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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9. 제3장 참선(參禪)

 

 

제1절 참선(參禪)

 

불교에서는 문자를 많이 배우고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것을 산사업(算沙業)이라고 폄하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모래사장에서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이 한도 끝도 없듯이 학문세계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분별시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불교의 경(經)이라 하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다 말씀하시지 않는 위경(僞經)도 많아서 그런 것을 볼 때에는 우리 마음이 망연해져서 어떻게 할 것인가, 도리어 혼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밀교 가운데 의궤(儀軌)같은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상야릇하게 우리의 소중한 삼학도(三學道)인 계율도 무시하고 방만한 대문이 다분히 있는데 후래인들은 그런 것을 무슨 도인들이 한 것처럼 생각하여 마음에 혼란을 느낍니다. 물론 그런 것 가운데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 경전의 명구문도 인용을 해 놓았기에 '방편으로는 필요한 것이구나' 하고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과 같은 산사업처럼 그런 번쇄한 것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음을 쉬어야 할 것인데, 마음을 쉬려고 할 때는 우리 마음이 하나의 도리로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모두를 하나의 통일 원리로써 마음의 섣부른 의단을 풀어 버려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마음을 쉴 수가 없습니다.

 

[벽암록(碧巖錄)]에 휴거헐거(休去歇去)라는 말이 있습니다. 쉬고 또 쉬어라, 상대 유한적(相對有限的)인 분별시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와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에나 어느 순간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여법성(眞如法性) 자리에서 비추어서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스피노자(Spinoza, Bartach 1632~1677)에 대한 말을 인용합니다. 그는 비록 가난한 철인으로 이층 하숙방에서 생명을 마쳤습니다만, '영원의 상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 그대 마음은 영원에 참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철학에는 부처님 사상이 많이 스며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의 소견을 산에 비유하면 산기슭에서나 중턱에서의 전망 같은 그런 하찮은 중생경계에서 보니까 십인십색으로 가지가지의 번뇌에 묻어서 나오기 때문에 때 묻은 행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상, 영원의 이미지(image)에서 보라는 말은 법의 정상에서, 본질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제법공(諸法空)의 자리,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자리에서 보아야 바로 보이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바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본질적인 관조(觀照)는 바로 우리 마음을 본질적으로 성숙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두를 드는 것이나 염불하는 것이나 근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상대적인 개념지식, 헤아림을 떠나버린 본체를 여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말이나 행동 하나하나는 우주의 근본 도리, 법성 도리에 입각해서 하라는 말이나 같은 뜻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상대적이고 개념적이고 유한적인 지식은 휴거헐거라, 쉬고 또 쉬어버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진여법성(眞如法性)이 발현(發現)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휴거헐거(休去歇去)라, 그러면 철수개화(鐵樹開花)라, 쇠로 된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비로운 것이나 부사의(不思議)한 소식을 보통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라 무시합니다마는 천지 우주 자체가 부사의 덩어리요 신비의 창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마음을 쉬고 또 쉴 때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한테 있는 초인적인 힘이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분별심으로 해서 초인적인 부처의 힘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쉬고 쉬어라. 그러면은 쇠로 만든 나무에서 꽃이 피어난다.' 마음 쉬는 지름길이 참선(參禪)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이것저것 많이 하더라도 결국은 마음을 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출가사문은 모두가 선(禪)을 생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부좌 위에서 생명을 바칠 사람들입니다.

 

1. 선(禪)의 정의(定義)

 

선(禪:Dhyna, 持訶那, 禪那)

 

사유수(思惟修), 적려(寂慮), 기악(棄惡), 공덕총림(功德叢林), 현법락주(現法樂住) 또는 삼마지(三摩地:Samᾱdhi 삼매)라고도 하며, 모두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이름이다. 또한 선종(禪宗)의 선(禪)은 기명(其名)은 동일(同一)하나 기체(其體)는 열반묘심(涅槃妙心)이다. 삼명육통(三明六通) 등 제공덕(諸功德)이 선정(禪定)에 의(依)하여 발득(發得)되므로 선정(禪定)은 최학도(最學道)요 안락법문(安樂法門)이며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한다.

 

선(禪)은 무엇인가? 우선 뜻을 알아야 보다 더 확신이 서지 않겠습니까? 선(禪)은 선나(禪那 Dhyāna)나 같습니다. 풀이하면 사유수(思惟修)라 합니다. 바른 생각으로 닦는다는 말입니다. 그냥 보통 생각이 아니라 정사유(正思惟) 곧 바른 생각입니다. 바른 생각이란 반야(般若)의 도리, 제법공(諸法空)도리, 오온개공(五蘊皆空)도리를 분명히 알고서 또는 다만 공(空)이 아닌 중도(中這)의 도리,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도리가 이른바 정사유요, 정사유 하면서 닦는 공부가 선이란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적려(寂慮)라는 뜻입니다. 번뇌를 소멸하여 고요하고 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분사(本分事)에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기악(棄惡)의 뜻이 있습니다. 상대유한적인 악만 아니라, 내가 있다 네가 있다 무엇이 좋다 궂다 하는 분별망상도 버리는 것입니다. 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합니다. 달마 스님과 양무제(梁武帝)가 거량할 때에 양무제는 "절도 많이 짓고 다리도 많이 놓고 많은 스님네 한테 보시도 했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하니까 달마 스님이 일언지하에 무공덕(無功德)이라 했습니다. 달마 스님은 선(禪)의 조사(祖師)이기 때문에 상대 유한적인 공덕을 말씀하실 필요는 없었겠지요. 상대적인 공덕은 또 분명히 있으나 영원적인 진여법성에서 볼 때는 때 묻은 공덕인 것이지 무루공덕(無漏功德)은 못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공덕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선은 공덕총림이라, 공덕이 하나 둘 있는 것이 아니라 총림같이 무더기로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한공덕(無限功德)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무루지혜를 얻는 것이거니 무한공덕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해 하실까봐서 부언합니다만 우리가 설사 무주상(無住相)이 못 된다 하더라도 밥 한 끼 베푸는 것도 꼭 공덕이 됩니다. 저희들은 공부할 때 느낍니다만 유위공덕(有爲功德)의 복덕도 많이 지은 사람들은 공부할 때 장애가 적습니다.

 

그러나 공덕을 못 세우고 자기 몸뚱이만 생각하고 자기 공부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연도 잘못 만나고, 병마가 엄습하고 장애가 많습니다. 따라서 유위공덕도 조도(助道)로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참선수행자들은 마땅히 복잡한 정(情)에 얽힌 것은 단연코 끊어버려야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삼매(三昧)가 발득(發得)되어서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할 때는 부처님께서 초기경전에서 말씀하신 신통부사의한 공덕인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못하니까 여러분들에게 자신 있게 보여드릴 수는 없으나 확신은 분명히 합니다. 다만 게을러서 깊은 삼매에까지 못 들어가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지 꼭 된다는 확신은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은 헛된 말씀은 한 말씀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부처님이 말씀한 신통자재(神通自在)같은 것은 비유나 상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꼭 사실로 되는 것입니다. 가사, 천안통(天眼通)을 하면 정말로 안목이 밝아서 우주를 다 보는 것입니다. 천이통(天耳通)을 하면, 순수 청정무구한 청정법신에서 오는 본래의 청각(聽覺)이라는 것은 천지 우주의 음성을 다 듣는 것입니다. 영어를 안 배워도 영어로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가사, 천도재(薦度齋)를 모실 때에 굉장히 어려운 한문 아닙니까? 천도법문의 대부분이 『화엄경』, 『법화경』, [어록] 등 중요한 데서 따온 법문이기에 한자도 어렵지만 뜻이 어렵습니다. 그런 어려운 것을 얼핏 생각하는 천박한 마음으로서는 한문을 전혀 안 배운 영가(靈駕)들이 어떻게 알 것인가 하지만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지금 컴퓨터(computer)를 보십시오. 입력(入力)만 시켜놓으면 기기묘묘한 것이 다 나옵니다. 우리 마음 곧, 불심(佛心)이란 것은 무한의 가능 곧, 모두를 다 알고 할 수 있는 힘이 갖추어 있습니다. 마음의 능력은 이른바 컴퓨터로 비유한다면 무한공덕이 본래로 입력되어 있는 컴퓨터인 것입니다. 일체를 다 알고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중요하고 인간성이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무엇을 좀 배우면 알고 안 배우면 모르는 정도 같으면 우리 인간성의 존엄이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그와 같이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입니다. 우리 불교가 아니면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참선할 때 분별시비를 항시 못 끊어 버립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비로소 끊는 것입니다. 일념(一念)이 딱 되어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마음이 오직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려야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고 삼매를 성취해야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의 삼명통(三明通)을 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명행족(明行足)이 있습니다. 밝은 것을 능히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훤히 보는 천안통이요 또는 숙명통이라, 무시이래의 과거를 다 아는 것입니다. 지금은 최면술만 좀 잘해도 몇 생을 거슬러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무량무변의 불지(佛智)를 통한다고 할 적에는 정말로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또는 누진통(漏盡通)이라, 모든 번뇌 습기(煩惱習氣)를 다 떼어버리는 것입니다. 습기를 못 떼었을 때는 아직 공덕이 못 나옵니다. 이른바 현법락주(現法樂住)라든가 하는 공덕이 못 나오는 것입니다. 습기를 떼어버려야 비로소 우리 심리와 생리가 정화되어서 공덕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경에, 우리 마음에서 욕심의 뿌리만 뽑아버리면 우리 발이 하늘로 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중을 비행하다가도 순간만 욕심을 내면 이른바 신족통(神足通)이 다 소멸되어 땅에 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심공덕(佛心功德)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여불공덕이 분호불수(與佛功德分毫不殊)라, 부처의 과불공덕(果佛功德) 즉, 불과를 성취한 공덕이 나와 더불어서 눈곱만큼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참다운 신(信)입니다. '부처는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 부처 공덕은 부처의 것이지 나한테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신(信)이 못되는 것입니다.

 

또한 선정(禪定)을 현법락주(現法樂住)라고 합니다. 이 현법락주라는 것도 우리가 크게 관심을 둘 문제입니다. '참선하면 아무런 재미도 없겠지' 합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선 처음에 재미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음식도 있으나마나 별 문제가 아니고 모든 것에 대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상(相)이 점차로 가시게 됩니다. 이 상에 얽히고 저 상에 얽히면 굉장히 괴롭고 구속되는 옹색한 구속감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인데 우선 나라는 생각이 차근차근 줄어지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가다가 죽어도 무방하고, 언제 죽어도 무방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집착이 스러지다가 드디어 욕계를 초월한 법락(法樂)을 얻어서 한량없는 행복에 잠기는 것이 현법락주입니다.

 

삼매(三昧)는 삼마지(三摩地 Samādhi)와 같은 의미입니다. 앞에 든 것이 모두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하여 우리 마음이 한 경계에 머물러서 즉 본체에 머물러서 분별망상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또한 선종(禪宗)의 선은 그 이름은 동일하나 그 체(體)는 바로 열반묘심(涅槃妙心)입니다. 열반묘심은 바로불심(佛心)을 말합니다.

 

선종(禪宗)이 이루어질 때는 화엄종이나 법화종 등 다른 종파와 대립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화엄이나 법화 등 모든 경론이나 종파를 초월해서 선종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참선하는 분들은 다른 종파와 대립하거나 교(敎)와 대립한 것도 아닌 것이고, 팔만사천법문 모두를 포괄하고 초월해서 선종이 나왔기 때문에 조금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상을 내지 말고 설사 경을 안 배웠다 하더라도 불심(佛心) 가운데는 모두가 다 함장(含藏)되어 있으니 '우주의 진리 모두를 다 갖춘 공부를 한다'하는 자부심으로 우리 선객(禪客)들은 공부를 지어 나가야 합니다.

 

또 삼명육통(三明六通)등 제 공덕이 선정에 의하여 발득(發得)되므로 최학도(最學道)라 곧, 배우는 길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 길이란 말이요, 또는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합니다. 참선이란 것은 몸도 마음도 가장 안락스러운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았으니까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처음에 습인(習忍)이 발득될 때까지는 어려울지 몰라도 나쁜 버릇만 떨어지면 제일 쉬운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앉는 것도 그냥 함부로 앉고 자는 것도 함부로 자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참선수행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의 자세 가운데서 가부좌같이 좋은 자세가 없습니다. 가사, 이틀이나 사흘이나 누워 있으라고 하면 마음도 무겁고 머리도 무겁고 오히려 괴롭습니다만 가부좌가 행습이 되어서 앉아 있으면 며칠도 무방합니다. 왜냐 하면 가부좌한 정삼각형 모습이 기하학(幾何學)적인 의미에서도 가장 안정된 모습인 것입니다. 둥그런 것은 아예 안정이 될 수도 없겠고 네모꼴보다도 정삼각형은 아래가 무겁고 넓고 위가 좁아서 제일 안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삼각형을 미타(彌陀)의 지인(智印)이라 합니다. 아미타는 제불의 본사(本師)요 제불의 왕인데, 미타의 묘관찰지(妙觀察智)의 상징이 정삼각형입니다. 밀교에서는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의 상징적인 표치가 정삼각입니다. 이 모습이 가부좌하고 똑같습니다. 따라서 가부좌할 때는 가장 몸이 안정되고 지혜가 제일 발동되기 쉬운 것입니다. 참선에 대한 공덕을 이와 같이 표현하는 것은 모두가 다 경론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저 가부좌 모양을 취하면 참선하고 있다고 하지만 참다운 참선이 못됩니다. 오직 마음이 본분사, 본체를 안 여의어야 참선입니다. 우리는 선에 대한 정의를 확실히 해 두어야 합니다. 달마 스님의 어록을 보나, 육조단경을 보나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상을 여의고서 본래면목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하나의 테크닉이나 형식적인 모양으로는 참선 같은 모양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진정한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話頭)를 참구 하더라도 제일의제(第一義諦), 상(相)을 떠나고 유·무· 공(有無空)을 떠나버린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본체에다 마음을 안주시켜야 참된 화두가 되는 것이지, 그냥 의심만 한다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리하게 어거지로 의심한다 해가지고서 몸도 안 좋고 그러겠지요.

 

묵조선(黙照禪), 묵조한다 하더라도 제일의제가 전제가 되고, 제일의제를 관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혼침만 와서 꾸벅꾸벅합니다. 우리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반야가 있어야지, 반야 없이 덮어놓고 앉아 있다고 할 때는 혼침만 많이 오는 것입니다.

 

공부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마장이 혼침(昏沈)과 도거(掉擧)라, 혼침과 분별시비입니다. 어떻게 이 혼침을 이길 것인가? 어떻게 이 분별시비를 이길 것인가? 그것을 못 이기면 결국은 심일경성(心一境性)인 삼매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2. 선(禪)의 종류(種類)

 

① 외도선(外道禪)…인과(因果)를 불신(不信)하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爲)하여 닦음.

② 범부선(凡夫禪)…인과(因果)를 신(信)하고 유위공덕(有爲功德)을 위(爲)하여 닦음.

③ 소승선(小乘禪)…아공(我空)을 신(信)하고 해탈(解脫)을 위(爲)하여 닦음.

④ 대승선(大乘禪)…아공(我空)및 법공(法空)을 신(信)하고 해탈(解脫)을 위(爲)하여 닦음.

⑤ 최상승선(最上乘禪)…여래선(如來禪) 혹은 조사선(祖師禪)이라고도 하며,

본래(本來) 부처로서 일체무루공덕(一切無漏功德)이 원만히 구족(具足)함을 신해(信解)하고 닦는 선(禪).

 

다음은 선(禪)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른바 초월적 명상법(瞑想法)이나 다른 명상법 등 명상법에서도 무슨 재미가 좀 붙으면 그것이 참다운 선(禪)이라고 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선(禪)을 과소평가하는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지금 미국에서나 또는 인도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에서 많이 나오는 명상법 같은 것 때문에 혼미를 당하지 않습니다.

 

1) 외도선(外道禪)

 

외도선(外道禪)은 인과(因果)를 불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고 파계무참(破戒無慙)한 짓을 하면 분명히 그 과보로 고(苦)가 있는 것이고 지금은 전생의 선근 덕택으로 넘어갈지 모르지만 죽은 다음에는 그 업 덩이를 짊어지고 다시 고생을 많이 합니다. 인과를 무시하면 불교의 가르침이 못되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선(善)을 짓는다면 분명히 선의 과보로 안락을 얻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과를 밝히고 인과를 초월하는 것이지 인과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과를 믿지 않고서 우선 재미가 좀 있고 우선 머리가 좋아지고 몸이 좋아지는 유루(有漏) 공덕을 위해서 닦는 것이 외도선입니다. 명상계통은 보통 다 그렇습니다.

 

2)범부선(凡夫禪)

 

다음에는 범부선(凡夫禪)이 있습니다. 외도는 불교를 안 믿는 것이고 범부라 할 때는 벌써 불교는 믿는 분입니다. 인과를 믿는 것입니다. 인과를 믿지만 아직은 무위공덕(無爲功德) 해탈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복이 많아지고 재수도 좋아지고 집안도 좋아지고 자기 병도 낫고 하는 이런 세간적인 유위공덕(有爲功德)을 위해서 닦는 것이 범부선 입니다.

 

3)소승선(小乘禪)

 

그 다음에는 소승선(小乘禪)입니다. 소승이라 하더라도 소승법도 깨달은 분상(分上)입니다. 구경적인 깨달음은 못되어도 역시 견도(見道)해서, 진여불성이 현전해서, 자기 자성을 알긴 알았으나 다만 습기를 못 여의었다는 말입니다. 아공(我空)을 믿습니다. 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지고 내 마음도 역시 수(受)나 상(想)이나 행(行)이나 식(識)이 인연 따라 잠시 합해져서 되었으므로 내가 공(空)하다는 것을 믿지만 일체만법이 다 비었다는 법공(法空)을 미처 못 깨달은 것입니다. 소승도 깨달음이 철저하지 못하여 완전한 깨달음은 못되나 역시 깨달음의 분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소승의 해탈을 위해서 닦는 것이 소승선입니다.

 

4)대승선(大乘禪)

 

그 다음에 대승선(大乘禪)은 나도 원래 비고, 일체 만법도 다 비었다는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믿습니다. 무슨 이데올로기나 무슨 주의나 또는 어떤 학설이나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나온 것이지 본래 이것이 이른바 무가정(無假定)의 원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이런 법공자리를 미처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라 하면 사회주의 사상을 원리적으로 믿고서 모두를 거기에 끼워 맞추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경직된 교조주의(敎條主義 dogmatism)인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더라도 법공을 철저히 못 증(證)한 사람들은 꼭 자기 식으로, 같은 법문도 자기 견해만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합니다. 자기주장, 자기가 느끼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법공을 미처 모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공, 법공을 믿고서 해탈을 위하여 닦는 것이 대승선입니다.

 

5) 최상승선(最上乘禪)

 

그 다음 최상승선(最上乘禪)은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을 말합니다. 더러는 여래선을 대승선 가운데 넣는 분도 있습니다만 뜻을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최상승선이란 다시 위없는 선이란 말입니다. 여래선, 조사선도 원래 둘이 아니요, 조사선이란 말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구태여 본래성불(本來成佛)의 뜻을 강조한 방면에서 구분할 때 여래선은 주로 부처님 경전을 참고로 많이 하였다고 볼 수가 있고, 조사선은 부처님 가르침을 무시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교 밖의 격외(格外) 도리에 보다 더 철저히 들어간다는 데서 이름 지어진 것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최상승선은 본래부처로서 일체 무루공덕(無漏功德)이 원만히 구족함을 신해(信解)하고 닦는 선입니다. 따라서 최상승선이 될 때는 모든 공덕을 다 원만히 갖추고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공, 법공을 믿고 공덕총림(功德叢林)이나 또는 현법락주(現法樂住) 모두가 다 갖추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쉬지 않으려야 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공덕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자리에 있습니다. 남을 미워도 하고 좋아도 하고 분별 시비하는 이 마음은 본래마음은 아니겠지만 망상하는 이 마음 떠나서 또 다른 마음이 있지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분별 시비하는 중생심, 이 마음 가운데에 일체공덕이 다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닦지 못해서 공덕을 발득(發得) 못하는 차이 뿐입니다. 앞으로 닦은 뒤에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이라 할 때에 본래성불(本來成佛), 즉신성불(卽身成佛) 또는 당래성불(當來成佛)의 세 가지로 성불의 뜻을 구분해서 얘기도 합니다. 본래성불은 본래 부처가 되어 있다는 말이요, 즉신성불은 이 몸 이대로 금생에 바로 부처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금생에 충분히 부처를 이룰 수가 있어야 하겠지요. 또는 금생에 그렁저렁 했으면 금생에는 못 이룬다 하더라도 당래성불이라, 당위(當爲)적으로 마땅히 미래에는 성불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선하는 분들은 본래성불 자리를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일체의 번뇌와 때 묻지 않는 모든 공덕을 원만히 갖추어 있다'고 믿을 때에 이른바 안심법문(安心法門)이 되는 것입니다. 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만 믿어버리면 사실은 구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휴거헐거(休去歇去)라, 이 마음 쉬고 또 쉬어버리는 것입니다.

 

앞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근본불교를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마음 공덕을 생각할 때는 모두가 헛것입니다. 다만, 복잡한 현대사회요 고학력 시대라서 학자도 많고 또 수도인도 많은데 그런 분들이 또 불교를 했다는 분들이 여러 가지로 부처님 가르침을 쪼개고 보태고 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체계를 못 세운 사람들은 혼미하고 혼란을 느껴 버립니다. 따라서 그런 혼란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근본불교부터 여러 시간 동안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우리가 윤곽을 취해서 근본적인 줄거리만 잡은 다음에는 누구의 말씀에 대해서나 참고로는 할망정 거기에 먹혀들 필요까지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최상승선만이 문제입니다. 이 가운에 다 들어 있으므로 그 외의 것은 문제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출가사문(出家沙門)은 최상승선만을 문제로 해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 생과 더불어서 묻어있는 근본적인 본능적인 구생기(俱生起)번뇌, 또는 금생에 나와서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지은 분별기(分別起)번뇌, 이런 번뇌 때문에 최상승선을 한다 해도 역시 자꾸만 끄달리고 장애가 되고 합니다. 마땅히 우리는 최상승선 도리를 한발도 헛디디면 아니 될 것입니다.

 

최상승선(最上乘禪) 이것은 모든 선법(禪法)을 다 포괄해 있습니다. 이 법문이 좀 어려우나 이것은 앞서 『도서(都序)』에도 있고, 『보조국사어록(普照國師語錄)』에도 아주 역력히 있는 법문이고, 또 대승불교(大乘佛敎)에도 이와 같이 표현은 안했다 하더라도 이런 뜻이 다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을 드립니다. 이런 것은 외워두시면 참 좋습니다. ‘약돈오자심 본래청정(若頓悟自心 本來淸淨)’ 만약 자기 마음이 본래 청정한 것을 문득 깨닫고서,

 

‘원무번뇌(元無煩惱)’라. 문득 깨달아 버렸으니까 그때는 그야말로 원래 번뇌가 없단 말입니다. 본래, 우리가 번뇌가 있다는 것은 나한테 자기의 본래 참다운 성품(性品) 불성(佛性)을 깨닫지 못 할 때에 번뇌가 있다고 보는 것이지, 우리가 ‘자기 본래성품(本來性品)이 청정(淸淨)한 것이다.’ 이렇게 이론적(理論的)으로라도 알았으면 그때는 ‘아! 나한테는 본래(本來)는 번뇌(煩惱)가 없는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루지성 본자구족(無漏智性 本自具足)’이라. 조금도 때 묻지 않는 그 부처님의 지혜(智慧)가 본래 스스로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제대로 삼매(三昧)를 못 닦아서 결국은 발휘(發揮)를 발현(發現)을 못한 것이지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은 본래 내가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그런 무루지성(無漏智性) 때 묻지 않은 그런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지혜(智慧)가 다 원만히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차심즉불(此心卽佛)’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필경무이(畢竟無異)’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여서 필경에 다르지 않는단 말입니다. 부처와 더불어서 똑같단 말입니다. 그래서 ‘의차이수자(依此而修者) 시최상승선(是最上乘禪)’이라. 이렇게 해서 닦는 것이 비로소 최상승선(最上乘禪)입니다.

 

‘역명여래청정선(亦名如來淸淨禪)’또한 이것이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고,

‘역명일행삼매(亦名一行三昧)’이른바 일행삼매(一行三昧)이고, ‘역명진여삼매(亦名眞如三昧), 또 진여삼매(眞如三昧) 해인삼매(海印三昧) 금강삼매(金剛三昧)인 것입니다. ‘차시일체삼매근본(此是一切三昧根本)’이라. 이것이 일체 삼매의 근본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최상승선은 어떠한 방편이 있는 지를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