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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6. 제2절 연기법(緣起法)

6. 제2절 연기법(緣起法)

 

연기법(緣起法)이라. 연기법은 바로 부처님 법(法)의 핵심(核心)입니다. 일체(一切)의 유위법(有爲法)은 모두 인연(因緣) 따라서 일어남을 말하며 특히 화엄종(華嚴宗)의 교리(敎理)는 연기(緣起)를 주로 하여 그 심천(深淺)에 따라 사종연기(四種緣起)를 말합니다.

 

* 연기법(緣起法)

 

1) 업감연기(業感緣起)<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 혹· 업· 고(惑業苦)의 삼도(三道)가 전전(展轉)하여 인과상속(因果相續)함을 말하며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상(相)임.

2)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 장식(藏識)으로서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삼법전전(三法展轉) 인과동시(因果同時)함을 말함.

 

3)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도 함.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眞如)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한 실체(實體)인데 염정(染淨)의 연(緣)에 따라서 종종(種種)의 법(法)을 생(生)함을 말함. 진여문(眞如門)으로는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실체(實體)이나 생멸문(生滅門)으로는 염연(染緣)에 따라서 육도(六道)를 현(現)하고 정연(淨緣)에 따라서 사성(四聖)을 나툰다.

 

4) 법계연기(法界緣起) :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도 함. 법계(法界) 곧 일체만유(一切萬有)를 일대연기(一大緣起)로 보는 것.

5) 육대연기(六大緣起)…지수화풍(地水火風), 공(空), 식(識)의 육대(六大)가 우주(宇宙) 법계 (法界)에 두루 가득하여 만유제법(萬有諸法)을 연기(緣起)함을 말함.

 

* 이진여(二眞如) : 수연진여(隨緣眞如)와 불변진여(不變眞如)

 

1. 수연진여(隨緣眞如) : 자성(自性)을 불수(不守)하고 염연(染緣)에 따라 염법(染法)인 육도 사생(六道四生)을 나투고 정연(淨緣)에 따라 사성(四聖)을 나툼.

2. 불변진여(不變眞如) : 연(緣)에 따라 만차(萬差)의 제법(諸法)이 이루어지나 진여(眞如)의 자성(自性)을 잃지 않음을 말함.

* 수연진여(隨緣眞如)는 파(波)와 여(如)하고 불변진여(不變眞如)는 수(水)와 같음.

 

불변(不變)의 수(水)가 파상(波相)을 일으키고 수연(隨緣)의 파(波)가 수성(水性)을 불실(不失)한다. 그래서 수연진여(隨緣眞如)이기 때문에 진여(眞如)가 곧 만법(萬法)이며 불변진여(不變眞如)이기 때문에 만법(萬法) 그대로 곧 진여(眞如)이다. 소승(小乘)은 아예 이종(二種)의 진여(眞如)를 모르고 대승(大乘)의 권교(權敎)는 불변진여(不變眞如)는 아나 수연진여(隨緣眞如)를 모르며 대승실교(大乘實敎)는 두 진여(眞如)를 다 안다. 기신론(起信論)은 바로 이 도리를 밝혔다.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부처님 법은 연기법(緣起法)을 기본으로 합니다. 부처님 법은 인연법(因緣法)을 줄거리로 합니다. 논리적인 줄거리는 바로 인연 연기법입니다. 따라서 인연법을 알면 부처님 진리를 알고 인연법을 모르면 부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연기법은 저급한 차원에 머물게 되면 이것은 세간적인 하나의 상대적인 원리 그런 것밖에는 안됩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이 중요한 점은 이른바 법계연기(法界緣起)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그런 차원까지 높여져야 참다운 대승적 연기법이 됩니다. 이 시간은 주로 연기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불법(佛法)을 얘기하는 분이 연기법을 말하지 않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앞서 말씀과 같이 세간적인 차원 상대 유한적인 차원에 머물러 버립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그런 차원에서만 그쳐 버리면 사실은 우리 생활에 큰 힘이 못됩니다. 이른바 상대적인 것밖에 안됩니다. 불교 연기법은 업감연기, 아뢰야연기, 여래장연기, 육대연기, 이렇게 4종으로 구분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1. 업감연기(業感緣起)

 

먼저 업감연기(業感緣起)라. 업감연기는 우리가 업(業)을 짓고서, 업은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가사 우리가 무엇을 좋다 그러면 그냥 좋다는 것이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다 흔적(痕迹)을 둡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도 그런 것이 그만치 흔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아무튼 우리가 말 한마디를 한다든가 생각을 한 번 한다든가 행동으로 옮긴다든가, 이른바 신구의(身口意)라. 우리 몸으로 행동을 하고, 입으로 말하고, 뜻으로 생각을 하고,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업인데, 업을 지어 놓으면 그대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꼭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우리가 업을 짓고 또 업을 지어 놓으면 그 하나의 업보(業報)로 해서 고(苦)를 받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번뇌(煩惱)를 일으키고, 또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을 지어 놓으면 결과적으로 인생고(人生苦)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 전생에 지은바 그런 하나의 업보에 따라서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와 같이 과거 전생에 업을 지어서 그 업의 과보에 따라서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났고, 금생에 또 업을 지어서 거기에 상응(相應)되게끔 내생 가서 태어나고, 이것이 이른바 삼세인과법칙(三世因果法則)이라. 이것은 불교의 기초적인 법문입니다.

우리 부처님 공부를 하실 분들은 역시 삼보사제(三寶四諦)라! 부처님과 부처님 법과 부처님 법 따라서 수행하는 승(僧) 이것이 삼보 아니겠습니까. 삼보 이것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배가 삼보입니다. 천지 우주의 근본 도리, 대 자연의 도리가 부처인 것이고, 그 부처님 법을 깨달으면 또 부처인 것이고, 그래서 천지 우주의 도리 이것이 하나의 부처인 동시에 바로 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우주의 근본적인 법에 따라서 행동하면 좋은데 우리가 그렇지 못하니까 업을 짓고서 거기에 상응된 고를 받는 것입니다.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 업을 받는가? 번뇌(煩惱)를 일으켜서 업을 받는가? 과거 전생에도 무명(無明)이라 하는, 무명 이것은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진리를 모르는 무지(無知)가 무명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과거 전생에 무지, 무명 때문에 부모 연(緣)을 만난단 말입니다.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따르고, 무지하기 때문에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무지한 행 따라서 식(識)이 생기고, 그 업식이 중음계(中陰界)를 헤매다가 부모 연 만나서 태 가운데 잉태하고, 또 자라나 열 달이 차면 태어난단 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보고, 듣고, 느끼고 해서 또 업을 짓는 것입니다. 업을 지어 놓으면 금생에 그것이 씨앗이 되어서 죽은 뒤에는 내생 가서 그대로 또 다시 과보(果報)를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가 항시 수레바퀴 모양으로 돌고 도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그래서 혹업고(惑業苦)라. 혹(惑) 이것은 미혹할 혹(惑)자, 번뇌를 가리킵니다. 번뇌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 따라서 받는 결과가 고(苦)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외워 두시면 편리합니다.

내가 가사 누구를 미워한다. 그러면 그것은 혹이란 말입니다. 무엇에 탐착(貪着)을 한다. 이것도 혹입니다. 혹이 있으면 그런 번뇌에 따라서 행동이 있게 되겠지요. 그래서 업을 짓고 고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항시 이와 같이 혹업고가 되풀이 됩니다. 무지한 번뇌 때문에 행동을 하고, 그 행동 따라서 인생고(人生苦)를 받고, 혹업고의 삼도(三道)가 전전(展轉)하여 인과상속(因果相續)이라.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 항상 이것이 상속이 되어간단 말입니다.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상속되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삽니다.

 

뱅뱅 도는 인생고, 그것을 뚝 끊어 버리는 것이 성자의 가르침이요, 성자의 길입니다. 우리 중생은 항시 이와 같이 죽고 나고 살고 죽고 끝도 갓도 없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회의 바퀴를 번뇌에 다라서 업을 짓고 고통을 받는 인생고의 바퀴를 다 끊어 버려서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업감연기(業感緣起)라 하는 낮은 차원의 연기법으로 해서는 영생해탈이라는 그런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 행동 따라서 인생고를 받고, 이런 것만이 업감연기라 하는 차원 낮은 연기법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다. 불교에서 연기를 보는 사람은 부처님 진리법을 확실히 알고 부처님 법을 보는 사람은 부처님을 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연기법을 모르면 그때는 불법을 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연기법은 불교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연기를 안다고 할 때는 불법을 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연기를 모르면 불법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인연 따라서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 세상 만물 어느 것이나 인연 따라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연기법으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현대말로 하면 인과율(因果律)이라. 인과율을 떠나서 과학도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이라는 것은 인과율을 공리(公理)로 합니다. 인과율이 없으면 과학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과율보다 훨씬 더 심오한 가르침이 부처님 연기법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과학적 인과율은 단순히 원인과 결과만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사상인 연기법은 그 인(因)과 연(緣)과 과(果),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조건과 이것이 합해서 결과가 나온다는 보다 심오한 범위가 넓은 것입니다. 그런데 업감 연기법 정도는 우리 눈앞에서도 다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범부에 속한 연기법 이것이 업감 연기법입니다.

 

그러면 이 연기법의 근원은 무엇인가? 연기법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원인을 캐서 물을 때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가르침이나 과학적인 가르침은 모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천재도 상대성(相對性)이 어디서 왔는가? 그 원인을 어떻게 풀지를 못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을 세우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참다운 본질(本質)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을 초월(超越)한 세계, 상대(相對)를 초월한 세계가 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가 전전(展轉)하여 인과상속(因果相續)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혹(惑)은 심병(心病) 즉 번뇌(煩惱)이며, 업(業)은 몸의 행위(行爲)이고 고(苦)란 생사(生死)의 과보(果報)이다. 그래서 심(心)의 병(病)을 연(緣)으로 하여 신(身)의 업(業)을 짓고 신(身)의 업(業)을 인(因)으로 하여 생사(生死)의 과(果)를 받는다.

 

이와 같이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가 서로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어 돌고 도는 것을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상(相)이라 하며 과거(過去)에 거슬러 올라가면 시작이 없고 미래(未來)에 굴러갈 때 또한 끝이 없나니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은 이를 밝힌 법문(法門)이다. 그런데 이러한 삼법(三法)은 본디 무엇으로부터 나왔느냐고 물을 때는 대답할 수 없나니 그래서 업감연기(業感緣起)에 이어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가 일어나는 까닭이 있다.

 

2.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이와 같은 연기법의 원인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입니다. 아뢰야(阿賴耶)란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장식(藏識)이라. 우리 마음이나 우주 만유는 중생들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모두를 거기에 다 담는 하나의 식(識)이 있단 말입니다. 알 식(識)자 이것은 마음이나 똑같습니다. 마음이란 뜻이나 식이란 뜻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 모든 존재가 다 식이 있는 것인데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는 물질은 물질이고 마음은 마음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항시 어느 물질이나 근본은 다 마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가 성립됩니다. 마음, 식 이것은 하나의 순수 에너지입니다. 이른바 우주의 정기(精氣),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본질인 동시에 알 식(識)자 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개념의 차이가 있어 놓으면 혼돈하기 쉬우므로 개념을 정확히 알아둬야 어려운 공부를 할 때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이 우리 사람도 역시 근본은 마음이고, 또 다른 존재도 근본은 마음입니다. 산도 근본은 마음이고, 해나 달이나 모두가 다 근본은 마음이라는 하나의 식입니다.

앞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현대 물리학자들도 그것을 긍정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저 끄트머리에 가면 동물과 식물도 한계가 없어져 버립니다. 가사 화분에 좋은 꽃을 가꿀 때도 화분(花盆) 그것은 단순히 아름답게 꽃을 피우기만 하는 식물인 것이지 무슨 뜻이 있으랴? 하지만 똑같은 화분을 놓고서 거름이나 관리도 똑같이 하면서 한 쪽 화분에 마음을 더 주고 다른 한 쪽 화분에는 마음을 덜 두면 이상하게 마음을 더 두고 관심을 느끼고 있는 화분이 훨씬 더 성장이 빠르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증명해서 밝힌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의 순수 에너지이기 때문에 관심을 두면 그만큼 화분의 꽃에 대해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지독히 미워하면 그 마음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미워하는 만큼 그 사람 인생에 대해서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영국이나 미국이나 자기 아들, 딸이 있다고 생각할 때 어머니나 아버지가 기도를 모셨다고 합시다. 저 멀리 있는 아들, 딸한테 아무 도움이 없다면 무슨 필요로 기도를 모시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오랜 경험으로 어디가 있던지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정성(精誠)을 드리면 틀림없이 그만큼 정성이 닿으므로 기도를 모시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인간의 오랜 경험으로 해서 알려져 내려왔단 말입니다. 그런 것만 봐도 다 알 수 있듯이 우리 마음은 무한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만이 마음이 아니라 개나 소나 돼지 그런 축생(畜生)들도 마음이 다 있습니다. 단지 인간같이 의식(意識)이 발달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으로 되었다.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불법에서 만법(萬法)이라고 말할 때는 일체 존재를 다 가리킵니다. 오직 유(唯)자, 알 식(識)자 오직 식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요, 모두가 다 마음이라 하는 순수생명(純粹生命)으로 만들어지고 또는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식이다.

 

식이라는 말이나 마음이라는 말이나 같은 뜻입니다. 다만 식 이것은 분별시비(分別是非)를 가질 때 식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래도 겉으로만 그러는 것이고 본질에 가서는 똑같아 버립니다.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불법 공부를 하셔야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아뢰야식 이것은 장식이라. 감출 장(藏)자입니다. 모두를 다 그 속에다 담아 두는 식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좋다 하면 좋다 하는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흔적이 없어 보이겠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에는 좋다는 흔적을 남깁니다. 남을 밉다 하면 미워하는 그것은 끝나 버리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은 밉다는 흔적을 둡니다. 자꾸만 남을 미워하면 그때는 더욱더 미워진단 말입니다. 남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그때는 그것이 더욱더 사랑해지고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생각이나 행동이,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도, 남을 한 번 딱 때리면 그 행동은 그쳐 버리지만 때렸다는 그 에너지는 역시 식에 갈무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도 함부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말이 그대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식에 역시 머물러 둔단 말입니다.

이른바 우리 식에 종자(種子)를 심어둡니다. 나쁜 생각은 나쁜 종자를 심어 두고 좋은 생각은 좋은 종자를 심어 둡니다. 좋은 사람은 마음속에 과거 전생이나 금생에 좋은 종자를 많이 심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들은 나쁜 말 많이 하고 남도 미워도 많이 하고 해코지 많이 하고 이런 사람들은 결국 나쁜 종자가 마음에 심어져 있기 때문에 나쁜 일 하기가 더 쉬운 것입니다.

장식으로서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 우리가 가사 저 사람이 밉다. 그럴 때는 그냥 우연히 미운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벌써 밉다는 종자가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서 종자에서 현행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좋다는 것이나, 궂다는 것이나 그런 것이 그냥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연인 것 같지만 잠재의식(潛在意識), 우리가 미처 못 느끼는 마음의 그런 바탕에는 종자가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자가 현행 행위를 나투고, 가사 때리기도 하고 안 때리기도 하고 밥도 먹고 걸음걸이도 하고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런 행동이 다시 훈종자(熏種子)라. 다시 종자를 심는다는 것입니다. 본래에서 보면 선악이 없지만 우리 과거 전생의 업식(業識), 마음에 들어 있는 선악의 종자가 인연 따라서 현실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것이 종자생현행인 것이고, 그리고 현실로 행동하면 또 그것이 거기에 걸맞는 종자를 다시 심는 것입니다.

종자를 심는 걸 보고 불교 술어로 훈종자(熏種子)라. 훈 이것은 더웁게 할 훈(熏)자입니다. 우리 마음에다 따습게 종자 훈기를 심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삼법전전 인과동시(三法展轉 因果同時)라. 이 삼법(三法)은 혹업고(惑業苦)라. 맨 처음에 우리 마음에 갈무리된 종자가 있으면 그 종자에 따라서 행동이 나오고, 행동을 하면 다시 업을 짓고, 그 업보로 해서 고를 받고, 다시 종자를 심고, 이렇게 해서 이것이 인과동시(因果同時)라. 인(因)과 과(果)가 서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즉시 종자를 심는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종자를 심어 놓으면 그때는 또 인연이 있으면 그냥 바로 현실로 행동이 나오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 인간의 행동이 규정(規定)되는 것입니다.

종자생현행이라. 우리 마음에 있는 선악(善惡)의 종자가 현실 행동을 낳는 것이고, 행동을 하면 그 행동 때문에 종자를 다시 심고, 그 종자에서 또 현실적인 행동이 나오고, 다시 또 종자를 심는 이 삼법이 이와 같이 영원히 되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가 다 식(識), 마음이라 하는 거기다 종자를 애초에 심어 놨으므로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주가 다 파괴되어 버려서 텅텅 비어가지고 있을 때는 종자가 어디서 나올 것인가? 우주가 다 파괴되어 버려도 물질적인 세계, 시간 공간적인 세계만 파괴되는 것이지 마음의 세계는 절대로 파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 천상계 어딘가에 그대로 생존하고 있으므로 그 종자 그대로 남아 가지고서 다시 우주가 구성되면 종자에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나고 나무로 태어나곤 합니다.

 

이렇게 그 마음이라는데다 종자(種子)를 심어가지고 거기서 현실로 행동(行動)이 나오고 다시 또 그 현행(現行)이 인(因)이 되어 종자를 심고 삼법(三法)이 전전(展轉)하는 이것이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입니다. 그러므로 아뢰야연기법 이것은 앞서 언급한 업감연기 즉, 십이인연법보다 정도가 높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마음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식(識)이란 대체로 무엇인가? 불교는 꼬치꼬치 밝혀서 끄트머리까지 다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덮어놓고 믿으라는 것은 불교에는 없습니다. 불교는 모두를 다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덮어놓고 믿어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중생의 합리적인 사고(思考)를 그대로 이끌어 갑니다.

우주의 도리(道理)라는 것은 조금도 차질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약 500년 분 아닙니까. 그는 우주는 정확한 수리(數理)로 구성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주는 정확한 수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역(周易)같은 그런 어려운 것도 역시 다 하나의 괘(卦)라는 수리로 풀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악(音樂)을 본다 하더라도 한 옥타브(Octave)는 팔진법에 따라서 화음(和音)이 되어 갑니다. 진동수에 따라서 전파, 광파가 있는 것이고, 음파도 가청 주파수대의 음파가 있고 초음파가 있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몇 사이클인가? 얼마만큼 진동하는가? 그런 정확한 수리로 해서 우주의 현상적인 문제가 규정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철학을 공부하고 물리학을 공부한다 하더라도 수학(數學)을 잘 모르면 못하는 것입니다. 우주 물리는 정확한 수리로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불교라는 것은 이와 같이 정확히 우주의 근원을 따지고 캐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 식은 도대체 무엇인가? 식(識)에다 종자(種子)를 심어 놓으면 다시 행동(行動)이 나오고, 행동을 하면 또 다시 종자가 심어지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식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식의 근본은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아뢰야(阿賴耶)를 장(藏감출장)이라고 풀이하여 모든 종자(種子)를 간직한다는 뜻이다. 미세(微細)하고 부사의(不思議)한 일대장식(一大藏識)이 있어서 일체만법(一切萬法)의 근본(根本)이 되는 만유(萬有)는 모두가 이 장식(藏識)에 간직한 종자(種子)로부터 현행(現行)된 것으로서 그 현행(現行)된 종자(種子)는 다시 새종자(種子)를 장식(藏識)에 훈(熏더울훈)하고 그래서 종자(種子)와 현행(現行)과 신훈종자(新熏種子)의 삼법(三法)이 전전(展轉)하여 동시(同時)에 인과(因果)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본래(本來) 어디로부터 나왔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나니 그래서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에 이어서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가 일어나는 까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