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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3. 제2절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제2절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이의 보리(菩提)란 각(覺)의 의(義)로서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견성오도(見性悟道)의 방편(方便)이라 정혜균지(定慧均持)의 심(心)을 일경(一境)에 주(住)하는 묘결(妙訣)이니 숙독요의(熟讀了義)한 후 적정(寂靜)에 처(處)하고 제1절(第一節)만 사(寫)하야 단좌정시(端坐正視)의 벽면(壁面)에 부(付)하야서 관이(觀而) 염지(念之)하되 관(觀)의 일상삼매(一相三昧)로 견성(見性)하고 염(念)의 일행삼매(一行三昧)로 오도(悟道)함

 

 

 

 

 

1. 아미타불(阿彌陀佛)

 

 

 

                                  菩提方便門

 

 

 

心은 虛空 과 等할 새, 片雲隻影이 無한 廣大無邊한 虛空的 心界를 觀하면서 淸淨法身인달하여 毘盧遮那佛을 念하고, 此 虛空的 心界에 超日月의 金色光明을 帶한 無垢의 淨水가 充滿한 海象的 性海를 觀하면서 圓滿報身인달하여 盧舍那佛을 念하고, 內로 念起念滅의 無色衆生과 外로 日月星宿 山河大地 森羅萬象의 無情衆生과 人畜 乃至 蠢動含靈의 有情衆生과의 一切衆生을 性海無風 金波自涌인 海中漚로 觀하면서 千百億化身인달하여 釋迦牟尼佛을 염念하고, 다시 彼 無量無邊의 淸空心界와 淨滿性海와 漚相衆生을 空⦁性⦁相 一如의 一合相으로 通觀하면서 三身一佛인달하여 阿(化)⦁彌(報)⦁陀(法)佛을 常念하고, 內外生滅相인 無數衆生의 無常諸行을 心隨萬境轉인달하여 彌陀의 一大行相으로 思惟觀察할 지니라.”

 

 

 

 

 

 

 

 

 

 

 

 

 

2. 보리(진리)를 깨닫는 방편문

 

 

 

마음은 허공과 같을 새, 한 조각구름이나 한 점 그림자도 없이 크고 넓고 끝없는 허공 같은 마음세계를 관찰하면서 청정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생각하고, 이러한 허공 같은 마음세계에 해와 달을 초월하는 금색광명을 띤 한없이 맑은 물이 충만한 바다와 같은 성품바다를 관찰하면서 원만보신인 노사나불을 생각하며, 안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형체 없는 중생과 밖으로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내와 대지 등 삼라만상의 뜻이 없는 중생과 또는 사람과 축생과 꿈틀거리는 뜻이 있는 중생 등의 모든 중생들을 금빛 성품바다에 바람이 없이 금빛파도가 스스로 뛰노는 거품으로 관찰하면서 천백억화신인 석가모니불을 생각하고, 다시 저 한량없고 끝없이 맑은 마음세계와 청정하고 충만한 성품바다와 물거품 같은 중생들을 공(空)과 성품(性)과 현상(相)이 본래 다르지 않는 한결같다고 관찰하면서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三身)이 원래 한 부처인 아미타불을 항시 생각하면서, 안팎으로 일어나고 없어지는 모든 현상과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덧없는 행동들을 마음이 만 가지로 굴러가는 아미타불의 위대한 행동 모습으로 생각하고 관찰할지니라.

 

 

 

 

3. [보리방편문]

 수행법(修行法)의 특징과 장점

 

 

[보리방편문] 수행법은

'열반안(涅槃岸)에 도(到)하는 첩경(捷徑)'

(1) 불법의 궁극적(窮極的)인 집약적(集約的)교설이므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묘제(妙諦).

(2) 불변수연(不變隨緣) 체용성상(體用性相)의 이(理)를 도파(道破)한 묘관찰지(妙觀察智)로서 설법단의(說法斷疑)하여 여래의 부동지(不動智)를 득(得).

(3) 정혜균등(定慧均等)의 심(心)을 일경(一境)에 주(住)하는 묘결(妙訣).

(4) 여래의 과상법문(果상法門)이기 때문에 인과상응(因果相應)하여 범부위(凡夫位)에서 오히려 상사각(相似覺)을 성취.

(5) 최고의 세계관및 인생관, 최선의 생활관 확립.

(6)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의 겸수이기 때문에 지정의(知情意)의 조화적 수행이 되어 법이적(法爾的)으로 안심입명의 속성취(速成就).

(7) 최선의 상념, 최선의 사유, 최선의 사색, 최선의 관조(觀照), 가장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행법이기 때문에 성불의 첩경(捷徑).

 

                              - 고보비로정(고보비로정) 구경대안락(구경대안락)-

 

 

 

4. 심즉시불(心卽是佛)

 

유로 말하면 태양(太陽)의 체(體)는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명(太陽光明)은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선의 그림자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에 해당합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물질이 아니고 우주 가운데 텅 비어 있으니 공(空)이라 하고, 그 공 가운데는 일체 존재를 일으킬 수 있는 본 성품(性品) 원만보신 노사나불이 충만해 있으니 성(性)이라 하고, 또 이 자리에서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인 일체현상이 나오므로 상(相)이라 합니다.

앞서 천태지의 스님의 공(空), 가(假), 중(中)을 배대하면 정확히는 좀 문제가 있으나, 이것은 중도(中道)의 중(中)에 해당하고, 이것은 가(假)에 해당하고, 이것은 공(空)에 해당하지요. 이것은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배대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자리는 아미타불의 타(陀)에 배대하고, 원만보신 노사나불은 아미타불의 미(彌)에 배대하고, 일체존재 일체만유를 아미타불의 아(阿)에 배대를 시켰습니다.

따라서 천백억화신 아(阿)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고, 청정법신 공(空)만 따로 있지 않고, 가사 우리가 하나의 불빛을 이렇게 볼 때 겉으로 보이는 것은 아(阿)인 불빛이지만 그 안에는 결국 성(性)과 공(空)이 다 들어 있습니다.

또 그 반대로 공 가운데도 공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성과 상이 다 있습니다. 소위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말입니다. 또 삼신(三身), 법신·보신· 화신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신일불(三身一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아미타불은 소박하니 방편적으로 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방편을 떠나서 제일의(第一義)적으로 해석할 때는 아미타불은 천지 우주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무엇인가? 관세음보살은 천지우주인 아미타불의 자비(慈悲)의 상징입니다. 또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무엇인가? 천지우주 아미타불의 지혜(智慧)가 바로 문수보살입니다. 그렇게 부처님 이름이 많지만 모두가 다 뿔뿔이 있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공덕(功德)이 하도 많으니까 하나의 개념으로는 표현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덕 따라서 그때그때 이름이 붙습니다. 중생의 병고(病苦)를 다스릴 때는 약사여래(藥師如來)라. 또 하늘에 있는 각 성수들, 별들을 가리킬 때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칠성여래(七星如來)입니다.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 그와 같이 돌멩이나 티끌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 번에 말하면 바로 마음이 부처인데, 마음 그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달마대사(達磨大師)의 관심론(觀心論)을 보면 마음을 맨 처음부터서 풀이했습니다. 인간성이 무엇인가? 마음 그것이 기묘한 것이어서, 우리 마음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참 별것도 아닌데 결국 마음 파고 들어가면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암마라식(菴摩羅識)이고 결국은 부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결국은 들어가면 다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산이요, 내요, 티끌이요, 또 원소요, 소립자요, 내내야 들어가면 결국은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은 우주의 순수 생명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에도 모두 이것이 똑같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을 보면 우주라는 것은 종횡(縱橫)으로 얽히고설키고 딱 묶여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입니다. 하나의 생명 덩어리인데 나만 잘 살고 남이 못살면 균형이 깨집니다. 균형이 깨지면 틀림없이 그때는 무슨 소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지 우주의 도리에 맞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맞게 살려고 하면 될 것인데 우리 중생은 앞서 말씀과 같이 겉만 본단 말입니다.

 

본래 하나인 줄을 본다고 생각하면 균형 있게 살 수가 있을 것인데, 속은 못 보고 겉만 보니까 이놈의 모양만 보고, 자기 몸뚱이도 사실은 자기 것도 아닌데 권력이고 무엇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을 불경에서는 그때그때 중생의 근기 따라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합니다. 보리(菩提)· 도(道)· 열반(涅槃)· 법성(法性)· 실상(實相)· 여래(如來), 이것이 원래 우리 주인공(主人公)이기 때문에 주인공·본래면목(本來面目)·진여(眞如)·극락(極樂) 모두가 다 결국 부처라는 하나의 별명에 불과합니다. 이명동의(異名同意)라. 이름은 다르고 뜻은 같습니다. 그러니까 불경을 볼 때 이렇게 나오고 저렇게 나오고 하면 무엇이 무엇인지 잘 몰라버립니다만 결국은 다 불성을 말해 있습니다. 간단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어떤 때는 현상만 가지고 상(相)만 말해 있는 법문도 있고, 어떤 법문은 성(性)만 말해 있는 법문도 있고, 어떤 법문은 체(體)만 말한 법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상만 말한 법문을 보면 성과 체는 잘 몰라버립니다. 그래서 옛날 소박할 때는 그렇게 상만 말하는 법문이 다 통할 수가 있었으나, 지금 현대는 일반 철학은 물론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철학이나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의 철학을 다 배웠기 때문에 그야말로 스피노자는 불교도 많이 공부했으므로 책을 보면 이거 부처님 말씀 같구나, 이렇게 생각이 날 때도 있습니다. - 이러한 때라 그런 치우친 불교해설을 하면 잘 통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뜻도 그것이 아닌 것이고, 부처님 법문은 그때그때 지금 현대는 이것저것 다 종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입니다.

 

 

따라서 같은 수행법도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정관(不淨觀)이라. 몸이라는 것은 더럽다. 이렇게 생각하는 공부라던가, 또 모두는 다 비었다. 다 비었다 하더라도 사실 중생들은 비었다는 것을 못 보니까 실감이 갈 수가 없습니다. 또 그것은 너무나 허망하고 말입니다. 도인들이 보면 빈 가운데 다만 비어있지 않고서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충만한 자리, 모두를 찬란한 불성으로 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실상입니다. 그런데 실상이 아니라 텅 비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허무를 느낍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은 별 것이 아니지만 내내야 마음 저변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같이 그런 고도한 법문이 아니면 우리 마음이 항시 안정을 못 취합니다.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있다고 해도 불안스럽고 텅 비었다고 해도 불안스럽고 합니다. 전부가 다 부처다 이렇게 되어버려야 본래성품이기 때문에 마음이 활발하니 풍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가장 풍요해지는 행법, 이와 같이 현상이나 실상이나 모두를 종합적으로 수렴(收斂)한 법문이 앞서 천태지의 선사의 법문이요, 또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입니다. 따라서 이 법문은 우주만유를 하나의 도리로 딱 통달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체험은 미처 못 한다 하더라도 사실은 우리 마음이 개운한 것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어디가 아파도 우리 불성은 아프지 않고, 아파도 말똥말똥 불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습니다. 이러한데서 우리가 불성 자리에 마음 두고 사는 것이 불교인의 생활이지요.

 

 

염불(念佛)도 결국 부처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부처를 안 떠나기 위해서 항시 부처를 염합니다. 본래 부처이니까 말입니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결국은 부처뿐인 것이니까 부처를 안 떠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이니까 말입니다. 옛날의 방편염불은 부처님 그러면 저만큼 밖에서 우리가 부처님을 부르면 우리한테 와서 가피를 준다. 이런 식이지만, 사실 원래 염불은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이것 보나 저것 보나 모두가 부처다. 이렇게 부처님을 염불하는 것입니다.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