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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4. 5.보리방편문 설법

5.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설법

 

“심(心)은 허공(虛空)과 등(等)할 새, 편운척영(片雲隻影)이 무(無)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허공적(虛空的) 심계(心界)를 관(觀)하면서 청정법신(淸淨法身)인달하여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염(念)하고, 차(此) 허공적(虛空的) 심계(心界)에 초일월(超日月)의 금색광명(金色光明)을 대(帶)한 무구(無垢)의 정수(淨水)가 충만(充滿)한 해상적(海象的) 성해(性海)를 관(觀)하면서 원만보신(圓滿報身)인달하여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염(念)하고, 내(內)로 염기염멸(念起念滅)의 무색중생(無色衆生)과 외(外)로 일월성수(日月星宿)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무정중생(無情衆生)과 인축(人畜) 내지(乃至) 준동함령(蠢動含靈)의 유정중생(有情衆生)과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성해무풍(性海無風) 금파자용(金波自涌)인 해중구(海中漚)로 관(觀)하면서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인달하여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염(念)하고, 다시 피(彼) 무량무변(無量無邊)의 청공심계(淸空心界)와 정만성해(淨滿性海)와 구상중생(漚相衆生)을 공(空)⦁성(性)⦁상(相) 일여(一如)의 일합상(一合相)으로 통관(通觀)하면서 삼신일불(三身一佛)인달하여 아阿(화化)⦁미彌(보報)⦁타陀(법法)불佛을 상념(常念)하고, 내외생멸상(內外生滅相)인 무수중생(無數衆生)의 무상제행(無常諸行)을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인달하여 미타(彌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사유관찰(思惟觀察)할 지니라.”

 

“심(心)은 허공(虛空)과 등(等)할 새” 우리 마음은 허공과 같습니다. 허공은 어느 제한도 없고, 어느 장애도 없듯이 우리 마음은 사실은 장애가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나’라는 장애, ‘너’라는 장애 그런 상에 지금 걸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걸려있는 것을 우리가 ‘마음은 허공과 등할 새’라는 실존 그대로 말하는 법문으로 해서 탁 털어버려야 합니다.

 

마음은 허공과 등할 새 “편운척영(片雲隻影)이 무(無)한” 조각구름이라든가 조그마한 그림자도 없는 편운척영(片雲隻影)이 무(無)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넓고 크고 또는 갓이 없는 ‘허공적심계(虛空的心界)를 관(觀)하면서“ 허공 같은 그런 마음의 세계를 관찰하면서, 우리 마음의 본바탕은 이와 같이 끝도 갓도 없는 광대무변한 허공 같은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인데 다만 텅 비어 있는 생명도 없는 그런 허무한 공간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끝도 갓도 없는 그런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청정법신(淸淨法身)입니다. 오염도 없고 그야말로 청정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끝도 갓도 없이 훤히 비어있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비로자나불은 생명인 것입니다. 끝도 갓도 없이 훤히 트여 있는 광대무변한 하나의 생명체 이것이 이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는 것입니다. “청정법신(淸淨法身)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염(念)하고”

 

“차(此) 허공적심계(虛空的心界)에” 이와 같이 끝도 갓도 없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마음세계에, 마음의 세계가 허무하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초일월(超日月)의” 달이나 해보다도 훨씬 더 찬란스런 초월적인 그런 “금색광명(金色光明)을 대(帶)한” 금색광명을 띠고 있단 말입니다. 그냥 우리가 물리적으로 보는 금색광명이 아니라 ‘초 일월의’ 그런 물체가 아닌 물질이 아닌 질료가 아닌 순수한 적광(寂光), 정광(淨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광명을 띠고 있는 “무구(無垢)의 정수(淨水)가 충만(充滿)한” 티끌이 없는,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정수가 청정한 하나의 생명수가 충만한 “해상적성해(海象的性海)를 관(觀)하면서” 마치 바다 같은 그런 성해를 그야말로 끝도 갓도 없는 바다 같은 하나의 광명의 바다를 우리가 관찰한단 말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광명의 바다를 관찰하면서, 이것 역시 끝도 갓도 없는 광명의 바다도 하나의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것도 생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부처님 이름을 붙이지요. 원만보신 노사나불입니다.

 

그래서 “원만보신(圓滿報身)인달하여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염(念)하고” 그런 모든 가능성 모든 생명을 생성하고 또는 섭리하는, 모든 가능성의 생명이 거기에 원만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원만보신 노사나불입니다. 부처님은 신비부사의하고 전지전능하신 살아계시는 실존(實存)의 초월적 생명체(生命體)입니다.

 

여기 “인달하여”는 접촉사의 고어(古語)에 불과합니다. “원만보신 인달하여” 이것은 “원만보신인” 것과 같습니다. 원만보신인 노사나불을 생각하고,

“내(內)로 염기염멸(念起念滅)의” 자기 마음 안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없어지는 “무색중생(無色衆生)과” 우리 관념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좋다’‘궂다’‘밉다’‘예쁘다’ 하는 추상관념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무색중생인 것입니다. 우리 관념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무색중생과,

“외(外)로 일월성수(日月星宿)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밖으로 보는 해· 달· 별· 산· 내, 등과 대지(大地) 기타 모든 만상의 “무정중생(無情衆生)과” 아직 의식이 발달되지 못한 그런 중생들과 “인축(人畜) 내지(乃至) 준동함령(蠢動含靈)의” 그런 의식 활동이 있는, 물론 아직은 의식이 완전히 발달은 못되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오관(五官)은 있습니다. “인축내지 준동함령의” 사람이나 축생이나 또는 꾸물거리는 식이 있는 “유정중생(有情衆生)과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일체중생 그러면 그때는 앞서 말씀과 같이 우리 관념의 무색중생, 일반 동물이 아닌 무정중생, 동물인 유정중생, 이들을 합해서 일체중생 그럽니다.

일체중생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면, 일체중생이 무엇인가 하면, 일체중생은 모두가 다 “성해무풍(性海無風) 금파자용(金波自涌)인” 그 원만보신 노사나불이라는 그야말로 광명의 생명의 그런 바다, 초 일월의 금색광명이 충만해 있는 생명의 바다 위에서 바람도 없지만 금파자용이라, 스스로 자(自)자, 뛸 용(涌)자 금색파도가 스스로 뛴단 말입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람과 동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다 무엇인가 하면, 무량무변한 천지우주에 금색광명이 가득한 가운데서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생성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금색바다에서 뛰노는 물거품 같다는 것입니다. 금파자용인 일체존재는 모두가 다 끝도 갓도 없는 금색광명의 바다에서 스스로 뛰는 “해중구(海中漚)로 관(觀)하면서” 거품 구(漚)자, 바다 가운데 있는 거품으로 우리가 관찰한단 말입니다. 사실은 거품인 것입니다.

나도 끝도 갓도 없는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는 바다에 있는 거품이요, 산이요, 내요, 사실은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저 성좌(星座)라든지 은하계(銀河系)라든지 보다 더 큰 성운(星雲), 그런 것에 비교하면 하나의 점도 못되는 것입니다. 창해일속이라, 그야말로 망망대해(茫茫大海)에 좁쌀 한 알만도 못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마음으로 해서는 파스칼의 말과 같이 천지를 다 감싸있지만 존재적인 의미로는 먼지 하나 만큼도 못합니다.

바다 가운데 거품으로 관찰하면서 이것이 숫자가 너무나 많으니까 사람 수, 동물 수, 무생물들의 수, 두두물물 산이요, 내요, 들이요, 별이요, 수없이 많으므로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라. 이런 것이 모두가 원래 부처님한테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모양은 천차만별로 구분된다 하더라도 전부가 부처한테서 나왔으므로 근본 부처님 성품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이 잘 못 본단 말입니다. 바로 보면 아무리 산이 되고 사람이 되고 하여도 조금도 변질이 없는 것입니다.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염(念)하고” 석가모니불을 좁게 생각할 때는 저 인도(印度)에서 나오신 역사적인 석존이시고, 광범위하게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가 다 석가모니불입니다. 이렇게 관찰하고,

“다시 피(彼) 무량무변(無量無邊)의 청공심계(淸空心界)와” 즉 맨 처음의 비로자나불을 말한 청공심계와 끝도 갓도 없는 텅 빈 마음의 세계와 “정만성해(淨滿性海)와” 천지우주의 그런 모든 역량, 모든 가능을 갖춘 금색의 바다와 “구상중생(漚相衆生)을” 금색바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생, 즉 말하자면 거품같이 일어나는 일체중생을, 거품 같은 중생을 “공(空)⦁성(性)⦁상(相) 일여(一如)의” 청공심계의 공, 정만성해의 성, 구상중생의 상, 이것이 결국 셋이 아니란 말입니다. 일여란 결국 하나란 말입니다.

 

“일여(一如)의 일합상(一合相)으로 통관(通觀)하면서” 하나의 일합상으로 통합해서 종합적으로 관찰하면서 “삼신일불(三身一佛)인” 청정법신(淸淨法身), 원만보신(圓滿報身),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인 삼신(三身)이 결국은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하나의 부처인 “아阿(化)⦁미彌(報)⦁타陀(法) 불(佛)을 상념(常念)하고, 아는 화신을 의미하고, 미는 보신을 의미하고, 타는 법신을 의미합니다. 아미타불을 항상 생각하고 내내야 그러니까 아미타불은 자기가 자기를 생각하고 우주가 우주를 생각하는 셈입니다.

 

“내외(內外) 생멸상(生滅相)인” 자기 마음으로 생각하는 자기 관념이라든지, 또는 밖에 보이는 여러 가지 현상적인 것이라든지, 이러한 내외의 생하고 멸하는, 자기도 죽고, 자기도 없어지는 또는 일체 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다 생하고 멸하고 생사를 거듭합니다. 생하고 멸하는 “무수중생(無數衆生)의” 수 없는 중생들의 “무상제행(無常諸行)을” 조금도 고유하게 머물지 않는 행(行)이란 말입니다.

무상(無常)이라. 우리가 무상이라는 말을 굉장히 깊이 새겨야 합니다. 무상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어떤 것이나 고유한 존재가 없단 말입니다. 어떠한 존재나 어느 순간도 머물지가 않습니다.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나, 내 관념이나, 부처님 불성 이 외는 모두가 움직이고 경망(輕妄)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 같습니다.

 

무상제행을, 덧이 없는 허망한 행위(行爲)를 어떻게 보는가 하면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인” 마음 심(心)자, 따를 수(隨)자, ‘마음이 만경에 따라서 궁굴다’ 마음이 만 가지 경계로 뒹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요, 별이요, 산이요, 내요 모든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마음이라 하는 우리들의 생명체(生命體)가 인과율(因果律) 따라서 만 가지 경계(境界)로 굴러 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국이 나쁘게 흘러가는 것도 생각해 보면 참 밉살스럽기도 하고 혼란스럽고 딱하지만 그러나 모두가 마음이라고 하는 우리들의 불성기운이 인과법(因果法) 따라서 흘러갑니다. 우리 모두가 혼란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타(彌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사유관찰(思惟觀察)할지니라” 미타의 미(彌)는 원만보신 노사나불, 타(陀)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입니다. 미타의 즉, 법신과 보신이지요. 현상적으로 제아무리 잘되고 못되고 천지가 모두 파괴돼서 텅텅 비어 버리고 또 생성되고 하는 모든 것이 미타의 일대행위(一大行爲)입니다. 일대 행상으로 생각하고 관찰할지니라.

 

 

6. 우주를 하나의 생명체

 

이 보리방편문은 우주의 모든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딱 묶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읽어보시고 읽어보시면 더욱 더 깊이 생각해 보시면 하나의 아미타 부처님으로 통일 돼 갑니다.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운 것은 이렇게 저렇게 자꾸만 시비분별 하니까, 즉 우주의 도리가 하나의 진리로 통일이 안 될 때는 산란스러운 것입니다. 중생은 미처 못 보아도 공자, 석가, 예수 그런 성자는 분명히 보듯이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딱 통일 되어 갑니다. 즉 부처님으로 통일되어 갑니다.

 

따라서 우주라는 것은 하나님뿐인 것이고 부처님뿐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걸 못보고 성자는 항시 하나님하고 같이 살고 있으므로, 예수도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바이블을 보면 그렇게 항시 말씀해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판단할 때도 정말로 부처님 차원에서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대중 가운데는 철학박사님도 계십니다. 제가 철학을 말하면 우스울 것입니다. 그러나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 같은 분은 우리 불교 철학과 굉장히 가까운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 가운데 ‘영원의 상(像) 위에서 현실을 관찰하라’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순간순간 영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보란 말입니다.

 

우리가 산기슭에서 보면 시야가 좁지요. 산 중턱에 올라가면 시야가 더 넓습니다. 산봉우리에 올라가면 사방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영원의 차원, 부처님의 차원, 하나님의 차원에서 모두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철학서를 보면 마치 불경(佛經)을 보는 기분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관찰하여라. 그러면 결국 너, 나의 구분이 없고, 또 이와 같이 공해가 심할 때 함부로 휴지를 버릴 수 없는 것이고, 우리가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다 살아 있습니다. 산도 살아 있고, 물도 살아 있고, 나무도 살아 있고, 다 살아서 보고 있습니다. 다만 중생들이 그 겉만 봅니다. 나무가 있으면 목신(木神)이 있고, 산이 있으면 산신(山神)이 있고, 물이 있으면 용왕(龍王)이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겉만 보니까 내면의 이러한 생명은 못 봅니다.

 

풍수지리학을 하시는 분들은 산을 보고 용(龍)이 이렇게 꿈틀꿈틀 살아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희랍 때라든지 로마 때라든지 또는 동양의 고대(古代)라던가 바라문교(婆羅門敎, Brāhmaṇism)나 그 하나의 일체 만사가 모두가 다 신(神)이 들어있다. 일체만유가 다 하나의 생명체(生命體)다. 이러한 교훈들이 약간의 표현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하나의 생명체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마음을 확 열고 보면 공자, 예수, 노자, 석가, 소크라테스 등은 다 같은 내용을 말했습니다. 또 과거에는 서로 문호를 세우고 벽을 높이고 싸워왔지만 우리 현대는 그렇게 하면 우리 민족도 못살고 우리 마음도 항시 괴롭습니다.

우주를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이 시간에 다른 것은 잘 못 외우셔도 ‘타성일편’이라는 말씀은 꼭 외워 두십시오. 때릴 타(打)자, 이룰 성(成)자, 한 일(一)자, 조각 편(片)자. 우주를 하나의 도리로 딱 통일시켜버린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체계로 통일시키면 굉장히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화두(話頭)에도 무(無)자가 있고 ‘이뭣고’가 있고 많이 있지만 결국 모두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버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의 체계로 묶어버리면 우리 마음은 텅 비어서 마음이 시원스럽습니다. 하나의 체계로 묶은 다음에 하나가 되기 위해서 정작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 [보리방편문]을 잘 외우십시오. 한 번 암송하면 한 번 외우신 만큼 이상하게 정말로 내 마음이 부처구나! 내 마음 속에는 이와 같이 무량의 공덕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시면 조그마한 자기라는 것에 옹색하고 폐쇄된 마음이 해방됩니다.

 

결국 불교는 자성(自性) 해탈(解脫)이라. 해탈은 자기 마음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물질에 얽매이고 자기에게 얽매이고 어느 관념에 얽매이고 그러한 것을 우리가 다 파헤치고서 이제 이렇게 풀어버리는 이것이 해탈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진리만이 참다운 해방이 있습니다. 지금 물질의 해방, 그 빵 좀 많이 있으면 좋고, 그러한 해방은 참다운 해방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리어 물질에 얽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결국 물질에 칭칭 얽혀서 그걸 못 풀므로 사람들이 경직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다 털어버리면 물질도 관념도 마음도 결국 다 털어버려야 만이 참다운 행복(幸福)과 해탈(解脫)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앞서 말한 타성일편이라, 천지우주는 오직 마음뿐이다. 부처뿐이다. 하나의 진리로 다 되어 있다. 이렇게 관념을 딱 붙여 두셔야 합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제 말씀 같으면 모르려니와 무수 도인들이 다 증명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실상은 안 보인다 하더라도 불교는 진실불허(眞實不虛)라, 성자의 말씀에는 거짓말이 있을 리가 만무하고 또 무수한 성자들이 증명했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그만큼 정화(淨化)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부처님뿐이다. 이 마음을 갖는 순간 사실은 우리 머리는 쭈뼛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내 본생명은 한도 끝도 없다. 내 본생명은 모든 가능을 갖춘다. 이렇게 한번 정말로 믿는 그 마음이 우리를 굉장히 정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이치로는 알았다 하더라도 - 이치로만 알면 실감이 덜 합니다. - 차근차근 실존적으로 우주의 생명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체험하는 것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인데, 체험을 하려면 역시 전문적으로 하기 위해서 저희 같은 출가 수행자가 있겠지요. 그런 점은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냥 부처가 딱 되어버리면 좋겠지만 금생에 나와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잘 못 듣고 잘 못 배우고 잘 못 생각한 것들이 잠재의식에 꽉 차 있습니다. 모두는 물질뿐이고 그것들은 물리적으로 풀이할 수가 있고 현상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믿을 수 있다. 보통은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으로 해서는 모두가 하나의 진리다 하지만 자기가 배운 지식 자기의 기성관념 때문에 성자의 말이나 글이 많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납득이 잘 안 가는 것이고 확실히 잘 못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만 읽어보고 읽어보면 자기 기성관념이 하나씩 깨집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다 때려 부셔서 완전히 법문 내용하고 하나가 되어버리면 깨달아 그때는 확 트여서 진실하게 공부해 가면 인후개통(咽喉開通) 획감로미(獲甘露味)라. 목구멍이 툭 트여서 말입니다. 처음에 공부하면 답답하고 옹색합니다만 공부가 진전되면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툭 트여 옵니다. 어디에 막힌 데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상쾌한 맛이 물론 도통까지는 아직 천리만리이지만 - 우선 자기 몸이나 마음이나 툭 트여서 어디에 막힘도 얽힘도 없습니다.

 

그런 관념만 가져도 굉장히 소중합니다. 그런 관념만 가져도 가슴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한 것입니다. 그때는 혼침도 없고 밤새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이 피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관념은 그렇게 쓰면 쓸수록 더욱 무시무시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쓰면 차근차근 무디어져서 물질에 딱 얽매여 버립니다.

 

물질에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이 몸뚱이는 무겁습니다. 천근만근 무거워져서 그렇게들 소중히 아끼고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닦아서 마음이 맑아지면 몸도 차근차근 가벼워 옵니다. 나중에는 이 몸뚱이가 어디가 있는가 없는가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치 공중에 둥둥 뜬 기분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번뇌의 뿌리가 뽑히면 몸이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나 위대한 도인들이 비행자재(飛行自在)라, 그런 말씀을 우리는 신화(神話)로만 들을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별 것도 아닌 원자력 가지고서 별별 재주와 위력을 다 부리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데 원자력보다도 더 고성능의 무한성능이 불성인데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비약적으로는 잘 안됩니다. 금생에 나와서 잘 못 배우고 잘 못 듣고 잘 못 생각한 것들이 다닥다닥 끼어 있으니까 대부분 그런 기성관념으로 꽉꽉 막혀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가닥을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7. 성불의 길은 지상명령

 

우리 생명의 길은, 우리가 가야할 길은, 마음의 고향 길은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무수한 성자들이 다 증명(證明)한 길입니다. 이렇게 이 길을 지향해서 일로매진(一路邁進) 하시기를 바랍니다. 재가(在家)불자님이라 하시더라도 밥을 드실 때나 무슨 일을 하시든지 간에, 사업을 하실 적에도 종업원이나 점원을 부처님같이 대해 보십시오. 얼마나 따르고 일을 잘하는가 말입니다. 6.25사변 때 사람들이 마구 죽이고 또 죽고 할 때도 그 무시무시한 때 저는 애쓰고 부처같이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상스럽게 위험한 고비를 잘 넘겼습니다.

 

난리를 넘는 가장 슬기로운 지혜가 무엇인가 하면 모든 사람을 다 부처같이 보는 것입니다. 자비(慈悲)와 덕망(德望)이 난리를 이기는 가장 큰 보배입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좋은 스승, 좋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라도 부처님 도리, 우주와 인생의 도리를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의 생명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꼭 마음을 주인공으로 해서, 지금 병자(病者)를 어디 가서 문병이나 간호를 한다 하더라도 그를 부처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정성스럽게 봐지는 것이고, 또 우리 식(識)의 파장(波長)이 부처같이 볼 때 가장 우수한 가장 강력한 파장이 되는 것입니다.

 

오! 부처님! 하는 그 때 우리 몸과 마음은 굉장히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를 부처같이 간절히 보는 그 마음이 우리 분위기를 정화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상대편의 마음도 정화를 시키는 것입니다.『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인데 우리 중생에게 당부를 하신 말씀입니다.

 

設滿世界火 必過要聞法 要當成佛道 廣濟生死流

설만세계화 필과요문법 요당성불도 광제생사류

-무량수경-

 

설만세계화’, 설사 온 세계가 지진이 나고 불바다가 될지라도 ‘필과요문법’ 이라 반드시 그 불바다를 뚫고 나가서 부처님 법을 들어라. 요(要)자 이것은 ‘꼭’이라는 뜻입니다. 꼭 부처님 법을 들을지니 ‘요당성불도’ 하고 한사코 불도를 성취해서 우리가 살면서 장사를 할 수도 있고 무슨 일을 할 수도 있으나 꼭 한사코 불도를 성취해야 함은 우리의 지상명령입니다. ‘광제생사류’ 라. 널리 중생을 제도하라.

 

‘온세계가 불바다로 휩싸이더라도 반드시 뚫고 나가서 우리 생명의 근원인 불법을 들을 것이며 마땅히 한사코 불도를 성취해서 만 중생을 제도하라.’

이것이 우리 인간이 할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모두가 부처님을 지향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지상명령(至上命令)입니다. 우리가 성불(成佛)하는 것은 지상명령입니다. 지상명령인 성불을 향해서 일로매진(一路邁進)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