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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5. 제2장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5. 제2장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본래 ‘선(禪)’은 ‘선나(禪那;Dhyāna)’의 준말로서 정려(靜慮)· 삼매(三昧;Samādhi) 등으로 번역되어 통일된 정사유(正思惟)를 의미한다.

그러나 달마대사 이후 중국을 거쳐 한국 일본 등으로 전래된 이른바 선종(禪宗)의 선은 비록 그 상(相)은 정려(靜慮)의 뜻을 취하나, 그 본체(本體)는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서 본래로 부처임을 깨닫고(해오解悟) 모든 분별시비를 여의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임제종의 ‘화두선’이든 조동종의 ‘묵조선’이든 염불이나 경론을 공부하든지 간에 일체만유가 본래로 평등한 반야지혜(般若智慧)를 깨닫고 닦아 나가면 모두 한결같이 붓다의 정통선(正統禪)이 되는 것이다.

 

 

제1절 「반야심경(般若心經)」

 

금강심론(金剛心論)에서는『반야심경(般若心經)』의 독특(獨特)한 해설(解說)로써 먼저 제법개공(諸法皆空)의 이(理)를 역설(力說)하여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정견(正見)을 천명(闡明)하고 있다.

 

1. 반야바라밀다심경의 독해(般若波羅蜜多心經의 讀解)

 

심경(心經)은 본사(本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께서 사리자(舍利子)에 대(對)하신 수도법문(修道法門)이니라.

1(一)에 경문(經文)의 소독(素讀)이오

2(二)에 현토(懸吐)의 음독(音讀)과

3(三)에 훈독(訓讀)이라

4(四)에 약해(略解)의 해독(解讀)만으로 요지(了知)하고

5(五)에 제2(第二)[현토(懸吐)의 음독(音讀)]와 제4(第四)[약해(略解)의 해독(解讀)]로 병독(竝讀)하다가

6(六)에 제3(第三)[훈독(訓讀)]과 제4(第四)[해독(解讀)]로 합독(合讀)하니

7(七)에 의독(意讀)만으로 종(終)하야

8(八)에 이를 실개(悉皆) 의석(義釋)할지라

9(九)에 관해(觀解)로 조료(照了)하고

10(十)에 묵조(黙照)할새.

 

여실신(如實信)의 신만(信滿)으로써 법(法)에 주(住)하야 여실해(如實解)의 해만(解滿)으로써 실행(實行)하고 여실수행(如實修行)의 행만(行滿)으로써 실증(實證)하되 신증심오(身證心悟)의 증만(證滿)으로 성불(成佛)할 진져.

 

「반야바라밀다심경」의 독해(讀解)라

심경은 본사 석가모니불께서 사리불(舍利弗)에 대하신 수도법문입니다. 경문만 한번 읽고 다음에는 보다 세밀히 읽기 위해서 토를 붙여서 음독(音讀)하고 다음에는 새기면서 읽고 다음에는 조금 더 풀이해서 뜻을 헤아리고 제5에는 현토(懸吐)의 음독과 제4의 약해(略解)의 해독(解讀)도 아울러서 읽어가다가 제6에는 훈독(訓讀)과 제4의 해독을 같이 아울러서 읽어가게 되면 점차로 뜻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제7에는 읽지도 않고 뜻만 살피고서, 우리가 경을 볼 때도 소리를 안 내고 가만히 참선하는 자세로 비추어 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제8에는 모두를 다 뜻만으로 해석하고 제9에는 관해(觀解)로 비추어 보고 제10에는 묵조(黙照)해서 비추어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읽다보면 결국은 독서백번(讀書百番) 의자통(意自通)이라, 스스로 통한다고 하듯이 처음에는 건성이라 하더라도 자꾸만 읽어가다 보면 성인의 말씀이기 때문에 또는 우리 마음이 본래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점차로 자기 마음이 밝아져 불성과 걸맞은 여법한 믿음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여실(如實)한 신(信)의 신만(信滿) 곧, 여실한 믿음이 원만해진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별로 깊지 않은 옅은 믿음이겠습니다만, 제법이 공(諸法空)한 도리를 직설로 설파한 법문은 착실하게 보면 볼수록 더욱더 공(空)에 사무치게 되어 신앙심을 깊게 해줍니다.

법에 주(住)하여 여법한 해석이 원만해짐으로써 여실(如實)한 수행이 되고 여실한 수행이 원만해짐으로써 실증(實證)하는 것이니 우리 몸으로 증(證)하고 마음으로 깨닫는 신증심오(身證心悟)는 원래 둘이 아닙니다. 마땅히 참다운 깨달음은 마음도 깨닫고 몸도 아울러 증명이 되어서 우리 몸도 속화된, 물질화된 소조사대(所造四大)가 순수한 4대인 능조사대(能造四大)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소위 환골탈태(換骨奪胎)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리와 심리가 바꿔진다는 말입니다. 증만(證滿) 곧 원만한 증득(證得)으로 성불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2. 般若心經 原文 - 玄奘法師詔譯

반야심경 원문 - 현장법사조역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

 

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

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

 

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無意識界 無無明亦無無明盡乃至無老死亦無老死盡 無苦

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무의식계 무무명역무무명진내지무노사역무노사진 무고

 

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괘애 무괘애고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得 阿耨多羅三藐三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득 아누다라삼먁삼

 

菩提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

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

 

實不虛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諦揭諦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디사바하

 

3. 般若心經 懸吐

반야심경 현토

 

(般若波羅蜜多心經)

(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의 菩薩이 行深般若波羅蜜多時에 照見五蘊皆空하야 度一切苦厄이니

관자재 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야 色不異空이오 空不異色일새 色卽是空이오 空卽是色이라 受想行識도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亦復如是니

역부여시

 

舍利子야 是諸法空의 相이 不生不滅이며 不垢不淨이며 不增不減일새

사리자 시제법공 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로 空中에 無色이라 無受想行識이니 無眼耳鼻舌身意요 無色聲香味觸法이오

시고 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요 乃至無意識界일새 無無明이라 亦無無明盡이며 乃至無老死라

무안계 내지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亦無老死盡이며 無苦集滅道니 無智라 亦無得하야 以無所得일새 故로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 고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니 故로 心無罣碍요 無罣碍故로 無有恐怖라 遠離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 심무괘애 무괘애고 무유공포 원리

 

顚倒夢想하고 究竟涅槃하나니

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도 依般若波羅蜜多故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시니라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누다라삼먁삼보리

 

故知하라 般若波羅蜜多가 是大神呪며 是大明呪며 是無上呪며 是無等等呪니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能除一切苦요 眞實不虛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故로 說般若波羅蜜多呪일새 卽說呪曰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고 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디

 

娑婆訶라시니라

사바하

 

4.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약해(略解)

 

<서분 제1(序分 第一)>

심경(心經)현토(懸吐)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약해(略解)

 

 

삼신(三身) 사지(四智)에 만덕(萬德)을 구비(具備)한 일대인(一大人)의 대자재경(大自在境)을

관자재(觀自在)의 보살(菩薩)이

관찰(觀察)하는 보살(菩薩)이

심밀(深密)의 정지(正智)로써 피안(彼岸)에 도(到)하는 법(法)을

행심반야바라밀다(行深般若波羅蜜多)

시(時)에

수행(修行)할 시(時)에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야

먼저 망정(妄情)으로 임의 분별(分別)하든 색법(色法)인 색온(色蘊)과 심법(心法)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사온(四溫)은 일즉히 가상가명(假相假名)으로서 명상(名相)이 본(本) 공(空)일새 오온(五蘊)의 개공(皆空)함을 조견(照見)하야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니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를 주(主)로 한 일체고액(一切苦厄)의 고해(苦海)를 도(渡) 하나니

「반야심경」의 약해(略解)를 보겠습니다.

어떤 경전이나 서분(序分)이 있고 정종분(正宗分)이 있고 유통분(流通分)이 있습니다. 서분은 서론이요. 본론이 정종분이고 결론은 유통분인 것입니다.

서분이라, 관자재(觀自在)의 보살이; 삼신사지(三身四智)에 모든 공덕을 구비한 일대인(一大人)의 대자재경(大自在境)을 관찰하는 보살이,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과 같은데 이렇게 깊은 뜻이 있습니다. 관자재보살을 풀이하면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三身)과 본래 진여불성에 갖추어 있는 지혜인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의 무량한 지혜와 만덕을 갖추어 있는 경계를 다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 전체의 성품과 현상을 조금도 빠짐없이 갖추어 볼 수 있는 보살이 이른바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입니다. 보살이란 진리를 여법히 통찰하고 행하는 이를 말합니다.

다음에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심밀(深密)의, 깊고 비밀스러운 바른 지혜로써 피안(彼岸)에, 해탈의 언덕에 이르는 법을 수행할 때에,

조견오온 개공하야; 먼저 망정(妾情)으로 이미 분별하던 색법인 색온(色蘊)과 심법인 수상행식의 사온(四蘊)은 일찌기 가상가명(假相假名)으로서, 참다운 상도 아니고 참다운 이름도 아닌 명과 상이 원래 공할 새 오온이 다 공임을 비추어 봐서도 일체고액이니, 생로병사를 주로하는 일체고액의 고해를 제도하나니

 

<정종분 제2(正宗分 第二)>

사리자(舍利子)야 색불이공(色不異空)이요 공불이색(空不異色)일새 색즉시공(色卽是空)이오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수상행식(受想行識)도 亦復如是(역부여시)니

 

사리자(舍利子)야 색(色)이란 공성(空性)의 여여상(如如相)으로서 색체(色體)가 별유(別有)함이 않이오 공체(空體)의 환화(幻華)일새 색(色)이 공(空)과 불이(不異)하고 공(空)이 색(色)과 불이(不異)하야 공(空) 그대로 색(色)이오 색(色) 그대로 공(空)이라 사온(四溫)[수상행식(受想行識)]도 또한 그러하니

사리자(舍利子)야 시제법공(是諸法空)의 상(相)이

사리자(舍利子)야 이러한 오온(五蘊)[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제법(諸法)이 본공(本空)한 실상(實相)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원래(元來) 생(生)하였음이 않이니 멸(滅)하지 못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며

염구(染垢)하지 않앴으니 세정(洗淨)하지 못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일새

흠축(欠縮)없이 원만(圓滿)하니 증감(增減)하지 못할지라

시고(是故)로 공중(空中)에 무색(無色)이라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이니

그럼으로 제법공(諸法空)의 실상(實相)엔 색(色)이란 가상(假相)도 무(無)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이란 가명(假名)도 무(無)하야 무명(無明)이란 가상가명(假相假名)의 총대명사(總代名詞)로서 근본무명(根本無明)[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무(無)하니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요

육근(六根)[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도 무(無)하고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오

지말무명(枝末無明)[육근(六根)]이 무(無)하니 육진(六塵)[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무(無)하며 능지(能智)의 의식계(意識界)도 무(無)하야

무안계(無眼界)요 내지(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일새

이미 근진(根塵)[육근육진(六根六塵)]이 무(無)하니 전오식(前五識)의 소지경계(所智境界)[안식계․이식계․비식계․설식계․신식계(眼識界․耳識界․鼻識界․舌識界․身識界)]도 무(無)하며

무무명(無無明)이라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이며

무명(無明)이란 도시본무(都是本無)할새 무명(無明)의 진(盡)할 것도 무(無)하며

내지무노사(乃至無老死)라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이며

따라서 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도 무(無)할새 내지(乃至) 노사(老死)의 진(盡)할 것도 무(無)하며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이와 같이 삼세(三世)의 고과(苦果)와 그 집인(集因)을 밝히신 십이지(十二支)의 인연법(因緣法)이란 곧 오온법(五蘊法)에 기(基)한 자(者)로서 실상(實相)에 본무(本無)할새 수도증멸(修道證滅)할 것도 무(無)하니

무지(無智)라 역무득(亦無得)하야 이무소득(以無所得)일새 고(故)로

이상(已上) 오온법(五蘊法)의 범부지(凡夫智)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의 연각지(緣覺智)와 사제법(四諦法)의 성문지(聲聞智) 등(等) 일체(一切) 유위법(有爲法)의 유루지(有漏智)란 몽환포영(夢幻泡影)을 계집(計執)함과 여(如)하야 개시(皆是) 허망(虛妄)일새 일체유루(一切有漏)의 지(智)가 무(無)하고 따라서 유루(有漏)의 득(得)도 무(無)하며 생사유루(生死有漏)를 득(得)할 바가 무(無)함으로

보리살타(菩提薩埵)는

제상(諸相)의 무명운(無明雲)을 개(開)하고 비상(非相)의 불성일(佛性日)을 견(見)하는 개사(開士)는

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多)니 고(故)로

무위법(無爲法)의 무루지(無漏智)로써 열반안(涅槃岸)에 도(到)하는 법(法)에 의(依)함으로

심무괘애(心無罣碍)요 무괘애고(無罣碍故)로 무유공포(無有恐怖)라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하고 구경열반(究竟涅槃)하나니

심(心)에 유루(有漏)의 괘애(罣碍)가 무(無)하고 괘애(罣碍)가 무(無)함으로 무명심(無明心)의 극단(極端)인 사액(死厄)의 공포(恐怖)가 무(無)해짐에 따라 일체(一切)의 전도몽상(顚倒夢想)을 원리(遠離)하고 열반(涅槃)에 구경(究竟)하나니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多故)로 득아누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시니라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여차(如此) 수행(修行)하야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證得)하시나니라

 

본론인 정종분(正宗分)에,

사리자야 색불이공이오 공불이색일새 색즉시공이오 공즉시색이라; 사리자야 색(色)이란 공성(空性)의 여여상(如如相)으로서, 색이 원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공성 그대로 인연 따라 그림자 같은 상을 내었다는 말입니다. 즉 어느 상이라도 진리에 맞는 여법한 상입니다. 색이란 그 성품이 공(空)이라는 것이지 없던 것이 나오고 진리에 안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색이든지, 무슨 물질이나 모두가 다 본체에서 본다면 진여의 여법한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색체가 따로 있음이 아니요, 공체에서 피어나오는 허깨비 꽃, 허망한 그림자일새, 색과 공이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서 공 그대로 색이요 색 그대로 공이라, 분석한 뒤의 공이 아니라 바로 색즉공입니다. 색 그대로 공이요 또는 공 그대로 색입니다. 진여불성이 어떻게 바꾸어진다 하더라도 변질이 되거나 변동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꿈같은 허환상(虛幻相)이 상만 나툴 뿐이기에 바로 즉공입니다. 물리학자처럼 분자를 원자로 분석하듯이 분석한 뒤의 공은 석공(析空)이고 반야심경의 공은 즉공(卽空)인 것입니다.

수상행식도 역부여시니; 4온도 또한 그러하니 수와 상, 행, 식도 역시 그와 같이 공이라는 말입니다.

사리자야 시제법공의 상이; 사리자야 이러한 색․수․상․행․식 오온의 제법이 본래 공한 실상(實相)은,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일새; 원래 생하였음이 아니니 멸하지 못하고, (보통은 생도 아니요 멸도 아니요 라고 번역합니다만 이런 풀이가 금타 스님의 독특한 풀이입니다.) 실상(實相)에서 통찰할 때는 원래 생겨나지 않았으니 멸할 것도 없고, 염구(染垢)되지 않았으니, 원래 오염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염되게 보는 것은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세정(洗淨)하지 못하고, 다시 씻을 필요가 없고, 흠축 없이 원만하니 증감하지 못할지라, 아무 흠절이 없이 원만무결하니 새삼 더하고 덜고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시고로 공중에 무색이라 무수상행식이니; 그러므로 제법공의 실상은 색이란 가상(假相)도 무(無)하고 또는 수상행식이란 가명(假名)도 무하여 무명(無明)이란 가상가명의 총 대명사로서 근본무명이 무하니, 그 무명이란 것은 결국 가상을 실상으로 보고 가명을 실제로 생각하는 데서 생기지 않습니까. 무명의 시초도 제법의 상을 여실하게 보지 못해서 무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안이비설신의요 무색성향미촉법이요; 안의비설신의 6근(根)도 무하고 지말무명인 6근이 무하니 또 6진(塵)인 색성향미촉법도 무하며,

무안계요 내지 무의식계일새; 이미 6근과 6진이 무하니 전5식의 소지경계(所智境界) 즉 안식계․이식계․비식계․설식계․신식계도 무하고 능지(能智)의, 능히 분별하는 의식계도 무하며, 무무명이라 역무무명진이며;

무명이란 도시 본래 없을 새 무명을 다할 것도 없으며, 무무명 역무무명진의 풀이를 잘 새기십시오. 무명이란 본래 없으니 무명을 없앨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무명이 있어야 무명을 여읠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이며; 따라서 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생도 무할 새, 반야심경에서 무명이나 내지 무노사는 십이인연법을 인용한 것입니다. 원래 무명이 없거니 무명에서 파생되는 행이나 식이나 다 응당 없고 따라서 늙어서 죽는 것도 결국은 없다는 말입니다. 노사를 다할 것도 없다, 즉 노사가 없다고 하면 끊을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원래 무명이 없기 때문에 무명에서 파생된 십이인연법(十二國緣法)의 십일지(十一支)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무고집멸도니; 무고집멸도는 상당히 세밀히 풀이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삼세의 고과(苦果) 곧 삼악도(三惡道)나 우리 중생이 윤회하는 육도(六道)는 고의 과보입니다. 과거세에 지은 무명과 삼독심에서 업을 지은 고의 과라는 뜻입니다. 그 집인(集因)을 밝히신 십이지의 인연법이란 곧, 5온법에 근거한 것으로서 원래 실상에는 없을 새 수도증멸(修道證滅)할 것도 없다. 우리가 공을 미처 모를 때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는 것이지 제법공의 경계 곧 색도 공이요 또는 우리 마음 우리 관념도 공이요 모두 공이라는 도리를 안다면 사제(四諦)법문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고나 집이나 또는 멸이나 도나 모두가 다 색(色)이 있고 심(心)도 있는 데서 나온 것이지 색심(色心)이 공하다면 이런 것이 어디에 붙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지라 역무득하야 이무소득일새 고로; 이상 5온법의 범부지(凡夫智)와 십이인연법의 연각지(緣覺智)와 사제법의 성문지(聲聞智) 등 일체유위법의 유루지(有漏智)란, 물론 부처님쩨서 아함경에서 오온법이나 십이인연법을 말씀하신 법문이 유루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표면에 나타난 문자로서는 색심(色心)을 설하고 본래자성자리를 분명히 말씀한 것이 아니기에 아직 방편설이 되겠지요. 몽환포영 곧 꿈이나 허깨비나 또는 거품이나 그림자같이 허망한 것들을 집착함과 같이 모두가 한결같이 허망하니, 일체 유루(有漏)의 지(智)가 무하고 따라서 유루의 득(得)도 무하며 생사유루(生死有漏)를 득할 바 없으므로, 이무소득고 즉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 되었다, 잘났다, 또 무엇이든 많이 안다, 이런 것도 결국은 때 묻은 번뇌의 득이므로 얻을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생사 윤회할 까닭이 없다는 뜻입니다.

보리살타는 의반야바라밀다니 고로; 모든 상의 무명운(無明雲)을 걷고서 상이 아닌 불성일(佛性日)을 견(見)하는 개사(開士)는, 개사는 살타보살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야심경을 여실히 아는 정도가 되면 벌써 보살지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공을 알면 대승초입(大乘初入)이라, 대승에 입문하는 것이므로 반야를 모르면 대승이 못되는 것입니다. 무위법(無爲法)의 무루지로써 열반안에 이르는 법에 의하므로,

심무괘애요 무괘애고로 무유공포라 원리전도몽상하고 구경 열반하나니; 마음에 유루의 괘애(罣碍)가, 유루의 그림자나 거리낌이 없고 괘애가 없으므로 무명심의 극단인 죽음의 공포가 없어짐에 따라 일체의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고 열반의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범부심은 잠재의식이나 현재의식이나 간에 모두가 다 죽음의 공포를 면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는 응당 죽음의 공포는 따르겠지요. 마음에 아직 번뇌가 남아있는 거리낌이 없어지고 또는 그런 거리낌이 없으므로 무명심의 극단인 죽음의 공포가 없어짐에 따라 일체의 거꾸로 보는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고 열반을 구경(究竟)한다는 말입니다.

삼세제불도 의반야바라밀다고로 득 아뇩다라삼막삼보리시니라; 삼세제불도 이와 같이 수행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하시나니라,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오온이 개공한 반야의 지혜를 떠나서 성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통분 제3(流通分 第三)>

고지(故知)하라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多)가 시대신주(是大神呪)며

 

고(故)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가 구경각(究竟覺)까지 성취(成就)하는 묘불가사의(妙不可思議)의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며

시대명주(是大明呪)며

 

근진식(根塵識)의 제혹(諸惑)을 단(斷)하고 적멸(寂滅)을 증(證)하니 도무극(度無極)의 삼명(三明)과 육통(六通)이 생(生)하는 대방편(大方便)이며

시무상주(是無上呪)며

 

팔만장경(八萬藏經)을 독파(讀破)하고 천칠백공안(千七百公案)을 입증(立證)함보다 승(勝)한 법(法)이며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니

 

최상무비(最上無比)의 총지(摠持)니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요

 

이상(以上) 그대로의 해의수행(解義修行)이 견고(堅固)하면 다라니신통장(多羅尼神通藏)에 주(住)할새 제마(諸魔)가 불침(不侵)이오

진실불허(眞實不虛)라

 

일체(一切)의 허망상(虛妄相)을 리(離)한 실상(實相)의 지혜(智慧)라

고(故)로 설반야바라밀다주(說般若波羅多呪)일새

 

고(故)로 이의 실상지(實相智)인 반야(般若)로써 도피안(到彼岸)하는 약법(約法)을 중설(重說)할새

 

즉설주왈(卽說呪曰)

 

곧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의 화두(話頭)요 공안(公案)이라 이를 더욱 단축(短縮)하여 총괄(總括)하면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보디사바하(揭諦揭諦波羅揭諦波羅僧揭諦菩提娑婆訶)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디사바하(揭諦揭諦波羅揭諦波羅僧揭諦菩提娑婆訶)라시니 반야바라밀다주(般若波羅多呪) 그대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多)의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됨을 요지(了知)할지니라.

 

유통분(流通分)이라.

고지하라 반야바라밀다가 시대신주며 시대명주며 시무상주며 시무등등주니; 고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가 구경각까지 성취하는 묘불가사의(妙不可思議)의 대총상 법문이며 6근·6진·6식의 제혹(諸惑)을 단하고 적멸을, 해탈을 증하니, 도무극(度無極) 곧 다시 더 높은 곳이 없는 가장 수승한 삼명(三明:天眼通․宿命通․漏盡通)과 육통(六通:三明에 神足通․他心通․天耳通을 합한 神通)이 생하는 대방편이며 팔만대장경을 독파하고 1700공안(公案)을 입증함보다 수승한 법이며 최상무비(最上無比)의 총지(總持)니, 능제일체고요 진실불허라; 이상 그대로의 뜻을 알고서 수행이 견고하면 다라니신통장 곧 일체재앙을 없애고 모든 공덕을 갖추는 법인 다라니 신통장에 머물게 되니 모든 마구니가 침범할 수 없고 일체 허망상을 떠난 실상(實相)의 지혜입니다.

고로 반야바라밀다주(般若波羅蜜多呪)를 설(說)할새 곧,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디사바하라 한다. 이 주문은 실상지(實相智)인 반야로써 도피안(到彼岸)하는 압축된 간략한 법문으로서 곧 반야바라밀다의 화두(話頭)요 공안이 되니 반야바라밀다주 그대로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음은 금타 스님이 주를 붙인 것입니다.

개명심이(蓋明心而) 견성(見性)이오 견성이(見性而) 오도(悟道)일새 선수후오(先修後悟)란 수(修)는 미수(迷修)요 선오후수(先悟後修)란 수(修)는 오수(悟修)니 수법(修法)에 있언 강경(講經)이나 송주(誦呪)나 참선(參禪)이나 관법(觀法)이나 그의 방법(方法)은 다소(多少) 차이(差異)가 유(有)하지만 미(迷)․오(悟)의 경(境)은 일야(一也)요 증(證)이란 신증(身證)이며 오(悟)란 심오(心悟)일새 신증심오(身證心悟)를 증오(證悟)라 운(云)하나니라

갑신춘(甲申春) 벽산한인 찬(碧山閑人 撰)

 

대저 마음 밝힘이 견성이요, 견성이 바로 오도일새 먼저 닦고 뒤에 깨닫는 선수후오(先修後悟)란 미혹된 수행법이요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선오후수(先悟後修)란 참다운 수행법인 오수(悟修)이니, 수법에 있어서 경을 보는 것이나 또는 송주나 참선이나 관법이나 그 방법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천수경으로 깨달으나 염불하고 깨달으나 화두로 깨달으나, 깨달은 경계는 둘이 아니요, 증(證)이란 몸으로 증하는 것이요 오(悟)란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니 신증심오(身證心悟)를 증오(證悟)라 합니다.

 

 

5. 실상반야(實相般若)

 

반야(般若) 지혜(智慧)는 앞서 말한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지혜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다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참다운 지혜 이것은 오온이 비어 있는 -오온(五蘊)은 정신(精神)과 물질(物質) 아닙니까. - 정신과 물질은 다 비어 있는 것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무엇인가?

비어 있지만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행복(幸福)이나 그런 만공덕(萬功德)이 가득 찬 온전히 가득 찬 그 자리가 즉 말하자면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텅 비어 있지만 사실은 불성(佛性)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우주(宇宙)에는 불성(佛性)뿐만 있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은 그걸 못 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 명호(名號)나 주문(呪文)을 많이 외운다 하더라도 그냥 외우기만 해서는 별로 공덕(功德)이 없습니다.

우리 관념상(觀念上) 천지(天地) 우주(宇宙)는 텅 비어 있는데 다만 불성(佛性)만이 충만(充滿)해 있구나!

이와 같이 느끼면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외셔야 씁니다.

참말로 있는 실상(實相)은 방금 말마따나 텅 비어서, 우리가 보는 것은 비어 있는 것인데, 다만 허무(虛無)하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실상(實相) 그것은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광명(光明)이란 말입니다.

그런 우주에 충만(充滿)한, 내 몸 가운데나 어디에나 우주에 충만한 부처님의 미묘(微妙)한 광명(光明), 그 가운데는 지혜도 행복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무한(無限)의 광명을 이렇게 이미지(image)로 생각하면서 이제 부처님의 명호(名號)나 또는 화두(話頭)도 하고 또는 염불(念佛)도 하고 주문(呪文)도 외운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그때는, 참말로 그때는 우리가 이제 그런 광명, 부처님의 그런 불성과 하나가 된단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처님의 불성광명(佛性光明)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속 빠른 공부 방법인 것이고, 그렇게 한다면 그때는 자기 스스로도 이제 머리도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지고, 더 예뻐지고 하는 것입니다.

 

6. 관조반야(觀照般若)

반야(般若) 공관(空觀)에 철저할 때 만법(萬法)은 오직 일심(一心)이요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의 경계(境界)가 나타나서 비로소 심(心)의 자유(自由)를 얻는 것입니다.

공(空)이란 일체법(一切法)은 연기(緣起)한다는 의미도 되고 그것은 대립적(對立的) 자타(自他)를 떠나서 이를 대아(大我) 곧 커다란 자기 가운데 수득(收得)하는 것입니다. 즉 삼신(三身) 사지(四智)에 만덕(萬德)을 구비한 일대인(一大人)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요 아미타불의 자재경(自在境)이 일체법(一切法)이요 생동하는 우주만상(宇宙萬象)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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