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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7. 3.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7. 3.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인연법을 보다 더 깊이 파고들면 이것은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 여래(如來)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 아닙니까. 여래라는 뜻이나 부처라는 뜻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우주의 도리 그대로, 우주의 도리에서 그대로 왔다. 그래서 여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우주의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식이라는 것은 그냥 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의 본체는 바로 여래입니다. 바로 부처란 뜻입니다. 따라서 끄트머리 가서는 결국은 다 부처까지 가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래장연기라. 이것은 또 진여연기(眞如緣起)라고도 합니다. 여래(如來)란 뜻이나 진여(眞如)란 뜻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여래는 진리 그대로다. 그러므로 여래라고 하는 것이고, 또 진여 이것도 역시 바로 진리다. 진리와 똑같다. 진리와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법계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는 우주의 경계 이것이 법계입니다. 바로 진리의 세계란 말입니다. 이것은 다 똑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좋은 말하고 나쁜 생각하고 이런 것은 모두가 다 마음에다 종자를 심는 것입니다. 가사 개나 소나 그런 축생들도 다 나름대로 행동을 하므로 종자를 자기 마음에 심겠지요. 그런 것들의 근원이 무엇인가 파고들면 모두가 다 부처라는 데까지 이른단 말입니다. 따라서 인연법(因緣法)의 가장 시초 기본적인 틀은 본바탕은 역시 부처 진여불성입니다.

우리 인간이 미처 몰라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지 원인(原因)을 캐고 들어가서 끄트머리에 들어가면 다 부처님한테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진여불성(眞如佛性)이 그때그때 연(緣)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 지금 현상계라는 것입니다. 내가 금생에 태어난 것이나, 또 살다 죽는 것이나, 사업에 실패하는 것이나, 누구를 좋아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겉만 보면 별것도 아니고 상대적인 걸로 해서 되는 것 같지만 근본 뿌리를 캐 들어간다고 할 때는 다 부처님의 도리란 말입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攝理)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면 우습게 생각하고 미신(迷信)같이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라는 것이 근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하나님의 섭리요 근본 도리입니다. 다 진리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뚝 떼어서 현상적인 세계만 볼 때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렇게 되겠습니다마는 가장 근본적인 도리에서 생각할 때는 부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기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여래장연기 즉, 진여연기 이것은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 두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여문에서는 진여, 즉 진리는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실체(實體)를 의미합니다.우리가 진여 진리를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 해서 구분해 보는 것입니다. 진여라는 부처님의 실상을 이렇게 저렇게 나눌 수가 없는 문제 아닙니까.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우주의 생명 그 자리의 참다운 면, 이것이 진여문이고, 또 진여문에서 인연 따라 현상계가 이루어지는 생멸문, 나고 죽고 하는 문, 우리가 태어나고 천지 우주가 이루어지고, 일본 고베 같은 지진이 생기고, 이런 것은 모두가 생멸문에서 일어났다가 없어졌다 하는 것입니다. 행복해졌다 불행해졌다 이런 것들이 다 생멸문입니다. 그래서 진여문에서 볼 때는 일미평등이라. 조금도 차이가 없는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한 우주의 한(하나의) 실체라. 즉 말하자면 우주는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인연 따라서 나고 죽고하는 생멸문에서 볼 때는 염연(染緣)이라. 별로 좋지 않은 때 묻은 인연에 따르면 그때는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것입니다. 육도는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간(人間)·천상(天上) 아닙니까. 지옥도 가고 인간 세계로도 나고 천상도 가고 이것은 아직 부처 경계가 못되므로 아직은 청정한 인연이 아닌 것입니다. 지옥은 더 오염되고 천상은 덜 오염됐다 하더라도 때 묻은 번뇌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천상 역시 욕계(欲界) 천상이나, 색계(色界) 천상이나, 무색계(無色界) 천상이나 아직은 인간보다는 더 낫다 하더라도 역시 때가 번뇌가 다 가신 것이 아닙니다. 번뇌가 남아 있습니다.

 

가사 우리가 죽을 때 남을 굉장히 미워한 채로 죽어버리면 그것은 틀림없이 싸움 잘하는 아수라 세계로 갓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또 죽는 순간에 독한 마음, 잔인한 마음을 품을 때는 지옥 가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금생에 좀 나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죽을 무렵에 좋은 스승 만나서 정말로 본래가 다 부처 아닌가. 원래 번뇌라는 것은 씨앗이 없는 게 아닌가. 번뇌는 근본 자취가 없지 않는가. 이렇게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서 부처님만 오로지 믿고 밀고 나간다고 생각할 때는 평소에 별로 좋지 않은 사람도 그 임종(臨終) 때 좋은 마음 때문에 좋은데 가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경에 보면 십념왕생(十念往生)이라! 평소에 잘 못 살았다 하더라도 죽을 때 좋은 마음으로 열 번만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을 외운다면 그 공덕으로 해서 좋은 데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임종 때 우리 마음의 자세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임종 공부라. 평상 공부도 필요하지만 임종 공부를 나이 드신 사람들은 아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나이를 먹었습니다만 나이가 들어 황혼이 되면 참 주의해야 됩니다. 평소에 내가 무던히 양심(良心)대로 살았거니 안심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때까지 고이고이 잘 살아서 꼭 내생에는 좋은데 가서 태어나야 합니다. 본래 성불(成佛)을 깨달아서 바로 극락(極樂)가면 더욱 좋고요. 금생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 과거 전생이 있었으므로 금생이 있는 것이고, 또 금생이 있었으므로 내생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전생이나 내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이 되시겠지요. 그래서 때 묻은 좋지 않은 인연, 염연(染緣)을 만나면 그때는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인간이나 천상이나 그런 과보(果報)를 받는 것이고, 청정한 인연 정연(淨緣)을 만나면 그때는 사성(四聖)이라.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불(佛)을 이룬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기르고 친구들과 우정(友情)을 맺고 하는 그런 경우도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저 친구를 지금 좋은 길로 이끌고 있는가? 이렇게 한 번씩 자기 반조(返照)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무슨 이익 있는 일이나 하고, 당이나 만들어서 나중에 정권이나 잡을 그런 일이나 하고, 그러면 결국 때 묻은 인연이기 때문에 자기 친구도 그런 쪽으로 엉뚱하게 이끌어 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정치해도 좋고 경제활동해도 좋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나와 남이 성불하는 쪽으로, 나와 남이 동시에 다 좋은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런 뜻으로 돈도 벌면 좋고 정치를 하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와의 우정에도 우리가 때 묻은 인연이 될 것이 아니라 맑은 인연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연(淨緣) 말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실상은 염정(染淨)이 둘이 아니지만 우리가 의미로 나누어 보면 염연(染緣)과 정연(淨緣)이라.

내외간에 함께 계실 때도 내가 저 사람한테 때 묻은 인연이 되는가? 내가 맑은 인연이 되어서 저이가 나 때문에 보다 더 맑아질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생활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육도 가운데는 개나 소나 돼지와 같은 축생계(畜生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귀신(鬼神)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부인을 합니다만 귀신도 존재하기 때문에 절에서 천도(薦度)도 모시고 다 하지 않습니까. 귀신 세계는 스승이 없는 어두운 세계이기 때문에 다른 걸로 해서는 인도(引渡)를 못합니다. 부처님 법으로 비로소 인도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비밀주(秘密呪)로 해서 '그대 이리로 오너라' 하면 올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보소청진언(普召請眞言)이라. 이 진언을 하면 그때는 귀신도 '누구 누구 영가(靈駕)여' 하면 다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이라는 것이 우주의 기본적인, 우주의 근본적인 순수 에너지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참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들도 부처님 힘으로 해서 '그대가 지금 너무 헤매지 말고, 그대가 헤매는 것은 그대한테도 좋지 않고 그대 가족에게도 안 좋으니까 그런 망념을 다 끊어버리고서 극락세계라든가 극락세계에 못 가면 천상이라든가, 천상에 못 가면 인도 환생해서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소서.' 이렇게 타이르는 것이 천도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꼭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쁜 쪽으로 가는 것을 항시 주의하고 자기 점검을 잘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누가 불행해지지 않는가? 나 때문에 누가 실패하지 않는가? 그리고 꼭 한 걸음씩이라도 성자의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여기 사성(四聖)이란 말씀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자(聖者)도 구분이 있습니다. 완벽한 진리를 깨달은 그런 분은 바로 부처고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은 보살, 보살은 나와 남을 다 더불어서 진리로 이끌어 가는, 자기도 성자가 되고자 최선을 다하고 남도 성자의 길로 인도하는 이가 보살 아니겠습니까.

 

연각(緣覺) 이것은 다른 사람은 제쳐놓고 자기만 성자가 되려고 애쓰는 그런 분이 연각승입니다. 성문(聲聞)도 역시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충실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은 별로 안보이고 자기 스스로 자기 공부만 주로 하는 그런 성자가 성문승입니다. 아무튼 성문, 연각, 보살, 부처 이것이 사성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장연기라. 따라서 인연법은 여기까지 가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인연법이 됩니다. 여기까지 간다고 생각할 때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다 진여라 하는 여래라 하는 진리에서 왔단 말입니다. 요새 무슨 지존파라 하는 나쁜 사람들도 역시 겉모습만 지존파지 그 본성은 똑같이 여래에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사람도 미워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저 사람은 과거 전생에 나쁜 죄악의 씨앗을 너무 많이 심고, 금생에도 스스로 지은 죄악 때문에 좋은 환경을 만나지 못하고서 참 불쌍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측은히 생각했으면 생각했지 그 사람을 성자들은 미워하지 못합니다.

 

가장 깊은 도리가 여기 있는 여래장연기라. 이 진여연기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생각을 깊이 해보십시오.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그 근본 뿌리를 모르고서 겉에서만 뱅뱅 돌아 버리는 것입니다. 번뇌를 일으키고 또 행동을 하고, 보통은 말도 번뇌에 따라서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고 생각도 그럽니다. 그러면 결국 차근차근 나쁜 번뇌 종자만 더 깊어집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상대성 원리에도 다 있습니다. 이런 것은 현대 물리학에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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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래가 부처라는 것은 불법에만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도 성선설(性善說), 성악설(性惡說)이라. 맹자(孟子)는 성선설, 인간성은 본래 선량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순자(荀子)는 인간성은 본래 나쁜 것이다. 인간성은 나쁜 것이므로 교육을 잘 시켜서 훈도(訓導)를 해야 된다. 맹자는 본래가 선량하므로 선량한 인간성을 때 묻지 않게 해야 된다.

역시 맹자의 주장이 보다 공자(孔子)의 뜻에 맞고 인간성은 제아무리 나쁜 사람도 겉만 그런 것이지 본래는 선량(善良)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량하다는 것도 부처님 사상같이 철저하지는 못합니다. 부처님 사상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냥 선량한 정도가 아니라 앞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갖춘 것입니다.

 

자비도 원만, 지혜도 원만, 능력도 원만, 일체 만공덕(萬功德)을 갖추고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의 본체(本體)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여래장연기의 인연법 따라서 태어난 것이 또 우리 인간(人間)인 것이고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제바달다'가 부처님을 상해하려고 코끼리에다 독주(毒酒)를 먹여서 부처님 오시는 길에 풀어놓았습니다. 그 독주를 마신 코끼리가 이것저것 앞뒤도 가리지 않고 할퀴고 유린하곤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 가서는 그냥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앞발을 꿇고서 그대로 유순(柔順)하게 변해 버립니다. 그 코끼리한테도 순수한 성품은 다 있습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식물(植物)에도 다 있습니다. 식물도 무생물(無生物)도 모든 일체존재가 근본 성품은 역시 진여불성입니다. 어느 물질이든 에너지가 없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순수 에너지, 에너지 가운데서도 가장 순수 에너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여불성 자리만 온전히 생각할 때는 우리 신앙심(信仰心)은 한결 더 수승하게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가 아프다. 내 몸이 거북하다. 이런 때도 나한테는 만능(萬能)한 진여불성이 내 생명의 본질이 아닌가. 이렇게 한 번 생각한 그걸로 해서 그냥 웬만한 것은 다 풀리는 것입니다. 나는 나고 가까스로 내 몸무게는 얼마고 내 힘은 얼마고 내가 배운 것은 뭐 대학교 나오고 무엇도 좀 하다 말았고, 이렇게 자기 능력을 제한시켜 놓으면 그만 그밖에는 못 나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구나 배웠던 안 배웠던 무한한 가능성(可能性)을 갖고 있습니다. 지혜, 자비, 행복이 다 완벽한 것입니다. 불법 말로는 이른바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부처님 공덕을 말할 때에 삼명육통은 자연히 거기에 따라갑니다.

 

삼명육통은 무엇인가 하면 신족통(神足通),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이 육통이고, 그 중에 특히 천안, 숙명, 누진 셋을 삼명이라 합니다. 이렇게 지금 말씀을 하면 같은 불교를 믿는 분들도 신통 그런 것은 외도나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의 기적도 과장시킨 것이지 무슨 기적이랴?

 

성자들은 우주의 순수 에너지를 쓰는 것입니다. 우주의 순수 에너지는 무한한 힘이 있단 말입니다. 지금 원자력같은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우리가 지금 원자력 가운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원자력보다도 더 무한한 성능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가운데는 무시무시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광명 파동이 초속 30만 킬로미터입니다. 눈에도 안 보이는 그 광입자(光粒子)의 속도가 일초에 30만 킬로미터란 말입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힘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절대로 자기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나쁜 버릇 때문에 과거 전생에 잘 못 살아서 자기 마음을 제한해 왔고, 금생에도 학교에서 배우고, 누구한테 말 듣고, 부모한테 영향 받고, 사회에서 나쁘게 배우고, 이것 때문에 우리 마음이 지금 왜소화되었습니다.

불교는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어디로 마음을 여는 것인가? 무한(無限)의 광장(廣場), 무한의 자비, 지혜, 행복, 능력이 갖추어진 광장으로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신앙입니다. 마음 열지 않고 부처님 믿는다면 그건 신앙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서 내 본래 생명(生命)의 고향(故鄕)자리, 거기다가 마음을 둔단 말입니다. 그런다고 생각할 때에 좋아할 사람도 미워할 사람도 아무도 없이 모두가 다 좋은 것 뿐입니다.

그래야 마음이 안심(安心)이 됩니다. 이것이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2조 혜가(慧可) 스님이 달마(達磨) 스님한테 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 마음이 불안(不安)합니다. 제 마음의 불안을 가시게 해 주십시오.' 달마스님 말씀이 '그래, 그대 불안한 마음을 한 번 내놔 봐라.' 좋은 마음이나 불안한 마음이나 어디 흔적이 있습니까?

그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한 마음에다 자기 스스로 나쁜 버릇만 잔뜩 종자로 심어 놓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것입니다. 원래 마음은 모양이 없는 것인데 자취가 없는 그 마음을 좋다, 궂다 한단 말입니다. 스스로 괴로워한단 말입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스스로의 번뇌에 스스로 묶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진여연기, 여래장연기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우리가 항시 여기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염불(念佛)을 하는 것도 역시 진여연기, 법계연기라. 우리가 진여의 자리, 여래의 자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모두를 다 부처님 차원에서 영원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본단 말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봐야 바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차원에서 보니까 바로 못 보인단 말입니다. 자기 번뇌로 굴곡(屈曲)시켜 보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여래장연기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고도 하는데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眞如)가 있어서 그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한 실체(實體)가 염연(染緣)과 정연(淨緣)에 따라서 종종(種種)의 만법(萬法)을 생(生)함을 말한다. 즉 염연(染緣)으로 말미암아 육도(六道)를 나타내고 정연(淨緣)으로 말미암아 사성(四聖)을 나타내나니 그래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여래장(如來藏)으로 말미암아 생(生)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래장(如來藏)은 다시 무엇으로부터 생(生)하느냐고 힐문(詰問)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여래장(如來藏)의 체성(體性)이 바로 진여(眞如)이며 진여(眞如)가 그 무엇으로부터 생(生)하였다고 하면 진여(眞如)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같이 일체만법(一切萬法)은 여래장(如來藏)으로부터 변조(變造)된 것이므로 만법(萬法)은 서로 융통(融通)하여 일대연기(一大緣起)를 한다고 논(論)하는 것이 법계연기(法界緣起)이다.

 

4. 법계연기(法界緣起)

 

그것이 바로 제4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바로 우주란 것은 하나의 부처님의 법으로 해서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진연기(無盡緣起)라, 우주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산이나 내나 또는 나나 너나, 너 가운데 내가 들어가고 나 가운데 네가 들어오고 말입니다. 불교 말로 하면 상입아입(相入我入)이라, 모든 존재 가운데가 서로 다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또 조금은 의단(疑端)을 품으시겠지요? 왜 나 가운데 네가 들어오고 또는 너 가운데 내가 다 들어가는가? 이것은 물질이 아니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몸뚱이 이것은 가짜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업식(業識) 따라서 이와 같은 몸을 받는 것이지 몸이 이것이 실존적인 진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유마경(維摩經)』이나 『능엄경(楞嚴經)』 보면 모탄거해(毛呑巨海)라. 터럭 모(毛)자, 삼킬 탄(呑)자, 클 거(巨)자, 바다 해(海)자, 조그마한 터럭 끝에 태평양 같은 바다가 쑥 들어간단 말입니다. 이해가 되겠습니까? 개납수미(芥納須彌)라. 겨자씨 개(芥)자, 들일 납(納)자, 또는 수미산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산이 수미산(須彌山)인데 겨자 씨 가운데 수미산이 쑥 들어간단 말입니다. 쑥 들어가서도 조금도 줄어들었다는 관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가 『유마경』이나 또 『능엄경』에가 있습니다. 조그마한 터럭 끝에 가서 태평양 같은 큰 바다가 다 들어가고 또 겨자씨 가운데 가서 우주에 비길 수 있는 큰 산이 들어간단 말입니다. 이런 도리를 어떻게 이해를 하시겠습니까? 부처님의 신통지혜(神通智慧)니까 그렇게 되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신통지혜도, 부처님의 신통지혜는 우연이나 기적이 아닙니다. 사실로 할 수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신통을 하신 것입니다.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들어가고 나갈 것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선 ‘나’라는 존재, ‘나’라는 존재를 파괴를 하셔야 됩니다. 파괴를‘나’라는 존재를 파괴를 해야 그래야 다시 바꿔서 말하면 내 마음을 하늘과 같이 연다는, 넓힌다는 그런 말이 되겠지요.

 

내 세포(細胞)란 것도 역시 하나의 흘러가는 물과 같이, 아까 흘러간 물과 지금 흘러간 물과 똑같지 않듯이 우리 세포도 아까 세포와 지금 세포가 같지 않단 말입니다. 찰나생멸(刹那生滅)이라, 어느 찰나 순간도 일 초의 몇 천분의 일 동안도 같은 나가 없습니다. 결국 세포가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가상(假想)에 불과한 것인데 우리가 그런 도리를 잘못 보니까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색(色)도 공(空)인 것이고 우리가 느낌도 공인 것이고 우리의 기쁨도 다 공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란 말입니다. 오온이 개공이란 뜻은 오온은 다 쪼개고 쪼개서 끄트머리 가서 공이란 뜻이 아닙니다. 색즉공(色卽空)이라, 오온 즉 바로 공이라, 바로 그대로 공(空)이란 말입니다. 성자(聖者)가 보면 있는 것 그대로 공입니다. 우리 범부(凡夫)가 보면 그때는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있는 것은 그대로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공(空)도, 소승(小乘) 공은 다 분석(分析)하고 들어가서 지금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 모양으로 성분에서 분자로 분자에서 원소로 원소에서 원자로 이렇게 분석하고 들어간단 말입니다. 들어가서 종당에는 다 공인 제로가 된다. 이것은 현대물리학적인 분석법인데 소승분석(小乘分析)은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대승분석은 색즉공(色卽空)이란 말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법계(法界)의 유위법(有爲法)도 무위법(無爲法)도 정신(精神)도 물질(物質)도 과거(過去)도 미래(未來)도 모두가 다 일대연기(一大緣起)를 이루어 그중 어느 하나도 단독(單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법(一法)으로써 일체법(一切法)을 이루고 일체법(一切法)으로써 일법(一法)을 일으킨다. 환언(換言)하면 만유(萬有)는 만유(萬有)를 연(緣)하여 일어나는 것으로서 일체만법(一切萬法)은 서로 연(緣)이 되어서 일어나는데 이를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도 한다.

 

5. 육대연기(六大緣起)

 

다섯 번째 가서 육대연기(六大緣起)라. 육대라는 이것은 밀교에 있습니다. 밀교도 요새 무슨 '탄트라'나 그런 것이 아니고 순수밀교라는 것은 아주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육대란 이것은 땅기운 · 물 기운 · 불기운 · 바람기운, 또는 텅 빈 공 기운· 마음기운입니다. 그냥 우리 눈에 보이는 땅기운 · 물 기운 · 불기운 · 바람기운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의 성품(性品)으로 해서 기운입니다.

 

진여불성 가운데는 성품으로 해서 무한의 성품이 있지만 대개 여섯 개의 속성으로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에너지 가운데는 모든 것을 굳게 만드는, 고체를 형성시키는 그런 땅기운도 있고, 모든 것을 윤택하게 만드는 물 기운도 있고, 또 산소와 같이 모든 것을 다습게 만드는 불기운도 있고, 또는 모든 운동에너지 즉, 동력인 바람기운도 있고, 그리고 끝도 갓도 없는 텅 빈 모든 존재의 공간성인 공기운도 있는 것이고, 그 모두의 근본이 바로 마음기운 식(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체 존재라는 것은 이와 같이 본래 진여불성이 갖추고 있는 그런 땅기운, 물 기운, 불기운, 바람 기운 또는 빈 기운 또 마음기운 이런 것이 어울리고 어울려서 존재가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육대 역시 진여불성, 여래장 가운데 다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아셔야 바르게 보는 것이고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나 내가 지금 당장 교통사고를 만나고 지진을 만나서 선지피를 뚝뚝 흘리고 죽어 가는 그런 마당에도 역시 지금 내 존재가 진여불성에서 잠시간 이렇게 모양을 나툰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에 모양을 나툰 존재 이것은 사실은 실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앞서 말씀과 같이 세포로 구성된 허우대뿐인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신진대사해서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정확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한 동안도 고유한 내 존재는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고유한 존재가 없다고 생각할 때에 바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결국 이대로 다 공(空)이란 말입니다. 일 초 전과 일 초 후의 내 세포가 같지를 않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어리석어서 상속되는 찰나를 보지 못하고 이 몸뚱이 이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우리가 엄격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일 초 전과 일 초 후가 같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원리에서 부처님께서 제법(諸法)이 공(空)이다. 모두가 다 비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법이 공이다.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이란 것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우리 불교 하시는 분들은 수천 번, 수만 번 하시겠지요. 그래도 그 물질이 공(空)이라는 것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물질이 생기면 거기에 얽매여 허물을 범하고, 누구한테 뇌물(賂物)도 받고, 또 비리(非理)도 저지르고 하는 것입니다. 물질(物質)이라는 것은 고유(固有)한 것이 아닙니다. 시시각각으로 변동해 마지않는 이것은 그야말로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무상이라는 것은 항상(恒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른바 전변무상(轉變無常), 변화무쌍(變化無雙)이라. 모든 물질은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 내 몸뚱이요, 그런 것이 물질이요, 그런 것이 감투요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연 따라서 남들이 양보해서 추대하면 감투를 써도 그때는 무방하겠지요. 감투를 써도 조금도 집착을 말고 인연이 다 되면 선선히 물러나서 용퇴를 한단 말입니다. 이래 되면 사회가 참 편할 것인데 종교인들도 무슨 감투를 써 놓으면 한 곳에만 붙어 가지고 지내려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진여연기란 연기법을 몰라서 그럽니다.

이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살기가 참 편한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손해가 없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장에 죽어 나간다 하더라도 인연 따라서 어차피 죽을 자기 몸뚱이 집착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나투지만 실로 온 것이 아니고 인연 따라서 사라지지만 참으로 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본래 진리 그대로 순수 생명 그대로인 것입니다. 오고 감이 없지 않습니까? 그림자 헛것을 잘 못 보고 생사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람 따라서 물에서 파도가 일어나 바람이 자면 다시 물로 돌아가듯이 이치가 똑같은 것입니다.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진리(眞理)에서 왔다가 다시 진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래 고향(故鄕)으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성인(聖人)들은 그렇게 보기 때문에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한단 말입니다. 예수가 죽음을 두려워했습니까? 석가가 두려워했습니까? 순교(殉敎)하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멋도 모르고 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겠지만 보통은 다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찮은 그런 눈에 보이는, 사실은 있지도 않는 것 때문에, 내 몸뚱이나 물질이나 감투나 사실 이것은 허망한 것인데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 생명을 오염(汚染)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업감연기(業感緣起)나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은 불교 기본적인 책을 보시면 정확히 아실 수 있습니다. 업감연기 이것은 번뇌(煩惱)라는 혹(惑)을 일으키고 거기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 행동이나 말이나 뜻으로 해서 업(業)을 짓고 그래서 인생고(人生苦)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내야 인생고도 우리가 지어서 받습니다. 과거 전생이나 금생이나 번뇌 때문에 행동을 바르게 못해가지고 업을 짓고 고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 원망(怨望)할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애매하게 받는다. 내가 무던히 착실하게 살았는데 저 사람이 나를 비방(誹謗)한다. 이생에는 안했으면 과거 전생에 자기가 꼭 그렇게 받을 만한 짓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고 적어도 이 인연을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남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더 나아가서 이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 모두가 본래는 다 부처님이 아닌가? 일체존재가 부처님이 아닌가? 부처님한테서 잠시간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모양이 되었다가 다시 부처로 돌아간다. 지옥으로 가고 어디로 간다 하더라도 잠시간 가는 것이지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에 다 부처가 들어 있는 것이고 본래불(本來佛)인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종당에는 몇 만생을 헤맨다 하더라도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심(安心)하고 살아야 그래야 안심법문(安心法門)이 됩니다.

 

지금 기본적인 문제를 알아두시면 나중에 제가 새삼스럽게 말씀을 드리지 않더라도 복사되신 것을 보시면 다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남을 위해서 법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자기가 하는 것은 수월한데 듣는 것은 괴로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연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제가 주로 말씀을 하게 됩니다. 불교가 복잡하고 어려운 법문이라고 다들 그렇게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인 것이고 오천 권 이상이 되는 불교경전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다 독파할 수는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참선(參禪)한다고 애쓰고 불경도 그때그때 봤으나 어떻게 그걸 다 자세히 보았겠습니까? 중점적으로 본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일반 분들은 체계 있게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20세 좀 넘어서 승려가 되었지만 이래저래 고생고생 하고 한 15년 남짓 지나서 40이 되니까 비로소 좀 갈래가 잡힌단 말입니다.

여기 가서 묻기도 하고, 저기 가서 묻기도 하고, 토굴에서 혼자 지내기도 하고, 고생고생 하고 난 뒤에 조금씩 불경을 봐도 그때야 문리(文理)가 익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맨 처음 불교를 공부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어렵게 생각이 되시겠구나 하고 동정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번 법회(法會)도 이와 같이 마련한 것입니다. 사실 경험자들이 간추려서 말씀해버리면 도움이 되시는 분들은 상당히 도움이 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