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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8. 제3절 무아(無我)의 수행(修行)

8. 제3절 무아(無我)의 수행(修行)

 

1. 무아(無我)인 이유(理由)

 

금강경에 '통달무아법자 진시보살(通達無我法者 眞是菩薩)이라, 무아법에 통달한 사람이 진실로 보살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없다 하는 무아법(無我法)에 통달하여야만 참다운 보살이라는 뜻입니다.

저번에도 말씀했습니다마는, 우리 범부와 성자와의 차이도 역시 내가 있다는 것을 여의는가 미처 못 여의는가에 있습니다. '나' 라는 아상(我相)을 미처 못 여읜다면 범부이고 '나' 라는 아(我)가 멸진(滅盡)되어 버려서, 그 번뇌(煩惱)가 다 끊어져버려서 그야말로 참, 무아(無我)가 되고 대아(大我)가 되어야 비로소 성자인 셈인지요.

또, 정도(正道)와 외도(外道)의 차이도 역시, 정도는 마땅히 그 구경지(究竟地)가 반드시 '내가 없다' 하는 무아를 증득(證得)해야만 정도(正道)의 표준이고, 그에 반해서 외도(外道)는 어디까지나 나를 못 여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떠한 신통자재(神通自在)로 재주를 많이 부린다 하더라도 나를 못 여의는 것은 외도(外道)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할 때에 "내가 없다 무아다" 이런 말은 하기는 쉽습니다마는 '분명히 내가 존재하는데 어째서 없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 답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화두(話頭)도 들고 염불(念佛)도 해서 공부를 많이 하면, 그때는 '나' 라는 것이 그냥 문득 끊어집니다.

하지만, 우리 업장(業障)이 무거우면 좀처럼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런 때는 우선 방편적(方便的)으로 '내가 어째서 없는가?' 하는 원인을 좀 캐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데에서, 부처님 교리(敎理)의 참뜻이 있는 것입니다.

한번 듣고서, 그냥 얼른 느껴가지고서 깨달아 버리면 문제가 안 되겠습니다만, 업장이 가리어버리면 통달보리심(通達菩提心)을 못합니다. 보리심(菩提心)자리, 자성(自性)자리를 미처 못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때에는 우리가 방편으로 그때그때 여러 가지 한계(限界)를 제시(提示)해 가면서 해설(解說)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진아(眞我)입니다. '참나' 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대아(大我)라, '큰 나' 입니다. 그리고 자기라 하는 범부성(凡夫性)이 소아(小我) 즉 망아(妄我)입니다.

우리 불교에서 나를 말할 때는 보통 3차원으로 말합니다.

 

그 한 가지가 망아(妄我)입니다. 망아란 우리 중생들이 미처 번뇌를 못 끊은 즉 말하자면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에 얽매인 '결박된 나' 요 '망령된 나'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망아는 본래 없습니다.

저번에도 말씀했듯이, 망아는 마치 어두컴컴할 때에 새끼 토막을 뱀으로 보는 그런 견해, 사실은 있지 않는데 망상으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났다 또는 그대가 이쁘다 밉다 이런 것은 망아입니다. 사실은 이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어두울 때에 잘못 봐서 새끼 토막을 뱀으로 보는 그와 같은 견해, 이것이 망아입니다.

 

그러나 또한 전혀 없지가 않습니다. 인연 따라서 이렇게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존재를 가리켜서 가아(假我)라고 합니다. 가아란 잠시간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가아(假我)의 참다운 본질이 무엇인가? 곧 가아의 본바탕이 이제 무아(無我) 이고, 진아(眞我) 또는 대아(大我)입니다.

우리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망아(妄我)를, 망령된 나, 잘못 본 나를 떠나는 동시에 분명히 지금은 있는 가아(假我)의 본질을 찾는 것이요, 이것이 우리가 공부하는 성불(成佛)의 공부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다고 하는가?

이런 문제는 중요한 문제니까, 좀 군더더기 같지마는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무아(無我), 진아(眞我), 대아(大我)

 

인신(人身)에 있어서 이를 있다고 집착(執着)함을 인아(人我)라 하고, 제법(諸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집착(執着)함을 법아(法我)라 함. 그런데 인신(人身)은 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체(我體)가 무(無)하며 일체법(一切法)은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성(我性)이 무(無)함.

 

공부해 보면 아시겠지만, '나'라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이나 모두가 '나' 때문에 일어나지 않습니까. '나' 라는 문제만 해결되면 그런 것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번뇌의 모든 것 즉, 근본번뇌, 수번뇌가 다 나를 기준해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내가 없다' 하는 것을 우리가 명백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자(聖者)가 못되는 한에는 제아무리 말로는 다 해도, 역시 나를 잘못 떠납니다. 따라서 무아(無我)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에 말씀드리는 정도는 척척 외워서, '나' 라는 망상(妄想)이 나올 때는 그냥, 이런 법문으로 대치를 해 버려야 합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고?

'사람 몸(人身)에 있어서 이를 있다고 집착(執着)함을 인아(人我)라 하고, 또 제법(諸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집착함을 법아(法我)라 합니다'

제법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일체만법(一切萬法)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산이나 내(川)나 또는 무슨 주의(主義)나, 좋다 궂다 하는 것이나, 유정(有情), 무정(無情) 일체 만유(萬有)를 가리켜서 제법(諸法)이라 합니다.

그런데 '사람 몸(人身)은 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체(我體)가 없습니다'

 

오온이라는 것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 몸은 색(色)에 해당하고 사람 마음은 수, 상, 행, 식(受想行識)에 해당합니다. 곧 감수(感受)하는 작용, 또는 상상하는 작용, 또는 의욕 작용, 또는 분별하는 작용입니다. 사람 몸은 이런 오온이 잠시간 가짜로 합해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의 나라는 그런 몸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 '일체법(一切法)은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상일(常一)의 아성(我性)이 무(無)라' 합니다.

 

일체 제법은 모두가 인연생으로서 어떤 법이나 단독으로 이루어진 법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무수한 인연, 인과 연이 합해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도 역시, 항상 하나인 아(我)의 성품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까, 제가 허두(虛頭)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통달무아법자 진시보살(通達無我法者 眞是菩薩)이라, 참다운 도인이나 보살은 내가 없다는 무아법(無我法) 즉, 내 몸도 참다운 것이 아니고 일체 만법도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법에 통달하면, 그때는 도인이요 보살입니다. 그만치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어째서 내 몸이 없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제가 누누이 말씀했습니다만 내 몸이라 하는 것은 각 원소(元素)가 잠시간 화합해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지은 업력(業力)을, 업력은 내나야 우리 마음에 붙은 여러 가지 우리 행위(行爲)나 훈습(熏習)된 것이 업력 아닙니까?, 이런 업력을 핵(核)으로 해가지고 무수한 인연이 모여서 각 원소가 되고 또 이렇게 조직된 세포가 몸이라는 말입니다.

 

불교말로 하면 지(地)·수(水)·화(火)·풍(風) 즉, 땅기운 · 물기운 · 불기운 · 바람기운이요, 물리학적인 술어로 말하면 산소나 수소, 질소, 탄소 같은 원소가 되겠지요. 이런 것이 우리 업(業)이라 하는 에너지를 핵으로 해서 이렇게 모여 구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구성되어진 몸은 잠시도 상일(常一)의, 이른바 항시 그대로 있는 몸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변화되어 갑니다. 세포라 하는 것은 어느 순간도 신진대사(新陳代謝)를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일초(一秒)전의 자기 몸과, 일초 후의 자기 몸이 똑 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단지, 우리 중생이 느끼지 못할 뿐이지 결국은 어떤 것이나 존재하는 것은 순간순간 변질되어 갑니다.

 

따라서 '항상 있는 어느 공간 속에 항상 존재하는 나' 라는 것은 결국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것을 못 보니까 있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내 몸은 그와 같이 지, 수, 화, 풍 사대(四大) 각 원소가 잠시간 업 따라서 이렇게 이루어져 있지마는, 그것도 역시 항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항상 하나로 있는 내 몸은 없다는 말입니다.

가사, 하나의 꽃이 피었다고 하면, 그 꽃이 하나의 원인 때문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공기나 수분이나 또는 태양광선이나 거름이나, 그러한 직접 원인과 또 간접으로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나 여러 가지 천지 우주의 모두가 다, 직접 간접으로 다 포함되어서 하나의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연생(因緣生)이라 할 때에, 말은 쉽습니다만 인연이란 말은 굉장히 의미 심중(深重)한 말인 것입니다. 인(因)과 연(緣)을 찾다보면 천지우주를 다 알아야만 인연(因緣)을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를 모르면 인연을 모르는 셈입니다. 우리 중생들이나 지금 현대 과학이나 물리학처럼 인연(因緣) 가운데 몇 가지 중요한 인연만 추려서 "무엇이 원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수없는 인연들이 잠시간 화합해서 이제 이런 꽃이 피었고 그것도 역시 순간순간 또 변질되어 갑니다. 항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꽃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흘러가는 물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고체(固體)인 바위도 역시, 우리 중생이 보면, 고체로서 이와 같이 딱 둥그런 바위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중생의 제한된 견해인 것이고, 바위를 구성한 각 원소(元素)를 보고 원자(原子)를 본다고 할 때에는 순간순간 변질되어가는 무상(無常)인 것입니다. 항상(恒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중생은 구조적(構造的)인 겉만 보니까 내용을 모릅니다. 내용을 보면 다 그때그때 변화하고 마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내가 없다 해도 말은 쉽지만 구성적(構成的) 내용을 모르면 집착을 끊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업장이 무거워서 말입니다.

우리는 ‘나(我)’라는 것을 이와 같이 아주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본다고 할 때는 차근차근 나에 대한 집착이 좀 끊어지겠지요.

'사람 몸에 있어서 이를 있다고 집착함을 인아(人我)라 하고 또는 일체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집착함을 법아(法我)라고 하는데, 사람 몸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지수화풍과 우리 마음을 구성한 감수하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의지작용, 분별하는 작용, 이런 오온(五蘊)이 잠시간 가짜로 화합되어 있으므로 항시 하나인 나의 몸이 없으며, 일체법은 모두가 인연 따라 이루어진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이것도 역시 항상 하나인 아(我)의 성품이 없다' 이렇게 아는 것이 불교의 초보인 셈입니다.

 

'내가 없다, 내가 비었다' 하는 것은 불교말로 해서 아공(我空)이라 하고, '일체법이 없다. 일체법이 비었다' 하는 것은 법공(法空)이라 합니다. 아공 법공을 깨달아버려야 도인(道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가 원래 비었다고 분명히 깨닫고, 일체법이 원래 비었다고 보아야만 비로소 깨달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조금 더 부연(敷衍) 설명하고 더 강조하기 위해서 도인들은 '내가 없다' 는 말씀을 종종 합니다.

여기, '내가 없다' 하는 굉장히 중요한 법문이 있습니다.

 

2. 지혜로 관찰[以慧觀之]

 

위무지혜고(爲無智慧故) 계언유아(計言有我) 이혜관지(以慧觀之) 실무유아(實無有我) 아재하처(我在何處) 두족지절(頭足支節) 일일체관(一一諦觀) 요불견아(了不見我) 하처유인급중생(何處有人及衆生) 중생업력(衆生業力) 가위공취(假爲空聚) 종중연생(從衆緣生) 무유재주(無有宰主) 여숙공정(如宿空亭)

- 지관(止觀) -

'위무지혜고(爲無智慧故)로 계언유아(計言有我)라,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계교(計較)해서 말한다.'

불교에서는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느끼는 것이 지혜가 있다고 말하고, 기억력은 좋고 하지만 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無智)인 셈입니다. 참다운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계교해서 말을 하는데,

'이혜관지(以慧觀之)컨대 실무유아(實無有我)라, 지혜로써 몸뚱이를 관찰하건대 실로 내가 있지가 않다. 그러면, 아재하처(我在何處)오, 나라는 것은 대체 어느 곳에 있는고?'

 

'두족지절(頭足支節)을 일일체관(一一諦觀)이라도 머리에서 발까지 뼈 마디마디를, 요불견아(了不見我)라, 일일이 하나하나 다 자세히 살펴서 관찰해 본다 하더라도, 마침내 나를 발견할 수가 없다'

'나' 라는 것이 머리에 있습니까, 발에 있습니까, 피부에 있습니까, 나다, 내가 좋다 내가 귀하다 내가 기분 나쁘다 이런 것이 머리에 보아도 없고, 발을 보아도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몸뚱이 어디에 보아도 나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곳에 있는가 하고, 머리부터 발까지 또는 뼈 마디마디 다 훑어 봐도 일일이 자세히 관찰해 본다 하더라도 마침내 나를 발견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처유인급중생(何處有人及衆生)이오, 어느 곳에 사람과 중생이 있는고?'

'중생업력(衆生業力)이, 가위공취(假爲空聚)라, 중생의 업력으로 해서, 잠시간 공 무더기가 되었다'

우리 과거세에 닦고 지어 쌓아 내려온 업력이 있고 또한 금생도 우리가 생활하는 것이 지금 업력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업력이란 것은 중생이 행동하는 기운입니다. 생각하면 그것이 남아 있고, 말하면 말하는 기운이 남아 있고, 그러한 기운을 업력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거품이나 마찬가지로 텅 빈 공(空)의 뭉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물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업력이 가짜로 잠시간 텅 빈 공의 뭉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종중연생(從衆緣生)이니, 무유재주(無有宰主), 여숙공정(如宿空亭)이라, 뭇 인연 따라서 생겨났으니, 그를 다스리고 주재하는 주인이 없는 것이 마치 빈 정자에 머문 것이나 같다' 고 합니다. 우리 몸은 지금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 업력이 인연 따라 일어나서 된 하나의 빈 집이나 똑같습니다. 다만 ‘내 몸이다’고 집착할 뿐입니다.

 

이 법문을 몇 십번이고 몇 백번이고 읽으면서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나' 라는 것 떼기가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 떼면 벌써 도인 안 되겠습니까?

여기에서, 중생업력 가위공취라, 중생이 업력으로 해서 가짜로 잠시간 공무더기가 되었다 하는 공무더기 즉, 공취(空聚)라는 말도 역시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현대 젊은이들은 원자구조론(原子構造論) 같은 것을 배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산소는 무엇인가? 또는, 수소는 무엇인가? 할 때에, 수소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 하나가 빙빙 도는 것입니다. 텅 빈 공간 속에서 하나의 광명파도(光波)가 이렇게 뚜렷이 돕니다. 이것이 내내야 공취라, 공무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말하자면 일체 존재의 가장 근원이 원자(原子) 아닙니까? 물론 그 밑에는 소립자(素粒子)가 되겠지요 마는, 원자 그것은, 원자핵(原子核)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가 도는 것인데,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에서 제일 거리가 먼 명왕성(冥王星)과의 거리보다도, 원자핵과 전자와의 거리 비율이 더 높고, 더 멀다는 것입니다.

일체 만유는 그런 원자(原子)가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여서 하나의 원소(元素)가 되고 또는 분자(分子)가 되고 해서 물질(物質)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사람 몸이나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실은, 공(空) 무더기가 모이고 모여서 일체 만유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가 하나 되면 수소이고, 여덟 되면 산소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경전에, 과학도 무엇도 없을 때에, 공취(空聚)라는 이런 말씀을 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그야말로 참, 감탄해 마지않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진리란 것이 벌써 거의 삼천 년전 옛날에 이와 같이 소상(昭詳)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지금 과학적으로 제아무리 따져본다 하더라도 흠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구조나 일체 만유의 구조에 있어서나 말입니다.

 

중생이나 우리 사람이 어디에가 있는가 하면, 중생의 업력(業力) 따라 갑니다. 업의 힘이 내나야 다 에너지, 힘 아니겠습니까? 가사 죽어지면 몸은 다 죽어버리지만 에너지가 남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식(識) 곧, 업식(業識)만 파장 따라서 자기 부모 태(胎)안에 붙어서 그것이 영양섭취해서 커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몸도 처음에는 한 점(點)에 불과합니다. 사람 눈에도 안 보이는 한 점이, 그것이 업식(業識)입니다. 그놈이 영양 섭취해서 커나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묘(奇妙)합니다. 그래가지고서 이제 공(空)을 모아서 산소도 모이고 수소도 모이고 각 원소들이 모여서 몸뚱이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그런 업력이 잠시간 텅 비어 있는 공을 모아서, 세포를 모아서, 여러 가지 인연 따라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업력 기운이 공 뭉텅이를 모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이것이 나의 몸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내 몸, 이것은 어떤 것인고? 하면, 무유재주(無有宰主)라는 것 입니다. 이것은 다스리고 주재(主宰)할만한, 내 것이라고 고집할만한 주인(主人)이 없다는 말입니다.

 

주인이 없는 것이 마치 비유하면, 여숙공정(如宿空亭)이라, 빈 정자에 머문 것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실은 주인이 없는 것인데 망상(妄想)으로 '나다, 내 것이다' 이렇게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실감(實感)이 잘 안 갈 것입니다. 따라서 몇 십번, 몇 백번 읽고 외워 보십시요. 그리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 보십시오. 그러면 조금 더 '분명히 내가 없는 것이구나' 하고 실감이 들 것입니다. 그러면 공부가 그 만큼 훨씬 더 익어진 셈입니다.

이 법문은 지관(止觀)이라는 천태지의(天台智의 538~597) 선사(禪師) 법문에 있는 말씀입니다.

 

3. 인간(人間)의 근원(根源)

 

형해지색(形骸之色) 사려지심(思慮之心) 종무시래(從無始來) 인연력고(因緣力故) 염념생멸(念念生滅) 상속무궁(相續無窮) 여수연연(如水涓涓) 여등염염(如燈焰焰) 신심가합(身心假合) 사일사상(似一似常) 범우불각지(凡愚不覺之) 집지위아(執之爲我) 보차아고(寶此我故) 즉기탐진치등삼독(卽起貪瞋痴等三毒) 삼독격의(三毒擊意) 발동신구(發動身口) 조일체업(造一切業)

- 원인론(原因論) -

 

그 다음 또 유사한 말씀이 있습니다.

'형해지색(形骸之色) 사려지심(思慮之心)이, 내 몸을 구성한 이런 색(色)이나, 생각하는 내 마음이나 이런 것이 무엇인고 하면'

형상이 있고 뼈가 있는 것이니까 역시 우리 몸뚱이를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우리 마음을 말합니다.

'종무시래(從無始來) 인연력고(因緣力故)로, 무시(無始)로 좇아오면서 인연의 힘인 고로'

 

무시란 처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디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끝도 갓도 없는, 한계 없는 시초부터서 인연의 힘인 고로, 인연이란 굉장히 의미심중한 말입니다. 일체법의 직접 간접 원인을 다 포함시킨 것이 인연입니다.

'염념생멸(念念生滅)하여 상속무궁(相續無窮)이라, 찰나찰나에 쉬지 않고 생(生)하고 멸(滅)하면서 서로 계속해서 다함이 없는 것이다'

 

염념(念念)은 생각생각 또는 순간순간 찰나찰나를 말한 것입니다. 내 몸이나 내 마음은 무엇인고 하면, 끝도 갓도 없는 오랜 옛날부터서 업력 기운이 조금도 쉬지 않고서 순간순간 죽었다 살았다 자꾸만 계속해 오면서, 끊어지면 무엇이 안 되어버릴 것인데 서로 상속(相續)해서 서로 계속해서 끊임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수연연(如水涓涓)이요 여등염염(如燈焰焰)이라, 마치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과 같고 마치 등불이 타올라가는 거와 똑같다'

 

하나가 떨어지면 물방울이겠지만 자꾸만 안 쉬고 떨어지면 비가 되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도 역시 세포 하나하나가 모였지만 이렇게 많이 모이니까 하나의 형체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몸이나 마음이 구성되는 것이, 물방울이 안 쉬고 떨어져 비가 되듯이 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거와 같습니다. 또한 엄밀히 보면 불꽃이 한번 타올라가고 그 뒤에 곧 타오르고 하는 것인데, 자꾸만 계속하니까 우리가 하나의 불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물방울도 방울방울 따로 있는 것인데 줄곧 계속하니까 하나의 물줄기로 보이고, 등불도 불꽃이 타오르고 또 타오르는 것인데 자꾸만 타오르니까 하나의 불꽃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횃불을 돌리 불 바퀴로 보이지요, 그것이 불 바퀴가 아닌데도 연속으로 빙빙 도니까 불 바퀴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도 각 세포가 모이고 모여 구성한 것인데, 이같이 많이 모이고 계속 움직이니까 하나의 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구성(構成) 문제요, 아주 깊은 철학적인 문제이니까 수십 번, 수백 번 읽으며 이것을 의지할수록 '정말로 무아(無我)구나' 이렇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신심가합(身心假合)하여 사일사상(似一似常)이라, 몸과 마음이 잠시간 화합(和合)되어서, 하나같고 항상(恒常)같다'

사실은 하나가 아니고 항상이 아닌데, 몸과 마음이 잠시간 합해있기 때문에, 하나같이 보이고 항상 같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을, '범우불각지(凡憂不覺之)하고 집지위아(執之爲我)라, 어리석은 범부는 이것을 깨닫지 못해가지고서, 집착해서 ‘나’라고 고집한다.'

마음과 몸이 잠시 모여지고, 또 몸은 내나야 각 공무더기가, 세포가 모인 것에 불과한 것이고 마음도 역시 마음의 흔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곳에서도 지금 마음이 안 보입니다. 달마(達磨)대사하고 2조(二祖) 혜가(慧可 487~593)대사하고 하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2조 혜가 스님이 "제 마음이 불안스럽습니다. 어떻게 좀 제도(濟度)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달마 스님이 "그러면 그대 마음을 내놓아 봐라" 하셨습니다.

 

불안스러운 마음을 아무리 찾아 봐도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 무슨 형체 가 있습니까?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한테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리 찾아봐도 불안스러운 마음이 없습니다." 달마 스님께서 "그러면 너를 제도해 마쳤노라" 하셨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어디에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에가 있습니까?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병(病)이 일어납니다. 마음병, 몸 병이 말입니다. 어리석은 범부가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해 가지고서, 이런 가짜로 임시간 화합된 그것을 깨닫지 못해 가지고서 이것을 '나다' 이렇게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보차아고(寶此我故)로 즉기탐진치등삼독(卽起貪瞋痴等三毒)이라, 이 내가 보배같이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곧,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 등 삼독심이 발동한다.'

한번 고집하면 나같이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살인죄나 무엇이나 탐심, 진심 모두가 결국은 내가 좋다고 생각되니까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나를 보배라고, 보배같이 생각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나한테 좋게 하면 탐심(貪心), 나한테 싫게 하면 진심(瞋心), 이러한 사리(事理)를 바로 못 보는 것이 치심(痴心) 아닙니까? 내가 있다고 하면은 바로 즉시에 내 소유(所有)라, 내가 있으면 내 집이 있고, 내 아내가 있고, 내 동생이 있고, 모두 다 내 것이라고 합니다. 너무 애착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이것은 독심(毒心)입니다. 범부는 그것이 독한 마음인 줄 모릅니다. 독심, 그것은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칩니다. 자기 몸도 해칩니다.

 

'삼독격의(三毒擊意)하여, 발동신구(發動身口)하고, 조일체업(造一切業)이라, 삼독심<탐심, 진심, 치심>이 우리 마음을 더욱더 자극하여 우리 몸과 입으로 발동(發動)을 일으키고, 일체 업을 짓는다'

미워지면 때릴려고 하겠지요, 미워지면 죽일려고 하겠지요, 욕설도 하고 말입니다. 그래가지고서 우리가 일체 업장(業障)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원인론(原人論)이라 하여, 인간의 근원을 위대한 도인인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 선사가 말씀한 것입니다.

 

저는 경론(經論)을 많이 안 봤습니다마는, '내가 없다' 는 말씀을 한 경론 가운데서 이같이 절실하게 말한 대문은 별로 못 보았습니다.

 

한 번 더 제가 설명합니다.

'사람 몸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인아(人我)라 하고, 일체 만법에 있어서 이것이 있다고 집착함을 법아(法我)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 몸은 물질과 정신인 색, 수, 상, 행, 식 오온인데, 이러한 것이 가짜로 잠시간 화합되어 있는 것이 몸이므로 항상 하나인 내 몸의 체(體)가 있을 리가 없으며, 일체 만법은 모두가 무수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되었으므로 이것도 역시 항상 하나의 아(我)라는 성품이 원래 없다'

 

이러한 것을 느끼는 것이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는 말입니다. 아공, 법공을 느껴야 비로소 공부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었다는 아공을 느끼고서 법공을 못 느끼면, 소승(小乘)이고, 대승(大乘)은 아공, 법공을 다 느껴야 대승인 것입니다.

 

그 다음 법문은,

'참다운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계교하고 집요하게 고집한다. 그러나, 지혜로써 이것을 관찰하건대 정말로 내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 나라는 것이 대체 어느 곳에 있는가? 해서, 머리부터 발까지 마디마디를 일일이 세밀하게 자세히 관찰해 보아도 마침내 나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느 곳에 사람이나 또는 중생이 있는고? 이것은 중생의 업력으로 해서 잠시간 공의 무더기를 각 세포를 만든다.'

 

저번에 말씀마따나, 천지창조 역시 중생의 업으로 해서 만든 것입니다. 불경에서 보면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이라, 하나의 중생이 아니라 무수한 중생의 생각하는 생명의 힘 즉, 공업력이 모이고 모여서 원자를 만들어 가지고서 천지우주가 이루어집니다.

'잠시간 공무더기가 되어가지고서 여러 가지 인연 따라서 태어났다. 따라서 사실은 주인이 없는 것이 마치 텅 빈 정자(亭子)에 머문 것이나 같다'

우리는 설사 고집을 한다 하더라도, 역시 주인이 없는 정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실인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집착이 안 생기겠지요.

 

그 다음 법문입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이런 몸뚱이나, 또는 생각하는 마음이나 이런 것은 무엇인고 하면, 끝도 갓도 없는 과거로부터서의 인연의 힘 때문에, 찰나찰나 생하고 멸하면서 끝없이 서로 이어 왔다. 마치 그것은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거와 같고, 또는 마치 불꽃이 염염이 타오르는 거와 같다. 이같이, 몸과 마음이 잠시간 화합되어서 하나같이 보이고 또는 항상 있는 것같이 보이니까, 어리석은 범부가 이것을 깨닫지 못해가지고서 이것을 나라고 고집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내가 보배롭고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곧,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이나 이런 삼독심을 일으킨다. 삼독심이 다시 또 우리 의식을 격발(擊發)시켜서, 우리 몸이나 입으로 발동해서 일체 업장을 짓는다.'

 

이렇게,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이제 내가 없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렇더라도 역시, 우리는 좀체 나를 못 뗍니다. 역시 내가 중요하니까 말입니다.

 

 

 

 

 

 

제4절 삼법인(三法印)

 

1. 연기법(緣起法)의 입장에서 본 인생의 실상(實相)

        

     

  ․․․․․ 

의 

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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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에서 인생의 실상을 볼 때는 불교의 특징인 3법인(三法印), 불교의 상징적인 인계(印契 Mudra)가 3법인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든 있는 것은 다 무상하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 무상한 존재는 필연적으로 무아라, 나라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일체 존재가 시간적으로 본다면, 같은 시간에 같은 존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티끌이나 단단한 금이나 모두가 시간이 경과되어서 다른 시간에 같은 모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베르그송(Bergson 1857-1941)같은 분도 순수지속(純粹持續)을 말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같은 시냇물에 다시 발을 담길 수가 없다" 물이 흘러가는데 한번 담그면 그 물은 흘러가 버리고 다른 물이 오겠지요.

이와 같이 모든 제행은 조금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생 ․ 로 ․ 병 ․ 사(生老病死)요. 천지 우주는 성 ․ 주 ․ 괴 ․ 공(成住壞空)이요. 일체 만유는 생 ․ 주 ․ 이 ․ 멸(生住異滅)이라, 이와 같이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인 것을 중생이 잘못 보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개고(一切皆苦)라, 모두가 인생고가 됩니다.

 

시간적으로 무상한 도리를 우리가 막을 수가 없고 공간적으로도 나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체념하고 달관하면 좋은데,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고가 생기는 것입니다. 집이 내 것이겠습니까, 무엇이 내 것이겠습니까,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내 것이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합해진 무상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런 범주 내에서는 우리가 인생고를 떠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사제(四諦) 법문 가운데 고(苦)와 집(集)입니다. 무명에서 일어난 자기라는 아(我)가 있으면 탐욕심과 분노심이 있겠지요. 그러므로 업을 짓고 따라서 고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잘 모르고 집착할 때는 인생고는 필연적으로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인생의 생 ․ 로 ․ 병 ․ 사를 사무치게 느껴서 유성출가(踰城出家)하고 육사외도(六師外道)를 방문한 것이겠지요.

만약 우리 인간이 근원적으로 제행무상이나 제법무아의 도리를 모르는 미망심(迷妄心)밖에 없을 때는 출가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해탈의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막는다 하더라도, 누가 만류하고 방해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해탈의 길로 안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석가모니께서 나오시기 전에도 이미 바라문교나 다른 종교나 모두가 다 몸부림치며 인생고를 떠나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도 내내야 마찬가지입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이른바 생멸(生滅) 멸이(滅已)해서, 번뇌를 다 없애고 참다운 영생불멸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적멸(寂滅)을 이룬 경계가 해탈의 이상경계라는 말입니다.

삼법인이란 불교의 근본교의(敎義) 핵심으로서 일정불변한 진리의 표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삼법인으로써 불설(佛說)과 마설(魔說)을 판정하는 인(印)으로 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