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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11. 4. 선(禪)의 자세(姿勢)

11. 4. 선(禪)의 자세(姿勢)

 

1) 정혜균등(定慧均等)

 

1) 일상삼매(一相三昧)…혜(慧)…관(觀)(여묘포서如猫捕鼠)

진여삼매(眞如三昧)

2) 일행삼매(一行三昧)…정(定)…지(止)(여계포란如鷄抱卵)

 

정(定)과 혜(慧)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선(禪)이나 삼매(三昧)나 같은 뜻으로 삼매를 총괄해서 백팔삼매(百八三味)라고도 하고 또 포괄적으로 말할 때는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제도 대체로 살펴본 바와 같이 달마 대사의 이입사행(理入四行)도 따지고 보면 일상삼매 일행삼매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달마의 이입(理入) 즉, 본래 일체만유와 불성(佛性)이 둘이 아니라는 원리에 들어가는 것은 지혜(智慧)고 일상삼매입니다. 천지 우주 모두를 하나의 부처로 보는 것이 이른바 일상삼매입니다.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천차만별로 두두물물 구분하면 일상(一相)이 못되겠지요. 오직 부처라는 불성 일상(一相)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상(相)은 우리가 상을 내는 상이 아니라 우주를 하나의 성품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지혜적이고 이른바 관(觀)이 됩니다.

 

어느 행법에 치우친 사람들은 관법(觀法)이 외도라고 합니다. 저는 관법만 좋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만 어느 분은 저더러 애는 퍽 쓰는데 관법 외도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관은 바로 부처님 반야(般若)를 관조(觀照)한다는 말입니다. 또는 『관심론(觀心論)』 허두에 이른바 '관심일법이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찰하는 법이 모든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화두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원리적으로는 관(觀)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는 잘 알고 해야 하는 것이지 잘 모르면서 피상적으로 비판해서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런 것은 하나의 구업(口業)이 되겠지요.

 

따라서 일상삼매(一相三昧)는 혜적(慧的)이고 관적(觀的)이란 말입니다. 관도 그냥 땅을 보고 하늘을 보는 그런 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성(自性)을 보는 관이요 혜도 보통 분별지혜가 아니라 반야지혜(般若智慧)입니다.

 

『육조단경』 부촉품에 일상삼매 일행삼매가 있고 4조 도신(道信) 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가 나와 있습니다. 또는 5조 말씀에도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불경이나 조사어록이나 공부하는 방법이 다 정(定)과 혜(慧)로 포괄이 됩니다. 혜(慧)를 삼매분상에서 말할 때에 일상삼매인 것이고 정(定)은 일행삼매입니다. 일행삼매는 일상삼매라는 혜 경계를 놓치지 않고서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지속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정과 혜가 쌍수(雙修) 곧, 아울러 닦아야만 정혜균등(定慧均等)으로서 가지런히 조화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거니, 부처 가운데는 정과 혜가 구족원만(具足圓滿)이거니, 우리 공부도 그렇게 상응(相應) 조화해 나가야 계합(契合)이 빠른 것입니다.

삼매(三昧)가 발득(發得)이 못되는 것이 정혜(定慧) 불균등(不均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칠각지(七覺支) 법문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공부가 지금 정과 혜가 균등히 조화가 되는 것인가? 조화가 된다면 혼침(惽沈)도 도거(掉擧)도 점차로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이러한 자세를 ‘여묘포서(如猫捕鼠)’라,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찰나도 한눈팔지 않고, 눈도 깜짝 않고서 쥐만 노려보는 것처럼 화두를 참구할 때나 염불할 때나 눈도 깜짝 않고서, 마음이 한눈팔지 않고 그 자리만 생각하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튼 마음이 없이 그 자리만 관조(觀照)하고 참구하는 것을 ‘여묘포서’라고 조사어록에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계포란(如鷄抱卵)’이라,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한다는 뜻입니다. 닭이 계란을 품어서 부화(孵化)시킬 때는 21일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21이나 7이나 굉장히 심심미묘한 수치(數値)인 것입니다. 21일 동안에 계란이 부화되는데 닭이 경망해서 계란을 품고 있다가 며칠 안 되어서 풀떡 일어나 버리면 되겠습니까? 따스한 온기로 훈습을 시켜서 적당한 온도가 되면 계란의 생명이 차츰 무르익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줄탁동시(啐啄同時)’라, 그 안에서 생명이 발육이 되어 곧 나가야겠다고 미묘한 신호를 보내면 동시에 어미닭이 껍질을 쫍니다. 시기가 딱 맞아서 병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어미 닭이 쉼 없이 계속 품고 있었기에 되는 것입니다.

 

참선 좀 하다가는 한 해나 했다고 해서 '내가 무던히 했는데' 그리고서 기분이 좀 좋으면 그만 둔다든가 또는 마음이 약간 열려서 몸도 마음도 공중에 뜨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이것이 깨달음인가보다고 훌쩍 자리를 떠나고 '그대 공부가 아직 멀었다'고 충고해도 선방을 떠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행삼매(一行三昧)’가 못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전보원(甫泉普願 748~834) 선사도 30년 동안 산에서 안 나온 선지식입니다. 달마 대사도, 물론 교화를 위해서지만 소림굴에서 9년간 있었습니다. 일행삼매를 진득하니 못하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 삼명육통(三明六通)하는 분들이 거의 안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출가사문은 한사코 정해탈(定解脫) 곧, 선정해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야 재주가 있고 구변 좋고 경 많이 외우고 위풍이 늠름하면 충분히 도인으로 대접받을 수도 있겠지만, 선정해탈(禪定解脫)은 오랫동안 삼매에 들어앉아야 되는 것입니다. 닭이 계란을 품듯이 진득하니 오랫동안 앉아야 합니다.

 

우리 참선 수행자들 정말로 명심을 하여야 합니다. 선방에서 공부하다가 방선(放禪)죽비 치면 나와서 잔소리나 하고, 그러면 안하는 것보다는 낫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공부가 익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방선해서 일어날 때도 안상(安詳)이라, 우리 수좌나 부처님 거동은 안상이라, 조용하고 점잔하고 사뿐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본체에다 머무르고 있는 그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도 하마 그 마음이 흐트러질 새라 소중하니 가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보임(保任)입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익어져서 병아리가 나오듯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자성(自性)을 깨닫는 이른바 생사대사(生死大事)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우리 번뇌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지금 닦아나가는 우리 진지한 수행자들은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번뇌가 얼마나 지겹고 무거운가 말입니다.

2) 제경론(諸經論)의 일행삼매(一行三昧) 법문

 

* 일행삼매자(一行三昧者)는 유전일행(惟專一行)하야 수습정정야(修習正定也)

“삼장법수4(三藏法數四)”

<일행삼매라는 것은 오로지 마음을 하나로 행(行)하여 닦아 익히는 바른 선정(禪定)이다.>

 

* 법계일상(法界一相) 계연법계(繫緣法界) 시명일행삼매(是名一行三昧) 내지(乃至) 입일행삼매자(入一行三昧者)는 진지항사제불법계(盡知恒沙諸佛法界) 무차별상(無差別相)이라.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

<이것이 천태(天台)의 사종삼매(四種三昧)의 하나인 상좌삼매(常坐三昧)의 내용이고, 선종(禪宗)에서는 좌선(坐禪) 그것이라고도 함>

 

*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 욕입일행삼매(欲入一行三昧)인댄 응처공한(應處空閒)하야 사제란의(捨諸亂意)하고 불취상모(不取相貌)하며 계심일불(繫心一佛)하야 전칭명자(專稱名字)하면서 수불방소(隨佛方所)하야 단신정향(端身正向)하되 능어일불(能於一佛)이 염념상속(念念相續)하면 즉시(卽時) 염중(念中)에능견과거미래현재제불(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이라.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

 

* 의시삼매고(依是三昧故)로 즉지법계일상(卽知法界一相)일새 위일체제불(謂一切諸佛)의 법신여중생신(法身與衆生身)이 평등무이(平等無二)라 즉명일행삼매(卽名一行三昧)니 당지(當知)하라 진여시삼매근본(眞如是三昧根本)이라.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 혜능(慧能)은 일행삼매자(一行三昧者) 어일체처행주좌와(於一切處行住坐臥) 상행일직심시야(常行一直心是也) ‘육조단경정혜품(六祖壇經定慧品)’

<약어일체처(若於一切處)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순일직심(純一直心)이 부동도량(不動道場)하면 진성정토(眞成淨土)니 차명일행삼매(此名一行三昧)라.>

<차(次)에 사(事)의 일행삼매(一行三昧)는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이명(異名)으로 일심(一心)으로 염불(念佛)함을 운(云)함.>

 

* 약어일체처(若於一切處)하되 이부주상(而不住相)하고 어피상중(於彼相中)하되 불생증애(不生憎愛)하며 역무취사(亦無取捨)하고 불념이익성괴등사(不念利益成壞等事)하야 안한념정(安閒恬靜)하면 허융담박(虛融澹泊)할새 차일행삼매(此一行三昧)라.

‘육조단경부촉품(六祖壇經咐囑品)’

* 일상(一相)이란 소위(所謂) 무상(無相)이라.

“지도론27”

* 일상(一相)이란 관적(觀的)이요 일행(一行)이란 염적(念的)이다.

“금강심론(金剛心論)”

* 가령(假令) 무변허공(無邊虛空)에 정수(淨水)가 충만(充滿)한데 일체(一切)는 포말(泡沫)이라 관(觀)함은 일상삼매(一相三昧)요 염(念)함은 일행삼매(一行三昧)며

“금강심론(金剛心論)”

 

* 무수중생(無數衆生)의 무상제행(無常諸行)을 미타(彌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이라 관(觀)함은 일상삼매(一相三昧)요 염(念)함은 일행삼매(一行三昧)다.

그리하야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의 근본(根本)은 일(一)이오 근본(根本)을 구색(求索)하는 방법(方法)은 한(限)이 없다.

“금강심론(金剛心論)”

* 마음을 일경(一境)에 주(住)하야써 관이염지(觀而念之)하면 가관적(假觀的) 일상삼매(一相三昧)가 인(因)이 되야 과(果)의 실상(實相)을 견(見)하고 염수적(念修的) 일행삼매(一行三昧)가 인(因)이 되야 과(果)의 보현경(普賢境)을 증(證)하니라.

“금강심론(金剛心論)”

* 아차법요(我此法要) 의릉가경(依楞伽經)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 우(又) 의문수설반야경(依文殊說般若經) 일행삼매(一行三昧) 즉(卽) 염불심시불(念佛心是佛) 망념시범부(妄念是凡夫)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 도신장(道信章)’

 

* 지혜관조(智慧觀照:般若觀照) 내외명철(內外明徹) 식자본심(識自本心) 즉본해탈(卽本解脫) 즉시반야삼매(卽是般若三昧) 즉시무념(卽是無念)

‘육조단경(六祖壇經)’

 

*신회(神會)는 시무념자(是無念者) 즉시반야바라밀(卽是般若波羅蜜) 반야바라밀자(般若波羅蜜者) 즉시일행삼매(卽是一行三昧)

‘남종정시비론(南宗定是非論)’

 

* “법계일상(法界一相) 계연법계(繫緣法界)”라 함은 전우주(全宇宙)를 일체(一體)로 하여 전인격적(全人格的)으로 행도(行道)하는 것. 이 2도(二道)는 불타(佛陀)의 원시경전(原始經典)에 계합(契合)된다.

 

* 불타(佛陀)에 있어서는 달마(達磨)를 행(行)하는 것이나 여래(如來)를 억념(憶念)하는 것이나 동일(同一)하며 선정(禪定)과 염불(念佛)과는 동일(同一)하다.

‘조선당3집 97쪽’

 

* 약돈오자심(若頓悟自心) 본래청정(本來淸淨) 원무번뇌(元無煩惱) 무루지성(無漏智性) 본자구족(本自具足) 차심즉불(此心卽佛) 필경무이(畢竟無二) 의차이수자(依此而修者) 시최상승선(是最上乘禪) 역명여래청정선(亦名如來淸淨禪) 역명일행삼매(亦名一行三昧) 역명진여삼매(亦名眞如三昧) 차시일체삼매근본(此是一切三昧根本)

‘도서(都序)’

 

* 일행삼매(Ekavyuha-Samadhi) 또는 일상삼매

일장엄삼매(一莊嚴三昧) : 전우주(全宇宙)의 온갖 물심(物心)의 현상(現狀)은 평등(平等)하고 한 모양인 줄을 관(觀)하는 삼매(三昧). 지도론47에 일체만유(一切萬有)의 차별상(差別相)에서 제법일미동체(諸法一味同體)의 상(相)을 관(觀)하는 삼매(三昧). 이것이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이름하게 된 까닭.

진여삼매(眞如三昧 :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진여평등(眞如平等)의 이치(理致)를 관(觀)하는 삼매(三昧)라고도 함.

* 진여삼매자(眞如三昧者) 부주견상(不住見相) 부주득상(不住得相) 내지(乃至) 출정역무해만(出定亦無懈慢) 소유번뇌(所有煩惱) 점점미박(漸漸微薄)

“기신론(起信論)”

 

* 일행일체행(一行一切行) : 일일행중(一一行中)에 일체행(一切行)을 구(具)함을 원행(圓行)이라 운(云)함. 화엄(華嚴) 천태(天台)의 제종(諸宗)에서 세운 묘행(妙行)이 총(總)히 시(是)이다.

“불교학대사”

 

3) 사종삼매(四種三昧)

 

삼매(三昧 : Samᾱdhi)는 삼마제(三摩提), 정(定), 정수(正受), 조직정(調直定), 정심행처(正心行處), 식려응심(息慮凝心)이라 번역함.

 

1) 상좌삼매(常坐三昧)

2) 상행삼매(常行三昧) … 반주삼매(般舟三昧)

3)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

4)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

그 다음에 사종삼매(四種三昧)라,

‘선(禪)’이라는 말과 ‘삼매(三昧)’라는 말을 우리는 꼭 외워 두어야 합니다. 불교를 말할 때는 꼭 ‘삼매’라는 말과 ‘선’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또 앞으로 두고두고 문제가 많이 될 것입니다. 삼매(三昧)라는 말은 지금 인도의 힌두교나 다른 종교에서도 많이 말씀을 합니다.

삼매는 ‘사마디(Samādhi)’라 하는 말인데 보통 ‘삼마제(三摩提)’라고 한문 음을 붙여서 말합니다만 간추려서 ‘삼매(三昧)’라고 합니다.

삼매 이것은 쉬운 말로 하면 우리 마음을 한 곳에 딱 머무르게 한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잡념이 없이 하나의 것에만 몰두한단 말입니다.

하나의 것에만 몰두하는 것이 삼매요, 근원은 우리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해서 산란스러운 마음이 없게 하는 것이 삼매입니다.

보다 더 확실히 말하면 우리 마음을 정법(正法) 즉, 바른 법에 머물게 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삼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선(參禪) 하면 삼매가 되겠지요. 따라서 그런 때는 참선(參禪)에서 말하는 선(禪)이나 삼매(三昧)나 거의 같은 뜻입니다. 분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누어서 이런저런 말을 합니다만, 내나 거의 같은 뜻입니다.

삼매 이것을 번역하면 ‘정(定)’이라, 우리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해서 움직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다음은 ‘정수(正受)’라, 모든 사물을 바로 바르게 감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바로 감수를 못합니다. 자기 업장에 따라서, 업에 여과(濾過)되어서 즉, 업에 걸려서 감수(感受)합니다. 따라서 판단을 바르게 못 합니다.

우리 마음이 맑으면 만상(萬象)을 바로 다 비추어 볼 것인데, 마음이 맑지 못하고 흐려놔서 만상을 바로 비추어 보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을 왜곡(歪曲)시켜서 만상을 수용(受用)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수용하는 것이 정수(正受)입니다.

 

또 한 가지는 ‘조직정(調直定)’이라, 우리 마음을 조화시키고 구부러진 마음을 곧게 하는 공부가 삼매입니다.

또 한 가지는 ‘정심행처(正心行處)’라,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을 바른 정법에 딱 머물게 한다는 말입니다.

‘식려응심(息慮凝心)’이라, 잡다한 생각을 쉬고서 우리 마음을 한 군데 머물러 엉기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삼매의 뜻 풀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매에는 어떠한 삼매가 있는가?

 

‘상좌삼매(常坐三昧)’라,

항상 앉아서 하는 삼매입니다. 우리가 선방에서 하는 것은 주로 상좌삼매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삼매는 앉아서 하는 것만이 삼매는 아닙니다. 사람의 행습이나 습관이 다르고 개성이 달라놔서 어떤 사람은 앉기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걷기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부처님 이름 외우기를 좋아하고, 그와 같이 차이가 많이 있어놔서 한 가지만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하는 기본적인 것은 역시 앉아서 하는 삼매입니다.

 

그 다음은 ‘상행삼매(常行三昧)’라,

항상 서서 하는 삼매입니다. 도량이나 부처님 주위를 뱅뱅 돌면서 하는 삼매입니다. 우리는 절에 가면 탑돌이 같은 것을 합니다. 또한 법당에서도 이따금 부처님 주위를 뱅뱅 돌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상행삼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앉기만 하면 다리도 아플 것이고 또 앉는 버릇을 못 붙인 분은 잘 안됩니다. 그런 분들은 산책하면서 합장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워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상행삼매를 다른 이름으로 ‘반주삼매(般舟三昧)’라고도 말합니다. 반주삼매라는 말은 ‘불립삼매(佛立三昧)’라, 부처가 앞에 서서 나타나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법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일주일 동안을 한계를 두고서 하는데, 옷도 하루에 한번 이상 갈아입고, 목욕도 하루에 한번 이상 하고, 누구하고 말도 전혀 않고, 음식도 하루에 오전에 한번만 먹고, 간식도 안 먹고, 이렇게 하면서 자지 않고 눕지 않고, 부처님 주위나 도량 주위를 이레 동안 안 쉬고 돌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찰나도 틈도 없이 이렇게 하면은, 웬만한 사람 같으면 7일 만에 반드시 부처님이 척 보인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이시는 것은 사람 모양을 한 모습만으로는 아니겠지요. 부처님의 무량광명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호기심 있는 분들은 한번 해보십시오.

그런 때에 부르는 이름은 '보보성성염념 유재아미타불(步步聲聲念念 唯在阿彌陀佛)이라,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 오직 걸음걸음, 소리소리, 생각생각에 아미타불이요,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입니다.

걸음 걸을 때 한 걸음도 놓치지 않고서 염불하는 마음, 또 소리마다 염불하는 소리, 한 순간도 다른 생각이 없이 염불하는 생각, 이와 같이 오직 아미타불만 왼다는 말입니다. 아미타불 대신에 관세음보살도 무방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려면 적어도 이렇게 한 번씩은 해봐야 합니다.

중국의 선도(善導 613~681) 스님은 승려가 된 뒤에 평생 동안을 한 달에 7일씩 꼭 이렇게 하면서 살아갔습니다. 따라서 그 분은 평소에 앉으면 극락세계가 훤히 보였다는 것입니다. 참선공부 하려면 꼭 이와 같은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나 우리가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그 뜻도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이란 경에 의거해서 우리도 한번 해본다는 의미로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기가 약하니까 관용해서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합니다만 원칙은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옷도 하루에 한번 이상 갈아입고, 목욕도 하루에 한번 이상 하고, 누구하고 말도 전혀 않고, 음식도 하루에 오정에 한번만 먹고, 간식도 안 먹고, 이렇게 하면서 자지 않고 눕지 않고. 인간은 참 허망합니다. 허망한 인간인 우리가 기왕 성불하려면 이와 같이 힘든 고비는 몇 번이나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항상 앉고, 항시 걷기가 어려운 사람은 또 근기에 맞추어서 ‘반행반좌(半行半坐)’라, 반쯤은 걷기도 하고 반쯤은 앉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 그것도 하기 어려운 사람은 자기 마음 따라서 더러는 걷기도 하고 더러는 앉기도 하는 ‘비행비좌(非行非坐)’라, 걷는 것도 아니고 앉는 것도 아니면서 삼매 공부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공부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꼭 어느 것이 옳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화두하는 참선이나, 묵조선이나, 이런 사종삼매나, 모두가 다 어떤 하나만이 옳다고 고집하면 벌써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불법은 모든 것을, 모두를 다 포함했기 때문입니다. 불법은 이슬람식이나 또는 기독교식이나 다 포함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만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자기한테 맞는 것을 골라서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골라서 하되, 아까 말씀마따나, 반주삼매 또는 불립삼매라, 부처가 턱 눈앞에 나타나는, 그런 정도의 삼매를 한번 용맹스럽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 삼동(三冬)은 안자고 안 눕는 것도 겨우 끝에 가서 이틀만 하기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용맹정진 기간 중에는 시설도 좀 더 잘 꾸며서 꼭 이와 같이 반주삼매를 모범 삼아서 한다고 생각할 때는 틀림없이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는 많은 분들이 나오시리라고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4) 좌선(坐禪)의 방법(方法)

 

제일 소중한 공부하는데 피로도 모르고 또는 하기 쉬운 좌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말입니다. 먼저 앉는 것이지요. 다리 모양은 좌체우용(左體右用)이라. 그런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좌체는 근본 체에 해당하고 오른편은 쓸 용(用)자, 우용이라 용에 해당한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이쪽은(왼편) 가만히 있고 이쪽은(오른편) 활동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좌선은 가만히 있어야 하기 때문에 활동을 우리가 이제 정지하고서 조용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움직이지 않는 왼쪽으로 움직이려는 오른쪽을 꽉 눌러야 한단 말입니다. 이것은 쉽습니다.

불교말로 이것을 길상좌(吉祥坐)라. 길상좌란 말은 아주 그야말로 상스럽고 좋다는 말이 길상(吉祥) 아닙니까. 길할 길(吉)자, 상스러울 상(祥)자, 이것은 길상좌라! 이렇게 하는 것은 보통 쉽습니다.

 

또는 항마좌(降魔坐)라. 마치 마구니를 최파하는 앉는 자세로 항마좌라!

왼발로 오른발을 딱 누르는 것은 고요한 정(靜)으로 해서 동(動)을 움직이는 동을 딱 누르기 때문에 항마좌라, 참선할 때는 활동하는 것 보고 마(魔)라 합니다. 활동을 해서는 안 되니까 말입니다.

 

금생(今生)에 너무 분별시비(分別是非)하고 활동(活動)을 너무 많이 해서 그때는 우리 번뇌(煩惱)가 많은 것인데 우리는 근본(根本)으로 회귀(回歸)하는, 근본으로 가는 길에 있기 때문에 내내야 근본 고향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동하지 않는, 정으로 이렇게 동을 딱 누른단 말입니다. 이것이 항마좌라. 마구니를 이렇게 딱 눌러서 항복을 받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이것은 쉽습니다만 원래 근본 된 가부좌는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복잡하게 오른 발을 왼쪽 허벅지에 이렇게 딱 누릅니다. 그리고 왼발을 오른쪽발 위에 올려서 딱 누릅니다. 행습이 되면 이 모습이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만 앉아 놓으면 우리 척추가 절로 펴지고 참 좋은 것이지만 대체로 우리 한국인은 다리가 짧아서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정소슬로(頂巢膝蓾) : 선정삼매에 들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니 새가 날아와서 머리 위에다 둥지를 틀고 땅에서 자라난 풀이 살을 뚫고 위로 솟아난 것을 가리킨다.

5. 선정(禪定)의 십종공덕(十種功德)

 

1) 안주의식(安住儀式)2) 행자경계(行慈境界)

3) 무번뇌(無煩惱)4) 수호제근(守護諸根)

5) 무식희락(無食喜樂)6) 원리애욕(遠離愛慾)

7) 수선불공(修禪不空)8) 해탈마견(解脫魔羂)

9) 안주불경(安住佛境) 10) 해탈성숙(解脫成熟)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

 

여기에는 돌아가셔서 선을 지도할 만한 선생님도 계시는 모양이니까 선(禪)의 공덕에 대해서 대강 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선이 자기 성취의 최상의 길입니다만 또한 구체화 시켜서 선의 공덕(功德)을 대강 알아야만 선이 좋다는 것을 더욱더 역설할 수가 있겠습니다.

선정(禪定)을 닦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공덕을 열 가지로 말한 것입니다. 선정에는 무량공덕이 있고 종당에는 다 성불이 되겠지마는, 우선 이와 같이 공덕을 나누어서 간추린 것입니다.

 

한 가지는 ‘안주의식(安住儀式)’이라,

이것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가 참선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우리 몸이 정화되고 마음이 안정되어서 우리 행동이 얌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안온한 행동을 취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행자경계(行慈境界)’라,

선정을 닦으면 자비심(慈悲心)이 많아집니다. 우리 행동이 거칠면 자비심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만 선을 닦으면 우리 생리가 정화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관계상 저절로 자비심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자비심을 스스로 내는 경계가 행자경계입니다.

 

다음은 ‘무번뇌(無煩惱)라,

번뇌가 없다는 말입니다. 탐(貪), 진(瞋), 치(痴) 삼독심(三毒心)은 역시 우리 생리나 마음이 정화가 안 되어서 발동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하면 저절로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이 발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번뇌입니다. 번뇌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수호제근(守護諸根)’이라,

참선하면 자연적으로 우리의 6근(根)인 눈, 귀, 코, 입, 몸, 뜻을 보호해서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감각들을 바른 방향으로 유도한다는 말입니다.

 

부설(浮雪) 거사(居士) 게송(偈頌)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설거사는 거사로서는 아주 위대한 분 아닙니까,

'목무소견무분별(目無所見無分別)이요'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분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소견(所見)으로 보지 않아 분별이 없고,

'이청무성절시비(耳聽無聲切是非)라' 우리 귀로는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소리에 대한 시비(是非)를 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선(禪)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시비나 어떤 분별은 내기가 싫은 것입니다. 또 저절로 낼 수가 없게 됩니다.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 가니 무슨 시비를 내겠습니까? 눈에는 보이는 소견에 따른 분별이 없고, 또 우리 귀는 무슨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좋다 궂다 하는 시비를 안 낸다는 말입니다.

'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放下)하고' 분별이나 시비를 다 놓아버리고서,

'단간심불자귀의(但看心佛自歸依)라' 다만 자기 부처한테 귀의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공부하는 분들은 이래야 합니다. 눈으로 보아도 분별을 안내고, 귀로 들어도 시비를 안 느끼고, 다 놓아버리고서 오직 부처한테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성불을 합니다. 그런 경계가 수호제근(守護諸根)입니다. 우리 6근(根)을 다 청정한 쪽으로 보호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무식희락(無食喜樂)’이라, 안 먹어도 희락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우리 범부가 생각할 때 사람의 행복은 잘 먹고 의식(衣食)이 좋고 모두 그런 것을 행복으로 느낍니다만 실은 그런 것은 욕계 번뇌가 끼어 있을 때의 말입니다. 번뇌가 떨어졌을 때는 음식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참선하면 ‘경안(輕安)’이라, 자기 몸도 가뿐하고 마음도 가볍습니다. 자기 몸과 마음에 별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선에서 조금 힘을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득력(得力)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런 경계가 지나가면 그때는 ‘희락지(喜樂地)’라, 기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한없는 환희심을 느낍니다. 그때는 그냥 감사해서 눈물이 주룩주룩 나올 정도로 환희심을 느낍니다. 따라서 이런 경안을 얻어 몸도 마음도 가뿐하여 아무 부담 없이 상쾌하고, 그와 동시에 희락지라, 희락을 느끼면, 그때는 음식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이성(異性), 음식(飮食) 또는 지위(地位)에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 먹어도 희락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원리애욕(遠離愛慾)’이라,

이성간의 사랑이나 모든 애욕(愛慾)을 다 떠나버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조금 무미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무미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선(禪)을 닦아 얻는 행복은 어디다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수선불공(修禪不空)’이라,

비록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느끼고 우리가 공을 닦는다 하더라도, 공관(空觀)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공관에 사무치고 참선에 사무치면 다만 공에 머물지 않고서 참다운 진공묘유(眞空妙有)라, 영원적인 불성(佛性)을 우리가 본다는 말입니다. 공(空)을 말로만, 추상적으로 말할 때는 공에 치우칩니다만 닦아서 얻은 공은 공에 안 치우칩니다. 바로 진공묘유, 불성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닦으면 수선불공이라, 우리가 공에 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해탈마견(解脫魔羂)’이라,

마구니의 그물을 다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좋다 궂다 또는 없다 있다 하는 여러가지 우리의 욕망, 이런저런 번뇌의 얽힘이 마견(魔羂)인데, 그런 마견을 다 벗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마구니의 걸림을 우리가 다 해탈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은 ‘안주불경(安住佛境)’이라,

부처님의 경계에 편안히 머문다는 말입니다. 번뇌가 없거니 응당 부처님의 경계에 편안히 머물겠지요.

 

다음은 ‘해탈성숙(解脫成熟)’이라,

차근차근 해탈되어서 우리 마음에 있는 마지막 번뇌의 씨까지 다 뽑아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성불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참선 공덕으로 오는 것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우선 참선하고 있으면 우리가 혈액 순환이 좋아서 이산화탄소 같은 그런 것도 역시 차근차근 다 제거되는 것입니다.

원래 불성(佛性)이란, 무한의 힘이 있고 무한의 공덕이 있는지라, 참선 닦으면 닦을수록 자기가 모르는 영원적인 무한의 힘이 자기한테 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