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12. 제4장 염불선(念佛禪)

제4장 염불선(念佛禪)

 

염불선이란 시방삼세(十方三世)에 두루한 자성불(自性佛)의 지혜광명(智慧光明)을 관조(觀照)하면서 닦는 선(禪)을 말한다.

 

제1절 염불(念佛)

 

이제 염불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아래 염불에 대한 개요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염불(念佛) :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염(念)함을 의미함.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부처요, 둘이 아닌 불이불(不二佛)이기 때문에 언제나 부처를 여의지 않는 불리불(不離佛)이다.

 

염불이라는 것이 부처를 우리 마음 밖에다 두고 할 때는 방편염불에 그치고 맙니다. 부처님은 저 멀리 극락세계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방편이 되겠지요. 기독교도 역시 본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안 계시는 곳이 없이 다 계시니까 내 마음 속에나 공기 속에나 다 계신다고 봐야지요.

 

따라서 불교도 마찬가지로 내 마음 이른바 부처님은 우주의 생명으로 계신다, 우주에 두루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야 참다운 부처님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순선법문 맨 처음에도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부처란 결국 우주를 몸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 어디에나 안 들어 있는 곳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 그대로 부처님의 무량공덕 32상 80수형호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4조 도신(道信)스님도 “부처를 생각하면 우리가 바로 부처고, 분별시비하면 중생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본래부처인지라 부처를 생각하면 결국 부처지요. 그것이 우리가 부처인지를 모르고 사니까 그런 것이지요.

 

염불이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닦은 뒤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래 부처인데 부처인 줄을 모를 뿐입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말을 듣고서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완전히 믿지를 못하니까 항시 의심합니다. 항시 의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아무런 힘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완전히 믿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순식간에 우리한테서도 위대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하게 믿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신앙이란 의심 없이 온전히 믿는 것, 믿어야 부처님 공덕(功德)이 발휘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마음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우리 마음이 본래는 청정심입니다. 우리가 설사 나쁜 생각을 하고 남을 미워도 하지만 우리 본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나쁜 생각도 많이 하면 우리 마음이 오염되어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근본성품에서 볼 때는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이 된다거나 크고 작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다하더라도 우리마음 자체, 성품으로 볼 때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는 청정심인 것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염(念)하는 것이 참다운 염불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을 저 밖에다 두고, 부르고 외우면 복을 주고 도움도 준다는 식은 방편염불입니다. 이런 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오로지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요, 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해야 진정한 염불선(念佛禪)이나 참선이 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 주여!”를 외친다 해도 역시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 계신다, 이렇게 소박하게 믿어버리면 참선은커녕 참다운 신앙도 못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내 마음 속에나 우주 어디에나 두루 계신다, 이렇게 믿으면 그 때는 “오! 주여!”를 해도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본 성품 본래 본바탕의 체(體)를 여의지 않으면 참선이 되는 것이고 근본성품, 근본바탕을 떠나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부처와 다르지 않는 불이불(不二佛)이라, 우리 중생들이 잘못 생각해서 부처는 부처고, 나는 나다, 이렇게 불신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부처로 환원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화두나 다른 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사, 티벳에서 하는 ‘옴마니반메훔’도 실제의 주문 뜻을 그대로 풀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영생불멸하는 진리의 보배 꽃’이라는 뜻입니다. 그네들은 다른 것 없이 ‘옴마니반메훔’만 합니다. 그것도 ‘옴마니반메훔’의 ‘옴’ 자체가 영생불멸한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으로 하다보면 본래 성품인 부처님께로 가까워지겠지요.

 

1. 염불(念佛)의 의의(意義)

 

念者人人現前一念也 佛者人人本覺之眞性也 現前一念覺悟本覺眞性

염자인인현전일념야 불자인인본각지진성야 현전일념각오본각진성

 

卽是可謂上根人念佛也 是與佛不二 與佛不離之行也

즉시가위상근인염불야 시여불불이 여불불리지행야

-지도론(智度論)-

 

공부가 익어져서 한 고비를 넘어서면 염불이고 화두고 다 초월해버립니다. 그러나 화두나 염불이나 묵조나 모두가 다 한 고비를 넘어서기 전에 습인(習忍)을 익혀서 마음이 딱 자성(自性) 곧, 불성(佛性) 한 자리에 머물기 전에 하는 것이지 익은 사람들한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땅히 부질없는 시비논쟁은 말아야 합니다. 염불이라 할 때의 염(念)이란, 사람 사람마다 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을 염이라 하고 불(佛)은 사람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깨달은 근본 성품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 아는 소식 아닙니까? 염불 공부란 우리 눈앞에 좋다 궂다 시비 분별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우리 본각(本覺)의 참 성품임을 각오(覺悟)하는 것이요. 이것이 곧 참다운 염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재확인하는 공부입니다. 생각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것이고 부처도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본각진성(本覺眞性)인데 생각생각에 부처를 여의지 않고서 염(念)하는 것이 참다운 상근인(上根人)의 염불인 것입니다.

 

이러한 염불은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부처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를 떠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업장 때문에 자꾸만 떠나버리니까 우리가 떠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부처임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또는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다 부처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도 부처요. 좋아하는 사람도 부처라고 깨달으면 미워도 미운 사람에 집착하지 않고 좋아도 좋아하는 사람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한테나 남한테나 이런 도리를 역설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2. 사종염불(四種念佛)

 

1)칭명염불(稱名念佛) … 부처님의 명호(名號:이름)를 외우는 염불

2)관상염불(觀像念佛) … 부처님의 원만한 덕상(德像)을 관찰하면서 하는 염불

3)관상염불(觀想念佛) …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상념(想念)하면서 하는 염불

4)실상염불(實相念佛) … 실상(實相) 곧, 진리를 관조(觀照)하면서 하는 염불

 

염불도 칭명염불, 관상염불 또 관상염불, 실상염불 이렇게 네 가지 종류로 보통 말합니다.

 

1)칭명염불(稱名念佛)

 

맨 처음 칭명염불(稱名念佛)이라, 부처님 이름 즉,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외운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이름은 명호(名號)라 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의 이름은 명호라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약사여래나 이런 이름은 명호가 되겠지요. 이러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외우는 염불이 칭명염불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한 바와 같이 일본 사람들 염불은 명호만 부르는 염불이 제일 많습니다. '명호만 불러서 무슨 덕이 있으랴'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겠지요.

 

부처님에 대해서 주로 말씀한 경전이 많이 있으나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에는 특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에 관해서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대무량수경』에 보면 아미타불이 중생을 제도하려고 과거에 원력(願力)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원력이 끝도 갓도 없이 많지만 그 원력을 간추려서 48원(四十八願)이라, 마흔여덟 가지 원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다 '중생을 어떻게 하면 빨리 극락세계로 인도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무상대도(無上大道)로 인도할 것인가?' 이런 것을 염원(念願)해서 세운 원력(願力)입니다.

 

그 원력 가운데서 제18원(第十八願)이라, 열여덟 번째 원이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 '부처님 이름을 부르면 극락세계에 태어난다.' 이렇게 보장한 서원이 있습니다. 염불하면 반드시 왕생이라, 성불하는 것이나 극락세계에 가서 나는 것을 보고 왕생이라 합니다. 부처님이 우리한테 보장하시기를 ‘그대들이 내 이름을 외우면 틀림없이 극락에 태어난다.’그것이 48원 가운데 제18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이름만 외우며 염불하는 종파들은 그것만 내세워서 '부처님이 보장했으니 틀림없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물론 이것도 또한 사실입니다.비록 관찰(觀察)도 참구(參究)도 않고 이름만 외운다 하더라도 꼭 성불이 됩니다. 부처님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없는 동시에 생각해 보더라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원래 부처인지라 또는, 부처님의 이름은 사람 이름과 달라서 부처의 공덕을 간직해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이름도 그 사람 이름을 자꾸만 부르게 되면 그 사람 영상(映像)이 떠오르는데, 하물며 부처님 이름은 부처님의 공덕을 거기에 다 간직한 이름이요 또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 말입니다. 그러기에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이름 자체가 부사의라는 말입니다. 우리 같은 ‘김 아무개’, ‘박 아무개’라는 이름은 부사의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지마는, 부처님 이름은 부처님께서 친히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갊아 있게(藏), 담게시리 만든(지은) 진리의 이름이기 때문에 이름만 불러도 우리의 업장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본래 부처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자꾸만 외우면 외울수록 우리 마음에 부처의 종자가 더 심어지고, 업장의 종자는 차근차근 감소가 됩니다. 그렇게 되어서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최대로 강해지고 드디어 우리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만 남으면, 그때는 성불하게 되겠지요. 원래 부처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염불만 해도 성불한다는 말씀이 조금도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이름만 외워서는 어쩐지 좀 무미(無味)합니다. 우리가 공부가 되어 상당히 올라가서는 가만히 있어도 염불이 되는 것이지만 처음 어느 단계까지 올라가려면 역시 이름만 외워서는 별로 무미합니다. 좀 미심쩍습니다. '내가 이름만 외워서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2) 관상염불(觀像念佛)

 

그런 때에 ‘관상염불(觀像念佛)’이라, 부처님은 자비롭고 만덕을 갖춘 원만상호(圓滿相好)를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법당에 가서 부처님을 우러러 보면서, 앙모(仰慕)하면서 염불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염불이 더 잘 되겠지요. 따라서 그냥 이름만 외워서 너무 무미할 때는 이와 같이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를 생각하고, 부처의 상호 곧 32상(三十二相)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원만덕상을 관찰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좋은 그림을 보면 기분이 좋듯이 부처님의 상호만 보아도 우리 마음에 우러러 숭앙이 되고 한결 안심이 되고 아늑한 평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덕스러운 얼굴을 보면서 이름을 외우고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3) 관상염불(觀想念佛)

 

그 다음은 ‘관상염불(觀想念佛)’이라, 음(音)은 똑같습니다만 앞의 것은 상(像)을 관찰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상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공덕(慈悲功德)이라든가 훤히 빛나는 지혜광명(智慧光明) 등 부처님의 공덕을 상상하는 염불입니다. 부처님은 그야말로 자비나 지혜나 여러 가지 재주나 한량이 없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부처님의 무량한 그런 공능(功能), 공덕(功德)을 상상하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이런 것도 역시 부처님을 그냥 이름만 외우는 것보다 내용이 보다 충실하겠지요. 그러나 역시 일반 대중은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잡을 싫어하는 분들 또는 이것저것 헤아리기를 싫어하는 분들은 이름만 외워도 분명히 성불하는 법입니다.

 

4) 실상염불(實相念佛)

 

네 번째는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 실상(實相) 곧, 진리를 관조하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실상(實相)의 묘혜(妙慧)가 없으면 외도(外道)의 무익(無益)한 고행(苦行)과 같고 계체(戒體) 불청정(不淸淨)하면 삼매(三昧)가 불현전(不現前)하는 것입니다.

 

실상(實相)---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여 영생상주(永生常住)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생명자체(生命自體)를 의미함.

또한 진여(眞如), 여래(如來), 불(佛), 열반(涅槃), 도(道), 실제(實際), 보리(菩提), 주인공(主人公), 일물(一物), 본래면목(本來面目), 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 도 함.

 

실상(實相)이나, 진리(眞理)나 또는 진여(眞如)나, 여래(如來)나 또는 부처(佛)나 열반(涅槃)이나 도(道)나 실제(實際)나 보리(菩提)나 주인공(主人公)이나 하나의 물건 즉, 일물(一物)이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나 또는 제일의제(第一義諦)나 똑같은 뜻입니다. 어떤 경(經)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어떤 경에서는 저렇게 말하고 경에 따라서 차이 있게 말했으나 내용은 똑같습니다. 따라서, 실상(實相)염불은 우리가 진리를 미처 모르지만, 아직 깨닫지 못했지마는 부처님께서 밝히신 대로 진리를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보는 것은 망상(妄想)인 것이고 가상(假想)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은 가상이요 부처님은 실상(實相)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상을 떠나 실상을 생각하면서 염불을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실상을 아직 못 봤습니다. 실상을 못 본 중생이 어떻게 실상을 보면서 할 것인가? 이것이 또 큰 문제가 되겠습니다.

 

우리가 닦아서 실상을 확실히 본다 하더라도, 아직은 못 봤지만 부처님이나 도인들 말씀에 의지해서 실상은 어떻게 생겼는가 하면, 실상(實相)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여, 원래 낳지도 않고 원래 죽지도 않는 즉, 원래 생(生)함도 없고 멸(滅)함도 없고, 또는 불구부정(不垢不淨)하여,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고, 영생상주(永生常住)한, 항시 죽지 않고서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나 기타 현상계에 있는 모든 것은 항시 머물러 있지 않고 그때그때 소멸됩니다. 사람도 잠시간 머물러 있고, 우주 만유도 잠시간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實相)은 영생으로 항시 머물러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현상은 머물러 있지 않고 항시 변화해서 마지않지만, 진리란 실상은 언제나 머물러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실상(實相)은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또는 더러운 것도 없고 청정한 것도 없고, 영생으로 항시 머물러 있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허공 가운데 가득 차있는, 그 무엇인지 모르는 묘한 그 무엇이 있단 말입니다. 다만 이렇게 텅 비어있을 뿐만 아니라 허공 가운데 가득 차 있는 그 무엇이란 말입니다.

 

실상(實相)은 끝도 갓도 없이 허공 가운데 가득 차있는 그 무엇으로 구태여 이름 지어 붙인다고 하면 부처요 또는 도(道)요, 보리(菩提)요, 진여(眞如)요, 여래(如來)요,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것은 우리 중생이 볼 수 없지만,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우리가 겨우 헤아려 본다고 하면, 낳지 않고 죽지 않고 항시 영생으로 머물러 있는, 모든 공덕을 갖춘 그러한 그 무엇이란 말입니다. 허공 가운데 가득 차있는 그 무엇이 실상입니다.

 

따라서, 실상염불(實相念佛)은 어렵기는 제일 어려우나 부처님의 이름에 가장 합당한 이름이고 염불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阿彌陀佛)하면, 아미타불이란 이름과 실상(實相)과는 거의 계합(契合)하고 거의 합당(合當)합니다. 아미타불의 풀이가 ‘무량광불(無量光佛)’이요, 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입니다.

 

무량광불이란 말은 광명이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말이고 무량수불이란 영생한다는 말입니다. 또 ‘청정광불(淸淨光佛)’이요 ‘무대광불(無對光佛)’이라, 청정하고 상대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이름은 실상에 걸맞은 이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실상염불을 할 때는 우리 마음을 천지우주로 해방시켜서 그 가운데 가득 차있는 그 무엇, 찬란한 그 광명,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 실상염불(實相念佛)인 것입니다.

 

이 염불이 실은 가장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실상을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라야 비로소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염불선(念佛禪)이 되는 것입니다. 이름만 그저 외우고, 또는 상호만 관찰하고, 부처님의 어느 몇 가지 공덕만 생각하는 이런 염불은 아직은 염불선은 못됩니다. 원래 ‘선(禪)’이라 하는 것은, 제가 이제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마음이 실상에 안주(安住)해서, 실상인 진리에 머물러서, 진리를 한시도 안 떠나는 공부가 바로 선(禪)입니다. 이것이 참선(參禪)입니다.

 

따라서 염불도 역시 그와 똑같이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되 우리 마음이 부처님의 진리를 안 떠나야 만이 실상염불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지금 한국의 여러 종단에서 염불을 합니다만 어떤 분들은 실상염불이나 이런 염불선은 아주 어려워서 못한다고 배격합니다. 실상염불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염불선이 되려면 그와 같이, 자기가 부처님의 실상 곧 진리를 상상하면서 해야 염불선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지로 공부할 때는 항시 그러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선 관념상 '내 본바탕도 역시 부처고, 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 뿐 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냥 이름만 들이 불러도 그때는 실상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잘 명심(銘心)하시기 바랍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이름만 그냥 불러도 성불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이름과 그 실체 곧, 이름과 내용이 딱 알맞으면 더욱 성불이 쉽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어렵게시리 철학적으로 생각하려면은 너무 어려운 것이니까, 그냥 쉽게시리 '내 몸의 본질도 역시 부처고, 산이나 내(川)나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 부처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면, 이것이 실상염불이 되는 것이요, 또한 동시에 염불선이 됩니다.

 

『정토경(淨土經)』에 보면 '염불행자 인중분다리화(念佛行者 人中芬陀利華)라'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는 가운데서 염불하는 수행자는 분다리화(芬陀利華 Puṇḑarīka : 白蓮華)라 즉, 가장 향기로운 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관음세지 위기승우(觀音勢至 爲其勝友) 라' 염불하는 분들은 그 벗(友)되는 사람들이 그냥 보통 여느 사람들이 아니라, 관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나 그런 보살들이 좋은 벗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임을 느끼고 부처 이름을 부르면 즉시에 관음보살이나 그런 보살들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의 좋은 벗이 되어서 우리 주변에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는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지성스런 마음으로 염불하고 있으면, 벌써 보살들이 굽어보고서 우리의 벗이 되어서 우리 주변에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염불삼매 총섭일체불법(念佛三昧 總攝一切佛法)이라' 우리 불법에 수행법이 많이 있는데, 염불삼매는 총섭(總攝)이라, 일체 불법을 다 거두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행법(行法)이나, 불교가 대도무문(大道無門)인지라, 불교가 하도 넓고, 넓은 것은 일정한 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법(佛法)에 들어가는 문이 많이 있지만, 따라서 화두(話頭) 드는 것이나 무엇이나 다 성불하는 법이나, 그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된 행법(行法)이 역시 염불(念佛)하는 법입니다. 염불하는 법을 기본으로 해가지고서 화두(話頭)나 기타 묵조(黙照)나 그런 딴 행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것을 알아두셔야 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염불에 대한 말씀을 가장 많이 하셨고 또 정통 도인들은 다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말씀마따나, 염불 이것은 우리 심리(心理), 우리 심리라는 것은 보통 지(知)와 정(情)과 의(意)로 구분하는 하나의 속성인데, 같은 공부도 역시 심리의 속성 따라서, 거기에 맞추어서 하면은 더 빠릅니다. 그래야 빨리 합치(合致)되지 않겠습니까?

 

헌데 염불하는 공부는 우리의 지혜(智慧), 우리의 감성(感性), 우리 의지(意志), 이것을 조화롭게 하는 공부입니다. 따라서 다른 것에 비해 훨씬 싫증도 덜 나기도 하고 또 빨리 성불하는 법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상염불(實相念佛)은 현상적인 가유(假有)나 허무에 집착하는 무(無)를 다 떠나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이른바 ‘법신(法身)자리’를 생각하는 염불인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자리를 생각하는 실상염불이 참다운 본질적인 염불입니다. 이른바 법의 실상, 내 인간 생명의 실상, 우주 생명의 실상, 이것을 우리가 관찰하는 것입니다. 관찰은 분명히 뚫어지게 안 보이니까 볼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생각만 해도 관(觀)이라는 뜻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부처의 법신(法身)은 있지도 않고 또는 공(空)하지도 않는 비유비공(非有非空)의 중도실상의 생명의 광명을 관조하는 염불이 곧 실상염불입니다.

 

이런 데서 우리가 의심을 품는 문제는 부처님의 명호(名號)에 대해서입니다. 우리 스님네나 재가 불자들 가운데 '어떤 부처를 염해야 할 것인가?'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분이 있습니다. 『지장경(地藏經)』을 보면 지장보살을 염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되어 있고 『아미타경(阿彌陀經)』을 보면 아미타불을 한번만 잘 염해도 극락세계에 간다고 되어 있고 또 『관음경(觀音經)』을 보면 욕심 많을 때나 마음이 괴로울 때나 또는 무엇이 안 될 때나 좋은 사람 만나고 싶을 때나 모두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염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佛子)들은 '뭘 염해야 좋을 것인가?' 또는 '다 한꺼번에 염해야 할 것인가?' 하고 마음에 갈등을 갖습니다.

 

그런데 가령, 지장보살님을 위주해서 염하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보다도 지장보살을 염하는 것이 훨씬 공덕이 많다는 생각을 하고 염할 때는 사실은 공덕을 크게 감하는 것입니다. 참답게 지장보살을 염하는 것이 못됩니다. 또는 관세음보살님을 염한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이나 지장보살 염불은 별로 공덕이 없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것이 가장 수승하다고 생각할 때도 참다운 공덕이 못되고 부처님 법에 여법한 염불도 못됩니다. 아미타불을 염할 때도 같은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법은 무장무애(無障無碍)하고 평등일미(平等一味)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라는 평등일미 자리에는 높고 낮은 우열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명호(名號)나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 주여!' 하고 기독교식으로 한 명호만 했으면 될 것인데 무슨 필요로 복잡하니 많은 부처님의 명호가 필요 있을 것인가? 하고 의단을 품기가 쉽습니다.

 

이런 때는 부처님의 불성공덕(佛性功德)을 생각해야 됩니다. 불성공덕은 무한 공덕입니다. 불가설(不可說)이라, 어떻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쪽으로도 무한하고 또는 지혜로운 쪽으로도 무한하고 또는 지구 덩어리가 베풀어주는 은혜 공덕으로 보더라도 무한합니다.

 

그래서 많은 부처와 보살 명호는 이른바 생신(生身) 보살이 아니라 법신(法身) 보살 명호로, 모두가 다 부처 공덕을 상징한 것입니다. 무장무애한 무량공덕을 자비로운 쪽으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지혜로운 쪽으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고 또는 원력(願力)쪽으로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이고 또는 죽어서 가는 영가를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쪽에서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고 또는 병고를 다스리고 구제하는 쪽에서는 약사여래(藥師如來), 약왕보살(藥王菩薩)입니다. 또는 법신 부처님이 하늘에 있는 달이나 별이나 그런 광명체로 화현(化現)하는 쪽에서는 이른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요,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이고 또 북두칠성 등 28수(宿) 그런 쪽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칠성(七星)입니다.

 

예경(禮敬)할 때에 보십시오. 산신(山神)을 외울 때도 처음에 ‘만덕고승(萬德高僧) 성개한적(性皆閑寂)’이라는 말을 합니다. 역시 부처님 가르침 따라 성중(聖衆)을 먼저 내놓고서 나중에 산신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청정 무비한 무량공덕이 산에 들어가 있으면 산신인 것이고, 물에 들어가 있으면 용왕(龍王)인 것이고, 우리 지구에 들어 있으면 지장보살이요. 또 별에 들어 있으면 치성광여래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올바른 해석이 되겠지요.

 

따라서 어떠한 때에 중생의 근기 따라서 산신 불공을 하더라도 우리 중생이 볼 때에 산인 것이지 바로 본다면 부처님 화신(化身)인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할 때도 산은 그냥 산이 아니요, 물도 그냥 마시는 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바로 불성(佛性)의 산으로, 불성의 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해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경을 보면 다 그런 도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본다면 지장보살을 부르나 또는 무엇을 외우나 간에 '부처님의 화신으로, 부처님의 공덕으로 우리 중생을 다스리는, 자비로 구제하는 공덕명호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우리 마음이 부처님한테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지장보살이나 무엇을 염해도 공부에 조금도 손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사아미타불(本師阿彌陀佛)’이라, 모두를 포괄적으로 법· 보·화(法報化) 삼신(三身)을 말할 때는 아미타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사아미타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통 염불할 때는 아미타불을 많이 하는 셈입니다만 어떤 명호를 부른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을 하는 것이나 다 똑같은 공덕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상염불(實相念佛)은 모든 상을 떠나서 이름도 떠나서 부처님의 진리, 중도실상(中道實相) 이른바 우주에 두루해 있는 부처님의 참다운 생명의 실상, 그 자리를 생각하고 하는 염불입니다. 따라서 실상염불이 되면 그 때는 바로 염불참선이 됩니다. 실상염불은 염불선과 둘이 아닙니다. 실상염불은 부처님의 법신(法身)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고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원리(原理)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