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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15. 6. 제 경륜의 염불법문

 

阿彌陀佛淨妙法身 遍在一切衆生心地 故云心佛衆生

是三無差別 亦云心卽佛 佛

아미타불정묘법신 편재일체중생심지 고운심불중생

시삼무차별 역운심즉불 불

 

卽心 心外無佛 佛外無心 如是眞實念佛

十二時中四威儀內 以阿彌陀佛名字 帖在

즉심 심외무불 불외무심 여시진실염불

십이시중사위의내 이아미타불명자 첩재

 

心頭眼前 心眼佛名 打成一片 心心相續

念念不昧 久久成功 則忽爾之間 心念斷絶

심두안전 심안불명 타성일편 심심상속

염념불매 구구성공 즉홀이지간 심념단절

 

阿彌陀眞體 卓爾現前 方信舊來不動名爲佛

아미타진체 탁이현전 방신구래부동명위불

- 태고대사(太古大師) -

 

그 다음은 태고 보우(太古普愚)선사 게송입니다. '아미타불의 청정미묘한 법신이 두루 일체중생의 마음자리에 본래 갖추어 있기 때문에 심 · 불 · 중생이 시삼무차별(心佛衆生 是三無差別)이라, 마음이나 부처나 중생이나 세 가지가 차별이 본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바로 마음이라. 마음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밖에 마음이 없도다. 이와 같이 진실한 염불을 할 때는 밤낮으로 행주좌와에 아미타불의 명호를 심두(心頭)에나 안전(眼前)에 붙여 두어라.'

 

맨 처음에는 관상적(觀想的)으로나 실상염불(實相念佛)을 하기가 쉽지 않은 셈 아닙니까? 역시 이름을 부르면 부르기가 쉽고 또 우리가 가장 공경하고 그리워하는 이름이니까 계속 불러도 별로 싫증이 안 나겠지요. 아미타불 명호를 우리 마음에나 눈앞에 여의지 않고 딱 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안불명(心眼佛名)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우리 마음으로 생각하고 눈으로 실지로 광명무량한 세계를 보려고 계속 공부해 나갈 때 마음이나 눈이나 부처의 명호가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따로따로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공부가 익어지면 이것이고 저것이고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두를 다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을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고 합니다. 어떤 공부를 하든지 우리 마음이 타성일편이 되어서 나와 우주가 하나로 되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그 자리를 애써 놓지 않고 상속적으로 생각 생각에 조금도 어두워지지 않게 오래오래 공을 이루면 문득 찰나 동안에 우리 범부심이 끊어진다. 그래서 아미타불 진체(眞體)인 우주에 편만한 진여불성이 활연히 앞에 나투나니 이것이 바로 불생불멸한 생명의 실상인 부처임을 믿을 지니라' 이런 뜻입니다.

 

眞如念佛 念佛功極 日日時時 於一切處 阿彌陀佛 淨妙眞體 冥現其前 臨命終時 迎接九品蓮臺 上品往生

진여염불 염불공극 일일시시 어일체처 아미타불 정묘진체 명현기전 임명종시 영접구품연대 상품왕생

 

- 보조 저(普照著) 염불요문(念佛要門) -

또 보조(普照知納) 국사의 염불요문(念佛要門)에는 '진여염불(眞如念佛)'이라, 진여염불은 앞에서도 든 바와 같이 대상적으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바로 미타이고 우주가 바로 부처라는 염불이 진여염불입니다. '진여염불의 공이 사무치면 나날이 때때로 어디에나 아미타불의 청정미묘한 진체(眞體)가 불현듯 그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임종할 때는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성중(聖衆)들이 마중하여 구품연대(九品蓮臺)의 상품상생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하였습니다.

 

극락세계는 깨달은 경계에서 본다면 한 점 티끌도 없고 오염이 없고 만 공덕을 갖춘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 아니겠습니까? 바로 보면 사바세계가 곧 적광토(寂光土)라, 이 세계가 이대로 극락세계인데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려서 미처 수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若念佛者 當知此人是人中 芬陀利華 觀音勢至 爲其勝友

약염불자 당지차인시인중 분다리화 관음세지 위기승우

- 무량수경(無量壽經) -

 

'만약 부처를 생각하는 자는 즉, 본래면목을 안 떠나는 자는 마땅히 알지니 이런 사람은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인 분다리화(芬陀利華 Puṇḍarīka)라 따라서,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그를 가장 좋은 벗으로 삼는다. '

 

관음 대세지도 인간적인 때 묻은 안목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습이 필요하면 언제나 나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청정하고 정말로 순수할 때는 수시수처(隨時隨處)에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宇宙)에 갖추어 있는 본래(本來) 자비(慈悲)의 정기(精氣), 그 생명(生命) 성령(聖靈)이 관음(觀音)이요, 지혜(智慧)의 정기(精氣) 곧 그 생명(生命) 성령(聖靈)이 문수(文殊)요, 또는 대세지(大勢至) 입니다. 염불은 지혜와 자비를 온전히 다 갖추어 있는 부처, 곧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를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니까 마땅히 관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비록 염불행자가 범부라 하더라도 가장 좋은 벗으로 삼는 것입니다. 관음은 자비를 의미하고 대세지는 지혜를 의미하기 때문에 일체 보살을 다 대신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염불행자는 일체 천만 보살이 그를 좋은 벗으로 생각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諸佛如來是法界身 入一切衆生心想中 是故汝等心想佛時 是心卽是三十二相 八十隨形好 是心作佛 是心是佛

제불여래시법계신 입일체중생심상중 시고여등심상불시 시심즉시삼십이상 팔십수형호 시심작불 시심시불

-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

 

제불여래는 바로 법계(法界)가 몸입니다. 법계란 삼천대천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불여래는 바로 법계가 몸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두루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대승적인 차원에서는 사람만이 중생이 아니라, 유정 무정 모두가 다 중생입니다. 사바세계의 두두물물이 다 중생이니까 또는 그런 중생으로 모든 법계가 구성되었으므로 부처님이 모든 중생의 마음 가운데 원래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우리 속에 들어 계신다는 의미는 모든 존재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어디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입니다.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불성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이 중생한테 들어 계신다는 것은 바로 온전히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개한테 불성이 있다고 할 때도 개의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머리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온전히 전체가 바로 부처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삼십이상 필십종호라' 이것도 꼭 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의미로 생각하면 무량공덕을 말한 것입니다. 부처님을 한번 생각하면 바로 그 생각이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생각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공덕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로 마음으로 부처를 짓고 또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 『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입니다.

 

달마(達磨 Bodhi-Dharma ?~528) 스님께서 중국 광주에 오실 때에 이미 150살(또는 130세)이 되어서 오셨다고 기록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던히 오랫동안 사셨겠지요. 그리고 9년 면벽 했으니까 몇 년이겠습니까? 지금이나 옛날이나 범부들은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도 하고 또 자기 아는 것보다도 조금 다르게 얘기하면 그것이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굉장히 거부반응을 느낍니다. 그때에도 달마 스님께서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 문자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겠지만 문자의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오직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마음만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사실 마음만 깨달으면 거기에 모두가 다 들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 스님들이 아주 시기심을 많이 냈습니다. 그것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논장(論藏)들을 보면 그 당시 가장 훌륭하다는 광통율사(光統律師) 또는 인도에서 들어오신 보리류지(菩提流志 Bodhiruci 508년 中國에 옴) 그분들이 법집(法執)하여 시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야 그랬으리요마는 그 밑에 있는 분들이 독살을 하려고 여섯 번이나 했습니다. 얼마나 박해가 많았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 어른께서 중국에 들어오신 딴 뜻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직 자기 생명을 모조리 바친다 하더라도 중생제도 외에는 다른 뜻이 없는 분인데, 그런 분을 독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까지도 독이 안 받는 것입니다. 벌써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통달한 분들은 '인연이 다 됐으니까 내가 가야겠다'해서 가는 것이지 독살하려고 해서 갈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섯 번째까지는 독을 먹고 바위 위에다 대변을 누면 어떻게 독하든지 바위가 다 빠개져 버립니다. 이렇게 독을 다 안 받았지만 여섯 번째는 '중국에 와서 내가 할 일은 다 하고 이제 인연이 다 됐다' 하시고는 독을 그대로 받고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웅이산(熊耳山)에다 입관을 해서 묻었습니다.

 

그 뒤에 위(魏)나라의 송운(松雲)이란 사람이 사신으로 인도까지 갔다가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총령(蔥嶺), 지금의 파미르고원을 넘어오는데 그때 수염이 털털하고 늙수그레한 한 스님이 주장자를 어깨에다 척 걸쳤는데 짚새기 한 짝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없고 반갑기도 해서 수인사를 하고 물으니까 달마라고 합니다. 송운이 위나라로 돌아와서 말을 들어 보니까 달마 스님이 이미 돌아가셔서 관속에 넣어 매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도 사신이라는 위신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해서 달마 스님 묘소를 파 내놓고 보니까 관속에 시체는 어디로 간 곳이 없고 짚새기 한 짝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달마 스님은 부활하여서 갔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또 달마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도 원래는 죽음이 없는 것이니까 사실은 다 부활입니다. 그네들이 저승세계를 잘 모르니까 예수의 부활설만 말씀을 했겠지요.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는 정각(淨覺)스님이 저술한 책입니다. 5조 스님의 제자 가운데 십대 제자가 있었는데 혜능(慧能)대사, 신수(神秀)대사, 현색(玄賾)대사, 지선(智詵)대사 등 십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인 현색대사의 제자가 정각스님입니다. 정각스님이 저술한 능가사자기가 전에는 미처 발견 안 되었다가 돈황(敦煌)에서 발굴된 것은 1907년경입니다. 돈황에서 발굴되어 나온 문서 가운데는 과거에 재래적으로 불교에서 모르는 것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가사, 육조 혜능스님하고 신수대사가 마치 경쟁하는 것같이 단경에도 기록이 되어 있고 그렇게 전수가 되어온 것인데 돈황에서 나온 여러 가지 문서를 본다면 신수스님도 위대한 도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실은 응당 도인이 되겠지요. 5조 홍인(弘忍)대사 칠백(七百) 제자의 상수(上首) 제자인데 도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종전에는 신수는 점수(漸修)나 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육조 혜능스님만 돈오돈수(頓悟頓修)니까 위대하다고 칭송해 왔습니다만 돈황문서가 발굴된 다음에는 모두가 공평스럽게 바로잡는 작업들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4조 도신(道信)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도 그 전에는 몰랐습니다. 그 전에는 아무런 문헌이 없었는데 돈황에서 발굴한 『능가사자기』 가운데 이 법문이 들어 있습니다. 그 뒤에사 지극히 귀중하다고 훤전(喧傳)해서 여러 가지로 참고하고 주석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4조 도신대사의 법문 말씀입니다.

 

 

念佛卽是念心 求心卽是求佛 所以者何 識無形

염불즉시념심 구심즉시구불 소이자하 식무형

佛無相貌 若也知此道理 卽是安心

불무상모 약야지차도리 즉시안심

常憶念佛 攀緣不起 則泯然無相 平等不二

상억염불 반연불기 즉민연무상 평등불이

入此位中 憶佛心謝 更不須徵

입차위중 억불심사 갱불수징

卽看此等心 卽是如來 眞實法性之身 亦名正法

즉간차등심 즉시여래 진실법성지신 역명정법

亦名佛性 亦名諸法實相 實際亦名淨土

역명불성 역명제법실상 실제역명정토

亦名菩提 金剛三昧 本覺等 亦名涅槃界 般若等 名雖無量 皆同一體也

역명보리 금강삼매 본각등 역명열반계 반야등 명수무량 개동일체야

 

-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 제5도신장(第五道信章) -

 

"염불이란 바로 자기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며 마음을 구하는 것은 바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식(識)이란 형체가 없고 부처란 무슨 모양이나 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도리를 안다면 바로 안심이라" 부처나 마음이란 것이 모양이 있다고 할 때는 마음이 걸리겠지만 마음이란 원래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도리를 안다고 할 때는 마음이 편안스럽다는 말입니다.

 

가사, 나한테 죄가 많이 있다고 생각할 때도 우리 마음으로 생각하겠지요. 승찬(僧璨 ?~606)스님이 2조 혜가스님한테 올 때 풍병에 찌들어서 '저한테는 죄가 많아서 이렇습니다.'하고 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니까 혜가대사가 '죄가 그대 마음의 어디에 있는가?' 하였습니다. 마음이 원래 없거니 무슨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죄를 어디서 끌어낼 터무니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원래 없고 죄상도 본래 없으나 자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 단계에서는 죄를 범해 놓으면 인과를 받습니다. 가사, 우리가 금생에 남의 것을 훔치기도 하고 남을 죽이기도 하고 또는 다른 동물도 함부로 하면서, 범부 분상에서 이치로만 '상(相)이란 본래 없지가 않는가?' 하는 정도로는 과보를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견성을 해서 자성불(自性佛)을 본 다음에야 죄상의 상을 여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마음도 원래 자취가 없고 마음이나 부처나 원래 형상이 없다는 도리를 알 때는 벌써 이것이 바로 안심(安心)이라는 말입니다.

달마 때부터 6조까지 주로 안심법문(安心法門)으로 모두가 다 마음을 안심케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서도 먼저 안심이 되어야 하고 재가 불자님들한테 법문을 할 때도 안심을 시켜야 합니다. 안심을 시켜놓고서 철저히 도덕적인 계율을 지키라고 해야지, 안심도 없이 억지로 지키라고 하면 재미도 없고 또 구속감을 느낍니다.

 

또다시 도신대사 말씀에 "항시 부처를 깊이 사무치게 생각하고 반연(攀緣)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상(相)이 소멸되어 상이 없고 평등하여 둘이 아니다. 이런 자리에 들어간다면 부처님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모든 상을 다 버리게 되는데 새삼스럽게 애쓰고 구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본다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진실한 법성신(法性身)이요 또한 정법(正法)이고, 불성(佛性), 제법실상(諸法實相), 실제(實際), 보리(菩提), 금강삼매(金剛三昧), 본각(本覺), 열반계(涅槃界), 또는 반야(般若)라고 한다. 이름은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모두가 다 하나의 몸이니라" 하였습니다.

4조 도신 대사 말씀은 권위 있는 말씀인 것이고 귀중한 말씀이기 때문에 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我此法要 依楞伽經 諸佛心第一 又依 文殊說般若經 一行三昧

아차법요 의능가경 제불심제일 우의 문수설반야경 일행삼매

卽念佛心是佛 妄念是凡夫 若善男子 善女人 欲入一行三昧

즉염불심시불 망념시범부 약선남자 선여인 욕입일행삼매

當先聞般若波羅蜜 如說修學然後 能入一行三昧 不退不壞 無碍無相

당선문반야바라밀 여설수학연후 능입일행삼매 불퇴불괴 무애무상

善男子 善女人 欲入一行三昧 應處空閑 捨諸亂意 不取相貌 繫心一佛

선남자 선여인 욕입일행삼매 응처공한 사제난의 불취상모 계심일불

專稱名字 隨佛方所 端身正向 能於一佛 念念相續 卽是念中

전칭명자 수불방소 단신정향 능어일불 염념상속 즉시염중

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 何以故 念一佛功德 無量無邊 亦與無量諸佛功德 無二不思議

능견과거미래현재제불 하이고 염일불공덕 무량무변 역여무량제불공덕 무이부사의

 

- 도신부법장4조(道信付法藏四祖)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 -

"나의 이러한 법요는 능가경에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에 의지하고 또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지했다."

저는 육조단경의 부촉품에 있는 '그대들이 만약 부처님의 일체종지를 얻으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지니라' 는 경구를 보고 또 4조가 말씀한 입도안심요방편 법문을 볼 때에 다 비슷한 법문이라서 역시 위대한 분들은 생각이 비슷한 것이 당연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했습니다.

 

"즉염불심시불(卽念佛心是佛)이요. 망념시범부(妄念是凡夫)라" 원래 부처인지라 부처를 염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요 반대로 상을 내는 망념일 때는 범부라는 말입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일행삼매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마땅히 먼저 반야바라밀을 들어야 한다." 누누이 말씀 드렸습니다만 반야(般若)가 있으면 불자이고 반야가 없으면 불자가 못됩니다. 반야가 없으면 결국은 속물입니다. 반야가 있어야 참선이 되는 것이고 반야가 없으면 참선이 못됩니다. 반야는 무엇인가? 반야는 바로 제법공(諸法空)의 지혜(智慧)입니다. 또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지혜입니다.

 

"그 반야바라밀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배운 연후에야 능히 일행삼매에 들 수가 있다. 그래야 후퇴도 물러남도 없고 또는 파괴함도 없고 거리낌도 없고 또는 상이 없다. 선남자 선여인들이 일행삼매를 정작 공부하려고 할 때는 잡다한 시끄러운 인연이 없는 한가한 곳에서 모든 산란스러운 생각을 다 버리고 상을 취하지 않고 마음을 부처의 경계에 매어 두어야 한다."

 

부처의 경계는 무슨 경계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이 부처의 경계를 잡기가 좀 곤란스럽습니다. 부처란 것은 '본래면목 자리가 아닌가' 이렇게는 알지만 우리 마음을 부처의 경계에다 맨다고 할 때에는 어떻게 맬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부처란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일체 존재의 생명인 동시에 상이 아니지만 인연이 닿으면 또 현상계에 상을 나투는 것입니다. 즉 유(有)도 아니고 가(假)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고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를 감견(感見)을 했으면 좋은데, 미처 감득(感得)을 못한 사람들은 부처에다 마음을 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때라도 '나라는 이 몸뚱이나 너라는 몸뚱이나 천지 우주에 있는 모든 두두물물이 다 비어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자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비어 있는 무량무변한 자리에 무량공덕을 갖춘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충만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매는 것이 실상관(實相觀)입니다.

 

이리하여 '전칭명호(專稱名號)라.' 우리가 초심일 때는 역시 뭐라 해도 화두면 화두, 염불이면 염불 이름을 자꾸만 외우고 하나만 생각해야 마음이 모아집니다. 공부가 익어져서 한 고비를 넘은 사람들은 외울 것도 없지만 처음에는 하나로만 외워야 마음이 계속되어 통일이 잘 되는 것이지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는 잡수(雜修)라, 잡스럽게 할 때에는 마음이 통일이 안 됩니다. 한 부처한테 마음을 내고 오로지 명호를 외우고 또 기왕이면 부처의 상호를 상상하면 좋겠지요. 상호란 허무한 것이 아니라 무량공덕을 갖춘 상호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러를 때마다 그만치 흐트러진 마음이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계신 방소(方所)에 따라서 단정히 바로 향해서 앉고 한 부처님에 대해서 생각 생각에 생각이 끊어지지 않을 때에는 즉시 그 생각 가운데 능히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제불을 다 본다. 한 부처의 무량무변한 공덕을 생각하면 바로 무량한 부처님 공덕을 다 감견(感見)하여 제불공덕과 둘이 아닌 부사의한 공덕을 성취한다."는 도신 선사 입도안심요방편법문에 있는 염불찬탄의 법문입니다.

 

청허휴정 스님(淸虛休靜 A.D 1520~1604) : 별호는 서산(西山), 조선시대 스님.

마음은 바로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끊임이 없고, 입은 부처님의 명호(이름)를 분명히 불러 흐트러지지 않게 한다. 이렇듯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면 그 한 생각 한 소리에 능히 八十억 겁 동안 생사에 헤매는 죄업을 소멸함과 동시에 八十억 겁의 수승한 공덕을 성취한다.

 

心則緣佛境界憶持不忘 심즉연불경계억지불망

口則稱名佛號分明不亂 구즉칭명불호분명불란

如是心口相應一念一聲 여시심구상응일념일성

則能滅八十億劫生死之罪 즉능멸팔십억겁생사지죄

成就八十億劫殊勝功德 성취팔십억겁수승공덕

「淸虛堂集청허당집

 

육조혜능 스님(六祖慧能 A.D 638~713):중국 당나라 스님. 선종(禪宗) 제六조(祖).

오직 아미타불 지니고 다른 생각 없으면

손 튀길 수고도 없이 서방 극락 가리라.

一句彌陀無別念 일구미타무별념

不勞彈指到西方 불로탄지도서방

「禪淨雙修集要선정쌍수집요

 

 

영명연수 스님(永明延壽 A.D 904~975) : 중국 북송 스님, 법안종(法眼宗)의 제三조(祖).

 

선정과 정토가 같이 있으면,有禪有淨土 유선유정토

마치 뿔 난 호랑이 같아서猶如戴角虎 유여대각호

이승에서 남의 스승이 되고現世爲人師 현세위인사

다음 생엔 부처와 조사가 되리,來生作佛祖 내생작불조

 

선정이 없고 정토만 있어도無禪有淨土 무선유정토

만(萬) 사람 닦아서 만 사람 가니萬修萬人去 만수만인거

다만 아미타불만 뵈옵게 되면但得見彌陀 단득견미타

어찌 깨닫지 못할까 걱정하리.何愁不開悟 하수불개오

 

선정만 있고 정토 없으면有禪無淨土 유선무정토

열 사람에 아홉이 길에 넘어지고十人九蹉路 십인구차로

중음(中陰) 경계가 나타나면陰境若現前 음경약현전

별안간 그것을 따라가고 말며,瞥爾隨他去 별이수타거

 

선정과 정토가 모두 없으면無禪無淨土 무선무정토

무쇠 침상과 구리 기둥의 지옥에鐵床並銅柱 철상병동주

일만 겁과 일천 생에萬劫與千生 만겁여천생

믿고 의지할 데 하나도 없네.沒箇人依怙 몰개인의호

 

천여유칙스님(天如惟則 A.D 1300년경) : 중국 원(元)나라 임제종(臨濟宗) 스님.

염불과 참선이 같지 않다고 의심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참선이란 다만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려 함이요, 염불은 자기 성품이 미타(彌陀)요. 마음이 곧 정토(淨土)임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이니, 어찌 그 이치에 둘이 있으랴.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을 생각하고 염불을 하면 현세나 다음 생에 반드시 부처님을 뵈오리라.」하셨으니, 이미 현세에서 부처님을 뵘이 어찌, 참선을 하여 도(道)를 깨닫는 것과 다름이 있을 것인가.

아미타불 넉자를 화두삼아 자나 깨나 분명히 들어 쉬지 않고 한 생각의 분별도 나지 않는 데 이르면, 차서를 밟지 않고 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뛰어오르리라.

 

[有自疑念佛與參禪不同(유자의염불여참선부동) 不知(부지) 參禪只圖識心見性(참선지도식심견성) 念佛者悟自性彌陀唯心淨土(염불자오자성미타유심정토) 豈有二理(기유이리), 經云(경운) 憶佛念佛 現前當來 必定見佛(억불염불 현전당래 필정견불) 旣曰現前見佛 則與參禪悟道 有何異哉(기왈현전견불 즉여참선오도 유하이재) 但將阿彌陀佛四字 做箇話頭(단장아미타불사자 주개화두) 二六時中 直下提撕 至於一念不生(이육시중 직하제시 지어일념불생) 不涉階梯 徑超佛地(불섭계제 경초불지)]

「天如惟則禪師普說(천여유칙선사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