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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17. 제2절 능가사자기 도신장 제오

제2절 능가사자기 도신장 제오(楞伽師資記 道信章 第五)

<要約1>

 

唐朝 蘄州 雙峰山 道信禪師 承璨禪師後 其信禪師

再敞禪門 宇內流布 有菩薩戒法一本

당조 기주 쌍봉산 도신선사 승찬 선사후 기신선사

재창선문 우내유포 유보살계법일본

 

及制入道安心要方便法門 爲有緣根熟者說

我此法要 依楞伽經 諸佛心第一 又依文殊說般

급제입도안심요방편법문 위유연근숙자설

아차법요 의릉가경 제불심제일 우의문수설반

 

若經 一行三昧 卽念佛心是佛 妄念是凡夫 文殊說般若經云

文殊師利言 世尊云何名一行三

야경 일행삼매 즉염불심시불 망념시범부 문수설반야경운

문수사리언 세존운하명일행삼

 

昧 佛言 法界一相 繫緣法界 是名一行三昧

善男子 善女人 欲入一行三昧 當先聞般若波羅

매 불언 법계일상 계연법계 시명일행삼매

선남자 선여인 욕입일행삼매 당선문반야바라

 

蜜 如說修學 然後能入一行三昧 如法界緣

不退不壞 不思議 無礙無相 善男子 善女人

밀 여설수학 연후능입일행삼매 여법계연

불퇴불괴 부사의 무애무상 선남자 선여인

欲入一行三昧 應處空閑 捨除亂意 不取相貌

繫心一佛 專稱名字 隨佛方所 端身正向

욕입일행삼매 응처공한 사제란의 불취상모

계심일불 전칭명자 수불방소 단신정향

 

能於一佛 念念相續 卽時念中 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

何以故 念一佛功德 無量無邊

능어일불 염념상속 즉시염중 능견과거미래현재제불

하이고 염일불공덕 무량무변

亦與無量諸佛功德 無二不思議 云云… 普賢經云

一切業障海 皆從妄想生 若欲懺悔者

역여무량제불공덕 무이부사의 운운… 보현경운

일체업장해 개종망상생 약욕참회자

 

端坐念實相 是名第一懺 倂除三毒心 攀緣心覺觀心

念佛心心相續 忽然澄寂 更無所緣念

단좌염실상 시명제일참 병제삼독심 반연심각관심

염불심심상속 홀연징적 갱무소연념

 

大品經云 無所念者 是名念佛 何等名無所念

卽念佛心名無所念 離心無別有佛 離佛無別

대품경운 무소념자 시명염불 하등명무소념

즉염불심명무소념 리심무별유불 리불무별

 

有心 念佛卽是念心 求心卽是求佛 所以者何 識無形

佛無相貌 若也知此道理 卽是安心

유심 염불즉시염심 구심즉시구불 소이자하 식무형

불무상모 약야지차도리 즉시안심

 

常憶念佛 攀緣不起 則泯然無相 平等不二 入此位中

憶佛心謝 更不須徵 卽看此等心

상억염불 반연불기 즉민연무상 평등불이 입차위중

억불심사 갱불수징 즉간차등심

 

卽是如來眞實法性之身 亦名正法 亦名佛性 亦名諸法實性實除

亦名淨土 亦名菩提 金剛

즉시여래진실법성지신 역명정법 역명불성 역명제법실성실제

역명정토 역명보리 금강

 

三昧 本覺等 亦名涅槃界 般若等 名雖無量 皆同一體

삼매 본각등 역명열반계 반야등 명수무량 개동일체

※①『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 돈황(敦煌)에서 발견. 초기(初期) 선종사서(禪宗史書). 서기(西紀) 719~720경(頃) 정각(淨覺)지음. 본서(本書)가 발견(發見)된 후 초기선종사(初期禪宗史), 특(特)히 북종선(北宗禪)의 연구가 급속히 진전(進展)됨. 내용(內容)은 안심법문(安心法門) ․ 달마(達磨)의 이입사행(二入四行) ․ 일행삼매(一行三昧) ․ 수일불이(守一不移)등이 설(說)해져 있음. 저자(著者) 정각(淨覺:683~750)은 오조홍인(五祖弘忍)의 사법제(嗣法弟) 현색(玄賾)의 제자(弟子).

② 찬선사(粲禪師:606~?) : 선종동토(禪宗東土)의 제삼조(第三祖) 승찬(僧璨:粲) 대사(大師)

③ 여법계연(如法界緣) : 법계(法界)의 승연공덕(勝緣功德)과 같음.

④ 전칭명자(專稱名字) : 오로지 불명호(佛名號)를 칭(稱)함.

⑤ 억불심사(憶佛心謝) : 불(佛)을 생각하는 마음도 사라지다.

⑥ 경불수징(更不須徵) : 다시 불(佛)을 찾고 부를 필요도 없다.

⑦ 금강삼매(金剛三昧) : 일체제법(一切諸法)에 통달하는 삼매(三昧) ․ 삼승성자(三乘聖者)가 최후로 일체(一切)의 번뇌(煩惱)를 떨치고 구경과(究竟果)를 성취(成就)하는 삼매(三昧)로서 사자후삼매(獅子吼三昧), 또는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 ․ 반야바라밀삼매(般若波羅蜜三昧) ․ 불성(佛性)이라고도 함.

 

⑧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 :『능가경(楞伽經)』권일(卷一)의 게(偈)에 “대승(大乘)의 모든 도문(度門:해탈문解脫門)은 제불심(諸佛心)이 제일(第一)이라”고 하였음.

 

⑨ 각관심(覺觀心) : 각(覺)은 대상(對象)을 대강 사유(思惟)하는 작용(作用)이며, 관(觀)은 한결 세밀(細密)하게 분별(分別)하는 작용(作用)으로서 모두 선정(禪定)을 방해함. 신역(新譯)에는 심사(尋伺)라 함.

 

제가 아는 어떤 분이『현행경』을 보고 거기에 경도(傾倒)가 되어서 자기가 아는 신도님들과 같이 더불어서 염불수행(念佛修行)을 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염불수행(念佛修行)을 할 때는 염불수행(念佛修行)을 하고, 또 시간 있을 때는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해서 참선(參禪)한다고 가부좌(跏趺坐) 틀고 앉아 있곤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 생각으로는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것은 참선(參禪)이고 염불(念佛)하는 것은 참선(參禪)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화두(話頭) 드는 것이나 안 드는 것이나 상관없이 참선(參禪)이나 염불(念佛)이나 본래로 둘이 아닙니다. 가령 우리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하근중생(下根衆生)이 염불(念佛)하는 것이고 참선(參禪)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염불(念佛)은 자세에 매였습니다. 자세가 본래(本來)의 자리, 실상(實相)의 자리, 가상(假相)이 아닌 본래(本來)의 실상(實相),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자리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 염불(念佛)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선(禪)입니다. 가령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엉뚱한 데 가 있으면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이와 같이 상대적인 문제를 의심한다면 그때는 선(禪)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선(禪)의 정의(定義)를 내리자면 본체(本體)를 떠나지 않으면 그때는 선(禪)인 것이고 본체(本體)를 떠나면 그때는 모두가 다 선(禪)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염불(念佛)을 하든, 주문(呪文)을 외우든, 또는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든지 간에 방법적인 것은 별 문제가 아니고,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자성(自性), 즉 불심(佛心)에 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불심(佛心)에 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모든 것을 구분하지 않고서, ‘천지만유(天地萬有)가 상대(相對)나 절대(絶對)나 두루 뭉실하게 모두가 다 이른바 생명 자체다. 불성(佛性) 자체다. 하나님 자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염불(念佛)하면 염불선(念佛禪)이고,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면 화두선(話頭禪)이고, 주문(呪文)을 외우면 주문선(呪文禪)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간단명료합니다.

순수(純粹) 선(禪)의 도리(道理)는 그렇게 되어 있고, 또 사실은 부처님 때부터서 육조 혜능(六祖 慧能)스님 때까지는 화두(話頭)란 말이 없고 그러한 말이 있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분열(分裂)된 때, 즉 북송(北宋) 이후에, 특히 대혜 종고(大慧 宗杲)스님이 화두선(話頭禪)을 강조하면서 유행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강원에서 배우는『서장(書狀)』은 대혜 종고(大慧 宗杲)스님의 저술인데, 대혜 종고(大慧 宗杲)스님은 임제종(臨濟宗) 분입니다. 사실 임제(臨濟) 스님은 화두(話頭)란 말도 하지 않았고, 또 화두(話頭)를 들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송나라 때에만 그런 것이지 달마(達磨)스님 때부터서 당나라 때까지는 화두(話頭)란 말도 없었고, 또한 조사선(祖師禪)이란 말도 없었습니다. 송나라 때 분열된 때부터 ‘꼭 우리들 종파가 옳고 그대들 종파는 방편(方便)이다.’ 이렇게 자시비타(自是非他)하는 가운데서 그러한 말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한국에 들어와서 이조(李朝) 5백 년 동안에 중국과 교류가 되지 않았으므로 별로 좋지 않은 것이 한국에서 딱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참선(參禪) 그러면 곧 화두(話頭)라고 독선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순선(純禪)이라고 한 것은 제가 지은 이름이 아니고 달마(達磨) 때부터 육조 혜능(六祖 慧能)스님 때까지의 순수한 선(禪)을 말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특히『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이것은 달마(達磨) 때부터 육조 혜능(六祖 慧能)스님 때까지의 기록을 소상히 기록(記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達磨)스님 기록(記錄)이라든가, 또는 그에 앞선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기록(記錄)이라든가, 또는『능가경(楞伽經)』기록(記錄)이라든가, 그러한 것이 여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달마(達磨)스님을 비롯하여 이조 혜가(二祖 慧可), 삼조 승찬(三祖 僧璨), 사조 도신(四祖 道信)스님까지는『능가경(楞伽經)』으로 해서 주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오조 홍인(五祖 弘忍)스님 때부터 비로소『금강경(金剛經)』이 들어왔습니다.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이것은 정각(淨覺)스님이란 그 당시의 분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마(達磨) 때부터 육조 혜능(六祖 慧能)스님 때까지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記錄)한 것인데, 1907년 이전에는 이 책이 안 나왔습니다. 1907년에 돈황석굴(燉煌石窟) 막고굴(莫高窟)에서 비로소 돈황문서(燉煌文書)가 발견되었는데『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도 그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그 때가 1907년이기 때문에 1907년 이전에 태어난 분들이나 그 이전에 공부한 분들은『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를 알 수 없었으므로 도신(道信)스님 법문(法門)도 그때는 전혀 몰랐습니다.『전등록(傳燈錄)』이나 그러한 책에 아주 간략한 기록만 있을 뿐이지 소상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07년 이후에 돈황석굴(燉煌石窟)에서『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가 나온 때부터서 비로소 사조 도신(四祖 道信)스님의 행적(行蹟)을 알게 되었습니다. 달마(達磨) 때부터 육조 혜능(六祖 慧能)스님 때까지도 사조 도신(四祖 道信)스님 기록이 굉장히 많고 내용도 아주 소상(昭詳)하고 충실합니다.

 

그리고 사조 도신(四祖 道信)스님은 그 어록(語錄)을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이분 때에 비로소 5백 대중(大衆), 6백 대중(大衆)을 한군데 모아놓고서 집단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삼조(三祖)스님 때까지는 이리 숨고 저리 숨으면서 소수(小數)의 분들이 인연(因緣) 따라서 함께 모여서 공부하다가 사조 도신(四祖 道信)스님 때부터서 비로소 대중적(大衆的)인 것을 선호(選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용도 충실하고 이때야 비로소 체계(體系)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도신(道信)스님께서는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한 권은『보살계법(菩薩戒法)』이란 책이고, 또 한 권은『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란 책입니다. 이렇게 두 권의 책을 냈는데, 그 도신(道信)스님 뿐만 아니라 달마(達磨) 때부터 육조 혜능(六祖 慧能)스님 때까지 모두가 다 보살계(菩薩戒)를 꼭 그때그때 설(說)했습니다.

 

기록이 없는 때도 있지만 특히 사조(四祖)스님 때부터는 기록이 아주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오조(五祖)스님 때도 마찬가지이고, 육조(六祖)스님도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역시 보살계(菩薩戒)를 설(說)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보살계(菩薩戒)는 바로 무상계(無相戒)입니다. 보살계(菩薩戒)를 왜 무상계(無相戒)라고 하는가 하면 상(相)을 여읜 계(戒)이기 때문입니다. 보살계(菩薩戒)는 바로 불성계(佛性戒), 무상계(無相戒)다.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 또는 불성(佛性), 즉 인간과 우주 만유의 본성(本性)에서부터서 나와 있는 우리 인간 존재의 도덕률이기 때문에 보살계(菩薩戒)라고도 하는 것인데 보살계(菩薩戒)는 바로 상(相)을 여의었기 때문에 무상계(無相戒), 불성계(佛性戒) 그렇게 말합니다. 따라서 조사(祖師)스님들이 얼마만큼 계율(戒律)을 중시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1. 염불심시불(念佛心是佛)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도신장(道信章) 제오(第五)라. ‘당조(唐朝)’ 이것은 당나라 때를 말합니다.

‘기주(蘄州) 쌍봉산(雙峰山)’ 기주(蘄州)는 쌍봉산(雙峰山)이 있는 그 지방(地方)의 이름입니다.

도신선사(道信禪師) 승찬선사후(承璨禪師後)’ <要約1>을 보면 찬(璨)에 ②자가 붙어 있지요. 뒤에 나오는 찬선사(粲禪師)는 승찬(僧璨)스님인데 뒤에 가서 주석을 달아두었습니다.

 

승찬(僧璨)스님에게 법을 받은 뒤 도신선사(道信禪師)가 ‘재창선문 우내유포(再敞禪門 宇內流布)라.’ 이 참선법문(參禪法門)을 재차 밝혀서 우주 내에, 이 세상에 유포(流布)를 시켰도다.

그리고 그 도신(道信)스님한테는 ‘유보살계법일본(有菩薩戒法一本)이라.’ 보살계법(菩薩戒法) 일본(一本)이 있고, ‘급제입도안심요방편법문(及制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라.’ 다시『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란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은 굉장히 소중한 책입니다. 참선(參禪)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참선(參禪)을 이끄는 요령이 거기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도 그냥 당신 마음이 내키는 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꼭 부처님 경전을 의지해서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조사(祖師)스님들이 얼마만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중요시 했던가.’ ‘교(敎)와 선(禪)이 하나라는 것을 얼마만큼 역설했던가.’ 이러한 것을 우리가 소상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도신(道信)스님께서『보살계법(菩薩戒法)』일본(一本)과 또『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라는 책을 지어서 ‘위유연근숙자설(爲有緣根熟者說)이라.’ 인연이 있거나 근기(根機)가 수승(殊勝)한 사람들을 위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근기(根機)가 낮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아차법요(我此法要)라.’ 내가 말한 그 법(法)의 요체(要諦)가 무엇인고 하면 ‘의능가경 제불심제일(依楞伽經 諸佛心第一)이라.’ 내가 법(法)을 깨달아가지고서 내 생각대로 말한 것이 아니라 『능가경(楞伽經)』에서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존재가 불심(佛心)이 제일(第一)이다. 어느 것도 불심(佛心)이 아님이 없다. 일체 모두가 다 불성(佛性)이다. 불심(佛心)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러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능가경(楞伽經)』에서 말씀했는데, 사조(四祖)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금 말하는 법(法)의 요체(要諦)는『능가경(楞伽經)』에 있는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하고, 또『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에 있는 일행삼매(一行三昧), 이것이 내가 지금 법문(法門)하는 가장 요긴(要緊)한 뜻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부처님께 법문(法門)을 요청해서 부처님께서 세우신 법문(法門)이『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입니다. 문수보살의 그러한 문의에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法門)인데 그 가운데에 일행삼매(一行三昧)가 있습니다.

 

그래서『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에 의지하면 ‘즉염불심시불(卽念佛心是佛)이라.’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에 있는 그 법문(法門)이 또 염불심시불(念佛心是佛)인데, 이것은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입니다.

염불(念佛)은 하근중생(下根衆生)이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근래에 와서 어느 스님들이 ‘염불(念佛)은 하근중생(下根衆生)이 하고 화두(話頭)는 상당히 근기 있는 분이 한다.’ 이렇게 말하는데 이러한 말들은 부처님을 비방(誹謗)하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염불(念佛)이란 부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는 무엇인가. 우리 신앙(信仰)의 대상인 우주(宇宙)와 인생의 근본적인 생명 자체, 또는 내 마음의 본질(本質)인 것입니다. 부처를 생각하는 것처럼 고귀한 것이 없으며 그것이 바로 염불(念佛)입니다. 그러한 것이 어떻게 해서 방편법문(方便法門)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 경전(經典)에는 그렇게 말씀하신 대목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역시 소승불법(小乘佛法)에서는 석가모니(釋迦牟尼)만 부처다 하고,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출현(出現)하시고 안하시고와 상관없이 대승적(大乘的)인 의미의 언제나 계시는 우주(宇宙)의 생명(生命)이 부처다 하는 대목은 전혀 없습니다. 근본불교(根本佛敎)에서는 불심(佛心)이라든가, 불성(佛性)이라든가, 또는 법성(法性)이라든가 그러한 말도 없습니다.

따라서 ‘염불심시불(念佛心是佛)이라.’ 내가 본래 부처거니 생각하는 그 마음, 즉 염불심(念佛心)이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그 반대로 ‘망념시범부(妄念是凡夫)라’ 망념(妄念)은 무엇이 망념(妄念)인가? 모두가 부처인데 어느 것을 보든지 미운 사람을 보나, 고운 사람을 보나 다 부처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되어야 바른 것인데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모두가 망념(妄念)입니다. 그래서 이 망념(妄念), 즉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범부(凡夫)입니다.

우리 중생은 속을 볼 때는 다 부처뿐이고 법성(法性) 뿐인데 겉만 보니까 미운 사람을 보고, 나쁜 사람을 보고, 범부(凡夫)를 보고는 범부중생(凡夫衆生)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망념(妄念)이며, 망념(妄念)으로 보면 결국은 범부(凡夫)인 것입니다.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에서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말하기를 “세존 운하명일행삼매(世尊 云何名一行三昧)니까.”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합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물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계일상(法界一相)이라.”하셨습니다. 법계(法界)라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이루어진 온 세계라는 뜻입니다. 법계(法界)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일상(一相), 즉 오직 하나의 실상(實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법계일상(法界一相)이란 우주란 것이 하나의 실상(實相)이라는 뜻입니다.

 

법계(法界)가 일상(一相)이거니, 즉 법계(法界)가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실상(實相)이거니, 거기에다가 ‘계연법계(繫緣法界)라.’ 그 법계(法界)에다가 우리 인연(因緣)을 딱 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을 거기에다 둔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도 다른 것이 없는 일진법계(一眞法界)의 법계(法界)에다 우리 마음을 딱 두고서 공부하는 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우주의 실상(實相)뿐이거니,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 이른바 일행삼매(一行三昧)인 것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또 나중에 나옵니다만 일상삼매(一相三昧)라고 하는 것이고, 그 자리에다가 우리의 마음을 두고서 앞생각 뒷생각에 다른 생각이 없이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계속해서 수행(修行)해 나가는 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일행삼매(一行三昧)라는 말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육조(六祖)스님의『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여섯 군데나 설해져 있습니다.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라.’ 수행하는 우리 불자들이 ‘욕입일행삼매(欲入一行三昧)라.’ 만약 일행삼매(一行三昧)에 들어가고자 할진데는 ‘당선문반야바라밀(當先聞般若波羅蜜)이라.’ 마땅히 당(當)자, 먼저 선(先)자, 당선문반야바라밀(當先聞般若波羅蜜)이라. 마땅히 ‘먼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듣고서’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얼마만큼 부처님께서 먼저 이론적(理論的)으로 체계(體系)를 세우라고 역설했던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더 쉬운 말로 하면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이치로 깨닫고서 나중에 닦으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길을 갈 때에 순로(順路)를 모르고, 목표를 모르고 갈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목표를 알고 또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법(法)은 우주(宇宙)의 법(法) 그대로입니다. 닦을 때는 ‘부처가 대체로 무엇인가.’ 또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과 수단이 있는 것인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철학이나 과학이든지간에 무슨 목적이 있다면 반드시 방법론(方法論)이 뒤따라야 됩니다. 따라서 방법론이 없다면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마땅히 먼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듣고서 ‘여설수학(如說修學)이라.’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그대로 닦아서 ‘연후(然後)라.’ 그 연후(然後)에 ‘능입일행삼매(能入一行三昧)라.’ 능히 일행삼매(一行三昧)에 들 수 있느니라. 그러한 뜻입니다.

 

여법계연(如法界緣)이라.’법계(法界)라는 것은 일미평등(一味平等)하기 때문에 법계(法界)가 모두 다른 것이 없이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공부한다면 ‘불퇴불괴(不退不壞)라.’ 후퇴도 없고 파괴할 것도 없으므로 불가사의(不可思議)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자체가 부사의(不思議)한 만공덕(萬功德)을 갖추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부사의(不思議)라 말합니다. 그래서 ‘무애무상(無礙無相)이라.’ 거리낌도 없고, 또한 상(相)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불성(佛性) 뿐인데 어디에 상(相)이 날 수가 있겠습니까.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들이 욕입일행삼매(欲入一行三昧)인데는’, 재차 구체적으로 또 말씀을 했습니다. 그대들 불자들이 마땅히 일행삼매(一行三昧)에 들어가려고 할진데는 ‘응처공한(應處空閑)이라.’ 마땅히 조용하고 잡스러운 것이 없는 데를 취해서 할지니라.

 

시끄러운 데나, 또는 언제나 처소(處所)를 가리지 않고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다 공부할 수 있는 것이 불법(佛法)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있으나, 또는 교육자로 교단에 서나, 어느 때 어느 처소에서나 다 부처님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시끄럽고 잡념이 많으면 또 장애가 되겠지요. 그러기에 초보인들은 선방(禪房)에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적한 곳에 처해서 하라는 그러한 의미입니다.

 

사제란의(捨除亂意)라.’ 산란스러운 마음을 다 버리고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취상모(不取相貌)라.’ 상(相)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금강경(金剛經)』에서 말씀하신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 등이 모두가 상(相) 아닙니까.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즉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가 상(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相)을 두지 말고서 ‘계심일불(繫心一佛)이라.’ 마음으로 생각하는 부처에 대해서 우리 마음을 거기에 딱 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마음을 거기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칭명자(專稱名字)라.’ 오로지 부처님 이름을 외워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지장보살(地藏菩薩) 그러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은 방편법문(方便法門)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은 절대로 방편법문(方便法門)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부처님을 마음 밖에다 두고‘저 극락세계(極樂世界)에 부처님이 계시고 나는 여기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방편(方便)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 ‘일체 존재가 모두가 다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가장 절실한 공부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불(成佛)의 지름길이라고 여기나 저기나 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여러분,『화엄경(華嚴經)』은 일대시교(一大時敎)의 모두를 다 통틀어서 거기에 집합시켜 놓은 경전입니다.『화엄경(華嚴經)』도 마지막에 가서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念)하면서 입법계(入法界)라.’ 법계(法界)에 들어가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성불(成佛)한다는 그러한 내용도 있습니다.

 

용수보살(龍樹菩薩)은 제2의 석가(釋迦)가 아닙니까. 용수보살(龍樹菩薩)은 부처님 다음에서는 그만큼 위대한 분이 없다고 해서 제2의 석가(釋迦)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분도『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이행품(易行品)」에서 염불(念佛)을 역설(力說)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의 마음이 그리워하고 흠모하고 동경하면 그 마음같이 우리 마음을 순화시키는 공부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그리워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리 마음이 정화(淨化)가 됩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 몸뚱이를 몽땅 바쳐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鄕愁)라든가, 그러한 것도 얼마나 순수(純粹)합니까.

 

그런데 하물며 우리 생명의 고향, 마음의 고향인 그 자리,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은 생각하면 할수록 가장 절실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을 위해서 염불(念佛)이 나온 것입니다. 내가 떠나온 고향(故鄕)이고 다시 돌아가야 할 고향이고, 내 생명의 바로 그 자리이고, 너나 나나 어느 누구의 모든 생명의 근본자리가 아닙니까. 그 자리보다 더 소중한 자리는 없습니다. 사실 우주는 모두가 그 자리뿐이므로 그 자리의 이름, 그 자리의 대명사를 외우는 것처럼 우리 마음을 정화(淨化)시키는 법(法)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염념칭명상참회(念念稱名常懺悔)이라.’ 생각 생각에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그것이 바로 참다운 참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은 ‘중생염불불환억(衆生念佛佛還憶)이라.’ 이것은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는 도리어 중생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는 나와 둘이 아니므로 금생(今生)에 나와서 염불법문(念佛法門)을 모르고 죽으면 정말로 불쌍한 일입니다. 자기 고향이 바로 부처고 다시 돌아가야 할 고향도 부처고, 내 생명의 이름도 부처고 우주의 이름도 본래 부처인 것입니다.

사조 도신(四祖 道信)스님은 선종(禪宗)의 네 번째 조사(祖師)입니다. 그러나 네 번째이기는 하지만 육조(六祖)스님 때까지 가장 두드러지게 중생제도를 하신 분입니다. 이분이 하신 말씀인데 이분도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 또는『입능가경(入楞伽經)』에 설해진 법문이다.”고 하셨습니다.

 

『입능가경(入楞伽經)』에 여래선(如來禪)이 나옵니다. 앞에서 제가 오종선(五種禪)의 갈래를 말했으나 이제『능가경(楞伽經)』에서는 사종(四種)의 갈래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이른바 여래선(如來禪)과 최상승선(最上乘禪)은 똑같습니다. 따라서 부처를 생각하는 것만큼 자연스럽고 위대한 것이 없습니다.

 

계심일불(繫心一佛)이라.’ 오직 어느 부처님에게 마음을 낸다는 말입니다. 무슨 부처, 무슨 부처 그렇게 이름은 다르지만 이것은 모두가 하나의 부처입니다. 부처님 이름이 하도 많고 보살님 이름이 하도 많으니까 우리가 혼돈(混沌)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부처님의 공덕(功德)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므로 하나의 개념으로 해서는 표현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달에 가 있는 부처님 기운은 월광보살(月光菩薩)이고, 해에 가 있는 부처님 기운은 일광보살(日光菩薩)이고, 또는 땅에 가 있는, 즉 이 지구 덩어리에 있는 부처님 기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고, 산에 가 있는 부처님 기운은 산왕보살(山王菩薩)입니다. 따라서 무슨 보살, 무슨 보살 그렇게 부처님 이름도 많고 보살님 이름도 많지만 모두가 다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다만 그 공덕 따라서 부처님을 자비로운 쪽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지혜로운 쪽으로 문수보살(文殊菩薩), 원력 따라서 보현보살(普賢菩薩) 그러는 것이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어느 한 부처님에 대해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싶으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불러도 좋은데 다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가운데는 모든 부처님을 다 포괄(包括)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부처님의 본사아미타불(本師阿彌陀佛), 총대명사(總代名詞)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기독교 인구가 지금 많은 수가 된 것이 무엇인고 하면 그 교리가 단순소박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너무나 복잡해서 오랫동안 공부를 해도 무엇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그렇게 하다보면, ‘오! 주여’하고 부르는 쪽으로 마음이 끌려가게 됩니다.

 

부처님의 별공덕(別功德), 자비공덕(慈悲功德), 제공덕(諸功德), 원력공덕(願力功德)으로 해서 관음보살(觀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무슨 보살 다 있지만 부처님의 총대명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 마음을 아주 간소하게 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 부처님에게 마음을 딱 매어서 ‘전칭명자(專稱名字)라.’ 오로지 그 부처님의 이름만 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불방소(隨佛方所)라.’ 동(東)을 향하나 서(西)를 향하나 우리가 서방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라고 서쪽을 향해서 말하는데 이것은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해가 지므로 우리가 돌아갈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서쪽이라고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지 부처님이 꼭 서쪽에만 계신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상징적인 뜻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단신정좌(端身正坐)라.’ 기왕이면 가부좌(跏趺坐) 하듯이 그와 같이 단정히 바르게 앉는 것이 좋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바르게 앉는 것이 우리의 몸도 마음도 더 빨리 맑아지고 통일이 더 빨리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능어일불(能於一佛)에’ 능히 한 부처님한테 대해서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생각에 다른 생각이 끼지 않도록 까지 상속한다면 ‘즉시염중(卽時念中)에’ 즉시(卽時), 곧 우리 생각 중에 ‘능견과거 미래 현재 제불(能見過去 未來 現在 諸佛)이라.’ 능히 과거 미래 현재의 제불(諸佛)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람 모양 같은 부처님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사람 모양 같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生命)의 실상(實相)이고, 생명(生命)의 광명(光明)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공덕(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한지라 우리가 진실하게 부처님의 모양을 꼭 보고 싶어 하면 그때는 우리의 원(願) 따라서 부처님이 광명의 사람 몸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저 지구 덩어리만큼 넓은 부처님을 보고 싶다.’ 이렇게 간절히 마음이 모아진다면 그 원(願) 따라 부처님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또는 ‘이 허공중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수만 수억으로 나타나서 내가 봤으면 되겠다.’ 이렇게 간절히 원(願)을 세우면 또 그와 같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수억 수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功德)은 그와 같이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것이므로 모두를 다 할 수 있고 모두를 다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부처님의 힘이고, 또한 우리 마음의 힘입니다.

 

‘하이고(何以故)’ 왜 그런고 하면 ‘염일불공덕 무량무변 역여무량제불공덕 무이부사의(念一佛功德 無量無邊 亦與無量諸佛功德 無二不思議)라.’ 한 부처님의 공덕(功德)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하니 무량제불(無量諸佛)의 공덕(功德)과 한 부처님의 공덕(功德)이 원래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한 부처님을 본다면 일체존재(一切存在), 즉 과거불(過去佛) ․ 현재불(現在佛) ․ 미래불(未來佛) 모두가 다 부처님으로 태어나신 분인 것입니다. 그리고 현상계(現象界)는 <비록 미혹중생에게는> 부처가 아니라도 성품(性品)으로 본다면 <깨달은 분상에서는> 모두가 다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스님들은 장엄염불(莊嚴念佛)을 다 아시지요. ‘삼백육십만억 일십일만 구천오백 동명동호 아미타불(三百六十萬億 一十一萬 九千五百 同名同號 阿彌陀佛)이라.’ 부처라는 것이 어디 가서 부분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십일만 구천오백(一十一萬 九千五百)이라 하였습니다. 이 수치도 역시 상징적입니다. 그 수가 하도 많으므로 일십일만 구천오백 동명동호 아미타불(一十一萬 九千五百 同名同號 阿彌陀佛)이라 하는 것입니다.

 

‘동명(同名)이라.’ 같은 이름이고, ‘동호(同號)라.’ 같은 호(號)입니다. 김씨(金氏)도 아미타불(阿彌陀佛), 박씨(朴氏)도 아미타불(阿彌陀佛), 나무도 아미타불(阿彌陀佛), 또는 물도 아미타불(阿彌陀佛), 모두 다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이러한 법문(法門)은 나옹대사(懶翁大師)나 태고 보우선사(太古 普愚禪師)나 그러한 분들이 주로 했습니다. 나옹(懶翁)스님은 중국(中國)에 들어가서 임제선(臨濟禪)의 조사스님들에게 선풍(禪風)을 받아온 순수한 선객(禪客)입니다.

이러한 분들이 다 그렇게 말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후대인들은 ‘염불(念佛)은 방편(方便)인 것이고,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면 그것이 바로 참선(參禪)이다. 이렇게들 말을 합니다.

 

우리가 지금 미국 사람들 것을 무비판적(無批判的)으로 수용하듯이 옛날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중국을 대국(大國)으로 섬기고 한국은 속국(屬國)이라고 스스로 자인(自認)했는데 그러한 가운데서 중국에 한 번 들어갔다 나와서 뭐라고 하면 그것이 다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무비판적(無批判的)으로 믿을 때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정통(正統)이 무엇인가.’ 또는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잘못 전해가지고서 지금까지 왜곡되게 지내왔던가.’ 이러한 것에 대해서 한 번쯤 비판해 볼 때입니다.

‘즉시여래진실법성지신(卽是如來眞實法性之身)이라.’ 즉 이러한 것이 다 부처님의 진실(眞實)한 법성(法性)의 몸이며,

역명정법(亦名正法)이라.’ 이렇게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정법(正法)이라고 이름하며,

 

역명불성(亦名佛性)이라.’ 이것이 바로 불성(佛性)이라고 이름하며,

역명제법실상(亦名諸法實相)이라.’ 이것이 모두가 다 실상(實相) 아님이 없다는 그러한 도리이며, 이것이 바로 실제(實際)이며 참말인 것입니다.

역명정토(亦名淨土)라.’ 이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 즉 정토(淨土)이며, 이것이 바로 보리(菩提), 즉 참다운 지혜(智慧)이며,

이 자리가 바로 금강삼매(金剛三昧)이며, 이것이 바로 본 깨달음(本覺), 근본 깨달음인 것입니다.

 

‘역명열반계(亦名涅槃界)라.’이것이 열반계(涅槃界)이며, 또는 반야(般若)이며,

‘명수무량(名雖無量)이라.’ 이름은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더라도

개동일체(皆同一體)라.’ 모두가 하나의 몸인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에 있는 법문(法門)으로 사조 도신(四祖 道信)스님이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을 이와 같이 인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맨 마지막에 있는 ※은 주석(註釋)한 것입니다.

 

2.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

능가사자기 본문에 ‘일체업장해(一切業障海) 개종망상생(皆從妄想生) 약욕참회자(若欲懺悔者)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 시명제일참(是名第一懺) 병제삼독심(倂除三毒心) 반연심각관심(攀緣心覺觀心)이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