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염불수행자료/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28일 우리나라의 정토사상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600년이 지난 후에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고(65년), 그로부터 300년이 흐른 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순도(順道)화상을 보내어 불상과 불경을 전해왔다. 소수림왕 4년(374)에는 아도(阿道)화상이 들어왔으며, 다음해(375년)에는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스님을,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스님을 머무르게 하였으니, 이것이 해동에 불법이 들어온 시초였다.


백제에는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 스님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들어왔고, 이듬해(385년)에 한산에 절을 세워 10인의 승려가 머물렀다.


신라는 문무왕이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는 고구려를 무너뜨렸으며, 그리고 당나라 세력도 완전히 축출하여 삼국을 통일하여 935년 고려에 합병되기까지 하나의 나라로 이어져 내려왔다.


신라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은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이루어졌다고 하나, ⟪삼국유사⟫에서는 소지왕 10년(488)에도 궁중내전에 수도하는 스님이 있었다 하고, ⟪삼국사기⟫에서도 눌지왕(재위 417~458)때에 묵호자라는 스님이 고구려로 부터 와서 모례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을 보아도 그 이전에 신라 사회에 불법이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미타신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시대 진평왕(재위 597~631)때 혜숙(惠宿)이 미타사를 창건하여 염불수행을 하였고, 선덕여왕 5년(636)에 당나라로 유학 갔다가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한 자장(慈藏)이 ⟪아미타경소⟫와 ⟪아미타경의기⟫를 찬술하였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아미타정토 신앙이 본격적으로 신라 사람들의 생활이나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시대(재위 661~681)부터이며, 특히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것은 경덕왕시대(재위 742~765)이후라고 한다.


6,7세기경 중국의 정토교학은 담란, 도작, 선도에 의해 크게 선양되었으며, 신라에서는 원효, 법위, 현일, 경흥, 원측 등이 배출되어 신라 정토교학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원효(617~686)는 동문인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였으나 도중에 단념하고 귀국하여 주로 경주의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저술 활동에 힘썼다. 그는 파계하여 설총을 낳은 후에는 속복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거사라 부르면서 연극배우들이 연기할 때 쓰는 표주박 같은 것을 만들어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을 교화하였다. 이에 모든 사람들은 그의 교화에 힘입어 아미타불의 명호를 알고 염불을 했다고 한다. 신라불교의 염불신앙의 대중화는 이때가 그 절정에 달했었다.


고려시대 미타정토신앙은 선종을 위시하여 화엄, 법상, 천태, 밀교 등의 각 종파에 폭 넓게 받아들여졌으나 하나의 독립된 종파로는 형성되지 못했다.


성종1년(982)에 도성암에서 성범(成梵)스님이 처음으로 만일미타 도량을 열어 50여 년 동안 아미타불 염불 수행을 하였고, 인종 7년(1129)에 법상종 출신 진억대사가 오대사를 수축하여 그곳에서 수정결사(水晶結社)라는 염불도량을 시설하여 ⟪점찰업보경⟫에 의해 선악을 점으로 살펴 참회하고 서방정토의 왕생을 기원하였다. 선종의 보조국사(1158~1210)는 선종에서 염불선(念佛禪)의 형식으로 체계화한 ⟪염불요문⟫을 지어 아미타불을 염하라 하였고, 원묘국사 요세(1163~1245)는 전남 강진의 만덕사 옛터에 80여 칸의 대가람을 지어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개설하여 법화참을 닦는 것을 행법으로 삼아 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하였다. 진각국사(1178~1234)는 어머니의 병을 간호할 때 지성으로 염불하여 마침내 염불삼매를 얻었고, 그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보조국사를 찾아가 출가하여 그를 이어 제2세(世)가 되었다.


고려 말엽 천태종 스님으로서 운묵 무기는 천태종 승려들의 세력화, 귀족불교화 하는 것과 선불교의 행위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정토문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서민적인 정토사상과 염불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각 종파에 폭 넓게 받아들여진 염불신앙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초기 태종(1401~1418)때 부터 배불정책의 일환으로 종파의 통폐합이 단행되어 조선불교는 통합 종단의 형태로 변해 가고 있었다. 세종 때의 선교 양종, 임진왜란의 총섭시대 등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이 탄생할 때까지 종파성은 없었고 통불교적인 조선불교였다.


함허(1376~1433)스님은 일찍이 염불을 권하여 대중 불교의 씨앗을 뿌렸고, 서산(1502~1604)스님은 염불의 깊은 뜻을 전하며 범부의 수행방편으로 적극 권하였다. 이 시대의 염불은 산문에서 자력 수행의 방편으로 수용하였고, 민중들은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지하는 칭명염불을 널리 수행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불교는 전반적으로 활동이 미약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불교의 세력이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간섭까지 심하여 사찰의 제정도 어려웠다. 이 시대에 각 사찰에서는 제정확보와 불교의 부흥을 위해 각종의 계(契) 모임과 만일 염불회(萬日念佛會)라는 수행결사가 생기게 되었다. 한국불교 교단사에 염불결사가 가장 많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였다.


만일염불회의 효시는 신라시대 758년 발징 화상이 지금의 건봉사에서 개설하여 그 후 제5차까지 회향하였고, 제6차는 1998년 8월6일 입제하여 2025년 12월21일에 회향할 예정이다. 그 위의 만일회는 범어사 내원암의 미타계, 고양군 흥국사의 만일회 등인데, 이미 다 회향하였다. 그런데 근간에 성남시 청계산 정토사(淨土寺)에서 한보광 스님이 회주가 되어 염불신행인들이  만일염불결사회를 개설하여 염불에 정진하고 있다.


조선불교는 고성군 건봉사를 제외한 각 본사의 말사에 있는 염불당을 선당으로 변경하는 등 각 염불당이 폐지되면서 산사의 염불수행의 북소리는 차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후 10여년이 흐른 후 1924년 김천 직지사 서전암에서 윤퇴운 스님이 염불회를 시설하면서부터 해인사 등에서 다시 염불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으나 사찰안의 염불수행은 건봉사와 정토사를 제외하고는 연재 거의 맥이 끊어지다시피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근간 청계산 정토사의 이 염불 수행이야말로 꺼져가는 이 땅의 염불의 불씨를 다시 살려 놓는 장한 일로서 범부 중생을 구제하고 염불 수행의 대중화를 위해 참으로 찬양해 마지않는다. 이러한 염불 결사가 앞으로 우후죽순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지길 충심으로 기원한다.

'염불수행자료 > 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일 도솔천과 극락세계  (0) 2013.08.22
29일 서쪽을 향하여 앉다  (0) 2013.08.15
27일 결사(2)  (0) 2013.08.01
26일 결사(結社) (1)  (0) 2013.07.25
25일 극락세계  (0) 2013.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