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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 왕생집

221. ●학희재문학(郝熙載文學)

221. ●학희재문학(郝熙載文學)

대명(大明)의 학희재(郝熙載)는 전당(錢塘) 사람으로 법명(法名)은 광정(廣定)이다 평생(平生) 충직(忠直)하고 진실(眞實)하여 학교(學校)에서 덕행(德行)으로 이름이 났다 만년(晩年)에 불교(佛敎)에 귀의(歸依)하여 좌선(坐禪)과 예송(禮誦)으로 밤낮을 잊었다 만력(萬歷) 신해(辛亥)<1611> 봄 2월(月)에 병(病)이 들었는데 매일(每日) 잠에서 깨어나서는 내가 꿈에서 부처님을 친견(親見)코자 했으나 부처님은 뵈옵지 못하고 숲속에 모여 있는 새 떼들만 보았다 하였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27일(日) 정오(正午)에 갑자기 머리를 들어 창(窓)밖을 바라보고는 그의 아들 세한(世翰)에게 오늘 헤어지면 이젠 그만이다하고는 가인(家人)을 돌아보며 은전(銀錢)을 준비(準備)하게하였다 얼마 후(後) 내가 조금 전(前)에는 혹시(或是) 관리(官吏)를 만날까하여 미리 준비(準備) 했던 것인데 지금은 필요(必要)없게 되었다하였다 삼고(三鼓)가 되자 두 명의 동자(童子)가 와서 나를 맞이한다. 부처님의 연화대(蓮華臺)가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간다하고는 편안(便安)히 갔다.


222. ●주(朱)씨

대명(大明) 진(陳)군의 어머니인 주(朱)씨는 오군(吳郡) 가정(嘉定)사람으로 준천(濬川) 거사(居士)의 부인(婦人)이다 천성(天性)이 효자(孝慈)하여 본디부터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였으나 나이 81세(歲)에 그의 아들이 운서(雲樓)로 찾아와 염불왕생(念佛往生)을 지도(指導) 받게 한 이후(以後)로 정업(淨業)에 독실(篤實)히 뜻을 두게 되었다 2년(年)이 지나 병색(病色)을 보이더니 죽기 3일전(日前)에 집 앞에서 누가 큰 소리로 주씨(朱氏)의 이름을 세 번 불렀다 그러자 주씨(朱氏)가 두 푸른 옷을 입은 자(者)가 여기 있다하였다 그 때는 이미 병세(病勢)가 차츰 쇠잔(衰殘)해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허리를 곧게 세우고 단정(端正)히 앉았다.

 

아들들이 자리에 눕도록 권(勸)해드렸으나 곧 그대로 편안(便安)히 갔다 시체(屍體)를 중당(中堂)으로 모셔 위를 향(向)하여 눕혔더니 시체(屍體)가 스스로 서(西)쪽을 향(向)하여 돌아누웠다. 온 식구가 깜짝 놀라며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감응(感應)한 것이라고 생각 하였다


찬(讚)

학군의 아버지와 진군의 어머니는 모두 청의(靑衣)동자(童子)의 상서(祥瑞)가 있었으니 당연(當然)히 인천(人天)에 태어날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暫時)후(後) 한분은 부처님의 연대(蓮臺)가 나타나셨고 한분은 서(西)쪽을 향(向)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니 또한 당연(當然)히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하실 것 이었다. 이렇게 두 가지 모양(模樣)이 동시(同時)에 나타났으니 왕생(往生)하리라는 것을 확정(確定)할 수는 없다. 설사 왕생(往生)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왕생(往生)은 그다지 멀지 않을 것이다.


223. ●서(徐)씨

대명(大明) 육(陸)군의 어머니인 서(徐)씨는 가정(嘉定) 사람으로 흘어미가

된 후로 정업(淨業)에 마음을 쏟게 되었다 남편(男便)이전에 천금(千金)을 빌려준 적이 있었는데 문서(文書)를 불태우고는 돌려받지 않았으며 패물(佩物)을 꺼내 남에게 보시(布施)하고는 늘 부처님 곁에서 예송(禮誦)하는 일로 날을 보냈다 이렇게 한지 10년(年) 만에 하루 저녁에는 심부름하는 사람을 부르더니 동방(東方)에 광명(光明)이 비치는것이 보이느냐? 내가 이젠 왕생(往生)할 때가 다가왔다 너희들도 나를 도와다오하고는 큰소리로 염불(念佛)하고는 합장(合掌)하고 갔다


224. ●과광태(戈廣泰)거사

대명(大明) 과이안(戈以安)의 법명(法名)은 광태로 전당(錢塘)사람이다 성품(性品)이 매우 효순(孝順)하고 평소 널리 선행(善行)을 쌓았으나 이를 감추고 남이 알아주는 것을 원(願)치 않았다 만년(晩年)에는 부처님을 섬기는 일에 정성(精誠)을 다 바쳐 영지사(靈芝寺)의 현소(玄素)스님과 함께 봄가을 두 때로 염불회(念佛會)를 열었고 화엄경(華嚴經) 등 다섯 가지의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였다 어느 날 사람들에게 가장 큰 걱정은 갈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서방(西方)으로 돌아갈 자량(資糧)을 마련해야하겠다"하고는 문(門)을 닫아걸고 조석(朝夕)으로 예송(禮誦)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미리 돌아갈 날짜를 그음 달 21일(日)로 정(定)해 두었다 이틀 전(前) 저녁에 모자(母子)가 둘러앉아 바라보며 눈물을 짓고 있으니 거사(居士)가 웃으며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무얼 슬퍼하느냐 나는 정토(淨土)에 마음을 기울여 미타(彌陀)를 친견(親見)하였다 너희들은 정애(情愛)에 걸려 나의 정념(定念)을 어지럽히지 말라"하고는 현소(玄素)스님에게 다정(多情)히 조념(助念)을 부탁(付託)하며 여러 가지 대화(對話)를 나누고는 때가되자 고요히 갔다


찬(讚) 

어떤 스님이 명부(冥府)에 들어가서 보니 거사(居士)가 고요한 방에 편안(便安)히 앉아 있는데 책상(冊床) 위에는 온갖 경전(經典)들이 쌓여있었고 뜰에는 붉은 대와 바위산이 어우러져 수려(秀麗)하기가 마치 동천(洞天)과 같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거사(居士)는 마땅히 극락(極樂)에 왕생(往生)했었어야 할 것인데 어찌 하여 아직도 명부(冥府)에 머물고 있는 것 일까? 아마 평소에 송경(誦經)에 뜻이 간절(懇切)하여 경전(經典)에 대한 소망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탓으로 나중에는 왕생(往生)하리라고 여겨진다


225. ●두(杜)거사(居士)

대명(大明)의 두거사(杜居士)는 순천부(順天府) 완평현(宛平縣)사람으로 서산(西山 )서광사(瑞光寺) 곁에 있는 낡은 사당(祠堂)에 숨어 집안일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30년(年) 동안 염불(念佛)에만 전념(專念)하였다 내가 고향(故鄕)사람인 동광책(童廣策)에게 그를 찾아보게 한 적이 있었는데 거사(居士)가 어디서 왔는가고 묻기에 항주라고 대답(對答)했더니 그대가 항주 사람이라고 하니 운서굉(雲樓宏) 공(公)을 아시오? 하였다한다


저의 스님이십니다. 하고 대답(對答)했더니 거사(居士)는 합장(合掌)하고 염불(念佛)하며 다시 다른 말이 없었다 한다. 죽을 때가 되어 9 일(日) 동안 예참(禮懺)하여 예참문(禮懺文)이 간절(懇切)한 곳에 이르자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며 음식(飮食)을 끊고 몇 모금의 물만을 마실 뿐이었다. 그렇게 예참(禮懺)을 마치고서는 앉아서 갔다 보름동안 안색(顔色)이 생시(生時)와 같았고 오색(五色)구름이 지붕위에 서리고 있는 것을 원근(遠近)의 사람들이 모두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