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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연종집요

三. 극락에 왕생하였다가 다시 와서 중생을 제도(濟度)한 실예(實例)

三. 극락에 왕생하였다가 다시 와서 중생을 제도(濟度)한 실예(實例)

 

 

각명묘행보살(覺明妙行普薩)은 중국 진(晉)나라 때의 사람으로 빈한한 집에 태어났는데 그 빈고(貧苦)로 인하여 발원하기를 『내가 전부터 지은 행업(行業)으로 이 빈궁고(貧窮苦)를 받는 것인데, 내가 만약 아미타불을 뵈옵고 극락국에 나서 일체 공덕을 성취하지 못하면 설사 몸을 잃어버리더라도 마침내 퇴식(退息)하지 않겠다』하고 七일 七야를 일심(一心)으로 염불하다가 마침내 아미타불의 상호(相好)광명을 보니 부처님이 각명묘행(覺明妙行)이란 칭호를 주시며 친히 수기(授記)하심을 받고 그 후 75세에 앉은 채로 해탈(解脫)하여 극락에 왕생하였다가 다시 이 세계에 와서 비구 거사 왕 신(臣) 여인 걸인 등이 되기도 하며 혹은 현신(顯身)혹은 은신(隱身)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하였다.

 

 

: 퇴식(退息) 관계하던 일에서 물러나서 쉼을 말한다.

 

    제도(濟度) 미(迷)한 세계에 있어 생사(生死)만을 되풀이하는 중생들을 건져 내어 생사가 없는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함을 말한다. 도(度)는 즉 도(道)이다.

 

 

 

            四. 극락삼성(極樂三聖)이 극락 왕생을 예보(豫報)

 

연종(蓮宗)의 초조(初祖)혜원대사(慧遠大師)가 여산(廬山)동림사(東林寺)에서 못에 백련(白蓮)을 심고 123인으로 더불어 백련사(白蓮社)를 설치하고 三十년 동안 염불의 정업(淨業)을 닦았다. 처음 十一년중에 극락삼성(極樂三聖)을 세 번 뵈었으나 대사는 발설하지 아니하더니 三十년 되던 七월 그믐날 저녁에 아미타불 신(身)이 허공에 가득하고 원광(圓光)중에 여러 화불(化佛)이 계시며 관음, 세지 두 보살이 좌우에 모시고 서 계셨는데 아미타불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본원력(本願力)으로 와서 너를 위안(慰安)하노니 七일후에는 네가 내 나라에 왕생하리라』하셨는데 대사는 八월 초엿새에 대중을 모아 훈계(訓戒)하고 단정하게 앉아 화거(化去)하니 나이 八十三세이다.

 

 

 

          五 .극락삼성(極樂三聖)이 대중(大衆)을 내영(來迎)

 

신라 경덕왕(景德王)17년 (서기 758년)무술(戊戌)년에 고성현(固城懸)원각사(圓覺寺 고려 때에는 烈山縣 西鳳寺로, 현대에는 固城郡 乾鳳寺로 개명 하였다.) 에서 발징화상(發徵和尙)이 승려 정신(貞信) 양순(良順)등 31인과 더불어 염불만일회(念佛萬一會)를 설치하고 염불하였는데 신도 1820인이 스스로 발심(發心)하여 그중 120인은 의복을 공급하고 1700인은 식량을 공급하더니 원성왕(元聖王)3년 (서기787년)정묘(丁卯)년에 도량(道場)문밖에 큰물이 나서 넘치며 아미타불이 관음 ,세지 두보살과 더불어 자금연대(紫金連臺)를 타시고 문 앞에 이르러 금색 팔을 펴시어서 염불대중을 접인(接引)하시니 대중이 크게 기뻐 뛰면서 좋아하였고 부처님은 대중을 거느리시고 반야선(般若船)에 올라 극락으로 다시 돌아 가셨는데, 이때에 도량승려 31인은 육신으로 하늘로 올라가 상품상생(上品上生)왕생하고 의복과 식량을 공급하던 염불신도 1820인 중 913인은 일시에 단정히 앉아서 화(化)하여 상품상생에 왕생하고 다른 18인은 상품중생(上品中生)에, 31인은 하품하생(上品下生)에 각기 왕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