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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 왕생집

129. ●소식학사(蘇軾學士)소동파(蘇東坡)

129. ●소식학사(蘇軾學士)소동파(蘇東坡)

송(宋) 소식(蘇軾)은 호를 동파(東坡)라 하고 관직(官職)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남(南)으로 귀양 가는 날 아미타(阿彌陀)상(像) 한축(軸)을 그려 행낭(行囊)에 넣어가지고 갔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이것은 소식(蘇軾)이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하는 징표(徵標)다 하였다 어머니 정(程)씨가 돌아가시자 남겨 두신 비녀와 귀걸이를 팔아 호석(胡錫)이라는 공인(工人)에게 부탁(付託)하여 미타(彌陀)상(像)을 그려 왕생(往生)을 천도(遷度)하였다


찬(贊)

노천(老泉)소식(蘇軾)의 아버지는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遷度)하기 위하여 일찍이 극락원(極樂院)에 여섯 분의 보살상(菩薩像)을 조성(造成)한 적이 있었고 자곡(子曲) 소식(蘇軾)의 동생도 역시(亦是) 매우 가까이 법문(法門)에 왕래(往來)하였다 이렇듯 소(蘇)씨가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한 것은 대(代)를 이은 것 이었다 세상(世上)에는 서방(西方)징표(徵標)라는 것을 새기는 자(者)가 있는데 이것은 동파(東坡)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말을 덧붙여 선전(宣傳)한 다 안목(眼目)을 갖춘 자(者)는 거짓을 인(因)하여 진실(眞實)까지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


130. ●장무진승상(張無盡丞相)

송(宋)나라 장상영(張商英)은 처음에 부인(婦人) 향(向)씨로부터 발심(發心)하여 불법(佛法)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호(號)를 무진(無盡)거사(居士)라고 하였다 그의 발원문(發願文)에 이런 것이 있다 이 세계(世界)와 오탁(五濁)의 어지러운 마음을 생각해 보면 정관(正觀)하는 힘도 없고 요인(了因)의 힘도 없어서 자성유심(自性唯心)을 능(能)히 깨닫지 못 하나이다. 삼가 석가세존(釋迦世尊)의 금구(金口)의 가르침을 따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전념(專念)하려 하옵노니 세존(世尊)의 원력(願力)으로 섭수(攝受)하사 과보(果報)가 다하는 날 극락(極樂)에 왕생(往生)케 하소서 흘러가는 물에 배를 타듯 자력(自力)을 들이지 않고 바로 이르게 하소서


찬(贊) 

무진거사(無盡居士)는 도솔열(兜率悅)공(公)에게서 선종(禪宗)을 깨달았으면서

정성(精誠)을 다해 안양(安養)에 전념(專念)하였으니 그의 책략(策略)은 치밀(緻密)한 것 이었다 향산(香山)으로부터 이 네 분의 공(公)에 이르기까지 비록 서방(西方)을 감응(感應)한 사실(事實)은 자세(仔細)히 기록(記錄)되어 있지 않지만 그 원인(原因)을 근거(根據)로 하여 결과(結果)를 살펴보건대 서방(西方)에 왕생(往生)하지 않았으면 어느 곳에 태어났으랴


총론(總論)

내가 듣기에 고덕(高德)이 말하기를 사대부(士大夫)로서 총명(聰明)이 출중(出衆)한 자(者)는 모두 전생(前生)에 중노릇하던 자(者)였다 하였다. 그런데 의심(疑心)스러운 점은 끝내 미혹(迷惑)하여 돌이키지 못하는 자(者)는 열에 아홉이라면 숙세(宿世)의 인연(因緣)을 등지지 않는 자(者)는 겨우 열에 하나일 뿐이니 그 까닭은 무엇일까?


오탁악세(五濁惡世)에는 퇴보(退步)할 수밖에 없는 많은 인연(因緣)들이 잠재(潛在)하고 있어서 비록 어진자(者)라 할지라도 이를 면피(免避)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械)선사의 후신(後身)은 소동파(蘇東坡)요 청선사(淸禪師)의 후신(後身)은 증노공(曾路公)이며 철선사(喆禪師)의 후신(後身)은 부귀(富貴)에 빠져 근심과 괴로움이 많았던 어떤 자(者)라 하였다


소동파(蘇東坡)는 법문(法門)에 가장 가까이 했던 분이니 증(曾)공이 이왕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 철선사(喆禪師)의 후신(後身)은 그 미혹(迷惑)함이 너무 심(甚)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고금(古今)의 선지식(善知識)들이 사람들에게 오탁(五濁)은 버리고 정토(淨土)를 찾게 했던 것이니 그렇다면 류유민(劉遺民)이하의 여러 군자(君子)들은 그 소득(所得)이 적지 않았을 것은 너무나 당연(當然)한일이 아니겠는가.


 처사(處士)의 왕생(往生)

 

131. ●주속지(周續之)

송(宋)나라 주속지(周續之)는 안문(雁門)사람이다 열두 살에 오경(五經)과 오위(五韓)에 통달(通達)했으므로 십경동자(十經童子)라고 불렀다 한가(閑暇)한 곳을 좋아하여 공경(公卿)과의 교류(交流)를 피(避)하고 언제나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여산혜원법사(廬山慧遠法師)를 섬겨 연사(蓮社)에 참예(參詣)하였다. 문제(文帝)가 즉위(卽位)하자 그를 불러 함께 담론(談論)한 후(後)매우 기뻐하였다


누가 처사(處士)의 신분(身分)으로 임금의 뜰을 밟으니 어떠했습니까? 하고 묻자 마음이 조정(朝廷)에 치달리는 자(者)는 세속(世俗)을 질독과 같이 여기겠지만 마음이 이 두 가지에서 떠난 자(者)는 시정(市井)이나 조정(朝廷)이 바위 돌 속일 뿐이다 하고 대답(對答)하였다 그래서 당시(當時)에 그를 통은선생(通隱先生)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종산(鍾山)에 살면서 전심(專心)으로 염불(念佛)하여 나이가 들수록 더욱 돈독(敦篤)하였다 하루는 공중(空中)을 향(向)해 부처님이 오시어 나를 맞이한다 하고는 합장(合掌)한 채 갔다


찬(讚)

주속지(周續之)는 시중이나 조정(朝廷)이 바위굴속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그렇다면 서방(西方)이나 동토(東土)가 다를 바 없다하는 뜻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염불(念佛)하며 왕생(往生)할 길을 찾았으니 그는 진정(眞正) 이롭고 해로움을<이해(利害)>알았던 것이다 고인(故人)의 이런 게송(偈頌)이 있다 높은 산(山)이나 평지(平地)가 모두 서방(西方)이나 집에 이르지 못한 자(者)는 희론(戱論)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