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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 왕생집

122. ●매여능 현령(梅汝能 縣令)

122. ●매여능 현령(梅汝能 縣令)

송(宋) 매여능(梅汝能)은 상숙(常熟) 사람으로 벼슬은 현령(縣令)을 지냈다 평소부터 정업(淨業)에 뜻을 두었더니 어느 날 꿈에 어떤 스님이 종이 백(百) 폭을 주는데 찢어보니 16 자(字)의 글자가 되었다 이 사실을 동령조(東靈照)스님에게 물어보니 열여섯 자(字)란 어찌 십육관경(十六觀經)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그때 마침 어떤 스님이 경전<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주고는 홀연(忽然)히 보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경(經)을 읽고 염불(念佛)하며 스스로 왕생(往生)하기 위하여 마음을 보인다하고 이름 하였다. 그때 읍(邑)의 생(生)공이라는 분이 장육(文六)의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상(像)을 조성(造成)하였는데 재산(財産) 백만(百萬)을 보시(布施)하여 장식(粧飾)하였다 그랬더니 법당(法堂)앞의 못에 한 쌍의 백련(白蓮)이 피었는데 꽃잎이 백 잎이나 되었다 그해 겨울에 병(病)없이 죽었다


123. ●잠정국(昝定國)학유(學諭)

송(宋)나라 잠정국(昝定國)은 호(號)가 생재(省齋)라 주학유(州學諭)를 지냄이라 항상(恒常) 염불(念佛)하면서 정토(淨土)의 모든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함이라 매월(每月) 24일(日)마다 승속(僧俗)을 모아서 경(經)을 외우고 염불(念佛)하였다 가정(嘉定)사년(四年)꿈에 청의동자(靑衣童子) 고(告)하여 말하되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이 하여금 그대를 부르심이라 삼일(三日)후(後)에 응당(應當)히 저 나라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할 수 있음이라 날이 이르자 목욕(沐浴)하고 다시 깨끗한 의복(衣服)으로 갈아입고

염불(念佛)하면서 가부좌(跏趺坐)하여 화거(化去)함이라


124. ●풍제천(馮濟川) 간의(諫議)

송(宋)나라 풍즙(馮楫)은 호(號)가 제천(濟川)이라 수녕(遂寧)사람이라 태학(太學)을 말미암아 등제(登第)함이라 <과거(科擧)에 오름이라> 처음에는 구도(求道)함에 선림(禪林)을 찾자 구(求)함이나 만년(晩年)에는 전일(專一)하게 정업(淨業)을 숭상(崇尙)하였다 서방문(西方文)과 미타참의(彌陀懺儀)를 찬술(撰述)함이라 후(後)에 급사(給事)가운데 장수(將帥)로써 로남(瀘南)에 출정(出征)했다가 도속(道俗)을 인솔(引率)하여 계념회(繫念會)<염불회>를 만들어 미치여 공주(邛州)를 다스림에 이에 후청(後廳)<뒷마루>에 고좌(高座)를 시설(施設)하고 대궐(大闕)을 향(向)하여 엄숙(嚴肅)히 절하고 승의(僧衣)<스님의 옷>을 입고 자리에 올라 관리(官吏)를 사례(謝禮)하여 사퇴(辭退)하고 주장자(拄杖子)를 무릎위에 비껴 얹고는 그리하여 화거(化去)함이라


찬(贊)

전등록(傳燈錄)에 공(公)에 대한 기록(記錄)이 실려 있는데 처음에는 용문원(龍門遠)을 참예(參詣)하였고 다음에는 묘희(妙喜)를 참예(參詣)하여 각각(各各) 깨달음이 있었다. 임종(臨終)에 미리 기한(期限)을 정(定)하고 자리에 올라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무릎위에 얹고는 죽었다 그 자재(自在)하고 분명(分明)한 모습(模襲)은 완연(宛然)히 선문(禪門)의 여러 종사(宗師)들의 풍격(風格)그것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그의 염불왕생(念佛往生)에 대해서는 언급(言及)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저술(著述)하는 자(者)의 뜻을 세우는 입장(立場)이 같지 않고 각각(各各) 소중(所重)히 여기는 바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저<전등록(傳燈錄)>은 직지인심(直指人心)만을 소중(所重)히 여겼으므로 으레 심지(心地)를 밝힌 부분(部分)만을 취(取)하고 정토(淨土)는 생략(省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회옥(懷玉)은 금대(金臺)가 두 번이나 이르렀고 원조(圓照)는 연꽃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사실(事實)을 아무것도 기록(記錄)하지 않았으나 여기[왕생(往生)집(集)]서는 이 점(點)을 상세(詳細)히 기록(記錄)한 것은 정토(淨土)로 돌아가는 것을 소중(所重)히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평소에 염불(念佛)하여 왕생(往生)에 대(對)해 대답(對答)한 것을 살펴보면 심성(心性)을 밝히는 것이 그 가운데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만약 덕(德)을 소중(所重)히 여긴다면 안자(顧子)를 덕행(德行)의 조목(條目)에 나열(羅列)하고 정사(政事)에 대한 부분(部分)에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요 재주를 소중(所重)히 여긴다면 안자(顔子)는 임금을 보필(輔弼)할만한 그릇을 갖추었다 하고 덕행(德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亦是) 각기(各其) 그 입장(立場)이 같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정업(淨業)을 닦는 자(者)는 돈독(敦篤)히 믿고 의심(疑心)치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