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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지관법문修止觀法門 정수행正修行 제6

7. 수지관법문修止觀法門 정수행正修行 6

 

6장 바른 수행修行을 할 것

 

修止觀 有二種 一者於坐中修 二者歷緣對境修.

지관止觀을 수행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좌선 중에서 수행하는 것이고, 둘은 생활환경을 지내면서 여러 가지 경계境界에 대처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第一 於坐中修止觀者 於四威儀中 乃皆得學道 坐爲最勝故 先約坐以明止觀. 略出五意不同 一者 對破初心麤亂修止觀 二者 對治心沈浮病修止觀 三者 隨便宜修止觀 四者 對治定中細心修止觀 五者 爲均齊定慧修止觀.

 

첫째, 좌선 중에서 지관을 수행하는 것인데,

일상생활의 거동[四威儀=行住坐臥] 속에서 곧, 모두, 길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지만, 좌선이 가장 훌륭한 것이 되기 때문에, 우선 좌선과 결부시켜 그로써 지관을 밝히겠다. 간략하게 다섯 가지의 뜻이 다른 것을 내놓으면,

 

처음에 마음이 크게 산란한 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이고,

마음이 가라앉거나 뜨는 병을 퇴치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이며,

편의에 따라 지관을 수행하는 것이고,

선정중의 미세한 마음을 퇴치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이며,

선정과 지혜를 균일하게 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이다.

 

第一 云何名爲 對破初心麤亂修止觀 所謂行者 初坐禪時 心麤亂故 應當修止 以除破之 止若不破 卽應修觀 故云 對破初心麤亂修止觀. 今明修止觀 卽爲二意 一先明修止 二次明修觀.

 

, 무엇을 이름하여, 처음에 마음이 크게 산란한 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수행자는 처음으로 좌선할 때, 마음이 크게 흩어지는 까닭에 반드시 지를 수행하여 그로써 이것을 타파하여라. 가 만약 타파하지 못한다면 곧 관을 수행하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처음에 마음이 크게 산란한 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지관止觀을 수행하는 것을 밝히면, 즉 두 가지 뜻이 되는데, 먼저 지를 수행하는 것을 밝히고, 다음으로 관을 수행하는 것을 밝힌다.

 

止有三種 一者 繫緣守境止 所謂 繫心鼻隔 臍間等處 令心不散. 故經云

 

()에 세 가지가 있는데,

 

계연수경지繫緣守境止(에 걸고 경을 지키는 지) 인데 이른바 마음을 코와 배꼽 사이의 중간쯤 되는 곳에 매어 달고,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에 말씀하시되,

 

繫心不放逸 亦如猴著鎖

 

마음을 매어 달고 멋대로 날뛰게 하지 않으며

또한 마치 원숭이[]를 쇠사슬에 묶어 놓은 것처럼 하여라.

<유교경遺敎經>

 

二 制心止者 所謂 隨心所起 卽便制之 不令馳散. 故經云

 

제심지制心止(마음을 억제하는 지)라는 것인데, 이른바 마음이 일어나는 바에 따라서, 곧 이것을 억제하여 흩어져 달아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경에 말씀하시되,

 

此五根者 心爲其主 是故汝等 當好制心

이 다섯 가지 근[五根]이라는 것은

마음을 그 주인으로 한다.

그런 까닭으로 그대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억제하여라. <유교경遺敎經>

 

此二種 皆是事相 不須分別

 

이 두 가지는 모두 사상事相이니, 옳고 그르다고 하는 분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

 

第三 體眞止者 所謂隨心所念 一切諸法 悉知從因緣生 無有自性 則心不取 若心不取 則妄念心息 故名爲止. 如經中說

 

체진지體眞止(을 체로 하는 지) 인데,

 

이른바 마음이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모든 제법諸法이 있고, 모두가 다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그 자체의 본질성本質性(자성自性)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면, 곧 마음에 취할 것이 없고, 만일 마음에 취할 것이 없으면, 곧 허망한 생각의 마음이 그쳐진다. 그런 까닭에, 이름하여 지라고 한다.

에 설하여진 것과 같다.

 

一切諸法中 因緣空無主 息心達本源 故號爲沙門

일체 우주만유宇宙萬有 속에서

인연은 한 것이며 주체자主體者가 없다.

마음이 그치면 그 근원[本源=空性]에 이르니

따라서 이르되 사문沙門[비구比丘]이라고 한다.

 

夫行者 初學坐禪 欲修十方 三世佛法者 應當發重誓願 度脫衆生 求無上道 其心堅固 猶若金剛 精進勇猛 不惜身命 若不成就 一切佛法 終不退轉. 然後 於端坐中 正念思惟 一切諸法 眞實之相 所言一切諸法者 卽是約心 明一切法也. 如一切善法不善法無記法 一切有漏煩惱法 一切三界有爲 生死因果法 皆因心有 故十地經云

 

대저 수행자가 처음으로 좌선을 배워서 시방 삼세(三世=과거過去현재現在미래未來)의 불법을 수행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무거운 서원(사홍서원四弘誓願)을 일으켜 중생을 제도 해탈시키고 최고의 깨달음을 구하여야 한다. 그 마음은 견고하여 마치 금강석과 같고, 정진하는데 용맹스럽고 목숨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만일 모든 불법을 성취하지 못하면 끝내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단정하게 좌선을 하면서, 바른 관념[正念]으로 모든 법의 진실 된 모습을 생각하여라.

 

이른바 모든 법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이 마음과 결부되어 모든 법으로 밝혀지는 것이다. 모든 선법善法, 악법,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 법[無記], 모든 유루有漏의 번뇌 법, 모든 삼계三界(무색계無色界)의 유위有爲, 생사인과법生死因果法 등등은 모두 마음으로 인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십지경十地經(화엄경십지품華嚴經十地品)에 말씀하시기를,

 

三界無別法 唯是一心作

삼계三界에 따로 법이라는 것이 없다.

다만 이것이 한마음의 작용이다.

 

約行者 知心無性 豈有諸法之實 約諸法不實 卽是虛誑 則空無有主 約空無有主 則不可取 若不可著 卽妄念心息 若妄念心息 卽寂然無爲 夫無爲者 卽是諸法之本源 若能安心本源 則無染著 若心無染著 則一切生死業行止息 若生死業行止息 卽是泥洹 故經云

만일 수행자가 마음이 그 자성이 없음을 안다면, 어찌 모든 법에 실이 있다고 할 것인가. 만일 모든 법에 실이 없다면 즉 이것은 거짓이며 속이는 것이다. 만일 거짓이고 속이는 것임을 안다면, 바로 공한 것이고 주체자가 없는 것이다. 만일 공한 것이고 주체자가 없다면, 바로 취할 바가 못된다. 만일 취하여 집착하지 않는다면, 즉 허망 된 생각의 마음은 그친다. 만일 허망 된 생각의 마음이 그친다면 바로 고요하여 무위인 것이다.

 

대저 무위라는 것은 즉 이것이 모든 법의 근원인데, 만일 마음이 그 근본에 안주安住한다면, 즉 염착染著됨이 없다. 만일 마음이 염착染著하지 않는다면, 즉 모든 태어나고는 죽고 죽고서는 태어나는 업[생사업행生死業行]이 종식된다. 만일 그 태어나고는 죽고, 죽고서는 태어나는 업이 종식된다면, 즉 이것이 열반이다.

고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有心不知心 心者不見心 心起想卽痴 無想卽泥洹

마음이 있으면서 마음을 모르고

마음이라는 것이 마음을 못 본다.

마음에 생각을 일으키면 곧 어리석음이며

생각이 없으면 바로 열반이다.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若能如是 修體眞止 當知 是人必得泥洹 名大沙門 是則略說 修體眞止相.

 

만일 능히 이와 같이 체진지體眞止를 수행하면 반드시 알리라. 이 사람은 틀림없이 열반을 얻을 것이며 큰 사문이라고 이름나리라. 이것이 즉 체진지體眞止를 수행하는 상을 약설略說한 것이다.

第二 云何名修觀 觀有二種 一者對治觀 二者正觀

 

무엇을 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하는가. 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대치관對治觀(물리치는 관)이고, 둘은 정관正觀(바른 관)이다.

 

對治觀者 如不淨觀 對治婬欲 慈心觀 對治瞋恚. 如是等觀 皆名對治觀 今不分別也.

 

대치관對治觀이란

 

부정관不淨觀(예컨대 사람의 육체란, 더러운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음욕을 물리치며, 자비관慈心觀(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진애瞋恚를 물리치는 따위와 같은 것인데, 이와 같은 여러 관을 모두 대치관對治觀이라고 이름하지만, 지금은 별도로 구별설명은 않는다.

 

二 正觀者 卽是觀諸法實相智慧 如經中具說.

 

둘은 정관正觀이라는 것은 즉 이것이 제법 실상을 관하는 지혜이다.

경속에 구체적으로 설하여진 것과 같다.

 

諸法不牽固 常立在於念 已解見空者 一切無想念

모든 법은 견고한 것이 아니며

항상 생각에 입각하여 존재한다.

이미 깨달아 공함을 보면,

일체 아무 상념도 안 생긴다.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若行者 初坐禪時 隨心所緣 一切諸法 念念不住 雖用如上 體眞之止 而妄念不息 爾時應當 隨心所緣 一切諸法 若善若惡若無記 若三毒貪瞋痴等. 若念一切世間之事 卽當反觀 所起之心 如是等心 爲是有耶 爲是無耶. 若是無者 無則無心 云何有心. 若爲心是有者 爲在是過去 未來 現在耶. 若在過去 過去已滅 何得有心. 若在未來 未來未至 何得有心. 若是現在 現在不住 則不可得 若不可得 則無有心. 復次 若言 心在現在 卽當諦觀 現在之心 有何等相貌 諦觀不見相貌 則心不可得 若不可得 則無有心. 復次 若以生滅 爲心相者 心爲卽是生滅 爲不卽是生滅. 若爲卽是生滅 一切草木 皆有生滅 亦應卽是心相. 若非心相 豈得以生滅 爲心相耶. 當知 心相不可得 心相無故 則無有心. 復次 若謂因現在 刹那生滅 成於心者 今諦檢生滅 尙不可得 何能成心. 若言現在有生滅者 爲當過去心滅 現在心生 爲不滅而生. 若過去心滅 現在之心生 從何處生. 若不滅而生 卽應有二心並住 而實不然 云何言不滅而生. 若非滅生 亦非不滅生 當知 則無有生 若无生 則無滅 若无生滅 何得以生滅成心. 故知 心不可得

 

만일 수행자가 처음으로 좌선할 때, 마음이 쫓고 있는 모든 법을 따라, 순간 순간의 생각들이 머무르지 않아서, 위에서와 같은 체진體眞의 지를 쓴다고 하더라도 망념妄念이 그치지 않는다면, 이럴 때에는 응당 그 마음이 쫓고 있는 모든 법을 따라라. (예컨대) , , 선도 악도 아닌 것,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 등등을 따라라. 만약 모든 세간의 일들을 생각하면, 도리어 그 일어나는 마음을 바로 관하여라. 이와 같은 마음은 이것을 있다고 할 것인가. 없다고 할 것인가. 만일 이것이 없는 것이면, 없다는 것이 곧 마음이 없는 것인데, 어찌 마음이 있다고 할 것인가.

 

만일 마음이 이것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과거에 있는 것인가, 미래 또는 현재에 있는 것인가. 만일 과거에 있다면, 과거는 이미 없어진 것, 어찌 마음이 있을 수 있는가. 만일 미래에 있다면, 미래는 아직 오지 않는 것, 어찌 마음이 있다고 할 것인가. 만일 이것이 현재라면 현재란 머무르지 않는 것이니, 어찌 마음이 있을 수 있는가. 즉 할 수가 없다. 만일 할 수가 없다면, 바로 마음이란 없는 것이다. 또한 마음으로, 만일 마음이 현재에 있다고 말한다면, 바로 현재의 마음에 어떠한 모습이 있는가 하는 것을 확실히 관하여라. 확실히 관하여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즉 마음이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얻을 수가 없다면, 즉 마음이란 없는 것이다.

 

또한 다음으로, 만일 생멸生滅이 마음의 상이라면, 마음은 즉 이것이 생멸生滅한다고 할 것인가. 또는 이것이 생멸生滅하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만일 이것이 생멸生滅이라고 한다면, 모든 초목도 모두 생멸生滅이 있으니, 역시 응당 이것이 마음의 상이라야 한다. 만일 마음의 상이 아니라면, 어찌 생멸生滅로써 마음의 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마땅히 알아야 하되, 마음의 상은 얻을 수가 없고, 마음의 상이 없기 때문에 즉 마음이란 없는 것이다. 또한 다음으로, 현재의 찰나刹那(90)의 생멸生滅로 인하여 마음이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지금 확실하게 생멸生滅을 따져보았어도 또한 얻을 수가 없었는데, 어찌 능히 마음을 이룰 것인가. 만일 현재에 생멸生滅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과거의 마음이 멸하고 나서, 현재의 마음이 생긴다고 할 것인가. 멸하지 않고서 생긴다고 할 것인가.

 

만일 과거의 마음이 멸하고 현재의 마음이 생긴다면, 어디에서 생기는가.

만일 멸하지 않고 생긴다면, 바로 두 마음이 함께 있는 것으로 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으니 어찌 멸하지 않고 생긴다고 말하겠는가. 만일 멸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고, 또한 멸하지 않고 생기는 것도 아니라면, 마땅히 알아야 하되, 즉 생김은 없는 것이며, 만일 생김이 없다면 바로 멸도 없고, 만일 생멸生滅이 없다면 어찌 생멸生滅로써 마음을 이룰 수가 있는가. 따라서 마음은 얻을 수가 없음을 안다.

 

復次 若謂定有現在心者 心爲從自生 爲從他生 爲從自他生 爲不從自他生. 若言從自生 未對境時 何故不自生. 若言從他生 他法若是心 則爲他心生他心 不應計他心爲己心 他法若非心 非心何能生於心. 若言因自他合故 有心生者 此亦不然 若自他各有心 不待合故有心生 若自他各无生 合亦不能生. 若言不因 自他生者 應從虛空中生 而實不然 從因緣生 尙不可得 何況無因生. 如此種種因緣 推檢現在心中生 畢竟不可得.

 

또한 다음으로 만일 현재의 마음이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고 한다면, 마음은 자기로부터 생긴다고 할 것인가. 남으로부터 생긴다고 할 것인가. 만일 스스로부터 생긴다고 말한다면, 아직도 경에 대하지 않고 있을 때에, 무슨 까닭으로 생기지 않는 것일까. 만일 타로 부터 생긴다고 말한다면, 타의 법이 만일 이것이 마음이라고 할 때, 즉 타의 마음이 타의 마음을 낳게 하는 것으로 되니, 참으로 타의 마음을 헤아려서 자기의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타의 법이 만일 마음이 아니라면, 마음이 아닌 것이 어찌 마음을 낳을 수가 있는가.

 

만일 자타自他가 합침으로 인하여 마음이 생기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 역시 그렇지가 않다. 만약에 자타가 각각 마음이 있다면 합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도 본래부터 마음이 생김이 있는 것이고, 만약에 자타가 각각 생김이 없다면, 합쳐도 역시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자타에 인하지 않고서 생김이 있다고 말한다면, 응당 허공 속으로부터 생길 것인데,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으며, 인연으로부터 생긴다는 것도 또한 불가득不可得이다. 하물며 어찌 인이 없이 생긴다고도 할 것인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인연으로서 미루어보아 현재의 마음 속에 생기는 것을 따져본다면 결국은 불가득不可得인 것이다.

 

若不得所觀之心 豈得能觀之智 若不得能觀所觀心 則一切心 皆不可得 若一切心不可得 則一切法 亦不可得 若一切法不可得 則心無所依 若心無所依 則無所憶念 若無所憶念 則顚倒想斷 若顚倒想斷 則心無分別 若心無分別 則諍論心息 若諍論心息 則無愛恚 若無愛恚 則覺觀攀緣不起 若覺觀攀緣不起 則身心寂然 若身心寂然 卽得正定 若得正定 則發眞實智慧 永離一切生死 故釋論偈云

 

만일 관하여지는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어찌 관하는 지혜를 얻을 것인가. 만일 관하는 마음이나 관하여지는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곧 모든 마음을 일체 얻지 못하는 것이며, 만일 모든 마음이 불가득不可得이면 바로 모든 법도 또한 불가득不可得이다. 만일 모든 법이 불가득不可得이면 바로 마음이 의지할 바가 없다. 만일 마음이 의지할 것이 없다면, 즉 생각되어질 것이 없는 것이며, 만일 생각되어질 것이 없으면, 바로 거꾸로 뒤집혀진 생각이 끊어지는 것이고, 만약 거꾸로 뒤집힌 생각이 끊어진다면, 즉 마음에 분별分別이 없어진다.

 

만일, 마음에 분별이 없어진다면 즉 의론議論을 다툴 마음이 종식되며, 만약 의논議論을 다툴 마음이 종식되어진다면, 바로 탐애貪愛와 진애瞋恚가 없어지고, 만일 탐애貪愛와 진애瞋恚가 없어진다면, 바로 여러 가지 잡념과[=추사麤思:거친 추, =세사細思] 반연攀緣이 일어나지 않으며, 만약 여러 가지 잡념과 반연攀緣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몸과 마음은 고요하게 되며, 만일 몸과 마음이 고요하게 되면, 바로 옳은 선정을 얻은 것이니, 만일 바른 선정을 얻었다면, 곧 진실한 지혜를 이룩하여 영원히 모든 생사生死를 여의게 된다.

 

따라서 석론釋論(대지도론大智度論)의 게에서 말씀하시기를,

 

般若波羅蜜 實法不顚倒 念想觀已除 言語法皆滅

無量罪滅除 淸淨心常一 如是尊妙人 則能見般若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波羅蜜多)

진실한 법이며, 거꾸로 뒤집힌 것이 아니고

은 이미 제거되어

말로써 표현되는 법은 모두 멸하고

무한한 죄는 소멸 제거되어

청정한 마음은 늘 한결같다.

이와 같이 존귀하고 오묘한 사람은

곧 능히 반야를 볼 수 있다.

 

是則略說 對破初心麤亂修止觀 竟.

 

이것이 바로 처음에 마음이 크게 산란한 것을 퇴치하고 지관을 수행하는 것을 간략하게 설명하여 마친 것이다.

第二 對治心沈浮病修止觀者 行者 於坐禪時 其心闇塞 無記○○ 或時多眠 爾時應當 修觀照了. 若於坐中 其心浮動 輕躁不安 爾時應當 修止止之. 是則略說 對治心沈浮病修止觀相. 但須善識藥病相用之 一一不得於對治 有乖僻之失.

 

, 마음의 침부병沈浮病을 고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한다는 것인데, 수행자가 좌선을 하고 있을 때, 그 마음이 어둡게 막혀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가라앉아서 흐리멍덩하거나 어떤 때에는 졸음이 온다면, 이런 때에는 응당 관을 수행하여 밝게 깨달아야 한다. 만약 좌선 중에 있어서, 그 마음이 떠서 움직여 경솔하게 날뛰어서 안정이 되지 못한다면, 이런 때에는 반드시 지를 수행하여 이것을 멎게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침부沈浮하는 병을 고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양상을 간략하게 설한 것이다. 다만 마땅히 약과 병의 양상을 잘 알아서 이것을 사용하되, 하나하나 치유할 수가 없다면, 어긋나서 한편에 치우친 잘못이 있는 것이다.

 

第三 隨便宜修止觀者 行者 於坐禪時 雖爲對治心沈故 修於觀照 而心不明淨 亦無法利 爾時當試 修止止之. 若於止時 卽覺身心 安靜明淨 當知宜止 卽應用止安心. 若行者 於坐禪時 雖爲對治浮動故修止 而心不住 亦無法利 當試修觀 若於觀中 卽覺心神明淨 寂靜安穩 煩惱患息 證諸法門也.

 

, 편의에 따라서 지관을 수행한다는 것인데, 수행자는 좌선할 때에,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퇴치하기 위한다는 이유로 관조觀照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마음이 밝지도 깨끗하지도 않거나 또한 방법의 이로움이 없으면 이런 때에는 마땅히 지를 수행하여 이것을 멎게끔 시도하여라. 만약 지를 할 때 곧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밝고 깨끗하여지는 것을 느낀다면, 마땅히 지가 좋은 것으로 알고 응당 지를 사용하여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

 

만일 수행자가 좌선할 때에 뜨고 움직이는 것을 퇴치하기 위하여 지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마음이 머무르지 않고 또한 방법의 이로움이 없다면, 마땅히 관을 수행함을 시도하여라. 만일 관을 하는 중에 곧 정신 밝고 깨끗하여지고 고요하고도 안온함을 느낀다면, 응당 관이 좋음을 알고서 바로 관을 사용하여 마음을 안정시키도록 하여라.

 

이것이 즉, 편의에 따라서 지관을 수행하는 양상을 약설略說한 것이다. 다만 반드시 편의와 잘 관련시켜서 이것을 수행하면, 곧 정신이 안온하게 되어 번뇌의 걱정은 사라지고 모든 법문을 밝힐 것이다.

 

第四 對治定中細心修止觀者 所謂行者 先用止觀 對破麤亂 亂心旣息 卽得入定 定心細故 覺身空寂 受於快樂. 或利便心發 能以細心 取於偏邪之理. 若不知定心虛誑 必生貪著 若生貪著 執以爲實 若知虛誑不實 卽愛見不起 是名修止. 雖復修止 而心猶惑著 愛見結業不息 爾時應當修觀 觀於定中細心 若不見定中細心 卽不執著定見 若不執著定見 則愛見煩惱業 悉皆摧滅 是名修觀. 此則略說 對治定中細心修止觀相. 分別止觀方法 並同於前 但以破定見微細之失 爲異也.

 

, 선정 중에 미세한 마음을 퇴치하려고 지관을 수행하는 것인데, 이른바 수행자가 먼저 지관을 사용하여 크게 흐트러진 것을 퇴치한다면, 흐트러진 마음은 이미 종식되어, 곧 선정에 들 수가 있는데, 선정하는 마음은 미세한 까닭으로 몸이 공하고 고요하여, 쾌락을 받는 느낌을 가지게 되니, 혹시 이롭고 편함을 바라는 마음을 일으켜, 그 세밀한 마음으로써 편벽하고 나쁜 이치를 취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선정의 그 마음이 거짓된 것임을 모른다면, 반드시 탐욕 집착을 일으킨다.

 

만일 탐욕 집착이 생기면 (그것을) 붙들고서 진실 된 것이라고 하게 되며, 만일 거짓되고 부실한 것임을 안다면, 곧 애착의 번뇌가[愛見]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또 지를 수행하더라도, 또 한 마음에 미혹과 집착이 생기고, 애착의 번뇌 업이 종식되지 않는다면, 이런 때에는 응당 관을 수행하여, 선정 중의 세밀한 마음을 관하여라. 만일 선정 중에 세밀한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면 즉, 선정의 그 잘못된 생각을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만일 선정에서의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곧 애착 생각과 번뇌의 업들이 모두 꺾이고 없어진 것이니, 이것이 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선정 중에서 세밀한 마음을 퇴치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약설略說한 것이다. 지관의 방법을 분별하는 것은 두 개 모두 먼저와 같으며, 다만 선정의 생각이 미세한 잘못을 깨뜨리는 것이 다르다고 할 것이다.

 

第五 爲均齊定慧修止觀者 行者 於坐禪時 因修止故 或因修觀 而入禪定 雖得入定 而無觀慧 若無觀慧 是爲痴定 不能斷結. 或觀慧微少 卽不能發起眞慧 斷諸結使 發諸法門 爾時應當 修觀破析. 若於定中 智慧開發 卽定慧均等 能斷結使 證諸法門. 若行者 於坐禪時 因修觀故 或因修止 而心豁然開解 智慧分明 而定心少故 則心動散 故如風中燈 照物不了. 故釋論云

 

, 선정과 지혜를 균등하고 고르게 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인데, 수행자는 좌선 중에 있어서 지를 수행함으로 인하여, 또는 관을 수행함으로 인하여, 선정에 들어가지만, 선정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지혜를 관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만일 지혜를 관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어리석은 선정이라고 하며, 번뇌를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혹시 지혜를 관하는 것이 미소微少하다면, 곧 참다운 지혜를 일으켜 모든 번뇌의 얽힘을 단절하고 모든 법문을 일으킬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때는 응당 관을 수행하여 풀어나가야 한다. 만일 선정 중에서 지혜가 개발되면 곧 선정과 지혜는 균등하게 되어, 능히 번뇌의 얽매임을 끊고 모든 법문을 증득證得하게 된다. 만일 수행자가 좌선할 때에 관을 수행하므로 인하여 또는 지를 수행함으로 인하여, 마음은 넓게 열려 풀어져서, 지혜는 분명하여도 선정의 마음이 적은 까닭에 곧 마음이 움직여 흩어져, 따라서 바람이 부는 속에 있는 등불과도 같이, 물건을 비추되 확실치가 않는 것처럼 될 때가 있으리라.

고로 석론釋論에 말하기를,

 

若無定心 雖有觀空無相等智慧 是爲顚倒智慧 是爲狂智慧 不離出離生死.

만일 선정의 마음이 없으면

이나 상이 없음을 관하는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거꾸로 뒤집혀진 지혜라고 하며

이것을 미친 지혜라고 한다.

살고 죽음을 떠날 수가 없다.

 

爾時應當復修止 以修止故 卽得定心 得定心故 如密室中燈 則能破闇 照物分明. 是卽略說 爲均齊定慧 二法修止觀相. 行者 若能如是 於端身正坐之中 先用此五番修止觀意 取捨不失其宜 當知 是人善修佛法故 必於一生 不空過也.

 

이때에는 응당 또 지를 수행하여야 하는데 지를 수행함으로써 곧 선정의 마음을 얻으며, 선정의 마음을 얻음으로써 밀실密室 속의 등불처럼 바로 능히 어둠을 깨치고 물건을 분명하게 비출 수가 있다. 이것이 곧 선정과 지혜의 두 가지 법을 균등하고도 고르게 하기 위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모습을 약설略說한 것이다. 수행자가 만일에 이와 같이 능히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좌선을 하는 가운데, 다섯 차례의 지관 수행의 뜻을 잘 사용하여서, 취하거나 버리는 것이 그 적절함을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 사람은 불법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까닭에 기필코 일생을 헛되게 보내지는 않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第二 明歷緣對境修止觀者 端身常坐 乃爲入道之勝要 而有累之身 必涉事緣 若隨緣對境 而不修習止觀 是則修心有間 結業觸處而起 豈得疾與佛法相應. 若於一切時中 恒修定慧方便 當知 是人必能通達 一切佛法.

 

둘째, 생활환경을 지내면서 여러 가지 경계에 대처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을 밝힌다면, 몸을 단정히 하여 항상 좌선하는 것을 곧 불도에 들어가는 일의 훌륭한 핵심으로 한다고 하여도, 그러나 여러 가지 얽힌 것이 있는 몸은 반드시 여러 가지 사연에 걸릴 것이다. 만일 생활환경에 따라, 여러 경계에 대처하여 또한 지관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수행하는 마음에 틈이 생겨 번뇌의 업들이 여러 처지에 부딪쳤을 때 일어날 것이니 어찌 빨리 불법과 상응할 수기 있을 것인가. 만일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항상 선정과 지혜의 방편을 수행한다면, 마땅히 이 사람은 꼭 모든 불법에 능히 통달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云何名歷緣修止觀 所言緣者 謂六種緣 一行 二住 三坐 四臥 五作作 六言語. 云何名對境修止觀 所言境者 謂六塵境 一眼對色 二耳對聲 三鼻對香 四舌對味 五身對觸 六意對法. 行者 約此十二事中 修止觀 故名爲歷緣對境修止觀也.

 

어떠한 것을 생활환경을 지내면서 지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하는가. 이른바 생활환경이란, 여섯 가지의 환경을 말하는 것인데,

가는 것,

머무는 것,

앉는 것,

눕는 것,

일하는 것,

언어이다.

어떤 것을 경계에 대처하여 지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하는가. 이른바 경계라는 것은 여섯 가지의 번뇌를 일으키는 경계를 말하는 것인데,

눈이 형색에 대하는 것,

귀가 소리에 대하는 것,

코가 냄새에 대하는 것,

혀가 맛에 대하는 것,

몸에 촉에 대하는 것,

마음이 법에 대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이 열두 가지의 일 속에 관련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까닭에 이름하여 환경을 지내면서 경계에 대처하여 지관을 수행한다고 하는 것이다.

 

行者 若於行時 應作是念 我今爲何等事欲行 若爲不善無記事 卽不應行 若爲善利益 爲如法事 卽應行. 云何名行中修止 若於行時 卽當了知 因於行故 則有一切善惡等法 而無一法可得 則妄念不起 是名修止. 云何行中修觀 應作是念 由心運身故 有去來往反 因此則有 一切善惡等法 故名爲行 反觀行心 不見相貌 當知 行者及一切 畢竟空寂 是名修觀. 行中亦預有 五番修止觀意 如前分別.

 

수행자는 만일, 가고 있는 시간에 있어서 반드시 이런 생각을 하라. 나는 지금 무슨 일들 때문에 가려고 하는가. 만약 좋지 않은 일이나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 때문이라면 즉시 결코 가지를 말아야 하며, 만일 착한 일, 이익 되는 일 때문이거나 법대로 하는 일 때문이라면, 응당 가거라. 라고. 무엇을 가는 중에서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하는가.

 

만일 가고 있는 경우에 있어서 마땅히 확실히 알아야 하는데, 가는 것으로 인하여 곧 모든 선이나 악 등의 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거기에는) 하나의 법도 취할 것이 없으니 즉 망념妄念은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이것을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가는 중에서 관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반드시 이런 생각을 하여야 한다. 마음에 의하여 몸이 운반되는 까닭에 가는 것 오는 것 왕복하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곧 모든 선, 악 등의 법이 있으며 따라서 이름하여 가는 것이라고 하니, 도리어 가는 마음을 관하여도 그 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간다는 것 및 모든 법은 결국 공적空寂한 것이라고. 이것을 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가는 도중에 또한 관련하여 다섯 차례의 지관止觀 수행의 뜻이 있음은 이미 살펴본 것과 같다.

 

次 若於住時 應作是念 我今爲何等事欲故 若爲不善無記事 卽不應住 若爲善利益事 卽應住. 云何名住中修止 若於住時 卽當了知 因於住故 則有一切善惡等法 而無一法可得 則妄念不起 是名修止. 云何住中修觀 應作是念 由心制御 竪身安立 因此則有 一切善惡法 故名爲住 反觀住心 不見相貌 當知 住者及一切法 畢竟空寂 是名爲修觀. 住中亦預有 五番修止觀意 如前分別.

 

다음으로 만일 머물고 있을 때에는 반드시 이런 생각을 하여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떠한 일들을 위하여 머무르려고 하는가. 만약 옳지 않거나, 옳지도 나쁘지도 않는 일 때문이라면 즉시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만일 좋은 일이거나 이익 되는 일을 위한다면 즉 머물러 있어야 한다라. 고 무엇을 머무르고 있는 중에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하는가. 만일 머무르고 있을 때라면 즉 반드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머무르고 있음으로 인하여 바로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있지만, 그러나 어느 하나의 법도 취할 것이 없으며 또 망념妄念도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이것을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머무르고 있는 중에, 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반드시 이러한 생각을 하여야 한다.

 

마음이 제어制御함으로 인하여, 몸을 세워 안정하게 서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곧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존재하며 따라서 이름하여 머무르고 있는 것이라고 하니, 도리어 머무르고 있는 마음을 관하면 그 상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 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머무른다는 것과 모든 법은 필경 공적空寂한 것이라고. 이것을 이름하여 관을 수행한다고 한다. 머무르는 중에 또한 관련하여 다섯 차례의 지관을 수행하는 뜻이 있음은 전에 살펴본 것과 같다.

 

次 若於坐時 應作是念 我今爲何等事欲坐 若爲不善無記事 卽不應坐 若爲善利益事 卽應坐. 云何名坐中修止 若於坐時 卽當了知 因於坐故 則有一切善惡等法 而無一法可得 則妄念不起 是名修止. 云何坐中修觀 應作是念 由心作念 累脚安身 由此則有 一切善惡等法 故名爲坐 反觀坐心 不見相貌 當知 坐者及一切法 畢竟空寂 是名修觀. 坐中亦預有 五番修止觀意 如前分別.

 

다음에 앉아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이러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떠한 일을 위하여 앉아 있고자 하는가. 만일 착하지 않거나, 착하지도 착하지 않지도 않는 일 때문이라면 곧 응당 앉아 있지 말아야 한다. 만일 착하거나 이익이 있는 일 때문이라면 즉 앉아야 한다라. 고 무엇을 앉아있는 중에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하는가. 만약 앉아있는 때라면 곧 반드시 확실히 알아야 한다.

 

앉아 있음으로 인하여, 곧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있으나 그러나 어느 하나의 법도 취할 바가 못되니 곧 망념妄念이 일지 않는다. 라고. 이것을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앉아 있는 중에 관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반드시 이러한 생각을 하여야 한다. 마음에 의하여 생각이 이루어져, 발을 겹쳐서 몸을 안정시킨다. 이로 인하여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있으니 따라서 이름하여 앉는다고 하니 도리어 앉아있는 마음을 관하면, 그 상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 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앉는다는 것과 모든 법은 결국은 공적空寂한 것이다. 라고 이것을 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앉아있는 중에서 역시 관련하여 다섯 차례의 지관을 수행하는 뜻이 있음은 전에 살펴본 것과 같다.

 

次 若於寢臥時 應作是念 我今爲何等事欲臥 若爲不如法 放逸等事 卽不應臥 若爲調和四大故 應臥 臥時 應如師子王臥. 云何臥中修止 若於寢息時 卽當了知 因於眠故 則有一切善惡等法 而無一法可得 則妄念不起 是名修止. 云何臥中修觀 應作是念 由心勞乏 卽便惛闇 放縱六分 因此則有 一切善惡等法 故名爲眠 反觀臥心 不見相貌 當知 臥者及一切法 畢竟空寂 是名修觀. 臥中亦預有 五番修止觀意 如前分別.

 

다음으로 만일 자고 누어있을 때라면 반드시 이러한 생각을 하여라. 나는 지금 어떠한 일들을 위하여 누우려고 하는가. 만일 법대로가 아닌 일이거나 방종한 따위의 일 때문이라면, 즉 반드시 눕지를 말라. 만약 사대四大를 조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응당 누어라. 누었을 때는 반드시 짐승의 왕인 사자처럼 누어라 라고. 무엇을 누어있는 중에 관를 수행하는 것이라 하는가. 만일 누어 쉴 때라면 반드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잠을 잠으로 인하여, 곧 모든 선악 따위의 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의 법마저도 취할 바가 없으니 곧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이것을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누어있는 중에 관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응당 이러한 생각을 하여라.

 

마음이 피로하고 지침으로써 곧 어둡고 캄캄하여 머리두 손두 발[六分]을 방종하게 하고, 이로 인하여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있어지니 따라서 이름하여 잔다고 한다. 도리어 눕는 마음을 관하면, 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눕는다는 것과 모든 법은 결국은 공적空寂한 것이라고. 이것을 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눕고 있는 중에도 역시 관련되어 다섯 차례의 지관止觀을 수행하는 뜻이 있음은 먼저 살펴본 것과 같다.

 

次 若於作時 應作是念 我今爲何等事欲作 若爲不善無記事 卽不應作 若爲善利益事 卽應作. 云何名作中修止 若於作時 卽當了知 因於作故 則有一切善惡等法 而無一法可得 則妄念不起 是名修止. 云何作時修觀 應作是念 由心運身手 造作諸事 由此則有一切善惡等法 故名爲作 反觀作心 不見相貌 當知 作者及一切法 畢竟空寂 是名修觀. 作中亦預有 五番修止觀意 如前分別.

 

다음으로 만일 일을 할 때에 있어서는 마땅히 이런 생각을 하여라. 지금 내가 어떠한 것들을 위하여 일을 하려고 하는가. 만일 착하지 않거나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는 일 때문이라면 곧 반드시 일하지 말고, 만일 착하거나 이익 되는 일 때문이라면 곧 일하라고. 무엇을 일하는 중에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하는가. 만일 일하고 있는 경우라면 곧 마땅히 착실하게 알아야 한다. 일함으로 인하여, 곧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있는데 그러나 어느 하나의 법도 취할 것이 없으니, 곧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이것을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일할 때에 관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하여라.

 

마음이 몸과 손을 운반하므로 모든 일을 조작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있게 되니 따라서 이름하여 일이라고 하는데, 도리어 일하는 마음을 관하면, 상의 모습은 보지 않는다. 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이라는 것과 모든 법은 결국은 공적空寂하다라고. 이것을 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일하는 중에서도 역시 관련하여 다섯 차례의 지관止觀수행의 뜻이 있음은 전에 살펴본 것과 같다.

 

次 若於語時 應作是念 我今爲何等事欲語 若爲欲論說 不善無記事 卽不應語 若爲善利益事 卽應語. 云何名語中修止 若於語時 卽當了知 因此語故 則有一切善惡等法 而無一法可得 則妄念不起 是名修止 云何語中修觀 應作是念 由心覺觀 鼓動氣息 衝於咽喉 脣舌齒齶故 出音聲言語 因此則有一切善惡等法 故名爲語 反觀語心 不見相貌 當知 語者及一切法 畢竟空寂 是名修觀. 語中亦預有 五番修止觀意 如前分別.

 

다음으로 만일 말할 때라면, 응당 이러한 생각을 하여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떠한 것을 위하여 말하려고 하는가. 만일 선하지 않거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일을 론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곧 응당 말하지 말아야 하며, 만약 선하고 이익 되는 일을 위하는 것이라면 응당 말하리라고. 무엇을 말하는 중에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하는가.

 

만일 말하고 있는 경우라면 반드시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 말로 인하여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있게 되지만 그러나 어느 하나의 법도 취할 것이 없으니, 곧 망념妄念은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이것을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말하는 중에 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하는가. 응당 이러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마음의 큰 움직임이나 작은 움직임[각관覺觀]으로 인하여 호흡을 고정시켜, 인후입술이빨을 충격시키므로 말미암아 음성이나 언어를 낸다.

 

이것으로 인하여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있기에 이름하여 말이라고 하지만, 도리어 말하는 마음을 관하면 그 상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말하는 것과 모든 법은 결국은 공적空寂한 것이라고. 이것을 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말하는 중에서도 역시 관련하여 다섯 차례의 지관止觀수행의 뜻이 있음은 전에 살핀 것과 같다.

 

云何名眼見色時修止 隨見色時 卽知如水中月 無有定實 若見順情之色 不起貪愛 若見違情之色 不起恚惱 若見非違非順之色 不起無明及諸亂想 是名修止. 云何名眼見色時修觀 應作是念 隨有所見 卽無見相 所以者何 於彼根塵 空明之中 各各無明 亦無分別 化合因緣 出生眼識 眼識因緣 卽生意識 意識生時 卽能分別 種種諸色 因此則有 一切善惡等法 卽當反觀 念色之心 不見相貌 當知 見者及一切法 畢竟空寂 是名修觀. 眼見色中亦預有 五番修止觀意 如前分別.

 

다음으로, 어떠한 것을 눈이 형색形色을 볼 때에 를 수행한다고 이름하는가. 형색을 보는 때마다, 곧 물 속의 달과도 같이 일정한 실이 없음을 알고, 만일 기분 좋게 느껴지는[순정順情] 형색을 보더라도 탐욕과 애착을 일으키지 않으며, 만일 기분이 좋지 않게 느껴지는[위정違情] 형색을 보아도 화내거나 고뇌를 일으키지 않고,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형색을 보더라도 무명無明 및 여러 가지 산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을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눈이 형색을 볼 때에, 을 수행한다고 이름하는가. 응당 이러한 생각을 하여야 한다. 보여지는 것이 있을 때마다 즉 보는 상이 없다라고.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 눈과 형색[근진根塵], 달이 밝아 맑게 보이는 물 속에 각각 보는 것도 없고 또한 분별하는 것도 없다. 화합된 인연이 안식眼識을 낳으며, 안식의 인연이 곧 의식意識을 낳고 의식이 생겼을 때, 즉 능히 여러 가지 모든 형색을 분별한다.

 

이로 인하여 바로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있으나, 돌이켜서 마땅히 형색을 생각하는 마음을 관하면 그 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본다는 것과 모든 법은 결국은 공적空寂한 것이라고. 이것을 이름하여 관이라고 한다. 눈이 형색을 보는 중에도 역시 관련되어 다섯 차례의 지관止觀수행의 뜻이 있음은 전에 살펴본 것과 같다.

 

次 耳聞聲時修止者 隨所聞聲 卽知聲如響相 若聞順情之聲 不起愛心 聞違情之聲 不起瞋心 非違非順之聲 不起分別心 是名修止. 云何聞聲中修觀 應作是念 隨所聞聲 空無所有 但從根塵和合 生於耳識 耳識生故 次生意識 强起分別 因此]則有 一切善惡等法 故名爲聞 反觀聞聲之心 不見相貌 當知 聞者及一切法 畢竟空寂 是名修觀. 耳聞聲中亦預有 五番修止觀意 如前分別.

 

다음으로 귀가 소리를 들을 때에 지를 수행한다는 것인데, 소리가 들려질 때마다 곧 소리는(산울림처럼 실체가 없는) 울림의 모습과 같음을 알고, 만약 기분 좋게 느껴지는 소리를 듣더라도 애착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소리를 듣더라도 화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며,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소리에는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을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소리를 듣는 중에 관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소리가 들려질 때마다(그것은) 하며,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귀와 소리의 화합에 따라서 이식耳識이 생기고, 이식이 생긴 까닭에 그 다음으로 의식意識이 생겨, 어쩔 수 없이 분별이 일어난다. 이로 인하여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있게 되고 따라서 이름하여 들음[]이라고 하니, 돌이켜 소리를 듣는 마음을 관하면 그 상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듣는다는 것과 모든 법은 결국은 공적空寂한 것이다라고. 이것을 이름하여 관이라고 한다. 귀가 소리를 듣는 중에서도 역시 관련되어 다섯 차례의 지관止觀수행의 뜻이 있음은 전에 살펴본 것과 같다.

 

次 鼻臭香時修止者 隨所聞香 卽知如化不實 若聞順情之香 不起著心 違情臭氣 不起瞋想 非違非順之香 不生亂念 是名修止. 云何聞香中修觀 應作是念 今所聞香 虛誑不實 所以者何 根塵合故 卽生鼻識 次生意識 强取香相 因此則有 一切善惡等法 故名聞香 反觀聞香之心 不見相貌 當知 聞者及一切法 畢竟空寂 是名修觀. 聞香中亦預有 五番修止觀意 如前分別.

 

다음으로 코가 냄새를 맡을 때에 지를 수행하는 것인데, 냄새를 맡을[] 때마다 즉 허깨비처럼 실이 아닌 것으로 알되, 만약 기분 좋은 향기를 맡아도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며, 기분이 좋지 않은 냄새를 맡더라도 성낼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냄새를 맡더라도 흐트러진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을 를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냄새를 맡는 중에 관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응당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한다. 지금 맡고 있는 냄새는 거짓인 것이며 실이 없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코와 냄새가 합하여지므로 비식鼻識을 낳으며, 또 다음으로 의식意識이 생기는 것이니 어쩔 수 없이 냄새의 상을 취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있게 되며, 따라서 냄새를 맡는다고 이름하는 것이니, 돌이켜 냄새 맡는 마음을 관하면 그 상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 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냄새 맡는 것과 모든 법은 결국은 공적空寂한 것이다. 라고 이것을 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냄새 맡는 중에서도 역시 관련되어 다섯 차례의 지관止觀수행의 뜻이 있음은 전에 살펴본 것과 같다.

 

次 舌受味時修止者 隨所受味 卽知如夢中得味 若得順情美味 不起貪著 違情惡味 不起瞋心 非違非順之味 不起分別憶想 是名修止. 云何名舌受味時修觀 應作是念 今所受味 實不可得 所以者何 內外六味 性無分別 因內舌根 舌根本無知 和合生舌識 次生意識 强取味相 因此則有 一切善惡等法 反觀緣味之識 不見相貌 當知 受味者及一切法 畢竟空寂 是名修觀. 舌受味中亦預有 五番修止觀意 如前分別.

 

다음으로 혀가 맛을 받을 때 지를 수행한다는 것인데, 맛을 받을 때마다, 곧 꿈속에서 맛을 얻음과 같음을 알아야 하되, 만일 기분이 좋은 훌륭한 맛이라 하더라도 탐욕과 집착을 일으키지 말 것이며, 기분이 맞지 않는 나쁜 맛이라 하더라도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또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맛이라도 분별하거나 여러 가지의 잡상雜想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을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혀가 맛을 받을 때 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하는가. 반드시 이러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지금 받고 있는 맛은 그 실체實體를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안팎의 여섯 가지 맛은 그 본질이 분별되지 않으며, 내부의 혀의 감각에 기인하는 것이다. 혀의 감각은 본래 지가 있는 것이 아니며, 화합되어 설식舌識을 낳고 다음에 의식意識을 낳으니 어쩔 수 없이 맛의 상을 취한다. 이로 인하여 즉 모든 선악 등의 법이 있으며, 돌이켜 맛이 연유되는 식을 관한다면, 그 상의 모습은 보지 않는다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맛을 받는다는 것과 모든 법은 결국은 공적空寂하다라고. 이것을 관을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혀가 맛을 받는 중에도 역시 관련되어 다섯 차례의 지관止觀수행의 뜻이 있음은 전에 분별한 것과 같다.

 

次 身受觸時修止者 隨所覺觸 卽知如化幻不實 若受順情樂觸 不起貪著 若受違情苦觸 不起瞋惱 受非違非順之觸 不起憶想分別 是名修止. 云何身受觸時修觀 應作是念 冷煖澁滑輕重等 名之爲觸 頭等六分 四大和合 名之爲身 觸性虛假 身亦不實 誰能受觸 和合因緣 卽生身識 次生意識 憶想分別 苦樂等相 故名爲受觸 卽當反觀 緣觸之心 不見相貌 當知 受觸者及一切法 畢竟空寂 是名修觀. 身受觸中亦預有 五番修止觀意 如前分別.

 

다음으로 몸에 촉감을 받을 때에 지를 수행한다는 것인데, 촉감을 느낄 때마다 곧 허깨비와도 같이 그 실체가 없는 것을 알되, 만일 기분 좋은 즐거운 촉감을 받더라도 성을 내거나 고뇌를 일으키지 않으며, 기분에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촉감을 받더라도 여러 가지 상념想念이나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을 지를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몸이 촉감을 받을 때에 관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하여야 한다. 차갑거나 따뜻하거나 또 껄끄럽거나 매끄럽거나 또는 가볍거나 무겁다거나 하는 따위를 이름하여 촉감이라고 하지만, 머리, , 손발 등 여섯 부분이 사대四大와 화합된 것, 이것을 이름하여 몸이라고 하니 촉감의 본질성은 거짓되고 임시적인 것이고, 몸 또한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니, 누가 능히 촉감을 받는다고 할 것인가. 화합된 인연으로 즉 신식身識이 생기며, 다음에 의식意識이 생기어 괴롭고 즐겁고 하는 따위의 상을 상념想念하고 분별하는 것이니, 따라서 이름하여 촉감을 받는다고 한다.

 

즉 마땅히 돌이켜 촉감을 연유하는 마음을 관하면 그 상의 모습은 보지 않는다. 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촉감을 받는다는 것과 모든 법은 결국은 공적空寂한 것이다. 라고 이것을 지을 수행한다고 이름한다. 몸이 촉감을 받는 중에도 역시 다섯 차례의 지관止觀수행의 뜻이 있음은 전에 분별한 것과 같다.

 

次 意知法中修止觀相 如初約坐禪中明. 修止觀相 五番之意 是中應廣分別 令不重辨. 行者若能 於行住坐臥 見聞覺知等 一切處中 修止觀者 當知 是人眞修摩訶衍道. 如大品經中

 

다음에 마음이 법을 아는 중에 지관을 수행하는 상은 처음의 좌선 속에 관련시켜서 밝힌 것과 같으며, 지관 수행의 양상의 다섯 차례의 뜻은 이 속에 틀림없이 널리 살폈으니 지금은 중복되어 말하지 않겠다. 수행자가 만일 능히 행주좌와行住坐臥 또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따위의 모든 것들 속에서 지관을 수행한다는 것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참으로 대승大乘의 길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대품반야경에 이르기를,

佛告須菩提 若菩薩行時知行 坐時知坐 乃至身服僧伽梨

視眴一心 出入禪定 當知 是名菩薩摩訶衍 以不可得故.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尊者에게 말씀하시되,

만일 보살이, 갈 때에 가는 것을 알고

앉아있을 때에 앉아있음을 알며,

나아가서 몸에 승가리僧伽梨를 입고서

오직, 한 마음에만 눈을 돌리고

선정에 드나든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을 보살의 대승大乘이라고 이름하며

(일체) 취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復次 若人如是 一切處中 修行大乘 是人則於世間 最上最勝 無與等者. 如釋論中偈說

또한 다음으로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어떠한 장소에서든지 대승을 수행한다면 이 사람은 즉 세상에서 가장 위이며, 가장 훌륭하고 그와 같은 이가 없는 자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 속에 있는 게에 설하여진 것과 같다.

 

閑坐林樹間 寂然滅諸惡 澹泊得一心 斯樂非天樂

人求世間利 名衣好牀蓐 斯樂非安穩 求利無厭足

衲衣行乞食 動止心常一 自以智慧眼 觀知諸法實

種種諸法中 皆以等觀入 解慧心寂然 三界無倫匹

고요하게 숲 속의 나무들 사이에서 좌선하고

조용하게 모든 악을 멸하며

사욕私欲없이 세속世俗을 떠나 한 마음을 얻는데

이 즐거움은 하늘의 즐거움이 아니다.

사람은 세간의 이익과

명성과 옷과 좋은 잠자리를 구하지만

이 즐거움은 편안하고도 온화한 것이 아니며

이익을 추구하면 만족할 때가 없는 것이다.

승려(僧侶)는 탁발을 행하며

거동하거나 머무르거나 마음은 항상 하나로

스스로 지혜의 눈으로써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관하여 알며

가지가지의 여러 법에

모두가 일체평등이라는 관으로써 들어가

지혜를 깨달아 마음이 고요하면

과거현재미래의 삼계三界에 필적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