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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3. 수행자료

허운(虛雲)스님의 참선요지에서

허운(虛雲)스님의 참선요지에서


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데 있다. 마음의 오염이 없어지면 진실로 자성(自性-자기의 본래 성품)의 참 모습을 보게 된다. 오염이란 바로 망상과 집착이고 자성(自性)이란 곧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이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다 같이 갖추고 있으며 둘이 아니고 차별도 없다.


만약 망상과 집착을  여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증득하는 것이니 곧 부처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바로 중생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무량겁을 지나면서 생사를 윤회하며 오래 동안 오염되었기 때문에, 바로 망상에서 벗어나 참된 본래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참선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참선할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망상을 버리는 것이다. 망상은 어떻게 버리는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이 많지만 그 중 「쉼이 곧 깨달음(歇卽菩提)」에서 「쉼(歇)」한자 만큼 간단명료한 것이 없다. 


선종(禪宗)은 달마조사께서 중국에 전래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육조(六祖) 혜능스님 이후 선풍(禪風)이 널리 퍼져 고금에 떨쳤다. 달마조사와 육조대사께서는 가장 긴요한 말씀으로 「모든 반연(攀緣-얽혀있는 인연)을 가리고 쉬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학인(學人)들을 가르쳤다. 모든 반연을 가리고 쉰다는 것은 모든 반연을 놓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반연을 놓으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 말은 실로 참선할 때 먼저 해야할 일이며, 이 말과  같이 참선을 하지 않는다면 참선은 오직 말뿐이어서 성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입문(入門) 조차 불가능하다.  온갖 반연에 얽혀 생각 생각이 생멸한다면, 그대는 어디 참선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반연을 놓으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 이  말씀이 참선할 때 먼저 해야할 일이라고 이미 알았는데 우리들은 어찌하여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가? 상근기의 사람은 한 생각을 영원히 쉬어 바로 무생(無生-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마음자리)에 이르고, 깨달음을 단번에 증득하여 털끝만치도 꼬이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음 근깅의 사람은 이치로써 현상을 제거함으로써 자성은 본래 청정하며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모두 거짓 이름이고 원래부터 나와 자성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명료하게 알 것이다.


모든 일과 사물은 다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나의 이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몸과 산하대지는 자성 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바다 가운데 떠 있는 거품처럼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만 본바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꿈과 같은 일인 일체의 태어나고 머물고 변하고 없어지는 것을 따르지 말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통째로 놓아버리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은 모양이 되어 자연히 번뇌와 분별심이 없어져,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과 애착하는 마음도 없어질 것이다. 이 몸을 통한 일체의 것들-고통, 가려움, 괴로움, 즐거움, 배고픔, 추움, 배부름, 따뜻함, 영예로움, 욕됨, 삶, 죽음, 앙화, 복, 길함, 흉함, 헐뜯음, 칭찬함, 얻음, 잃음, 안전함, 위태로움, 험함, 평탄함- 이 모든 것을 사량분별의 바깥에 두어야 비로소 놓고 또 놓았다고 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놓고 영원히 놓으면, 모든 반연을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반연을 다 놓아버렸으므로 망상은 스스로 없어지고 분별심은 일어나지 않아 집착은 멀어진다. 여기에 이르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며, 자성이 빛을 발해 온 바탕이 드러난다. 이렇게 되면 참선의 조건이 구비 된 것이며, 다시 노력하여 진실로 참구(參究)하면, 비로소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 것이 분명해진다.             


근래에 참선하는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대저 법은 본래 법이 아니며, 한번 언어의 표현에 떨어지면, 곧 진실한 뜻이 아니다. 이 마음을 밝히면 본래가 부처이며 당장에 아무런 일도 없고 모든 것이  눈앞에서 각각 완성되는데, 수행을 말하고 증득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마(魔)의 이야기다」


달마스님이 중국에 오셔서「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고 하심은 대지의 모든 중생이 다 부처라는 명백한 가르침이다. 당장에 이 청정한 자성을 알면, 모든 것을 따르더라도 물들지 않으며 하루 24시간 가고 머물고 앉고 누워도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눈앞에 완성된 부처이며, 마음을 쓸  필요도 힘을 들일 필요도 없어 다시는 지을 것도 해야 할 것도 없고, 말과 생각에 수고할 필요가 털끝만큼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때문에 부처가 되는 일은 가장 쉬운 일이요, 가장 자유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안에서 얻는 것이며 밖에서 구할 수 없다.


일체 중생이 만일 오랜 세월 동안 사생(四生)과 육도(六道)에 윤회하며 길이 괴로움의 바다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열반의 경지인 부처가 되기를 원한다면 진실로 부처님과 조사의 정성스런 말씀을 믿어야 한다. 일체를 놓고 선도 악도 모두 사량(思量)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서 부처를 이룰 것이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역대의 조사께서 일체 중생의 제도를 발원하였으니, 이것은 근거가 없는 헛된 발원이 아니며 헛된 말씀이 아니다.


위에서 설한 바처럼 법은 이와 같고 또한 부처님과 조사께서 거듭거듭 밝혀 간곡히 부촉하신 진실한 말씀에도 터럭만큼의 헛됨과 거짓이 없다. 일체 중생은 어쩔 수 없이 한없는 세월을 나고 죽는 고통의 바다에 빠져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하면서, 윤회를 그치지 않고 미혹하여 뒤집히고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과 합했다. 이것은 마치 순금이 똥구덩이에 빠진 것과 같아서 사용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더러움은 감당하기 어렵다.


부처님은 부득이 큰 자비심으로써 각양각색의 근기가 같지 않은 중생들의 탐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애착하는 마음 등 8만4천 번뇌의 병을 대치하는 8만 4천의 법문을 설하셨으니, 그대로 하여금 순금에 묻은 각종 오염과 더러움을 대패, 솔, 물, 헝겊 등을 사용하여 씻고 다듬고 문지르게 하도록 가르치신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은 모두가 미묘한 법이며, 모두가 생사를 해결하여 부처를 이루는 길이다. 다만 그 사람의 근기에 적당한가 적당하지 아니한가가 문제일 뿐 구태여 법문의 높고 낮음을 나눌 필요가 없다.


중국에 전래한 일반적 법의 문은 종문(宗門)과 교문(敎門)과 율문(律門)과 정토문(淨土門)과 밀교문(密敎門)이다. 이 다섯 가지 법의 문은 각자의 근기와 흥취(興趣)에 따라서 어느 문이든 수행해도 된다. 모두가 한 문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니, 오래오래 변함없이 나아가면 반드시 성취할 것이다.


종문(宗門)은 참선을 한다. 참선이란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참구하여 뚫는 것이니, 이른바「밝게 자기의 마음을 깨닫고 환하게 본래의 성품을 본다」는 이 법의 문은 부처님께서 연꽃을 드신 것으로부터 시작하였으며 달마대사께서 중국에 온 이후에 이르러 공부하는 방법은 여러 번 바뀌었다


당, 송 이전의 선덕(禪德)들은 흔히 한마디의 말이나, 반 구절의 말로 도를 깨달았다. 스승과 제자간 사이에 전수하는 것도 마음으로써 마음에 인가하는데 지나지 않았을 뿐 어떠한 실제의 법은 없었다. 일상생활 가운데 묻고 대답하였고 또 방편에 따라 풀어 주고 속박하였으니 병을 보아서 약을 줄뿐이었다. 송대 이후 사람들은 근기가 약한 탓에 비유하여 「모든 것을 놓아라」,「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일러주어도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모든 것을 놓지 못하고, 선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생각하였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조사스님들이  부득이 독으로써 독을 다스리는 방법을 채택하여 학인에게 공안(公案)을 참구하거나 화두(話頭)를 간(看)하라고 가르쳤다. 심지어 죽은 화두 하나를 정하여 깨물되 질겅질겅 깨물어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말라고 하였다. 마치 늙은 쥐가 나무 궤짝을 뚫는 것과 같이 정해진 한 곳을  뚫어질 때까지 파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한 생각으로써 만 생각을 물리치는 것이니 실로  부득이한 방법이다. 마치 몸에 있는 나쁜 독을 칼로 째서 치료하지 않으면 살아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옛 사람들의 공안은 아주 많으나 후에 와서는 오로지 화두를 간(看)하라고만 가르쳤다.「시체를 끌고 다니는 것은 누구인가」,「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어떤 것이 나의 본래면목인가」등이 있다. 근래에 와서 제방에서 흔히 쓰는 것은 「염불하는 이는 누구인가」하는 화두 하 나 뿐이지만 사실은 모두 다 같은 것이며 평범한 것이어서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하고자 한다면, 경을 읽는 자는 누구인가, 주문을 외우는 자는 누구인가, 부처님께 절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밥을 먹는 자는 누구인가, 옷을 입는 자는 누구인가, 길을 가는 자는 누구인가를 간하라. 이 모두는 같은 형식의 화두이다.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답은 마음이니, 말은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말의 머리며, 생각도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므로 마음은 생각의 머리[念頭]다. 만법이 다 마음으로부터 생기므로 마음은 만법의 머리이다. 실로 화두는 곧 이 생각의 머리이며 생각 이전의 머리는 곧 마음이다. 곧바로 말하면 한 생각도 생기기 이전이 바로 화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화두를 간하는 것이 마음을 관(觀)하는 것임을 안다.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은 바로 마음이며,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을 간(看)하는 것은 바로 관(觀)하는 것이다. 성품은 곧 마음이며 「듣는 것을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反聞聞自性)」라는 것은 곧 관하는 것을 돌이켜 자기 마음을 관하는 것이다. 「청정한 깨달음의 모습을 원만히 비춤」에서 청정한 깨달음의 모습(淸淨覺相)은 마음이며 비춤(照)은 곧 관(觀)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염불이란 곧 관불(觀佛)이며 관불은 곧 관심(觀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간하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부처를 생각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했는데 이는 마음을 관(觀)하는 것이며, 곧 자기 마음이 청정한 깨달음의 본체임을 관조(觀照)하는 것이고, 또한 자성(自性)의 부처를 관조하는 것이다. 마음이란 곧 성품이며 깨달음이며 부처이다. 마음이란 모습과  방향과 장소가 없으므로  얻을 수 없으며, 청정한 그대로 법계에 두루하여 나오는 것도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닌 본래 눈앞에서 완성된 청정한 법신불이다.


수행자가 육근(六根)을 거두어들여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살피고 화두를 관조하면 생각을 떠난 청정한 자기의 마음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면밀히 하고 담담하게 고요히 비추어 보면, 바로 오온(五蘊)이 다 공하고 몸과 마음이 함께 고요하여 마침내 할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 이로부터 24시간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끄달림이 없이 여여(如如)하여, 오래 날이 지나 공부가 깊어지면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어 고통은 없어지고 제도하는 일도 끝날 것이다..


옛날 고봉(高峯)스님이 이르기를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살피되 마치 한 개의 기와 쪽을 만 길이나 되는 깊은 못에 던지면 곧 바로 못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이 하라. 이같이 하여 만약 7일이 되도록 깨닫지 못하면 나의 머리를 짜르라」고 했다. 대중들이여, 이것은 몸소 겪은 분의 말씀으로 진실한 말이지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허망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어째서 현대인들은 화두를 드는 사람은 많으나 도를 깨치는 사람은 적은가. 이것은 현대인의 근기가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참선을 하면서 화두를 이치로만 대할 뿐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동서남북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닌 결과 늙어서도 안정되지 못하고, 화두를 대하나 아직도 명백하게 제 마음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 화두이며 어떻게 화두를 들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생 동안 말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여 말꼬리에만 마음을 쓰면서,「부처님께  참배하는 이는 누구인가」,「화두를 비추어 보라」하면서 화두를 들고 참구하지만 화두와는 서로 어긋나니, 어떻게 본연의 무위대도(無爲大道)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법왕의 위치에 도달하리요. 금가루를 눈에 넣으면 눈이 멀 것인데 어떻게 큰 광명을 방출할 수 있겠는가. 가련하고 가련한지고.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 도를 배운다는 것은 그 뜻과 원은 범상하지 아니하나 결과는 헛될 뿐이니 매우 불쌍하구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차라리 천년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하루의 길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했으니, 수행하여 도를 깨달음은 쉽고도 어려우며 어렵고도 쉬운 것이다. 마치 전기 불을 켜는 것과 같아서 알기만 하면 손가락 한번 퉁기는 사이에 큰 광명을 놓아 만년의 어두움을 단번에 없애나, 알지 못하면 기회는 사라지고 등불은 꺼져 번뇌만 더욱 많아진다.


잠시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한 사람이 마(魔)에 집착하여 발광(發狂)하며 피를 토하고 병을 앓고, 무명의 불꽃이 커져 남이라는 소견과 나라는 소견이 깊어지는 경우가 바로  두드러진 예가 아닌가.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잘 조화하여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를 고르게 하기를 힘써, 걸림도 거리낌도 없고 나라는 소견과 남이라는 소견도 없이, 다니고[行] 머물고[住]  앉고[坐] 누울[臥] 때에도 현묘한 기틀과 오묘하게 계합(契合)해야 한다.


참선이라는 이 법은 본래 분별할 수 없으며 다만 공부해 갈 뿐이지만 초참자(初參者)에게는 초참자 어려움과 쉬움이 있고, 구참자(久參者) 에게는 오래된 대로 어렵고 쉬움이 있다.


초참자의 어려움이란 무엇인가. 몸과 마음이 순일하고 익숙하지 못하여 나아갈 길이 명확하지 못하고, 공부를 하여도 향상되지 않으며, 마음에 급하다는 생각이 없어 눈을 감고 세월만 보내나니, 「첫해는 처음 참구함, 2년째는 오래 참구함, 3년째는 참구하지 않음」이라는 결과를 이룰 뿐이다. 초참자의 쉬움이란 무엇인가. 다만 신심(信心)과 장영심(長永心-길이 영원한 마음)과 무심(無心)을 갖추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신심이란, 첫째 나의 마음이 본래 부처이며 시방세계의 모든 중생과 더불어 다르지 않음을 믿는 것이요, 둘째 석가모니부처님이 설하신 법은 그 모든 법이 생사를 요달하여 부처를 이루는 도임을 믿는 것이다.


장영심이란, 어떤 한 법의 문을 선정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수행하되, 내생과 후 내생에 이르도록 이와 같이 수행함을 말한다. 참선을 이와 같이 참구하며, 염불도 이와 같이 염불하며, 주문도 이와 같이 주문하며, 교학도 이와 같이 듣고 생각하여 수행한다. 어떠한 법의 문을 수행하더라도 다 계가 근본이 된다. 과연 능히 이와 같이 수행하면 장차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위산(僞山)노사는「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법을 수행하되 삼생(三生)을 능히 물러서지 않는다면 반드시 부처의 자리를 얻을 것이다」하였고, 또 영가(永嘉)노사는「만약 망녕된 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영원히 발설(拔舌)지옥에 떨어져 항하의 모래 수 같은 세월을 보낼 것이다」라고 했다.


무심(無心)이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아 종일토록 대중을 따라 일어나고 앉지만 다시는 아무런 분별심이나 집착을 일으키지 아니하여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는 것이다.


처음 발심하여 수행하는 사람이 이 세 가지 마음(信心, 永長心, 無心)을 갖추고, 화두를 들고 참선한다면 곧「염불하는 이가  누구인가」하라. 스스로 묵묵히 생각하다가 몇 번 소리를 내어「아미타불」을 부를 때, 염불하는 이는 누구며, 이 한 생각이 어디로부터 일어났는가를 살피라. 마땅히 알라. 이 한 생각은 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또한 나의 몸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다.  만약 나의 몸이나 혹 입으로부터 나왔다면, 내가 죽은 후에도 몸과 입은 그대로 있는데 어찌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마땅히 알라. 이 한 생각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났으니, 곧 마음으로부터 생각이 일어난 곳을 찾아 그 곳을 자세히 보고 똑바로  살피기를, 고양이가 쥐 잡듯이 하여 온전히 정신을 집중하면 두 가지 생각이 없어질 것이다. 다만 느리거나 급하게 하지 말고 그 도를 적당히 하라. 조급하게 서두르면 병과 장애가 생길 것이다.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이와 같이 하여 날이 가고 공부가 깊어지면 참외가 익어 꼭지가 떨어지듯, 시절인연이 되면 잡거나 밀거나 할 때 홀연히 크게 깨달을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찬지 뜨거운지를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바로 의심할 것 없는 경지에 이르나니 마치 네거리에서 자기 아버지를 만나 큰 즐거움을 얻는 것과 같다.


구참자의 어렵고 쉬움이란 어떤 것인가. 구참자란 가까이 에서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였고, 여러 해 동안  공부하여 한 차례 단련되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잘 익었고  참선의 이치가 명확하여 자유자재하게 공부할 수 있으므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구참자의 어려움이란, 바로 이와 같은 자유자재가 명백하여 중간에서 머무는 것이다. 중간에서 머무르니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지 못하고, 고요하지만 움직임이지 못하니 진실한 쓰임새를 얻을 수 없다.


심지어 객관 세계를 대하면 곧 감정을 내어 취하고 버리는 것이 옛 과 같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완연하다. 크고 작은 망상(妄想)이 구태의연하게 굳어져 있어, 하는 공부가 바위에 부딪치는 찬 물거품과 같아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며, 또 오래하면 피로하고 게을러져 마침내  아무런 결과도 쓰임도 얻지 못한다.


구참자가 이런 곤란을 알았다면 곧 본래 참구하는 화두를 일으켜 정신을 들어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높고 높은 봉우리에 서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다니되 손을 놓고 마음대로 다니며, 불조(佛祖)와 함께 본체를 상견(相見)하게 되니 어디에 곤란이 있으리오. 쉬울 뿐이다.


화두란 곧 한 마음이며 그대와 나의 이 한 마음은 가운데에도 안에도 밖에도 있지 않지만, 또한 가운데에도 안에도 밖에도 있는 것이니, 마치 허공이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곳에 두루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화두는 위로 끌어올리려고도 하지 말고 또 아래로 물리려고도 하지 말라. 위로 끌어올리면 흔들림을 야기하고, 아래로 물리면 혼침(昏沈)에 떨어져 본래의 심성을 어기므로 다 중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망상을 두려워하며 망상을  없애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노니 망상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또한 없애려고 노력하지도 말라. 망상을 없애기 위해서는 다만 그대가 망상을 인식하고 망상에 집착하지 말며, 망상을 배척하려고도 말고, 오직 망상이 계속 되지만 않게 하면 망상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즉 「망상이 일어나면 곧 망상인 줄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질 것이다」.


만약 망상을 이용하여 공부를 한다면 이 망상이 어느 곳에서부터 일어났는가를 살펴라. 망상은 자성이 없고 바탕이 공한 까닭에 바로 본래부터 망상이 없었던 나의 심성으로 돌아가, 자성이 청정한 법신불이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진실로 말하노니 진여와 망상이 한 몸이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 보리와 번뇌가 모두 본래의 마음이며 본래의 성품이다. 분별심이 필요치 않으며, 좋아하고 싫어함도 필요치 않고, 취하고 버리는 것도 필요하지 않다. 이 마음은 청정하여 본래 부처이니 한 법도 필요치 않다. 어느 곳에 군더더기가  있겠는가. 참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