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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3. 수행자료

권수염불문(1)

권수염불문(1) 


제 1장 염불을 발기하는 인연


연지대사 말씀에 한 생각으로 삼 아승지겁을 뛰어 넘고 한조각 말로서 모든 성인과 같이 되나니 지극히 묘한 용을 가히 헤아리지도 못 할 것은 오직 불설아미타경이라 하셨다. 이 경은 명호를 부르는 염불 법문을 발기한 인연이 된다. 석가모니불은 이르시되 중생이 본래 부처로서 낱낱 부처의 지견을 갖추었는데 어찌하여 무명과 번뇌에 덮혀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고? 비록 깨닫지는 못하여도 불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마치 보물이 집안에 묻혀있고 구슬이 옷 속에 감춰 있어 잃어버리지 않음과 같다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부처님께서 염불 법문을 열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발심 염불하여 본래 갖추어 있는 부처지견에게 깨쳐들게 한 것이다.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이르시되 "사리불아 어찌하여 모든 부처님들이 일대사 인연으로 세상에 나셨다 하는가? 모든 부처님이 중생들께 부처의 지견을 열어서 청정케 하고 져 세상에 나셨으며, 중생들께 부처지견을 보여 주고 져 세상에 나셨으며, 중생들께 부처지견을 깨닫게 하고 져 세상에 나셨다." 하였으니 부처지견을 곧 모든 부처님의 지를 깨친 것이요 또한 중생들에게도 부처의 삼덕 (반야, 해탈, 열반)이 비밀히 감춰져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치어 성불하시고 중생들은 혼미하여 윤회를 받는 것이니 잘 알아라. "혼미와 깨침은 비록 다르나 중생과 부처는 본래 평등한 것이다." 하셨으며, 금강경에도 이 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 하셨으니 곧 중생이 본래 부처지견을 갖추어 부처님과 다름없다는 뜻이다. 지견 두 글자는 근본 성품을 말하는 것이니 근본 성품은 곧 불성이라 이 성품은 항상 육근문에 있어 광명을 놓고 땅도 움직이는 것이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혀로 맛보고 뜻으로 아는 것이다. 이제 다만 의근 안근만 들어서 지견이라 하지만 실지로는 여섯 성품이 곧 한 성품인 것이다.


능엄경에 "원래는 한 정기 밝은 것을 나누어 여섯 가지 화합을 만들었다" 하셨다. 부처님 지식은 참된 지식이라 모르는 것이 없고 부처님의 보는 것은 참되게 보는 것이라 못 보는 것이 없다 하셨는데 중생들은 망상을 집착하여 망령된 지견이 된 것이다. 고인의 글에 한조각 구름이 골짜기를 덮으니 돌아오는 새가 다 집을 잃었다는 말과 같다. 대개 망념은 자성이 없고 전체가 참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중생을 위하여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게 하심이니 마치 집안에 있는 보물을 가르쳐 주신 것과 같다.


이것은 본래 집안과 옷 속에 있는 보물이라 구하지 않아도 본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생에게 불성이 갖추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우리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염불 법문을 열어 보여주심은 중생들로 하여금 육근을 거두고 깨끗한 생각으로 계속하여 아미타불 명호를 불러 생각의 경계가 고요하고 마음이 텅 빈데 이르면 불성이 저절로 드러나서 곧 부처님 지견에 깨쳐 들어가 자성이 저절로 드러나서 각자 자기에게 갖추어 있는 자성 미타를 친견하여 한 가지 출세의 큰 인연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염불을 정토 법문, 연종, 정종이라고 한다. 석존께서 큰 자비심으로 중생의 근기를 보아 교화 하시는데 오직 이 염불 법문이 중생을 제도하기 쉬우므로 제자들이 묻지도 않는데 스스로 아미타경을 설하시되, "사리불아 여기서 서쪽으로 십만억 불토를 지나 극락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 아미타불이 설법하고 계시느니라."고 하시어 극락세계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셨다. 극락의 의보와 아미타불의 정보를 설하셨으며 두 가지 명호(무량수, 무량광)는 만고칭명 염불의 근본이며 부처님께서 친히 설하신 미묘한 법으로서 중생으로 하여금 육도윤회를 벗어나게 하신 가히 말 할 수 없는 수승한 법이다.


아미타경에 부처님이 극락 명자를 해석 하시되 사리불아 어찌하여 극락이라 하는고? 그 나라 중생은 고통이란 전혀 없고 락만 받으므로 극락이라 한다. 여기 극락의 의보 정보와 여러 가지 장엄을 말씀하시어 중생의 신앙심을 일으키고 다음에 중생의 왕생 발원을 권하셨다. 이 말을 들은 중생들은 저 나라에 나기를 원할 것이니 가서 나기만하면 모든 착한 사람과 함께 모여 살게 된다. 또 아미타불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는 것으로 염불의 정행을 세웠다. 미타경에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 이야기를 듣고 하루, 이틀, 사흘, 닷새, 엿새, 이레 동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일심불란하면 그 사람의 임종 시에 아미타불께서 모든 성중과 같이 그 앞에 나타나시므로 그 사람의 마음이 뒤바뀌지 아니하고 곧 극락세계에 가서 난다" 하셨다.


* 신심과 원력과 수행


위에 인용한 아미타경 정종은 신과 원과 행을 권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신 원 행 이 세 가지로 정토에 왕생하는 자료를 삼았으니 이 세 가지 자료만 구족하면 결정코 구품연대에 올라 갈 것이다. 왕생하고 못하는 것은 신심과 원력의 있고 없는데 달려있고 품위의 낮고 높음은 수행의 깊고 얕은데 매인 것이다. 심과 원과 행은 솥의 세발과 같아서 하나만 없어도 되지 않는다. 내가 항상 정토 법문을 권할 적에 신은 반드시 깊이하고 원은 반드시 간절히 하고 행은 반드시 진실함을 요구하나니 능히 이같이 하면 정토에 왕생하는 것이 왼손에 책 쥐고 가는 듯하다.


첫째, 깊이 믿는 것 네 가지


1. 석가여래는 삼각이 원만시고 사지(평등성지, 성소작지, 묘관찰지, 대원경지)가 크게 밝아 근기를 보아 교화하시는데 이 염불 법문은 결정코 말세 중생의 근기에 맞는 것이요 헛된 말이 아님을 믿을 지니라.


2. 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의 인행 때에 자비심으로 사십팔의 큰원을 세우시고 무량겁으로 만행을 닦으신 공덕장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가상적인 것이 아니고 황금으로 땅이 이루어진 정토가 실지로 있는 것을 결정코 믿을 지니라.


3. 육방 제불께서 넓고 긴 혀로 찬탄하시고 역대 성현들이 정토 법문을 수행의 제일 빠른 길이라 찬양하시며 천경만론에 곳곳마다 정토 법문을 지시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진실한 말이요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님을 믿을지니라.


4. 사바세계는 탁하고 악하여 중생의 악업으로 감득한 것이요 극락세계는 깨끗하고 착해서 중생의 청정한 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염불은 곧 몸과 입과 뜻을 청정케 하는 것이라 삼업이 맑아지면 정토에 나는 것은 인과가 서로 부합하는 것이니 결정코 허황치 않음을 믿을 지니라.

이와 같은 네 가지 신심을 갖추면 비록 어떤 사람이 염불보다 특별한 법문이 있다 하더라도 마침내 따라가지 않을 것이니 이만해야만 깊은 신심이라 할 것이다.


둘째, 간절한 원 네가지


1. 결정코 성불할 것을 원하라.


간절한 원이라는 것은 자기의 심령을 져버리지 않는 것이니 사람마다 신령한 성품은 본래 갖추어 있는데 번뇌와 업장으로 인하여 생사윤회가 끊어지지 않다가 다행히 금생에 사람이 되어 아미타불 명호와 본원 공덕을 들었으니 신심을 내어 이 몸이 다하도록 염불하여 정토에 나서 생사를 벗어나고 성불하기를 원할 것이니 이것이 심령을 져버리지 않는 것이다.


2. 고통을 여의고 낙 얻기를 원하라.


우리들이 업을 따라 과보를 받으므로 이 사바오탁 악세세서 삼고 팔고 무량한 고통을 받았으니 이제 사바와 극락을 비교하여 보면 자연히 기뻐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날 것이다.


사바세계에는 세 가지 고통이 있다.


(1) 고통의 고통이니 오취 중생(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이 생사의 몸을 받아 항상 고통을 받는 중에 다시 여러 가지 고를 받으므로 고통의 고통이라 한다.


(2) 무너지는 고통이니 이 몸을 사랑하다가 죽게 되고 오욕을 즐기다가 없어지고 부모 형제 친척이 서로 사랑하다가 생이별 사이별 하게 되고 재산을 아끼다가 잃어버리고 관직에서 떨어지고 천상 낙도 복이 다하면 떨어져서 모든 것이 결국은 없어지므로 무너지는 고통이라 한다.


(3) 행하여 가는 고통, 모든 물질이나 마음이 항상 같지 않고 나고 멸하고 짧고 길고 있고 없고 하면서 항상 변천이 있는데 변천 하는데 따라 좋고 나쁜 것이 있으니 좋은 일은 적고 나쁜 일이 많으므로 고통이 생긴다. 이것을 행고라 한다. 그러나 극락세계 중생들은 항상 몸과 마음이 안락하므로 고통의 고가 없고 의보정보가 특수하게 장엄되었으므로 무너지는 고가 없고 항상 열반 삼매의 낙을 수용하므로 행하는 고가 없다.


또 사바에는 여덟 가지 고통이 있으니 나는 고통, 늙는 고통, 병나는 고통, 죽는 고통,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고통, 원수끼리 만나는 고통, 구하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고통, 번뇌가 성하는 고통이 있다. 극락은 연꽃 속에 화생하는 낙이 있으므로 나는 고가 없고 상호에 광명이 있으므로 늙는 고가 없고 항상 자유롭고 몸이 건강하므로 병나는 고가 없고


목숨이 무량하므로 죽는 고가 없고 많은 중생이 서로 모여 살아가므로 이별하는 고가 없고 성현들만 있으므로 원수와 만나는 고가 없고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되므로 구하여 얻지 못하는 고가 없고 오온이 공적하므로 번뇌가 성하는 고가 없다. 이와 같이 두 세계의 더럽고 깨끗함과 고와 낙이 현저히 다르니 결정코 극락에 나서 고를 여의고 낙 얻기를 원할 것이다.


3. 빨리 물러나지 않는 자리에 오를 것을 원하라.


이 국토에서 수행하는데 는 진보는 어렵고 퇴보는 쉬우며 모든 환경이 나빠서 수도 하는데 장애 되는 인연은 많고 도우는 인연은 적으며 혹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마지막에는 게을러지며, 혹 공부를 바꾸기도 하며 혹 공부하던 중 몸이 죽게 되면 전생에 하던 공부를 잊어버려 계속치 못하고 내생에는 또 업을 지어 반드시 타락하나니 이 땅에서의 수행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저 십신보살이 비록 큰 마음을 내었으나 조금 올라가다가 다시 떨어지는 것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털이 바람을 따라 구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행 신심이 만겁을 경과 하여 신심이 만족하고 선근이 익어져야 바야흐로 초주에 들어가고 물러나지 않는 자리를 얻는 것이니 매우 어렵고 미타국토는 다만 왕생만 하면 문득 세 가지 물러나지 않음을 얻는 것이니 매우 쉬운 길이다. 아미타경에 중생이 극락에 태어나는 자는 물러나지 않는 자리에 오른다 하였으니 정토에 나기를 원할 지니라.


4. 아미타불을 친견하기를 원하라.


부처님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워 마치 우담발화가 삼천년에 한번 피는 것과 같다. 고인의 말에 부처님 계실 때는 내가 악도에 빠지고 내가 사람 되었을 때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니 이 몸이 업장이 많아 부처님 금색신을 뵙지 못함을 참회한다 하였다. 내가 말세에 나서 석가불은 이미 가시고 미륵불은 오시지 않아 아무리 부처님을 뵈옵고 법문을 듣고자 하나 매우 어려워 마치 의지할 데 없는 고아와 같이 가련하다.


젖먹일 어머니와 이끌어 줄 아버지를 잃어 극히 위태함과 같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미타 아버지께서 현재 설법하시어 중생을 만지기를 어머니가 자식 생각하듯 하시나니 그러므로 정토에 왕생하여 아미타불 친견하기를 원할 지니라. 비록 이 몸이 만 번 죽더라도 이 원은 바꿀 수 없고 가사 임종 할 때에 혹 제석천왕이 나를 이끌어 도리천에 나게 하고 혹 대범천왕이 나를 초석천에 나게 하더라도 나는 결정코 가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다른 곳이야 말할 것 있겠는가? 또는 보통 서방에 나기를 원치 않고 반드시 금대를 타고 상품 상생하여 일찍 부처님을 뵈옵고 빨리 무생법인 증득하기를 원할 지니라.


희옥대사가 근실히 염불하셨는데 하루는 아미타불이 나타나시고 공중에 음악소리가 들리며 은대를 가지고 영접하거늘 대사가 생각하되 내가 평생토록 정진하여 금대를 바랐는데 어찌 은대가 왔는가 생각하고 가기를 즐겨 하지 않으니 부처님도 강요하지 않으시고 서방으로 가셨다. 대사는 더욱 정진하여 결정코 왕생할 줄 믿었더니 이십일 일후에 불보살이 공중에 가득하고 아미타불은 금대로 영접하시거늘 대사는 나의 원이 만족하다하고 합장 염불하며 가셨는데 공중에서 음악소리가 들리었다.


그때에 태수가 글을 짓되 우리 스승이 한 생각으로 초지에 오르니 불국토 음악이 두 번 들리도다. 오직 문 앞에 계화나무가 있어 가지가 낮아서 금대에 결리도다. 하였다. 광명선도 대사는 "나와 같이 염불하면 너의 소원을 이룰 것이다" 하였으니 원의 힘이란 너무 커서 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극락세계의 종종장엄은 온전히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만일 믿음만 있고 원이 없으면 신이 헛된 것이라. 그러므로 반드시 원을 발해야 한다. 보현보살은 "내가 임종할 때에 모든 장애 없어져서 아미타불 친견하고 곧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합니다."

하셨으니 정토수행 하는 이는 원을 꼭 간절히 세워야 되는 것이다.


셋째. 실 행


행은 아미타불 명호를 부르는 것이니 이것이 전문으로 정토행을 닦는 것이다. 행은 진실해야 되는데 비록 신과 원이 있어도 진실한 행이 없으면 정토에 날 수 없다. 마치 과실을 심으면 과실을 얻지마는 심지 않으면 과실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이 염불에는 신심 원력 실행 세가지중에 하나만 빠져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일심으로 부처님을 생각하여 마음과 부처가 서로 응해서 마음은 부처를 여의지 않고 부처는 마음을 여의지 않아 생각이 한곳에 있어 끊이지 않으면 망상이 일지 않아 마음은 호수의 조용한 물과 같고 부처님은 달 그림자 비치 듯 하다 삼매는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과 원과 행은 정토에 나는 양식이 되는데 양식만 준비하면 정토에 나기가 어렵지 않고 정토에 나면 삼계윤회를 벗어나므로 석가여래께서 여쭙는 제자 없이 미타경을 말씀하시어 염불 발기의 인연이 된 것이다.


♣ 제 2장 염불이 곧 수행이다.


대개 수행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몸과 입과 뜻의 삼업으로 구분 하나니 만일 몸으로 악한 일을 하고 입으로 악한 말을 하고 뜻으로 악한 생각을 하면 곧 수행을 잘못 하는 것인데 염불은 곧 삼업을 맑히는 것이니 좋은 수행이 되는 것이다. 이제 시험해 말할진대 한사람이 염불 법문을 듣고 믿고 의심치 않으며 왕생발원 하여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불러 글자마다 마음에서 일어나고 글자마다 입에서 나오고 글자마다 귀로 들어가서 생각생각이 분명하여


마음과 입이 일체가 되어 생각 생각이 계속하여 마음속에 부처뿐이고 부처밖에 마음도 없어져서 모든 망상을 제하고 망상이 없어지면 의업이 청정해지나니 이것이 의업수행이다. 입으로 염불하여 잡념이 없고 소리소리가 아미타불을 여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곧 구업수행이다. 중생의 몸으로 짖는 업은 뜻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니 일심으로 염불하여 육근을 막아 버리면 곧 신업이 맑아지는 것이니 이것이 신업수행이다.


혹 말하기를 "일생에 염불하여 극락에 갈수 있을까? 과연 고통의 세계를 떠나 안락한 곳에 가고자 할진대 특별히 기묘한 법을 닦는 것이 옳거늘 이제 다만 부처님 명호만 부르는 것을 어찌 진실한 수행이라 하리요 사람을 속이고 그르치는 것이 아닌가." 답하되 "이것을 다른 이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곧 석가여래께서 철저한 자비심으로 중생의 근기에 맞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만덕이 구족하시고 세상에 제일 높은 성자로서 헛말이 없거늘 어찌 중생을 속이겠는가? 부처님은 중생들이 망념이 분분하여 쉬지 못함을 아시고 아미타불 명호를 생각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생각으로서 생각을 그치게 하는 법이다. 마치 의사가 독함 병에 독약으로 치료하는 것과 같고 또 중생의 마음은 물과 같아 깨끗한데 여러 가지 망념을 일으키는 것이 마치 티끌을 물에 넣으면 맑은 물이 탁수로 변함과 같다.


이제 탁수를 맑히려면 물 맑히는 구슬을 넣어야 된다. 아미타불 명호는 물 맑히는 구슬과 같고 중생의 산란심은 탁수와 같다. 운서스님은 물 맑히는 구슬을 탁수에 넣으면 탁수가 맑아지고 부처님 명호를 산란한 마음에 던지면 산란지심이 불심이 된다 하였다. 그러므로 염불은 바로 부처되는 법이라 어찌 남을 속이겠는가? 중생이 매일 십이 시중에 빛과 소리 냄새 맛 촉감 등 여러 경계를 생각하고 반연하여 탐욕심을 내어 업을 짓고 업을 따라 과보를 받아 나고 죽어 윤회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염불 법문을 가르쳐 전심으로 아미타불 명호를 생각하며 불러서 자연히 육진경계를 생각지 않고 분별의 마음이 나지 않게 한 것이니 이것이 곧 망상의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는 유일의 묘법이다. 눈으로 빛을 볼 때 다만 아미타불만 생각하고 빛의 좋고 나쁨을 생각지 않고 귀 코 혀 몸 뜻의 경계에 대하여도 모두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어찌 수행의 묘법이 아니리요. 누가 말하기를 부처님 명호를 생각하는 것이 무슨 공덕이 있으리오.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명호에 만 가지 공덕이 구비함을 모르는 까닭이다.


연지대사 법문에 그 명호를 부르면 만 가지 공덕이 구비하고 번일하게 생각하면 백가지 행실에 빠질 것이 없다 하였으니 어찌 공덕이 없다 하겠는가. 옛날 주리반특가가 출가하여 한 게송을 배우는데 백일 동안 앞에 글을 알면 뒤에 글을 잊어버리고 뒤에 글을 알면 앞에 글을 잊어버려서 도무지 외워보지 못했다. 게송 왈 "입을 지키고 뜻을 거두고 몸으로 범하지 말며 일체중생을 괴롭히지 말고 무익한 고행은 멀리 여일지니 이렇게 수행하는 자는 도를 얻을 것이다" 이 게송은 부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남마다 세 때로 하는 것이니 이것은 출가의 본뜻을 잊어버리지 말고 꼭 이 글대로 수행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반특가는 오래 배워도 외우지 못하거늘 그의 형 주리가 차라리 속가로 가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반특가는 기억력은 없어도 도심은 굳어 물러가지 아니하였다. 부처님은 그 우둔함을 불쌍히 여겨 수식관을 가르쳐 코에 숨이 들고 나가는 것을 세어 하나에서 열까지 세고 다시 하나에서 열 이렇게 세는데 세는 법은 들이는 숨을 세면 나가는 숨은 세지 않고 나가는 숨을 세면 드리는 숨은 세지 않는 것이다. 반특가가 그 말씀을 따라 공부에 깊이 들어가 마음을 깨쳐 걸림 없는 지혜를 얻고 모든 루가 다해 아라한이 되었다.


수식관은 염불 공부에 미치지 못하지만 수식관을 하고도 아라한이 되었거늘 하물며 염불 공부에 미치지 못하지만 수식관을 하고도 아라한이 되었거늘 하물며 염불은 능히 삼업을 맑히고 육도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니 어찌 옳은 수행이 아니겠는가.


♣ 제 3 장 염불이 가장 온당하다.


석존께서 사십구 년 동안 중생의 근기에 따라 팔만 사천 법문을 설하시니 문마다 도에 들어가는 요긴한 길이다. 마치 많은 길이 서울을 통하는 것과 같다. 능가경에 "근원에 돌아가는 길은 한갈 이지만 방편따라 문이 많다" 하셨다. 이렇게 많은 문 가운데 가장 쉽고 가장 온당한것은 염불 만한것이 없다.


염불은 다만 아미타불 명호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니 어떤 사람이나 한번 가르치면 곧 알게 되는 것이다. 다만 입으로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생각생각이 계속되면 문득 염불삼매를 얻는 것이니 그 수행은 참으로 쉬운 것이다. 다만 수행만 쉽고 공덕이 없으면 진실로 귀할 것이 없겠지만 이 염불법문은 신심과 원력으로 진실히 염불하면 참구와 관상을 아니 하여도 왕생하게 된다.


만일 다른 법문을 닦으면 다만 자기의 힘만 의지하는 것이니 자기의 힘은 넉넉지 못하여 혹 옆길로 갈수도 있고 혹 중도에 마가 생길수도 있고 혹 공부 중에 죽어 내 생에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면 십중팔구 전생의 공부가 없어지는 것이니 이런 법문은 모두 위태로운 것이다. 오직 염불법문은 자기 염불의 힘과 부처님의 원력을 겸하였으므로 다만 진실히 염불하면 왕생 못할 이유가 없고 다만 아미타불 명호를 안고 일생동안 생각하면 항상 제불의 호념을 얻고, 또한 부처님 광명을 생기거나 다음 생에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


염불하는 중생은 아미타불께서 원을 따라 영접해 주시나니 이것은 곧 두 힘이 일시에 결정코 부처님을 뵈옵고 극락에 왕생하여 삼계 고해를 뛰어넘고 구품연대에 화생하여 물러나지 않는 자리에 올라 앉아 무생법인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이 선종을 최상승이라 하여 많이 추종되니 이것은 돈교 법문이라. 한꺼번에 생사를 벗어나고 불지에 오르는 것이니 이 말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상상 근기라야 일생에 판단할 수 있고 하근은 도저히 될 수 없고 중 근기도 일생에 판단하기가 어렵고 심중팔구 후생에는 전생 공부가 어두워지는 것이다.


송나라 청초당은 선문의 종장인데 일생에 정진하다가 말년에 어는 정승이 고향에 돌아오는데 거동이 굉장함을 보고 부러운 마음을 내었더니 후생에 정씨 집에 태어나서 정승이 되었으니 이것은 일생동안 참선 공부한 업을 부귀공명과 바꾼 것이다. 어찌 애석치 않을까. 장원의 글에 "한집이 배부르고 따뜻함은 천집의 원망이요 반세상 부귀공명은 배 세상의 원수"라 하였다.


♣ 제4장 염불이 수승방편이다


염불이 제일 수승방편이 되는 것은 모든 중생의 근기에 맞아 승속남녀 현우귀천 모두 할 수 있으며 절이나 속가나 바쁠 때나 한가한 때는 움직이고 고요할 때에 일심으로 염불하여 생사를 해탈하는 것이니 그 수승함이 제일이다. 혹 말하기를 염불은 어리석은 사람이 할 것이요 지혜인이 어찌 하겠는가 한다. 시험해 묻노니 요즘의 지혜인 이 능히 문수 보현 두 보살보다 뛰어나겠는가. 저 두 보살도 정토에 나기를 발원 하셨다. 문수 발원경에 "내가 임종할 때에 모든 마장 없어지고 극락세계 왕생하여 모든 소원 성취하고 그 자리에서 부처님께 수기 받기를 원합니다." 하셨고


보현보살도 이와 같이 발원 하였으며, 또 영명 연지 두 대사 보다 지났는가. 저 두 대사는 지혜가 넓고 재주가 탁월하여 고금 사람들이 많이 추앙하는 이로 모두 진심으로 염불하며 정토법문을 널리 펴고 많은 저술을 세상에 전하였는데 우리는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기에 염불할 것이 있느냐 하는고? 속담에 총명한 이가 총명을 인하여 허물을 범한다 하는 것이 이런 사람을 가르친 것이다.


혹 말하되 염불은 출가한 사람이 할 것이요 재가 신도는 할 수 없다 한다. 이런 말은 부처님의 근본 뜻을 저버리고 주생을 그르치는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이 주생을 제도 하지 않는 것이 없지마는 유독 이 염불법문은 세 근기에 다 맞고 모든 중생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출가인만 제도하고 제가인은 제도하지 못하겠는가?


승속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발심 염불 하면 모두 제도를 얻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절에서 염불하는 것은 좋지만 속가에서는 불편하다 한다. 이런 사람은 도무지 염불도리를 모르는 사람이다. 다니거나 앉거나 머물거나 눕거나 어느 곳 어느 때를 막론하고 염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요긴한 것은 생각 생각이 서로 계속 하여 한 덩어리가 되고 꿈속에서 능히 염불하게 되면 현세에 모든 소원이 성취되고 임종 시에 일심이 되어 마음이 뒤바뀌지 않는 것이다. 다닐 때에 염불하기 좋다. 한걸음에 염불 한 번씩 한다.


발자국마다 극락정토에 놀고 생각마다 사바세계를 떠난다. 꽃구경 버들 구경에도 염불하고 물과 산에 놀 적에도 염불은 놓지 말라. 내가 한번 극락에 가게 되면 시방세계를 마음대로 왕래 할 것이다. 머물 때에 염불하고 이 몸을 살펴보라 사대가 허망하여 하나도 진실함이 없다. 나와 미타가 둘이 아니라 명월을 대하면 흡사히 세 사람 같다. 이 몸은 점점 썩어서 머물기 어렵고 정토는 멀지만 가기 쉽다. 어느 때에 매미 같이 껍질을 벗고 연화 태중에 금색신을 얻을까


앉을 때에 부처님을 관하고 가부좌 하니 몸이 연화대 꽃 가운데 있도다. 백호상은 분명히 생각 따라 나타나고 금빛 얼굴 화력 하여 마음에 합하도다. 사실은 꿈과 환과 같이 비고 고요한데 이치는 원융하여 유무도 아니로다. 어느 날 연못에 부처님의 발을 받들고 이마를 만지시고 수기를 받자오리 누워서 염불할 때에 소리를 내지 말고 숨 쉬는 가운데에 명호를 생각 하라 베게위에 청풍은 불어오고 평상머리에 명월은 비치도다. 티끌 같은 더러운 마음 끊기 어려우나 꿈속에는 연화세계가 나타나도다. 꿈 가운데 부처님 나타나더니 깨고 나도 기억에 분명하다.


만일 꿈속에 염불하지 못하면 이것은 공부가 미숙한 것이다. 깨어난 뒤에 불전에 머리를 때려 피를 흘리고 참회하여 용맹정진 오래하면 자연히 몽중에도 염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것은 깨는 것 같고 죽는 것은 꿈과 같은 것이니 꿈속에 능히 염불하면 죽을 때도 염불 왕생 하느니라.


염불공부를 자기가 시험할 것이니 능히 기쁠 때나 걱정할 때나 여러 가지 경계를 당하여 염불이 끊어지지 않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때도 생각이 움직이지 않으면 자연 일심불란을 얻을 것이다. 또 말하되 염불은 노인이 할 일이요 젊은이는 할 필요가 없다한다. 이것은 참으로 사람을 그르치는 말이다.


사람의 목숨이 무상하여 수명을 알 수 없으니 일찍 염불하는 것이 옳다. 만약 장수 하여 염불을 많이 하면 공덕과 수행이 깊어 임을 뵙고 급히 내려와 절을 하고 곧 남편을 불러 절하라고 권하니 남편도 또한 부처님의 반신을 뵙고 신심을 내어 생각 하되 반신을 뵙고 신심을 내어 생각 하되 염불하면 반드시 부처님을 뵙는데 임종 시에 부처님 영접을 받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라 하고 곧 선경을 불태우고 부부가 같이 염불 했더니 뒤에 임종 시에 다 좋은 상서가 나타나고 극락에 왕생 하였다.이 염불은 일하는 사람에게도 장애가 없는데 하필 한가한 사람만 염불한단 말인가


염불 제이 수승방편은 업장을 가진 상태에서도 왕생하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은미하여 업을 짓고 업을 따라 과보를 받는 것은 인과의 필연적 이치라. 지장경에 "업의 힘이 너무 커서 수미산 보다 높고 큰 바다 보다 깊어서 능히 성인의 도를 막는다. 그러므로 악이 적다고해서 죄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죽은 뒤에 과보를 받는 것이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는 것이다. 부자간이 지극히 친하나 갈리는 길은 다르며 비록 서로 만나도 업을 대신 받을 수 없다"하셨다.


업은 헛됨이 없어 나고 죽음에도 끝나는 것이다 아니다. 예전에 안세고 법사가 여러 생에 수도를 했는데 한번은 안식국의 태자가 되어 출가해서 도를 닦아 숙명통을 얻고 보니 전생에 자기가 사람을 죽었던 사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조용히 관해보니 자기에게 죽은 그 사람이 중국에 태어나 살고 있음을 알고 그 빚을 갚고자 배를 타고 낙양에 가서 넓은 들판 무인지경에 이르렀더니 문득 앞에 한 소년이 오는데 법사를 보고는 성을 크게 내어 한말도 하지 않고 칼로 찔러 법사를 죽였다.


법사의 영혼이 다시 안식국의 태자로 태어나서 또 출가하여 숙명통을 얻어서 보니 아직도 원결이 남아 있어 그 당사자가 또한 낙양에 있는지라 전생에 자기를 죽인사람을 찾아서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 스님이 일부러 묻되 당신이 나를 아는가 하니 알아보지 못하는지라. 또 말하되 나는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저 들판에서 당신이 죽인 그 스님이다. 그 사람이 크게 놀라서 생각하기를 이 일은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이 스님은 귀신이라 필시 원수를 갚으려고 온 것이로구나 하고 허겁지겁 도망치려하였다.


이에 스님이 말하기를 겁내지 말라 나는 귀신이 아니다. 그때 죽은 뒤에 영혼이 다시 안식국에 태어나서 오늘 두 번째 낙양에 와서 전생에 당신에게 지은원수 빚을 또 갚으려 하노라. 내가 내일 다른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니 당신은 나를 위해 증인이 되어 나의 유언을 전하되 내가 당연히 목숨 빚을 갚은 것이라고 설명해서 관청은 그 사람을 고의 아닌 실수로 돌려서 살인죄로 다스리지 말라고 하라는 부탁을 하고 그 이튿날 같이 시장거리로 나아갔다. 스님은 앞서고 그 사람은 뒤 따라가는데 스님 앞을 보니 한사람이 나무를 지고 오다가 넘어지면서 스님의 머리를 때려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리하여 나무 장사가 관청에 잡혀 죄를 심문받는데 낙양 사람이 보니 어제 밤 스님의 말과 같은지라 관청에 가서 그 스님의 유언을 전하여 나무장사의 죄를 다스리지 말라 하였다. 그 스님은 영혼이 다시 안식국에 가서 세 번째로 태어났는데 도 출가하여 수도하니 그분이 바로 그 유명한 안세고법사라. 전생에 고승으로 숙명통을 얻었어도 오히려 그 지어놓은 업을 면하지 못하는데 염불법문은 죄업을 가지고도 왕생하는 것이니 그 수승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 나라 국왕이 나선스님 한데 묻되 염불하는 사람이 죄업이 남아있는데도 왕생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대답하되 대왕이여 큰 돌을 물에 놓으면 가라앉지 않습니까? 왕이 말하되 반드시 가라않습니다. 나선스님이 말하되 가라앉지 않게 할 수 는 없을까요? 하니 그리될 수 없습니다. 만일  돌을 배에 싣고 가도 가라앉을까요? 가라앉지 않습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아미투불 원력으로 접인 함을 입어 왕생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큰 원의 배를 타는 고로 죄가 있어도 왕생한다 함은 돌을 바에 싣고 가는 것과 같다 하였다.


옛날에 정선화는 소 죽이는 업을 하고 살았는데 하루는 병이 중하여 죽게 되었는데 많은 소가 와서 목숨을 돌려달라면서 혹은 뿔로서 눈을 찌르고 혹은 가슴을 찌르며 혹은 등을 받고 혹은 발로 몸을 밟으니 장선화가 크게 놀라서 그 처를 불러 빨리 스님을 청하여 나를 살려 달라 하였다. 그 처가 한 스님을 청해 와서 스님이 말하기를 놀래지 말라 이제 네가 살생한 죄업이 중하니 다른 법으로서는 구원할 도리가 없고 다만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너의 원수를 풀고 너의 고통을 면할 수 있다. 나를 따라 염불하라하고 스님이 고성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니 선화는 한 손으로 향불을 잡고 스님을 따라 염불하여 겨우 두어 번 부르고 말하기를 소가 갔다고 했다. 스님이 다시 염불하여 극락에 가기를 원한라고 권하였다.


선화는 더욱 건절한 마음으로 염불하고 큰소리로 말하기를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영접 하신다 하고 합장하고 죽었다. 이것은 곧 업을 가지고 왕생한 증거이다. 모든 사람에게 권하노니 장선화가 염불하고 업을 가지고 왕생한 인연을 잘 알고 오해하지 말라. 만일 염불하면 업을 가지고도 왕생한다하여 생전에 모든 나쁜 짓을 하고서 임종 시에 염불하여 대업왕생 한다고 하면 천만 부당한 것이니 잘 알아라. 임종에 염불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만일 전생에 선근이 없으면 임종할 때 절대 염불하지 못할 것이다.


장선화가 비록 살생한 업을 지었으나 전생에 닦은 큰 선근이 있는 까닭이다. 만일 선근이 없었으면 스님을 청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요 또한 능히 높은 스님을 만나서 염불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바라는 것은 먼저 악업을 끊을 것이요 부처님에게만 의지하지 말지어다. 고인의 시에 "한가할 때에 미리 향을 올릴 것이요 임종 시에 부처님의 발만 잡으려고 하지 말라 말은 언덕에 닥쳤는데 고삐준비는 늦었고 배는 강 가운데 왔는데 물새는 곳을 메우기 어렵다"하신 뜻을 잘 살필 일이다.


염불이 수승방편이다.

연종 二조 광명 선도대사 말씀에 다른 법문 수행은 좀처럼 성공이 어렵고 오직 염불법문이 생사를 빨리 벗어난다고 하셨다. 이 사바세계 중생은 근기는 둔하고 업장은 깊어서 발심한 수행자는 적고 혹 발심은 했으나 견고해서 퇴보하지 않는 자는 적으며 혹 신견이 중하여 허망한 몸을 아껴서 조금만 괴로우면 병이 날까 두려워하여 처음은 근실하다가 나중에는 게을러서 공부가 진보 못하는 수도 있고 혹은 환경이 나빠서 수도하기에 불편하여 비록 발심하여 수행은 하나 모든 장애를 이길 수 없어서 물러 갈수도 있고


혹은 병마에 걸려 몸을 자유롭게 못 쓰는 수도 있고 혹은 신체 불구자도 있고 혹은 정신에 이상이 있어서 도가 높을수록 마구니는 더욱 높아지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공부를 타락 시키는 마장인 것이다. 비록 일생동안 정진은 잘 하였으나 도업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목숨이 마치게 되어 다시 태중에 들어가면 전생의 공부가 어둡게 되어 다시 계속하지 못하고 티끌 세상에 떨어져서 탐욕심이 나서 업을 지어 능히 윤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젊을 때에 옛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소동파 학사는 오조 계선사 후신인데 재주가 뛰어 나서 고관이 되어


한 부인과 두 첩을 데리고 살면서 오욕 락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더니 불인선사가 소동파를 제도하려고 하룻밤에 그 집에서 자는데 동파가 한 첩을 보내어 시봉시켰다. 선사가 그 첩으러 하여금 화로 일곱 개를 가져와서 숯불을 피우고 한 차관에 물을 부어 넣고 화로에 넣어 않고 둘째 화로 셋째 화로 여러 화로에 차례로 끓이는데 그 첩은 무슨 생각인지 알지 못하고 선사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차관은 너무 오래 끓어서 물이 다 말라 폭음이 나며 차관은 깨어졌다. 선사가 웃으면서 그 첩에게 말하기를 밤이 깊었으니 가서 잠을 자라고 했다.


다음날 새벽에 동파가 그 첩에게 묻되 어제 밤에 선사는 무슨 말씀이 있었는가? 첩은 밤에 본대로 대답했다. 동파가 생각 하니 애욕이라는 것은 끊지 못하면 반드시 생명을 잃을 것이 마치 차관에 물이 마르면 차관이 터지는 것과 같음을 보여주신 것을 깨닫고 선사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익힌 욕심은 선정의 힘이 아니면 막을 수 없다하고 선정공부를 하였다.


이 땅에서 수행해서 불퇴지에 오르기는 어렵고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모두 불퇴지에 이를 것이니 오랫동안 닦은 보살만 이 세 가지 불퇴지를 증득하는 것이 아니라 곧 하품에 나는 중생도 다 그러하며 내지 임종에 십념하여 업을 가지고 왕생한 이도 또한 삼 불퇴지를 증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승한 방편은 아미타불의 큰 원력과 청명염불의 큰 공덕이 아니면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 제5장 염불이 능히 업장을 녹인다.



일체중생이 무시 겁래로 한 생각이 망령되게 움직여 무명이 생겨 미혹에 미혹을 쌓으면서 무량겁을 지나도록 악업을 많이 지어 자기의 불성을 장애 하였으니 업장을 녹이지 못하면 불성이 나타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부처님께서 이 염불법문을 제창하시어 업장을 녹이게 한 것이다. 경에 "염불 한 번에 팔십 억겁 생사중제를 녹인다."고 하였으니 무슨 까닭인가?


발심하여 염불하는 것은 저절로 큰 지혜가 나타나는 것이니 동굴에 전등을 켜면 순식간에 어둠이 없어지는 것과 같이 염불하여 업장을 멸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업장이 중하여서 염불을 해도 여전히 망상이 어지럽게 일어나는 것은 모두 발심이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생각하는 힘이 충분하지 못하여 업장을 대적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업장이 많은 중생은 염불관을 하는 것이니 과연 일심으로 염불하면 이 사람은 제불의 호념을 얻을 것이요


아미타불의 광명을 받아서 자기도 모르는 거운데 가피력을 얻어서 업장은 점점 소멸하고 선근은 날마다 증장할 것이다. 진나라 때에 승려를 도태 할 적에 황제가 혜원법사의 덕화를 추앙해서 여산은 도태의 난리에서 빠졌다. 그 때에 두 스님이 있는데 한분은 외짝 눈이요 한번은 절뚝발이라. 도태 당할까 두려워하여 여산에 들어와 혜원법사를 의지하여 수행하였다. 이에 법사가 염불법문을 닦아서 업장을 녹이게 하였다. 외짝 눈 스님은 내 상에 큰 선지식이 되어서 정토종을 선양하기를 발원하였고 절뚝발이 스님은 내상에 국왕이 되어 불법을 카에 일으키기를 발원하였다.


이 두 스님은 오직 염불공덕 으로서 업장을 녹이고 서원을 성취하였는데 외 짝눈 스님은 내생에 영명연수대사가 되어서 일대에 큰 스님으로서 만 가지 선으로써 정토를 장엄하셨고, 절뚝발이 스님은 고려국왕이 되어서 불법을 깊이 믿고 삼보를 보호 하였으며 뒤에 중국에 가서 영명선사의 법을 보호하여 정토법문이 크게 흥왕하였다. 예전에 백정이 있어 돼지 죽이는 업을 하였다. 그 처는 염불하면서 그 남편에게 살생 업은 나쁘므로 결코 나쁜 과보를 받을 것이니 부디 아미타불을 불러서 업장을 녹이라고 권하였다.


그 남편이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여러 번 권유를 받고 염불하였는데 업장이 두터워 잠깐 염불하다가 곧 잊어버려 계속하지 못하거늘 그 처가 교묘한 방편으로 여러 문 위에 방울을 달아놓고 방울소리를 듣거든 염불하라 하였다. 백정은 잊어버렸다가도 가끔씩 방울소리가 나면 염불하곤 하였다. 수년이 지나서 그 남편이 죽어서 염라국에 갔는데 귀졸들이 돼지 태중에 넣는데 돼지우리 바닥에 철판이 깔려서 귀졸의 창이 철판에 닿으니 철판소리가 덩그렁 났다. 백정이 그 소리를 듣고 생전의 습관대로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그때에 연꽃이 앞에 나타나서 정토에 왕생하였으니 이것이 능히 염불이 업장을 녹이는 증거이다.


업장은 세자기 업중의 하나인데 혹장을 의지해서 업을 짓고 업장을 말미암아서 보장을 받아서 육도에 윤회하는 것이니 만일 전생 업이 녹아지고 새로운 업을 짓지 아니하면 곧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염불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곧 과거의 잘못을 고치고 앞으로 선행을 닦게 한 것이다. 일구미타 명호를 전심으로 생각해서 그치지 아니하면 생각생각 마다 마음의 광명이 부처님 명호에 비쳐있고 때때로 부처님의 광명이 염불인 에게 비추어 마음 광명과 부처님의 광명이 서로 비추는 것이니 심력과 불력을 중생의 소견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일심염불이 곧 업장을 녹인다 함은 마치 태양 광명이 밤중에 어두움을 없애고 바람 힘이 공중에 안개를 쓸어 가는 것과 같다. 세상에 수행하는 사람이 염불법문을 믿지 않고 염불을 아니하면 비록 오신통을 얻어도 업장을 녹이기 어렵다. 옛날에 형제 네 사람이 같이 외도를 닦아서 오신통을 얻었다. 하나는 천안통이니 능히 일체세계를 보고, 둘째는 천이통이니 능히 세계 모든 소리를 듣고, 셋째는 타심통이니 능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고, 넷째는 숙명통이니 능히 삼세 모든 일을 알고, 다섯째는 신족통이니 능히 시방세계로 날아다닌다.


하루는 큰 형이 내일 오시에 무상이 닥쳐서 사형제가 동시에 죽은 것을 알고 그 아우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일에 무슨 일이 있을지 아는가? 아우들이 답하되 내일 오시에 우리형제 네 사람에게 무상이 닥쳐 올 것입니다. 무상이란 말은 영원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죽음의 별명이라. 큰형이 말하되 무슨 법으로서 피하겠는가? 아우들이 말하되 신통의 힘으로 피한 즉 무상 귀졸도 자연히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다. 네 사람이 의논을 마치고 큰 형은 말하되 나는 신력으로 허공에 날아 갈 것이다.


둘째는 나는 신력으로 큰 바다에 숨을 것이다. 셋째는 나는 신력으로 산중에 숨을 것이다. 넷째는 나는 신력으로 시중에 숨을 것이다. 그리하여 의논을 마치고 다음날 각기 신력으로서 죽음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업장이 녹지 아니해 그 시간에 네 사람이 신력을 다 잃어서 공중에 있는지는 땅에 떨어져 죽고 바다에 잠긴 자는 큰 고기가 잡아먹고 시장에 숨은 자는 여러 사람의 발에 치어 죽고 산중에 숨은 자는 범에 물려 죽었다.


감산대사 말씀에 세상일은 본래 결함이 많고 허망한 몸은 무상을 면하기 어렵다 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권하노니 신통 같은 것도 구하지 말고 다만 진실히 염불하여 정토에 나기를 원하면 업장이 자연히 녹아지고 임종할 때에 부처님이 맞아주시어 무상의 고가 없고 진상의 낙을 얻을 것이니 어찌 좋지 않을까.


업의 힘이 커서 중생들이 다 업을 따라 윤회하는데 오직 염불이 가히 업장을 녹이는 것이다. 저 팔가가 염불하고 업장을 지닌 채 왕생하였다. 옛날 사람이 팔가라는 새를 키우는데 능히 사람의 말을 따라 하는 지라 하루는 스님이 그 집에 와서 염불하였더니 팔가가 나무아미타불을 불러 스님이 염불 할 때마다 팔가도 따라 염불하였다.


스님이 간 뒤에도 팔가는 매일 염불하니 그 주인이 염불을 좋아한다고 그 새를 절에 보냈다.

스님들이 기특히 여겨 고성염불과 무념염불로 가르치니 팔가가 알아듣는 것 같았다. 하루는 스님들이 보니 팔가가 곧 죽게 되어 옆에서 도우는 염불을 하여 장롱 속에서 죽었다. 팔가의 시신을 산에 묻어 주었더니 수일 후에 산에 한 연꽃이 피어올라 스님들이 땅을 파서보니 그 연꽃이 팔가의 혓바닥에서 솟아나 있었다.


후인의 글에 "신령한 새 팔가조가 있어 스님 따라 아미타불을 염하였다. 죽어서 땅에 묻어 연꽃이 피었으니 우리 사람은 어찌 저만 못하는고." 하였다. 팔가는 날짐승의 무리인데 염불하여 극락에 왕생하고 혀에서 연꽃이 나왔으니 우리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만일 염불하지 않으면 위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고 아래로는 자기의 심령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장원 글에 "세상의 만 가지의 부귀영화나 문장 변재가 한바탕 꿈이라 일찍이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였다.


♣ 제6장 염불하되 복 받으려 말라


다음생의 복을 구하기 위하여 염불한다 하면 이러한 사람은 원이 잘못되어 성취 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 이 염불법문을 가르치신 것은 사바세계 중생들이 몸과 마음으로 여러 가지 고통을 받는데 그 고를 풀어주기 위하여 염불을 가르쳐 사바세계의 고통을 여이고 극락세계의 낙을 얻게 한 것인데 염불하면서 서방에 나기를 원하지 않고 인간에 나서 복을 받고자 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인간의 만사는 다 고통이고 공이고 무상한 것이니 무슨 낙이 있으리오.


이런 쾌락은 참된 낙이 아니다. 옛날 스님말씀에 "이 몸뚱이는 고통의 근본이요 세상의 모든 낙은 고통의 원인이다" 하고 경에 이르되 "재물과 색욕, 명예, 음식, 졸음, 이오욕은 지옥의 근본이라 오욕을 없애니 만일 내생에 복보를 구해서 부귀한 집에 나서 복을 받는다고 해도 인간 부귀는 꽃 사이에 이슬이요 세상의 공면은 물위에 거품이라 복을 받는 중에 공명은 물위에 거품이라 복을 받는 중에 복을 닦지 않으면 필경에 악도에 떨어져 많은 고를 받을 것이다.


사자봉 글에 이르되 색과 재물을 탐함은 사람의 몸을 잃는 근본이요 술과 고기를 먹는 것은 지옥뿌리를 심는 것이다. 눈앞에 한때는 즐기오나 사후에는 만년이나 고통을 받는 것이라 했다. 염불하는 것은 본래 고통을 여의고 낙을 얻는 것이니 만일 사바세계를 떠나 극락에 나기를 구하지 않으면 고통은 더욱 중하고 낙을 없을 것이다.

이제 중생의 팔고를 말한다.


1. 태어나는 고통


세상 사람이 업을 따라 과보를 받아 태어나는데 전생의 업과 부모 인연을 의지 한 것이다. 세 가지 인연이 합하여 중음신이 되어 어머니 태중에 들어가는데 부모의 성교함을 보고 문득 음욕심이 나서 애정이 흘러 종자가 되어 태를 이루는 것이다. 어머니 생장과 숙장의 사이에 있어 어머니가 뜨거운 것을 먹으면 화탕지옥 같이 뜨겁고 어머니가 차가운 것을 먹으면 한빙지옥 같이 추우며 열 달 동안 더러운데 갇혀있으니 이것을 태옥이라 한다. 출태하는 날에는 칼로 몸을 베는 것 같은 고통을 받게 된다.


2. 늙는 고통


세월은 빨리 가고 얼굴은 변하여 눈에서 꽃이 생기고 귀가 먹고 털이 희어지고 얼굴은 쭈그러지고 몸은 마르고 이는 빠지고 기력은 쇠하여 일에 자유가 없고 매사를 다른 이에게 의존한다. 능엄경에 "부처님이 파사익왕에게 묻되 대왕의 얼굴이 한꺼번에 늙었는가요. 자주 변화하는 것인가요. 답하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월이 흘러 점점 이지경이 되었습니다. 내가 어릴 때는 살결이 윤택하였고 장성할 때에는 기혈이 충만하더니 이젠 늙어져서 모발은 희고 얼굴은 쭈그러지니 앞으로 오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이것을 보면 국왕으로서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와 부귀를 가져도 늙는 고통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3. 병나는 고통이다


사람 몸은 사대(흙, 물, 바람, 불)가 고르지 못하면 백병이 나는 것이다. 옛 스님 글에 병이 들어야 바야흐로 몸이 고통인줄 알 것이니 건강할 때에 다른 사람을 위해 바쁘다 했다. 평생에 고질이나 모진 병은 제하더라도 다만 치통이나 두통만 있어도 자유가 없고 거동이 불편하고 침식이 감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보아도 일체 병은 다 고통인 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장비는 성질이 강하고 급한 장수인데 제갈무후에게 말하기를 나는 누구라도 두렵지 않다 하였다.


그때에 무후가 손바닥에 병자를 써서 보이면서 이것도 두렵지 않는가하니 장비가 큰 소리로 이것은 크게 두렵다 했으니 이것은 병이 들면 영웅장사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우리가 능히 병중에 일심으로 염불하면 병고에 끄달리지 않는 것이니 임종할 때 만 가지 고통이 있어도 자연히 정신을 차릴 수 있는 것이다.


4. 죽는 고통이다.


경에 이르되 인연이 합하면 허망하게 나게 되고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멸한다고 했으니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다. 날 때는 사대(흙, 물, 불, 바람)를 빌려 몸이 되었다가 죽을 때는 사대가 흩어지게 되는 것이라. 마치 살아 있는 소를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이 고통을 면할 수 없다. 가죽, 살, 힘줄, 뼈는 지대가 되고 숨 쉬는 것과 수족 운동하는 것은 풍대가 되는 것이다. 죽을 때에는 풍대가 먼저 떠남으로 호흡이 끊어지고 수족이 움직이지 못한다. 화대가 흩어 질 때는 몸이 식어들어 한기가 심하다. 수대가 흩어질 때에는 시체의 아홉 개 구멍에서 물이 흐른다.


지대가 흩어 질 때에는 피육 골절이 굳어진다. 죽는 일은 누구나 면할 수 없는 것인데 죽기 전에 잘 살필 일이다. 세간의 큰일은 나고 죽는 일인데 백옥과 황금도 다 소용이 없고 처자와 권속이 많이 있어도 대신 가지 못한다. 내가 다른 사람 죽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은 볼 같이 뜨겁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일이자 동시에 나에게도 필경 돌아올 일이기 때문이다.


5.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고통


은혜와 애정을 주고 받는 것이 부모 형제 처자 권속간이다. 항상 서로 모여 온 가정이 화락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만일 이별하게 되면 그 심정은 칼로 베는 것과 같다. 천 가지 애정은 천 가지 한탄이요 일분 은혜는 일분의 근심이니 인생의 만나고 흩어지는 것이 본래 무상한 것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옛말에 "부모 은혜가 깊으나 결과는 이별이요, 부부의 의가 중하나 또한 이별이라, 인간은 숲에 사는 새가 날 이새면 각각 날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6. 원수와 만나는 고통


전생의 업으로 원수가 되었는데 멀리 떨어져 살면 별 고통이 없지만 업력에 끌려 여의려고 해도 만나게 되는데 혹 부자간도 되고 혹 형제도 되고 혹 부부도 되고 혹 친구도 되어 서로 죽여 원수를 갚기도 하고 서로 미워하여 정신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것은 인연을 만나는 것이라 헤어지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마치 벙어리가 쓴 것을 맛보아도 쓰다는 뜻을 말 못하는 것과 같다.


7. 구하여 얻지 못하는 고통


세상에 어찌 만족 한 사람이 있으리오. 만일 부족이 있으면 반드시 구하게 되는 것이니 구하는 것이 뜻대로 되면 마음이 만족하고 기쁜 빛이 얼굴에 나타나지만 만일 뜻대로 못되면 마음에 걱정이 되어 고통이 되는데 인간사는 뜻과 같이 안 되는 것이 훨씬 많다.


8. 오음이 성한 고다


오음은 곧 빛과 받는 것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 의식이니 색, 수, 상, 행, 식, 이 다섯 가지 번뇌의 만일 중하면 불이 성하는 모양과 같다. 위의 팔고는 다만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니 지혜 있는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모두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른바 천명이면 천명이 다 고통 받되 그 고통의 모양이 서로 같지 않을 뿐이다. 만일 내생에 사람이 되더라도 이 고통은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사람에게 염불을 권해서 극락에 가게 하노니 그래야만 고를 여의고 락을 얻는 것이다.


미타정토는 모든 부처님의 국토보다 뛰어나서 조그마한 고통도 없고 다만 락만 받는 곳이다. 염불하는 사람은 내생에 인간에 나기를 구하지 말고 또는 천상에 나기도 구하지 말 것이니 천복도 다 되면 고통이 있는 것이다. 영가대사 법문에 보시하고 계를 지켜 하늘에 나는 복은 마치 공중을 향해 활을 쏘는 것과 같아서 그 힘이 다할 때에는 도리어 떨어지는 것과 같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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