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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행자의 편지/태호스님의 산사의 풍경소리

초발심으로 돌아가자

【태호스님의 산사의 풍경소리】

 

 

 

초발심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공부하는 길에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만 가장 첩경인 길을 참선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참선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론이 제기 되었습니다만 근원적인 마음가짐이 없이 지엽적인 방법론 만으론 첩경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공부든 인생살이든 각기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소원 가운데 가장 큰 소원, 모든 소원을 다 합한 것을 본원本願이라 합니다. 또 이러한 소원을 맹세코 이루겠다는 것을 서원이라 합니다.

『법화경』에 “서원안락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서원을 세우면 우리 몸이나 마음이나 안락으로 가는 첫걸음이라 합니다. 우리인생의 목적은 안락입니다. 몸이나 마음이나 안락하고 싶어서 모든 방법을 강구합니다. 그런데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나 생활 속에서 참아내고 견디어내고 이겨내는 근본 길은 서원을 크게 세워야 안락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큰 서원, 본원은 무엇일까? 우리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목적의식, 우주의 목적의식을 알아야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제불보살의 십종대원, 약사여래 십이대원 아미타불 사십팔원 등 서원이 많이 있습니다만 『심지관경』에서는 모두 뭉뚱거려 사홍서원으로 말합니다. “중생무변서원도, 번뇌무진서원단, 법문무량서원학, 불도무상서원성”입니다.

그런데 선禪의 입장에서는 자성중생서원도, 자성번뇌서원단, 자성법문서원학, 자성불도서원성으로 다른 중생을 다 제도하고 남의 번뇌를 다 끊어주는 등의 보살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의, 내 자성 가운데 중생심을 제도하고 내 자신의 번뇌를 끊어야하고 내 자신 법문을 배워 진리에 어긋나지 않아야하고 내자성 가운데 부처님을 이루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요즈음 더욱 내 자신을 돌아봅니다. 내 마음가운데 중생의 마음이 얼마나 남아있는가, 번뇌는 얼마나 많은가? 법문말씀에 어긋남이 없는가, 자성의 불심을 얼마나 키우고 있는가?

엊그제 LA관음사 도안 큰스님의 열반소식을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세상의 인연을 다하여 열반에 드셨지만 도안스님도 이제 속세와의 인연이 다하였구나!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환귀본처”하셨다고 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작년에 도안스님이 종단의 큰스님들과 함께 금강선원에 오셨을 때 여러 가지 불사계획을 말씀하시며 방법들을 물으신 일이 있습니다.

그때에 나는 “이제 그만 벌리시고 회향준비나 하십시오.”했습니다. 그 뒤 소식을 들으니 건강치 않으신데도 대중을 위한 불사를 계속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에 오셔서 일생을 바치며 동분서주 쉬는 날이 없으시더니 마지막까지 불사를 놓지 않으시구나, 정말로 서원이 크시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나를 돌아봅니다. 세속의 나이도 적고 큰 불사도 못하면서 빨리 쉬고 싶구나 했던 내 마음이 얼마나 좁을까? 그렇지만 한편으로 변명이 생깁니다. “이제 외형적인 불사를 웬만큼 했으면 내면적인 불사를 해야지.”그래서 한창 진행 중인 건축불사가 마무리되면 모든 번뇌망상을 쉬고 스스로를 점검하던 무문관 생활을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나의 업은 무엇이고 본원은 무엇인가? 도안스님의 추모사도 사양하고 공사에 매달리는 모습이 열반하신 큰스님의 뜻을 받드는 것 아닌가? 처음 세운 서원을 다시 떠올립니다.

“초발심시 변정각”이라는 법성게의 말씀도 떠올립니다. 세상에선 “시작이 반”이라고 합니다만 우리 불가에서는 처음 마음을 잃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초발심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변질되어가는 우리 마음들, 소년소녀시절의 순박한 꿈들, 세상에 물들지 않고 고결하던 소박한 꿈들이 그립습니다. “서원안락행”이라 처음 세웠던 서원들, 본원의 정립이 참선의 첫걸음이요 우리 인생을 안락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기본임을 다시 새겨봅니다.

출처 : LA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