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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행자의 편지/광전스님의 염불선 이야기

염불선이야기29-수증론⑥ 삼학등지(三學等指)

염불선이야기29-수증론⑥ 삼학등지(三學等指)


초기불교에서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수행을 한 단어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삼학(三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이 팔정도(八正道)라는 구체적인 덕목으로 표현되었다면, 선불교에서의 삼학은 불성계(佛性戒)와 일행삼매(一行三昧) 그리고 일상삼매(一相三昧)의 형태로 설명되고 있다. 먼저 불성계에 대해 살펴보면, 불성계란 일체중생이 본래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믿고 모든 상(相)을 떠나는 것을 불성계라 말하고 있다. 불성계는 형식적인 모양, 즉 계상(戒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처의 자리에 안주하는 것 자체를 불성계라 보고 있는 것이다.


혜(慧)에 해당하는 일상삼매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에 입각해 우리의 마음을 중도실상(中道實相)인 생명의 본질에 머물게 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우리 중생의 제한된 안목에 인식되는 천차만별의 상을 떠나 부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정(定)에 해당하는 일행삼매는 일상삼매로 모아진 우리의 마음을 순간순간 놓치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을 뜻한다. ‘혜’와 ‘정’을 비유하자면 ‘선택’과 ‘집중’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삼매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중 부처님의 관점을 나의 관점으로 선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일행삼매는 그 선택한 관점에 집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계, 정, 혜의 비중이 거의 비슷하다면 선불교에서는 계를 설명할 때도 혜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고 정을 설명할 때도 혜의 연장선상에서 정을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불투도(不偸盜)를 설명할 때에 선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는 본래 부처이고 우리 중생의 전도된 견해에서만 나와 남의 구분이 있으므로 반야바라밀에 입각한 지혜가 있다면 굳이 불투도의 계율을 강조하지 않아도 저절로 남의 물건을 훔쳐야 할 만한 이유가 사라져버려 불성계가 구족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훔치지 말라는 도덕적인 요구가 아니라 훔쳐야 할 동기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초기 선종의 법문이 대부분 보살계수계와 더불어 설하는 법문의 형식을 띄고 있는 것 같다.  ‘정혜쌍수(定慧雙修)’,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지관(止觀)’, ‘비파사나와 사마타’는 표현은 다르지만 다 똑같이 ‘선택과 집중’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저절로 불성계를 갖추게 된다. 따라서 선불교에서는 계율에 대해 소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반야바라밀에 입각한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통해 자연스럽게 계율을 지키게 되는 쪽으로 삼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고 있는 <천수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죄는 자성이 없고 마음을 따라 일어나니 만약 마음이 멸한다면 죄도 또한 사라지네.’ 이 또한 선불교의 관점에서 진정한 참회란 무상참회, 즉 모든 상을 떠난 참회라야 진정한 참회임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