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선이야기27-수증론④ 불성본유 불성시유
인간은 본래 착한 존재일까? 아니면 악한 존재일까? 어린아이의 티 없이 해맑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에 고개가 끄덕여지고, 요즘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사고가 매일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것을 보면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에 더 공감이 간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을 위주로 하는 선불교(禪佛敎)에서 우리중생이 수행을 통해 성불한다는 것에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첫째는 신수(神秀)의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이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이 끼지 않도록 하라.”는 게송에서처럼 우리중생은 본래 부처이지만 객진번뇌(客塵煩惱)에 오염되었으니 수행을 통해 불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중생의 입장’ 즉 시각(始覺)에 더 비중을 둔 관점이 있고, 혜능(惠能)의 “보리나무는 본래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본래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라는 게송에서처럼 중생은 본래 부처이고, 중생의 번뇌라는 것도 중생의 망념(妄念)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므로 ‘눈뜸’ 즉 ‘인식의 전환’만이 필요할 뿐이고, 수행이라는 것도 인식의 전환을 위한 수행이라는 ‘부처의 입장’ 즉 본각(本覺)에 비중을 더 둔 관점이 있다.
이렇듯 시각의 관점에서는 번뇌를 없애기 위한 점수(漸修)가 강조될 수밖에 없고, 본각의 관점에서는 인식의 전환을 위한 돈오(頓悟)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어떤 선사는 본각(本覺)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또 어떤 선사는 시각(始覺)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며, 어떤 경우는 한 선사(禪師)의 법문 중에도 본각과 시각의 법문이 혼재(混在)하는 것일까?
스승은 법문을 듣는 제자를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법문을 한다. 이것은 스승이 제자의 근기(根機)와 심리상태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제자가 ‘부처의 입장’ 즉 본각의 입장에 치우쳐 수행을 소홀히 한다면 ‘중생의 입장’ 즉 시각의 입장에서 수행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고, 반대로 제자가 ‘중생의 입장’ 즉 시각의 입장에 치우쳐 수행의 지위나 점차에 시비분별만 하고 있다면 본각의 입장에서 돈법(頓法)을 일깨워주어 본래부처임을 강조해 시비분별을 없애주는 것이 스승의 역할인 것이다. 즉 중생의 병에 맞는 약으로써 ‘부처의 입장’과 ‘중생의 입장’ 즉 본각과 시각이라는 약을 처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을 해야 한다. 무염오수행이란 우리의 관점은 본각을 지향하되 현실적으로 수행할 때에는 시각의 입장에서 수행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눈은 저 높은 하늘을 향하되, 발이 땅에서 떨어져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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