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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행자의 편지/광전스님의 염불선 이야기

염불선이야기25-수증론② 돈오점수 돈오돈수

염불선이야기25-수증론② 돈오점수 돈오돈수


여러 해 전 한국 불교계에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적이 있었다. 논쟁의 핵심은 ‘깨달은 후에도 수행이 필요한가?’의 문제였다. 돈오돈수를 주장한 쪽은 깨달은 후에 수행이 필요하다면 그 깨달음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주장이었고, 돈오점수를 옹호한 쪽은 이치로는 몰록 깨달았더라도 과거 오랜 세월의 습기(習氣)를 없애기 위해서는 수행이 더 필요하다는 입장의 차이였다.


그런데 이 논쟁을 가만히 살펴보면 두 주장에서 쓰이고 있는 ‘오(悟)’의 개념이 서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오의 개념을 증오(證悟)의 구경각(究竟覺)의 개념으로 썼고,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오의 개념을 해오(解悟), 또는 성인(聖人)의 입문단계에 해당하는 증오(證悟)의 개념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오의 개념을 구경각으로 규정지은 입장에서는 깨친 후에는 더 이상 수행이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오의 개념을 해오(解悟), 또는 성인의 지위에 입문하는 깨달음으로 규정지은 입장에서는 깨친 후에도 당연히 구경각을 위한 수행이 더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논쟁을 바라본다면 양측은 서로의 주장에 모순이 없다. 다만 서로 똑같은 ‘오(悟)’라는 표현을 쓰지만 ‘오(悟)’가 다른 개념으로 쓰였을 뿐이다. 물론 ‘구경각이 아닌 깨달음을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부분에 다소의 논쟁이 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언어는 ‘이 단어는 이런 의미로 쓰자’는 서로간의 약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경전에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지난 호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해오(解悟)의 의미, 성인의 지위에 입문하는 단계로서의 증오(證悟), 구경각으로서의 증오(證悟)로 다양하게 쓰였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의미로 쓰인 ‘깨달음’인지 그 내용을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또 하나 살펴 볼 것은 수행법에 따라 돈점(頓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면 ‘남종(南宗)은 돈법(頓法)이요, 북종(北宗)은 점법(漸法)이다’는 표현이 그런 경우인데 이런 주장도 <육조단경> 돈점품을 살펴보면 “법에는 돈점이 없으나 사람의 근기에 날카로움과 둔함이 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법에 빠르고 더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총명함과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돈점의 표현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많은 선사(禪師)들이 돈점(頓漸)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환자(患者)의 병(病)의 상태에 따라 때로는 돈(頓)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점(漸)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점수에 치우쳐 시비고하(是非高下)를 일삼는 사람에겐 돈(頓)을 이야기해 분별을 없애고, 본래 부처거니 무슨 수행이 더 필요할 것인가 하는 사람에겐 점(漸)을 이야기해 아만(我慢)을 없애 진지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즉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으로 돈과 점을 이야기 할 뿐, 법(法) 자체에 돈점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