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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7. 입보리행론

8장 지혜품

 

8장 지혜품


[내외종파의 교의를 요약하여 두 가지 총괄과 차별을 설하노라.]

쫑카파 대사의 [비밀도차제론] 앞부분에 나옵니다만 외도가 있든 없든 우리 자신의 마음에 전도된 견해의 습기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견해를 알고 옳고 그름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쫑카파 대사가 계셨던 당시 티베트에는 외도라고 할 만한 이들이 없었습니다. 타지에 존재하는 외도들이야 티베트와 관계가 없었고 그래서 쫑카파 대사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현재 우리는 다양한 견해 속에 살고 있습니다. 티베트의 경우 나라를 잃은 후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었고 또 그 관계가 필요해졌습니다. 세상 어디에 산들 다양한 견해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가 하나의 사회,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지역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전체가 하나의 지역으로 하나의 지구촌이라는 마을 속에 다양한 문화와 종교,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 티베트에서 법을 설할 때처럼 보리도차제론이나 논서 중심의 방식은 이제 시대가 지난 것입니다. 외.내도의 다양한 견해를 알아야 합니다. 외도 역시 예전 인도에서 존재했던 외도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천주교.무슬림.유태교 그리고 봄베이에 본산이 있는 조로아스트교, 이들 종교의 구조나 다양한 견해 사상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양철학 특히 인본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대과학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 자세히 알기는 힘들지만 요점과 핵심을 알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마 우리 티베트보다 한국이 더 좋은 조건일 것입니다. 한국에도 다양한 종교, 사상, 철학이 존재합니다. 그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과학에서 한국은 큰 발전을 했고 많은 학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일반인을 위한 보편의 가르침과 특정인을 위한 가르침,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합니다. 옛날 티베트의 ‘쑹럽바’라는 분이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편적 가르침과 특별한 가르침 이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지금 다양한 내외사상 철학체계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보편적 가르침의 형태이며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정한 가르침은 특별한 한 사람에 한해 여러 가지 다 알 필요 없이 한 가지 가르침을 통해 수행하는 형태로도 가능합니다. 이를 염두한 가르침에 근거해 수행법과 수행을 이끄는 형태가 있습니다. 이것이 특정한 사람을 위한 특별한 방식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구상의 종교의 하나로 설명할 때 내외사상을 전체적으로 알고 다른 사상을 관련해 이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전의 스승들이 법을 펼친 것은 보편적인 형태였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뛰어난 성취자들은 특정 법기를 위한 특별한 가르침을 다양하게 펼치기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럼 논서를 보십시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지요. “실상(實相)을 터득한 지혜가 없으면 염리심과 보리심을 수행해도 윤회의 뿌리를 끊을 수 없기에 이런 연유로 연기를 깨닫는 방편에 힘쓰라.“ ‘지혜로 실상을 깨달은 즉 연기의 진여를 깨달은 지혜 없이는 절대로 해탈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상을 깨달은 지혜가 없어서는 안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상을 깨달은 지혜와 무아사상에 대해서 불교의 모든 종의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무아라는 것은 제법의 존재방식 혹은 진면목 실상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깨달은 지혜를 불교 4대 철학세계에서 모두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실상, 진여는 어떤 것인가? 바로 연기의 진여를 의미합니다. 연기의 진여라고 하는 연기는 어떤 것인가? 연기사상 가운데 가장 심원한 유명가유(有名假有:제법이 오직 이름만으로 가설돼 성립 존재하는 것), 식이 가설함으로 존재 성립하는 것 그러한 연기를 근거하여 가장 심원한 연기사상이 얻어지는 실상이 존재하고 그 실상이 궁극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 궁극의 심원한 실상을 알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연기의 진여를 알기 위해 제법이 의지해서 성립 존재한다는 상호관련 연기법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연기법을 알기 위해 인과의 연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즉 가장 심원한 연기사상을 알기 위해 먼저 이해되어야 할 사상들이 존재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의 실태를 알아야 합니다. 보편의 사물 본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물의 본질을 얘기할 때 요즘 흔히 얘기하는 물리학, 심리학, 화학이라는 것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굉장히 광범위해 집니다. 연기라는 말 속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가 이 연기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불교라는 것은 이성과 지혜를 총체적으로 사용하여 이것으로 내면의 마음을 제어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륵보살이 보성론에서 ‘대오과(大五科) -다섯 가지 학문을 경시하지 마라.’ 라고 말씀하셨듯이 다양한 학문의 필요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대오과는 인도에 존재했던 5대 학문을 의미합니다. 대오과 가운데 의학을 제외하고는 현대학문이 여기에 모두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외사상을 모두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앎으로써 상위체계의 더욱 심원한 사상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견해의 잘못된 바를 끊고,  그것을 끊기 위해 자신의 종교 철학은 물론 다른 이들이 인정한 바 즉 이전의 타종교나 철학에서 인정했던 것이나 지금의 타종교나 철학에서 인정하는 바를 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무아조세(無我粗細)의 순서를 이해하기 위해 무아사상에서 조세의 차이와 특징을 안다면 각 무아사상의 깊이와 특성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그저 ‘아 심원한 무아사상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는 정도밖에는 되지 않겠지요.


무아를 인정하는 불교의 4대 철학이 인정한 방식을 이해하면 무아를 인정하는 점에선 같지만 무아에 대한 다른 이해 - 깊고 얕음이라고 할까요, 심오한 차이랄까, 이성과 지혜를 통해 세세한 부분까지 고찰하면 이로 인한 이해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런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큰 도움이 되기에 무아조세의 순서 이해를 위해 내외의 교의를 알아야 합니다.


“요약하여 두 가지, 총괄과 차별을 설하노라. 첫 번째 둡타(성극일종의:成極一宗義)라고 하는 말은 임의로 지은 것이 아니니 이는 부처님의 경에서 이미 말씀한 까닭이다.” 둡타(종의)라고 하는 것은 깊이 사유하고 분석 통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즉각적 사고나 행동, 햇볕이 뜨거울 때 피하고 추울 때 찾거나 뜨거움을 피해 그늘을 찾는 것은 동물도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태양은 어떤 것인가? 태양의 온도는 어떤가? 태양이 얼마큼 오래 되었나, 미래에 어떤 변화를 가질 것인가' 따위를 동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이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점점 깊이 연구하다보면 태양 또한 한계가 있고 태양의 한계를 5~60억만년 정도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지구가 생성된 지 50억년이라고 합니다. 지금 자세히 기억나진 않습니다만 결과적으로 태양에 대한 이해를 가집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어째서 태양이 생긴 것일까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측량한 것 아마 이것을 common sense 즉 보편적으로 체험 인식되는 것, 행불행의 감각이 일어나는 것 이러한 것을 일반상식이라 하며 우리들 추측에 의한 비량에서 현량에 이른다는 것은 결국 일반상식을 근거로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유를 밝히는 과정에서 우리의 일반상식인 common sense가 존재하지 않는가? 누가 보더라도 부정할 수 있는 선에서 진실을 규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바탕에 근거해 여러 가지로 측량한 결과, '이럴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판단에 성립된 기준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생각 된다’고 하는 것은 한가한 소리지요. 분석하여 깊이 사유하고 이치를 따져 ‘내 생각에 틀림없다’고 하는 통찰의 기준이 생기게 됩니다. 성립되는 기준을 두는 것, 이를 종의라고 합니다. ‘둡바’라는 것은 ‘존재 성립함’이란 뜻이고 ‘타’라는 것은 통찰을 통해 기준점을 두는 것. 이것을 종의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일반적으로 인(人)이라 하면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나’라는 생각을 가진 이를 인(人)이라고 규정합니다. 생명체라면 하찮은 미물이라도 모두 ‘나’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나라는 생각 때문에 작은 벌레조차도 자신을 귀히 여기는 생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 일입니다만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며칠이 지나도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혹 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물방울을 조심스럽게 옮겨 떨어뜨려주었더니 만족스러운 듯 몸을 뒤집어 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벌레에게도 나라는 강한 생각이 존재하고 그 생각이 상황에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벌레의 반응을 이렇게 봤지요. 기도를 하며 계속 지켜봤더니 다시 몸을 뒤집어 물이 입에 닿았는지 만족스러워하는 듯 했습니다. 이렇게 벌레조차도 나라는 생각이 존재합니다. 작은 벌레지만 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고통을 원치 않고 행복을 원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미물의 행불행이란 즉각적인 행불행일 뿐 이외의 것엔 어떤 생각도 없습니다.

 

이렇게 인(人)이라고 할 때는 판별력이 있는 것과 없는 부류가 있습니다. 사고력을 가지고 있는 부류 가운데 일반적으로 접하는 대상이 인간입니다. 인간 가운데 또 나누어 농사를 짓는 농부나 티베트의 유목민,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농부나 어부들은 생업이외의 일들에 관해서 관여하거나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이가 종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이고 종의에 영향을 받는 이는 보다 지적인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난 곳이 유목지라도 깊은 사유와 분석을 통해서 이런 학자들의 사상을 따른다든지 이를 바탕으로 발전된 새로운 기준을 규정한다든지 과학자 경우는 기계를 이용하여 측정하고 정도를 파악하여 사물의 실상을 규명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도 종의제창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나누면 종의에 영향을 받는 이와 종의에 영향을 받지 않는 두 부류이다. 전자는 경서를 익히지 않고 분석하고 검토하지 않아 태어난 그대로의 생각으로 금생의 행복에만 뜻을 둔다. 후자는 경서를 익혀 근(根)과 도(道)와 과(果)의 삼 규정에 대해..” 이 부분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도 종의제창자의 경우 외도 순세파 가운데 한 부류는 전생과 내생을 인정하지 않고 현재에 보이는 것 이외의 것을 인정 않으므로 근본요소들은 말하겠지만 이에 근거한 도과(道果)는 말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이외는 내생을 인정하지 않고 현세에 보이는 대로 본래 갖고 있는 생각만으로 인식하려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에서 더욱 진보한다든지 그에 근거한 다양한 수행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대로라면 '경서를 익히지 않고 분석 검토하지 않아 태어난 그대로의 생각으로 이생의 행복에만 뜻을 두는 이'가 종의에 영향 받지 않은 자입니다. 종의에 영향을 받는 자는 '경서를 익혀 근과 도와 과의 삼규정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성립한 이치를 경(經), 정리(正理)의 도(道)로 논하는 자'로 순세파의 경우는 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각 교의를 교조의 말씀이라 한다면 그런 의미로써의 경은 인정한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근과 도, 과 삼규정에 대해 자신의 생각에서 성립된 이치를 경과 정리의 도를 논하는 자이다.” 종의의 석명(釋名) 또한 <선명사의소(善明詞義疏)>에서 이르길  "이룸의 궁극(둡타-종의)이란 이치와 말씀으로 보이신 대로 자신의 견해를 성립한 이것에서 다른 곳으로 더 갈 곳이 없음으로 궁극이다" 라고 하신 것처럼 경과 이치 가운데 어떤 것에 의지하든 이에 의지하여 확정하고 성립된 성립된 종지(宗旨) 그것만이 자신의 생각에 있어서 그 이치와 달리 넘어서는 것이 없음으로 이룸의 궁극이라 하신 것입니다.


“외도와 내도 두 가지로 분류한다. 외도와 내도의 차이가 있으니 마음속 깊이 삼보에 귀의하는 자가 불교도이고 삼보에 의지하지 않고 세속의 신에게 마음으로 귀의하는 자가 외도인 까닭이다.” 이것도 대부분의 외도로 해석해야 합니다. 순세파처럼 신을 인정하지 않는 외도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불보 법보 승보 이렇게 세 가지를 두고 이런 삼보를 바른 의지처로 인정하는 이를 불교도라고 합니다. 삼보를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불법과 법을 보이신 부처님, 길을 감에 있어 선지식역할을 하는 승가, 이런 삼보를 마음 깊이 믿는 자가 불교도입니다. 이외는 외도가 되는 것이지요.

    

'귀의'는 외도에게도 가능한 얘기입니다. 특히나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에게 자신의 삶 전체가 달려있다고 여긴다면 이런 창조주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또 순세파처럼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한다면 특별한 귀의처를 얘기할 수 없습니다.

    

“외도와 불교도의 종의제창자(提唱者)의 차이 또한 있으니 교조 교법 견해 이 세 가지에 의해 구분하는 까닭이다. 불교의 교조는 덕이 원만하고 교법은 유정에 해로움이 없고 견해는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아(我)가 없음을 인정하는 세 가지 차이가 있다.”


제행무상. 일체유루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이 그것이지요. 이러한 사법인을 인정하는 이를 불교종의제창자, 이를 인정치 않는 이를 외도종의제창자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조께서 보이신 사법인을 얘기할 때 제행무상. 일체유루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인데 먼저 제행무상이라 할 때 변화성을 얘기합니다. 변화성을 가지는 법은 무루와 유루로 나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유루는 일반적으로 번뇌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유루에 영향을 받는 모든 것은 고통이다 즉 제행이 변화하므로 무상하고 그런 유루와 무루 중에 유루는 고통의 본질이다' 이것이 일체유루개고(一切有漏皆苦)입니다. '이런 고통을 없앨 수 있는가 하면 고통의 근원은 탐진이고 탐진의 뿌리는 아집이다.' 아집이 만일 전도된 지견이 아닌 바른 지견이면 이와 상위되는 지견은 존재할 수 있지만 이를 다스릴 대치법(對治法)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집은 전도된 지견이며 전도된 지견인 이상 이것을 다스리는 지견이 존재합니다. 아닌 것을 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전도된 지견이 된 것입니다.


실제 존재방식은 진실상에 머물고 이것을 언젠가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진실을 깨달은 의식이 전도된 지견에 대적하는 지견이 되고 대치법은 정당성을 가져 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제법이 공하고 무아이므로 아집이 전도된 지견이라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집에 대치법이 존재하고 이로 인해 아집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완전히 아집을 제거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줄일 수 있음을 우리의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뿌리를 없애는 것은 많은 사유를 통해 가능합니다. 아집이 대치법에 의해 멸했을 때 고통의 근심에서 벗어난 열반입니다. 이것이 열반적정입니다.


이러한 것을 설명하므로 비로소 해탈에 관한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해탈이 어느 특정한 장소인 정토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탈이란 고통을 초래한 번뇌의 허물이 사라지는 것이고 번뇌의 뿌리는 아집이고 무아인 의미를 깨달은 지견이 아집을 멸할 때 지견으로 생긴 고통도 사라지는 것이죠. 따라서 모든 근심을 넘어 고통에서 벗어난 해탈을 얘기하는 것이죠. 이 이치를 보이는 교조야말로 다른 교조와 다른 특별함을 가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교조들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무아를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부처님 한 분뿐 그 누구도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교조는 모든 허물이 다하여 덕이 원만하고 교법은 유정에게 해가 없으며” 교법에서 유정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것으로 치면 나형파가 불교보다 낫습니다. 외도승자(勝者大雄-Rsabha Jina)를 따르는 이들을 나형파라는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교조이므로 승자라고 합니다. 아마 비폭력 행위에 있어서는 불교보다 더 앞서 있습니다. 그들은 비폭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이것은 사실이며 모두가 인정해야할 바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비폭력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자비에 있습니다. 물론 10가지 불선업의 계율을 가르칠 때 타인에게 해를 입히면 그 결과로 고통이 돌아온다는 고통의 과보를 두려워하므로 해를 가하지 않도록 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불교는 자비에 뿌리를 둔다는 말씀처럼 타인은 나와 마찬가지로 고귀한 존재이며 그 대상에게 해를 입혀서 안 된다는 생각에 있습니다. 그러나 초심자에게는 해를 입히는 것이 악업이며 곧 자신에게 해를 초래한다는 식의 나쁜 결과를 보임으로 그 원인을 없애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자비가 가능한 이유는 오늘 아침 말씀 드린 것처럼 사법인과 관련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해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번뇌로 인한 고통의 시달림에 연민의 마음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안됐다고 생각하는 정도겠지요. 별다른 생각이 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를 제거할 수 있음을 안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벗어나지 못하고 시달리는 것을 보면 강한 연민이 일 것입니다. 벗어날 방법이 보이는데 벗어날 방법을 구하지 않고 고통을 원치 않으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어쩌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나겠지요. 더욱 강한 자비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혜로 일어난 자비심이란 많은 고통들이 존재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알았을 때 일어나는 자비심입니다. 이성과 지혜가 함께 하는 자비심이지요. 고통을 없앨 방법을 모른다면 고통에 시달림을 보고 ‘어떻게 하나’ 하고 자포자기해서 한숨 쉬는 것 외에 별도리가 없겠지요. 이것은 지혜가 없는 자비심입니다. ‘비폭력’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비폭력을 이끌어내는 사상에서 불교가 가지는 다른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교법은 유정에게 해로움이 없으며 견해는 상일주재의 아가 없음을 인정하는 세 가지 차이가 있다.” 대종의론에서 이르기를 “아집의 경계를 막고 막지 않는 내외의 두 가지 지견이 있네.” 여기에 뜻이 다 드러납니다. 아집의 경계인 아의 독립적 실체를 성립하는 것 외에도 이를 막는 혹은 막으려 노력하는 이가 불교도입니다. 견해는 상일주재의 아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불교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외도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외도의 종파들은 이와 반대로 교조에게 허물이 있고 덕을 원만히 갖추지 않았으며, 교법은 유정을 해하거나 살생함이 있고, 견해는 상일주재의 아가 있음을 주장하는 세 가지 차이가 있다.” ‘상일주재의 아’라는 것은 이전 티베트와 인도에 전해지지 않았던 기독교나 이슬람 유태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서 정토나 천계를 가거나 혹은 악도에 떨어지는 영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삶이 다하여 다른 곳으로 가는 주체가 있지요. 우리가 인정하는 전생과 내생의 개념으로 다음 생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천국이나 지옥에 감을 얘기합니다. 죽음으로 몸이 무너지기 때문에 오온과 다른 나, 영혼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외도들이 ‘상일주재 아(我)’ 하는 이들은 “전생에서 이생으로 이생에서 내생으로 감이 존재한다. 이 몸의 상태에서 나를 얘기한다면 몸이란 무너지는 것이고 전생으로부터 이생에 오거나 후생으로 갈 수 없다. 따라서 이 몸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나라는 것이 필요하다!” 이로써 오온과 별개의 대상인 ‘나’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는 영원불멸한 상(常고)이고 유일하며 오온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주재자(主宰者)인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지금 불교 이외의 종교 대부분은 모두 그럴 것입니다. 제가 모두라고는 하지 못해도 말입니다. 대부분이 상일주재의 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집의 경계를 막고 막지 않는 내외의 두 가지” 라는 말씀이 지난 3천 년 간 지속되고 있는 셈입니다. 불교가 전해진 때부터면 3천년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오신 2500년 전부터 지금까지라 할 수 있겠지요. 


‘두 번째 유경(有境)의 세 가지는 인(人.보트가라), 식(識), 능전성(能詮聲) 세 가지로 첫 번째 수교행경부(隨敎行經部)는 온(蘊)의 상속(相續)이 보트가라의 사례이다.’ 이 부분은 앞의 설일체유부와 동일합니다. ‘수이행경부(隨理行經部)는 의식(意識)을 보트가라의 사례로 인정한다. 두 번째 량(量)과 비량(非量)의 두 가지 심식이 있으며 량에는 현량(現量)과 비량(比量) 두 가지이다.’



     

‘현량에는 근현량(根現量) 의현량(意現量) 자증현량(自證現量) 유가현량(瑜伽現量) 네 가지이며’ ‘근유색(根有色)은 량일 수 없으니 명료의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경계를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교의에서는 량(量)을 식(識)으로 규정합니다. 유무는 량식이 인식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대상을 요량하는 식이 요량한대로 실제 존재하고 요량한 식이 있다면 그 또한 착란이 아닌 식이 대상을 요량하면 그 대상이 존재한다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식에 대상이 현현함으로서 대상을 인식하더라도 인식한 대로 존재하지 않을 때는 착란식이 됩니다. 인식한 대로 실제 존재하지 않아 그런 식을 전도식 혹은 착란식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유무는 인식체인 량식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고 량식의 존재는 자증분에 의해 성립합니다. 대상의 존재는 인식 수단인 량식의 유무에 따르고 이런 량식의 성립은 자증분에 의해 성립됩니다. 량식에 관해서 중관에서의 설명이 좋습니다. 쉽게 수긍이 갑니다.

   

명언으로 존재함은 대상에 식이 현현하고 그것을 인지한 식이 있고 식이 인식한 대로 다른 식으로도 인식되는 것 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처음 인식한 후 두세 번 확인해본 그대로 인식되거나 또 다른 측면에서 분석 가능하다면 앞서 ‘이것이 있구나’라고 인식된 것이 분석 후에도 계속 그대로일 때 그 식이 바른 의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인식한 상태에서는 바로 량식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두 가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량식이 존재하는 것은 자증분에 의해 성립되지만 그 식이 량식인지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대상의 존재는 량식으로 성립되고 량식의 존재는 자증분으로 성립됩니다.


일반적으로 량식이든 비량식이든지 간에 어떤 식이든 그에 해당하는 자증분이 있지요. 량식의 존재를 자증분으로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량식(바른 의식)인 것은 어떻게 성립할까요? 그렇지요. 다른 의식으로 성립 입증되는 것이지 자증분 그 자체로는 량식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일반상식에서 말한다면 무엇인가를 보았을 때 다시 살펴보고 또 다시 확인하여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서 '나는 이렇게 보인다. 너도 그렇게 보이느냐'고 물어 보고 이것을 또 확인되었을 때 있다는 것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인식한 의식이 바른 의식 량식임을 그제야 확신할 수 있습니다.  평소 과학자들이 조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분석하여 얻은 결과가 있다면 한 사람의 결과로써 결론을 내리지 않고 거듭 반복하여 분석 확인하고 다른 사람이 같은 방법을 써서 분석했을 때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면 있다고 결정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이 바른 의식임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에서 사유 분석을 통해 량식이란 것을 확인하지 않고는 량식임을 알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량식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량식이 량식임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에서의 점차적인 분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지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현량에는 근현량, 의현량, 자증현량, 유가현량” 자증분이라는 것을 설명하자면 일반적으로 식에는 자증분과 타증분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소취행상과 능취행상이 있습니다. 소취상이 있는 것은 타증분이라는 것이고, 인식대상의 식과 인식하는 식이 둘이 아닌 상으로 인식하는 식 이것을 능취행상이라 합니다. 다른 소취는 인식하지 않고 식 그 자신을 인식하는 식이므로 자증분이라 합니다. 


유가현량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관수행, 어떤 대상에 습을 들인 것으로 인해 대상이 분명하게 인식되는 것이 유가현량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비량의 심식에 재결식(再決識)” 량식이란 것은 대상에 거짓되지 않는 것 바른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식 자신의 힘으로 바른 식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찰나의 의식은 첫 번째 찰나에 존재했던 량식을 뒤따른 것이므로 식 스스로의 힘으로 대상에 바른 식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량식은 대상을 새롭게 바르게 인지하는 의식이어야 한다는 설명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재결식은 대상을 인식한 그대로 실제 그렇기 때문에 량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류논증은 이것을 량식으로 인정합니다. 이 교의에서는 량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대상을 새로이 인식하는 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각각의 종의에서 인정하는 량식이라는 것은 의식 그 자체의 힘으로 어떤 대상을 바르게 새로이 인식하는 식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바르게 인식하는 식으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대상의 자상(自相)을 인정하기 때문에 가지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물의 의존성, 명언가유를 얘기하는 교의에서는 다소 량식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비량(非量)의 삼식(三識)에 재결식(再決識), 전도식(顚倒識), 의(疑)” 의문을 대개 끊어야할 대상으로서 규정할 때는 번뇌의 성질을 가지는 의문을 얘기합니다. 알아야할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의문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취해야할 의문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예를 들어 경서를 배울 때 경서의 앞머리에 사종요지를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경서를 배우는 대근기들이 처음에 경서의 내용이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이러한 가르침의 내용이 필요한가라는 필요성, 필요에 의해 이루는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여 경서의 내용이 있고 내용이 일반적 이야기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과 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 이것은 또한 일시적으로 지식의 습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앎으로써 가지게 되는 이익과 궁극의 목적, 이렇게 내용과 필요성 궁극적인 목적을 알고 나서 이러한 관련성을 알 때 비로소 경서를 배우려고 하는 진지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경서를 봄과 동시에 혹은 어떤 스승이 말씀했다는 이유만을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함에도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는 의지에 대한 가르침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아무튼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의심이나 의문이 없으면 확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분석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분석하지 않을 것이고 분석하지 않으면 뜻을 끝까지 규명하여 완전한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것 같다고 두는 것은 대략적으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입니다. 분석을 통하여 확신을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은 사의(伺意)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이유를 생각하고 분석하여 바로 이것이다. 틀림없다. 이것밖에 길이 없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요새말로 백퍼센트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백 퍼센트라고 할 때는 확신한다는 얘기지요. 몇몇은 백보다 천이 더 많은 수라고 해서 천 퍼센트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아무튼 이유를 사유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유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분석하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분석하려는 마음이 생기려면 의문과 의심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의문과 의심은 취해야할 바입니다. 실제 그러한 것에 스스로 잘못된 이유 생각으로 인해 의심 즉 취해야할 바를 취하여 매진하는데 방해가 되는 의심은 번뇌의 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결식, 전도식, 의” 번뇌의 의심인지 아닌지는 의심이 가는 대상에 관련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사의(伺意)는 우연히 보게 된 것 알게 된 사실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사의라고 합니다. “현이불지(現而不知)는 다섯 가지이다.” “이러한 것에서 현량(現量)과 현이불지(現而不知)의 두 가지 심식은 반드시 무분별식과 착란식이며” 현이불지는 오근식의 안식이 형상에 착하고 있는 상태에는 의식이 소리를 듣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비량(比量)과 사의, 의 세 가지는 오직 분별식이다. 식이 대상을 요량할 때 유상(有相)으로 지각하고” 조금 전에 설일체유부처럼 무상(無相)이 아닌 유상으로 식이 대상을 인식할 때 대상의 상이 현현하는 것을 지각하는 것을 말하는 듯합니다. “세 번째 어떤 소전(所詮)을 이해하게끔 하는 청취대상이 능전성(能詮聲)” 이 부분은 특별한 것이 없네요. “이를 소전에 의해 분류하면 전종성(詮種聲)과 전취성(詮聚聲)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또 이를 표전방식으로 분류하면 전법성(詮法聲)과 전유법성(詮有法聲) 두 종류이다.” 다른 대상의 특성을 배제하는 소리와 않은 것을 의미하지요. ‘소리의 무상성’에서 무상성은 병이나 기둥의 무상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소리의 무상성은 다른 대상의 무상성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소리는 무상하다’라고 할 때는 직접적으로 소리는 무상이라는 것만을 의미할 뿐, ‘화병은 무상하다’라는 사실을 배제한 소리의 무상성을 따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있지요.


‘소리의 무상성’은 전법성(詮法聲)이고 ‘소리는 무상하다’는 전유법성(詮有法聲)입니다. “도(道)는 도의 소연(所緣)은 사제(四諦)의 무상(無常)을 비롯한 십육행상(十六行相)이며 세품무아와 세품인무아를 동의어로 인정한다.” 이 교의에서는 법무아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인(人)의 상일주재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조품인무아(粗品人無我)이며 인이 주체적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세품인무아(細品人無我)로 인정한다.” “도(道)의 소단(所斷)에는 인아집(人我執)과 구번뇌(具煩惱)인 무지와 구번뇌가 아닌 무지 등의 명칭 정도만을 인정하며 이외의 법아집과 소지장(所知障) 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부와 같다.”


“삼승의 도를 수도오위(修道五位)로써 설명하고 지(知), 인(忍)의 16찰나를 견도(見道)로 인정한다.” “현량의 현현하는 경계(顯境)는 반드시 자상(自相)이어야 함으로 세품인무아를 성문의 견도 무간도의 인지대상(能取所緣)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견도의 무간도가 유가현량이 되고 이것의 인식 대상인 세품인무아는 차전(遮詮)이므로 자상이 될 수 없지요. 따라서 인아(人我)가 공한 행온(行蘊)이 직접 요량되는 대상으로 규정합니다. 네 가지 종의를 자세히 구분하여  이 논사는 이 종의의 견해를 가지고 있고, 저 분은 저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구별하는 것은 아마 티베트의 논사들에게 강하게 보이는 경향인 것 같습니다.

     

    

앞의 논사 중에 예를 들어 집경론의 주석을 지으신 시와중네라는 분은 용수보살과 무착보살의 견해가 일치한다고 인정하면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티베트의 논사들이 아주 자세히 연구한 결과로써 확연히 판별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장하는 바에 있어서 근(根), 도(道), 과(果) 세 가지 가운데 근에 관한 주장에 있어 경(境)을 말하자면 모든 소지(所知)가 삼성(三性)으로 귀납됨을 인정하니” “제행(諸行)을 의타기성(依他起性), 제법성을 원성실성(圓成實性), 이외의 것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인정하는 까닭이다.”


사대 종의철학에서 속제에 대해 인정하는 바가 다르고 주로 무아사상의 뜻을 이해하는 정도와 깊이에 따라 사대 종의철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먼저 초심자들이 탐.진의 마음을 줄여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 탐.진을 비롯한 번뇌가 일어날 때 좋아 보이는 대상에 탐착이 생기고 미워 보이는 대상에 싫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대개 타인에게 좋아 보인다는 이유로 나에게 탐착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미워 보이는 이유로 나에게 분노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좋아 보이고 미워 보인다는 것 좋고 싫어 보이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굉장한 차이가 있지요. 나와 관련해서 좋고 싫은 대상을 두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아 보이는 대상에 집착하고 미워 보이는 대상에 분노하는 것은 나라는 아집이 강할수록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의 벗과 적에 대한 구분이 더 강해지지요. 나라는 아집이 다소 줄어든다면 나의 벗과 적이 존재할 수 있지만 나의 벗과 나의 적이라는 이유로 생기는 탐.진의 강한 마음은 다소 줄어들 것입니다. 평소에 자주 비유합니다만 예를 들어 시계가 상점에 진열되어 있을 때 나의 시계라는 것을 사기 전에는 좋은 점을 보고 좋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구입한 후에 나의 시계가 되었을 때는 상점에 진열되어 있을 때보다 더 좋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나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해 더 강한 집착이 생기는 것이지요.

    

따라서 먼저 탐.진의 거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나만이라는 고집과 독단적인 마음을 줄여나갈 방법을 강구할 것을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언가 하면 어제 그제 이미 말씀드렸듯이 나의 몸, 내 가족, 내 벗, 내 머리, 내 가슴이라 할 때 이 모든 것의 바탕인 고정된 나라는 것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떠오른 대로의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고정된 나라는 생각이 적어질수록 나의 형제, 나의 벗, 나의 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다소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 집착의 마음이 줄어들수록 거기에 해가 되는 반대편에 대한 미움이 줄어들 것입니다.


석명론에 “아집에서 분노가 일어나니” 라고 말씀하셨듯이 집착의 마음이 강할수록 분노와 미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탐.진의 마음을 줄이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나라는 강한 집착을 줄이기 위해 ‘상일주재의 아가 없다’, ‘오온과 다른 별개의 상일주재의 나라는 것이 없다’, ‘오온에 의지하지만 오온을 주관하는 주재자로써 독립적인 나는 없다’는 것을 사유하고 확신을 얻어 습을 들인다면 나라는 마음이 줄어들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로 나에게 좋아 보이고 싫어 보인다고 인식하는 ‘나’는 인무아를 수행함으로써 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좋아 보이고 싫어 보이는 ‘대상’에서 무아를 생각해본다면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법무아를 설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오온을 비롯한 법 또한 그러합니다. ‘아(我)’가 보이는 대로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중관학파에서 말하는 진실로 존재하지 않음의 의미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는 고정되고 진실로 여겨지는 대상이 없단 것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누리는 대상인 법 또한 고정되고 독단적이며 진실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립시키는 하나의 논리로 외경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얘기합니다. 모든 것이 인식하는 심식 상에서 습기가 드러날 뿐이지 심식에 나타나는 대상이 실체로써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바깥의 경계 자체에서 고정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꿈속의 현현과 같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 대개 사람들이 꿈속에서 집착했던 것을 꿈에서 깨어났을 때 ‘무슨 소용이 있나, 내 의식에 그렇게 나타난 것일 뿐이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깥 경계에 지목할 수 있는 벗과 형제를 향해 강한 집착이 생길 수 있지요. 지목의 대상인 집착이 생기는 대상은 자신의 마음에서 습기가 나타난 것일 뿐이다. 심식에서 현현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면 외경으로부터 고정된 진실로써 존재한다는 것으로 여겨서 탐.진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유식의 경서에서 말하는 법무아입니다. 오온의 법 또한 보이는 대로 존재하지 않음이 법무아입니다. 인무아와 법무아 두 가지 집착하는 나와 집착하는 대상, 이 두 가지 모두 독립적이고 진실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실유의 의미에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외경으로 성립된 진실이 없다는 것, 승의로써 성립하지 않는 법이 각각의 존재 방식으로 성립되어 있는 궁극의 자성으로 보입니다. ‘자성으로 성립한다면 자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승의로 성립하는 것이고, 어떤 경계의 자성을 규명해 들어갈수록 그 자성이 분명해져야 하는데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승의로써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색을 비롯한 제법이 승의로써 성립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합니다. ‘더 들어가서 어떤 대상이 보일 때 대상자체에서 성립하는 것 같지만 대상자체에 성립되는 것이 없다. 저편에 가설한 것 명언가유다’라고 설명합니다. 명언가유로 인과와 행위, 행위자를 규정할 수 있다면 마음의 아집과 실집을 가장 강력히 대적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저쪽에 성립된 것이 결코 없다. 오직 이름으로 가설된 것 뿐’이라는 것이 가장 강력합니다.


명언가유의 이치로 행위와 행위자를 규정하지 못하면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방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성 없이 연기라는 이유로써 무자성과 진실로써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이해를 한다면 아집이나 실집에 이보다 더한 대치법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종의철학을 단계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모든 소지(所知)가 삼성(三性)으로 귀납됨을 인정하니 제행이 의타기성, 제법성을 원성실성 이외의 것을 변계소집성으로 인정하는 까닭이다.


이 세 가지를 자체에서 성립(自體有)하는 것과 자성으로 성립(自性有)하는 것으로 인정하지만 진실로써 성립(眞實性-實有)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차이가 있으니 이는 변계소집성은 진실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며 의타기성과 원성실성 두 가지는 진실로써 성립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까닭이다. 삼성(三性)을 얘기하는 것은 물론 제법을 삼성으로 설명하는 이유가 있지만 주된 것은 제행인 의타기성 특히 불청정의타기성, “바른 것이 아니나 의타기성은 존재하네. 거기에 두 가지가 존재하지 않네.” 라는 말씀처럼 불청정의타기성에 관련해 탐.진이 생깁니다.


무루의 법에 의해 탐진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주로 불청정의타기성에 의해 윤회하고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에 어떤 대상에 대해 탐진이 생기고 이로 인한 고통의 발생은 우리에게 보이는 대로 변계소집성이 공하다는 원성실성의 자성이라는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승의로써 성립되진 않으나 분별의 가성으로 성립하는 것이 변계소집성의 정의이다. 분류하면 차별변계(差別遍計)와 상단변계(相斷遍計) 두 가지이다. 전자는 소지(所知) 따위이고 후자는 이종아(二種我:인아, 법아) 따위다. 두 가지 실집(實執)의 집착 대상인 법아와 인아를 말합니다.



다른 인연의 힘에 의지하여 생기며 원성실성의 바탕이 되는 것이 의타기성의 정의이다. 분류하면 청정의타기성과 불청정의타기성 두 가지이다. 전자는 성현의 후득지(後得智)와 불상호(佛相好)따위고 후자는 유루근취(有漏近取)의 오온(五蘊)따위이다. 두 가지 아(我) 가운데 어떤 아든 아가 존재하지 않는 진여가 원성실성의 정의이다. 이 두 가지 중이라는 것은 인아와 법아를 말합니다. 인아와 법아 가운데의 아가 존재하지 않는 진여가 원성실성이라 인정하고 있으므로 법무아와 인무아 모두를 원성실성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오직 한 가지를 말하니”를 해석할 때 법무아만을 원성실성으로 인정하고 인무아를 원성실성으로 인정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는 비전도원성실성과 불변원성실성으로 분류된다. 주로 원성실성을 얘기할 때 불변원성실성을 의미합니다. 불변원성실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현의 선정지를 비전도원성실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전자는 성현의 선정지(禪定智)와 같고 후자는 법성(法性)과 같다. 전도되지 않은 원성실성을 원성실성으로 분류하지만 원성실성이 아니니 이는 어떤 것을 소연(所緣)하면 장애가 다하게 되는 청정도(淸淨道)의 궁극 소연이 아닌 까닭이다. 진제인 공성, 실집의 대치법인 공성을 규명하기 위해 삼성(三性)을 설하신 것입니다.


이 또한 불청정의타기성이 보이는 대로 성립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외경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외경으로 성립한다면 이것저것으로 이름과 분별로 가설하기 이전에 가설의 바탕이 이전부터 존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형상이 이름과 분별의 가설바탕이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외경으로 존재한다면 실체로써 존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색을 인식하는 분별의 바탕이 실체로 성립하지 않아 보이는 대로의 외경으로 존재하지 않지 않는가. 그것을 심식에 현현일 뿐이라는 것으로 탐진의 마음을 차단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타기성에 의해 탐진이 생기므로 탐진이 생기는 대상이 공성의 자성이라는 원성실성을 규명합니다. 공성의 자성이라 할 때 무엇으로 공한가라고 한다면 차전인 변계소집성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유법인 의타기성 변계소집성이 공한 원성실성 즉 무엇으로 공한가. 공한 바탕(의타기성)이 차전(변계소집성)으로 공한 그것이 원성실성이다. 공성으로 이끌기 위해 삼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지를 속제와 진제로 나누어 청정도의 소연을 진제로 두고 아닌 것을 속제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중관학파와 마찬가지로,  -명언을 관찰사택(觀察思擇)하는 이지량(理智量)으로 얻어지는 대상이 속제의 정의이다.- 승의를 관찰사택하는 이지량으로 얻어지는 대상을 속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제는 반드시 자상으로 성립해야 하지만 속제는 자상으로 성립하는 것만은 아니니 의타기성이 자상으로 성립하나 변계소집성의 업들은 자상으로 성립하지 않는 까닭이다.-


-거짓된 것이면 거짓된 것으로 성립되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 의타기성이 거짓된 것이나 거짓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어떤 종의이든 자신의 교의에서 진제 속제를 다르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유식에서 가유 실유를 구분하는 방법을 요약해 말씀하시고 있네요. 이 아래에 -삼시(三時)와 무차(無遮)에 관한 것은 경량부와 유식. 자립논증 세 파가 동일하다.- -색(色)을 비롯한 오진(五塵)은 외경(外境)으로 성립하지 않으니- 색을 비롯한 오진은 우리 의식 저쪽에 우리 마음과 상관없이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상에서 독립적으로 성립한 것이 아니다.


-아뢰야식 상에 있어 공업(共業)과 개별업(個別業)의 습기의 힘이 내면의식 실체에서 생기는 까닭이다.- 아무튼 하나의 근취인에서 인식과 인식대상이 생긴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같다는 것이지요. -진상유식파의 경우 색을 비롯한 오진이 외경은 아니나- 이 부분은 앞에서 이미 나왔습니다. 제법이 마음의 자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경(有境)에서 수교행자(隨敎行者)들은 팔식(八識)을 인정하므로- -의식(意識)과 아뢰야식을 인(人-보특가라)의 사례로 인정하며- 인(보특가라)을 규정함에 있어서 팔식을 인정하는 수교행자들은 습기가 저장되는 장식(藏識)이라는 무기식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보특가라(人)’라고 지목할 수 있는 궁극의 대상이라 합니다. 수이행자(隨理行者)들은 팔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중관파와 마찬가지로 의식(意識)을 인(보특가라)의 사례로 인정합니다.


아뢰야식을 인정하는 교의에서 아뢰야식은 어떤 것인가? -아뢰야식은 안의 습기를 소연하며 유형을 구분할 수 없고 자성은 무복무기(無覆無記)이며 심소인 오변행(五遍行)과 반드시 상응하여 존재하는 주의식(主意識)으로 견고한 특성을 가지는 것으로 인정한다.- -염오의(染汚意-말나식)는 소연(所緣)인 아뢰야식을 소연하여 아(我)로 생각하는 상(相)을 가지는 식- 안식(眼識)을 비롯한 육식과 염오식과 아뢰야식을 더해 팔식을 얘기합니다. -량(量)에는 현량(現量)과 비량(比量) 두 가지와- 현량에는 경량부와 마찬가지로 -사현량(四現量)을 인정하며 자증현량(自證現量)과 유가현량(瑜伽現量)은 반드시 착란식이 아닌 것으로 인정한다.- -진상파(眞相派)는 범부의 심속에서 청(靑)을 인지하는 안식(眼識)을 비착란식(非錯亂識)으로 인정하고- 청을 청으로 현현함은 무명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상파의 경우는 범부 심속의 근현량(根現量)이면 반드시 착란식이어야 하며 범부 심속의 의현량(意現量)이면 착란 비착란 두 가지 경우가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언젠가 스페인에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큰 성당이 있는 어느 지방의 성지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그때 몸집이 작은 천주교의 한 사제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라고 하더군요. 저를 맞이한 사람이 설명하기를 그분이 5년 동안 성당 뒤 작은 산에서 물과 빵으로 연명했다더군요. 그런 분이 당신을 만나러 온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분을 만나 당신은 저 산 위에서 5년 동안 지냈다고 하던데 그 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랑을 명상하며 지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참 희유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찬탄하는 마음이 크게 일더군요. 이런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보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된 지견을 가졌다고 경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존중과 존경심을 갖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두 번째, 불교의 종의를 간략히 분류하여 설함에 있어 총설과 차별설 두 가지이다. 첫째로 비할 바 없는 교조 석가족의 왕께서 처음에 최상의 보리심을 발하시고 중간에는 삼대 무량겁동안 자량을 쌓으셨으며 마지막으로 보드가야로 옮기시어 성불하시고 바라나시에서 다섯 비구에게 사성제의 법륜(법륜)을 굴리셨다.- 팔리경과 산스크리트어 경전에서 공통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제 말씀드린 대로 불교는 인과를 바탕으로 합니다. 처음부터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중생이 마음을 다스려 마음의 덕이 높아가므로 허물이 다하여 부처를 이뤘음을 대소승을 막론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할 바 없는 교조(敎祖)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무량겁 전에 처음 보리심을 발하고 삼대 무량겁 동안 자량을 쌓으셨으며 마지막으로 룸비니에 태어나셔서 보드가야에서 성불하시어 처음으로 바라나시에서 사성제의 법륜을 굴리셨던 것입니다. 아마 아래에 자세히 언급될 것입니다. -그 후에 영취산에서 중전의 무상법륜(無常法輪)- 대승의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로 되어있지요. 그 대승의 말씀인 중전 무상법륜을 영취산에서 굴리셨습니다. 그 후 -비사리에서 분별법륜(分別法輪)을 크게 굴리시니- 이름이 사제(四諦)법륜인 것은 가르침의 내용을 주로 사성제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사제법륜이라고 합니다. 중전 무상법륜도 그렇습니다. 제법이 무자성임을 말씀하시고 있어 무상법륜이라고 합니다. 분별법륜은 해심밀경에서 처음 이름이 나옵니다. 중전무상법륜을 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중전 무상법륜에서 일체지를 비롯한 모든 법은 자상이 없음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에 이를 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삼성으로 나누어 변계소집성은 무자상으로 의타기성은 유자상으로 분류해서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궁극의 요의경으로 말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분별법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분별법륜(分別法輪)을 굴리시니 외도의 여섯 교조 등 사견을 말하는 모든 이들을 조복시켜 이익의 근원인 부처님의 진중한 불법이 널리 퍼져 전승해지게 되었다.- -이후 해석자들이 삼전법륜의 말씀을 풀이한 것에 의해 네 가지 종의제창자가 생기니- 근본적으로 네 부류의 종의는 부처님의 경장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들에서 실유제창자의 두 부류가 초전법륜을, 중관파가 중전법륜을 그리고 유가행파들이 삼전법륜을 따르는 것으로 근(根), 도(道), 과(果)의 삼규정을 인정하게 되었다.- 비사리 등에서 말씀하신 마지막 법륜은 산스크리트어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에 대승이 불설이냐 아니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즉 산스크리트어 경장이 불설이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입적하시고 400년이 지나 용수보살이 계셨던 당시에도 불설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용수보살의 ‘보관보만론’에서 대승을 불설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비롯한 인도 나란다 스승들이 대승이 불설임을 밝히는 논서를 지으시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불설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 있었고 지금에도 역사학자들은 대승이 부처님 입멸 후에 불교가 발전해서 나타난 것이라고 합니다.


자세히는 ‘난해현론’에서 대승이 불설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승장엄론’에서도 언급하지만 청변논사께서 지으신 ‘난해현론’에서 가장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 용수보살의 ‘육십정리론’일 겁니다. ‘육십정리론’에서 공성, 연기의 진여가 일체종지를 이루기 위해 필요함은 물론이고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도 이것의 증득의 필요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소승의 경서에서 보시나 지계 인욕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만 그것을 심화시키는 특별한 도가 없다면 수승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만일 대승이 불설이 아니라면 대승의 논서가 근거가 없는 셈이 됩니다. 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해탈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일체지의 지위획득은 제쳐두고라도 해탈조차 성취할 수 없습니다. 사성제를 인정하는 이들에게 고. 집. 멸. 도제를 말씀하시게 됐지만 공성을 인정치 않으면 멸제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어렵습니다. 멸제가 성립하지 않으면 도제가 성립되기 힘듭니다.


따라서 대승이 불설이 아니라 이후에 부처님을 따르는 이들이 지은 것이라면 결국 부처님보다 부처님을 따르는 이들이 더 훌륭하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농담으로 자주 말합니다만 부처님보다 용수보살이 더 뛰어나고 그분보다 우리가 더 뛰어나겠지요. 앞서 나온 경서를 알고 더해 현대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대적 지식을 용수보살께서 아실 리 없지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요. 부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다고 하게 됩니다. 부처님을 평범한 범부로 여겨서 말입니다. 컴퓨터처럼 당시에 존재하지 않던 여러 가지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으니까요. 결국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부처님을 평범한 범부로 두고 선한 마음과 지혜를 가진 자 정도로 여겨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대 무량겁의 자량은 무의미하게 되고 이것을 인정할 수 없는 아니 인정하지 않겠지요. 따라서 이것은 대단한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용수보살이란 분은 대단히 뛰어나신 분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이치적으로 따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굉장한 지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분이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무조건 받아들이는 분이 아닙니다. 요의와 불요의의 경을 구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을 따지는 것이지요. 뛰어난 지성. 제가 아는 산스크리트 학자들은 중론의 저술 방식이 뛰어나다고 놀라워합니다. 중론의 산스크리트어 문체가 뛰어나다고 굉장한 칭송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뛰어난 지성과 이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당시 인도의 역사에서 250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이 부처님에 대해 추측하는 것이 쉬울지, 부처님 입멸 후 4~5백년이 지난 그때의 스승들이 더 잘 알 수 있을 거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부처님 입멸 후 4~5백년이 지난 그때의 스승들이 더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들은 인도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부처님께서 입멸하신지 4~5백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얘기를 하던 때이지요. 선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혹은 스승의 스승의 스승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입멸하신지 4,5백년이 되지 않았던 시대의 분이고 지성과 이성을 가지신 분이 하셨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대학자라 하더라도 다소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이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용수보살은 비구이십니다. 절대로 거짓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계율을 여법이 지키는 비구이고 뛰어난 지혜를 가지며 석존 입멸 후 4,5백년이 지난 비교적 가까운 시대에 존재하셨던 용수보살께서 부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어리석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중론에서도 부처님 경장을 인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집학론’에서 많은 경을 인용하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집학론’에서 인용하셨던 대승의 경이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인정 하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용수보살을 따르는 성천보살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뛰어난 지혜와 내외도 사상을 모두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뒤로 불호, 청변논사도 뛰어나신 분들입니다. 견해에 있어서 조금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긴 있지요. 월칭보살께서 이치적으로 따져봤을 대 청변의 견해에 오류를 말씀하긴 합니다만 이것으로 놀랄만한 지성과 예리한 이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봤을 때 대승의 경을 바른 하나의 근거로써 제기하기 때문에 대승이 불설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반야부의 경을 영취산에서 설하실 때 장소가 광활해 무수한 천인무리가 함께 법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실제 영취산 설법 장소에 가보면 일이십 명이 다리를 오므리고 들어갈 수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범부에게 공개적으로 설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설하신 것은 결집삼장입니다. 일반 역사에서도 이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여기에 비해 대승은 공개적으로 설하지 않았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보편적인 역사적 사실을 기본으로 배열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설하지 않아 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가르침의 내용을 생각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했지만 공개적으로 설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업이 정화된 이들에게 설하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반야경에서 사리자와 관세음보살 혹은 수보리와 관세음보살의 질의 응답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사리자와 수보리는 인간의 존재이기 때문에 쉽게 서로 대화나 접근이 가능했지만 사리자와 관세음보살과의 질의응답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천신의 형상인 관세음보살과 질의응답은 업이 정화된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지 업이 정화되지 않은 사람이 십지보살과 질의응답의 기회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때문에 업이 정화된 이들에게 설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일 필요가 없습니다. 업이 정화된 중생이 있다면 부처님께서 나투어 법을 설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밀교의 경이 불교인지 의심하는 이들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욱이 밀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업이 정화된 대근기에게 설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성천보살의 논서 가운데 오종성의 뜻을 풀이하신 논서에서도 말씀하셨듯이 무착행, 바라밀행, 유착행 세 가지로 소승행에게는 무착행을, 넓지 않은 이에게는 바라밀행, 심원함에 나아가지 않는 이에게는 유착행이라는 심행을 말씀하시고 비구의 모습인 부처님께서 만다라의 분노본존의 모습으로 변해 밀교경을 설했다고 인연을 밝힐 때 나오며 사실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가장 업이 정화된 1,2명에게 나타나서 설하실 지도 모릅니다. 가장 업이 정화된 이들에게 설하셨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가르침을 부처님께서 살아계셨던 동안-80세 정도 사셨지만 그 동안 설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후에 근기가 되는 이들에게 나타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티베트에 종파를 떠나 많은 스승들께서 부처님뿐만 아니라 용수보살과 성천보살을 직접 친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쌀마(후에 발전한 새로운 종파)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닝마(기존의 종파)에서 해심밀이라는 것이 나오고 성천보살이 나타나 어떤 본존에 의지할 것인지 말씀하고 그에 맞는 비밀의 가르침과 수행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업이 정화된 특별한 이들에게 만다라의 본존이 나타나 특별한 비밀의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500년 전 인도에서 가능한 것이 티베트에서 발생하지 않으란 법이 없습니다. 만약 인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 한다면 민족우월주의가 됩니다. 이는 말이 되지 않는 소리지요. 이렇게 볼 때 일반적 방법으로 규정한 역사로 얘기하는 것은 힘듭니다.


그래서 성언량 이런 경을 해설한 논서로 용수보살을 비롯한 분들이 지으신 논이 두 번째로 나오게 됩니다. 부처님 말씀과 논서 이 두 가지를 깨달아 교학과 수행을 갖춘 바른 스승, 상사량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바른 스승에 의지하므로 제자의 체득이 가능하므로 증득량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확신을 얻는 순서로 말하자면 반대로 먼저 자신의 마음에 경험이 생기고 스스로의 경험으로써 이전에 공부할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의식에 이런 변화가 왔고 변화로 인해 마음이 행복하고 몸이 편안해져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고 이보다 더한 체득으로 일반인에게 없는 특별한 공덕이 갖춰지면 증득량이 되는 것입니다.


증득량은 자신의 경험으로 직접 이해되는 것이지요. 이런 증득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가르침을 보이신 스승에 의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스승이 믿고 의지할 만한 스승이라는 바른 스승 상사량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스승은 용수보살을 비롯한 분들의 경서를 배우고 수행함으로써 교학과 수행을 갖춘 스승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논서에 대한 확신이 들고 논서의 저자인 용수보살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또 용수보살이 그렇게 훌륭한 분이라는 확신과 함께 거짓을 설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승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어제 말한 단견자(斷見者)인 순세파 주장의 하나로써 만약 전생이 존재하는 근거를 의식에 둔다면 의식이란 육체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므로 육체가 무너지면 의식도 사라짐을 수천 년 동안 인도의 순세파는 주장해 왔습니다. 현대에는 의식은 뇌에 의해 생기는 것이고 뇌가 죽음으로 의식도 없어지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과학자들이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 열려있는 의식으로 사물을 관찰합니다. 몇몇 젊은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1979년 소련의 몇몇 과학자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식(識)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어 오식(五識)과 ‘의식(意識)’을 말하자 과학자들이 soul이라는 의미로 이해했나 봅니다. 예수교에서 말하는 영혼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종교의 영역이라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종교의 영역이라면서요.

이런 과학자의 경우는 예외입이다.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태도 말입니다. 특히 중국 과학자들 가운데 처음부터 종교를 부정하고 공산주의만 옳다고 결정한 뒤 과학에서 자신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으려 하면 치우치지 않은 의식이 아닙니다.  또 불교인이 불교입장에서 옳고 그른 것을 미리 결정한 뒤, 뒤에 옳은 이유를 제시한다면 이 또한 치우친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뜻을 구할 수 있다’는 말처럼 백 퍼센트 열려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취할 바와 버려야할 바, 옳고 그름을 먼저 결정한 후에 성립이유를 댄다면 이미 한쪽에 치우친 생각이지요. 처음부터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어떤 것을 성립시키고 그 필요를 밝히기 위해 이유를 댄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열려있는 의식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 위에서 따져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실상을 알았다면 그 실상을 취할 것인지 아닌지는 다른 의식으로 살펴보아야지 처음 실상을 파악하는 의식이 처음부터 실상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러면 치우친 의식이 됩니다. 때문에 불교에서 열려있는 마음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 뜻을 구한다.’

쫑카파 대사께서 “편견의 어둠에 가리지 않아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지혜의 힘을 가진 이”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편견의 어둠에 가리지 않는’이라 했듯이 한쪽에 치우쳐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과학자들과 많은 모임을 가지지만 ‘이것이 불교사상이다’라고 절대 얘기하지 않습니다. 불교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의 생각을 물어오면 불교에선 이렇게 얘기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생에 대해 물어올 때면 불교도나 전생을 믿는 사람들의 주제이지 당신이 관여해서 밝힐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얘기를 합니다.


중국과학자의 경우 처음부터 공산주의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어떤 근거를 대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과학자, 열려있는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얘기만은 아닙니다. 우리도 우리 것이 옳다고 결정하고 과학에서 근거를 찾으려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과학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어떤 이유를 대든지 원하는 대로 이유를 찾는다면 열린 의식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담입니다만 과학자들과 교류한지 20년이 되어갑니다. 과학자들과 교류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초창기 과학자들과 교류를 고려할 때 일입니다. 미국의 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불자였는데 저에게 이런 조언을 하더군요. 과학의 교류는 여러 위험요소를 가진다. 과학은 영어로 ‘killer of Religion'이다. 종교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과의 교류를 위험하다 하더군요.


그래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무엇을 하는가? 진실을 규명합니다. 규명하는 대상은 한계를 가지지만 주로 형체가 있는 대상입니다. 인식할 수 있고 형상이 있는 대상, 현전(現前)의 경계, 측량이 가능한 것을 대상으로 해서 과학이 이루어집니다. 분야 자체가 한계성을 집니다. 불교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규명하는 대상은 한계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 진실을 규명한다는 것입니다. 불교 또한 진실을 규명합니다. 불교에서 진실을 규명하는 방법으로 네 가지 도리(道理), 정리(正理)를 들어 말합니다. 법이(法爾), 작용(作用), 관대(觀待)도리 세 가지를 말하는데 이것은 우선 바탕이 본래 존재하는 것, 예를 들어 우리에게 나라는 생각이 존재함과 그와 관련한 행불행 감정의 존재 이런 것은 법. 자연입니다. 이것은 업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자연성입니다.


마찬가지로 바깥에 형상, 안팎의 모든 사물의 결과가 원인에 의존함은 자연(法爾)입니다. 각 사물이 가지고 있는 작용과 성질 예를 들어 불의 뜨거움 들의 성질은 법이입니다. 이러한 것을 법이도리(法爾道理)라고 합니다. 사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작용도리(作用道理)란 사물이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 아마 현대의 화학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각 물질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고 다른 물질과 만났을 때 성질이 어떻게 변화하는가? 다른 물질과 섞었을 때 또 다른 하나의 물질이 나오게 됩니다. 사물의 본성이 다른 물질과 상호 관련성을 가지기 때문에 성질에 변화성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물질에 다른 두 물질을 첨가했을 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 사물에 새로운 결과를 가지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관대도리(觀待道理)라고 합니다. 결과가 원인에 의한 것이다. 원인이 결과를 발생시키고 결과가 원인에 의존하는 것 이런 것은 자연법칙입니다. 이러한 자연법칙을 인정하고 이 바탕 위에 자연의 존재, 두 가지를 기본으로 한 것이 증성도리(證成道理)입니다. 증성도리는 이러하기 때문에 저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원치 않고 행복을 원하는 것은 본성이며 자연입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 이런 요건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또 저러한 조건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저러한 원인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증성도리입니다.


이러하므로 저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러해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필요치 않다. 불필요한 것을 없애기 위해 상호관계성을 가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이와 더불어 각각의 자용, 성질을 파악하고 그것의 연관성을 이해함으로써 이익이 되는 물질은 취하고 해가 되는 것은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관점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이 네 가지의 도리로 성불하셨습니다. 먼저 식(識)이 존재하고 그 가운데 대적되는 의식이 존재합니다. 그 속에 상위(相違) 상반(相反)되는 의식이 존재합니다. 바깥 사물에 상위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변화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상위성이 없다면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내면의식에 있어서도 상반되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의식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지 상위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내면의식에 있어서 상위의식은 어떤 것인가. 우선 바깥 사물의 성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예를 들면 뜨거움과 차가움은 상반되는 성질입니다. 연속선상에서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함께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밝음과 어둠 또한 그렇습니다. 동시에 같이 존재할 수 없는 상위모순되는 존재입니다.


내면의식은 바깥물질처럼 상위성을 따지는 대상은 없지만 인식하는 것이 상반되는 것 예를 들어 ‘좋다’ 혹은 ‘나쁘다’라고 인식하는 것은 상반된 인식입니다.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한 시점에 좋다 나쁘다는 인식은 상위모순되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불쌍한 중생을 향한 자비심과 그 중생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미움은 상반된 인식입니다. 


내면의식에 상반된 의식이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바깥 사물에 뜨거운 성질이 커질수록 차가운 성질이 줄어들고 밝아질수록 어둠은 줄어듭니다. 이처럼 내면의식에는 중생을 향한 미움이 더 커지면 사랑의 마음이 일어날 수 없고 중생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일어날수록 분노의 마음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실제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인해 변화를 가집니다. 법이도리, 작용도리, 관대도리를 그 아래에서 증성도리.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치 않는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행불행과 관련 있는 것 바깥사물이든 내면의식이든 행복을 주는 필요조건과 그렇지 못하고 불행을 주는 불필요한 조건들을 없애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도 이 네 가지 도리로써 생각하셔서 점차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가져와 모든 허물이 다하여 공덕이 원만한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이후에 또 언급될 것입니다.


허물이 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탐진이 줄어드는 것은 경험으로 알 수 있지만 완전한 제거는 많은 사유를 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 점차 허물이 줄어들고 공덕이 원만해져 궁극의 경지의 단증에 이른 것이지 아무 것도 않고 처음부처 그렇게 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방식입니다. 창조주를 인정하는 경우는 다릅니다. 부처 아닌 신이 창조주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그런 식이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분석하여 존재방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과학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로 상위되는 점이 없다고 생각해서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몇몇 이들은 의아해하며 가끔 묻기도 합니다. 불교가 과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교는 실상을 규명한다. 과학도 실상을 규명한다. 진실 혹은 실상을 구하는 입장에서 같다. 따라서 서로 교류가 필요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모순되는 바가 없지요. 20년간 과학과의 교류를 통해 어느 위치에 왔는가 하면 과학이 물리학과 신경병리학에서 얻은 결과는 대단합니다. 불교 경서에서 언급하긴 하지만 대략적인 것에 그칩니다. 과학이 놀랄만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과학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리학 특히 화학에서 미립자에 관한 설명은 자세합니다. 이것은 모두 분석해서 얻은 결과를 얘기한 것이지 추측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심리학 특히 강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분별 예를 들면 탐.진에 대해서는 불교가 굉장히 풍부한 설명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변화 방법이나 대치에 대해 이전의 인도종교 중 불교의 설명이 자세하고 뛰어나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분야 과학자들이 불교에서 어떤 설명을 하는지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근래 과학자들 가운데 불교의 설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요즘 열린 의식을 가진 유명한 과학자들이 불교 특히 티베트불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불법을 수행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생을 위해서 법을 수행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불교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전, 후생의 경우 일반적으로 중생의 심식을 기본으로 인식대상을 말할 때 직접지각 대상인 현전(現前)과 비현전(非現前), 극비현전(極非現前) 세 가지의 인식대상을 말합니다. 세 가지 인식대상이 존재함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말입니다.

    

존재한다고 모두 보여져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오감으로 바로 인식되는 대상일 필요는 없지요. 감춰진 경계(非現前)가 많이 존재하지요. 예를 들면 미세한 무상(無常)은 우리가 실제로 인식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사유를 통해 어느 정도 추측할 뿐이지요. 근래 과학이 미분자 상태에서 원자가 찰나찰나 변하고 사라지는 것은 보고 측량으로써 어느 정도 일 수 있게 되었지 이전에는 알지 못했지요. 직접지각대상(現前)이 아닌 감춰진 경계(非現前)가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100년 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근래에는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미경 망원경이 발달될수록 더 무한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 창조주를 인정하는 종교에서 지구에 국한해 얘기할 뿐 더 자세한 내용은 없습니다. 바깥에 별과 해와 달 그리고 지금의 세상을 창조했다고 얘기합니다. 그 당시에 알지 못했던 것을 지금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당시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각할 수 없는 감춰진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어떤 것은 극비현전(極非現前)인 것도 있습니다. 대상과 시대에 따라 비현전 가운데 이치적으로 따져서 인식 불가능한 극비현전의 대상도 존재합니다. 때문에 다양한 의식 가운데 대부분은 미세의식은 비현전입니다. 의식에는 미세하고 거친 다양한 의식이 존재합니다. 거친의식은 드러나기 때문에 현전이 되지만 대부분의 미세의식들은 비현전일 것입니다. 그중에 극비현전일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이런 선상에서 봤을 때 전생은 비현전입니다. 실제 직접지각만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비현전은 알지 못하는 것, 인식에 이르지 못한 것이지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이 이해의 바탕이 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불교 경서에서 어떤 사물이든 원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원인 가운데 구생인(俱生因)과 근취인(近取因)이 있다, 원인이며 결과의 본질이 되는 근취인을 얘기합니다. 외부의 형체가 있는 것에 근취인이 필요하듯이 내면의식에도 근취인이 필요합니다. 의식의 본질인 명료(明了)라는 자성과 물질은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다른 것입니다. 성향이 다른 물질은 성향에 맞는 각 근취인을 가집니다. 따라서 지금 의식의 흐름은 태어난 후의 의식을 이어온 것이고 태어난 후의 의식을 거슬러 가보면 수정란에 심어지는 의식으로 이어집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명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일반인은 제쳐두고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도 입으로는 명료라는 말을 수천 번 말하지만 마음 속으로 명료가 무슨 의미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관심과 체험을 통하지 않고는 알기 어렵습니다. 마음을 대상을 한 지관수행으로 명료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일체종지를 제쳐두고도 먼저 사물을 규명할 때 색(色-물질체)과 식(識-정신체), 불상응행 세 가지 중 심식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명료의 체험 분별을 그친 상태에서 식의 작용이 없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이 상태에서 의식의 본질이 무엇인가 자성을 알고 이와 상응하는 원인이 필요한가 아닌가. 어제 얘기했듯이 뇌로부터 의식이 생겨납니다. 뇌에 의존하죠. 뇌는 의식에 비해 훨씬 거친 물질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과학자가 이런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와 자신의 고통으로 마음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뇌신경이 같답니다. 그때 의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뇌라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입니다. 농담으로 말이죠. 큰 차이가 있지 않나요? 타인의 고통으로 마음이 불편한 것은 우러난 것이지 억지로 일어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타인에 대한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원치 않는 마음으로 저절로 우러난 것뿐만 아니라 근본에 용기가 있습니다. 자신은 고통을 원치 않음에도 고통 받고 있는 것이지요. 뇌가 이것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통의 감정을 느낄 뿐 어떻게 왔는지 뇌의 작용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의식에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루하루 행불행의 삶속에서 이타를 생각하는 마음이 클수록 대담하게 되고 걱정과 마음의 불행이 적습니다. 도움이 됩니다. 필요한 것입니다. 취해야 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원치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원치 않기 때문에 해탈이나 일체지의 지위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생각은 자신에게 도움을 줍니다. 도움을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취하고 버려야할 바가 한 뇌신경에 동시에 의지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모든 의식을 뇌구조로 설명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거친 것은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모든 설명을 해내지 못하는 이러한 뇌에 의해 모든 의식이 생겼다고 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물론 이쪽으로 계속 발전하겠지만 생각해 봐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논란의 하나는 이 세상이 왜 생겼는가? Why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세상의 생성과정 (How)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하면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What이라 해도 설명 가능합니다. 세상이 어떤 것인가 라고 하면 어느 정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지구와 태양, 열, 은하계 따위로 설명할 수 있겠지요. How라 하더라도 설명 가능합니다. 수십억 년 전 태양이 생성되고 그것을 둘러싼 것이 가장자리에 생성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겠지요. 그러나 Why라고 했을 때는 설명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철학이 설명하기 시작하겠지요. 원인 없이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무지한 말이지요. 실제로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머리가 아프니까 그냥 원인 없이 생겼지 않을까라고 하면 그만이지요. 그러면 머리 아프게 사유 분석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원인 없이 생겼다고 하면 이치에 완전히 벗어납니다. 현재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는 것이 시작할 때는 원인 없이 우연히 생겼다고 한다면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지요. 원인에서 생겼다면 어떤 원인에서 생겼는가? 어쩔 수 없이 수론학파가 영원불멸한 원인(常因)에 의해 생겼다고 합니다. 이 또한 불가능한 것이, 변화 없는 원인이 결과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결과가 변한 만큼 원인 또한 변하는 것이지 원인에 변화가 없다면 원인의 결과가 생기지 않는 때와 원인의 결과가 발생한 때를 두기가 힘듭니다. 원인의 작용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영원불멸한 원인에 의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반은 무상하고 반은 영원불멸성인 창조주라는 것을 들고 나온다면?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어 무상한 존재인 것 같기도 하고 항상 계시는 자생적 존재라고 할 때는 영원불멸인 것 같은 존재가 있다고 해도 굉장한 논란거리가 됩니다. 창조주는 어떻게 생겼는가? 어떤 존재인가? 왜 생겼나고 한다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전지전능한 사랑의 주가 우리의 논란거리 속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불교도 입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인정하는 종교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 안에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전지전능한 사랑의 주인이 창조해낸 창조의 결과가 조물주 자신이 답답할 정도로 세상에 여러 복잡한 문제가 많지요. 사랑의 주인 창조주께서 근심하며 ‘내가 창조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만들었다.’ 라고 할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논란이 있지요. 고로 원인 없이 생겼다는 것도 이치에 어긋납니다. 영원불멸의 인에서 생겼다는 것 또한 이치에 어긋납니다. 불멸의 자생적 존재에서 나왔다는 것도 이치에 어긋납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럼 뭔가?


이 세계 즉 기세간이 형성된 것은 이것을 누리는 주체인 유정세간인 중생이 존재하기에 기세간이 형성된 것입니다. 여기서 업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럼 이 세계는 태초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원불멸의 인과 원인 없는 발생으로 조물주를 주장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태초를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처음 어떻게 발생했는가’ 라고 했을 때 조물주가 창조했다든지 영원불멸의 인인에 의해 생겼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태초의 인이 없다고 합니다. 태초의 인이 없다고 하는 것은 태초의 인이 있다고 하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태초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치로써 왜 생겼는가라고 할 때 이러한 가능성 저러한 가능성에서 볼 때 이것이 타당하지 않고 저것이 타당하지 않다. 여기에 타당성이 다소 있다. 이렇게 해서 태초가 없음을 얘기할 때 몇몇은 선뜻 수긍을 못합니다. 만족할런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논란이 적고 더 많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생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예를 들면 전생을 기억하는 이에게 전생은 직접 인식되는 대상(現前)입니다.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직접 알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는 힘듭니다. 꿈을 꿔보지 않은 사람에게 꿈을 설명하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저는 마약에 경험이 없습니다. 마약을 했을 때 어떤 느낌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약의 경험에 대해 아무리 얘기를 해도 그 사람이 경험한 것처럼 알 수는 없습니다. 대충은 알 수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의식의 체험은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경험하지 않은 다른 이들에게 그대로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전생이 있다는 이유를 바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시작 없음을 이유로 드는 것이지 전생이 있다는 이유를 한마디로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 지금까지의 [입보리행론/지혜품]은 불교TV에서 4회에 걸쳐 방영한 '달라이라마의 특별법문'에서 자막으로 소개된 설법내용 전부입니다. 입보리행론의 나머지 법문은 자료를 구하는 대로 다시 옮기겠습니다.


일체 유정의 행복과 해탈을 위하여 보리심을 발하기 위한 수행의 길을 안내하시는 존자님의 입보리행론 법문을 계속 들을 수 있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