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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7. 입보리행론

9. [입보리행론] 제6장 인욕품(2)

[입보리행론] 제6장 인욕품(2)


35  조심성 없이 자신에게조차

      가시 같은 것으로 해를 입히거나

      여인을 얻기 위한 탐착으로

      단식까지 하네.

36  어떤 이는 자살을 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며,

      독과 해로운 음식을 먹고

      박복한 행동으로

      스스로를 해치기도 하네.

37  번뇌의 힘은

      소중한 자신마저 죽이는데

      하물며 타인을 해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네.

38  번뇌로 인해

      자신을 해치는 사람에게

      자비심은 못 낼망정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네.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적, 해칠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나에게 인상만 써도 상대가 ‘나를 싫어해서 나에게 인상을 써는구나!’ 싶어 괜히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가 특별히 해칠 마음 없이 인상을 썼다면 그렇게 보는 내가 틀린 것이지 상대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를 입히는 적으로 여기는 근거가 되는 것은 상대가 분노를 일으켜 해칠 마음을 나에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적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적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근거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미래에 나에게 어떤 표현을 하느냐에 따라, 또는 내 마음이 변하면 가까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적’이라고 여기는 진짜 근거는 상대방에게 있는 분노라는 번뇌입니다. 분노를 일으킴으로써 상대가 나에게 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분노라는 번뇌 때문에 나를 해치는 적이 나를 향해서 분노를 일으킬 때, 그것으로 해를 입게 됩니다. 적이 누구인지 잘 생각해 보면 적의 마음에서 일어난 분노입니다. 분노로 인해서 적의 마음이 변하여 어쩔 수 없이 나에게 해를 가하는 것입니다.


분노라는 번뇌는 어떤 이에게 일어나든지 부정적인 행위를 가져올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무엇인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잘못을 했거나 혹은 자신이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 때, 화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화가 자신을 향해 일어날 때는 자살을 하는 일도 생깁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목숨을 버리는 등,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스스로에게도 이런데 분노에 휩싸여 타인을 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분노라는 자체의 역할이 해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에 분노가 자신에게 일어날 때는 자신을 해치고, 분노가 타인에게 일어날 때 타인을 해칠 것은 볼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화를 내야 할 곳은 분노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분노에 휩싸인, 분노에 휘둘린 사람은 오히려 자비심을 내야 할 대상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같은 수행자는 분노를 자청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번뇌를 원치 않는 이, 더욱이 보리심을 수행하는 이에게는 분노에 휩싸인 상대가 자비심을 발하게 하는 대상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심은 못 낼망정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논서에서는 번뇌가 있는 이와 분노에 차 이야기할 때 분노를 일으키는 자와 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분노와 번뇌로 인한 행위, 이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일어남으로 인해 해를 입히는 것, 해를 입히는 행위는 분노가 한 것입니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쩔 도리 없이 조건에 의해 분노를 일으키고, 분노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는 나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해로운 행위가 생긴 것입니다.


사람은 한 순간 자비의 마음을 낸다면, 나를 향해 사랑의 마음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형제입니다. 알겠습니까? 사람 그 자체가 자신을 해치는 주체라면, 인간이라는 것 그 자체가 본래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생긴 것이라면 자신을 해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나의 형제도 될 수 있고 나의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 편도, 적도 아닐 수 있으니, 사람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나에게 우호적이면 ‘나의 형제’로 여깁니다. 나를 향해 분노를 일으키면 그 사람을 ‘나의 적’으로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분노에 의한 것이지, 사람 자체를 나의 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나쁜 짓을 하면 그 사람의 번뇌가 그렇게 했다는 생각은 못하고 ‘그 사람이 그렇게 했다.’ 며 그 사람에게 맞서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에게 자비심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면 자비심을 낼 수 있습니다. 나를 해친 행위 자체는 번뇌가 한 짓이고, ‘그가 번뇌에 휘둘렸구나!’ ‘불쌍하구나!’ 하면 자비심을 낼 수 있습니다. 나한테 강한 번뇌가 일어날 때 나도 어쩔 수가 없는데, ‘그도 번뇌에 휘둘리고 있구나!’ ‘그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참 안됐구나!’ 하면 자비심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스로의 경우에는 구분을 하기도 합니다. 한 예로 화가 나서 친구에게 나쁜 인상을 지었다, 다음 날 화가 풀리면 “미안하다. 어제 내가 화가 나서 너에게 인상을 썼다.”고 사과하지 않습니까? 이때는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번뇌로 인해 나쁜 인상을 지은 것과 나쁜 인상을 쓴 나, 이 두 가지를 구분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스스로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잘못이 없다. 어제는 내가 화가 나서 나쁜 인상을 지었다.” 며 잘못을 화에게 돌립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우리는 구분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상대인 적에 대해서도 구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나를 해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행위는 막아야 하고, 그런 행위에 대항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행위에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행위를 한 행위자는 자비심을 내야할 대상입니다. 자비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욕의 중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상대방에게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상대를 싫어하지 않는 것이 인욕을 이해하는 중심입니다. 인욕은 상대방이 나쁜 행위를 할 때 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가 근거 없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를 한다면 그것에 맞서야 합니다. 그것에 대항해야 합니다. 인욕수행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만 생각한다면 타인이 나에게 어떤 해를 가한다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별다른 목적이 없다면 말입니다. 다른 저의가 있다면 대항해야 할 것입니다.


보살학에 있어서 “조건에 맞다면 능히 조복하리니..” 나쁜 행위를 하는 이, 많은 중생의 수명에 해가 되는 이, 많은 중생의 행복에 해가 되는 이가 있다면 대응해야 합니다. 대응하지 않는 것은 보살에게 죄가 되는 것입니다. 대응해야 함에 대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결국 행위에 대해서는 때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행위자에 대해서는 오로지 자비심으로 대해야지, 분노로 대해서 안 됩니다. 분노해야 할 대상은 나쁜 행위와 그것을 있게 한 번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를 내어야할 대상은 이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반 상식에서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갈 것입니다. 그렇게 행위자에게 사랑(자애)으로 대하며, 악행에 대해선 대응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사랑을 가져 보십시오. 점차 그 사람의 마음이 변할 것입니다. 그러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친구가 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나를 해치는 행위가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사람을 나쁘게 여겨 언제나 방해하려 한다면 그 상대도 언제나 나를 해치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 인간사로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행위와 사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인간을 완전히 소거해 버리려는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화를 내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39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어리석은 자의 본성이라면

      거기에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으니

      태움이 본성인 불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네.

40  중생의 허물은 일시적인 것,

      중생의 성품은 본래 선하네.

      그러니 화를 내는 것이 옳지 않으니

      허공에 연기 낀 것을 나무라는 것과 같네.


직접적으로 해를 입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고, 왜 화를 내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41  몽둥이에 맞았을 때

      만일 때린 사람에게 화를 낸다면

      그 사람 역시 분노에게 부림을 당한 것이니

      분노에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리라.


몽둥이 같은 것에 맞아 고통이 생겼다면, 이때 우리가 화를 내어야할 대상은 몽둥이입니다. 실제로 고통을 만들어낸 대상은 몽둥이이기 때문입니다. 몽둥이 탓에 고통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몽둥이에게 화를 내지 않고 몽둥이를 휘두른 사람에게 화를 낸다면 그 사람도 분노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때린 것이므로 “분노에게 화를 내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42  내가 이전 중생에게

      해를 입혔네.

      내가 중생에게 해를 끼쳤듯이

      나에게 해가 생기는 것은 마땅하네.


우리의 행복과 불행, 모두 업에 의해서 생긴 것입니다. 업과 과보로 인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자신을 해치는 적을 만난 것과 이것이 원인이 되어 고통이 오는 것도 자신의 업에 의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현재 자신에게 해악이 오는 것은 자신의 업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화를 내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3  적의 무기와 나의 몸,

      이 두 가지 모두 고통의 원인이네.

      적이 무기로 나의 몸을 해친다면

      어떤 것에 화를 낼 것인가?


고통을 주는 원인으로 무기와 몸, 두 가지가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인데, 원인 가운데 하나인 자신의 몸에게는 화를 내지 않고, 상대의 무기에게만 화를 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44  건드리면 참을 수 없는 종기와 같이

      고통으로 가득한 몸을

      애착에 눈이 멀어 자신으로 여기니

      그 해악을 누구에게 화 낼 것인가?


외부의 모든 고통뿐만 아니라 생. 노. 병. 사의 근원이 되는 몸에 스스로 집착하여, ‘내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고통의 뿌리는 업과 번뇌에 이끌리는 나의 육신을 가짐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몸에 해가 생기는 것을 다른 누구에게 화 낼 것인가?


45  어리석은 사람! 고통은 원하지 않으나

      고통의 원인에는 탐착하니

      자신의 허물로 비롯된 해악이거늘

      왜 남을 원망하는가?


나에게 해를 입히는 상대적인 적도 불행을 원치 않고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나 상대의 번뇌인 분노와 또 다른 조건인 ‘나’가 만나, 해치는 행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시킨 것이라고 여기고 화를 내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46  비유하건대 지옥의 사자와

      날카로운 칼 숲과 같이

      자신의 업으로 고통이 생기나니

      어느 누구에게 화를 낼 것인가.


47  내가 지은 업에 의해

      나를 해치는 이들이 생겼네.

      나를 해친 중생이 지옥으로 간다면

      내가 그들을 망친 것이 아닌가!


상대 또한 새로운 업을 지을 수 있습니다. 업과 과보의 미묘한 부분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신다고 합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해악이 오로지 나의 행위에 의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금 마음공부를 할 때에는 실제적인 원인에 대해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자신의 인욕수행의 방법으로, 인욕수행의 완성(인욕바라밀)을 이루기 위해서, 그로 인해 보리심 수행을 위한 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실질적이고도 일반적인 부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자의 몸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딸입니다. 그의 아들 입장에서 보면 어머니가 됩니다. 각각 의지하는 곳에 따라 다양함을 가집니다. 맞는 말입니다. 내 경우에도 한 사람이지만 비구이고 불자이며 티베트인이기도 합니다. 많은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불교 논리학인 인명학의 논서를 보면, 하나의 대상에 대상의 수에 해당하는 만큼의 측면의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한 사람이면서 비구라는 측면과 티베트인의 측면, 불자의 측면, 노장이라는 측면, 이렇게 다양한 측면과 제가 법을 들은 스승 입장에서 보면 제자라는 측면, 이렇게 다양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있습니다.


각각의 측면에서, 이러한 비유처럼 적이 나를 해치는 것이 그 사람의 번뇌 때문에 새로운 업을 지은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나를 해치는 적을 만난 것은 나의 업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적이 나를 해치는 것입니다. 적은 나를 해친 것으로 인해 악업을 지었습니다. 당연히 악도로 떨어질 것입니다.  이 입장에서 보면 적을 악도에 떨어지게 하는 원인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한 것처럼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를 해친 중생이 지옥으로 간다면 내가 그들을 망친 것이 아닌가!”


48  적을 향해 인내한다면

      나의 업은 많이 정화되겠지만

      나로 인해 그들은

      기나긴 고통의 지옥으로 떨어지네.

49  나는 그들에게 해를 입힌 사람이며

      그들은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네.

      그런데 어찌 거꾸로 생각하는가?

      흉악한 마음에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리라.


나의 입장에서. 적이 해칠 때 인욕을 수행한다면 내 인욕수행의 바탕이 됩니다. 당연히 나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입니다! 적이 나에게 입힌 해악은 나의 업으로 인한 것이므로, 도리어 내가 적에게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내가 적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분노할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시킨 것은 나의 업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타를 망치는 것은 ‘나’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화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해를 입힌 사람이며 그들은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네. 그런데 어찌 거꾸로 생각하는가? 흉악한 마음에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리라.” 자신의 잘못을 보지 않고 타인의 잘못만 탓하며 남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타인의 잘못만 탓하고, 화를 낸다면 자신의 업이 시킨 대로 악업을 짓는 것이 됩니다. 그로 인해 ‘내가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닌가?’ 한다면


50  만약, 고통을 주는 적이 내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인욕의 미덕이 있다면 지옥에는 가지 않네.

      그로인해 나는 보호를 받겠지만

      그들은 무엇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겠는가?


상대방의 업 탓에 적이 되긴 했지만 적을 향해 인욕을 할 수 있다면, 인욕수행이 이루어진다면 “생각의 미덕으로 지옥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로인해 나는 보호를 받겠지만” 내가 인욕수행을 하여 번뇌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보호할 때 “그들은 무엇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겠는가?”   적의 해침을 참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해를 입힌 자에게 복이 어떻게 생기겠는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51  오히려 보복을 한다면

      그들을 보호하지도 못하고

      내 수행마저 어긋나니

      나의 인욕은 무너지네.


상대가 나를 해친 것에 보복을 한다면 자신은 물론 상대까지 망치고 모두에게 고통만 올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행도 기웁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자비입니다. 자비를 근본으로 합니다. 그래서 선(善)을 배우기 위한 네 가지 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때린 것. 훈계한 것. 화를 낸 것. 허물을 들춘 것에 보복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수행마저 어긋나니 나의 인욕행은 무너지네.” 하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실제 자신의 몸에 고통을 주는 해악이 생길 때 인욕하는 법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이후에는 타인이 나를 비방하거나 비난하는 것, 말로 인한 해악들에 대해 인욕하는 법에 대해 말씀 하시고 있습니다.


52  마음은 형상이 없으니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없앨 수가 없네.

      정말로 몸을 애착해서 일어난 고통이

      오히려 마음을 해칠 뿐이네.


몽둥이로 몸을 때리면 실제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말로 할 때는 자신의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러나 실제 마음을 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53  모욕과 거친 말, 불쾌한 말들이

      몸에 해를 끼치지 않는데

      마음 그대여!

      어찌 그렇게 화를 내는가?

54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것이

      이생에도 다음 생에도

      나를 해치지 못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가?


직접 해를 입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나 재물을 얻는데 해가 된다면


55  재산을 얻는 것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싫어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네.

      내가 얻은 이 재산은 사라지지만

      죄업은 언제까지나 남을지니.

56  차라리 오늘 죽는 것이

      삿된 삶을 오래 영위 하는 것보다 나으리.

      이처럼 오래 산다 해도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네.


[고귀한 화환]에서 다섯 가지 잘못된 생계(오사명五邪命)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란 첫째, 청정하지 않으면서 청정한 수행자인 척하여 삶을 영위하는 것. 둘째, 아첨하며 삶을 영위하는 것. 셋째, 얻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재물을 찬탄하며 삶을 영위하는 것. 넷째, 협박과 힘으로 재물을 불려 삶을 영위하는 것. 다섯째, 작은 재물로 큰 재물을 바라며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이를 다섯 가지 잘못된 생계라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부와 명예를 위해서 대단한 것처럼 굴면 안 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달라이 라마의 경우, 사람들이 신심을 내거나 공양을 오리도록 하기 위해, 실제로 그렇지도 않은데 대단한 청정비구인 것처럼 구는 것입니다. 한국 비구, 비구니 스님들도 신도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서 자신이 대단한 것처럼 행동하고 이것을 통해 뭔가를 얻었다면 그것을 잘못된 생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입에 발린 소리를 하거나, 거짓으로 상대를 기쁘게 해 재물을 얻는다면 아첨으로 얻은 것이기에 잘못된 생계 가운데 하나에 해당합니다. 또 남의 물건을 칭찬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물건을 보고 ‘정말 좋다.’ ‘나도 갖고 싶다.’ 하는 속셈으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물건을 보고 ‘정말 좋다!’고 할 때 상대방이 “그렇게 좋으시다면 제가 드리지요!”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아닙니다. 필요 없습니다.”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의도적인 칭찬을 통해 다른 사람 물건을 가진다면 잘못된 생계에 해당합니다.


힘으로 빼앗는 것 역시 잘못된 생계입니다. 나는 스승이니 제자가 좋은 것을 바쳐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또한 잘못된 생계에 해당합니다. 군주가 강제로 빼앗는 것 역시도 잘못된 생계입니다. 예를 들어 다람살라에서 날씨가 추워질 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전에 네가 준 가사, 참 따뜻하더라! 그것 정말 좋더라.” 하는 것은 ‘내놓아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얻는 것도 사명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 잘못된 생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삿된 삶을 오래 영위 하는 것보다 나으리.” 아무리 재물이 많이 생기더라도 그릇된 삶이니 일시적으로 안락할지 몰라도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래 산다 해도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네.” 죽음의 고통이라는 것은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죽어야 합니다. 죽을 때, 백만장자든 억만장자든 돈은 은행에 두고 가지, 가져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친한 형제나 친구가 있어도 죽을 때는 두고 가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몸이라 해도 두고 가야 합니다.


57  꿈속에서

      백 년간의 행복을 누리고 깨어났건

      순간의 행복을 누리고

      깨어났건

58  깨어난 뒤,

      행복은 다시 되돌릴 수 없네.

      삶이 길거나 짧거나

      죽음 앞에선 꿈과 같으리.

59  많은 부를 얻어

      오랫동안 행복을 누렸다 해도

      도둑맞은 것처럼

      빈 몸 빈손으로 가야 하네.

60  만약 재물을 모은 후

      죄를 없애는 복덕을 짓겠다고 하면서

      재물을 벌면서 화를 낸다면

      오히려 죄가 되지 않겠는가?


“만약 재물을 모은 후 죄를 없애는 복덕을 짓겠다고 하면서” 사명으로 얻은 재물을 비롯해 많은 재물을 얻어 오래 살 수 있고, 그것으로 복을 짓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재물을 벌면서 화를 낸다면 오히려 죄가 되지 않겠는가?”


61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내가 살아왔는데

      만일 그것이 흩어진다면

      악행만 저지른 것이니

      이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62  만일, 서로 신뢰가 떨어져

      내 험담을 할 때, 화를 낸다면

      다른 사람을 험담할 때

      그대는 왜 화를 내지 않는가?


“만일 신뢰가 떨어져 내 험담을 할 때, 화를 낸다면” 자신에게 나쁜 소문이 돌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갖는 것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화를 낸다면 “다른 사람을 험담할 때 그대는 왜 화를 내지 않는가?” 곱지 않은 말에 화를 낸다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곱지 않은 말에도 화를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이 나에 관해 곱지 않은 말을 한다고 화를 낸다면 말입니다.


63  믿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라며

      불신을 그대가 참을 수 있다면

      번뇌에서 비롯된 곱지 않은 말들을

      어찌 참지 못하는가?


믿지 않은 것과 남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이런 원인에서 생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않는 원인이 있다면 그런 원인도 원인에 의한 것입니다. “번뇌에서 비롯된 곱지 않는 말들을 어찌 참지 못하는가?”


64  불상과 불탑,

      정법을 비방하고 훼손해도

      내가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네.

      그것은 부처님께 해가 되지 않네.

65  스승과 형제와 같은 가까운 이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 역시

      이전의 업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아

      분노를 없애야 하네.


 이전의 업과 지금의 조건으로 인해 해침을 당하는 것으로 알아, 해를 입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66  몸을 가진 중생은

      다른 중생과 무정물 둘 다로부터 해를 입는데

      왜 중생에게만 화를 내는가?

      그러므로 해악을 인내할지니.

67  한 사람은 무지 때문에 죄를 짓고

      이에 다른 사람이 무지로 인해 화를 낸다면,

      누구는 허물이 없다 하고

      누구는 허물이 있다 할 것인가?

68  다른 사람이 나를 해치게끔 하는

      그런 업을 내가 왜 지었던가?

      모든 현상이 지은 업에 의한 것이라면

      내가 지은 업에 어찌하여 화를 내는가?


업으로 인해 생긴 것에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69  이제 알았으니

      반드시 모두가 자애로운 마음을 갖도록

      나는 복 쌓는데

      마음을 쓰리라.


번뇌에 이끌리지 않고 인욕수행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70  예로 집을 태우는 불이

      다른 집으로 번진다면

      지푸라기 같이 불길을 번지게 하는 것들을

      끌어내는 것이 옳네.

71  어떤 것에 집착하여 (재물과 명예와 같은 것에 집착하여)

      분노의 불길이 번질 때면

      복덕의 보배가 불타지 않도록

      집착의 근원을 없애야 하네.

72  사형선고를 받은 이가 손이 잘리는 것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다면 다행스런 일.

      인간으로 살면서 겪는 고통으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73  지금의 이 고통 정도도

      내가 인내하지 못한다면

      지옥 고통의 원인인 성냄은

      어찌 버리지 못한단 말인가!


“지금의 이 고통 정도도 내가 인내하지 못한다면” 남이 나의 몸을 해하거나 마음을 불행하게 하는 고통 정도도 인내하지 못한다면 “지옥 고통의 원인인 성냄은 어찌 버리지 못한단 말인가?” 번뇌에 이끌리어 작은 분노도 참지 못하고 분노에 휩싸인다면 그로 인해 다시 악업을 짓고 그 후에 악도로 가는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성냄은 어찌 버리지 못한단 말인가!”


74  욕심 때문에 불타는 지옥을

      수 천 번 경험했지만

      나는 자신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선행을 하지 않았네.


       법을 위한 고행에 관한 말씀입니다.

75  이타행을 위한 고행에는 어떤 손해도 없으며

      깨달음 또한 이룰 수 있으니

      중생의 해를 없애 줄 수 있는 고행을

      오직 기뻐하며 행해야 마땅하리라.


자신의 적이 타인을 칭찬하거나, 적이 잘 되었을 때 싫어하지 않고 인욕수행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76  다른 사람이 적의 덕을 칭찬하며

      기뻐한다면

      마음 그대여, 그것을 찬탄하며

      왜 좋아하지 못하는가?


나의 적을 타인이 칭찬할 때, 질투하며 싫어하지 말고 ‘맞는 말이다.’ 며 응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타당한 칭찬을 할 때는 ‘그것은 사실이다. 실제 그렇다.’ 며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음 그대여, 그것을 찬탄하며 왜 좋아하지 못하는가?” 칭찬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즐거워진다면 자신에게 이익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적을 타인이 칭찬하는 것에 대해 ‘그렇다.’ 며 수희찬탄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77  그대가 좋아하는 행복은

      즐거움의 근원이지 악한 것은 아니며

      성현들이 좋아하시며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최고의 방법이기도 하네.


“그대가 좋아하는 행복은 즐거움의 근원이지 악한 것은 아니며” 행복의 결과를 낳고, 질투하지 않고, 참됨으로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결과를 가져와서 죄가 없고, 허물이 없는 덕을 갖춘 이들을 불보살들께서 좋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남이 볼 때도, 다른 사람이 나의 적의 덕을 칭찬할 때 ‘그렇다.’ 고 인정한다면, 나의 바르고 열린 생각을 좋아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좋아할 것입니다.


78  다른 사람에게는 행복해진다고 말하면서

      그대 자신은 오히려 원치 않는다면

      마치 품삯이나 보시를 거절하는 것과 같이

      이승과 저승에서도 행복이 사라지네.


자신의 적을 다른 사람이 칭찬할 때, 칭찬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마치 품삯이나 보시를 거절하는 것과 같이 이승과 저승에서도 행복이 사라지네.”


79  나의 덕을 칭찬할 때

      그 사람까지도 즐거워하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의 덕을 칭찬할 때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옳지 않네.


다른 사람이 “나의 덕을 칭찬할 때”는 내가 기뻐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까지 행복하기를 바라네.” 자신의 적이 지닌 덕을 “다른 사람이 칭찬할 때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옳지 않네.” 하신 것입니다.


80  일체 중생을 위해

      깨달으려 하면서

      중생 스스로가 행복을 구하는 것에

      어찌 시기하는가? 

81  모든 중생이

      삼계의 귀의처인 부처가 되길 바란다 하면서

      그들이 받는 작은 존경을 보고서

      어찌 그렇게 싫어하는가?

82  내가 돌보고

      베풀어야 할 중생이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왜 도리어 화를 내는가?


모든 중생을 위하겠다는 염원을 가진 사람이 중생의 작은 안락에 질투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중생의 고통을 없애고, 행복을 내가 이루겠다는 책임을 지겠다고 했기에 중생이 작은 안락이라도 가진다면 중생의 행복에 대한 책무를 지고 있는 나로서는 책무가 가벼워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희찬탄 해야 하는 것이지 “도리어 화를 내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83  중생이 행복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으면서

      그들이 깨닫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 얻는 이익에 화를 낸다면

      보리심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적에게 작은 행복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자신의 적을 향해 보리를 원하는 것은 그저 말뿐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84  만일 보시자가 재물을 적에게 주든

      스스로 갖고 있든

      그것이 그대 것이 아닌데

      (적에게) 주든 주지 않든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85  복덕과 신심 같은

      자신의 공덕을 왜 버리는지?

      공덕의 씨앗은 버리는 자신에게는

      왜 화를 내지 않는지 말해보라.


재물이 정말 좋다면 재물이 생기게 하는 원인을 지녀야 합니다. 질투나 분노가 없는 인욕수행이야말로 모든 재물이 들어오는 원인인데 그런 원인을 지니지 않는 “자신에게는 왜 화를 내지 않는지 말해 보라.” 하신 것입니다.


86  그대는 스스로 지은 죄악에

      괴로워하기는커녕

      다른 사람이 지은 복덕에

      시기 질투하는가?

87  만일, 그대가 적을 미워하여 그가 불행해진다면

      그대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대의 저주만으로는

      그를 해칠 수 없네.

88  그대의 바람대로 그에게 고통이 생겼다고

      그대가 좋아할 까닭이 있는가?

      만약 ‘통쾌하다.’ 한다면

      나와 남이 파멸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89  번뇌의 어부가 던진 낚시 바늘은

      흉악하고 날카롭네.

      그 바늘에 꿰어 지옥 가마솥으로 들어가면

      지옥사자가 나를 삶을 것은 분명한 일.


여기서부터 자신은 물론 형제나 친구의 재물이나 명예를 훼손시키면 싫어하는데, 그런 사람을 인욕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90  칭찬을 듣고, 명성을 얻는다 해서

      복덕이 되는 것은 아니며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무병장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몸이 편안해지는 것 또한 아니네.

91  진정 자신에게 무엇이 이익인지 안다면

      그런 일에 무슨 가치를 두겠는가?

      다만 내가 즐거움을 바라기 때문이라면

      차라리 도박이나 술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네.

92  명예를 위해 재산을 탕진하고

      영웅이란 이름을 얻기 위해 나 자신까지 죽인다면

      세상의 명성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고 나면 누구에게 이득이 되겠는가?

93  모래성이 무너질 때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울던가?

      그처럼 칭찬과 명예가 사라질 때

      우리 마음은 어린 아이와 같아지네.

94  소리 그 자체는 마음이 없기에

      나를 칭찬할 수 없네.

      ‘나를 칭송하는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이

       내가 기뻐하는 이유라 한다면.


        여기서 하나의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95  나나 남이나 할 것 없이

      다른 사람의 기쁨이 나에게 무슨 득이 될까?

      기쁨과 행복은 칭찬하는 사람의 몫이기에

      내가 얻을 것은 없네.


자타를 막론하고, 칭찬하는 사람이 누리는 기쁨은 자신에게 아무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6  그의 행복에서 나의 행복을 찾는다면

      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이 해야 할지니.

      이처럼 다른 사람의 기쁨이 내 행복이 된다면

      나도 행복하지 않겠는가?


“그의 행복” 즉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서 나의 행복을 찾는다면 “모든 사람에게도 그와 같이 해야 할지니.” 적을 칭찬하는 사람 역시 나의 적을 칭찬할 때, 기쁨을 누리기에 좋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97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는 것으로

      스스로 기뻐한다면

      그것 또한 옳지 않으니.

      우치한 행동일 뿐이네.


내가 칭찬 받고, 명예를 얻는 일에 경계하지 않으면 자신의 번뇌가 커질 수 있는 위험이 따릅니다. 그래서 이것에 허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98  타인의 칭찬은 나를 미혹케 하고

      염리심을 사라지게 하며

      덕이 있는 사람을 질투하게 하고

      원만함도 사라지게 하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은 자만이나 질투, 경쟁심 같은 감정이 어쩌면 적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이 나고, 재산이 많아지고, 유명해지면, 자만과 질투. 경쟁심이 더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탐진(貪瞋)의 생각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일반인들도 탐진이 있기는 하지만 아마 덜할 것입니다. 그래서 “원만함도 사라지게 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99  내가 칭찬 받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내가 악도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100  나는 해탈에 뜻을 두었으니

        부와 존경에 구속될 필요가 없네.

        어떤 사람이 이런 속박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려 하는데

        어찌 그에게 분노를 일으키랴.

101  ‘윤회’ 라는 고통의 집으로 들어서려는 나에게

        부처님의 가피와 같이,

        막아서는 문이 되니

        내 어찌 거기에 분노를 일으키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아만과 질투, 경쟁심이 생기는 위험한 순간, 적의 비방과 비난은 우리 마음을 가라앉히게 합니다. 아만과 교만. 질투. 경쟁심.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 등을 없앨 수 있는 적의 비방과 비난은 마치 부처님의 가피와 같은 것이며, 그래서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적은 내가 공덕을 쌓는데 방해가 되고, 내가 수행을 하고 복을 짓는 것에는 방해를 하기 때문에 화를 낸다면 그 또한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102  내가 공덕을 쌓는데 방해가 되기에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네.

        인욕만한 고행이 없으니

         거기에 내가 머물러야 하지 않겠는가?


분노하지 않고 인욕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나은 수행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을 지을 수 있는 기회는 없습니다. 보리심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필요한 수행입니다.


103  만일 내 허물로

        인내하지 못한다면

        공덕을 지을 기회를

        스스로가 훼방하는 것이네.


적은 인욕의 공덕을 짓게 하는 주된 요인입니다. 그런 적에게 화를 내는 것은 큰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훼방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적이 인욕 공덕의 요인이 될 수 있는가?


104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도 멸하네.

        이것이(원수) 있으므로 저것(인내)가 있는 것인데

        어떻게 원수가 방해라 하는가?


결과는 원인이 없으면 생기지 않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입니다. 적을 만나 분노가 일어날 때 인욕수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나를 해치는 적이 있어 내가 인욕수행을 할 수 있으며, 적은 인욕의 바탕이자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적은 나의 인욕수행의 원인이기 때문에 ‘인욕수행의 좋은 조건이 생겼으니 정말 좋은 일이다.’ ‘큰 은혜’로 여겨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원수가 방해라 하는가?”


105  (공양) 때에 맞춰 나타난 걸인이

        보시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네.

        출가의 장애 요인들이

        출가를 방해 할 수는 없네.

106  세상에 ‘구걸하는 사람’은 많아 보시할 기회는 많지만

        해를 입히는 자는 드물어 인욕할 기회는 적네.

        이처럼 내가 남을 해치지 않으면

        그도 나를 해치지 않네.

107  별 어려움 없이

        집안에 앉아 보물을 얻은 것처럼

        보살행에 도움이 되는

        적을 나는 좋아하리라.


 보살행 가운데 뛰어난 수행인 인욕수행에 도움이 되고 바탕이 되는 적이 오늘 여기 있으니, 인욕수행의 밑거름을 얻은 것입니다. 적은 인욕수행의 선지식이며, 친구로 여겨 좋아해야할 대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욕수행에 있어 적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108  적을 통해 내가 인욕을 성취했다면

        인내의 결과를

        적에게 먼저 보답해야 하니

        그가 인욕의 씨앗이기 때문이네.


보리심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인욕수행은 필수요건입니다. 보리심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분노’ 라는 적은 가장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 라는 적을 바로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인욕수행입니다. 이런 인욕수행은 자신을 화나게 하는 자신의 적과 자신이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인내의 결과를”, 좋은 결과를 적에게 먼저 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인욕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109  적이 나에게 인욕을 성취하게 하려는 의도가 없었기에

        공양을 올릴 대상이 아니라 한다면

        깨달음의 씨앗이 되는

        정법에는 어찌하여 공양을 올리는가?


‘적은 나를 해치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나의 인욕수행을 증장시키기 위해 나를 해친 것이 아니다. 적은 나로 하여금 인내를 성취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으므로 공양을 올릴만한 대상이 아니다.’ 라고 한다면 “깨달음의 씨앗이 되는 정법에는 어찌하여 공양을 올리는가?” 만약 나에게 도움을 주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공경할 까닭이 없다고 한다면 정법과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멸제滅諦)나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도제道諦), 역시 우리를 돕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멸제나 공을 실제 체득한 지혜 그 자체가 우리를 돕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관점에서 본다면 “깨달음의 씨앗이 되는 정법에는 어찌하여 공양을 올리는가.” 하고 반문을 하신 것입니다.


110  적은 나를 해칠 의도가 있으므로

        공양을 올릴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의사처럼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서

        내가 인욕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정법이 나에게 도움을 주려는 의도도 없지만 해칠 의도도 없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정법은 공양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적은 나를 해치려 하기 때문에 “공양을 올릴 곳이 아니라고 한다면 의사처럼 도움만 주는 사람에게서 내가 안욕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해치려는 마음이 있기에 우리가 상대를 적으로 여기지, 해치려는 마음이 없으면 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인욕수행은 오로지 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여래를 향해서 인욕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보살을 통해 인욕수행을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선지식이나 스승을 통해서 인욕수행을 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부모. 형제를 통해 인욕수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인욕수행을 가능하게 하는가? 누가 인욕수행의 기회를 주는가? 오직 적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처럼 도움만 주는 사람에게서 내가 인욕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하신 것입니다.


111  큰 분노에서 인욕이 생기나니,

        적은 인욕의 씨앗이므로

        정법처럼

        공양을 받을만하네.


보리심을 새롭게 일으키고, 이미 일으킨 보리심을 기울지 않고 더욱더 증장하기 위해서 인욕수행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인욕수행은 중생이 그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며, 뿐만 아니라 자비심 수행 역시 중생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불쌍한 중생을 향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자비가 우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자애심이라는 것도 중생이라는 대상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타인을 해치려는 동기를 없애는 것도 수행의 바탕인 중생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불선업을 끊는 계율 역시 수행의 바탕인 중생을 위하는 마음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뛰어난 태어남의 장수, 육신의 안락과 무병도 중생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입보리행론]에 보면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고통과 온전히 바꾸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룰 수 없고 윤회세계에서도 안락이 없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윤회하는 동안의 모든 원만구족이 타인을 귀중히 여기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윤회를 하더라도 안락과 즐거움, 모든 원만구족이 중생에게서 비롯되며, 해탈의 지위를 얻는 것 역시 중생에 의해 오는 것이며, 일체지를 증득하는 성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중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112  중생심이 곧 부처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네.

        중생을 기쁘게 함으로써

        완전한 피안에 이를 수 있네.


일체지, 성불의 지위를 얻기 위해 두 가지 공덕을 쌓기 위한 요인은 위로 부처님과 아래로 중생입니다. 이들에 의해서 두 가지의 자량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13  중생과 부처로 통해

        불법을 성취하는 것은 같은데

        부처님을 존경하듯이

        중생들을 왜 존경하지 않는가?

114  생각의 공덕은 다르지만

        그 열매는 같네.

        중생에게도 공덕이 있으니

        동등하네.


부처님과 중생이 같다고 한 것은 일체지를 성취하는 원인으로써 같다는 것입니다. 일체지를 성취하도록 하는 은혜에서 본다면 부처님과 중생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덕에 있어서 부처님과 중생이 같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일체지, 성불의 지위에 이르게 하기에 “중생에게도 공덕이 있으며 그것은 동등하다.” 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15  자애심으로 중생에게 공양을 하는 것은

        중생의 덕이며

        부처님을 믿는 것은

        부처님의 덕이네.

116  부처가 되는 것은

        부처나 중생이나 같다고 할 수 있네.

        그러나 부처님의 무한한 공덕의 바다는

        같을 수 없네.

117  무량한 부처님의 공덕을

        한 부분만이라도

        여러 사람에게서 본다면

        그에게 공양을 하기 위해 삼계를 다 바쳐도 부족하리라.

118  수승한 불법의 한 부분이라도

        누군가가 갖추고 있다면

        그 공덕만으로도

        내가 공양을 올리는 것은 마땅할지니.


중생을 싫어하고 존경하지 않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부처님의 제자에게 귀의처는 부처님과 보살님입니다. 마음 깊이 의지하는 부처님과 보살님께 진정 귀의한다면, 불보살이 자신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중생을 천대하고, 중생에게 화를 내고 무시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요?

부처님을 믿고 따르면서 다른 한편으로 부처님께서 당신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중생을 우리가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면 부처님께 제대로 귀의하지 않는 셈입니다. 친구가 있다고 합시다. 잠깐만, 여러분이 잘 드시는 야채가 뭐지요? 여러분이 드시는 신 음식 있지 않습니까? 김치! 친구가 신김치를 싫어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친구를 초대해 놓고 신김치만 먹게 한다면 그것은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친구를 초대한 날에는 평소 자신이 신김치를 좋아하더라도 친구가 신김치를 싫어한다면 다른 것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통의 친구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하물며 둘도 없이 좋은 친구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더없이 좋은 친구이자 의지처이자 귀의처입니다. 그런 분의 뜻에 따르지 않고, 부처님께서 더없이 중하게 여기는 중생을 우리가 업신여기고, 속이고,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은 바로 부처님을 무시하는 짓입니다. 자신의 귀의처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119  사심 없는 진실한 이웃이 되어 주시고

        한량없는 도움을 주시는 부처님께

        중생을 기쁘게 하는 것 외에

        어떤 것으로 보답을 할 수 있겠는가?

120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고

        무간지옥으로 들어가신 그 은혜에 보답하려면

        비록 중생이 큰 해를 입힌다 해도

        그들을 오로지 도와야 하리라.


모든 중생이 설사 나에게 큰 해를 입힌다 하더라도 보복하지도 말고, 분노하지도 말고 오로지 그들을 깊이 사랑해야할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21  나의 본존이신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해 자신도 버리셨는데

        나는 어찌 어리석게 자만에 빠져

        중생의 종이 되지 못하는가?

122  중생이 행복하면 부처님께서 기뻐하시고

        중생을 해치면 부처님께서 슬퍼하시네!

        중생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중생을 해치는 것이 곧 부처님을 해치는 것이네.

123  전신이 불타고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만약 중생에게 해를 끼친다면

        대자대비하신 분께 기쁨을 드릴 방법이 없네.

124  내가 중생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대자대비하신 분께서 싫어하시는 일이네.

        그 모든 죄악, 하나하나 오늘 참회하오니

        당신을 슬프게 한 저를 용서 하소서.

125  여래를 기쁘게 하기 위해

        오늘부터 결단코 ‘세상의 종’이 되리니.

        수많은 중생이 나를 때리고, 죽인다 해도 보복하지 않아

        세상의 보호자를 기쁘게 하리라.


누가 내 머리를 치거나 때린다 해도, 심지어 죽인다 해도 ‘나’라는 생각을 없애고, 다스려서 “보복하지 않아 세상의 보호자를 기쁘게 하리라.”


126  대자대비하신 분께서 모든 중생을

        한 치의 의심 없이 자신과 같이 여기시니

        그런 중생을

        내 어찌 존경하지 않으리.


“대자대비하신 분께서는 모든 중생을” 자신으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127  인욕수행만이 여래를 기쁘게 하네.

        자신의 바른 뜻을 성취하는 것도 인욕 수행이라네.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것도 이것이라네.

        그러므로 나는 항상 인욕 수행을 하리라.


항상 중생을 해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중생을 오로지 사랑하고 존중해야할 대상으로 여겨야 합니다. 게쉬께서는 “내가 어떤 사람과 있든 자신을 가장 낮은 사람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에게 진정 사랑과 자비로 모든 것을 베풀게 하소서.” 하신 것처럼 항상 중생을 귀의처로 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28  예로 왕의 몇몇 신하들이

        백성을 괴롭힌다 해도

        긴 안목을 가진 이는

        힘이 있어도 맞서지 않는다네.

129  왜냐하면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왕의 권력과 왕의 신하들이 호위하기 때문이네.

        이런 것처럼 사소한 해를 끼치는 하찮은 사람들도

        무시하지 말아야 하니.

130  그것은 (중생을 해치는 내 뒤에) 지옥의 사자 있으며

        (중생 뒤에는) 대자대비하신 불보살이 계시기 때문이네.

        백성이 흉포한 왕을 조심하듯이

        중생을 위해야 하네.

131  왕을 분노케 해도

        백성은 고통을 당하는데

        중생을 해친 과보로 겪어야할 고통을

        지옥의 고통에 견주겠는가?

132  아무리 왕을 기쁘게 해 부귀를 얻는다 해도

        중생을 이롭게 해서

        얻게 될

        부처의 경지에 견줄 수 없네.


        이렇게 중생을 오로지 사랑으로 존중하고 보살핀다면

133  중생을 기쁘게 해서 얻을,

        ‘미래의 부처’는 제쳐 두고라도

        이생에서 얻을 부와 명성, 행복을

        어찌 보지 못하는가?

134  윤회하는 존재는 인내의 결과로

        아름다움과 명성과

        무병장수와

        전륜성왕의 복락을 얻네.


여기까지 6장이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