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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7. 입보리행론

8.[입보리행론] 제6장 인욕품(1)

[입보리행론] 제6장 인욕품(1)

 

1  천 겁 동안 쌓은 보시와

    부처님께 올린 공양,

    그 모든 선행이

    한 순간의 분노로 무너지네.


백 생, 천 생 동안 쌓은 선행, 보시로 인해 생긴 선행과 지계로 인해 생긴 선행을 중심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입중론]*에 보면 보시와 지계에서 비롯된 백 생의 선업과 수행을 통해 얻은 선업은 탐욕의 번뇌를 줄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입중론]에서는 ‘백 생’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천 생’이라 했습니다. ‘백 생’이라 하신 연유는 보살이 보살에게 화를 내면 백 생의 공덕이 사라지기 때문이고, ‘천 생’이라 하신 것은 보살이 아닌 이가 화를 내면 천생의 선업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모든 선행이 한순간의 분노로 무너지네.” 아주 짧은 시간에 낸 작은 분노라 할지라도 백 생, 천생에 쌓은 선행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2  분노보다 더한 악은 없고

    인욕보다 더한 고행은 없네.

    그러므로 진지하게

    모든 방법으로 인욕을 수행할지니.


여러 종류의 악과 불선이 있기는 하지만 선을 없애는데 있어, 분노만한 것이 없기에 “분노보다 더한 악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로 “인욕보다 더한 고행은 없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인욕수행이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방법으로 인욕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인욕의 이로움을 기억하고 분노의 해악을 기억할 수 있으면 분노를 대치할 수 있는 인욕수행을 좋아할 것이고 인욕수행을 거듭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해악과 인욕의 이익에 대해 늘 생각해야 합니다.


3  분노의 고통으로 가득하면

    마음의 평온은 사라지고

    기쁨과 안락을 얻지 못하니

    잠도 오지 않고 불안해지네.


분노가 강하게 일어나면 마음의 평온은 사라집니다. “분노의 고통”이 생길 것입니다. 분노의 흐름이 계속될 때 마음은 불안하기 때문에 평화는 깨집니다. 분노의 고통이 생길 때 평온함과 여유로 분노를 바로 없앨 수 없습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음의 평온은 사라지고” 분노가 강하게 일어날 때는 기쁨도 사라지고, 마음에 행복도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하루 이틀을 지나 일주일 이상 계속된다면 대개는 식음을 전폐할 것입니다. 당연히 건강도 나빠질 것입니다. 마음의 불행 때문에 몸까지 불편해 지는 것입니다. “잠도 오지 않고” 말입니다. 그래서 “기쁨과 안락을 얻지 못하니 잠도 오지 않고 불안해지네.”


불안하고 분노에 휩싸이면 안절부절 못합니다. 화를 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 화를 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화가 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화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화를 내는 순간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습니다. 화가 안 난 상태에서 스스로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것처럼 분노로 인해 평정을 잃습니다. 평소 고운 사람도 화를 낼 때에는 전혀 딴사람이 됩니다. 화가 날 때, 미친 사람처럼 굴기도 합니다. 머리로 벽을 치거나, 극단적인 경우,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분노가 가정의 불화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분노는 국가 간에 전쟁도 일으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분노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다.


분노 때문에 다양한 폭력이 발생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이나 방법만으로 폭력과 비폭력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동기에 의해 구분을 해야 합니다. 분노가 동기가 되었다면, 겉으로 드러난 표현이나 방법이 부드럽다 해도 실질적으로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도움을 주기 위함이 동기가 되었다면 겉으로 드러난 표현과 방법이 다소 거칠다 해도 비폭력이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폭력과 비폭력을 이야기할 때 그 동기가 무엇인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비심에서 비롯된 행위는 비폭력행위일 것입니다. 분노에서 비롯된 행위는 폭력행위가 될 것입니다. 분노는 자신은 물론 남까지 망칩니다. 일시적으로 불행할 뿐만 아니라 궁극에는 고통을 불러옵니다.


* 입중론(入中論)

귀류논증 중관파의 거장 챤드라키르티(월칭月稱, 600~650년 경)의 저술. [입중론]의 구성은 [십지경]의 형태를 띠고 보살의 발심을 10단계로 나누어 10장으로 하고, 마지막으로 보살지의 공덕과 불지의 공덕을 설하는 2장이 추가되어 전체 12장으로 되어있다. 그 내용은 주석문이 아닌 독자적인 저술로 공사상에 입각해서 보살행을 설명하고 있다. [입중론]의 중심이 되는 부분은 제6장 제6발심현전지(發心現前地)이다. 6장에서 챤드라키르티는 반야바라밀의 수행을 강조하고, 나아가 중관학파의 기본적인 주장인 일체법무자성공(一切法無自性空)의 입장에 입각해서, 대립되는 여러 학파. 유식학파. 바이쉐시카파, 상키야파, 베단다파, 순세론 등을 비판한다. 중관파인 자립논증파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하면서 스스로 중관파 논사로서의 입장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입중론]과 그 주석서 [입중론주]는 현재 티베트어 번역본만 남아있다. 


4  어떤 이가 재물과 명예로

    은혜를 입었다 해도

    그 주인이 화를 낼 때에는

    대들고, 죽이려고 하네.

5  분노는 친한 이들조차 싫어하네.

    베풂으로 회유해 보려 하지만 외면하네.

    화를 내어 행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네.

6  분노라는 원수는

    이렇게 고통을 주니.

    주의하여 화를 내지 않는다면

    이생에도 다음 생에도 행복할 것이네.


어떤 것을 적이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을 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적이라 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부의 적이 나를 해친다 해도 내 마음이 평온하다면 나를 해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적을 향해 자비수행을 하거나 인욕을 수행할 수 있다면, 적의 공격이 오히려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외부의 적이 갖은 방법으로 괴롭혀도 내면의 마음까지 괴롭힐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평화를 깨트리는 것이 누군가 하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번뇌입니다. 번뇌라는 이 적이 일어날 때, 마음의 평온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형제나 친구, 아무리 친한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분노가 일어나면, 그 즉시 마음의 평화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반대로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적을 향해 인욕과 자비와 사랑을 지닌다면 아무리 외부의 적이 해를 입힌다 해도 마음의 평화를 깨트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마음의 평화를 깨트리는 주범은 바로 번뇌라는 적입니다. 번뇌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내면의 적인 것입니다. 대개 적이 해를 입힐 때 그를 향해 분노합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바로 우리 마음의 평온은 사라지게 됩니다. 외부의 적이 우리 자신의 평화를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음의 평화를 깨는 진짜 적은 우리 안에 있는 번뇌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집착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착이 강하게 일어나면 마음의 평화는 무너집니다.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탐욕과 분노 둘 다 평화를 깨는 적입니다. 우리는 분노가 자신을 도와주는 것처럼 느낍니다. 부당한 행위를 목격할 때 분노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은 마치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분노가 치솟을 때 대담해지기도 합니다. 대담해지지 않던가요? 평소 얌전하던 사람도 화가 나면 붉으락푸르락합니다. 얌전한 사람도 말입니다. 이렇게 분노는 ‘없던 용기’마저도 불어넣어 줍니다. 마치 분노가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 같은 착각마저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는 것입니다.


집착이 생길 때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집착이라는 것은 마치 가까운 사람이 베푸는 호의처럼 느낍니다. 심지어 친구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탐. 진이 우리를 속이는 방식이 이런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해가 되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것 같고, 친구 같은 모습을 하고는 우리를 속입니다. 잘 살펴보면 우리 마음을 불행하게 하고, 마음의 평화를 잃게 하는 주범은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수행자의 적은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적은 자신 안에 있습니다. 분노의 해악을 알고, 분노를 원하지 않는 마음이 생길 때 인욕수행이 가능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의하여 화를 내지 않는다면 이생에도 다음생에도 행복할 것이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입중론]에서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이에게 보복하는 것으로 이전에 내가 입은 해를 어찌 없앨 수 있는가?” 하셨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해코지를 할 때, 해코지를 당하는 것이 분해 다시 화를 냅니다. 이전에 내가 입은 해코지는 이미 당한 것이기에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화를 냅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이전에 해코지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화를 낸다고 해서 이전에 입은 해코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해코지를 당했습니다. 해코지를 당해, 고통에 휩싸여 있는 상태에서 화까지 낸다면 마음의 불행은 더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불행한 상태에서 보복까지 한다면, 상대의 해악까지 다시 되풀이될 것입니다. 더 나쁜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이미 입은 해에 분노하지 않고, 사랑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마음이 불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욕수행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질 뿐만 아니라 점차 마음이 변해, 어쩌면 전에 해코지를 했던 사람이 가까운 관계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희망도 있습니다. 나에게 해코지한 것에 화를 내면서 보복한다면 계속 적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희망 같은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입중론]의 이 구절은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해코지를 하는 이에게 보복하는 것으로 이전에 내가 입은 해를 어찌 없앨 수 있는가?” 이생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고, 다음 생에도 화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입중론]에서 “추한 모습으로 성인이 아님을 보이고, 이치와 이치에 맞지 않음을 아는 이성을 잃었으니 참지 않음은 악도에 떨어지게 하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를 내면 ‘추한 모습’으로 변합니다. 예쁘고 잘생긴 얼굴이라 해도 화난 얼굴은 추합니다. 눈을 부릅뜨고, 거칠고 표독스런 표정을 지으면 아무리 인물이 좋아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추한 모습으로 성인이 아님을 보이고”라 하신 것 같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인상을 쓰고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 나옵니다. 심하면 싸움도 합니다. “추한 모습으로 성인이 아님을 보이고, 이치에 맞고 맞지 않는 것을 아는 이성을 잃으니” 진짜 그렇습니다. 화가 나면 이치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즉 타당한 것과 타당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분노에 휩싸이면 어떤 것이 이치에 맞는지, 어떤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치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아는 이성을 잃게 되니”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합니다. 분노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살인을 하고 싸움을 합니다. 분노 때문에 18가지 악한 행위를 저지릅니다. 그 결과, 악도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뜻하는 바가 많습니다.   


7  원하지 않는 것을 시키고

    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서 분노가 생기네.

    마음의 불만을 먹이 삼아 분노를 키워

    결국 나를 삼키네.

8  이런 나의 적, 분노의 먹이를

    모두 없애야 하리.

    나를 해치는 이 적보다

    더 큰 적은 없네.

9  어떤 일이 닥쳐도

    흔연한 마음만은 잃지 말지니

    흔연해서 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모든 선행은 시드네.

10  만약 바꿀 수 있다면

      싫어할 것이 무엇이며

      만약 바꿀 수 없다면

      싫어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화를 내지 않는 방법으로, ‘화를 내지 않도록..’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원인은 불편한 마음 때문입니다. 편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가 화를 불러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를 불러오는 원인인 불편한 마음을 없애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불편한 마음’의 상태가 되는 조건들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과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이 해를 입는 것’, ‘자신의 적에게 도움이 되거나 잘되는 것’ 등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별것도 아닌 것에 화를 냅니다. 그래서 ‘불편한 마음’이라는 원인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를 해치는 이 적보다 더 큰 적은 없네.” 나를 해치는 일반적인 적은 나에게는 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자신의 형제나 친구를 돌보는 선량한 면을 갖추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분노라는 적은 생기는 순간부터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행복을 무너뜨리는 일만 할 뿐입니다. 분노 그 자체가 가지는 유익함이나 긍정적인 측면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해치는 이 적보다 더 큰 적은 없네.”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분노라 해도 ‘분노’라는 적에게는 연민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분노’라는 적에게는 인욕을 할 가치가 없습니다.

일반적인 외부의 적에게는 자비를 지녀야할 까닭이 있습니다. 나와 같은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이 고통을 원하지 않고 행복을 원한다는 것이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가 나를 해칠 때 그로 인해 인욕수행이 가능합니다. 인욕수행으로 나에게 큰 도움을 주는 선지식입니다.


분노가 원하는 대로 하면 손해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분노와 대적해 분노를 없애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닥쳐도 흔연한 마음만은 잃지 말지니” 하신 것입니다. 분노에 대적하기 위해 화를 내거나 마음의 불편함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편해지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선을 바라기는 하지만 선행은 시들게 됩니다. 한편으로 그런 상황을 “만약 바꿀 수 있다면 싫어할 것이 무엇이며 만약 바꿀 수 없다면 싫어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한 원인, 그 바탕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불편한 원인은 나와 내편인 사람, 즉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 불행입니다.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을 싫어하고, 행복한 일이 생기면 좋아하고, 재물과 존경이 생기면 좋아하고, 재물과 존경이 생기지 않으면 싫어하고, 칭찬 받으면 좋아하고, 비난을 받으면 싫어하고, 명예를 얻으면 좋아하고, 명예를 잃으면 싫어합니다.


11  나와 내편인 사람에게는

      고통이나 경멸, 험담,

      명예롭지 않는 일이 없길 바라는데

      적에게는 그 반대이길 바라네.


이런 것이 바탕이 되어 마음이 불편합니다. 자신의 형제나 친구가 잘되면 좋아하고, 잘 안 되면 가슴 아파하는 마음도 다스리고, 적이 잘되는 것에 배 아파하고, 잘 안 되면 좋아하는 마음 역시도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12  행복의 원인은 드물지만

      고통의 원인은 너무나 많네.

      고통 없이 싫어서 멀리하는 마음(염리심厭離心)은 생기지 않으니

      마음 그대여! 굳건하게 머물지니.


“행복의 원인은 드물지만 고통의 원인은 너무나 많네.” 일상에서 보면 행복의 원인은 적고 고통의 원인은 많습니다. 그런데 전부 행복을 바랄 뿐입니다. 행복을 원하는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행복의 원인은 적고 고통의 원인은 많은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고통이 반복되는 위험 요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전부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고통의 원인이 더 많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의 원인은 드물지만 고통의 원인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고통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마음을 익힐 수 있다면 고통을 힘들어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전에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해도 고통을 수용할 줄 안다면 고통을 버거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통 때문에 마음이 불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수용하는 방법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싫어서 멀리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으니 마음 그대여, 굳건하게 머물지니.” 고통 때문에 해탈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통이 원인이 되어, 정도(正道)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고통이라는 것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고통이라는 것을 스스로 살펴볼 수만 있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나쁜 상황을 잘 활용해 더 나은 방향으로 전개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현명함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 없이 싫어서 멀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 마음 그대여, 굳건하게 머물라.”하는 것입니다.


13  두르가 여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 고행을 하는

      까르나빠 사람은

      태우고, 잘리는 고통에도

      무의미한 인내를 하는데

      해탈을 하겠다는 내가 어찌 이리도 겁쟁이처럼 구는가?


신에게 공양을 하고, 맹신적이고도 광신적인 수행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고생스럽게 하는 것이 손해가 될 뿐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일체지를 성취하려고 하는 우리가 나쁜 조건을 보살도로 전환하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받아들여 행복의 조건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고통이 행복의 조건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4  익숙해지면

      모든 것은 쉬워지네.

      작은 어려움에 익숙해지면

      큰 어려움도 견딜 수 있으리.

15  뱀이나 해충을 피해,

      굶주림이나 목마름,

      옴 같은 피부병을 의미 없는 고통으로만 여기는가?

      어찌 인내의 기회로 보지 못하는가?


작은 어려움도 점차 익숙해지면 인내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16  더위와 추위, 비바람,

      질병, 결박, 구타 앞에서

      나약해지지 말아야 하네.

      나약해지면 피해만 더욱 커지네.

17  어떤 이는 자신의 피를 보고도

      더 큰 용기를 내는데

      어떤 이는 남의 피를 보고도

      놀라 혼절을 하네.

18  이는 마음의 강건함과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외부의 해악에 휘둘리지 말고

      고통이 자리 잡을 수 없도록 할지니.

19  현자는 고통이 생겨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네.

      번뇌와 싸울 때에는

      많은 고난이 따르네.


“현자는 고통이 생겨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네.”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고, 분노가 일어날 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노력한다고 해서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조건을 보살도로 바꾸고 적과 부딪혔을 때 인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쉽지 않다는 이유로,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번뇌와 싸울 때에는 많은 고난이 따르네.” 번뇌와 분노라는 적과 함께 싸우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고향을 떠나 전쟁을 할 때 어렵고 힘든 일만 있을 뿐입니다. 전쟁터에서 ‘행복’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외부의 싸움도 적과 대치할 때에는 어렵고 힘든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번뇌라는 적과 대치할 때에도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자발적으로 해야 합니다.


20  모든 어려움에 상관하지 않고

      분노와 같은 적을 무찌르는 사람,

      그를 큰 영웅(대웅大雄)이라 하네.

      세속의 영웅은 시체를 죽이는 것에 불과하네.


        다음으로 고통을 사유하는 공덕이 있습니다.

21  고통에도 득이 있으니

      염리심은 교만을 없애고

      윤회하는 중생에게 자비심을 일으키게 하고

      악을 삼가고 선을 좋아하게 하네.


“고통에도 득이 있으니 염리심은 교만을 없애고” 예를 들면 아만심이 일어날 때, 교만에 가득 찬 모습을 보입니다. 자만심으로 인해 타인을 무시하며 천시하는 일이 생깁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손해가 되는 일입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게 굴면 덕이 됩니다. 자만심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좋은 방법은 고통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만심이 줄어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에는 득이 있으니 염리심은 교만을 없애게 하고” 자신의 고통에 비추어 타인의 고통을 생각해 보면 자비심이 생길 것입니다.


“윤회하는 중생에게 자비심을 일으키게 하고” 고통의 결과를 원하지 않기에 고통의 원인인 악을 원하지 않으며, 악을 원하지 않기에 그것의 원인인 번뇌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삼가고 선을 좋아하게 하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통을 기억한다 해서 마음이 위축되는 것은 잘못입니다. 고통을 떠올린다 해서 마음에 화가 일어난다면 그것 역시 잘못입니다. 고통을 생각하면 새로운 용기가 생기고, 고통을 생각하면 인욕이 생겨야 합니다. 여기서는 법에 대한 확신으로 인욕을 하는 것입니다.


22  황달과 같은 큰 병고에는

      분개하지 않으면서

      어찌 중생에게만 화를 내는가?

      모든 것은 조건(연緣)이 시켰을 뿐인데.


우리 몸에 있는 쓸개와 같은 장기와 몸 그 자체는 다양한 병이 생기는 근원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몸에게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 “황달과 같은 큰 병고에는 분개하지 않으면서..” 여기에서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 것은 의도적으로 해를 입히지 않는가? 그러니 병과 중생은 차이가 있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쓸개로 인한 고통은 조건이 되어 그렇게 되었을 뿐 의도한 것이 아니라’ 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마음이 있는 것-유정들-이 나를 해치고, 나를 고통스럽게 할 때도 “조건에 의해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원해서, 의지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도 조건이 시켰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23  비유하건데 원치 않아도

      질병이 생기는 것처럼

      바라지 않아도

      계속하여 번뇌는 생기네.

24  ‘화를 내겠다.’는 생각 없이도

      사람들은 쉽게 화를 내네.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 없이도

      분노는 저절로 일어나네.


모든 것은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상대방 때문에 번뇌가 생기고, 그 번뇌로 인하여 나는 해를 입습니다. 이 모두, 조건에 의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를 내겠다는 생각 없이도” 그런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사람들은 쉽게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역시 조건이 형성되면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 없이도 분노는 저절로 일어납니다.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분노는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은 없지만 저절로 일어나네.”


25  세상의 모든 허물과

      모든 죄악들,

      전부는 조건의 힘으로 생기나니

      스스로의 힘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네.

26  이런 조건들 역시

      ‘고통을 발생시키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며

      조건에 의해 생긴 것들 역시

      ‘나는 조건에 의해 생겼다.’고 주장하지 않네.


불교의 인과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물이건, 모든 것은 오직 인과에 의해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과에 의해 다양한 현상이 생기고, 그로 인해 다양한 행복과 불행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과법은 불교에만 있는, 불교 고유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부터 마음에 있었던 것이든, 형태를 가지는 물질의 원인이든, 조건에 의해 변화를 하면서 하나의 형태를 구성합니다. ‘그렇게 되게 한’ 첫 번째 조건을 한정한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외부 물질의 태초를 거론한다는 것은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태초 또한 그렇습니다.


그래서 유정의 시작이 없고, 윤회의 시작이 없다는 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인과에 의해 생기는 것인데 태초는 인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우연히 생기는 것인데, 그러면 ‘이것이 어째서 생겼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인과법에 의해 생긴다는 것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외도 가운데 인도철학 학파 가운데 하나인 상키야학파의 경우, 태초부터 인과에 의한 발생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인과는 인정하지 않고 태초가 있는 가운데 원질(原質, Prakriti)이라는 것을 두고서, 25가지의 요소는 이 원질에서 생겨난다고 합니다. 결국, 원질의 실체를 알게 되면 점차로 현상은 사라지고, 마침내 아(我, puru.sa)만 남게 되는데 이것을 해탈이라고 상키야학파에서는 주장합니다.


상키야학파에는 무신파와 유신파가 있는데 무신파의 경우에는 ‘세상을 만든 신은 없다. 원질이 형상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유신파는 원질은 현상의 바탕이 되고, 이런 바탕을 여러 현상을 펼칠 계획을 만드는 이가 신(神)이고, 신과 원질이 같이 함으로써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행, 불행을 겪는 아(我)가 변화가 없는 영원불멸의 독립적 존재이라는 이치를 근거로 태초를 주장합니다. 따라서 제법이 인과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만드는 주체자, 근원이 만든 것이라 합니다. 세상의 창조주가 만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27  원질Parkriti이라 여기는 것과

      나Atman라고 이름 붙인 것

      이것을 ‘내가 생기겠다.’ 해서

      일부러 생긴 것은 아니니.


그러한 원질과 행. 불행을 겪는 아가 조건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생기지 않는 것이니 그것이 없다면 결과가 생긴 그때에 인정한 것은 무엇이며’ 원질 자체는 불변하고 유일하며 독립적인 것입니다.


28  어떤 것도 생기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때 무엇이 생길 것이라고 바라겠는가?

      (아我는) 항상 대상에 관여하고 있다면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원질은 영원불변한 것이므로 인과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원질은 인과에서 생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즉, 영원불변한 것이 변화가 있는 것을 결과로 낳을 수는 없습니다. 결과가 변하는 형태의 것이라면 그것의 원인이 되는 것도 변하는 성질이어야 합니다. 변화가 없는 것이 변하는 것을 낳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질은 생기지 않는 것이니 그것의 결과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생기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때 무엇이 생길 것이라고 바라겠는가?”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불변하는 것의 결과로 다양한 변화가 있는 물건을 생기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원질이 저절로 생기게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我는) 항상 대상에 관여하고 있다면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아가 항상 있는 불변의 물질이라면 허공과 같이 변화가 없는 것이어서 그것은 결과를 낳는 행위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9  만약 아(我)가 ‘항상 하는 것’이라면

      허공과 같이 결과를 있게 하는 것이 없음이 분명하니

      다른 조건들과 만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신이 불변하는 존재라면 다른 조건과 만나더라도 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하는 아(我)를 인정한다면 육신의 변화에 의한 ‘나의 늙음’과 ‘나의 젊음’을 거론할 수 없습니다. 즉 ‘내가 아프다.’ 든가 ‘나는 건강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할지라도 전과 같다면 즉 다른 인연(원인과 조건)이 영향을 줄 때도 그것이 이전과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그렇게 한 것이’ 즉 다른 영향을 준 것이 ‘아(我)에게 무엇이 되겠는가?’ 라고 한 것입니다. 



30  대상에 반응 할 때에도 변함없이 남아있으니

      무엇이 그것을 변하게 하겠는가?

      조건이 이것(원질)에 작용한다고 한다면

      그 둘의 관계는 어떤 것이겠는가?


관계성에서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그 어떤 연관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31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해 생기니

      그러므로 항상 하는 ‘자아의 힘’은 없네.

      이 사실을 알면 환영과 같은 현상에

      노할 일은 없네.


불교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며, 윤회체계를 12연기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윤회는 무명(無明)에서 시작되는데, 무명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무명만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연기가 시작되는 출발점에 무명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의 연기가 시작되면서 무명이 성립될 때에 또 다른 연기의 변화가 시작되기도 합니다. 무명에서 노사(老死)까지 하나의 12연기가 끝나기 전, 그 기간 동안 무명과 같은 많은 다른 12연기가 함께 시작되면서, 노사 이후에 무명이 계속되어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디가 시작인지 말하기 힘들기 때문에 처음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명에서 행(行), 행에서 식(識 ), 이렇게 해서 노사까지의 연기(緣起)가 12연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12연기가 끝나기 전에 다른 여러 가지 연기가 십만, 백만, 천만 가지가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도 이전 무명으로 행이 생을 이루는 선업을 지었습니다. 지은 그것을 의식 종자에 심었던 것이 지난 한 생의 애(愛), 취(取)가 발하여 유(有)의 연기가 성립되었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우리 육신의 발생을 이룬 것입니다. 지금 인간이라는 형태의 생(生)을 이루어 노사의 연기가 익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 우리 인생 전체는 물론, 하루하루 마음의 집착 때문에 여러 가지 고락의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신구의(身口意)로 복이 아닌 업과 복이 되는 갖가지 업을 매순간 짓고 있는 것입니다. 단 1분 동안에도 갖가지 분별로 다양한 형태로 업을 짓고 있습니다.


지금의 인간 몸을 받게 되는 하나의 연기가 처음 무명을 시작으로 사(死)의 연기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무명으로 또 다른 업을 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다른 연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에는 시작이 없고, 무명에도 시작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명의 인과를 지니고 있는 인간에게 시작이 없으며, 의식에 시작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외부에 형태가 있는 물질의 연속성을 생각해 볼 때 물론 거친 연속성은 알 수 있겠지만 물질을 구성하는 성분의 연속성은 시작도 끝도 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 생기고, 인연의 타력(他力)에 의한 것이기에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해서 생기니 그러므로 항상 하는 자아의 힘은 없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안팎의 인연이 만났을 때 인과에 걸맞는 결과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환영(幻影)과 같은 현상에 노할 일은 없네.” 조건에 의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한 것이 됩니다. 다른 것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하지 않고 자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연기에 자력(自力)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고, 저절로 이루어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자력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환영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면 환영과 같은 현상에 노할 일은 없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팎의 모든 물건이, 선과 악이, 원인과 결과가 모두 환영이라면 굳이 악을 없앨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32  누가 있고, 무엇이 있어

      분노를 억제한단 말인가?

      그래서 없애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한다면

      환영에 의지하여

      환영의 고통을 끊는 것은 이치에 맞는 것이네.


“환과 같은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그것의 원인인 환과 같은 악을 없앨 필요가 없지 않는가?”하고 반문을 한다면,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환영은 허깨비와 같은 것이지만, 환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될 때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없는 환영과 같은 행복이지만 행복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한 부처의 지위나 해탈도 실제 하지 않는 환영이지만 이것은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영과 같은 것이고 본래 없는 것이지만 연기와 인과는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원하지 않고 행복을 원하기 때문에 고통을 없애는 것이 환영과 같은 것이지만 고통은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환영에 의지하여 환영의 고통을 끊는 것은 이치에 맞는 것이네.”


33  앞에서 말했듯이

      적이나 혹은 친구의 부당한 행동을 볼지라도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

      미워하지 말아야 하네.

34  만일, 원하는 일만 일어난다면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 누구에게도

      고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네.


스승 샨티데바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간의 행복은 오직 타인의 행복을 위한 것에서 비롯되며, 세간의 불행은 나만의 행복을 바라는 것에서 생기네. 많은 말은 필요 없네. 어리석은 이는 자신을 위해 일하고 부처는 남을 위해서 일하시네. 이 둘의 차이를 보라.” 이처럼 삼계의 윤회나 적정의 상태에 머문다 해도 자신만 소중히 여기는 이기심에는 불운과 불행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번뇌를 끊은 열반의 고요함을 성취한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이기심으로 인해 소지장을 여전히 끊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원만공덕의 일체지를 얻지 못하는 것은 이기심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윤회에서, 아주 강한 이기심으로 이타를 경시하는 거친 이기심이 있을 때는 본래적인 괴로움(고고苦苦)을 겪거나 악도에 태어나기도 합니다. 아주 미세한 이기심, 이타를 경시하는 이기심은 아니지만 이 미세한 이기심이 괴고(壞苦)나 행고(行苦)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방금 말한 것처럼 마침내 번뇌를 끊어 아라한의 지위를 얻었다 하더라도 적정의 한편에 떨어져 있는 것은 미세한 이기심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기심은 모든 불행의 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타심은 윤회에 있더라도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것-타인의 목숨을 구하거나 타인의 자산을 보호하거나, 형제나 친구를 구하는 것-은 타인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윤회에 있더라도 원만하고 뛰어난 태어남(증상생增上生)을 성취하고, 증상생을 지탱하는 무병장수나 혹은 불살생으로 인한 장수나 불투도로 인해 재물이 있고 보시행으로 원만한 부를 얻게 합니다. 또한 인욕수행으로 좋은 친구를 얻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속이지 않은 것으로 모든 이가 인정하고 큰 권력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윤회의 원만함을 얻기 위한 가장 주된 조건은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이타심입니다. 또한 구경에 열반을 이루는 것도, 적정과 윤회 두 극단을 떠난, 성불의 지위도, 이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세간의 행복은 오직 타인의 행복을 위한 것에서 비롯되며, 세간의 불행은 나의 행복만을 바라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모든 허물을 여의고 원만공덕을 성취하신 것은 바로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이타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어린 아이이자 범부인 우리들에게 생기는 모든 허물과 끊임없는 고통이 오는 것은 모두 이기심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나가르주나의 [중관 고귀한 화환(보만론寶鬘論)에서 “중생에게 생명이 소중하듯 내가 그들을 소중히 여겨, 내가 그들의 악을 받고 나의 선은 그들이 받기를”이라고 하셨습니다. “중생에게 생명이 소중하듯 나에게 그러한 것이 더 소중하기를”이라는 것은 어떤 중생이라도 자신의 목숨은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모든 중생의 생명을 내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발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그러한 악이 익기를” 나에게 허공과 같이 끝없는 중생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인 모든 악이 나에게 오기를 발원하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선이 익지 않고” 내가 신구의로 지은 모든 선이 한없는 중생들에게 일시적. 궁극적인 도움과 이익이 되는 원인이 되기를 발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입보리행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모든 허물을 끊고서 보리심의 말을 타고

행복에서 행복으로 나아가는 이 마음을 아는 자,

그 누가 나태에 빠져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일시적, 궁극적 불운과 고통을 없애는 보리심의 말을 타고 지금 범부의 초심상태에서 가없는 허공까지 더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모든 허물을 끊고서 보리심의 말이란 탈 것의 형태로, 보리심의 말을 타고 더한 행복으로 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마음의 힘인 진실함과 이타심과 이타의 성심, 좌절 없는 용기와 지혜가 뒷받침 될 때, 나쁜 상황에 처한다 해도 나쁜 조건을 오히려 보살도로 전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쌰카시리 보살은 [심학론]에서 “기쁨은 모든 이에게 회향하고 그 유익함이 허공계에 가득 차게 하소서. 불행은 내가 짊어져 모든 중생의 고통을 소멸케 하소서!”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거나 불운이 찾아올 때 마음이 위축됩니다. 작은 행복이라도 생기면, 마음에 자만과 교만이 생겨 산란해 지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의 경우, 모두 기쁨이 생기면 자신의 행복이 선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과 이것의 원인인 이전에 지은 모든 선을 모든 중생을 위해 회향하여 ‘모든 중생이 행복해지기를’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고 불운한 일이 생기면, ‘허공같이 끝없는 중생의 고통을 나의 이 고통으로 대신하기를’ 이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어떤 행. 불행이 오더라도 보리심의 수행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행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항상 행복한 일이 생기고, 항상 상서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기쁨의 태양이 떠오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허물을 끊고서 보리심의 말을 타고 행복에서 행복으로 나아가는 이 마음을 아는 자, 그 누가 나태함에 빠져 있겠는가?” 하신 것입니다.


까담파의 스승이신 체가와께서 “오탁악세를 보살도로 바꾸네.” 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오염(명탁命濁), 번뇌의 오염(번뇌탁煩惱濁), 시대의 오염(겁탁劫濁), 견해의 오염(견탁見濁), 중생의 오염(중생탁衆生濁)이 있습니다. 오탁악세-명탁. 번뇌탁. 겁탁. 견탁. 중생탁-는 여러 가지 악조건이 있는 시기를 말합니다. 안으로는 거친 번뇌가 있고 바깥으로도 불길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탁악세의 이 시기를 보살도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오탁악세를 보살도로 바꾸니” 상서로운 좋은 일이 생긴다면 볼 것도 없지만 나쁜 상황이 생기더라도 보살도로 바꿀 수 있거나 일체지를 성취하는 원인과 조건으로 만들 수 있다면 진정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에 이로운 음식을 먹어 영양분으로 섭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독을 먹고도 영양분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학론]의 서두에 “오탁악세를 보살도로 바꾸네.”라고 하신 것은 체득을 통해 하신 말씀입니다.


 스승 체가와께서 [심학론] 연구하시고, 스스로 체득하실 때, 고난과 비방에 개의치 않고 어려움을 극복한 결과로 진정한 보리심을 일깨울 수 있다면 아무런 미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죽어도 후회가 없네.” 우리가 보리심이라는 법을 들은 적이 있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기회가 있은 이때에 청정한 보리심을 수행을 해야 합니다. 


쫑카파 대사께서 “보리심에 최선을 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청정 이타의 보리심 수행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합니다. 청정 이타의 보리심이라는 것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먼저 보리심을 명상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보리심이라는 것을 수행할 때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음에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보리심을 지니고 경을 듣고 사유하고 수행해야 합니다.


보리심의 법을 가르치는 논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 샨티데바께서 지으신 이 [입보리행론]입니다. 샨티데바는 7세기 인도 분이십니다. 그 분이 지으신 [입보리행론]이 당시 인도에서 널리 퍼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시의 인도뿐만 아니라 후에 티베트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쌰카파, 닝마파 등 모든 종파에서 이 [입보리행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티베트에는 [입보리행론] 주석서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샨티데바의 수승한 가르침인 [입보리행론]은 저술 이후, 지금까지 수행을 가르치는 논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