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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7. 입보리행론

10.[입보리행론] 제7장 정진품

[입보리행론] 제7장 정진품


인욕수행이 바탕이 되고 잘 되어야 정진수행이 가능합니다. 인욕에는 질병이나 천재지변 등의 해악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안수고인(安受苦忍)과 타인의 원망이나 해침을 감내하는 내원해인(耐怨害忍)이 있습니다.

이런 인욕수행을 할 때 퇴굴심은 생길 수가 없습니다. 퇴굴심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런 인욕수행으로 정진수행을 지어가기 때문에 인욕 다음에 정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인욕으로 정진해야 하니

    오직 정진만이 깨달음에 이르게 하네.

    바람이 없으면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복덕자량은 정진 없이 생기지 않네.


“인욕으로 정진을 해야 하니 오직 정진만이 깨달음에 이르게 하네.” 반야부 경전을 보면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지위를 얻는데, 삼십 내지 사십 번의 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가장 빠른 것이 삼대 무량대겁(삼대 아승지겁)이라 했습니다. 한 대겁(大劫)은 팔십 중겁(中劫)입니다. 이 팔십 중겁은 생성(성成)에 이십 겁, 지속(주住)에 이십 겁, 소멸(괴壞)에 이십 겁, 공무(空無)에 이십 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팔십 중겁이 하나의 대겁을 형성합니다.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무량한 대겁이 걸리는 것입니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상태가 계속되면 하나의 대겁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한 대겁이 삽만 번 곱하기 육십을 반복한 수가 아승지입니다. 보통 아승지가 삼십 내지 사십 번 걸리는데, 빠를 경우에는 삼 회에 걸친 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합니다.


삼대 아승지겁을 기준으로 하면 자량도와 가행도에 있을 때에는 첫 번째 대아승지겁의 자량을 쌓습니다. 부정지(不淨地)에 있을 때에는 두 번째 아승지겁 동안 자량을 쌓습니다. 청정지(淸淨地)에 있을 때에는 세 번째 대아승지겁의 자량을 쌓아서 궁극에 부처를 이루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시작 없는 때부터 들여온 습관이기에 며칠 만에 또는 몇 년 만에 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최상의 밀교경전에서는 삼생 삼자량-세 번 몸 받고 세 번 자량을 쌓아-을 이룬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 무르익은 원인이 있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원인이 완전히 익지 않은 가운데 처음부터 밀교에 입문하는 것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밀라레빠와 같은 분의 경우는 밀교의 대수행자이고 대근기를 가졌으며, 전생에 까담파의 요가행자 착티졸이었습니다. 그분이 후생에 밀라레빠로 태어나시어 역경사 마르빠께 의지하여 일반인이 하기 힘든 수행을 하신 끝에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이전에 인도나 티베트에서 최상 밀교를 통해 수행하여 높은 깨달음이나 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것은 많은 생 동안 자량을 쌓은 결과이지 단숨에 얻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을 보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한편,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내가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퇴굴심이 생길 위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진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량한 구애됨 없이 정진한다면 점차로 일체지를 이루는 원인이 증장해, 포악하고 보잘 것 없는 마음이 변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체지를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인연과 바탕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래서 정진을 아주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정진이란 선을 좋아하는 것!

    반대되는 게으름은

    악행을 즐기는 것이며

    나태함으로 자신을 하찮게 만드는 것이네.


정진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제6장 인욕수행품에서 인욕의 반대가 되는 분노를 다스려 인욕수행을 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정진수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가 되는 게으름을 다스려 정진을 수행하고, 증장시켜 나갈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정진의 상대, 적수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게으름입니다. 편안함의 타성에 젖은 게으름, 악행에 집착하는 게으름과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자기 경시, 이 세 가지로 게으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성적인 편안에서 게으름이 생기는 원인이 무엇인가? 

3  게으름으로 편안함에 젖어들고,

    잠에 취해

    윤회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서

    게으름이 다시 생기네.


아무 생각 없이, 순간적인 안락함에 그저 안주하면 색. 성. 향. 미. 촉에 마음이 빼앗겨 일시적인 만족이나 작은 즐거움에만 빠져 지내기에 “게으름으로 편안함에 젖어들고”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잠에 취해 윤회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서 게으름이 다시 생기네.” 일시적인 편안함을 없애기 위해 또 안락에서 생기는 게으름과 잠을 없애기 위한 대치로써 죽음의 무상함과 악도의 고통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 하는가하면 

4  번뇌의 그물에 걸려

    생사의 올가미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는데

    그대는 아직도 모르누나!

5  주변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가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그런데도 잠에 취해 있는 그대여!

    마치 도살장의 소 같구나!

6  죽음은 피할 길 없고

    저승사자는 노려보고 있는데

    어찌 그대는 먹는 것을 탐하고

    그토록 잠에만 취해 있는가?

7  죽음은 갑자기 찾아오니

    하루 빨리 공덕을 지어야 하네.

    죽음 문턱에서 게으름을 버린다 해도

    때늦은 후회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8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아직 못 다한 일도 많은데

    갑자기 저승사자와 마주치고 나서야

    ‘이제는 틀렸구나!’ 싶어 눈앞이 캄캄할 것이네.

9  비통함에 흐르는 눈물,

    부은 얼굴에 눈은 충혈 되니

    모든 가족이 절망할 때

    저승사자를 보게 되리니.

10  자신의 죄악이 떠올라 괴로워하고,

      지옥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두려워

      똥오줌을 싸며 혼미해질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1  그대는 잡힌 물고기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것처럼

      죽음 앞에서 발버둥치는 이 고통을

      죄악으로 지은 지옥의 고통에

      어찌 비견할 수 있겠는가?

12  뜨거운 물이 여린 피부에 닿아도

      매우 뜨거운데

      지옥에 떨어질 업을 짓고서도

      어찌 이렇게 태평한가?

13  정진하지 않으면 나쁜 결과가 올 수 밖에.

      엄살이 심하면 참기 어렵고

      죽음을 앞둔 천신의 남루함이여!

      아, 고통이 나를 부수어 버리네.

14  ‘몸’이라는 배에 의지하여

      고통의 큰 강을 건너가라.

      이 배는 나중에 얻기 어려우니

      어리석은 이여! 잠에 빠지지 말라.


인간의 몸을 배에 비유했습니다. 업과 번뇌로 이뤄진 고통의 대해(大海)를 ‘몸’이라는 배에 의지하여 건너야 합니다. 이런 인간의 몸이라는 “이 배는 나중에 어려우니 어리석은 자여! 잠에 빠지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팔유가 십 원만의 인간 몸을 받은 지금, 수행하기 좋은 이 때, 잠자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편안함의 타성에 젖은 게으름을 없애는 것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다음은 악행에 탐착하는 게으름입니다. 악행에 탐착하는 게으름이란, 일반적으로 끝도 없는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결처럼 끝날 기약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일에만 얽매이는 것을 악행에 탐착하는 게으름이라 합니다. 이는 해이한 상태는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다지 의미 없는 것에 얽매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5  기쁨의 원인인 무궁한 정법,

      최고의 기쁨은 끊어버리고,

      고통의 원인인 산란과 들뜸(도거掉擧)을

      그대여, 어찌 그리 좋아하는가?


법을 닦는 수행이란 마음을 선하게 쓰는 것입니다. 진실로 타인을 위하는 마음과 자비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자비심과 사랑의 마음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노는 이따금씩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는 어머니를 마음으로 의지하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태어난 순간부터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 깊이 사랑하는 대상이 없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벗 하나 없는 외톨이입니다. 병이 들었을 때 보살핌과 사랑을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한 늙었을 때 보살핌과 사랑을 받는 것은 더없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보살핌과 사랑이 가득한 곳에서 맞이한다면 마음이 편안할 것입니다.


분노는 때때로 일어나는 것이지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가 일어나 때, 가끔은 도움을 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기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분노의 마음은 우리 일상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분노와 사랑,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사랑이 인생 전체에서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분노의 마음은 가끔 발생하는 것일 뿐, 한 인간이 자립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있으면 자신의 마음이 행복합니다. 몸이 편안하고 선한 마음을 지니면 머무는 곳마다 편안합니다. 사랑의 기운이 가득할 때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들도 가까이 다가와 좋아하는 것입니다.


쫑카파대사께서 [보리도차제]에서 “생각은 이타심인데 자신의 이익을 함께 이루네.” 라고 하신 것은, 생각은 자신의 이익을 전혀 돌보지 않고 타인을 위하지만 자신의 이익도 덩달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결과, 좋은 벗이나 형제를 만날 수 있는 것이고, 남들로부터 좋은 소리를 들으며, 모든 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생이 기쁘고, 선한 생을 살기 때문에 내생 또한 행복할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생 동안 실제로 선한 마음과 행으로 습관을 들인다면, 생을 거듭할수록 더 큰 안락과 행복이 생길 것입니다. 선한 마음이 생길 수 있도록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다면, 기쁨의 원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기쁨의 원인은 무궁한 정법, 최고의 기쁨은 끊어버리고..” 이생보다 더 나은 의식주를 얻으려고 하는 업(행위)이 새로운 행복을 가져올지 아니면 또 다른 어려움을 가져올지 모를 일입니다.

여기까지가 악행에 탐착하는 게으름을 끊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나약함으로 자신을 경시하는 게으름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는 조건의 힘은 기르고(조력배양助力培養), 실수(實修)인 정념의 자발적 수습과 그 결과, 자신의 뜻으로 수행하는 것을 이 게송에서 요약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해태를 다스리기 위한 대치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래에서) 다시 자세하게 언급할 것입니다.


16  태만하지 않고 자량의 공덕과

      스스로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과

      나와 남을 평등하게 관하는 것과

      남과 나를 바꾸는 수행을 하라.


정진의 주된 목적은 보리심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음에는 나약함으로 인한 자기경시의 게으름에 대한 대치(對治)입니다.


17  ‘내가 깨달음을 감히 얻을 수 있겠는가?’ 하며

      나태함에 젖지 말아야 하네.

      여래께서는 사실만을 말씀하셨으니

      이는 진리이네.


한량없는 자량을 쌓고 삼대아승지겁 혹은 삼십 내지 사십 번의 아승지겁 동안 광대한 자량을 쌓아야 한다고 할 때 ‘내가 과연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오직 진실만을 말씀하시는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구나!’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8  파리. 모기. 벌,

      이런 미물들조차

      정진의 힘을 일으키면

      얻기 어려운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네.

19  나와 같이 사람으로 태어나

      이로움과 해로움을 분별하여

      보살행을 포기하면

      내가 깨달음을 어찌 얻으리.


우리 모두에게는 여래장, 불성이 있습니다. 삼독심의 허물, 무명과 실집(實執)이 강하게 존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들은 떨어지는(흩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근본청정심에서 분리되는 성질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견에 대해서는 무아를 깨닫는 지혜라는 대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부 물질에 냉온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뜨거움과 차가움의 성질이 서로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한쪽의 성질이 강할 때 상대의 성질이 약해지는 것은 자연현상입니다. 외부 물질의 성질 대부분이 반대되는 성질에 의해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면의 의식도 이러한 원리에 의해, 상대하는 의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되는 의식은 외부에서 상충하는 물질처럼 만지거나 느낄 수 있는 성질처럼 서로 반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면 의식에 있어 반대가 되는 것, 상대가 된다는 것은 인식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더욱이 분별에 있어 상충하는 것입니다. 전오식은 대상이 무엇인지 인지하는 수준이지, 대상이 좋고 나쁘다고 인식하지는 않습니다. 그 예로 형상에 관한 집착이 일어날 때 눈은 형상을 볼 뿐입니다. 눈은 형상을 인식할 뿐입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인식은 할 수 없습니다. 전오식 다음에 잇따른 분별이 일어나면서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분별식입니다. 분별 때문에 하나의 대상을 두고 어떤 이는 좋다고 하고, 어떤 이는 나쁘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별이 다른 것입니다. 분별이 서로 상충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좋다고 여기는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나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상대하는 의식입니다. 인식하는 것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대상에 대해 ‘나쁘다.’는 의식이 강할수록 ‘좋다.’는 생각은 줄어듭니다. 반대로 ‘좋다.’는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나쁘다.’는 생각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인식하는 것은 상충하기 때문입니다. 아견(我見)을 진실이라고 인식하는 의식과 진실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의식은 서로 반대가 됩니다. 상충할 뿐만 아니라 서로 상반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견은 타당하지 않고 무아는 타당한 것이며, 아견의 상대가 되는 무아의 의식이 존재할 때 아견이라는 뒤집힌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허물의 대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허물을 일시적이고도 우연한 객진(客塵)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물조차도 정진의 힘을 일으키면 얻기 어려운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방편은 보리심을 얻기 위한 것이지만 삼대아승지겁 동안 자량을 쌓을 때 보살들이 하기 어려운 보살행을 ‘내가 감히 성취할 수 있을까?’ 하는 퇴굴심이 생기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0  팔다리를 보시하는 것은

      두려워하면서

      지옥고의 경중을 따지지 못하니

      무지에 대한 두려움은 한이 없네.


이것은 경중의 차이를 따지지 않아서 생기는 퇴굴심이라는 것입니다. 잘 따져 보면 퇴굴심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21  백 천만 겁 무량한 세월 동안

      이 내 몸은 수없이 잘리고

      찔리고, 태워지고, 찢겼지만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니.


지금까지 업과 번뇌에 이끌려 악도나 인간의 몸을 받은 후에도 “잘리고, 찔리고, 태워지는”는 고통은 수없이 받아왔습니다. 그것도 의미 없이 말입니다. 이런 고통을 당했기에 ‘좋은 결과를 얻었다.’며 내보일 만한 것도 없이 말입니다. 보살도를 익힌 다음에는 다소 어렵더라도 노력하고 애쓰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2  내가 깨달음을 이루기까지

      그 고통은 유한하니,

      이는 병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몸에 상처를 내는 고통과 같네.


궁극적인 고통을 없애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시적인 어려움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중병을 고치기 위해 수술을 받는 것처럼, 일시적인 고통을 자처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23  모든 의사는 치료를 할 때

      작은 고통으로 큰 병을 없애네.

      그러므로 많은 고통을 없애기 위해

      작은 고통쯤은 인내할지니.

24  최고의 명의는

      평범한 치료를 하지 않고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

      수많은 중병을 치료하네.

25  부처님께서도 (보살행을 닦으실 때) 처음에는

      하찮은 푸성귀 따위를 베푸셨지만

      점차 익숙해지면서

      마침내 자신의 몸까지 베푸셨네.

26  내 몸이

      푸성귀처럼 여겨질 때

      몸을 보시하는 것이

      무엇 그리 어렵겠는가?


        어째서 이런 것이 가능한가 하면

27  죄악을 끊었으니 고통은 없고

      지혜로우니 걸림이 없네.

      보살은 전도몽상과 죄악으로

      몸과 마음을 해칠 까닭이 없네.


“죄악을 끊었으니 고통은 없고 지혜로우니 걸림이 없네.”  나가르주나 보살은 [고귀한 화환]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에게 육신의 고통이 없다.” 즉 보살지에 있는 보살에게 육신의 고통이 없고, “마음의 고통이 어디에 있을까.


자비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시니 그로 인해 세상에 오래 머무시네. 그러므로 성불이 오래 걸린다 해도 지혜로운 이는 나태하지 않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악을 끊었으니 고통은 없다.” 고 하신 것은 지혜로 무아의 진여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일체가 환과 같음을 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려움을 자처하신 것은 자량을 속히 쌓을 수 있는 이익으로 아시기 때문이며 지혜롭기에 싫어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기심과 실집(實執)의 뒤집힌 분별 때문에 육신을 ‘나’로 집착하거나 귀하게 여겨 육신의 고통을 참지 못하거나 멀리 내다보지 못해 “몸과 마음을 해칠 까닭이 없네.” 하신 것입니다.


28  복덕으로 몸은 안락하고

      지혜로운 마음이 행복하니

      중생을 위해 윤회계에 머문다 해도

      자비심을 지닌 사람에게 어찌 괴로움이 있을까?


보리심이 주는 이익들은 보리심의 힘에 의해 생긴 것입니다.


29  이것은 보살심의 힘이니,

      이전의 악업을 다하게 하고

      바다와 같은 복덕을 쌓게 하니

      성문보다 더 뛰어나네.

30  모든 괴로움과 어려움을 없애는

      보리심의 말을 타고

      행복에서 행복으로 나아가는 이 마음을 안다면

      그 누가 나태할 것인가?


정진을 시작하기 위해 정진과 반대되는 해태를 없애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정진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조력助力)들을 기르는 것에 관한 내용입니다.


31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그 힘은

      희구. 견고. 기쁨. 버림이네.

      희구는 고통의 두려움과

      열반의 이로움을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네.


“중생에게 이익되는 그 힘은 희구. 견고. 기쁨 버림이네.” 선의 큰 이익과 선의 좋은 과보를 알고 굳은 결의를 일으키는 것을 희구력이라 합니다. 굳은 결의가 바탕이 되어 이것을 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좌절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고 굳건히 해나가는 것, 이것을 포기하지 않는 견고력(堅固力)입니다. 그리고 기쁘고 즐겁게 행하는 것이 환희력입니다. 심신이 지쳐 선업을 제대로 행할 수 없을 때 잠시 쉬는 것을 방사력(放捨力)입니다. 희구력. 견고력. 환희력. 방사력을 4조력이라 합니다. 이 가운데 희구력은 “고통의 두려움과 열반의 이로움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32  이로움에 반하는 것을 끊어

      희구. 견고. 기쁨. 버림을

      자발적으로 행하고

      정진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네.


여기서 “견고”는 굳건히 해나가겠다는 결의입니다. 아만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번뇌의 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행하고..” 그 결과 몸과 마음을 다스려 “정진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희구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33  나와 남의 수많은 허물을

      내가 전부 없애야 하네.

      언제까지나 이 허물 하나하나,

      영겁의 바다가 다할 때까지.

34  허물을 없애려는 노력을

      내가 조금도 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끝없는 고통 속에 빠져있는 것이니

      내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자신의 고통만 아니라 한없는 중생의 모든 고통을 없애겠다는 마음을 일으켰기에 비록 작은 고통일지라도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노력하겠다는 희구력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35  내 공덕이나 중생의 공덕 모두,

      내가 쌓아야 하네.

      작은 공덕 하나를 이루는데도

      영겁 동안 습관을 들여야 하는데,

36  나는 그 어떤 공덕에도

      습관을 들이지 않았으니,

      긴 윤회 가운데 얻은 이생을

      내가 헛되이 보내는 것은 기가 막힐 노릇이네.

37  나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지도 않았으며

      대중에게 공양을 올리지도 않았으며

      가르침을 실행하지도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바람을 들어주지도 못했네.

38  두려움에 떠는 이에게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무외시無畏施)를 베풀지도 않았으며

      불쌍한 이에게 행복을 주지 못했다면

      나는 어머님께 아픔과 고통만 드린 셈이네.

39  나는 이생과 지난 생에도

      법을 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이런 고난을 얻었으니,

      이것을 안다면 누가 법을 얻으려는 마음을 내지 않겠는가?

40  희구는 일체 선한 것의 근본이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네.

      희구의 근본은

      그 결실을 거듭거듭 관하는 것이네.

41  육체적 고통과 마음의 불행,

      갖가지 두려움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악행에서 바롯된 것이네.

42  마음에서 선을 행하는 이는

      어디를 가든

      복덕은 따라다니니

      과보는 실제로 나에게 돌아오네.


일반적으로 업(業)은 전적으로 흰 업(선업善業)과 검은 업(악업惡業), 희지도 검지도 않은 업(무기업無記業), 생각과 행위가 모두 흰 업, 생각은 희지만 행위가 검은 업, 생각은 검지만 행위가 흰 업 등 다양합니다. 어쨌든 도움을 주려는 선한 동기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도와준 후에는 수희하고, ‘오늘 내가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어서 기쁘다.’는 생각을 하면 전적으로 흰 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타심의 동기와 실제 업 또한 도움이 된 행위, 후에 수희한 것까지 전적으로 흰 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타인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선한 행위를 했더라도 동기가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한 것-동기가 바람직하지 않다면 희지도 검지도 않은 업일 것입니다. 행위 그 자체로 보면 타인에게 도움을 주었기에 흰 업이겠지만 동기가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희지도 검지도 않은 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코지 하려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욕설을 하고, ‘비로소 오늘 본때를 보여주었다.’며 즐거워한다면 전적으로 검은 업일 것입니다. 동기도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며 행위 역시 거친 구업이기에 검은 업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한 나쁜 짓을 수희하고 만족한다면 전적으로 검은 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업은 다양하다 할 수 있습니다.


43  악행을 저지른 이는

      행복을 원해도

      어디로 가든 죄악이 따라오니

      고통이라는 무리에게 파괴되네.


전적으로 흰 업의 결과로 태어난 곳에 차이가 납니다. 정토나 연화장 세계에 태어나는 경우입니다.

44  향기롭고 시원한 연화장 세계에서

      부처님의 법음을 양식 삼아

      불광에서 피어나 현화생하여

      불전에서 여래의 심부름꾼이 되어 선업을 닦네.


        전적으로 검은 업의 결과로 육신에 가해지는 고통에 차이가 납니다.

45  저승사자가 살갗을 전부 벗겨내고

      펄펄 끓는 구리 쇳물이 온 몸에 쏟아지며

      불에 달군 창칼에 찔려 살점은 찢기고

      달궈진 철판에 떨어지는 고통에 시달리네.


누린 것의 차이로 “펄펄 끓는 구리 쇳물이 온 몸에 쏟아지며”, 삶에 차이로 “불에 달군 창칼에 찔려 살점이 찢기고”, 머무는 곳에 차이로 “달궈진 철판에 떨어지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46  진심으로 선을 구하고

      공경으로 수행해야 하리.

      [금강당경]의 의식을 행하여

      자신감을 관하라.


“진심으로 선을 구하고 공경으로 수행해야 하리.” 이 말씀은 전적으로  흰 업, 선업에 대한 절실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구력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견정력입니다. 자긍심을 일으켜 번뇌의 아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퇴굴심 없이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견정력을 생기게 합니다.


“[금강당경]의 의식을 행하여 자신감을 관하라.”며 [금강당경]을 말씀하시는데 [화엄경]의 한 품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아만 혹은 ‘내가 하겠다.’는 결단으로 자신감으로 물러나지 않겠다며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아만입니다.


47  먼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잘 살펴서 하되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말며

      이미 시작한 일은 중단하지 말라.

48  중단을 하면 다음 생에도 습관이 되어

      악과 고통이 늘며

      다른 선한 과보가 생길 때에도

      그 과가 미약해 성취되지 않네.


원을 세울 때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실천하지도 못할 것을 하겠다고 한다면 결국에 자신을 기만하는 셈입니다. 실천 가능한 것을 자신이 하겠다고 다짐을 한 뒤에 실행해야 하므로 먼저 가능성을 잘 따져봐야 합니다. 가능한 것이라면 시작해서 반드시 끝까지 해야 합니다. 시작해서 도중에 그만 둔다면 그것이 버릇이 되어 미래에 어떤 일을 하든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실제 자신감을 일으킴에 있어서 아만이라고 이름 붙인 세 가지 자신감 즉 업의 자신감, 번뇌의 자신감, 능력의 자신감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49  업과 번뇌와 능력,

      이 세 가지에 자신감을 가질지니.

      혼자서도 하겠다는 것이

      업에 대한 자신감이네.

50  번뇌 탓에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자신의 선업을 성취할 수 없네.

      중생은 나처럼 선행을 할 힘이 없으니

      내가 이것을 하리라.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천한 일도 개의치 않고 일한다면

51  다른 이들이 천한 일을 하고 있는데

      내가 어찌 한가로이 있겠는가?

      자만심에 차 그 천한 일을 바라보지 말지니

      자만을 없애는 것이 제일이라네.


내가 모든 중생을 위해 부처의 지위를 얻어, 모든 중생을 유익하게 하겠다는 맹세를 했으니 반드시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남보다 뛰어나거나 우월하다고 자만을 해서는 안 됩니다. 


52  죽은 뱀을 만나면

      까마귀도 금시조처럼 구는 것처럼

      내가 무기력해지면

      작은 난관도 큰 장애로 다가오네.

53  주눅이 들어 자포자기한 이가

      어려운 처지에서 어찌 벗어나랴.

      자신감과 노력을 일깨운다면

      큰 장애도 나를 해칠 수 없네.


어떤 일을 할 때, 주눅이 들어 의기소침해 한다면 원하는 바를 절대 이룰 수 없습니다. 어려움에서도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스스로 할 수 있다면 자신감은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자신감을 가지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번뇌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지니고 있으면 번뇌조차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54  그러므로 마음을 굳건히 하여

      계를 범하지 않아야 하네.

      만약 계를 범한다면

      삼계를 정복하려는 것이 웃음거리가 될 것이네.

55  스스로 모든 허물을 이겨내야 하리라.

      나 아닌 그 누구도 대신 이겨낼 수 없네.

      승리자이며, 사자의 아들인 나는

      자긍심을 가져야 하네.


중생이 끊어야 할 아만은 ‘번뇌에 이끌리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의미하는 아만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아만은 번뇌에 이끌린 것이지만, 후자의 아만은 번뇌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감이기 때문입니다.


56  모든 중생은 자만 때문에 망하니

      번뇌 속에 자신감은 있지 않네.

      자신감에 찬 사람은 번뇌라는 적의 손아귀에 휘둘리지 않나니

      그는 아만이라는 적을 무찌를 수 있네.

57  아만으로 가득한 사람은 삼악도에 빠지며

      (설사 인간으로 태어난다 해도)

      빌어먹는 거지가 되어 사람들의 잔치를 망치네.

      가난하고, 추하며, 천한 이가 되어 모든 이의 멸시를 받네.

58  아만으로 똘똘 뭉친 고행자,

      그도 아만이 가득한 사람이라

      이보다 더한 비천함은 없네.


번뇌의 아만에 이끌려서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는 수행자라 해도 그가 자만에 찬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연민의 대상이 되니 “이보다 더 비천한 것”은 없습니다.


59  ‘아만’이라는 적을 이기기 위해 자신감을 지녀야 하나니.

      자신감을 지닌 이를 승리자, 영웅이라 하네.

      아만의 적이 퍼지는 것을 반드시 없애

      중생의 원대로 승리의 과를 이뤄야 하네.


여기까지 업의 자신감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번뇌의 자신감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60  번뇌의 무리 속에 있으면

      갖가지 방법으로 대처하여

      마치 여우 무리 속의 사자와 같이

      번뇌의 무리 속에서 벗어나야 하네.

61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눈을 보호하듯이

      고통스러운 상황이 생기더라도

      번뇌에 이끌리지 말아야 하네.


번뇌의 해악을 봄으로써 번뇌에 절대 휩쓸리지 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62  내가 불에 타 죽거나

      내 목이 잘린다 해도 개의치 않겠네.

      오만 가지 번뇌에게

      굽히지 않으리.

63  모든 상황에서 이치에 맞는 것만 하리라.

      놀이에서 즐거움을 바라듯이

      선업을 놓치지 않고 행하며

      선업 그 자체보다는 정진하는 즐거움으로 행해야 하네.


“모든 상황에서 이치에 맞는 것만 하리라.” 번뇌라는 적에게는 언제나 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 번뇌에 이끌리지 않아야 하는 번뇌의 자신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놀이에서 즐거움을 바라듯이” 이것은 환희력입니다. 자신감에 대한 설명은 끝났습니다. 여기에서부터는 환희력에 대한 설명입니다. 환희력은 선을 행할 때 즐겁고,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놀이에서 즐거움을 바라듯이 선업을 놓치지 않고 행하며 선업 그 자체보다는 정진하는 즐거움으로 행해야 하네.” 선을 행할 때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64  행복을 위해 행하지만

      행복할지 않을지 알 수 없네.

      선은 행복하니

      지금 선업을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65  칼날에 묻은 꿀처럼

      욕망은 충족되지 않네.

      변하고 사라지는 복덕에

      어찌 만족하는가?

66  일을 끝내기 위해

      한낮 더위에 시달리던 코끼리가

      물을 만나 연못 속으로 뛰어들 듯이

      선행에 거듭거듭 뛰어들어라.


선을 행함에 있어 먼저 절실함을 가지고, 마음 크게 내어 선업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뻐하고 좋아하며, 선행을 이뤄야 합니다. 이것이 환희력입니다.


다음부터는 방사력입니다.

67  기력이 쇠할 때에는

      잠시 쉬어야 하네.

      잘 마쳤다면

      나중을 위해 잠시 놓아야 하네.


일을 다시 하기 위해 잠시 놓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혜명상을 하든 지관상을 하든지 말입니다. 특히 초심자의 경우, 수행을 할 때 힘이 들면 몸은 가부좌를 하고 있지만 원하는 대로 집중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어떤 수행이건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력이 쇠할 때에는 잠시 쉬어야 하네.” 이전보다 더 잘하기 위해 때로는 잠시 쉬어야 합니다. 이것이 방사력입니다.


그리고 다음 내용은 이렇습니다. 실제 정념으로 수행을 할 때에는 할 바를 잘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지혜명상을 하든 관상을 하든 의식을 둔 대상에 집중을 하는지, 다른 것에 마음이 이끌려 해이해지는지, 정지로 살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68  전장에서 적과

      칼을 겨눌 때처럼

      번뇌의 칼날을 피해가며

      번뇌의 적을 무찌르고 포박하라.

69  싸우다 칼을 떨어뜨리면

      두려움에 칼을 재빨리 집어 들 듯

      정념의 무기를 놓치면

      지옥의 두려움을 기억하며 재빨리 집어 들어야 하네.


수행은 바로 정념에 의지해야 합니다. 집중의 대상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이끌려서 -마음이 해이해져- 망상을 피운다면 몸은 그대로 머물고 있지만 마음은 흐트러져 있으니 시간만 낭비한 셈입니다. 큰 허물이 됩니다. 비유하자면


70  독이 피를 타고

      온 몸으로 퍼지듯이

      기회만 있으면

      죄악은 마음을 퍼져 나가네.


그렇기 때문에 정념으로 의도한 대상이 그 어떤 것이든 그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게 정념으로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정념에 어떻게 의지하여야 하는가?


71  겨자기름이 가득한 그릇을 옮길 때,

      칼을 찬 이가 곁에서 ‘흘리면 죽이겠다!’ 며

      협박할 때처럼

      수행자는 그와 같이 집중을 해야 하네.

72  무릎에 뱀이 기어오르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는 것처럼

      잠과 게으름이 찾아오면

      한순간에 없애야 하네.

73  스스로 범한 허물 하나하나,

      반드시 반성하여

      나중에 같은 허물을 범하지 않도록

      결심하고 또 오래 기억해야 하네.

74  모든 상황에서

      정념으로 머물기 위해

      선지식을 만나고

      이치에 맞는 법을 구해야 하네.


여기까지 실수(實受)인 정념수행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행의 결과로 몸과 마음에 자재하다는 것은 정진수행에 습관을 들인 힘에 의해 나중에 선업을 이루는데 어려움이 없어 몸과 마음이 맑고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75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불방일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는 가뿐히 일어나야 하네.


어떤 수행을 하건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76  바람이 부는 대로

      버들가지가 움직이듯이

      즐겁게 (신구의) 삼업을 닦으면

      모든 선업이 쉽게 이루어지네.


이것으로 7장 정진품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