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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7. 입보리행론

7. 제5장 호계정지품

        [입보리행론] 제5장 호계정지품


작년에 [입보리행론] 제1장 보리심 공덕 찬탄품 부터 제4장 보리심 불방일품까지 마쳤습니다. 오늘(2004. 10.28)은 제5장 호계정지품 부터 하겠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수행자입니다. 특히 나란다의 법통을 잇는다면 공성과 보리심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공성과 보리심의 수행방법을 제시한 최고의 논서가 바로 [입보리행론]일 것입니다.


1  수행자가 배워야 할 것(학처學處)을 지키려면

    집중을 잘 해 마음을 지켜야 한다.

    이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학처를 지킬 수 없네.


보리심을 일으킨 후, ‘불방일’을 익히고, 정념과 정지에 의지해야 일으킨 보리심이 기울지 않고, 더욱더 증장한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바라밀 수행을 익혀야 하기에 모든 것이 정념과 정지, 불방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2  마음의 코끼리가 풀려 날뛰면

    무간 지옥의 해를 입히지만

    야생의 미친 코끼리는

    무간 지옥의 해를 입히지 못하네.


“마음의 코끼리가 풀려 날뛰면 무간 지옥의 해를 입히지만” 이것은 마음을 코끼리에 비유한 것입니다. 마음의 코끼리를 정념으로 붙들지 않고 풀어놓으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까닭에 악업을 저지릅니다. 그로 인해 다양한 업과 번뇌를 짓습니다. 그 결과, 세 가지 괴로움인 고고. 괴고. 행고가 끊임없이 생기는 것입니다. 특히 강한 고고를 겪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코끼리를 다스리지 못해 입는 해악을 보통의 코끼리는 입힐 수 없다는 뜻입니다.


3  모든 행을 ‘정념’의 밧줄로

    마음 안에 있는 날뛰는 미친 코끼리를 묶어두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선업이 손에 들어오네.


나가르주나께서 수행을 했을 당시, 인도에는 육체의 고통을 통해 수행하는 종교가 있었습니다. 불교의 수행에도 육체 수행이 있습니다. 절이나 꼬라 순례, 단식기도 등이 몸으로 하는 수행입니다. 진언이나 염불을 통해 하는 수행이 있습니다. “옴마니반메훔” 같은 진언은 구업을 닦기 위한 수행입니다. 반면, 공사상과 보리심, 염리심이나 무상관 같은 수행은 몸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입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바로 생각(의意)으로 하는 것입니다.


수행에는 신구의(身口意)-몸과 말과 생각-에 의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 의한 것입니다. 몸과 입에 의한 수행은 마음에 의한 수행만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게송을 통해, 인도의 몇몇 종교가 육체적 고행을 통해 업을 정화하거나, 육체적 고통을 수행의 중심으로 삼는데 반해 불교는 마음을 수행의 중심으로 삼는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는 마음을 통해 수행을 하기에 좀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 수행법 가운데에도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마음으로 하는 수행에 비해 염불이나 진언은 다소 쉬운 편입니다. 절 또한 그렇습니다. 많은 불자들의 경우, 대부분 몸과 입으로 하는 수행을 주로 합니다. 마음 수행이 어렵기도 하지만, 마음 수행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편입니다. 마음을 통해 하는 수행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마음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은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오늘은 즐거웠다”, 이렇게 우리가 항상 이야기하는 이 마음의 실체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존재에 대해 체험을 합니다. ‘이것’과 ‘저것’이라는 상념(상想)이 생기게 하고, 행. 불행의 느낌과 감정들을 만드는 그 모든 것은 의식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의식을 분류해 보면 심왕과 심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식’ 혹은 ‘마음’이라 하는 대상을 인지하는 것은 심왕이라 하고, 개별적인 마음 작용을 심소라고 합니다.


마이트레야께서는 [중변분별론]에서 “거기에 실체를 인식하니 의식이고, 그것의 차이, 마음에서 생겼네.” 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거기에 실체나 본질을 인지하는 것이 마음이며, 그 대상의 차별을 아는 것이 마음작용(심소心所)입니다.  ‘그것’이라는 지시대명사가 마음을 가리킨다면 그 의식의 차별, 대상을 분별하는 것이 마음작용인 것입니다. 아상가께서 지으신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의식을 8식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6식으로 설명하는 분도 있습니다. 보편적으로는 우리 의식을 6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색. 성. 향. 미. 촉의 다섯 대상을 파악하는 5식과 의식인 6식, 이를 둘러싼 심소는 51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느낌(수受), 지각(상想), 의도(행行), 선한 것과 불선의 번뇌인 다양한 마음작용을 51가지로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별적 대상에 대한 의식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식이란 무엇인가? 부파불교 가운데 설일체유부에서는 의식이 외부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통째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한편, 경량부에서는 의식에 형상이 함께 있어 의식에 대상의 상(像)이 비춰진 것을 인식한다고 주장합니다. 외부의 대상을 바로 인식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대상의 형상이 의식에 비춰진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像)이 있는 식(識)이라고 합니다.


설일체유부만이 상이 없는 식을 인정하고 나머지 학파는 영상(影像)을 가지고 있는 식(유상식有像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영상을 가지고 있는 (유상有像) 의식을 ‘명료한 의식’이라 한다면 감이 잘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명료한 의식을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식이 맑을 때 거친 분별들을 없앱니다. 지나간 일에 대한 분별도 없앱니다.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일들이 많이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모두 없애야 합니다. ‘앞으로 이렇게 해야겠다.’ 하는 계획이나 결심 등 미래에 관한 분별 역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과거와 미래로 향하는 생각을 끊습니다. 즉 생각이 분산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다 보면 평소의 생각-외부의 대상의 모양(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접촉(觸)에 대한 분별이 끊어집니다. 현재는 물론 과거로, 미래로 넘나드는 생각과 내면에서 치닫던 감정과 안팎의 인식이 외부로 향하던 감각을 막으면 뭔가 비어있는 느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보통 의식의 본질은 안팎의 다양한 형상에 의해 가려져 있다고 봅니다. 바깥의 형상과 기쁨과 고통의 감정 같은 다양한 상들이 마음의 본질을 모두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깥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내면의 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모두 차단합니다.  그 상태를 점차로 늘여나가고, 그것을 깊이 유지할 수 있다면 차츰 차츰 ‘명료한 의식’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의식이라는 것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이 무엇인지, 마음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외도의 가르침에서도 마음의 본성에 의식을 두고 명상을 합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우리 마음이 미세한 뇌신경에 의지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마음이 뇌에서 생성된 것, 혹은 뇌에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단 근래 와서 제기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2~3천 년 전, 외도들 가운데에도 전생과 내생을 인정하지 않는 외도들이 있었습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우리 몸에 있는 신경조직에 의지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근래에 심도 있게 제기되고 있는 주장 가운데에는 ‘뉴런’이라는 뇌신경조직에서 의식이 생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사상의 뿌리는 2~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몸에서 비롯된 것이다. 몸이 없어지면 의식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전생과 내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의식을 단순히 ‘인식하는 것’이라 한다면 의식이 몸의 감각에 의지해 생긴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고 개별적인 인식을 하지 않은 의식 그 자체가 명료한 상태의 ‘그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의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과학자들이 세밀한 시험을 통해 뇌신경의 변화가 의식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의식이 뇌신경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서서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오랜 수행을 통해 경지에 도달한 수행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을 때, 생각이 뇌신경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의식에는 거칠고 미세한 다양한 의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5식의 경우, 눈. 귀. 코. 혀. 몸(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오근과 같은 몸의 감각기관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5식은 분명 뇌신경에도 의지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형상을 보고, 색. 모양을 감지하는 것은 뇌에 의한 것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뇌신경이 부분손상이라도 입으면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다섯 감각기관에 의지해서 생기는 거친 의식 대부분이 분명히 몸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과 연결되어 있으며, 몸에 의지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의식에는 거친 의식과 미세 의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깨어있는 상태가 현재 의식의 상태입니다.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는 현재 의식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꿈속에서는 꿈속의 색깔과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에 거침과 미세함이 있는 것이 꿈과 깨어있을 때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혼절한 상태에서도 다시 깨어날 수 있는 의식의 잠재된 씨앗이 있습니다. 의식의 연속성이 존재하며 미세한 의식이 있습니다.


대개 인간이 죽는 순간, 가장 미세한 의식 상태가 됩니다. 예를 들어 몇몇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데, 죽은 후 바로 육신이 부패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제 스승이신 링 린포체의 경우, 13일 동안이나 유체가 전혀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제가 아는 어떤 이들은 2~3주 가 지나도록 유체가 썩지 않은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에 대해 미세한 의식이 유체에 머무는 동안에는 육신이 부패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뇌 조직은 죽은 상태입니다. 의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미 죽은 상태인 시체입니다. 그런 시체가 부패하지 않는 것은 아주 미세한 의식이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칠거나 미세한, 다양한 의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청정한 성질을 가진 의식에는 다양한 의식 상태가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의식 가운데에는 오온에 의지하는 거친 의식이 인식하는 의식으로 변하는 것은 이전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조건이 되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친 의식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미세한 의식의 흐름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혼절했다 다시 의식이 돌아올 때 그 이전의 미세한 의식의 흐름이 없으면 다시 깨어날 수 없습니다.


* 등무간연(等無間緣)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에서 말하는 네 가지 조건(사연 四緣) 가운데 하나. [구사론]에서는 인과 연을 자세히 분류하여 육인사연(六因四緣)의 이론을 전개했다. 여섯 가지 원인은 능작인(能作因). 구유인(俱有因). 상응인(相應因). 동류인(同類因). 편행인(遍行因). 이숙인(異熟因)을 말하며, 네 가지 조건은 인연(因緣). 소연연(所緣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육인(六因) 가운데 능작인은 4연의 증상연이며, 나머지 오인은 4연의 인연이다. 그러나 유식학파에서는 육인 가운데 동류인을 인연과 증상연에 통하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오인은 증상연이라고 했다.


인연은 직접적이며 내적인 원인을 말한다. 등무간연은 앞의 마음이 소멸하는 것이 다음의 마음을 생기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정신적인 현상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앞 순간의 마음과 바로 다음 순간의 마음은 시간적인 간격 없이 바로 연속해서 일어나며, 앞의 마음이 다음 순간의 마음의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다.

소연연은 인식의 대상이 인식을 생기게 하는 원인이라는 의미이다. 증상연은 앞의 3가지 조건 이외의 모든 원인을 말한다. 여기에는 다른 것이 생기는데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유력증상연有力增上緣)와 다른 것이 생기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원인으로 된다는 소극적인 경우(무력증상연無力增上緣)의 2가지가 있다.  


의식의 전후는 하나의 흐름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미세한 의식의 경우에는 의식의 계속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앞 의식이 없으면 뒤 의식도 올 수 없는 것입니다. 모태에서 수정체에 의식이 깃드는 순간이 바로 인간이 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느낌(수受)과 지각(상想)과 의지(행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은 의식의 흐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의 의식 흐름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태에 막 깃든 의식 이전에 의식이 없었다면, 그것이 뒤 의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논리로 전생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아닌 것이 의식의 가장 가까운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달마카르티(Dharmakirti, 법칭法稱)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미세한 의식이 의식의 원인이며 의식이 아닌 색이 의식의 근취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미세 의식에서 볼 때, 마음을 일으키기 이전에 마음이 없다면 다음 순간의 의식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마음 그 자체의 본성인 명료한 의식 상태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51종의 심소(심리현상)에는 근본번뇌 여섯 가지와 부수적인 번뇌 스무 가지가 있습니다. 51종의 심소와 연결되어 번뇌를 일으킬 때, 마음은 번뇌로 물드는 상태가 됩니다. 번뇌가 심소와 연결되어 일어날 때는 심왕이 번뇌에 물든 상태가 됩니다.


믿음과 자비도 심소와 연결되어 일어납니다. 믿음과 자비의 마음이 일어날 때 이와 상응하는 심왕은 선한 마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심왕 그 자체는 선. 악 그 이전의 것입니다. 심왕 그 자체는 선한 마음으로도, 악한 마음으로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번뇌는 좋지 않은 것(불선不善)이고 믿음 같은 것은 좋은 것(선善)입니다. 물론, 이때 믿음은 바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잘못된 믿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근거가 있는 믿음과 자비는 이유가 타당하기 때문에 뿌리가 탄탄합니다. 이와 반대로 지식도 번뇌를 일으키는 지식은 허물이 되며 뒤집힌 견해입니다. 바른 지식은 실상을 파악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바른 생각은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올바른 근거가 없는, 잘못된 생각은 그 뿌리가 탄탄하지 못합니다. 타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생기는 특성이며, 심왕은 시작이 없는 때부터(무시이래無始以來) 그 흐름을 지속해 왔습니다. 지금의 우리 몸은 한 생뿐입니다. 또한 우리 몸은 거친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몸을 통해 가질 수 있는 능력- 예를 들면 높이뛰기. 달리기 같은 운동은 몸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 몸은 거친 물질이며, 흐름이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친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뿐더러 ‘최고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비롯되는 자비나 믿음, 지혜 같은 미세한 흐름은 습성에 따라 ‘최고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청정하여, 본래 허물이 없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부처의 경지인 불지(佛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래장이라 이름 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본래부터 허물없이 청정하여 일체지를 이루는데 그 근거에는 여래장이 있습니다. 이것을 부처의 씨앗이라고 합니다. 어떤 중생이건 여래장이 있기에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번뇌에 물들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고통의 원인을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쪽으로 흘러 선업을 짓는다면 행복의 씨앗을 심는 것이며 나아가 불과(佛果)를 얻을 것입니다. 윤회와 해탈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며, 마음을 다스리고, 못 다스리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관해 포괄적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4  호랑이. 사자. 코끼리. 곰. 뱀 같은

    모든 모양의 적과

    지옥의 옥졸과

    야차와 나찰의 해악도

5  이 마음 하나 붙들면

    모든 것을 붙들어 맬 수 있으며

    이 마음 하나 극복하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네.

6  모든 두려움과

    한량없는 고통도

    마음에서 생기는 것을

    부처님께서 보이셨네.

7  지옥의 무기는

    누가,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가?

    타오르는 쇠의 땅은 누가 만들었으며

    여인의 무리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8  이런 모든 것은

    악한 마음에서 생겼음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네.

    삼계에서 마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네.


중생의 고통의 뿌리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에서 생긴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모든 삼계의 고통은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거친 형체를 가진 존재들은 의지처가 필요합니다. 바깥의 세상과 청정하지 않는 우리 육신은 업과 번뇌로 인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육신의 의지처인 안팎의 세계 또한 업과 번뇌에 의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친 육신뿐만 아니라 외부 세상 역시 업과 번뇌로 인해 생성된 것입니다. 우리의 업에는 신(身), 구(口)의 업과 마음으로 짓는 의업(意業)이 있습니다. 번뇌라는 것은 의식입니다.


의식이 어떻게 형체가 있는 물질의 원인이 되는가? 앞에서 의식의 씨앗은 반드시 의식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형태를 가진 물질의 씨앗은 물질이어야 합니다. 의식의 씨앗은 의식이어야 하고, 형체를 가진 물질의 씨앗 역시 의식이라면 의식의 씨앗이 반드시 의식이 아니어도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형태를 가진 물질의  경우, 씨앗이 그와 비슷한 종의 물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아닌 물질이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의식도 그것을 있게 하는 원인이 의식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거친 물질인 우리 육체의 경우도 씨앗은 이전의 사대(지수화풍地水火風)와 사대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사대로 이루어진 거친 물질이 생성된 원인을 찾아 그 이전의 형태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물질은 사대원소에 의해 생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의 최초 형태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의식에 시작이 없다.’고 하듯이 사대요소에 의해 생성된 물체 역시 처음의 시작점을 정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외부 환경이든, 인간이든 이전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태초에 세상이 생기기 이전은 공의 상태이며 아주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륜경전에 서술되어 있듯이, 세상을 이루는 요소는 큰 허공(허태공虛太空) 상태입니다. 이것이 외부환경을 만드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만든 생성물질이 ‘업의 결과’인지는 저 역시 확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이치를 해명하는 4가지 논리가 있습니다. ‘물의 젖는 성질’, ‘불의 뜨거운 성질’, ‘땅의 견고한 성질’, ‘바람의 움직이는 성질’은 자연의 상태, 속성이지 업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물체로 존재하는 것이 자연의 원리이지 업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성이 업에 의해 좌우될 수는 있습니다. 아주 미세한 씨앗인 큰 허공에서 비롯된 하나의 요인이 외부 환경을 생성하는 원인이 될 수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진화하는 가운데 진화 조건이 생명체의 업에 의해 좌우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중론]에서 “마음 그 자체가 중생계와 사대의 갖가지를 이루니 그것은 중생의 업에서 생기는 것이네. 마음이 없다면 업 또한 없다.”고 하신 것처럼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정화되지 않은 업에 의해 생성된 것입니다. 여러 조건 가운데 번뇌와 업에 의해 생성된 것입니다. 이것의 근취인(씨앗)을 본래 있던 것이라 해야 할지는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부터, 육바라밀 수행의 궁극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9  중생의 가난을 없애는 것이

    보시바라밀이라 한다면,

    아직도 굶주리는 중생이 있으니

    이전의 부처님들은 어떻게 피안에 이르셨는가?

보시바라밀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과거불들은 보시바라밀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이 됩니다. 왜냐면 아직도 가난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시바라밀을 이룰 수 있는가?

10  모든 것을 (보시에서 생기는) 결실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마음을

      보시바라밀이라 하셨으니

      보시바라밀은 마음에 의한 것이네.

보시바라밀이라는 것은 남김없이 다 베풀 수 있는 마음입니다. 보시바라밀은 물건만 베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1  물고기 같이 살아있는 생명 모두를

      살생할 수 없는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보다

      살생을 끊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지계바라밀이라 말씀하시네.

12  포악한 유정은 허공처럼 많기에

      그들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화내는 이 마음 하나 없애면

      모든 적을 없애는 것과 같네.

13  내 발을 보호하기 위해

      온 대지를 가죽으로 덮겠는가?

      내 발바닥에 가죽 하나 깔면

      온 대지를 덮은 것과 같네.

14  이와 같이 바깥 경계 또한

      내 전부 단속하기 어려우니

      이 마음을 단속해야지

      바깥 경계를 단속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적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욕바라밀이란 자신 안에 있는 분노나 미움을 없애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분노나 미움을 없애면 모든 적을 없애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15  좋은 마음의 행위(의업意業)를 한 번 일으킨 과보로

      범천에 태어날 수도 있지만

      몸의 행위와 입의 행위에 의한 과보는

      약하기에 그러기 어렵네.

16  염송과 갖은 고행을

      오랫동안 했다 할지라도

      산만한 마음으로 했다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네.

17  누구든지 수승한 법의 근본인

      마음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면

      고통을 없애고 안락을 얻으려 하지만

      그런 사람, 그저 의미 없이 윤회세계를 떠돌 뿐이네.


선정의 과보로 천상에 날 수도 있습니다. 천상의 공덕을 얻을 수 있는 것도 바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천상의 공덕은 마음이 선정 상태에 이르렀기에 얻는 과보이므로 마음의 공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정바라밀 역시 마음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지를 얻게 하는 지혜 역시 마음의 공덕이라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마음을 의미 있는 쪽으로 써야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마음이 되길..’ 이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좋은 마음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가 도움이 되진 않습니다.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쓰이기 위해서 먼저,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어떤 것이 나쁜 것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악에 대해 알고, 안 후에 잊지 않고 기억하며, 마음을 선한 쪽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정념으로 마음이 선을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에 정지(正知)로써 마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마음이 선을 향해 제대로 흐르고 있는지 정지로 점검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이 선한 쪽으로 흐르고 있는지, 번뇌에 물들어 있는지 아닌지 정직하게 지켜보아야 합니다. 만약 선한 마음을 유지할 수 없다면 적어도 선도 악도 아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이 번뇌로 향한다면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도 모두 망칩니다. 일시적으로는 물론 궁극적으로도 불행해 집니다. 이런 이치를 알아 마음을 선한 쪽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으면 최소한 선도 악도 아닌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지 아닌지 정지로써 살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8  그러니 이 마음을

      잘 지니고 바르게 지켜야 하리니.

      마음을 지키는 수행 외에

      다른 많은 수행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니 이 마음을 잘 지니고 바르게 지켜야..”는 정념으로 잘 지니고, 정지로 잘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수행 외에 다른 많은 수행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여기서는 몸과 입과 마음의 많은 수행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 수행’, ‘마음을 지키는 수행’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19  천방지축 날뛰는 무리 곁에선

      상처를 조심스럽게 감싸듯이

      악한 무리 속에 있을 때에는

      마음의 상처를 잘 보호해야 하네.

20  상처의 작은 고통도 두려워,

      상처에 주의를 기울일진대

      중합지옥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마음의 상처를 보호하지 않겠는가?

21  마음을 잘 보호하면

      악한 이들 속에 있거나

      여인들 가운데 있어도

      굳건한 계율은 기울지 않네.


샨티데바 스님께서 법문을 할 당시에는 비구들을 대상으로 법문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성 수행자의 경우, 단어를 바꾸면 될 것입니다. 비구니가 남자들 가운데 있더라도, 정념과 정지로써 마음을 지킨다면 계율이 기울지 않는다는 말일 것입니다.


22  나의 재물과 명예가 흩어지고

      육신이 쇠하고, 삶이 피폐해도 괜찮으며

      다른 선행이 기우는 것 또한 괜찮으나

      마음만은 결코 기울지 않아야 하리니.


여기서부터는 정념과 정지에 의지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23  마음을 지키는 이여!

      정념과 정지는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지키기를

      나 이렇게 두 손 모으나니.

24  병으로 쇠약해진 이는

      모든 일에 무기력하듯이

      무지로 인해 마음이 쇠약해진 이는

      선행을 베풀 수 없네.

25  정지를 갖추지 못한 중생은

      듣고, 생각하고, 수행을 한다 해도

      깨진 항아리의 물이 새는 것 같이

      정념에 머물지 못하네.

26  들어 믿음이 있는 이가

      정진을 열심히 한다 해도

      정지가 없으면

      그 허물로 인해 더렵혀지네.

27  ‘정지가 없음’이라는 도둑은

      정념이 쇠하면 쫓아오니

      많은 공덕을 쌓았다 해도

      도둑에게 빼앗긴 것과 같으니, 악도에 떨어지네.

28  번뇌의 이 도적떼는

      호시탐탐 노리다

      기회만 포착하면 선행을 빼앗고

      선취(善趣)의 생명조차 끊어버리네.

29  그러므로 정념으로

      사소한 것도 절대 놓치지 말아야하네.

      놓쳤다 하더라도

      악도의 해악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야 하네.


기억할 뿐만 아니라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일들은 막상 상황이 닥치면 합니다. 그리고 기억조차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취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술에 취하면 기억력이 떨어집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싸움을 하거나 망신을 당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망신을 당하는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뿐더러 또 다른 허물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념으로 사소한 것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하네.” 언제나 바른 기억이 기울지 않도록 항상 정념에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놓쳤다 하도라도 악도의 해악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하네.” 마음이 나쁜 곳으로 흐르거나 이끌릴 때,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고 금새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합니다.


        정념이 되기 위한 조건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30  스승과 법사의 가르침을

      외경으로 받들며

      복덕을 지닌 이를 공경할 때

      정념은 쉽게 생기네.


스승이나 선한 사람과 함께 할 때, 좋은 성품을 지닐 수 있습니다. 함께하는 이가 나쁜 사람이면 특히 싸움질이나 하고, 도박이나 하고,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술이나 퍼마시는 사람들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물들어 갈 것입니다. 반대로 항상 사려깊이 행동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어느새 그 사람의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스승과 함께 하고, 법사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배우는 이가 취하고 버릴 것을 구별하고 또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손해가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통해 일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짓말을 해서 일시적으로 위험한 순간을 모면할 수도 있을 테고, 도둑질을 하면 돈이 많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손익과 궁극적인 손익을 잘 알아차려야 합니다.


31  불. 보살님께서

      자유자재로 중생을 굽어보시니

      당신들 앞에

      언제나 제가 있습니다!

32  하여, 항시 부끄러움과 공경,

      두려움으로 받듭니다.

      이렇게 부처님을 기억하니

      정념이 거듭거듭 생겨나네.

33  항시 정념이 마음에 머물도록

      노력해야 하네.

      그럴 때, 정지는 이루어야질 것이며

      사라졌다 해도 다시 되돌아오리라.


기억이 기울지 않도록,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제대로 안다면 정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즉 정지가 성립되는 하나의 원인은 정념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정지가 성립되는 주요인은 몸과 마음의 상태를 거듭 살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정념과 정지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율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34  산업과 구업이 일어날 때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려

      그 순간 나무와 같이

      흔들림 없이 머물러야 하네.

35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들로 인해

      산만해지지 말아야 하리니.

      언제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말아야 하네.

36  응시로 인한 눈의 피로를 풀기 위해

      가끔 주위를 둘러보아야 하네.

      그때 혹시 사람이 눈에 띄면

      반갑게 눈인사를 할지니.

37  길을 갈 때,

      위험한 것은 없는지 재차 살펴보고

      쉬었다 떠날 때에는

      머문 자리를 잘 살펴야 하네.

38  앞뒤를 잘 살펴

      오갈 것이며

      모든 순간,

      상황에 적절하게 행할지니.


우리가 일상에서 길을 오갈 때나 무엇을 쳐다볼 때, 시장을 가거나 속인들 집에 갔을 때, 언제 어디서나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정념으로 지키고,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9  몸이 어떻게 머물지

      항상 염두에 두어

      자신의 몸이

      어떻게 머무는지 잘 살펴야 하네.


몸가짐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침에 기도를 할 때에도, 몸가짐을 정념으로 바르게 해야 합니다. 가부좌를 하고 몸을 바르게 세우고 있는지 살핍니다. 이렇게 몸가짐을 정념으로 살피고, 정지로 제대로 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점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40  산란한 마음의 미친 코끼리를

      법이라는 마음의 기둥에 묶어

      달아나지 않도록

      갖은 노력으로 점검해야 하네.

41  언제나 선정에 머물 수 있도록 노력하며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점검해야 하네.


몸의 상태를 살피는 것 못지않게 선한 마음이 나쁜 쪽으로 흐르지 않도록 정념으로 지키고, 정지로 점검해야 합니다. 특히 마음이 선정에 들었을 때, 마음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을 선한 상태에 두든지 선도 악도 아닌 상태에 두든지 의식은 오로지 의식을 둔 그 대상에 머물게 합니다. 하나의 마음으로, 한순간도 산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정에 들었을 때, 반드시 정념으로 대상을 잊지 말고 대상에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이렇게 하고 있는지 정지로 거듭거듭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42  생명을 위협 받거나 모임(법회)에 참석했을 때

      만일 작은 계를 지킬 수 없다면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좋으니,

      보시행을 할 때에도

      계를 개차법으로 행해야 하네.


여기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에는 일반적인 경우와 예외적인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43  무엇이든 결심하고 시작했으면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열심히 실천하면

      이룰 수 있나니.

44  이렇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네.

      산만하게 굴면 둘 다 이루어지지 않네.

      정지가 없을 때 생기는 부수적인 번뇌는

      이래야 늘지 않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할 때, 처음 시작한 것을 끝까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작만 하고 도중하차를 하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45  쓸데없는 잡담이나

      신기한 구경거리에

      빠져들더라도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하네.

46  이유 없이 흙을 파거나 풀을 뽑거나

      땅에 그림을 그릴 때,

      여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는 두려워하며

      바로 멈추어야 하네.

47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말을 하고 싶을 때

      먼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살펴

      마땅히 이치에 맞게 행할지니.

48  한순간, 마음에 애착이 일어나거나

      화가 날 때,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말며

      움직이지 않는 나무같이 머물러야 하네.

49  들뜨거나 게으른 마음이 생길 때,

      자만하거나 거만해질 때,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려는 생각과 말이 일어날 때,

      속이려는 마음이 일어날 때,

50  스스로를 치켜세우려 하거나

      남을 얕보고 업신여기거나

      비방이나 입씨름을 랄 때

      마치 움직이지 않는 나무같이 머물러야 하네.

51  재물과 존경, 명성을 원하고,

      하인을 부리고 싶은 생각이 들거나

      내가 공경 받기를 바랄 때

      움직이지 않는 나무같이 머물러야 하네.

52  이타심이 사라지고

      자신만의 이익을 챙기는

      말을 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

      움직이지 않는 나무같이 머물러야 하네.

53  참을성 없고, 게으르고, 비굴하게 굴고,

      고집 부리고, 망언을 일삼고,

      파당을 짓는 마음이 일어날 때

      움직이지 않는 나무같이 머물러야 하네.

54  항상, 번뇌를 일삼고

      부질없는 일을 좇는 마음을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치법으로

      단단하게 지켜야 하네.

55  부처님에 대한 큰 믿음으로

      존경과 겸양의 예의를 갖추며,

      부끄러움을 알고, 인과의 두려움을 알며,

      부드러운 인상으로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할지니.


선행을 할 때 확실한 목표를 갖고,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기꺼이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생각과 행이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존경과 겸양의 예의를 갖추며, 부끄러움을 알고, 인과의 두려움을 알며, 부드러운 얼굴로 타인을 위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것을 익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56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의

      고집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네.

      번뇌로 인해 생긴 것이니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해야 하네.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의” 우리의 선한 마음을 기울게 하는 악조건 가운데 하나는 나쁜 이들과 어울리는 것입니다. 나쁜 이들과 어울리다 보면 허물이 생기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물이 들고 맙니다.


57  언제나 자신과 중생들이

      비난 받지 않는 일을 하도록 하며

      환영과 같은 (자신의 행위에) 아집을 내지 않는

      이러한 마음을 항상 지녀야 하네.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욕심을 보거든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고,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말며, 또한 포기하지 않고 한결같이 사랑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58  오랜만에 귀한 인간의 몸을 얻었음을

      자주 떠올려

      수미산처럼

      굳건하게 지녀야 하네.


산란한 마음이 정념과 정지를 약하게 하는 원인인데, 그 중에 하나가 우리 육신에 대한 집착입니다. 육신에 대한 집착이 정념을 약하게 하고 산란함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이 지니는 허물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59  독수리가 시체에 붙어있는 살점을 탐하여

      뜯어먹는 것을 보면서도

      마음 그대여! 혐오스럽지 않다면

      지금 어찌하여 이 몸을 그토록 애호하는가?

60  이 몸을 내 것으로 집착하여

      너, 마음이여! 어찌 보호하려는가?

      너와 이 몸, 둘이 각각인데

      이 몸을 보호하는 것이 너한테 무슨 이익이 있는가?

61  어리석은 마음이여!

      너는 어찌하여 나무와 같은 깨끗한 몸을 지니지 않았는가?

      더러운 것들로 뭉친 이 몸은 썩어 가는데

      그것을 돌봐 무엇 하겠는가?

62  먼저 껍질부터 차례대로,

      생각으로, 구분해 보라.

      살점도, 뼈의 그물도,

      지혜의 칼로 한 면씩 잘라보라.

63  뼈까지도 따로 추려내어

      골수까지 볼 일이니

      여기에 어떤 실체가 있는지

      스스로 따져보라.


우리 몸은 32가지 부정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본래 더러운 것입니다. 이 육신을 만든 것은 부모의 정혈입니다. 이 또한 깨끗하지 않은 물질입니다. 부모의 정혈로 이루어진 육신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펴봅시다. 피부와 근육, 힘줄, 뼈 그리고 골수까지, 전부가 부정한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음식은 우리 몸 안에서 배설물이 됩니다. 우리 몸을 생성하는 원인을 보아도, 몸 그 자체를 보아도, 몸에 들어간 음식의 결과물을 보아도 온통 더러운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4  이처럼 애써 찾아봐도

      몸에서 그대가 실체를 보지 못하는데,

      아직도 어찌하여 애착으로

      이 몸을 지키려 하는가?

65  그대는 몸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먹을 수도 없으며

      피를 마실 수도 없으며

      내장 또한 삼킬 수 없으니

      이런 몸을, 그대는 어디에 쓰려하는가?

66  독수리나 늑대 먹이가 되기 위해

      이 몸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네.

      모든 인간의 몸은

      선행을 베푸는 데 쓰여야 하네.


인간의 몸은 본래 부정하고 쓸모없지만, 이 몸으로 큰 뜻을 펼칠 수 있고 선행도 베풀 수 있습니다. 보리심 역시 인간의 몸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인간의 몸이 아닌 다른 몸으로는 보리심을 수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공성 역시 인간이기에 수행할 수 있는 것이지 다른 몸으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67  그대가 그토록 보호하여도

      저승사자가 무자비하게 빼앗아

      새나 개에게 준다면

      그때, 그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68  제멋대로 구는 종에게

      품삯을 주지 않는 것처럼

      이 몸을 돌보아줘도 제멋대로 구는데

      그대, 어찌하여 고생스레 돌보는가?

69  이 몸에게 품삯을 주어

      이제부터는 내 뜻에 맞추도록 하라.

      쓸데없는 몸에겐

      아무 것도 주지 말아야 하네.

70  이 몸을

      가고 오는 수단인 배로 여기며,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보배로운 몸이 되도록 해야 하리.

71  얽매임 없이 자유로이,

      언제나 미소를 띠며,

      화난 표정과 찌푸린 인상은 모두 버리고

      중생의 친구가 되고, 진실하게 대해야 하네.

72  의자 같은 물건을 옮길 때

      조심성 없이 소리 내어 옮기지 말고

      문도 거칠게 열지 말며

      항상 조심스러워야 하네.

73  물새나 도둑고양이는

      소리 없이 살짝,

      먹이를 낚아채네.

      보살도 항시 그렇게 행해야 하네.

74  남을 지혜롭게 격려하고,

      청하지 않은 충고의 말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항상 모든 이의 제자가 되어야 하네.

75  모든 바른 말을

      선업의 말씀이라 여겨야 하며

      복을 짓는 이를 보면

      찬탄하며 기뻐해야 하리.

76  그가 없을 때 덕을 말하며,

      다른 이의 덕을 말할 때는 함께 칭송하며

      자신의 덕을 말할 때에는

      그런 덕이 있는지 잘 살펴야 하네.

77  보살의 갖은 노력을 모두가 좋아하니

      이것은 돈으로도 살 수 없네.

      그러므로 다른 이가 행한 덕행을

      기쁨으로 여겨야 하네.

78  이생의 나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내생에도 큰 행복을 누릴 것이니.

      그렇지 못한 허물 탓에 기쁨은 없고 고통뿐이니

      내생 역시 고통스러울 것이네.


이 말씀들은 타인과 어울리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업을 짓게 하는, 나쁜 벗을 멀리할 자유가 있습니다. 자신의 육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이렇게 무엇을 하든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정념과 정지로써 구분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면 현생에서 행복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대화법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79  말은 마음과 같이

      앞뒤가 맞고, 뜻은 분명하게, 호감을 갖게 하며,

      집착과 분노가 끊어져 부드러우며,

      상황에 맞게 해야 하네.


        표정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80  유정을 바라볼 때

      그들이 있기에

      내 부처 될 수 있음을 알아,

      온전히 자애롭게 보아야 하네.


대상에 따라 특히, 공덕을 갖춘 승가나 스승, 은혜의 복전인 부모, 불쌍하고 고통 받는 중생을 도우면 큰 선업이 됩니다. 반대로 그들에게 해를 입히면 큰 악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81  항시 선행에 힘쓰고,

      번뇌는 대치법을 일으켜 다스리고

      공덕과 이익의 복전이 되게 하며,

      고통 당하는 중생에게 큰 이익이 되게 해야 하네.

82  지혜와 신심을 가지고

      선업을 항상 행할지니,

      선업을 행할 때에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아야 하네.


스스로 자율적으로 행해야 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83  보시바라밀과 같은 육바라밀을

      점차 힘써 증장시키며

      작은 이익을 위해 큰 뜻을 버리지 말며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하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에서, 보시나 지계보다는 선정이나 지혜가 더 힘든 수행입니다. 점점 수행이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시나 지계바라밀 같은 수행이 몸에 밴 후, 위 단계의 수행인 선정이나 지혜에 대해 점차적으로 수행해 갈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금지된 것을 필요에 의해 뜻을 저버리지 말며, 작은 뜻을 위해 큰 뜻을 버리지 말며, 얕은 것을 위해 깊은 뜻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비천한 것을 위해 수승한 뜻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84  이렇게 바로 알아

      항상 타인을 이롭게 하기 위해 노력할지니.

      대자비를 지니신 이께서 멀리 내다보시어

      소승에서 금지된 것을 대승에서는 허락하셨네.


어떤 행위건 금지나 필요에 따라 행해야 하나, 가장 주된 것은 이타의 관점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타’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대자비하신 여래께서 멀리 내다보시어 때로는 성문. 연각에게도 금하신 것을 보살들에게는 허락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85  동물, 병자, 의지할 곳 없는 이,

      수행자들에게 보시를 하고

      분수에 맞게 먹으며

      세 가지 법의 외에는 모두 베풀어야 하네.


법의는 자신의 피부와 같은 것이므로 지녀야 하며, 그 외 다른 의복은 다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86  정법의 정진에 써야할 이 몸을

      사사로운 일로 소모하지 마라.

      그렇게 한다면

      중생의 원을 속히 이루게 하리라.

[집학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육신은 물론 재물 역시 타인을 위해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적절한 시점이 아니면 베풀지 말고 잘 지니고 있어야 하며, 타인을 위해 써야 합니다.


87  뒤집힌 자비심으로

      이 몸을 쓰지 말며,

      이생과 다른 생에서도

      반드시 보리를 이루기 위한 씨앗으로 써야 하네.


여기까지 물질보시(재시財施)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은 법보시(법시法施)에 대한 말씀입니다.

88  존경심이 없는 이에게 법을 설하지 말며

      아프지도 않으면서 머리를 싸매거나

      양산이나 지팡이, 무기를 지녔거나

      머리를 천으로 가린 이에게 법을 설하지 말라.*

89  소승에게 대승의 넓은 법을 설하지 말며

      남자가 없을 때 여자에게 설하지 말며

      소승과 대승의 법을 똑같이

      존중하며, 모두 행해야 하네.


“남자가 없을 때 여자에게 설하지 말며” 라는 구절은 비구의 경우, 다른 비구나 다른 남자가 없을 때 여자에게 법을 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법을 설하는 이가 비구니라면 여성 도반이 없이 남자에게 법을 설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소승법과 대승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에게 깊고 넓은 법을 설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에게 법을 설하면, 수긍하지 못하고 그릇된 견해를 가지거나, 오해하기도 합니다. 또는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한 이’에게 넓고 깊은 부처님 법을 함부로 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 법에 깊이와 넓이가 따로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분명, 법에 따라 차이는 다소 있지만 소승과 대승의 법을 똑같이 존경해야 합니다. 소승법이라 해서 단순히 낮은 것으로 여기거나 대승의 법이라 해서 더 나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법에 넓이와 깊이를 달리해 설하신 것은 중생의 성향과 기질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중생 각자의 근기에 따라 도움이 되고, 각 중생에게 가장 적합한 법을 설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대승과 소승 모두 존경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끔 우리도 이런 짓을 합니다. 대승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소승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다소 얕잡아 봅니다, 소승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대승법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다.”고 합니다. 같은 대승법 안에서도 밀교는 “법이 아니다.”라고도 합니다. 한편 밀교수행을 특별하게 여겨 육바라밀 수행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각자의 성향이 다르고 근기가 다름을 알아 다양한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중요합니다.


90  광대한 법의 그릇을 지닌 이에게

      소승의 법을 담지 말며,

      지계행을 버리지도 말며

      현교와 밀교로 자신을 기만하지 말라.

91  치목이나 침을 뱉고 나면

      안 보이게 덮어야 하며,

      용변을 본 후 사용한 물을

      거리에 함부로 버리는 것은 흉이 되네.

92  음식을 한 입에 우겨넣거나

      쩝쩝대지 말고, 입을 벌리고 먹지 말며,

      다리를 쭉 뻗고 앉지 말며

      팔짱을 끼고는 교만스럽게 굴지 말아야 하네.

93  탈 것이나 침실에서

      여인과 단 둘이 있지 말며

      세속인들이 불쾌하게 여길 짓은

      삼가야 하네.

94  길을 물어올 때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말며

      공손하게 오른손으로,

      손을 펴서 가리켜야 하네.

95  팔을 크게 흔들지 말고

      작은 손짓으로,

      손가락을 튕기는 정도의 소리로 신호를 해야 하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율의에서 벗어나네.

96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처럼

      오른쪽으로 누워야 하네.

      잠들기 전에

      반드시 정지를 세워 지녀야 하네.


여기까지 먹는 법, 법을 설하는 법, 길을 가는 법, 자는 법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 88번 :

인도불교의 역사성이 배어있는 대목이다. 법을 배우러 온 이가 아니라 시비를 하러 오거나 머리에 띠를 둘러 시위를 하거나 지팡이 등의 무기를 지니고 폭력을 행하거나 회교도처럼 머리에 두건을 두른 이교도 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이제부터는 호계정지품에서 말씀하셨던 내용을 요약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97  보살의 행에 대해

      수없이 말씀하신 것으로,

      마음을 닦는 행이

      확고해질 때까지 행해야 하네.

98  낮밤으로 세 번씩

      삼취경(三聚經)*을 독송하며

      부처님과 보살님께 의지하면

      남은 죄가 소멸되리라.

99  자의든 타의든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말씀하신 그대로를

      매순간, 익히기 위해 노력해야 하네.

100  보살에게 배움이 아닌 것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

        그렇게 임하는 지혜로운 자에게

        공덕이 되지 않는 것은 없네.

101  직접이든 간접이든

        중생 이익을 위한 일이 아니면 행하지 말며,

        오로지 중생의 이익을 위하고,

        모든 행은 깨달음을 위하여 회향해야 하네.


선한 마음으로 중생을 대하고, 몸과 입과 마음의 세 가지 행위 모두가 중생의 이익을 위하고, 중생을 위해 회향을 한다면 중생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일체지를 얻는 원인이 됩니다. 또 한편으론 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나가르주나는 [고귀한 화환]에서 “대지와 물과 불, 바람과 보병, 나무가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것처럼 언제나 중생을 위하여 이 몸을 쓰이게 하소서.” 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입보리행론]에서도 “지대를 비롯한 사대원소와 영원한 허공조차 무량한 중생 삶에 갖가지 바탕이 되게 하소서.” 하고 하셨던 것입니다.


수행을 하려면 선지식에게 의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버리고 취할 바를 보이시는 존재가 선지식입니다. ‘스승’은 명칭뿐만 아니라 선지식으로서 자질 역시 갖춘 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항상 선지식은 대승의 가르침에 정통하고, 보리심의 범행인 교학과 수행의 두 가지 덕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승의 가르침에 정통해야 합니다. 대승의 가르침에 정통하면, 소승의 가르침에도 정통합니다. 소승의 가르침에 정통하다 해도 대승의 가르침에는 정통하지 않을 수 있지만, 대승에 정통하면 당연히 소승에는 정통합니다. 그처럼 밀교에 정통하면 현교에 정통합니다. 현교에만 정통하다면 밀교에 대해 모를 수도 있습니다.


‘자격을 갖춘 상태’ 즉 위 단계의 교학과 수행을 갖추고 있으면 아래 단계의 법은 알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 단계의 법에 정통하다 해서 위 단계의 법을 알 수는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승의 가르침에 정통하고..”는 대. 소승의 길을 보임에 있어 정통하고 들음(문聞)의 덕을 갖추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리심의 수행은 교리에 밝거나 배움의 덕이 있다 해도 수행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림 속의 꽃’과 같습니다. ‘그림 속의 꽃’은 제 역할을 할 수 없듯이 문자의 의미에 대해서는 통달했다 할지라도 그 참뜻을 모른다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들은 대로 성취하고 보리심을 발하여 범행에 머무는 스승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받들 수 있어야 합니다. 선재동자의 일대기에 실린 이 말씀은 [화엄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국에서도 화엄경이 있지요? [화엄경] 가운데 선재동자의 일대기에 있는 입법계품의 스승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할 것입니다.


* 삼취경(三聚經)

석가모니 부처님을 위로 35분 부처님께 죄악을 참회하며 예경하고, 복덕을 수희찬탄하며, 보리심에 회향하는 내용의 짧은 경전이다. 산스크리트어본과 티베트어 번역본만 남아있다.


104  많은 경장에서 배워야할 바(학처學處)를 보이셨으니

        반드시 경전을 읽어야 하며

        특히 [허공장경]은

        맨 먼저 보아야 하네.

105  항상 보아야 할 것은

        보다 자세한 [집학론(대승집보살학론)]으로

        반드시 보아야 하네.


그리고 이보다 더 포괄적인 샨티데바의 [집학론]도 보살이 반드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06  더불어 간추려 놓은

        [집경론(集經論)]도 때때로 보아야 하니.

        존귀하신 나가르주나께서 지으신

        두 가지 경서도 부지런히 보아야 하네.


스승이신 쿠누 린포체 말씀에 따르면 샨티데바께서 지으신 [집경론]이 티베트어로 옮겨지긴 했지만 논장에는 이런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가르주나께서 지으신 [집경론]은 논장에 있습니다. 하지만 나가르주나께서 지으신 [집학론]은 ‘있었다.’고 하는 주장과 [집경론]은 있었지만 [집학론]은 ‘없었다.’고 하는, 두 가지의 주장이 있습니다. 갤첩 린포체께서는 이런 논쟁에 대해, ‘두 가지’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두 번째’로 해석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2권도 부지런히 보아야 한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즉 나가르주나께서 지으신 [집경론] 2권을 의미합니다. 샨티데바께서 지으신 [집학론]과 [집경론]도 있지만, 여기서는 나가르주나께서 지으신 [집경론]을 부지런히 보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107  모든 경장에서 ‘행하라.’한 것은

        열심히 행하고

        세속적인 마음을 단속하기 위해서

        보살이 배울 바를 잘 알아, 바르게 실천해야 하네.

108  몸과 마음의 상태를

        거듭거듭 살피는 것,

        이것을 한마디 요약하면

        정지(正知)를 지키는 것이라 하네.


거듭거듭 몸짓과 말, 행동을 살피는 것이 정지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109  몸으로 이렇게 실천해야 하는데

        말로만 한다면 무었을 이룰 수 있겠는가?

        치료법을 읽는 것이

        환자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여기까지가 [입보리행론] 제5장 호계정지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