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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0.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가르침

7. 고행(苦行)의 의미

7. 고행(苦行)의 의미

 

 

 

 

몸은 마음의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몸은 소리에 따르는 메아리, 형체에 따르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만 자기 몸뚱이에 대해 집착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몸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 불교의 고행생활(苦行生活)입니다.

 

 

 

 

불교에서나 기독교에서나 고행(苦行)이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좋고 무엇 때문에 쓸데없이 몸을 괴롭히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우리 평범한 중생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고행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쉽게 생각하기 전에 왜 성자들이 괜히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40일이나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야 밥 한 끼도 굶기 어려운 것인데,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하셨습니다. 직접 단식을 해보면 우리 몸이라는 것이 꼭 지금 우리가 먹는 만큼의 칼로리를 먹어야만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월남의 메디콩 스님이라는 분은 반체제(反體制)에 저항하던 중 정부로부터 구속당해서 옥중에서 100일 동안 단식을 했습니다. 옥중에서 물만 먹고 100일 동안 살았는데, 그것도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두 시간씩 하루 네 시간 동안 염불을 했습니다. 옥중에서야 몰래 무엇을 먹을 수도 없는 일이니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저도 40대의 나이에 광주 동광사에서 지도법사로 일주일에 두 번씩 가서 법문을 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 다녔습니다. 지도법사로 가서 법문을 할 동안 보름동안 단식을 했는데, 법문에 가려고 하면 주변에서 만류를 합니다. 보름동안 단식을 하고 가서 쓰러져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평소에 말더듬이였습니다만, 보름동안 단식을 하고 나서는 말 한번 더듬지 않고 평생에 처음으로 말을 참 잘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에 몸이 즉 마음이요, 마음이 즉 몸입니다. 몸이 건전하면 마음도 건전하고 몸이 취약하면 마음도 취약합니다. 몸은 마음을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눈썹하나, 치아 하나 모두가 그렇습니다. 관상을 보는 사람들은 치아의 모습만 보고도 성품을 압니다. 따로 수행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머리 색깔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을 압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생명은 우리 마음인 식(識)에 있습니다. 몸뚱이는 보조에 불과하고, 몸뚱이를 유지하고 있는 영양도 보조에 불과합니다. 모두가 단식을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생명의 본질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우주의 본바탕이자 우리 인생의 본바탕이고, 몸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따라 50년이고 80년이고 인연 따라서 쓰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뚱이를 귀하게 여겨 봉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몸을 너무 귀하게 여기면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 몸만 귀하게 여기다보면 남의 몸뚱이는 별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 것은 다 좋아 보이니 자기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의 몸뚱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그야말로 싸움의 바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몸은 마음의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몸은 소리에 따르는 메아리, 형체에 따르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만 자기 몸뚱이에 대해 집착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몸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 불교의 이른바 고행생활(苦行生活)입니다.

 

따라서 불가의 수행자는 무얼 많이 먹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야 좋은 옷 걸치고, 좋은 음식 먹고 다니는 사람, 즉 자기 몸을 높이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지만 불가에서는 제일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제일 높은 스님이 아닙니다. 될수록 골라서 누더기를 입는 것이 더 좋습니다. 가장 못 먹고, 가장 못 입고, 가장 못 살면서도 정신적인 면으로는 최고로 생활하는 것이 출가 수행자의 본분인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공덕이 높은 사람들은 네 가지 행동에 의지한다(行四依)고 했습니다. 첫째가 분소의(糞掃衣)입니다. 똥 밑씻개나 할 만한 누더기를 주어다가 깨끗이 빨아 누벼서 옷을 해 입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수하좌(樹下座)입니다. 편안하니 집 가운데서 자지 말고 항상 나무 밑이나 돌 위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상걸식(常乞食)입니다. 먹을 것은 얻어서 먹고, 얻어서 먹더라도 많이 먹지 말고 주먹밥으로 하나 정도만 먹습니다. 네 번째는 부란약(腐爛藥)입니다. 병이 생겼을 때는 길거리의 소똥을 발효시켜서 만든 약만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당시 수행자의 표본입니다. 이와 같이 청빈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수행자들은 그때의 사람들과 근기(根機)가 같지 않기도 하거니와 다 같이 모여서 공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절이 생기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기본 정신은 항상 마음에 두고 있어야 참 수행자로서 청빈하고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