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몸의 허망함
몸은 중생의 업력기관으로, 각각의 원소가 잠시 가화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의 번뇌 중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번뇌가 무엇인가 하면
지금 인연 따라 가화합된 몸뚱이가 소중하다는 번뇌입니다.
생명의 근본이 되는 불성은 매우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더러는 순교의 길을 택하고 더러는 자기 몸조차도 불살라서까지 공양을 합니다. 이것을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고 합니다.
예수 같은 분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피하려고만 했으면 얼마든지 필할 것인데, 짐짓 십자가에 올라갔습니다. 생명의 실상을 변증한 셈입니다. 사람 몸뚱이는 허망한 것이고, 사람의 진정한 몸뚱이는 마음에 있다는 것을 변증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생명의 실상을 생각할 때는 사바세계(裟婆世界)의 허망함에 대해 깊이 동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관론(止觀論)에 보면 몸이라는 것을 중생의 업력기관(業力機關)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이라는 것은 중생의 업을 짓는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을 지어 놓으면 그 업의 여러 가지 조합으로 가짜로 화합(假和合)합니다. 우리 몸도 이렇게 가짜로 화합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연(緣)을 따라 무엇인가가 되어 태어납니다.(從衆緣生)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도 주로 12인연법(因緣法)으로 깨달으신 것입니다.
당장 우리 인생의 전생만 생각해봐도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고,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무엇이었으며,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이런 문제만 생각해봐도 제대로 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나는 엄마의 뱃속에서 나왔다는 사실 하나는 알지만, 그 전에는 무엇이었는지, 어머니의 태(胎) 속에서 자라고 나오기 전까지는 내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의 근원을 소급해서 올라가고 올라가서 뚫고 나가면 결국은 ‘우주의 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합니다. 이렇게 생각해서 올라가면 갈수록 마음이 하나로 모아집니다. ‘우리의 전생이 무엇인가? 무엇인가?’ 이렇게 하나의 생각을 파고 들어가면 집중력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산란하여 집중이 되지 않으면 항시 상대적인 의식에 머물고 마는 것인데, 마음이 하나로 딱 모이면 집중력이라는 것이 생겨서 의식으로부터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 제9암마라식으로 쭉쭉 들어갑니다. 원래우리 정신의 근본 뿌리가 불성이기 때문에 딱 한번만 정신을 집중시키면 그 힘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차근차근 깊이 스스로 파고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과거세(過去世)의 선근(善根)도 많기 때문에 훨씬 더 명상하는 힘이 강했습니다. 그런 분이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계속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과거가 확 열려버렸습니다.
도인들이 공부해서 마음이 열려올 때, 맨 처음에 얻는 신통이 바로 숙명통(宿命通)입니다. 숙명통은 과거전생을 다 아는 능력입니다. 숙명통을 얻고 나면 지금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과거를 알고 보니 천상정토(天上淨土)인 도솔천(兜率天)에 있는 하나의 영체(靈體)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영체로 헤매다가 지금 자기의 어머니ㆍ아버지의 인연파장에 걸려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몸뚱이가 생기고, 어머니의 태 안에서 영양을 섭취해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산소, 수소, 질소, 탄소 같은 것들이 가화합을 이루고 모여 ‘나’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몸은 중생의 업력기관으로, 뭇 인연을 따라서 생겨난 것인데 이것이 실체는 아닙니다. 각각의 원소가 임시로 잠시 가화합되어 있는 것이고, 화합돼서는 잠시도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생의 번뇌 중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번뇌가 무엇인가 하면, 지금 인연 따라 가화합된 이 몸뚱이가 소중하다는 번뇌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물리학을 떠올려서 내 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내 몸은 각 분자(分子)가 합해져서 된 것입니다. 바람기운이나 불기운이나 물기운, 흙기운 같은 각 원소의 기운이 잠시 인연 따라서 합해 있는 것이 이 몸뚱인데 중생들은 이 몸뚱이를 애지중지합니다. 몸뚱이는 죽고 나면 산소는 산소대로, 수소는 수소대로 다 흩어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죽고 나면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영체(靈體)가 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머니의 태 안에 생명이 생겨날 때도, 그것을 하나의 물질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들어오는 영혼은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영이 없다고 합니다. 사람은 다만 부모님의 피가 결합되어서 하나의 생명이 된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물질 너머를 보는 도인들의 안목으로 보면, 물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의 생명이 있는데, 이 생명이 과거에는 사람도 되었다가 짐승도 되고 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생을 거치며 헤매다가 때마침 어떤 부모와 인연의 파장이 서로 맞으면 그때는 걸려서 태 안으로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인연이 맞아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한 세상 살다가 다시 죽으면 우리 몸은 또다시 각원소로 분해가 됩니다.
그러나 몸은 분해가 되어도 다시 영체는 남습니다. 몸은 죽더라도 금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 금생에 내 영혼이 얼마나 성숙되었는가? 금생에 내가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 하는 것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 즉 영혼의 성숙도에 따라서 죽고 난 뒤에 갈 곳이 달라집니다. 나쁜 짓을 많이 한 영혼들은 저 밑으로 뚝 떨어져서 지옥 같은 데로 갑니다.
가끔 불교인들도 극락이니, 지옥이니, 아귀 같은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무지한 중생들을 가르치느라 이야기한 비유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제한된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것뿐입니다. 지옥이라는 곳에는 분명히 지옥중생이 있는데, 이들은 영체(靈體)라서 보이지 않는 것뿐입니다. 귀신이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죽은 뒤에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 원소로 흩어진다 하더라도 심식(心識)은 남습니다.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 암마라식은 남습니다. 불성은 가장 본질이기 때문에 조금도 중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으면 흩어질 몸뚱이에 대한 애착 때문에 여러 가지 고난도 많이 받고 시비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 몸뚱이를 보배로 생각하고 아끼기 때문에 모든 죄악이 생겨납니다.(寶此我故 卽起貪瞋 病等三毒 三毒擊意 發動身口 造一切業) 손가락에 반지를 몇 개씩 끼고 치장하는 것도 몸뚱이를 아끼기 위한 것이지 심성을 가꾸려고 하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몸은 물리학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뻔한 것입니다. 몸뚱이는 하나의 겉껍데기에 불과할 뿐, 생명의 본질이 아닙니다. 따라서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못 버리면 참다운 불교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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