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부정관(不淨觀)ㆍ자비관(慈悲觀)ㆍ인연관(因緣觀)
부처님의 초기 법문은 쉽습니다.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하니까
될수록 나쁜 짓 하지 말로 좋은 일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즉 중생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기 쉬운 윤리적인 면을 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수행을 하고 있지만 부처님 당시와 비교하면 벌써 2500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 지방은 문맹도 많고 노예도 많고 배우지 못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는 높은 경지의 어려운 법문(法門)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법공(諸法空)이라든가, 일체만유(一切萬有)가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라고 말을 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자기 몸뚱이는 좋게 보여서 좋은 것 먹고 좋은 것 입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는 것이 다 헛된 것이라고 말을 한다고 해서 얼마나 이해가 되겠습니까. 부처님 당시에는 더더구나 무식한 시절이라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초기 법문은 쉽습니다.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하니까 될수록 나쁜 짓 하지 말고 좋은 일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즉 중생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기 쉬운 윤리적인 면을 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부정관(不淨觀)으로 수행을 시켰습니다. 사람 몸에서 나오는 것은 눈물이고 콧물이고 오줌이고 침이고 모두가 더러운 것뿐이라는 이야깁니다. 아무리 미인이라고 하더라도 껍질하나 벗겨 놓고 보면 미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껍질을 둘렀으니 예쁘게 보이는 것이지 껍질을 벗겨 놓으면 살덩이에 선지피만 흐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면 인간의 몸뚱이라는 것은 더러운 것뿐이라는 것이 부정관입니다.
살아있을 때야 우리 몸을 애지중지하겠지만 죽고 나면 자기 식구들조차도 보기 싫어합니다. 죽고 나면 결국 썩어서 가는 것이고, 또 불로 태우면 재만 남는 이 몸뚱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염된 것뿐입니다. 어머니의 태(胎)안에서는 뱃속의 더러운 것들 속에서 지냈고, 또 태어나면서 그것들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은 뒤까지 인간의 몸이란 사뭇 더러운 것뿐입니다.
초기에 부정관으로 수행을 시킨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나 자기 몸뚱이만 사랑해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정관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 몸뚱이에 집착할 필요가 없구나! 이것 때문에 내 생명을 낭비할 필요가 없구나!’라고 깨닫게 되고, 이렇게 부정관 공부가 차츰차츰 마음이 깊이 들어가면 욕심도 줄어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성 쪽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몸에 대한 집착이 희미해지면 그만큼 법을 더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는 탐심(貪心)이 많은 사람에게는 몸이 더럽다는 부정관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관(慈悲觀)이 있습니다. 자비관은 진심(瞋心)이 많아서 조금만 기분이 나쁘면 금세 핏대를 올리고 남을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시켰습니다.
자비관은 내 주변의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쁠 때라도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웃음이 나옵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을 항상 생각합니다. 친근하고 좋은 사람들을 항시 생각하다 보면, 그때는 좋아하는 마음이 잠재의식에 박혀서 점점 좋아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퍼져갑니다.
자비관은 진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까운 사람부터 생각하도록 하여 자비심을 더울 확장시키는 공부입니다.
그리도 또 인연관(因緣觀)이 있습니다. 중생들은 보통 어떤 일이 일어난 원인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보고 일의 이치를 따집니다. 무슨 사태가 일어나면 그 결과만 보고 선악을 판단하고 타인을 경계하고 심판합니다. 그러나 원인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 즉 인과(因果)를 가려서 생각하다 보면 차근차근 마음이 트여갑니다.
부처님 법은 인과를 따지는 것입니다. 인과를 따져 올라가다가 가장 시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른바 제일 원인이 무엇인가를 자꾸 따져 올라가는 것입니다. 제일 원인은 바로 불성입니다. 인과를 거슬러 올라가고 올라가고, 물질도 분석하고 알갱이를 나누고 나누다 보면 결국 모두 텅 비어버립니다. 그 텅 빈 에너지가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인과를 따지다 보면 불성이 되어버립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하나의 티끌로 보나 하나의 물로 보나 또는 다른 무엇으로 보나 결국은 모두가 다 원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원자의 근본 뿌리가 불성이기 때문에, 끝까지 분석해 들어가면 결국에 가서는 다 불성이 되어버립니다. 사람의 의식도 집중하면 할수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 제9암마라식 이렇게 깊어져서 결국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그와 같이 인과를 가리는 것이 인연관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무명(無明), 즉 잘못 보고 있습니다. 밝게 보면, 불성광명(佛性光明)이 훤히 천지를 다 비춥니다. 이런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무명에 가리어 밝게 보지 못하더라도, 공부가 깊어지면 내 인간성의 본 광명이 우주를 환희 비춘다는 확신이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가 잘 되어 가면 천안통(天眼通)을 얻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일체의 사물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금타대화상의 천문학은 천안통을 통해야 납득할 수 있습니다. 천안통을 했으므로 지구의 내면이며, 화성의 내면, 수성의 내면, 또 각 성수(星宿)의 질량이나 열량을 전부 다 수치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깊이 느껴야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마음을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몸뚱이에 집착해 멀리 합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이 몸뚱이의 더러운 것을 생각하면 워낙 괴로우니까 자기 스스로 칼로 찔러서 죽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부처님께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여 자살은 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자기 몸 더러운 것만 생각하면 짜증도 나고 당장에 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 사는 도리라 하는 양심이나 도덕도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높은 경지에서 보면 그저 번뇌일 따름이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본바탕은 부처이므로 한 생각 바꾸면 그야말로 무한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천안통도 하고 천지우주를 다 삼킬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데 개발을 못하는 것뿐이니 깨달음에 목표를 두고 살면 몸 더러운 것을 생각하더라도 살맛이 생깁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초기에는 눈으로 보이는 것을 두고 수행 방법을 삼았습니다.
염불도 부처님을 찾고자 해서 하는 것이므로 이름을 부르는 것도 하기 쉽습니다. 똥 마른 막대기라는 화두를 들고서도 마음을 통일시킬 수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일이 마음을 집중시키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개념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이름이 부처님 명호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 어떤 젊은 불자님이 “제 평생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불러도 너무나 짧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자기 한 평생 아무것도 안하고 나무아미타불 또는 관세음보살만 해도 너무나 짧다고 합니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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