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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0.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가르침

11. 마하지관(摩訶止觀)과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11. 마하지관(摩訶止觀)과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마하지관은 천태지의선사가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詩敎)를 다 모아서

한 체계로 묶어 제일 지혜가 수승한 사람한테 제시한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마하지관은 어렵다고 해서 사람들이 잘 보려고 하지 않지만

마하지관 수행법과 보리방편문 수행법은 비슷비슷 합니다.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여실히 밝힌 법문입니다. 그 연원(淵源)은 제2의 석가라고 하는 용수보살에게 올라갑니다. 금타대화상이 깊은 선정(禪定), 즉 삼매에 들어 있는 중에 과거의 용수성자로부터 감응을 받아 전수받은 현대에 가장 알맞은 고도한 수행법이 바로 보리방편문입니다.

 

도인들이 깊은 선정에 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보게 됩니다. 지금 세상으로 말하자면 최첨단 수신기로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전파가 와서 닿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래서 도인들이 삼매에 들면 몇 천 년 전이든 몇 만 년 뒤의 일이든 시공에 구애받지 않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가능성은 모두가 갖추고 있습니다. ‘분명히 부처님은 모두를 다 알고 모두를 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믿어야 진실한 불교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원래 우리 인간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마하지관(摩訶止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하라는 것은 인도말로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그치다’는 뜻의 지(止)는 산란한 마음을 딱 그치게 하여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말입니다. 본다는 뜻의 관(觀)은 우리의 본성을 비추어 본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무명(無明)에 가려 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본성을 부처님 말씀에 따라서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마하지관은 20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중국의 천태지의스님이 낸 것입니다.

 

불성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영생하는 것입니다. 불성 가운데는 물질적인 질료는 아무것도 없고 또 불성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해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일체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갖춘 하나의 광명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했으니 우리 중생이야 그저 부처님 말씀을 따라서 믿고 비춰 봅니다.

 

마음공부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같이 닦는 것입니다. 불교는 아주 어렵거니와 관련된 이론과 체계도 많습니다. 참선공부는 인류 문화사 가운데 가장 고도한 수행법이기도 합니다. 그런 어렵고 고차원적인 수행법을 단 몇 시간 동안 이해하고 윤곽을 잡으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현대는 다행히 과학이 발달한 시대라 물리학적인 지식을 동원시키면 중생의 의식으로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갑니다. 항상 학교에서 배운 물리학적인 지식을 상기하면 좋습니다. 불교 공부를 하다보면 물리학과 수학이 철학을 공부할 때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원래 수학을 못해서 철학 서적을 읽다보면 막혀서 이따금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물리학적인 소양은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현대는 이론과 실험 과학의 체계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지금 시대는 물리학을 모르면 아주 불편합니다.

 

지금 물리학을 보면 일체 물질이 파괴된 후에는 에너지라는 광명만이 남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전자(電子)라는 것을 극소화 시키면 광량자(光量子), 즉 광입자(光粒子)가 됩니다. 전자라는 아주 미세한 알맹이를 분해해보면 결국은 하나의 광자(光子)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광명체(光明體)입니다. 현대 물리학으로 봐도 우주에는 지금 이러한 광자가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온 우주가 불성이고 광명이고 부처님분이라고 하신 말씀을 현대 물리학으로 비추어 본다 하더라도 맞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근원적인 것은 하나의 생명의 성역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하지관은 우리의 산란한 마음, 좋다 궂다 분별하는 마음이 허망한 것들이므로 이 허망한 것을 우리가 부정하지 않으면 참다운 것이 못 나온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렇기에 부처님 경전 가운데서 양적으로 가장 비중이 많은 것이 공(空)사상, 제법공(諸法空)입니다. 이른바 금강경 도리를 부처님이 22년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도 허망하고, 꿈이요, 허깨비라는 것을 또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싫증이 나는 것인데 이 소중한 내가 허망한 존재라는 말을 듣는 것이 무엇이 좋겠습니까? 그래도 그렇게 반복해서 말하지 않으면 중생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니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현대 물리학의 원소 이론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 몸뚱이는 이와 같이 생긴 대로 고유하게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단 한순간도 이 몸뚱이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중생들은 그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통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이 보고 있는 현상계(現象界)가 허망하고 메아리요, 그림자라는 것을 22년간 줄기차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하여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천지 우주가 물질로 꽉 차 있는데 한 물건도 없다고 합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이것도 역시 물리학을 아는 분들은 그냥 이해가 됩니다. 물질은 에너지의 파동일 뿐입니다. 개별적으로 고정된 물질도 아니고 질료도 없습니다. 공간성도 없는 에너지의 진동, 즉 파동이 우리 눈에는 물질로 보이는 것뿐입니다.

 

횃불을 동그랗게 빙빙 동리면 우리 눈에는 불 동그라미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불 동그라미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의 잔상에 의한 착각 때문에 그와 같이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포들이 합해서 모여 있으니까 사람 몸뚱이로 보이는 것이지 세포도 역시 보다 미세한 것들에 의해 파동만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공간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가장 미세한 원자를 놓고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원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주위에 전자들이 돌고 있습니다. 어떠한 존재나 모두가 다 원자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우리가 분석해 놓고 보면 원자란 핵을 중심으로 삼아 전자들이 돌고 있는 것입니다. 핵 주위로 전자가 몇 개나 도는 가에 따라 산소, 수소, 질소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와의 사이는 텅 비어있습니다. 원자핵과 전자 사이는 마치 태양과 지구와의 사이같이 텅 비어있습니다. 태양과 지구와의 사이가 비어있는 것처럼, 모든 물질의 근원이 되는 원자 자체의 속은 텅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원자와 다른 원자 사이도 텅텅 비어있습니다.

 

그런 비어 있는 것들이 모여서 우리 몸도 구성하고 물질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 몸을 가리켜서 공취(空聚)라고 했습니다. 텅 빈 하나의 무더기라는 말입니다. 텅 빈 공(空)이 모여서 우리의 세포를 이루고 있습니다.

 

모든 물질이 근본이 되는 원자는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자핵이란 무엇인가? 핵도 에너지가 진동해서 돌고 있는 파동에 불과합니다. 전자 역시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물질화돼서 물질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근본에서 보면 에너지뿐입니다. 중생이 되고 무엇이 되고 했다 하더라도 근본 본질에서 볼 때는 모두가 부처뿐입니다.

 

우리 몸이라는 것은 이렇게 텅 빈 것인데 그 사실 하나를 중생이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부처님께서 22년 동안이나 반야(般若) 공(空) 사상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수자상(壽者相)이 없다고 했습니다. 상(相)이란 결국 현상(現象)입니다. 잘났고 못났고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개도 있고 소도 있고…그런 것이 모두 상인데, 금강경에서는 상이 있다는 것을 쳐부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상이 없으면 불(佛)이요, 도(道)요, 성자(聖者)요,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상이 있으면 범부(凡夫)고, 중생(衆生)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것입니다. 상이 없으면 성자고 부처요, 상이 있으면 범부요 중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조(觀照)를 할 때 초기에는 태양도 보라하고, 간혹 서산(西山)에 뉘엿뉘엿 지는 황혼도 보라하고, 영롱한 물도 보라 했습니다. 장엄한 태양을 보면 마음이 텅 비어 오고, 영롱한 물을 자주 보면 혼탁한 마음이 맑아옵니다. 초기에는 눈에 보이는 상대적인 것과 인연을 짓게 해서 우리 마음을 관조해서 통일시키는 법을 썼습니다. 초기 불경에도 그러한 법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조금 올라가면 법당에 있는 거룩하신 부처님을 애쓰고 봅니다. 마리아상을 보고, 부처님 상을 보고 그러면 우리 마음이 그만큼 모아집니다.

 

초기에는 이렇게 형상을 보고 관조하는 법이 있었지만, 형상은 허망한 것이고 참다운 실상은 모양이 없습니다. 가장 고도한 형상은 모양이 없는 순수한 생명입니다. 이렇게 순수한 생명을 인정할 정도가 되면 그때는 이관(理觀)이라, 마음의 원리를 보게 합니다.

 

마하지관에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 지(止)고, 마음을 어떤 경계에다 놓고 비추어 보는 것은 관(觀)입니다. 가장 위대하기 때문에 마하지관이라 합니다. 따라서 그 때는 에누리가 없이 불성 그 자리에 마음을 딱 붙여 버립니다. 마하지관은 천태지의선사가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詩敎)를 다 모아서 한 체계로 묶어 제일 지혜가 수승한 사람한테 제시한 가장 고도한 수행법입니다.

 

마하지관은 어렵다고 해서 사람들이 잘 보려고 하지 않지만 마하지관 수행법과 보리방편문 수행법은 비슷비슷합니다.

 

마하지관은 마음을 공(空), 가(假), 중(中)으로 봅니다. 공은 우리가 보는 모든 인식이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렸다시피 중생의 인식은 실존을 보지 못합니다. 물자체를 못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은 물자체가 아니고 결국 모두가 사실이 아닌 거짓, 즉 가(假)입니다. 모든 것이 다 비었다는 것이 공이고, 따라서 모두가 거짓이라는 가입니다. 그러나 텅 비었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공이 아닙니다. 그 공 중에는 무엇인가 일체 존재가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중(中)입니다. 중은 공과 가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색도 아니고, 그와 같이 다 통하기 때문에 중도(中道)입니다. 이것이 천태지관에서 보는 시각입니다.

 

보리방편문은 마하지관과 약간 비슷합니다만, 천태지의선사의 공가중(空假中)은 불성을 논리화시켜서 보았기 때문에 생명적인 역동성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리방편문은 생명의 화석을(化石化)시키지 않고 생명 그대로를 공부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하지관보다는 보리방편문이 더 우수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