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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0.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가르침

3. 식(識)의 끄트머리

3. 식(識)의 끄트머리

 

 

 

 

6식의 저변에는 제7식(識)인 말나식(末那識)이 있습니다. 그 7식도 끝이 아닙니다.

7식에서 보다 깊이 들어가면 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습니다.

이것이 끝인가 하면 또 아뢰야식의 근본으로 암마라식(菴摩羅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암마라식이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고 표현합니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입니다. 사람이 아닌 일반 동물도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알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오감(五感)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일반 동물에 비해 진일보해서 의(意), 즉 의식까지 사용합니다.

 

유물론자들이나 일반 사람들은 인간의 의식으로 인식하는 것만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하다못해 그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485~414년경)같은 분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물에 대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이라는 것은 인간의 주관(主觀)에 의해 제한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 자체도 실존적으로 있어서 주체적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 정도의 업식(業識)의 반영일 뿐이라고 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萬物)이 마찬가지입니다. 물(物) 자체가 그대로 있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에 의해서 이것이고 저것이고 푸르고 누렇다는 것이지, 그 푸르고 누런 것이 실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인식 정도에 따라서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같은 물이라도 사람이 보면 물이고, 귀신이 보면 하나의 피로 보고, 천상 인간이 보면 유리로 보고, 고기는 자기가 사는 집으로 봅니다. 그저 물일뿐이지만, 보는 주체에 따라서 달리 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개개인의 수행 정도에 따라 달리 봅니다. 하나의 수학 문제라도 어린아이가 풀이하는 것과 중학생이 풀이하는 것이 차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는 모든 물질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물(物)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이라고 하는 주관(主觀)에 비추어진 것뿐입니다. 따라서 인간성이야 말로 만유(萬有)의 척도인 것이지 물 자체가 있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비춰진 것을 가지고 좋다, 궂다, 옳다, 그르다 시비 분별합니다.

 

인간의 의식은 의(意)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심층의식(深層意識)인 말나식(末那識)이 있습니다. 눈ㆍ귀ㆍ코ㆍ혀ㆍ감각 의식의 6식의 저변에는 제7식(識)인 말나식이 있습니다. 그 7식도 끝이 아닙니다. 7식에서 보다 깊이 들어가면 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습니다. 이것이 끝인가 하면 또 아뢰야식의 근본으로 암마라식(菴摩羅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암마라식이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입니다.

 

 

사람은 6식을 쓰고 동물은 5식을 쓰고 식물들은 그것보다도 못 쓰지만, 그렇게 되어 있다 하더라도 불성은 모두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또는 광물이나 이렇게 사람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적(微視的)인 세계도 모두 불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산소라든지 수소라든지, 또 더 미세하게 분석하여 소립자(素粒子)라든지 하는 모든 것들을 사람이 기계를 이용해 파괴시켜 양자(陽子)가 되고 전자(電子)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도 결국은 하나의 불성 위에서 이루어진 파동의 일종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에너지의 파동입니다. 에너지가 곧 물질이요, 물질이 곧 에너지입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질이 파괴되면 물질이라는 형체가 사라지더라도 에너지는 그대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에너지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소립자를 파괴한다 하더라도 그 모양만 사라지는 것이지, 그 에너지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생명적 에너지는 영원합니다.

 

여기에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공(色卽空) 공즉색(空卽色)”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색(色)은 현상계의 물질을 말합니다. 색즉공이라, 그런데 그 공이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虛無)같으면 색즉공 다음에 공즉색이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공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이 아닙니다. 비록 시간ㆍ공간성을 갖는 질료(質料)는 아니겠지만 에너지가 충만하고 심심미묘(甚深微妙)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공 가운데서 인연 따라서 다시 식(識)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 곧 에너지요, 에너지가 곧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색증공, 공즉색이라고 하는 것이나 같은 뜻입니다.

 

가끔 이렇게 물리학을 끌어다가 불교의 술어를 설명하면 반감을 갖는 분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뜻은 그깟 물리학보다 훨씬 깊은 것인데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언어라는 것은 인간 정도의 식을 갖는 사람들끼리 정한, 극히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인식범위에서의 정보전달 수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사용해도 정확히 다 표현할 수가 없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도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언어라는 우상(偶像)에 사로잡히면 불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물리학적 술어에 맞춰가며 이해하면 정확히 일치는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맞으면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보다 세밀한 것은 각자 연구하고 체계를 세워 가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