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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6. 수행차제.삼종요도

9. 곰림 바르빠

10. 지관쌍수(止觀雙修): 지혜와 방편의 합일


[지(止)와 관(觀)] 두 가지가 모두 평등하게 들어가고(雙修) 있으면, [이때는] 몸과 마음에 해로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행하는 바((加行方便) 없이 머물러야 합니다.

몸 등이 불편해지면, 그때는 일체 세간(世間)을 환영(幻影) 아지랑이(陽炎) 꿈(夢) 물에 비친 달(水月) 빛 그림자(光影)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이들 유정(有情) 중생은 이와 같이 심오한 법(法)을 이해하지 못하고 윤회하면서 모든 번뇌에 휩싸이고 있으니, 내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법성(法性:眞如)을 이해 할 수 있게 하리라.” 라고 생각하며, 대비심(大悲心)과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킵니다. 그런 다음, 잠시 쉬고(良久) 다시 그와 같이 제법(諸法:現象)의 무광삼매(無光三昧: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삼매)에 들어가야 합니다. 또 마음에 아주 싫증이 나면 그와 같이 잠시 쉬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관쌍수(止觀雙修)에 들어가는 길이며,

분별(分別)로 무분별(無分別)의 상(像:印象)을 보는 것입니다.


위의 본문에서는 지(止, Śamatha)를 성취한 후에 관(觀, Vipaśyanā)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밟아서 지와 관을 하나로 합일하는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집중하는 수행과 분석하는 수행을 함께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와 관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너무 애써서 수행하면 안 됩니다. 자연스럽게 그 상태가 유지되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몸과 마음의 건강을 챙겨야 합니다.

수행정진에 들어가기 전에 너무 덥거나 춥지 않도록 필요한 것으로 몸을 잘 보호해야 합니다. 수행 중에 피곤함이 찾아오면 집중을 조금 풀고 모든 현상을 환영(幻影) 등과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는 윤회의 사슬에 매여 있는 모든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선한 마음으로 현상의 실제를 깨닫고 중생들을 도우려는 강한 동기를 일으켜야 합니다.


“잠시 쉬고(良久) 다시 그와 같이 제법(諸法:現象)의 무광삼매(無光三昧: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삼매)에 들어가야 합니다.”라는 말은 무아(無我)에 대한 수행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무아(無我)에 대한 수행이 깊어지면, 빛이 반사하여 사물이 보이는 것과 같은 세속적인 현상이 마음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마음의 싫증을 발견하면 잠시 쉬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지와 관을 병행하는 수행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분별(分別)로 무분별(無分別)의 상태에 집중하는 수행입니다.


그렇게 요가 수행자는 이 [수행] 차제(次第:精進法)를 한 시간(一回精進) 또는 밤중에 반(半) 정진의 시간이나 한 정진의 시간 또는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진여(眞如) 수행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이 의분별선정(意分別禪定: 色受想行識을 幻으로 파악하는 선정)이며,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원한다면 삼매(三昧)에서 깨어나 가부좌(跏趺坐)를 풀지 말고, “이들 제법(諸法:現象)이 궁극적으로는 본래 성품이 없는 것이라 해도 세속적으로는 확실히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업(業)과 결과(果) 등이 어떻게 편재(遍在)할 수 있겠는가? 세존께서도, ‘사물이 생겨나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자성(自性)이 없다.’라고 설하셨다. [하지만] 이들 유정(有情) 중생이 어설픈 지식으로 본래 성품이 없는 사물들을 존재한다고 과장(誇張:增益)하여 전도된 생각에 [사로잡혀] 긴 세월을 윤회의 수레 위에서 떠돌고 있으니, 내 어떻게 해서든지 위없는(無上) 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모두 구족(具足)할 것이며 일체지(一切智)의 경지를 이루어서 이 모든 법성(法性:眞如)을 깨우치고 말리라.”라고 생각한 다음, 천천히 가부좌를 풀고 시방(十方)에 머무시는 불보살님께 배례(拜禮)하고 나서, 그들에게 헌공(獻供) 찬탄(讚嘆)한 다음, 『보현보살행원찬(普賢菩薩行願讚)』 등의 서원(誓願:祈禱)을 널리 세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 공성(空性)과 대비심(大悲心)의 정수(精髓:心要)를 지니고 보시(布施) 등의 일체 공덕과 지혜 자량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선정(禪定)에서 깨어나면 회향의 기도를 올립니다. 정진이 끝나고 나서도 보시 등의 다른 수행은 항상 같이 해나가야 합니다. 더불어 연기법(緣起法)과 공성의 양면성을 함께 이해하면서 해야 합니다.


여기서 공성이란 존재의 부정 즉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에는 본래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중관(中觀)철학의 중도(中道)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나면 극단적인 견해는 저절로 사라집니다. 공성에 대한 철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세속적인 인과(因果)의 법칙을 위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인과(因果)의 법칙에 대한 확신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성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물의 본래 성품이 공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정진이 끝나고 나면 공덕과 복덕의 자량을 쌓아야 합니다. 공덕의 자량은 관(觀, Vipaśyanā)의 수행을 보충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선정(禪定)은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을 모두 성취한 것입니다. 즉 『대보적경보만보살회(大寶積經寶鬘菩薩會)』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애(慈愛)의 무기를 갖추고 대비심(大悲心)의 경지에 머무르며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을 모두 성취하기 위한 선정(禪定)을 행하라. 여기서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이라는 것은 보시(布施)와 멀어지지 않고 지계(持戒)와 멀어지지 않으며, 인욕(忍辱)과 멀어지지 않고 정진(精進)과 멀어지지 않으며, 선정(禪定)과 멀어지지 않고 지혜(智慧)와 멀어지지 않으며, 방편(方便)과 멀어지지 않는 것이니라.”라는 것 등을 널리 설하신 바와 같습니다. 보살은 모든 유정 중생을 모두 성숙시켜야 하며, 장소와 몸 그리고 많은 권속(眷屬) 등을 원만(圓滿)하게 하는 보시(布施) 방편(方便) 등의 선법(善法)에 확실히 의지하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이란 공성을 직접 깨달은 지혜를 말합니다. 더불어 방편 수행이 그 지혜를 뒷받침해야 합니다. 즉, 보시 등의 다른 바라밀(婆羅蜜) 수행이 함께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완전한 부처의 깨달음은 오직 그에 맞는 적절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습니다. 보살들은 중생들을 돕는 큰 복덕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든 선행은 아주 힘 있고 효과적인 것입니다. 보살은 빠르게 부처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육바라밀(六婆羅蜜)의 수행을 방편삼아 열심히 정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국토(佛國土) 등의 원만(圓滿)함은 무엇을 말하며, 어떤 결과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지혜는 보시(布施) 등의 방편을 완전히 구족(具足)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도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는 방편의 구경(究竟)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보살은 보시(布施) 등의 방편에도 역시 의지해야 합니다. 공성(空性)만으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집제법방광경(集諸法方廣經)』에서도 설하신 것처럼, “미륵이여, 보살들이 육바라밀(六婆羅密)을 완전히 성취하는 것은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위한 것인 데, 이에 어리석은 이들이 말하기를, ‘보살은 지혜바라밀만을 익혀야 한다. 나머지 바라밀을 해서 무엇 하는가?’라고 말하며, 그들은 다른 바라밀 역시 비판적으로 생각한다. 미륵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륵보살이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륵이여, 보살행(菩薩行)을 할 때 육바라밀(六婆羅密)을 가지고 선근복덕(善根福德)을 쌓은 그 선근복덕들은 해로운 것인가?’ 미륵보살이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륵이여, 그대 역시 육십 겁(劫) 동안 보시(布施) 바라밀을 바르게 수행해 왔다.


육십 겁(劫) 동안 지계(持戒)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인욕(忍辱)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정진(精進)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선정(禪定)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지혜(智慧) 바라밀을 수행해 왔다.’ 이에 어리석은 이들이 말하기를, ‘한 가지 방법만으로 깨달을 수 있으며, 그것은 공성(空性) 수행이다.’라고 한다면, 그들이 행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라는 등의 [법]을 [널리] 펴셨습니다.


위의 구절들은 지혜와 방편을 함께 개발하는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성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보다 깊은 통찰력을 얻기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더불어 방편의 수행인 육바라밀(六婆羅蜜) 등도 함께 병행해야 합니다. 보살의 최종 목표는 모든 중생들과 함께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수행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결국 지혜와 방편의 합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방편(方便)과는 먼 보살의 지혜라는 것은 성문(聲聞)과 같아서 부처의 행상(行相:수행 행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방편으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즉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가섭이여, 이와 같으니 예를 들면 신하(臣下)가 뒷받침하는 왕들이 모든 목적을 이룰 수 있듯이, 보살의 지혜는 선교방편(善巧方便)에 의한 모든 도움으로 역시 부처의 모든 행상(行相)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보살도(菩薩道)의 지견(智見: 진리에 대한 견해)과는 다른 외도(外道)와 성문도(聲聞道)의 지견(智見)은 ‘아(我: 개별적 본체)’ 등에 대한 전도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언제나 지혜와는 먼 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해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성문(聲聞)들은 대비심(大悲心)과는 멀기 때문에 방편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의 열반에 들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보살도(菩薩道)는 지혜와 방편을 [모두] 갖추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주열반(無住涅槃)에 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시 한 번] 보살도(菩薩道)는 지혜와 방편을 [모두] 갖추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무주열반(無住涅槃)을 성취함으로서, 지혜의 힘으로 윤회에 떨어지지 않고 방편의 힘으로 열반에도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설상두정사경(佛說象頭精舍經)』에서, “보살도(菩薩道)를 요약하면 이 두 가지인 데, 둘이라는 것은 이와 같아서 방편과 지혜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佛說最上根本大樂金剛不空三昧大敎王經)』에서도, “지혜바라밀은 어머니이며, 선교방편(善巧方便)은 아버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에서도, “보살들에게 속박이란 무엇이며 해탈이란 무엇인가 하면, 방편이 없이 윤회 중생을 [애써] 모두 떠받치는 것이 보살의 속박이며, 방편으로 윤회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다. 지혜가 없이 윤회 중생을 [애써] 모두 떠받치는 것이 보살의 속박이며, 지혜로 윤회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다. 방편이 갖추어지지 않은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이 갖추어진 지혜는 해탈이다. 지혜가 갖추어지지 않은 방편이 속박이며, 지혜가 갖추어진 방편이 해탈이다.”라고 널리 펴셨습니다.

보살이 지혜만을 의지하면 성문(聲聞)이 갈구하는 열반에 떨어져 속박당하는 것과 같아서, 무주열반(無住涅槃)에 드는 성취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방편과는 먼 지혜를 보살의 속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추운] 바람에 얼어가는 사람이 불에 의지하는 것처럼 보살은 전도된 바람을 막고서, 방편을 가진 지혜인 공성(空性)에 의지해야 합니다. 성문(聲聞)과 같은 방식으로 깨달으려 하지 말고, 『대보적경대승십법회제구(大寶積經大乘十法會第九)』에서 설하신 것처럼, “선남자(善男子)는 이와 같아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불을 철저히 받들면서 그 불을 지극히 숭배하고 스승처럼 여긴다 하더라도, ‘나는 불을 숭배하고 스승처럼 여기며 받들고 있으니 여기 두 손에다 모두 담아야 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자신의 몸이 고통스럽거나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살 역시 열반을 알고 있지만 지니고 있는 열반을 드러내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렇게 자신의 깨달음을 바꾸어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방편에만 단순히 의지한다면 보살은 범부(凡夫)의 경지를 뛰어 넘지 못하고 단지 속박만 당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가진 방편에 의지해야 하는 데, 이것은 진언(眞言, Mantra)으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한 독(毒)처럼, 보살은 번뇌 역시, 지혜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할 수 있는 힘을 길러서, 감로(甘露)로 변화시킵니다. 자연스럽게 상승적인 과보를 받는 방법이 보시(布施) 등에 의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살들은 지혜와 방편을 타고 납니다.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들은 자신들의 수행을 위해 세상에서 일하는 것을 극히 꺼려합니다. 그러나 보살들은 지혜와 방편을 가지고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며 그것을 최고의 수행으로 삼습니다.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일할 때는 몸과 말의 행위에 대한 엄격한 규칙에 너무 얽매여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말씀하시기를, “가섭이여, 이와 같아서 예를 들면 진언(眞言)과 약(藥)으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한 독(毒)으로는 [어떤 것도] 죽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보살들의 번뇌는 지혜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한 것이기 때문에 전락(轉落)할 수가 없다.”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방편의 힘으로 윤회를 포기하지 않으며, 열반에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지혜의 힘으로 모든 대상(所緣)을 끊고서 윤회에 떨어지지 않으며, 그래서 오직 무주열반(無住涅槃)만의 불성(佛性)을 성취합니다. 따라서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에서도, “지혜를 알고서 모든 번뇌를 완전히 제거한다. 방편을 알고서 모든 유정을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유정 중생의 이익에 별 관심이 없으며 마음의 작용(行)이 화합(和合)하여 이루어진 모든 것에 대한 별 관심이 없는 것을 무상청정원만각(無上淸淨圓滿覺)이라고 나는 가르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성(佛性)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지혜와 방편 두 가지 모두에 의지해야 합니다.


보살들은 위대한 지혜를 타고 납니다. 따라서 번뇌는 그들에게 아무런 맥도 못 추며, 바라지 않는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원인이 되지도 못합니다. 보살들이 지혜와 방편의 수행을 병행할 때는 윤회에 끌려 다니거나 열반의 기쁨에 안주하는 등의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중생들을 돌보면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에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를 수행할 때나 깊은 정(定)에 들어 갈 때는 보시(布施) 등의 방편에 의지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전(前)과 후(後)에 생기는 지혜가 무엇이든, [그것이] 생기면 그때는 [언제든지] 방편에 의지할 수 있으니, 그렇게 지혜와 방편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적용해야 합니다.


공성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력인 지혜는 이원(二元)의 벽을 완전히 뛰어넘은 것입니다. 마치 물에 물을 붓는 것처럼 마음은 완전히 공성과 하나가 됩니다. 정진 중에 방편을 수행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불가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방편과 지혜를 함께 수행해야 하는 바른 관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정진을 시작하기 전이나 끝나고 났을 때, 개인적으로 자비심이나 이타심 그리고 보시 등의 수행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지혜를 기르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더불어, 보살들이 지혜와 방편을 병행(竝行:雙修)하는 길이 이 길입니다. 모든 유정 중생을 보살피는 대비심(大悲心)으로 [스스로] 완전히 성숙(攝受)해서 출세간(出世間)의 길에 의지해야 하고, 일으킨 방편을 행할 때도 환술사(幻術師)처럼 전도되지만 말고 보시(布施) 등에 의지해야 합니다.

『대방등대집경제십이무진의보살품(大方等大集經第十二無盡意菩薩品)』에서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보살의 방편은 무엇이며 지혜를 성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한다면 정(定, Samāhita: 人無我와 法無我의 空性을 보기 위한 선정)에 들어 유정 중생을 보살피면서 대비심(大悲心)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가까이 하는 것이 방편이며, 적정(寂靜)과 최고의 적정(寂靜)으로 정려(精慮, Samāpatti: 평등한 경지의 선정)에 드는 것이 지혜이다.”라고 널리 설하신 바와 같습니다.

『항마장(降魔章)』에서도 말씀하시기를, “더불어 보살들의 가행(加行: 적극적 수행)을 바르게 공경하는 것은, 지혜를 알기에 모든 선법(善法)을 쌓기 위해 가행(加行)하고, 지혜를 알기에 내가 없음(無我)과 유정이 없음과 생명이 없음과 생명의 유지가 없음과 사람이 없음(人無我)에 대해서도 가행(加行)하며, 방편을 알기에 모든 유정을 완전히 성숙시키기 위해 역시 가행(加行)하는 것이다.”라고 널리 펴셨습니다.


『집제법방광경(集諸法方廣經)』에서도,“예를 들어 어떤 환술사(幻術師)가 [자신이 만든] 환(幻)에서 벗어나려고 애쓸 때, 그는 이미 환(幻)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환(幻) [자체에] 집착하지 않듯이,


삼계(三界)가 환(幻)과 같은 줄 구경보리(究竟菩提) 성인(聖人)은 아시나니, 중생을 위해 무장(武裝)하신 [뜻은] 중생을 그전부터 알기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살들이 오직 지혜와 방편의 법(法)을 성취한 힘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들의 가행(加行)이 윤회 속에 머물면서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마술사(魔術師)가 감옥에다 스스로를 가두는 마술을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마술사는 그 감옥이 마술에 의해 만들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집착이나 두려움 등의 다른 감정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은 삼계(三界)의 환영(幻影)이라는 마술에 걸려 있는 모든 중생들을 보고 계십니다. 부처님은 환영과 같은 사물의 본래 성품이 공성인줄 잘 아시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든 중생들을 사랑과 연민으로 돌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성(空性)과 대비심(大悲心)의 정수(精髓:心要)를 가지고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원만하게 회향(回向)하는 보시(布施) 등의 방편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승의(勝義:絶對)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 앞에서와 같이 일정한 시간에 따라서 지(止)와 관(觀)의 가행(加行)을 가능한 만큼 수행해야 합니다. 『성소행경계원만청정경(聖所行境界圓滿淸淨經)』에서 언제나 유정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보살들의 공덕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처럼, 가까이 두고 생각하면서 언제나 방편에 능숙해지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비(慈悲)와 방편(方便)과 보리심(菩提心)에 익숙해지면, 이 생에서 의심할 것 없이 특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꿈 속에서 언제나 불보살님을 친견(親見)할 수 있습니다. 다른 좋은 꿈들 역시 꿀 수 있습니다. 천신(天神)들도 기뻐서 보호할 것이며, 매 순간 마다 공덕과 지혜의 자량은 늘어만 갈 것입니다. 번뇌장(煩惱障)과 나쁜 과보 역시 정화할 수 있으며, 언제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의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풍길 수 있으며, 몸도 역시 질병으로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업(業)에서 자유로워지는 수승함 역시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통(神通) 등의 특별한 공덕(功德:屬性)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르침을 수행해 나갈 때는 항상, 공성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이미 논의한 것처럼, 사물은 실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다.’라고 할 만한 자신만의 고유한 성품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문을 염송(念誦)하고 절을 할 때도 환영과 같은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회향 역시 무아(無我)의 관점에서 해야 합니다. 공성의 의미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은 밀교의 수행에서도 중요합니다. 모든 종류의 선한 행위 속에서 공성을 기억하는 것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따라서 번뇌와 같은 모든 종류의 허물은 점점 줄어들고, 자비심 이타심 방편 등은 끝없이 자라납니다.

그렇게 신통력(神通力)으로 세간(世間)의 무량(無量)한 세계에 가서 불세존께 헌공(獻供)하고 당신들의 법(法)을 듣습니다. 임종시(臨終時)에도 의심할 바 없이 불보살님들을 친견(親見)할 수 있습니다. 다른 생에서도 불보살님과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특별히 성스러운 가문(家門)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원만하게 구족(具足)할 수 있습니다.

큰 부(富)와 수많은 권속(眷屬)을 거느리며, 예리한 지혜로 수많은 사람을 모두 성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에서 [모든] 생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량없는 공덕을 다른 경전들에서도 보여주고 있음으로 [바르게] 터득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비(慈悲)와 방편(方便)과 보리심(菩提心)을 항상 공경하고 오랫동안 수행하면 점차로 마음의 흐름(心相續)이 완전히 모두 청정해지는 순간이 나타나 완전한 성숙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부싯나무(燧木)를 문질러서 불을 만드는 것처럼, 바른 이익을 위해 수행하면 최고의 구경(究竟)에 이를 수 있고,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로 일체의 분별(分別)의 그물에서 멀어져 법(法)의 틀을 희론(戱論)함이 없이 분명하게 알며, 티 없이(無垢) 흔들리지 않는 등불을 바람이 없는 곳(無風地帶)에 놓아 둔 것처럼, 흔들림 없이 알게 됩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본래 자성(自性)이 현전(現前)하는 견도(見道)를 포함한 승의(勝義:絶對) 보리심의 본래 성품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하여 사물의 끝자리를 보는 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여래의 종성(種姓:家門)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보살의 무결(無缺)함에 들어가는 것이며, 세간의 일체 중생에서 바뀌는 것입니다.

보살의 법성(法性)과 법(法)의 틀을 알고서 안주(安住)하는 것이며, 보살의 초지(初地)를 성취한 것으로 이에 대한 공덕은 더 자세하게 『십지경(十地經)』 등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여(眞如)를 바라보는 선정(禪定)이며,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 가르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보살이 희론(戱論)없는 무분별(無分別)의 성품에 들어간 것으로, 신해행(信解行)의 경지를 신해(信解)의 힘으로 들어갔음을 의미(安立)하는 것이지, 실제 행(行)은 아닙니다. [여기에] 지혜가 생겨나야만 실제 행(行)에 들어가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보면 자비심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이러한 마음을 방편의 도움으로 점점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지성을 갖추고 있는 인간입니다. 따라서 무언이 바른 것인지 또는 무엇이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지성의 힘 역시 궁극적인 실제에 대한 관찰의 힘으로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함께 정화(淨化)와 공덕 쌓기를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바른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궁극적인 진여(眞如)에 대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점검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실제에 대한 심오한 감각을 기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석적인 접근에는 또한 선정(禪定)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공성과 자비의 수행은 마음의 얼룩을 보게 하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더불어 일체지(一切智)의 상태를 성취할 수 있게 합니다.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수행한 다음, 지혜를 바탕으로 한 자비심이 일어나면 부처의 경지를 이루고 싶은 강한 동기가 생겨납니다.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한 이러한 동기가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스스로 보살이 되어 대승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것이 자량도(資糧道)입니다. 이것은 대(大) 중(中) 소(小)의 세 가지 수준의 깨달음 중에, 조그만 차원의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을 땅과 같은 보리심이라고 부릅니다.

보리심에는 21가지의 유형이 있습니다. 보리심은 공성에 대한 지식과 자비심을 수행한 결과로 얻어집니다. 지(止, Śamatha)는 공성의 수행과 함께 해나가야 합니다. 수행에서 지혜가 생겨나기 시작하면 그때 수행자는 가행도(加行道)에 들어선 것입니다.


수행은 지혜와 방편의 완전한 조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물에 물을 붓는 것처럼, 이원(二元)의 얼룩을 지우고 진여(眞如)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공성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을 얻는 처음 순간이 바로 견도(見道)에 들어서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보리심과 바로 이어지며 대승에 길을 분명히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보살의 십지(十地) 중에 처음 성취하는 단계인 초지(初地)는 환희(歡喜)의 경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지는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운 경지입니다. 이전의 수행의 단계에서 나타나던 수행의 장애를 모두 극복하는 경지가 수도(修道)입니다.


수행의 장애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그때 수도(修道)를 성취합니다. 금강(金剛)과 같은 상태라고 불리는 수도(修道)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미세한 장애들까지 뿌리부터 완전히 제거됩니다. 따라서 출세간(出世間)의 일체지(一切智)가 생겨나 완전한 부처로의 대전환을 이룹니다. 이 경지가 바로 불도(佛道) 또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도(無學道)입니다.


이와 같이 초지(初地)에 들어간 다음, 수도(修道)에서 출세간(出世間)에서 얻은 두 가지 지혜(根本智와 後得智 또는 止觀)로 지혜와 방편을 수행하고, 점차로 수행하여 끊어야 하는 장애(障碍)가 미세하게 축적된 것 역시 미세하게 정화하며, 특별한 공덕(功德:屬性)을 더 깊이 성취하기 위해 하급(下級)의 수준들도 완전히 정화하여, 여래지(如來地)의 중심에 들어가 일체지(一切智)의 바다로 들어가게 되면, 목적한 바를 완전히 이루고 목표 역시 [완전히]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완전히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점차로, 보다 질 좋은 땅의 황금처럼, 마음을 확실히 정화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어 구경원만(究竟圓滿)한 완전청정(成佛)을 이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체지(一切智)의 바다에 들어가면 여의주(如意珠)와 같이 일체 유정 중생의 생존을 떠받치는 공덕(功德:屬性)을 쌓고 지니며 이전(以前)에 [세운] 원력(願力:祈禱)의 과보를 받아 이룰 수 있습니다.

즉 대비심(大悲心)의 본성(本性)으로 돌아가, 본래 갖추고 있던 갖가지 방편을 가지고 한량없는 화현(化現)으로 일체 중생을 모두 원만하게 합니다. 습기(習氣)로 인한 잘못된 일체의 허물을 제거하고, 무한한 유정 세계에 머무시는 것을 알기에 불세존의 일체 공덕(功德:屬性)이 생긴 자리(根源)에 대한 신심(信心)을 일으키며, 그 공덕(功德:屬性)을 완전히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비밀주(秘密主)의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라는 것은 자비(慈悲)를 근본으로 하여 생긴 것이고, 보리심(菩提心)이라는 원인(因)에서 생긴 것이며, 방편(方便)으로 구경원만(究竟圓滿)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중한 까말라실라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먼저 세속과 궁극의 두 가지 진리인 이제(二諦)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 수행의 과정에서는 지혜와 방편의 두 가지 자량(資糧)이 서로 조화롭게 뒷받침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결과, 두 가지 형태의 불신(佛身)인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을 얻는 것입니다.

부처의 일체지(一切智)를 한번 이루고 나면 모든 번뇌 망상과 장애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인간으로서 이 땅에 와서 더 이상 흔들림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무한한 신통(神通)의 힘으로 모든 중생들이 자유와 해탈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현자(賢者)는 질시(嫉視) 등의 허물을 멀리 하고

공덕(功德)에는 만족이 없어, 대양(大洋)과 같으니,

분별(分別)하고 잘 해석하여 파악함이

환희(歡喜)의 백조가 물에서 우유를 취하는 것 같네.


그러므로 지자(智者)들은

편견(偏見)의 혼란을 여의고,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잘 해설하나니

모두가 취(取)해야 할 것 뿐이로다.


이와 같이 중도(中道)를 설하노니,

내가 지은 공덕이 무엇이든

그렇게 일체 중생이

중도(中道)를 성취케 하소서.


『수행차제(修行次第)』를 아짜리야(Ācārya, 傳敎師) 까말라실라(Kamalaśīla, 蓮花戒)께서 중편(中篇)을 지어 마치셨다. 인도 학자 쁘라갸와르마(Prajñavarma, 慧鎧)와 역경사(譯經師) 승려(僧侶) 예쉐 데(Ye shes sde)가 번역하고 편집 교정하였다.


위대하신 까말라실라(Kamalasila)께서 설하신 이 아름다운 가르침이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8세기 인도의 대학자인 아짜리야(Acarya, 傳敎師) 까말라실라(Kamalasila, 蓮花戒)와 그의 위대한 스승 샨따락시따(Śāntarakshita, 寂護)는 설역(雪域)의 땅 티벳과 아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존경심만을 표하는 것으로는 당신들의 자비심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까말라실라(Kamalasila)의 『수행차제(修行次第) 중편(中篇)』에 대한 전승(傳承)의 법맥(法脈)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소중한 경전을 지니고 공부하는 여러분들에게 특별히 당부할 것은 중도(中道)에 대한 이해를 계속해서 넓혀 가라는 것입니다. 특히 중관(中觀)철학의 심오한 내용을 잘 드러내신 불호(佛護, Buddhapalita)보살과 월칭(月稱, Candrakirti)(*역주: 불호(佛護, Buddhapalita)보살과 월칭(月稱, Candrakirti)은 중관학파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귀류논증(歸謬論證)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보살의 수승한 논서들을 중심으로 공부해 나가기를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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