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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6. 수행차제.삼종요도

5. 곰림 바로빠

5. 곰림 바로빠.


1. 인과(因果)

이와 같이 일체지(一切智)는 원인(因) 없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며, [만일 원인 없이 일체지가 생길 수 있다면] 모든 것은 항상 일체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생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도 속박(束縛)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 어떤 것도 일체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 부분적으로 생기는 모든 사물(事物)은 원인에 의존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체지도 역시 때에 따라 부분적으로 [생기는] 것이며, 언제든지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곳에서나 그런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렇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원인(因)과 조건(緣)에 의존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위의 구절에서는 언제나 존재 하는 것과 언제나 그렇지 않고 때에 따라 가끔씩 존재하는 것의 두 가지 유형의 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에서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며 때에 따라 가끔씩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암시합니까? 이러한 질문은 아주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원인들에 의존하는 순간적인 것을 말합니다. 사실 어떤 특정한 사물은 원인들이 발생하는 어떤 특정한 때에 생겨납니다.

어떤 특정한 사물이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라 가끔씩 발생한다는 것은 그들이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조건들에 의지하여 발생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현상은 항상 그런 것이 아니라 가끔씩 때에 따라 원인과 조건들에 의지하여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다양한 유형이 있습니다. 먼저 원인들에는 실제원인, 직접원인, 간접원인, 동류원인, 부차원인 등의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조건들에도 객관조건, 원인조건, 직전(直前)조건 등의 다양한 종류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한 곳에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조건지어진 현상은 형상(形相)과 의식(意識) 그리고 두 가지 다 아닌 경우의 세 가지의 범주(範疇)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형상(形相)은 모양과 색깔 등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의식(意識)은 모양도 색깔도 없으며 어떤 물리적인 용어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느낌이나 감각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시간이라는 개념은 형상도 아니고 의식도 아닌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는 모든 것을 아는 의식을 말합니다.

일체지는 흙이나 돌 바위 산 같은 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의 대상으로 기능하는 무언가에 의해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인식의 대상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일체지(一切智)는 모든 완전함을 다 포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경지입니다.

세 가지 범주 중에 조건지어진 현상은 의식의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알고 이해하는 것이 의식의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해하겠어요.”, “알았어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의식이나 감각으로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눈의 의식 즉 안식(眼識)이 무언가를 볼 때, “나는 저 모습을 보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또 마음의 의식 즉, 여섯 번째인 의식(意識)이 행복이나 고통을 경험할 때는 “나는 행복해.” 또는 “나 힘들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경험한다.” “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라고 말할 때는 의식이 매개체로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무언가를 인식하고 아는 것은 의식의 기능입니다.


의식들은 지식과 집중력 그리고 예리함 등에 따라 다양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예는 인간의 의식을 동물의 의식과 비교해보면, 인간의 의식이 다양한 대상을 훨씬 넓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들 역시 교육 수준과 경험에 따라 다릅니다. 더 많이 교육받고 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 더 넓은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과 이해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발전합니다. 필요한 조건들을 만나면 인식 능력은 증가하고 지식의 대상이 확장되어 이해가 깊어집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은 잠재력을 완전히 개발할 수 있습니다.


일체지(一切智)는 대상에 대한 마음의 인식 능력을 완전히 개발한 상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체지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을 각각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는 지혜는 의식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원인과 조건에서 발생한 개념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이것은 일체지 역시 원인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일체지는 원인 없이도 생겨날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모든 의식들이 다 일체지의 상태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마치 사물이 원인과 조건 없이 발생하여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생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도 속박(束縛)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 어떤 것도 일체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만약 사물이 다른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것에도 속박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것도 일체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기능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은 특정한 때에 생길 수 있는 것이지 언제나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때에 필요한 조건이 이루어지고 방해하는 조건이 없으면, 의식은 모든 현상에 대한 지식을 갖춘 일체지로 전환할 수 있게 됩니다.


사물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물들이 원인과 조건에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원인과 조건에 의지한다는 틀 안에서 보면, 일체지(一切智)에 대한 결과적 성취는 원인과 조건 즉 바르고 완전한 원인과 조건들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더불어 일체지를 이루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체지는 원인과 조건들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상가(Asaṅga, 無箸)의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원인과 조건에 의하여 생긴 존재가 결과라는 말입니다. 조건들에는 부동(不動)조건, 무상(無常)조건, 잠재조건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은 무상(無常)조건과 관련한 것입니다. 또, 어떻게 일체지가 의식에서 생길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는 잠재조건에 관해서 설명해야 합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은 의식의 본래 속성입니다. 의식의 본성은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대상을 파악하는 것에서 생깁니다. 이렇게 보면, 인식하는 속성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제 질문은 인식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그렇게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는 가에 관한 것입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은 의식의 본래 속성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완전한 지식의 상태를 볼 수 없게 마음을 가로 막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음 질문은 어떻게 그러한 장애들이 생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그런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대상을 바르게 인식할 수 없게 하는 의식의 장애는 무지(無知)입니다. 무지(無知)는 존재의 실체를 왜곡하고 극단적인 견해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우리가 무지(無知)에 대해 말할 때는 무언가 필요한 조건이 결여되어 있거나 대상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조건을 말합니다. 다양한 유형의 무지(無知) 중에서 실제를 왜곡하는 무지가 가장 근본적인 무지입니다.

그리고 이 무지가 가장 큰 장애입니다.

이 무지를 분석함으로서 제거할 수 있는 결론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의 허물은 우선 무지와 무지의 잠재력에서 오는 것입니다. 먼저 무지를 마음에서 분리할 수 있는지 아니면 끝을 볼 수 있는지에 대해 관찰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무지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무지는 실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왜곡합니다. 그것은 대상을 잘못 인식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해 대응하는 바른 이해를 갖춤으로서 무지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실제를 왜곡하는 무지와 그 무지에 대응하는 방법은 모두 다 원인과 조건에 의지합니다. 그들은 똑같이 필요한 조건을 만나면 자라나고 장애의 요소들이 사라지면 소멸합니다. 그렇다면 둘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가 궁금할 것입니다. 실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왜곡하는 무지가 대상에 대한 잘못된 마음이라면, 그것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이해하는 것을 옳다고 믿는 것일 뿐입니다.

인식을 통해 인지된 대상을 유효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인식은 무지로 인해 왜곡된 인식이기 때문에 유효한 인식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실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왜곡하고 있는 무지는 끝을 볼 수 있습니다. 무지로 인한 마음은 유효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물에 본래의 성품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을 인식하는 것은 유효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이 두 가지 마음은 서로 직접적으로 부딪치고 있습니다.

대상의 무자성 즉, 무아(無我)를 인식하는 마음은 무지한 마음에 대응하는 강력한 처방입니다.

이렇게 해서 무지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어떠한 인간의 고통도 그에 대응하는 적절한 대처법을 활용하여 줄여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상대적인 요소를 만나면 그들의 잠재력이 감소되는 사물들의 특성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마음이 본래의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마음의 긍정적인 속성입니다. 이것은 유효한 인식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마음의 본성이 긍정적인 속성에 익숙해지면 무한하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는 다르게 몸은 아무리 긍정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도 무한히 확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몸이 아주 거친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친 속성을 가지고는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무지(無知)한 마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때는 ‘실재(實在)’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따른 몇 가지 질문들이 있습니다.

실재는 무엇인가?

실재에 관한 잘못된 마음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해서 마음은 실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

 

실재 또는 실유(實有)에 대한 공성(空性)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래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완전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실유를 입증할 논리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실유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길들여지지 않은 의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천착해 들어가면, 실유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무언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 다른 경우를 발견합니다. 즉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겉으로 나타난 모습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속적인 일에서는 누군가가 깨어났다고 말합니다. 깨어남은 나타난 모습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모순 때문에 생깁니다. 즉, 무언가에서 깨어나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꿈과 같은 상태에서 얼마나 자주 깨어나는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의 상황을 놓고 점검해 봅시다. 동물들과 비교하면 우리의 마음에는 무한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그 실체를 분석할 능력이 있습니다. 반면에 동물은 나타난 그대로만을 파악합니다.

물론 인간들도 서로의 능력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세하게 분석해 보면, 마음이 일반적으로 옳다고 인식하는 것들은 좀 더 깊은 의미에서 보면 잘못된 경우도 많습니다. 현상이 존재하는 방식은 그런 마음들이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닙니다. 즉 공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이나 집들처럼 무상(無常)한 것들에 대한 인식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 중에는 수세기 또는 수천 년 동안을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그러한 것들이 순간순간 변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항상 그대로 거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자(原子)나 입자(粒子) 단위에서 이들을 살펴보면 어느 한 순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현대의 과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발견을 통해 하나 둘씩 검증해 나가고 있습니다.

딱딱하게 움직이지 않고 항상 그대로 있을 것만 같은 대상들도 그 실제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한 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마음 수행(修行)

교육을 받고 공부를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마음을 길들인다는 것은 마음에 익숙해지는 과정입니다.

불교의 맥락에서 보면, 익숙해짐 또는 명상수행은 마음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잘못된 속성을 버리고 긍정적인 속성을 키우는 것입니다.

명상수행으로 마음을 훈련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부정적인 속성을 버리고 긍정적인 속성을 일으켜 강화할 수 있습니다. 명상수행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분석적인 수행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삼매(三昧) 즉, 일점집중(一點集中)입니다.

수행을 할 때는 먼저 수행의 대상을 지속적으로 분석해야하고 그 과정 속에서 수행의 대상과 점점 익숙해져야 합니다. 수행자에게 명상수행의 대상이 확실히 다가오기 시작하면, 더 이상 분석을 하지 않고도 수행의 대상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분석과 집중의 조화는 수행의 대상인 마음을 길들이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 모두 각자가 본래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바라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인간의 특성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고통을 넘어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교육의 과정을 열심히 마친 사람은 비교적 성공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교육을 통하여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교육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교육은 마음을 잘 길들여 예리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몸과 말을 제어합니다. 그러므로 몸과 말을 위한 어떠한 훈련도 마음과 함께 해야 합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 물리적인 몸과 말을 수행하는 데는 먼저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동기가 있을 때 마음은 그러한 수행의 이익을 따라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을 수행하는 목적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음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웁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버리고 바로 잡아야 할 많은 허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마음을 전환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모으고 잘못된 것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과 방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교육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과 해야 할 것을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요소들도 함께 제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육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고 행복하게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사회적 맥락에서 바라보면, 교육은 생생한 자기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 얼마나 존경받을 수 있는가는 몸과 말과 마음의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은 그 중심이기 때문에 마음을 길들이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삶 속에서 행복과 슬픔은 마음의 지성(知性)이나 힘에 의존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도 역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말과 마음의 행위가 미래에 존재할 우리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성향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신적인 잠재력을 잘 못 사용하면 실수를 계속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힘든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마음의 잠재력을 능숙하게 잘 길들이면, 긍정적이고 행복한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가 다른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마음을 잘 제어하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길들이고 성숙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음 수행의 중요성을 잘 알고, 마음이 무엇인지 탐구해야 합니다.

마음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두뇌를 가리킬 것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옳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특별히 인간의 마음을 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인간의 몸 어느 특정한 부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몸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의식을 인간의 의식이라고 말합니다.

또 동물의 몸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의식을 동물의 의식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 혹은 의식은 실제 거칠고 미세하며 다양한 마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거친 유형의 마음들은 눈과 같은 감각기관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분명히 두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외적인 바탕이나 요소들은 하나의 의식이 생기게 하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근본원인은 순간적인 의식 이전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명료한 의식의 상태입니다.

아리야데바(Āryadeva, 聖天)의 『사백송(四百頌)』에서는 의식의 근본원인은 변화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명료한 의식의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할 논리적인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의식이 아무 때나 생겨난다는 것은 분명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행동을 하고 나면 그 사건은 우리의 의식에 그대로 남습니다. 그 결과 10년이 지나도 우리는 그 경험을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잠재성을 일깨운다.’라고 말합니다. 이 잠재성은 의식의 흐름을 통하여 옮겨갑니다. 필요한 조건이 모이면 이것이 활성화되고 잠재된 인상(印象)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생의 잠재적인 인상도 깨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두뇌와 마음의 관계만으로는 잠재력의 미세한 면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잠재성에 대한 주의 깊은 이해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뿐만 아니라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도록 도와줍니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사고(思考), 관습적 믿음, 마음이 투영하는 다른 대상들에 대한 의심도 풀어 줄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잠재성을 가진 마음의 완전한 성품을 모두 드러낸 상태인, 일체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마음의 잠재력을 모두 일깨운 마지막 결과인 일체지를 얻으려면 완전하고 바른 원인들을 심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적절한 훈련의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원인(因)과 조건(緣)들 중에서도 바르고 완전한 것들에 의존해야 합니다.

잘못된 원인에 열중하면 아주 긴 시간이 흘러도 바라던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뿔(角)에서 우유를 짜는 것과 같습니다. 원인(因)을 모두 다 갖추지 않으면 결과는 생기지 않습니다. 씨앗(種字) 등에 무언가 하나라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싹 등의 결과는 생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과를 바란다면 바르고 완전한 원인과 조건들에 의존해야 합니다.


바르고 완전한 조건들을 모은 다음, 바른 순서를 따라 그 원인들을 적용하여 마음을 넓히면 일체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려면 단순히 필요한 재료를 모아놓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어 내려면, 기름이나 양념 같은 재료들을 어떻게 적절히 배합하고 요리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일체지(一切智)의 결과를 얻기 위한 원인(因)과 조건(緣)들은 무엇입니까?’라고 한다면, 대답하건대, 저 같은 [사람은] 맹인(盲人)과 같아서 그것들을 가르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존(世尊)께서 실제 부처를 이루신(現證菩提) 후에 제자들에게 설하신 바와 같이 제가 세존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비밀주(秘密主)의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라는 것은 자비(慈悲)를 근본으로 하여 생긴 것이고, 보리심(菩提心)이라는 원인(因)에서 생긴 것이며, 방편(方便)으로 구경원만(究竟圓滿)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지를 성취하기를 원한다면 자비와 보리심 그리고 방편,

이 세 가지 모두를 공부해야 합니다.

여기서 까말라실라께서는 일체지를 이루는 방편과 바른 원인을 심는 것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일체지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누구라도 먼저 자비심에 바탕을 둔 보리심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수행은 또 특별히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을 함께 수행하고, 육바라밀(六婆羅蜜)을 뒷받침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방편으로 알려진 이 수행들은 서로 따로 떨어뜨려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소승이나 대승할 것 없이 모든 부처님의 법을 수행하려면, 그 근본인 자비심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3. 자비(慈悲)


자비심(慈悲心)이 발동(發動)한 보살들은

모든 유정(有情)을 해탈(解脫)케 하려는 분명한 서원(誓願)을 세웁니다.

자비심(慈悲心)은 수행의 초기 단계나 중간 단계 그리고 마지막 단계 할 것 없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위의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보살들이란 자비심이라는 강력한 동기가 일어나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일체지를 이루려는 서원을 세운 위대한 존재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결심이 이타적인 생각에서 깨닫고자 하는 마음인 보리심(菩提心)입니다.

이것은 자비심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다음, 자신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버림으로서, 너무나 행하기 어렵지만 흐름을 끊지 않고 긴 세월을 쌓아야 하는 공덕(功德)과 지혜(智慧)의 자량(資糧)에 집중해 들어갑니다. 보리심을 일으킨 힘으로, 그 모든 것을 언제 다 충족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지 말고, 육바라밀을 포함한 보살의 수행을 하나씩 밟아 나가야 합니다. 그 결과 보살들은 무한한 공덕과 지혜를 많은 노력 없이도 점점 쌓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확실한 공덕(功德)과 지혜(智慧)의 자량(資糧)을 원만하게 구족(具足)할 수 있습니다. 자량(資糧)을 원만하게 구족(具足)하면 일체지(一切智)는 손 안에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일체지의 근본은 오직 자비(慈悲)뿐이며 가장 먼저 [이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일체지의 근본 바탕은 “오직” 자비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이라는 단어는 자비심이 일체지의 핵심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원인과 조건들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체지는 자비심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자비심은 꼭 필요한 원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자비심만으로 충분하다면 앞에서 설명한 보리심이나 방편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말은 모순일 것입니다. 『불설법집경(佛說法集經)』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세존이시여, 보살은 너무 많은 법(法)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한 가지 법이라도 제대로 지니고 바르게 깨우친다면 부처의 모든 법은 그의 손 안에 있게 됩니다. 한 가지 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즉 대비심(大悲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은 자비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비심을 근본으로 보리심이 생깁니다.

그렇게 누군가가 보살행(菩薩行)을 계속해나가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주제의 결론은 자비심 없이는 자신보다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깨달으려는 수승(殊勝)한 마음인 보리심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타심이 없이는 육바라밀 같은 대승 보살행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즉 이러한 과정이 없이는 불성(佛性)을 확인하는 일체지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비심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대비심(大悲心)을 모두 섭수(攝受)하신 불세존(佛世尊)들은 자리(自利)를 원만하게 모두 이루셨어도 끝내 유정(有情) 세계 안에 머무시며, 성문(聲聞)처럼 열반(涅槃)의 최고 적정처(寂靜處)에도 들지 않습니다. 유정을 살펴보시고 열반의 적정처를 불타는 철옥(鐵獄)으로 여겨 멀리 하시는 세존들께서 [그렇게] 무주열반(無住涅槃)하시는 원인(因)은 바로 대비심입니다.


자비심은 수많은 경전들에서도 찬탄(讚歎)하고 있는 것으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쨘드라끼르띠(Candrakīrti, 月稱)는 깨달음의 길에서 시작단계나 중간단계 그리고 마지막 단계 할 것 없이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자비심이라고 말하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시작단계에서는 자비심을 근본 바탕으로 해서 보리심이 생깁니다. 또 보살이 마지막 목적을 이루려면 육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중간단계에서도 자비심은 똑같이 중요합니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자비심은 부처님이 무주열반(無住涅槃)하시는 이유입니다. 즉 부처님이 깨달음의 지복상태에 머물지 않고 중생을 위해 일하는 원동력이 바로 자비심입니다. 자비심은 부처님께서 무주열반하시는 동기이며,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였음을 보여주는 법신(法身)과 남들을 위한 목적을 성취하였음을 보여주는 색신(色身)을 완성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비심의 힘으로 이 허공계가 다할 때까지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헌신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목적을 이루고 나서도 보리심의 중요성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까말라실라께서 인용하고 있는 쨘드라끼르띠의 다른 논문에서도 이 주제에 대한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또한 대중들에게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전통에서는 어떤 특정한 철학적 견해가 경전의 권위 자체만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개인 각자가 철학적 견해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논리와 이성에 의지해야 합니다. 지식의 대상들은 폭넓게 분명히 드러난 현상과 부분적으로 감춰진 현상 그리고 완전히 감춰진 현상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부분적으로 감춰진 현상은 직접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논리적인 적용이 필요합니다. 이 때 분석의 대상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추론(推論)에 의해 인식할 수 있습니다. 추론을 통한 인식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논리식(論理式) 즉, 논법(論法)이 필요합니다. 또, 입문 단계에 있는 사람은 완전히 감춰진 현상을 과학적 논리나 합리적인 추론만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우리의 경험으로도 증명하기가 곤란합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믿을만한 경전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먼저, 권위 있고 믿을 만한 경전의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유효하고 믿을 만한 스승의 가르침으로 그것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경전의 권위는 직접적인 인식에 위배되지 않는 분명한 현상에 대한 가르침이나 추론에 위배되지 않는 부분적으로 감춰진 현상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믿음에 근거해서 추론적 인식에 위배되지 않는 완전히 감춰진 현상에 대한 이중 삼중의 분석에도 틀림이 없어야 합니다. 즉 경전의 권위에 대한 유효성은 논리적 이성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르침의 본래 의미나 주요한 목적과 관련하여 그 내용이 사실이거나 유효하다면, 다른 목적과 관련하여서도 그 유효한 면을 추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을 수행하는 주요한 목적은 명확한 선성(善性, 또는 涅槃이나 一切智)의 상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인간이나 천상계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일반적인 목적입니다. 따라서 분명한 선성(善性)을 깨닫기 위한 과정을 제시하는 가르침은 어떠한 논리적인 검증에도 그 허물을 찾을 수 없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어떤 의문이 어려운 것 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이라면, 그 보다 단순한 문제들과 관련한 것들은 그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스승이란 이러한 가르침을 주시는 존경스럽고 의지할만한 분을 말합니다. 스승은 자비심을 수행한 힘으로 깨달음을 얻으신 분입니다. 스승이 가진 커다란 자비심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진실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게 큰 자비심의 힘으로 스승은 제자가 장애를 제거하여 보다 완전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과정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경험하신 깨달음에 비추어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부처님은 궁극적인 실체를 직접 깨달으시고 그 진리를 드러내시는데 아주 능숙하셨습니다.

부처님의 헌신은 무조건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일을 영겁의 세월동안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준비 해왔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고 이해함으로서 여러분 스스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주제나 수행을 입증할 때는 특정한 경전의 가르침을 인용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수많은 오류와 의심을 제거할 수 있고, 새로운 통찰의 힘을 얻기 위한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4. 자비의 근본 평등심(平等心)


자비심은 일체지의 상태를 깨닫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인들 중에 하나입니다.

자비심은 수행의 시작단계나 중간단계 그리고 수행을 다 마치고 나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제 질문은 자비심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비(慈悲)를 수행하는 단계에 처음 들어가 [어떻게] 시작하는 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먼저 평등심(平等心)을 길러서, 모든 유정(有情)을 향한 집착(貪)과 분노(瞋恚)를 버릴 수 있는 마음(捨)의 심성(心性)을 계발(啓發)해야 합니다.

자비심은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모든 중생들에게 집중하는 마음입니다.

자비심에는 지혜와 관련한 세 가지의 유형이 있습니다. 즉,

1. 유정 중생들에게 집중하는 자비심과

2. 현상에 집중하는 자비심

3. 그리고 감춰진 뜻에 집중하는 자비심의 세 가지를 말합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중생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이 세 가지는 그 의도가 다른 것이 아니라 집중하는 대상이 다른 것일 뿐입니다.

1. 유정 중생들에게 집중하는 자비심은, 무상이나 본래의 성품이 공성인 중생들의 속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유정 중생 자체에 집중하는 것 입니다.

2. 현상에 집중하는 자비심은 유정 중생에게 집중할 뿐만 아니라,

유정 중생의 무상한 실체에도 집중하는 자비심을 말합니다.

3. 마찬가지로 감춰진 뜻이 있는 것 즉,

이것은 본래의 성품이 결여되어 있는 중생들의 본성에 집중하는 자비심을 말합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자비심은 공덕을 쌓는 친절한 마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어떤 특정한 종교를 믿는가 안 믿는가의 문제는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일반적인 선성(善性)은 그가 일으키는 친절한 마음의 형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친절한 사람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친근감을 느끼게 합니다.

심지어는 동물들에게도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은 자신들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 주위를 빙빙 돌면서 즐거워합니다. 반대로 공격적인 악의를 품고 다가오는 사람은 동물이나 새들도 금방 눈치를 챕니다. 그런 사람의 목소리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달아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친절한 동기나 따뜻한 마음은 극히 소중한 성품입니다. 자비심을 지닌 사람은 모두에게 존경받으며 그 기쁨에 찬 모습 때문에 어디서나 친구가 따릅니다. 동료들 사이에서 기쁨을 주고 있는 사람을 보면 한 눈에 그가 자비로운 동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단편적인 예를 들어보면 친절함에 대한 의미가 보다 분명해질 것 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 어떠한 값도 치르지 않고 다른 이들의 가슴 속에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가 아니라면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해도 주변에 친구들이 모여든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경쟁적이고 공격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의 재산을 다 준다 해도 제대로 된 이익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애정 어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항상 마음이 즐겁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따라서 친절한 마음과 협조적인 자세는 나와 남 할 것 없이 지금 이 순간과 앞으로도 행복을 얻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입니다.


협조적인 마음에서 생긴 긍정적인 성품은 바랄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들은 자기의 종교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하며 인내와 관용을 기르고 다른 사람을 돕는데 관심을 가지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기본적인 원리들에 대해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것입니다. 특히 불교에서는 가르침의 기본 바탕을 자비심에 두고 있으며, 이 자비심에 대한 수행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자비심을 수행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는 고통스런 존재들에게 사랑과 연민을 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의 본래 성품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무한한 중생들에게 집중하면,

그 모든 중생들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강력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먼저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기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평등성(平等性)에 대한 수행입니다.


보통 중생들을 대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 상태를 점검해보면,

- 친근함을 느끼는 부류,

- 혐오하는 부류,

- 무관심한 부류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존재들을 가까운 친구나 친척들로 여깁니다. 하지만 자신과 친구와 친척들 그리고 과거에 가지고 있던 것들이나 지금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가지게 될 것을 방해하고 해롭게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는 거리를 둡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그들에게 혐오감이나 증오심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을 길러야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목적에 관심이 더 많으며 다른 이들에 대한 자비심은 그냥 겉으로만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심을 일으키려면 먼저 모든 중생들을 따로 구분하여 보지 말고 똑같이 생각하는 평등심을 길러야 합니다.


또 우리가 친구나 친척들에게 특히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대하는 것은

결국 집착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드러난 친절 속에는 이기적인 동기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은 나를 이롭게 해, 그리고 저 사람은 나하고 이런 관련이 있어”라는 편견을 가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친절”이라는 용어는 무언가 집착에 더 가까운 말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비심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자비심은 남들의 이익 즉 남들의 행복과 고통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처럼 다른 이들도 고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비로운 사람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려는 긍정적인 자세를 키워갑니다.

일반적으로 친구나 친척에게 갖는 친근감을 집착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더 심해지지 않도록 줄여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집착과 자비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몇몇 책들에서는 “집착”이라는 용어를 자비심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하지만 집착이 자비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집착은 실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비심은 실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려는 동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평등성을 개발하는 데는 두 가지 주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관계의 불확실성 즉, 무상(無常)과 고(苦)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이들에 대한 증오와 집착의 무익함을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중생이 행복을 바라고 고통에서 자유롭고 싶어 하는 똑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보고, 모든 존재들에게 편견 없이 대하는 자세를 기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평등성을 개발하는 위의 두 번째 방법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유정(有情)은 안락(安樂)을 바라며 고통을 원치 않는다는 것과 무시이래(無始以來) 윤회해 온 유정 중생이 수백 번을 나의 친인척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모두 헤아려 보면, 여기에 차별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어떤 것에는 아주 집착하고 어떤 것에는 아주 분노하였었던가, 그러므로 나는 모든 유정에게 마음을 평등하게 대하리라.’라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행동할 수 있도록 중립적인 상태에서 시작하며, 친구와 적에게도 역시 평등심(平等心)을 길러야 합니다.


모든 유정 중생들이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며, 행복을 원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고립된 존재들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의 행복과 고통은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이에 대한 상호 관련성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유정 중생들은 시작도 없던 그때부터 우리에게 직접 간접적으로 많은 이익을 주고, 친절을 베풀어 왔습니다. 이들이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애쓰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편견 없는 자세를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당연한 것입니다.


누구나 다 똑같은 마음으로 대하려면 어떤 특정한 개인들에 대해서 먼저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즉 세 가지 유형의 개인들에 대해 관상을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생에서 나를 해롭게 하는 적들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주는 친구에 관한 것, 또 다른 하나는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은 낯선 이에 대한 것입니다.


마음이 반응하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점검해 보면, 적들을 대하는 마음은 “이 사람은 나의 적이야.”라고 반응하며, 초조해하고 성내며 미워합니다.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은 가라앉고 편안해 집니다. 낯선 사람에게는 싫거나 좋은 감정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실, 편견과 이기심 그리고 좁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나 친척에게 집착하는 것은 이 생에서 받고 있는 순간의 이익 때문입니다.

또 적을 미워하는 것 역시 지금 당장 자신에게 해로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친구는 없습니다.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요. 자신의 적도 처음부터 적의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런 관계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살다보면 지금 이 순간 최고의 친구가 내일 철천지원수로 변하기도 합니다. 또 너무나 미워하던 적이 가장 믿을 만한 친구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과거의 수많은 생을 가지고 말하면, 이런 관계가 별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런 이유들만 봐도 적을 향한 증오나 친구를 향한 집착은 순간에 스쳐가는 잠깐의 이익을 위한 속 좁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좀 더 넓은 눈으로 멀리 바라보면, 평등성은 집착이나 증오의 무익함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줍니다.


지속적인 수행을 통하여 친구와 적과 낯선 사람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모두 평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행의 폭을 넓히면 이웃이나 동족들에게까지 이 마음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결국 수행은 전 세계의 모든 존재들에게로 넓혀갈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개인을 대상으로 시작하여 완전한 평등성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넓은 범위를 대상으로 수행하면 보편적인 평등성을 얻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다시 구체적인 개인으로 돌아와서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화를 살펴보면 그렇게 많이 나아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수행은 점차로 수행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 좋으며,

이 방법은 과거의 많은 스승들이 제안하고 칭찬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무시이래(無始以來) 윤회해 온 유정”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업과 번뇌의 영향으로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순환의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원인이 영원한 것이라면 그 결과도 당연히 영원해야 할 것입니다. 존재의 윤회는 자재천(自在天, Īśvara) 즉 전능한 창조주라고 생각하는 신(神)에 의지하여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윤회하는 존재입니까?

그것은 원인에 근본적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윤회하는 존재가 태어나는 두 가지 근본적인 원인은 업과 번뇌입니다.

그 중에서도 번뇌가 더 지배적입니다.

번뇌들 중에서도 실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 생기는 무지(無知)가 가장 심각합니다.

무지는 외부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의식에서 생긴 실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의식이 존재하는지 안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어떠한 결론도 확실히 내리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의식이 사물의 본성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는 다른 모든 번뇌의 근본 뿌리에 해당하며, 의식이라는 연속체를 가지고 윤회하는 존재로 탄생하는 원인입니다. 따라서 의식은 시작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의식에 시작이 있었다고 한다면 수많은 궤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생물이 생기기 이전의 무생물을 의식의 시작점으로 인정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생물적인 결과는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원인과 결과는 같은 범주(範疇)에 속한 것입니다. 물리적 대상의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면 결과는 보통 본래의 원인과 똑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식도 역시 유사한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 순간 의식은 같은 범주 안에서 순차적으로 생겨납니다.

지금 이 순간의 의식이 다음 순간 의식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불교 경전들에서는 시작도 없는 마음 즉 무시이래(無始以來)의 마음 또는 시작도 없는 존재 혹은 유정 중생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회하는 존재들에게 시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무시이래(無始以來) 윤회해 온 유정”에서 유정은 무수한 세월동안 우리의 친척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유정 중생들에 대한 친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직접 간접적으로 우리를 이롭게 해 왔습니다. 이 생에서 우리의 친구와 친척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만 봐도 분명합니다. 낯선 사람들 역시 공덕을 쌓는 바탕으로서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애(慈愛)와 자비(慈悲)는 우리에게 그렇게 친절했던 무한한 유정 중생들을 기억하는 속에서 길러야 합니다.


이러한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리심이 생깁니다. 따라서 공덕과 지혜를 쌓는 수행은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유정 중생들 모두와 관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위없는 목적을 성취하려면 유정 중생들을 친절로 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샨띠데바(Śantideva, 寂天) 보살의 『입보리행론(入保提行論)』은 이러한 관점에서 유정 중생들이란 결국 그들의 본래 불성(佛性)을 회복하도록 도우려는 부처와 다르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정 중생들은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무한한 가치와 도움을 줍니다.

세속적인 차원에서 적들은 해로움의 원인입니다.

실제 우리는 그들에게 적의를 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적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훌륭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관용과 인내를 수행할 수 있는 적과의 기본적인 관계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를 잘 이해함으로서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인내와 관용을 수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전들에서, 자신의 적을 자신의 최고 스승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요약하면, 적을 포함한 모든 유정 중생들이란 직접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다양한 방식으로 크게 도와주고 있는 존재들을 말합니다.


그렇게 모든 유정(有情)에 대한 평등심(平等心)을 갖추고 나서 자애(慈愛)를 기릅니다.

자애의 물로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적시어 비옥한 대지(大地)처럼 [만들고 거기에] 자비(慈悲)의 씨앗을 심으면 아주 빠르게 흠 없이 잘 자랄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자애롭게 하고 자비를 길러야 합니다.


자애와 자비를 기르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까말라실라께서는 곡식을 기르는 것에다 비유를 하셨습니다. 씨앗은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땅에 심어야 잘 자라듯, 자비심 역시 자애를 바탕으로 기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유정 중생들을 향한 평등성을 기르려면, 그들을 수많은 생에 함께 했던 친구나 친척으로 보아야 하며 또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바라는 우리와 똑같은 존재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다스리면 점점 중생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하나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개개의 유정 중생들을 보면 볼수록 그들에게 마음이 이끌릴 것이며, 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등성에 대한 수행을 하려면 먼저 자애(慈愛)를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자애의 물로 촉촉이 적신 다음, 자비심의 씨앗을 심으면 아주 빠르게 잘 자라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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