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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6. 수행차제.삼종요도

2.곰림 바르빠(修行次第 中篇)

『곰림 바르빠(修行次第 中篇)』원문 번역본(原文飜譯本) 2.



이에 먼저 요가 수행자가 편하고 빠르게 지(止)와 관(觀)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止)와 관(觀)의 자량(資糧)을 증장(增長)시키는데, 의지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止)의 자량(資糧)이라는 것은, 적절한 장소에 머물며 탐심(貪心)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알며, 집착 등의 분별심(分別心)을 완전히 버리고 계율을 청정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공덕을 모두 갖춘 적절한 장소가 있는 곳을 알아야 하는데, 의복과 음식 등을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거나 얻기 쉬우며, 악한 사람과 적 등이 거주하지 않아 머물기에 좋고, 질병이 없는 땅이라 터가 좋으며, 계율을 수지(受持)하고 견해가 같은 좋은 친구(道伴)가 있으며, 낮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지 않고 밤에는 잡음이 없는 곳이 좋은 곳입니다.

 

탐심을 줄인다는 것은 법복(法服) 등이 좋거나 많다고 특별히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은 법복(法服) 등이 좋지 않은 것을 얻었어도 항상 만족하는 것입니다. 많은 활동(分別心)을 완전히 떠난다는 것은 사고파는 등에서 악업(惡業)을 모두 떠나고, 재가자(在家者)나 출가자(出家者) 누구든지 너무 가까이 하는 것을 완전히 떠나며, 의약(醫藥)과 점성(占星) 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계율을 청정히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율의(律儀:戒行) 모두 성죄(性罪: 자체로 무거운 重罪)든 차죄(遮罪:행위 규범 위반)든 지니고 배운 것(遮戒學處)을 위반하지 않고 방일(放逸) 하더라도 신속하게 참회(懺悔)하여 여법(如法)하게 하는 것이며, [또] 성문(聲聞)의 율의(律儀)에서, 바라이죄(波羅夷罪: 승려자격 박탈의 최고 중죄)는 개차(開遮: 참회용서)하여 회복할 수 없다고 설하셨지만, [혹시라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또한 참회하여 이후에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업(業)을 지었든 그 마음에는 본래의 성품이 없다는 것(心無自性)을 각각 분석하든지 제법(諸法:現象)은 본래 성품이 없다는 것(法無自性)에 익숙해짐으로써 그의 계율이 청정해 질 수 있음을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아사세참회대승경(聖阿闍世懺悔大乘經)』에서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그렇게 참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행에 확실하게 매진해야 합니다.


집착(執着)도 역시 이 생과 다음 생에 다양한 허물을 마음에 짓게 하므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분별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의 모습으로 윤회하는 사물은 아름다울 수도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은 [끝내] 소멸하는 법으로 불안정합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 모든 것들은 나(我)에게서 머지않아 떨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나(我)에 대해 어찌하여 [그렇게] 지나치게 집착하는가라고 곰곰이 생각하여 모든 분별을 버려야 합니다. [더불어] 관(觀)의 자량(資糧)이라는 것은, 성현(聖賢)께 의지하여 많이 듣고 완전함을 추구하며 적절히 사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성현(聖賢)을 의지해야 하는가라고 한다면, 다문(多聞)하시고 말씀이 분명하며 자비심을 지니어 어려움을 잘 견디시는 분을 말합니다.


이에, 많이 듣고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세존께서 십이분교(十二分敎: 열두 가지 가르침의 형태)하신 요의(了義: 확실히 드러난 뜻)와 불요의(不了義: 뜻이 잘 드러나지 않은 것)를 겸양한 자세로 진지하게 듣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필요한 만큼 듣지 않는 것은 관(觀)의 장애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경전에서, “관(觀)은 듣고 사유하여 생긴 바른 견해(正見)라는 원인(因)에서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연천소문경(那羅延天所問經)』에서도, “듣는 것이 갖추어지면 지혜가 생겨날 것이며, 지혜가 갖추어지면 번뇌가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적절히 사유한다는 것은 요의(了義) 경전과 불요의(不了義) 경전 등을 바르게 판단하는 것으로, 그와 같이 보살의 의심이 사라지면 수행이 한 곳으로 분명해 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심스런 의혹은 커져만 가서 마치 돌 계곡 길을 건너는 사람처럼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요가 수행자는 언제나 생선과 고기 등을 피하고 가까이 하지 않으며 적당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살은 지(止)와 관(觀)의 모든 자량(資糧)을 쌓음으로서 수행에 들어가야 합니다.

* 아래 부분은 실제 수행하는 부분임

이에 요가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는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든 모두 완전히 구족(具足)해야 하는 데, 변(便)을 보고 나서 번잡한 소리가 없어 마음에 흡족한 곳을 찾아, “내 모든 유정을 깨달음의 정수(精髓:心要)에 이르게 하리라.”라고 생각하며, 일제 중생을 구경에 이르게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비심(大悲心)을 시현(示現)하여 시방(十方)에 머무시는 불보살님들께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한 다음,


불보살의 존상(尊像)이나 탱화(幀畵) 등을 앞에다 모시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하며, 그들에게 정성껏 헌공(獻供) 찬탄(讚嘆)하고 나서, 자신의 허물을 참회(懺悔)한 다음, 일체 중생의 공덕을 따라서 향수(享受)해야 하며,


아주 편안하게 앉아서 주존(主尊) 비로자나(毘盧遮那)의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눈은 너무 크게 뜨지도 감지도 말며 코끝을 향해 두고, 몸은 너무 앞으로 기울거나 뒤로 기울지 않게 똑바로 세우며, 생각은 안으로 돌려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어깨는 같은 높이에 두고, 머리는 젖혀지지도 않고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게 하며, 코에서 배꼽까지 일직선이 되게 합니다. 이(齒)와 입술도 자연스럽게 합니다. 혀도 윗니 부분에 닿게 합니다. 호흡의 들고 남(氣息出入)도, 소리가 나거나 너무 세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고, 어떤 것에도 끌리지 않게 천천히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숨을 들이 쉬고 내 쉬어야 합니다.


이에, 먼저 지(止)를 성취해야 하는 데, 외부경계(境界:對象)에 산란(散亂)함을 가라앉히고 나서 내적인 대상(所緣)에 [집중하여] 지속적으로 자기 본성(本性)에 머무르며, [몸과 마음이] 경안(輕安: 맑고 가벼움) 상태에 안주(安住)하는 것을 지(止)라고 합니다.


지(止)의 본성을 볼 수 있을 때, 그 자체를 분별하는 것이 관(觀)입니다.

 

『불설제개장보살소문경(佛說除蓋障菩薩所問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지(止)는 한 곳에 집중(一處(点)集中)하는 마음의 성품이며, 관(觀)은 바르게 각각의 것을 분석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야 지(止)를 완전히 탐구(探究)할 수 있으며, 관(觀)에 능숙한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답하시기를, ‘미륵이여, 나의 법(法)을 상대적으로 구별하면 다음과 같다. 계경(契經:經, Sutta)·응송(應頌:重頌, Geyya)·기별(記別:記答, Veyyākaraṇa)·풍송(諷誦:偈, Gāthā)·자설(自說:感興偈, Udāna)·인연(因緣, Nidāna)·비유(譬喩, Avadāna)·본사(本事:如是語, Itivuttaka·본생(本生, Jātaka)·방광(方廣, Vedalla)·희법(希法:未曾有法, Abbhutadhamma)·논의(論議, Upadeśa) 등을 보살들에게 설하노니, 보살은 이것들을 잘 듣고 잘 지니며, 경문(經文)을 염송(念誦)해야 하고, 마음으로 잘 구분하며, 본 것을 잘 이해하고 나서, 홀로 고요한 곳에 바르게 머물며, 이와 같이 잘 사유한 법의 내용을 마음에 새기고, 어떤 마음이 생각을 만드는 마음인가에 대해 내면에서 끊임없이 억념(憶念)해야 한다.”


“이렇게 안주(安住)하고 이것을 수없이 반복 적용하면, 이에 몸의 경안(輕安)과 마음의 경안(輕安)을 성취할 수 있으며, 이것을 지(止)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보살은 지(止)를 완전히 탐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몸의 경안(輕安)과 마음의 경안(輕安)을 성취하고 나서, 그 자체에 안주(安住)하여 마음의 산란(散亂)을 가라앉힌 다음,

 

이와 같이 생각으로 만든 현상(法)은 그 자체가 내적인 삼매의 행위경계(境界:對象)로서 영상(影像)과 같은 것이니, [이들] 각각을 분석하여 신해(信解)해야 한다.

 

이처럼 삼매의 행위경계(境界:對象)인 영상(影像)들이 인식의 대상(境界)임을 판별하여 철저히 구분하고, 완전히 분석하며, [이들을] 모두 분별하기 위해 인내(忍耐)와 기쁨으로 통찰(通察)하여 이해하는 것을 관(觀)이라고 하며, 이렇게 해서 보살은 관(觀)에 능숙해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요가 수행자가 지(止)를 실제로 성취하고자 한다면, 먼저 계경(契經)과 응송(應頌) 등의 십이분교(十二分敎) 모두가 진여(眞如)로 인도(引導)하고 있고 진여로 이끌어 왔으며 진여로 이끌어 갈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으로, 그곳에 마음을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


한 가지 형태로 어떤 형태의 현상(諸法)도 포괄할 수 있는 대상(蘊) 등에 마음을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 한 가지 형태라 함은, 보고 들은 바와 같이 부처님의 존상(尊像)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즉 『성삼매왕경(聖三昧王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황금의 꽃과 같은 옥체(玉體)이신

세간(世間) 보호자 [관세음]의 완전한 아름다움,

그 대상(所緣)에 마음을 두고 있는

보살을 정(定, Samāhita)에 들었다 하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무언가 바라던 대상(所緣)에 마음을 두고, 그 자체가 되기 위해 지속적으로(相續)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까이 두고서 마음에 대해 이와 같이 분석해야 합니다. 즉 대상을 잘 지니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침몰(沈沒: 무겁게 가라앉음)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외부경계(境界:對象)에 도거(掉擧:들뜸)하여 산란(散亂)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점검해야 합니다.


이에, 만일 혼침(昏沈: 몽롱한 무기력)과 수면(睡眠:졸음)에 굴복하여 마음이 침몰(沈沒)하거나 침몰할 염려가 있을 때는 최고 환희(歡喜)의 대상인 부처님의 존상(尊像) 등이나 밝은 빛을 관상(觀想)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침몰(沈沒)을 제거한 다음, 무엇이든 대상 그 자체에 마음을 [두고] 대상을 아주 분명히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언제든지, 선천적인 맹인(盲人)이나 어둠 속에 있는 사람 같고, 눈을 감은 것과 같아서 마음의 대상을 분명하게 볼 수 없을 때는 침몰(沈沒)하고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언제든지, 외부의 형상 등에 [마음이 향하여] 그들의 특성을 구별하는데 쫓아가거나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을 하고, 이전에 경험한 경계(境界:對象)에 이끌려 마음을 방일(放逸: 놓고 풀어짐)하거나 방일할 염려가 있을 때는 모든 생각을 분석하지 말고 고통스러움 등에 대한 생각을 내서 대상(所緣)의 본질(性品)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렇게 산란심(散亂心)을 가라앉히고 나서, 주의(主意: 알아차림)와 경계(警戒: 깨어 있음)의 끈으로 마음의 코끼리인 대상(所緣)을 나무에다 묶어 두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침몰(沈沒)과 방일(放逸)이 사라지고 대상(所緣)에 대한 마음이 평온해 지는 것을 보게 되면 정진(精進)을 [조금] 느슨하게 하여 적당하게 해야 하며, 그렇게 적당한 상태에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지(止)를 닦고 나서 몸과 마음의 경안(輕安)이 이루어지고, 원하는 만큼 대상(所緣)에 [집중하는] 마음을 스스로의 힘으로 갖추고 나면, 그 때 지(止)를 성취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지(止)를 성취하고 나면 관(觀)을 수행해야 하는 데,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즉 “세존의 모든 말씀은 완전한 가르침이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진여(眞如)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으며 진여로 인도하고 있다.

 

진여를 알고 나면 빛이 나타나 어둠을 물리치는 것처럼 [전도된] 견해의 모든 그물을 피할 수 있다. 지(止)만으로는 맑음을 이룰 수 없고 장애의 어둠도 제거할 수 없으며, 지혜로 진여를 바르게 수행하여야 청정지혜(淸淨智慧)를 [얻을 수] 있다.

 

지혜만이 진여를 깨우치게 할 수 있으며, 지혜만이 장애를 바르게 제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지(止)에 안주(安住)하면서 지혜로 진여를 완전히 탐구하리라. 지(止)만으로는 만족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