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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6. 수행차제.삼종요도

4. 곰림 바르빠

* 지금부터 이어지는 곰림 바르빠는 모두 달라이 라마의 주해입니다. 이 논서의 귀중한 가치에 비해 주석서를 발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달라이 라마의 주해는 아주 귀중한 해석의 열쇠입니다. 정성껏 그 깊이를 탐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덴 합장.


발단(發端)


범어(梵語)로는 ‘브하와나끄라마(Bhavanakrama)',

서장어(西藏語, Bod-yig)로는 ‘곰뻬림빠(sGom Pa'i Rim Pa)',

[한어(韓語)로는 ‘수행차제(修行次第)’라고 합니다.]


문수동자(文殊童子) [보살님]께 배례(拜禮) 올립니다.

[여기에] 대승 경전의 체계를 따라 입문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수행차제(修行次第)를 간추려서 설명하겠습니다. 이에

일체지(一切智)를 속히 성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원인(因)과 조건(緣)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수행차제(修行次第)』라고 부르는 이 논서(論書)는 위대한 정신적 스승이신 까말라실라(Kamalasila, 蓮花戒)께서 저술하신 것입니다. 이 논서는 원래 상편, 중편, 하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설명할 내용은 중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논서의 핵심주제는 보리심(菩提心)과 공성(空性)에 대한 바른 견해인 정견(正見)입니다.


불성(佛性)을 이루는 정신적인 길에는 지혜와 방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부처님의 물리적인 몸인 색신(色身)과 지혜의 몸인 법신(法身)을 성취하는 수행의 길을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먼저 다른 유정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바라밀(婆羅蜜: 실천행)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행하는 바라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방법과 공성에 대한 지혜를 깨닫는 방법은 모두 불교(佛敎) 수행의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핵심 요소입니다. 이 논서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두 가지 요소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담겨져 있습니다.


이 가르침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보리심의 근본에는 자비심(慈悲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이러한 사고(思考)는 모든 현상의 궁극적인 본성인 공성을 깨닫는 지혜수행으로 이어집니다.

이 지혜는 모든 사물의 공성에 집중하는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hyana이 하나로 합일된 상태를 말합니다.


북인도의 라훌 스피띠(Lahul-Spiti) 그리고 낀노르(Kinnaur) 지역에서 여기까지 이렇게 법문을 들으러 오신 여러분은 대부분 학식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 많은 분들은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나 믿음이 없는 초심자들이기 때문에, 좀더 기초적인 수준에서 가르침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종교에 대한 관심은 일반적으로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특히 불교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 것인 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종교에 대한 관심을 일으킬 수 있는 여러 구절들이 있으며, 논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종교는 단순히 맹목적인 신앙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논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믿음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믿음과 논리를 바탕으로 한 믿음의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의 경우에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방식과 자신의 필요와 요구에 맞게 관찰해 나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믿음은 보통 자신에게 유용한 무언가가 있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특히 대승(大乘)에서는 먼저 가르침의 내용을 잘 점검해보고 나서 논리적으로 인정할 만한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만 이해해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다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좀 더 깊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경전의 가르침들은 대부분 문자만으로 논리적 분석이 안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좀더 깊은 차원의 해석이 필요합니다.

반면에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논리적으로 합당한 경전들도 있습니다. 더불어 두 가지 모두를 필요로 하는 경전도 있습니다. 즉 어떤 부분은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하고 어떤 부분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해석을 하지 않으면 끝도 없이 반복되는 궤변(詭辯)이나 희론(戱論)에 빠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경전들을 하나씩 점검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불교 공부에서 중요한 것이 논리적 분석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단편적인 예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언가에 대한 관찰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분석대상의 실험법을 배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이성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할 때는 논리적인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법문을 하는 동안에는 잘 집중해서 듣고, 가르치는 내용을 잘 기억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기록하여 나중에 다시 점검할 수 있도록 보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먼저 가피(加被) 즉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의 가피나 스승의 가피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가피는 여러분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가피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불(佛) 법(法) 승(僧)삼보(三寶)의 가피나 스승의 가피를 말할 때도 가피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긍정적인 면이 증가하고 부정적인 면이 줄어들 때, 그것을 가피라고 합니다.

가피는 티벳어로 “진랍(Byin rLab)"이라고 하는데, “거대한 잠재력”이라는 의미의 “진(Byin)”과 “변화 한다 또는 변화 시킨다”라는 의미의 “랍(rLab)”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진랍(Byin rLab)”은 “거대한 잠재력을 변화시킨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가피는 이전에 없던 착한 성품을 개발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착한 성품은 발전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진랍”은 마음에서 착한 마음이 생기는 것을 방해하는 번뇌 망상을 줄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가피란 마음의 선한 모습을 강화하고 허물을 제거하는 힘을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이에 일체지(一切智)를 속히 성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원인(因)과 조건(緣)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논서가 다루고 있는 내용이, 대상을 정교하게 분석해 나가는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철학적 작업이 아니라, 수행의 과정과 방법을 담고 있는 수행 지침서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경전은 이론적 논리만을 담고 있고 또 어떤 경전은 수행의 방법만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불교의 경전이 다 마음을 다스리고 성숙하게 하는 논리적인 방법과 실천적인 방법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어떤 부분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어떤 경전은 기본적으로 논리적인 학습에 유용하고, 또 어떤 경전은 수행의 과정을 습득하는데 유용합니다. 이 논서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즉 수행의 과정과 절차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을 따라서, 『수행차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논서는 수행자가 마음의 흐름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쌀 알갱이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것처럼 어지러운 것이 아니라, 적절한 순서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행차제』의 세 부분 중에 본문은 중간 부분에 해당합니다. 아짜리야(Acarya, 傳敎師) 까말라실라께서는 맨 처음 이 내용을 인도말로 가르치셨습니다. 본문은 범어(梵語)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성스러운 경전 언어에 대한 인연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또 이렇게 인도 당시의 언어로 제목을 붙이는 것은 역사적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설역(雪域)의 땅 티벳에 문명의 새벽이 오고 점점 국가라는 형태를 갖추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의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돌아보면 티벳인들은 다양한 사회문화적인 요소들을 주변국가로부터 흡수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를 비롯한 남쪽의 여러 나라에서는 정신을 풍요롭게 한 종교와 문화를 수용하였습니다.

특히 의학, 불교, 범어(梵語) 등의 문화와 학문들을 수많은 성자와 학자들의 고향인 인도에서 들여왔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티벳인들은 인도를 성스러운 땅이라고 부릅니다. 다양한 야채 요리와 음식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야채와 관련한 티벳어의 많은 단어들이 중국어와 유사하며 오늘날까지도 그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추운 기후에 맞게 발전한 복장들은 몽골의 영향이 강합니다. 복장의 색깔이나 모양 등의 많은 부분에서 그 영향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세기를 티벳은 이웃 나라들과 접촉해 왔습니다. 많은 것들을 수입하여 우리 자신의 독특한 문화로 발전시켜 온 것입니다. 본문에서 “범어(梵語)로는”이라고 시작하는 것은 이 논서의 정통성(正統性)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인도의 스승으로부터 전해졌다는 말입니다.


또 분문에서는 “서장어(西藏語, Bod-yig)로는”이라고 말하면서, 티벳어 제목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논서가 다른 언어에서 티벳어로 번역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티벳어는 불교의 수많은 경전이나 주석서들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단어와 표현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티벳어는 불교의 전문적인 논리 용어나 구체적인 수행의 경지를 표현하는 주요 언어로서 여러 세기 동안 그 역할을 다해 왔으며, 지금도 불교의 모든 깊이를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언어 중에 하나입니다. 즉 현대의 언어들 중에 소승(小乘) 대승(大乘) 금강승(金剛乘)의 모든 불교적 깊이를 다 다룰 수 있는 독특한 언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티벳어는 인류의 중요한 문화적 재산이며, 불교의 원래 모습들을 재구성해낼 수 있는 소중한 불교 언어입니다.


“문수동자(文殊童子) [보살님]께 배례(拜禮) 올립니다.” 이 구절은 번역자의 예경 부분입니다. 번역자 혹은 역경사(譯經師)가 아무런 장애 없이 모든 일을 끝낼 수 있기를 바라며 귀의(歸依)를 올리는 부분입니다. 이 구절은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모든 목적이 다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문에 해당합니다. 과거에 모든 불교의 법왕(法王)들이 공표하신 것처럼, 문수보살님께 예경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또 이 책이 형식적으로 불교의 경(經)·율(律)·론(論) 삼장(三藏) 중에 경(經)이나 논서(論書) 부분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번역자의 예경에서, 만약 불보살님께 예경을 올리고 있다면 그것은 경장(經藏)에 속한 경전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문수보살님께 예경을 올리는 경우는 그 경전이 논장(論藏)에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만약 어떤 경전이 율장(律藏)에 속한 것이라면, 그때는 오직 일체의 지혜를 모두 이루신 부처님께만 예경을 올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번역자의 예경은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이 논서의 기본 주제는 지(止)와 관(觀)을 하나로 합일한 삼매(三昧)에 의지하여 얻을 수 있는 무아(無我)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는 논서이기 때문에 문수보살님께 예경을 올리고 있으며, 따라서 논장(論藏)에 속한다는 말입니다. “대승 경전의 체계를 따라”라는 구절은 저자가 이 논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수행의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대승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하는 것입니다.

답은 불성(佛性)입니다.

불성은 무엇을 말합니까?

일체의 모든 지혜를 다 갖추신 분을 부처라고 합니다. 이러한 부처의 성품을 불성이라고 합니다.

대승을 공부하는 마지막 목적은 부처의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적절한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탐구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이 수행을 통하여 일체지를 이루기 위한 바르고 완전한 과정을 밟아 나가야 합니다. 이상으로 이 논서의 주제를 간단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위대하신 용수(龍樹, Nāgārjuna) 보살의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자신과 세상을 위해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려면,

산(山)처럼 확고부동한

이타심(利他心)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자비심과

이원(二元)을 초월한 지혜를 갖추어야 하리라.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도 남들과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이들은

일체지(一切智)의 경지를 이루려는 동기를 가져야 합니다.

자비심과 이타심 그리고 정견(正見)은 위없는 깨달음의 길을 위한 기본 바탕입니다.

이와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法, Dharma)을 믿고 가까이 해야 합니다.

모든 장애에서 자유로워지고 유익한 것들을 만나려면, 넓고 심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잘 살펴보고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가능한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미래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고 자신을 불행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티벳 불교 4대 종파 중 겔룩(Gelug)파의 뿌리인 까담(Kadam)파(*역주: 까담빠(ꇅ bKa' gdams pa)는, 티벳 불교사에서, 11세기 이후 출현한 신파(新派)들 중에 처음으로 성립한 종파이다. 개조(開祖)는 아띠샤(Atīśa, 982-1054) 존자이며, 후에 쫑카빠(Tsongkhapa, 1357-1419) 대사가 문을 연 겔룩빠(ꇅ dGe lugs pa)의 전신(前身)이기도 하다.)에서 게쉐(Geshe)(*역주: 게쉐(ꇅ dGe-bshes)란 티벳 불교에서 교학적 수업과정을 모두 마치고 얻는 최고의 학위를 말한다. 각 종파마다 조금씩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게쉐라 하면, 불교의 삼장(三藏)에 정통한 분들을 지칭한다.) 학위를 받은 상뿌와(Sangpuwa)는 이 주제에 대한 아주 핵심적인 게송을 남겼습니다. 이 게송은 내 자신의 내면세계에도 깊은 영향을 준 것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마음에 유익할 때 바른 것,

잘 다스려지고 길들여진 행동은 가르침을 들은 흔적이며,

번뇌 망상은 수행이 퇴보하는 흔적이라네.

이와 같이 진실을 이해하는 자를 수행자라고 한다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법(法)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생각하며, 수행하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

마음을 길들이기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스승은 자신의 가르침이 제자의 마음에 유익한 것인지 주의 깊게 잘 살펴봐야 합니다.

제자 역시 자신의 마음에 유익하도록 스승의 가르침에 집중해야 합니다.

제자는 자신의 마음을 길들이고 다스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합니다. 따라서 위대한 까담파 게쉐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라 해야 합니다. 까담파 게쉐들은 법(法)과 마음을 하나로 녹여야 한다고 권계(勸誡)합니다. 지적인 훈련과 마음의 수행이 따로 떨어져 있다면, 수행은 많은 부분을 놓치고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신적 수행의 과정에서는 언제나 스스로를 완전히 점검해야 합니다.

즉, 법(法)이라는 거울을 가지고 자신의 몸과 말과 마음의 잘못을 항상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스승과 제자 모두 자신과 남들의 이익을 위한 동기를 가지고 가르침을 수행해야 합니다.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역주: 쫑카빠 대사의 저서인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 ꇅ Byang-chub Lam-rim che ba)』은 일반적으로 람림(Lam-rim)이라고 약칭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람림’이라는 이름은 깨달음의 단계(菩提道次第)를 뜻하는 일종의 문학군(文學群)이기도 하다. 이 경우에는 티벳어 이름 그대로 ‘람림(Lam-rim)’이라고 표기하기로 한다.)의 기도문에도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강력한 자비심을 동기로

[법이 전해지지 않은] 새로운 곳과

[법이 점점] 쇠락(衰落)해 가는 곳에

불법(佛法)의 보고(寶庫)를 드러내게 하소서.


부처님의 법(法)은 물리적인 무언가가 아닙니다. 불교의 전파와 부흥은 외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내적인 깊이와 마음의 흐름(心相續)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잘못을 줄이면 좋은 성품이 자라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법(法)을 보존하고 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마음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물리적으로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닌 이상, 시장에서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으로 인한 집착을 떠나는 출리심(出離心)과 모든 이들의 이익을 위하여 깨달으려는 마음인 보리심(菩提心) 그리고 공성을 깨닫는 지혜, 이 세 가지를 기르는 수행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에 집중해야 합니다.


불법을 진흥시키고 보존하는 책임은 법을 믿고 존경하며 따르는 이들의 몫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바라는 것을 위해 무언가 건설적인 일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내면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마음을 길들이는 적절한 훈련을 하고,

다른 이들의 마음이 잘 다스려지도록 도와야 합니다.

쫑카빠(Thongkapa) 대사께서는

자신의 마음이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은 어느 누구의 마음도 길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짜리야(Ācarya, 傳敎師) 다르마끼르띠(Dkarmakīrti, 法稱)는 이러한 원리에 대해 아주 분명한 용어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방법이 모호하면

설명은 자연히 어려워진다.


설명을 쉽게 하여 남들을 이롭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보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살들은 마음을 괴롭히는 번뇌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 적극적인 수행을 합니다. 그와 동시에 깨어서 관찰하는 마음을 기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이를 통해,

부정적인 성품을 제거하고 긍정적인 성품을 개발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보살들은,

다른 모든 유정 중생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디그나가(陳那, Dignāga)의 『집량론(集量論, Pramāṇasamuccaya)』에 대한 주석서에도 다음과 같이 말씀이 있습니다.


자비로운 이는 모든 방편을 다 하여

중생들의 고통을 가라앉힌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선(善)한 마음을 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불법이 쇠퇴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는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티벳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침략한 중국인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원칙을 성실하게 지켜 나가야 합니다. 가르침의 목적은 오직 우리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 계율을 지키고 수행의 이익을 찾는 것입니다. 다른 일반적인 강의를 듣는 것은 주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으로 목적이 다릅니다.


이제 여러분은 무엇이 실제로 법을 수행하는 것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수행은 먼저 열 가지 부정적인 행위인 “십악(十惡)”(*역주: 십악(十惡)은 몸(身)과 말(口)과 생각(意)을 짓는 열 가지 부정정인 행위로서, 살생(殺生), 투도(偸盜, 도둑질), 사음(邪淫), 양설(兩舌, 이간질), 악구(惡口, 험담), 기어(綺語, 발림소리), 탐욕(貪慾), 진에(瞋恚, 성냄), 사견(邪見) 등을 말 한다.)을 저지르지 않는 계행(戒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몸과 말과 마음의 모든 부정적인 행위를 적절히 이해하고 그에 대한 대응 방법을 완전히 터득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지식과 함께 개인 각자가 도둑질이나 거짓말 등의 부정적인 행위를 하지 말고 정직과 친절 그리고 다른 모든 선한 행위를 수행해야 합니다.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들은 승가(僧伽, Saṇga)의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승복(僧服)을 입은 것은 승가의 규율을 따라 수행하고, 다른 이들에게 위의(威儀)를 갖추고 대화하겠다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대하고 가르치는 것도 승가의 계율에 따라 바른 방식으로 행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법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번뇌 망상이며,

결국은 번뇌 망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가장 큰 난점은 이 번뇌 망상으로 인해

시작도 없던 그 때부터의 모든 고통이 다 생겨난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을 못 살게 굴거나 적들이 핍박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하지만 외부의 적은 겨우 한 생에서 생기는 직접적인 일일 뿐입니다. 이 생을 넘어서 까지 우리를 해롭게 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 내부의 적인 번뇌 망상은 분명 다음 생까지 이어지는 화근입니다.

실제로는 이 번뇌 망상이 최악의 적입니다.

법(法)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에게 있어 실제 점검은 이러한 번뇌 망상을 발견하고 제거하는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번뇌 망상이 줄어들면 수행은 그 만큼 빠르게 발전합니다.

이것이 실제 수행자를 결정하는 기준점입니다.

외적으로 얼마나 근엄하고 성스러워 보이냐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수행의 모든 목적은 우리 마음의 번뇌 망상을 줄이는 것이며, 결국 뿌리 채 뽑아야 할 것입니다.

넓고 심오한 가르침을 듣고 수행함으로서

수행자는 무아(無我)에 대한 수행과 친근해지고 결국 실제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가르침을 듣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르침을 듣는 효과적이고 적절한 방법을 아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여기에는 듣는 자의 세 가지 버려야 할 허물과 길러야 할 여섯 가지 적절한 의도가 있습니다. 먼저 세 가지 허물 중에 첫 번째는 뒤집힌 그릇처럼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은 가르침을 듣는 장소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서 분주한 것을 말합니다. 사실 누군가가 가르침을 전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듣지 않습니다. 아마 그 가르침에 흥미가 없거나 들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배움의 큰 장애입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가 없는 좋은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고 참석해야 합니다.


두 번째 허물은 구멍 뚫린 그릇처럼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르침은 듣고 있지만 내용을 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가르침을 듣고 나서도 주의하고 집중해서 기억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법(法)을 수행한다는 것은 자신이 들은 것을 유익하게 활용할 줄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냥 한 때 할머니께 들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르침이란 자신의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발전시키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르침에서 유익한 점을 발견하려면 주의 깊게 억념(憶念, Mindfulness)(*역주: 억념(憶念, ꇅ Dran-pa ꇄ smṛti)는 일반적인 기억이나 생각과는 의미가 다르다. 즉, 부처님이 본래 중생의 이익을 위해 세원던 서원의 차원에서 자신을 항상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깨어 있는 것을 말한다.)해야 합니다. 듣고 읽는 등의 모든 배움의 과정에서는 확실한 집중력으로 그 내용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관심이 반감되면 반만 기억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배운 것은 무엇이든 다시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 내용과 의미가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전통적인 티벳 승원에서 하는 것과 같은 논리적인 학습과 논파술(論破術)(*역주: 중세 인도 승원의 교육 방식에서 전해진 티벳 승원의 이 논리적 논파술(ꇅ Tshad-ma ꇄ pramaṇa, 量, 인식 수단 혹은 인식방법)은 지금도 티벳 승원의 가장 기본적인 교육과정으로 전승되고 있다. (Daniel E. Perdue의 『Debate in Tibetan Buddhism』, Snow Lion Publications, Ithaca, New York, 1992판 참조.)을 익히는 것입니다.


듣는 자의 세 번째 허물은 동기와 관련한 것입니다. 즉, 독(毒)을 담은 그릇과 같습니다. 가르침을 들을 때는 동기를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경전을 읽거나 가르침을 듣는 등의 법(法)을 수행하는 모든 행위에는 바른 동기를 가지고 임해야 합니다. 거친 마음을 길들이고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배움이어서는 안 됩니다. 더불어 여섯 가지 적절한 의도(*역주: 즉, (1) 자만하지 않고, (2) 신심을 잃지 않으며, (3)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4) 외부 경계(대상)에 이끌리지 않으며, (5) 안으로 집중하여, (6) 낙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빼툴 린포체(dPal sprul Rinpoche)의 『내 스승의 완전한 가르침(ꇅ sNying thig sngon 'gro'i khri yig, Kun bzang bla ma' zhal lung)』(영문판, Words of My Perfect Teacher, translated by Padmakara Translation Gruop,Vistaar Publications, New Delhi, 2001판 pp.12-15참조.)란 이상의 허물을 가지지 않고, 바른 동기로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듣는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이제 까말라실라의 『수행차제』에 대한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저자는 티벳 불교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신 분으로, 쫑카빠 대사께서는 까말라실라에게 영예로운 학자라는 적절한 칭호를 올렸습니다. 까말라실라는 많은 저서를 남기셨는데, 그중에서도 『중관명(中觀明)』과 이 『수행차제』가 가장 존경받고 있습니다.


상편, 중편, 하편의 세 가지 『수행차제』에 대한 전승 법맥(法脈)은 아주 드뭅니다. 티벳의 중앙과 남서쪽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아주 멀고 고립된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뀐누 라마 뗀진 걀짼(Khunnu Lama Tenzin Gyal tsen)은 티벳의 캄(Kham) 지방에서 이 법맥을 이으셨습니다.

그 뒤를 세르꽁 린포체(Serkong Rinpoche)께서 이으셨습니다. 그 당시 나는 개인적으로 이 법맥을 전승받고 싶었지만 받을 수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길지 않은 논서(論書)이고 해서 나중에 받아도 될 줄 알았습니다. 대신에 부똔 린첸 둡(Buton Rinchen Drup)의 깔라짜끄라(Kālacakra Tantra, 時輪)에 대한 주석 등 여러 가지 깔라짜끄라에 관련한 내용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스위스에 계시던 세르꽁 린포체(Serkong Rinpoche)의 입적(入寂) 소식을 전해 들었고, 가까이 계시던 스승 링 린포체(Ling Rinopoche)께서는 아주 연로하셨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이 『수행차제』에 대한 가르침을 받지 않은 나의 게으름에 대한 큰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나중에 나는 이 가르침의 법맥을 이은 많은 스승들과 게쉐(Geshe)들을 만날 때 마다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한번은 보드가야에서 사꺄(Sa skya)(*역주: 티벳 불교의 사대 종파 중에 하나로 신파(新派)에 속한다.

개조는 켄 꾄촉 꺌뽀(Khon Konchok Gyalpo, 1034-1102)이다.) 종파의 승원장(僧院長)이신 상게 뗀진(Sangye Tenzin)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 『수행차제』에 대한 가르침을 라사(Lhasa)에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캄(Kham)에서 오신 나이든 스승님께 받았다고 했습니다. 법을 전해들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나는 그가 받은 가르침이 뀐누 라마 뗀진 걀짼(Khunnu Lama Tenzin Gyalthen)으로부터 캄 지방에서 이어진 전통이라는 것을 확인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 늦기 전에 이 가르침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는 내가 새로운 경전을 시작할 때면 언제나 스승 링 린포체(Ling Rinopoche)께 자문을 구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이미 입적하시고 난 뒤였습니다. 그 당시 보드가야에는 대학자이신 니마(Nyima)께서 계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상황을 다 말씀드리고 그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도 좋은 생각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사꺄 종파의 승원장이신 상게 뗀진(Sangye Tenzin)께 이 가르침을 이어 받았습니다. 너무도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긴 세월을 가슴에 묻어두었던 법맥의 단절에 대한 안타까움과 양심의 가책에서 저절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게 뗀진(Sangye Tenzin)께서는 이제 팔십대가 넘으셨습니다. 이 분은 사꺄 종파 안에서도 아주 명망 있고 존경받는 스승입니다.


이 『수행차제』에 대한 주석서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 스스로도 아직 까지 이에 대한 주석서를 직접 본 것이 없습니다. 쫑카빠 대사는 이 『수행차제』의 많은 부분을 당신의 저작 속에 인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을 적절히 활용하여 이 『수행차제』를 주석하고 보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까말라실라께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티벳에 전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바른 동기로 티벳에 머무는 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완전한 기반을 다졌습니다. 티벳의 위대한 법왕(法王) 중에 한 분이었던 티송 데짼(Trisong Detsen, 약 740-798) 왕은 아짜리야(Ācarya, 傳敎師) 샨따락쉬따(Śāntarakṣita, 寂護)와 구루 린포체(Guru Rinpoche)이신 빠드마삼바바(Padma- sambhava, 蓮花生)를 티벳으로 초청했습니다. 이들 세 분은 설역(雪域)의 땅 티벳에 불교의 기반을 다지는데 큰 공헌을 하신 분들입니다.

밀법(密法, Tantra)을 포함한 완전한 형태의 불교가 이 분들의 협력으로 인해 티벳에 완전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아짜리야 샨따락쉬따는 불교가 티벳에 자리 잡는 동안 불교의 이론적인 해석과 이해에 대한 오류가 생길 가능성을 미리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자인 까말라실라를 초청하여 그러한 경우에 대비한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역사는 이것이 까말라실라께서 티벳에 초대된 이유이고, 『수행차제』를 지으신 이유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수행차제』의 상편(上篇)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티송 데짼(Trisong Detsen) 왕의 요청으로 이 논서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티벳인들의 이익을 위해 그 중에서도 부처님의 법을 자리 잡게 하기 위하여 위대하신 까말라실라께서 티벳으로 몸소 오신 것입니다. 상편, 중편, 하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수행차제』는 티벳에서 쓰신 것으로, 중국인 화상(和尙)(*역주: 여기서 말하는 중국인 화상이란, 7-8세기경 티벳 불교의 교학과 수행의 방향을 결정한 논쟁에서, 인도측 대표로 나선 까말라실라에게 패한 중국측 대표 마하연(摩訶衍)을 의미한다. 이 논쟁은 티벳 최초의 승원인 삼예(Samye)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삼예의 대논쟁”으로 불린다.)이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티벳 최초의 승원이었던 삼예에서 중국의 마하연 화상의 잘못된 불교 해석에 대해 까말라실라의 반박이 승리하여 이후 티벳 불교의 방향성을 확립한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며, ‘삼예의 대논쟁’으로 유명합니다. 아짜리야 까말라실라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견해에 대한 모순을 확실히 제거하기 위해 이 논서를 지으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의 위대한 스승들은 뛰어난 학문적 성취와 계율을 함께 갖추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논쟁을 하는 동안에도 아주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즉, 상대자들을 개인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실제 논쟁을 할 때도 부처님께서 하신 그대로 분명하고 확실한 이론과 수행을 바탕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봐도 부처님의 법은 스스로 자기 모순을 가진 저급하고 잘못된 견해들을 무색하게 합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이 귀중한 논서는 설역의 땅 티벳과 특별한 업연(業緣)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인 까말라실라께서 티벳에 베푼 한량없는 공덕은 말할 것도 없이 너무나 큰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티벳인들이 그에 대한 고마움을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고 전합니다.

당시에 몇 가지 사건들이 일어난 거지요. 다른 각도에서 보면, 티벳인들이 “법은 꽃을 피웠지만, 마귀(魔鬼)의 무리도 역시 극성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압하기 위해 구루 린포체 빠드마삼바바께서 티벳에 오신 것입니다. 구루 린포체는 모든 마귀의 힘을 제압하고 티벳을 가피 받은 평화로운 환경으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왕(法王)도 구루 린포체께서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티벳 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는 적절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데는 다양한 해석적 접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부처님과 보살들은 모든 중생들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들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일합니다. 관세음 보살님도 역시 티벳과 특별한 업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언제나 현신(現身)하시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피와 끊임없는 관심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티벳인들은 수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승들의 애정 어린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국제적인 상황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위한 지지는 끊이지 않습니다. 진리는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심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미래를 위한 준비도 똑같이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논서는 모든 이들의 미래를 위한 소중한 지침서입니다. 이 지침서를 따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긍정적인 자세를 개발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들 역시 좋은 동기를 가지고 이 가르침을 듣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이 한량없는 공간의 모든 중생들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이 위대하신 까말라실라의 『수행차제』 중편을 들으리라.”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몸과 말과 마음의 어떠한 행위도 기본적으로는 그 성품이 동기에 의해 결정됩니다. 따라서 어떤 행위는 긴 세월 불성(佛性)을 이룰 수 있는 긍정적인 동기로서 선과 행복을 가져옵니다. 반면에 바르고 건강한 동기를 잃어버리면, 아무리 열심히 수행을 하여도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차이 같지만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내용입니다. 심사숙고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논서에서 저자는 소승과 대승의 모든 길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보리심(菩提心) 그리고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에 대한 특별한 강조와 함께 육바라밀(六婆羅蜜)의 수행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 수행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이나 아직 수행의 과정과 형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논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핵심적인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추면 다른 경전들도 큰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논서는 불교의 모든 다른 경전들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