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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6. 수행차제.삼종요도

3. 곰림 바르빠

『곰림 바르빠(修行次第 中篇)』원문 번역본(原文飜譯本) 3.



진여(眞如)는 무엇과 같은가’라고 한다면,

[답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물과 사람과 법의 자성(自性)이 공성(空性)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혜바라밀(婆羅密, Pāramitā) 행으로 깨우치는 것이지 다른 것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세존이시여, 보살은 제법(諸法:現象)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어떤 바라밀행(婆羅密行)으로 파악합니까? 관자재(觀自在) 보살이여, 지혜의 바라밀행으로 파악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止)에 안주(安住)하면서 지혜를 수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요가 수행자는 다음과 같이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온(蘊)·계(界)·처(處:入)를 제외하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온(蘊) 등일 수 없는 것은, 온(蘊) 등이라는 것들이 무상(無常)하고 많은 성품(性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항상(恒常)하며 하나의 성품(性品)이라고 다른 이들이 분별(分別)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을 실재한다고] 믿습니다. 그 자체이거나 또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실재(實在)할 수 없습니다. 즉 [서로 결합하고 의지하여 존재하는 방식 이외에]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세간(世間)에서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人無我]


법무아(法無我)도 역시 이와 같이 수행해야 합니다. 즉 법(法:現象)이라고 하는 것은, 요약하면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입니다. 여기서 온(蘊) 처(處) 계(界) 그리고 형색(形色:形體)을 가진 것들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의 형상(形像) 이외에는 없습니다. 즉 그들은 미세한 입자(粒子)로 부서지며, 미세한 입자들 역시 나누어지는 성품(性品)으로, 각각을 살펴보면 본래의 성품을 분명하게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시이래(無始以來) 형색(形色:形體) 등은 역시 청정한 것이 아니며, 발현(發現)의 욕구가 꿈이라면 보이는 대상(所緣)의 형색(形色:形體)등은 빛과 같은 것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마음의 성품인 형색(形色:形體) 등을 밖에서 끊으려고 하는 것과 같으며,

결국 여기서 형색(形色:形體) 등은 마음의 형상(形像)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이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唯識)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이러한 법(法:現象)을 분석하여 일체가 마음뿐이라는 것을 알고서, 이들 각각을 분석하는 것이 모든 법의 본성을 각각 분석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의 본성을 각각 점검해야 합니다. 이상(以上)을 이와 같이 알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마음 역시 진제(眞諦:절대 진리)에 부합(符合:契合)하지 않습니다.

즉 거짓 본성인 형색(形色:形體) 등의 형상(形相)을 파악하는 갖가지 심성(心性)이 생겨나서 [인식하는] 것을 진제(眞諦)에서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형색(形色:形體)등이 거짓인 것처럼, 마음 역시 그 이외에는 없는 거짓 성품입니다. 그렇게 형색(形色:形體) 등은 갖가지 형상(形相)이나 일(一)과 다(多)가 본래의 성품이 아닌 것처럼, 마음 역시 그 이외에는 없음으로 일(一)과 다(多)가 본래의 성품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환영(幻影) 등의 본성(本性)과 같을 뿐입니다.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제법(諸法:現象)도 역시 환영(幻影) 등의 본성과 같을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지혜로 마음의 본성을 각각 분석하면

궁극적으로 마음은 내부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외부에서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으며 현재 생겨나는 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생겨날 때 역시 어디서 온 곳이 없고, 사라질 때 역시 어디로 간 곳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파악할 수도 없고 신뢰할 수도 없는 것인데, 형색(形色:形體)을 가지지 않는 것이 본래의 성품인 것은 무엇과 같은가라고 한다면,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가섭(迦葉)이여, 마음을 완전히 탐구하고 나면 발견할 수가 없다.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은 찾을 수가 없다. 찾을 수가 없는 것은 과거에도 없다. 미래에도 없으며 현재에도 생겨나지 않는다.”라고 널리 [법을] 펴셨습니다.

그렇게 분석하면 마음은 시작도 무결(無缺)하여 볼 수 없으며 끝도 무결(無缺)하여 볼 수 없고 중간도 역시 무결하여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에 끝과 중간이 없는 것처럼 제법(諸法:現象)도 역시 끝과 중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마음의 본래 성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무언가를 완전히 깨우친다는 것은 공(空)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마음이 만든 형상(形相)인 형색(形色:形體) 등의 본래 성품 역시 궁극적으로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지혜로도 제법(諸法:現象)의 본래 성품을 바르게 볼 수 없다면, 형색(形色:形體)이 항상(恒常)한지 무상(無常)한지 공(空)한지 공(空)하지 않은지 번뇌가 있는지(有漏) 번뇌가 없는지(無漏) 생겨나는지(生) 생겨나지 않는지(不生) 존재하는지(有) 존재하지 않는지(無)를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형색(形色:形體)에 대한 구별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수(受)·상(想))·행(行))·식(識)도 역시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차별들 역시 존재할 수가 없으니, 이에 구별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지혜로 사물을 분별하여 요가 수행자가 어떤 사물의 본래 성품이 궁극적으로 확실히 [있는 것이라고] 천착(穿鑿)하지 않을 때, 무분별삼매(無分別三昧) 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제법(諸法:現象)에는 본래 성품이 없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지혜로 사물의 본래 성품을 각각 분석하지 않고 수행을 하게 되면, 생각을 모두 끊기 위해서만 수행하는 분별심 역시 피할 수 없으며 본래의 성품이 없다는 것도 깨우칠 수 없는데, [이것은] 지혜의 빛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바르게 각각을 분석해야 앎의 불이 생기는 것은, 마치 부싯나무(燧木)를 문질러 일으킨 불처럼, 분석의 나무를 태우는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불설제개장보살소문경(佛說除蓋障菩薩所問經)』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잘못 길들여진 일체의 희론(戱論)을 여의고자 한다면 공성(空性)을 닦는 요가(瑜伽)를 해야 한다. 공성(空性)에 대한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마음을 흐트러뜨리거나 마음을 아주 기쁘게 하는 대상(處)과 그것들의 본래 성품을 완전히 탐구하여 공(空)을 깨우친다.

마음이 무엇인지 깨우치는 것도 역시 본래의 성품을 모두 탐구하여 공(空)한 것을 깨우치고, 그렇게 깨우쳐서 무상(無相) 요가(瑜伽)에 들어간다.”라고 널리 펴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분석을 먼저 하는 것이 무상(無相)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생각을 완전히 끊는다 해도 지혜로 사물의 본래 성품을 분석하지 않고는 무분별(無分別)한 상태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 형색(形色:形體) 등으로 [이루어진] 사물의 본래 성품을 바르고 정확하게 분석하고 나서, 선정(禪定)에 들어 갈 때는 형색(形色:形體) 등에 머무는 선정(禪定)에 들어가지 말 것이며, 기세간(器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사이에 머무는 선정(禪定)에도 들지 말아야 함은 형색(形色:形體) 등의 [실체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주선정(無住禪定: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는 선정)이라고 합니다.

지혜로 일체 사물의 본래 성품을 각각 분석한 다음, 무성선정(無性禪定: 대상이나 조건이 없는 선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지혜선정(智慧禪定)이라고 합니다. 즉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이나 『대보적경보만보살회(大寶積經寶鬘菩薩會)』 등에서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의 진리에 들어가면, 모든 것은 생각할 것과 관찰할 것이 다르지 않음으로 분별과 분석을 떠나는 것입니다. 말없이 한 곳에 집중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행하는 바(加行方便) 없이 진여(眞如)를 극명(克明)하게 수행하는 데 머무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상태에 머무르면서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산란(散亂)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탐착(貪着) 등으로 마음의 바깥 경계(境界:對象)가 산란해지면 산란한 감각(受)을 빨리 벗어나는 수행 등으로 산란심(散亂心)을 가라앉히고 빨리 본래 상태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마음에 싫증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면 삼매(三昧)의 공덕(功德)을 생각함으로서, 그에 대한 환희심(歡喜心)을 길러야 합니다. 산란함의 허물을 보고서 또한 싫증을 모두 가라앉혀야 합니다.

반면에 혼침(昏沈)과 수면(睡眠)에 굴복하여 흐름이 불분명해지고, 마음이 침몰(沈沒)하거나 침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환희심(歡喜心)의 대상을 생각하여 빨리 침몰을 극복해야 하고, 그런 다음 대상(所緣)의 본래 성품에 아주 견고(堅固)하게 집중해야 합니다.

반면에 이전에 웃고 즐기던 기억으로 인하여 도거(掉擧)나 방일(放逸)할 염려가 있을 때는,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상(無常) 등을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대상에 적용하여 산란심(散亂心)을 가라 앉혀야 하며, 그런 다음 다시 진여(眞如)를 향해 마음을 행하는 바(加行方便) 없이 들어가 머무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반면에 침몰(沈沒)과 방일(放逸)에서 멀어진 다음, 정(定)에 들어 진여(眞如)에 대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려면, 정진(精進)을 [조금 느슨하게 하여] 쉬고 [치우치지 않으며] 평등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마음이 정(定)에 들어가고 있는 중에 [너무] 애써 정진하면 마음은 산란해질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침몰하고 있는 중에 애써서 정진 하지 않으면 아주 침몰하여 관(觀)은 사라지고 마음은 선천적인 맹인(盲人)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침몰하면 애써서 정진해야 합니다.

[또 이미] 정(定)에 들면 [너무] 애써 정진하지 말아야 합니다.

관(觀)을 수행하는 중에 지혜를 아주 강화(强化)하면 지(止)가 약해져서 등불을 바람에 놓아 둔 것처럼 마음은 요동칠 것이며, 그로 인해 진여(眞如)를 극명(克明)하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럴 때는 지(止)를 수행해야 합니다.

지(止)가 너무 강해지면 마찬가지로 그때는 지혜를 수행해야 합니다.

[지(止)와 관(觀)] 두 가지가 모두를 평등하게 들어가고(雙修) 있으면, [이때는] 몸과 마음에 해로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행하는 바((加行方便) 없이 머물러야 합니다. 몸 등이 불편해지면, 그때는 일체 세간(世間)을 환영(幻影) 아지랑이(陽炎) 꿈(夢) 물에 비친 달(水月) 빛 그림자(光影)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이들 유정(有情) 중생은 이와 같이 심오한 법(法)을 이해하지 못하고 윤회하면서 모든 번뇌에 휩싸이고 있으니, 내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법성(法性:眞如)을 이해 할 수 있게 하리라.” 라고 생각하며, 대비심(大悲心)과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킵니다.

그런 다음, 잠시 쉬고(良久) 다시 그와 같이 제법(諸法:現象)의 무광삼매(無光三昧: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삼매)에 들어가야 합니다. 또 마음에 아주 싫증이 나면 그와 같이 잠시 쉬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관쌍수(止觀雙修)에 들어가는 길이며, 분별(分別)로 무분별(無分別)의 상(像:印象)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가 수행자는 이 [수행] 차제(次第:精進法)를 한 시간(一回精進) 또는 밤중에 반(半) 정진의 시간이나 한 정진의 시간 또는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진여(眞如) 수행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이 의분별선정(意分別禪定: 色受想行識을 幻으로 파악하는 선정)이며,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다음, 원한다면 삼매(三昧)에서 깨어나 가부좌(跏趺坐)를 풀지 말고, “이들 제법(諸法:現象)이 궁극적으로는 본래 성품이 없는 것이라 해도 세속적으로는 확실히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업(業)과 결과(果) 등이 어떻게 편재(遍在)할 수 있겠는가?

세존께서도, ‘사물이 생겨나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자성(自性)이 없다.’라고 설하셨다. [하지만] 이들 유정(有情) 중생이 어설픈 지식으로 본래 성품이 없는 사물들을 존재한다고 과장(誇張:增益)하여 전도된 생각에 [사로잡혀] 긴 세월을 윤회의 수레 위에서 떠돌고 있으니, 내 어떻게 해서든지 위없는(無上) 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모두 구족(具足)할 것이며 일체지(一切智)의 경지를 이루어서 이 모든 법성(法性:眞如)을 깨우치고 말리라.”라고 생각한 다음,

천천히 가부좌를 풀고 시방(十方)에 머무시는 불보살님께 배례(拜禮)하고 나서, 그들에게 헌공(獻供) 찬탄(讚嘆)한 다음, 『보현보살행원찬(普賢菩薩行願讚)』 등의 서원(誓願:祈禱)을 널리 세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 공성(空性)과 대비심(大悲心)의 정수(精髓:心要)를 지니고 보시(布施) 등의 일체 공덕과 지혜 자량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선정(禪定)은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을 모두 성취한 것입니다.

즉 『대보적경보만보살회(大寶積經寶鬘菩薩會)』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애(慈愛)의 무기를 갖추고 대비심(大悲心)의 경지에 머무르며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을 모두 성취하기 위한 선정(禪定)을 행하라. 여기서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이라는 것은 보시(布施)와 멀어지지 않고 지계(持戒)와 멀어지지 않으며, 인욕(忍辱)과 멀어지지 않고 정진(精進)과 멀어지지 않으며, 선정(禪定)과 멀어지지 않고 지혜(智慧)와 멀어지지 않으며, 방편(方便)과 멀어지지 않는 것이니라.”라는 것 등을 널리 설하신 바와 같습니다.

보살은 모든 유정 중생을 모두 성숙시켜야 하며, 장소와 몸 그리고 많은 권속(眷屬) 등을 원만(圓滿)하게 하는 보시(布施) 방편(方便) 등의 선법(善法)에 확실히 의지하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국토(佛國土) 등의 원만(圓滿)함은 무엇을 말하며, 어떤 결과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지혜는 보시(布施) 등의 방편을 완전히 구족(具足)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세존께서도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는 방편의 구경(究竟)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보살은 보시(布施) 등의 방편에도 역시 의지해야 합니다. 공성(空性)만으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집제법방광경(集諸法方廣經)』에서도 설하신 것처럼, “미륵이여, 보살들이 육바라밀(六婆羅密)을 완전히 성취하는 것은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위한 것인데, 이에 어리석은 이들이 말하기를, ‘보살은 지혜바라밀만을 익혀야 한다. 나머지 바라밀을 해서 무엇 하는가?’라고 말하며, 그들은 다른 바라밀 역시 비판적으로 생각한다. 미륵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륵보살이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륵이여, 보살행(菩薩行)을 할 때 육바라밀(六婆羅密)을 가지고 선근복덕(善根福德)을 쌓은 그 선근복덕들은 해로운 것인가?’ 미륵보살이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륵이여, 그대 역시 육십 겁(劫) 동안 보시(布施) 바라밀을 바르게 수행해 왔다.


육십 겁(劫) 동안 지계(持戒)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인욕(忍辱)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정진(精進)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선정(禪定)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지혜(智慧) 바라밀을 수행해 왔다.’ 이에 어리석은 이들이 말하기를, ‘한 가지 방법만으로 깨달을 수 있으며, 그것은 공성(空性) 수행이다.’라고 한다면, 그들이 행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라는 등의 [법]을 [널리] 펴셨습니다.


방편(方便)과는 먼 보살의 지혜라는 것은 성문(聲聞)과 같아서 부처의 행상(行相:수행 행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방편으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즉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가섭이여, 이와 같으니 예를 들면 신하(臣下)가 뒷받침하는 왕들이 모든 목적을 이룰 수 있듯이, 보살의 지혜는 선교방편(善巧方便)에 의한 모든 도움으로 역시 부처의 모든 행상(行相)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보살도(菩薩道)의 지견(智見: 진리에 대한 견해)과는 다른 외도(外道)와 성문도(聲聞道)의 지견(智見)은 ‘아(我: 개별적 본체)’ 등에 대한 전도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언제나 지혜와는 먼 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해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성문(聲聞)들은 대비심(大悲心)과는 멀기 때문에 방편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의 열반에 들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보살도(菩薩道)는 지혜와 방편을 [모두] 갖추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주열반(無住涅槃)에 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시 한 번] 보살도(菩薩道)는 지혜와 방편을 [모두] 갖추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무주열반(無住涅槃)을 성취함으로서,

지혜의 힘으로 윤회에 떨어지지 않고 방편의 힘으로 열반에도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설상두정사경(佛說象頭精舍經)』에서, “보살도(菩薩道)를 요약하면 이 두 가지인 데, 둘이라는 것은 이와 같아서 방편과 지혜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佛說最上根本大樂金剛不空三昧大敎王經)』에서도, “지혜바라밀은 어머니이며, 선교방편(善巧方便)은 아버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에서도, “보살들에게 속박이란 무엇이며 해탈이란 무엇인가 하면, 방편이 없이 윤회 중생을 [애써] 모두 떠받치는 것이 보살의 속박이며, 방편으로 윤회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다. 지혜가 없이 윤회 중생을 [애써] 모두 떠받치는 것이 보살의 속박이며, 지혜로 윤회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다.

방편이 갖추어지지 않은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이 갖추어진 지혜는 해탈이다. 지혜가 갖추어지지 않은 방편이 속박이며, 지혜가 갖추어진 방편이 해탈이다.”라고 널리 펴셨습니다.

보살이 지혜만을 의지하면 성문(聲聞)이 갈구하는 열반에 떨어져 속박당하는 것과 같아서, 무주열반(無住涅槃)에 드는 성취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방편과는 먼 지혜를 보살의 속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추운] 바람에 얼어가는 사람이 불에 의지하는 것처럼 보살은 전도된 바람을 막고서, 방편을 가진 지혜인 공성(空性)에 의지해야 합니다.

성문(聲聞)과 같은 방식으로 깨달으려 하지 말고, 『대보적경대승십법회제구(大寶積經大乘十法會第九)』에서 설하신 것처럼, “선남자(善男子)는 이와 같아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불을 철저히 받들면서 그 불을 지극히 숭배하고 스승처럼 여긴다 하더라도, ‘나는 불을 숭배하고 스승처럼 여기며 받들고 있으니 여기 두 손에다 모두 담아야 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자신의 몸이 고통스럽거나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살 역시 열반을 알고 있지만 지니고 있는 열반을 드러내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렇게 자신의 깨달음을 바꾸어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방편에만 단순히 의지한다면 보살은 범부(凡夫)의 경지를 뛰어 넘지 못하고 단지 속박만 당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가진 방편에 의지해야 하는 데, 이것은 진언(眞言, Mantra)으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한 독(毒)처럼, 보살은 번뇌도 역시, 지혜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할 수 있는 힘을 길러서, 감로(甘露)로 변화시킵니다. 자연스럽게 상승적인 과보를 받는 방법이 보시(布施) 등에 의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말씀하시기를, “가섭이여, 이와 같아서 예를 들면 진언(眞言)과 약(藥)으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한 독(毒)으로는 [어떤 것도] 죽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보살들의 번뇌는 지혜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한 것이기 때문에 전락(轉落)할 수가 없다.”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방편의 힘으로 윤회를 포기하지 않으며, 열반에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지혜의 힘으로 모든 대상(所緣)을 끊고서 윤회에 떨어지지 않으며, 그래서 오직 무주열반(無住涅槃)만의 불성(佛性)을 성취합니다.


따라서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에서도, “지혜를 알고서 모든 번뇌를 완전히 제거한다. 방편을 알고서 모든 유정을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유정 중생의 이익에 별 관심이 없으며 마음의 작용(行)이 화합(和合)하여 이루어진 모든 것에 대한 별 관심이 없는 것을 무상청정원만각(無上淸淨圓滿覺)이라고 나는 가르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성(佛性)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지혜와 방편 두 가지 모두에 의지해야 합니다.


이에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를 수행할 때나 깊은 정(定)에 들어 갈 때는 보시(布施) 등의 방편에 의지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전(前)과 후(後)에 생기는 지혜가 무엇이든, [그것이] 생기면 그때는 [언제든지] 방편에 의지할 수 있으니, 그렇게 지혜와 방편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적용해야 합니다.


더불어, 보살들이 지혜와 방편을 병행(竝行:雙修)하는 길이 이 길입니다. 모든 유정 중생을 보살피는 대비심(大悲心)으로 [스스로] 완전히 성숙(攝受)해서 출세간(出世間)의 길에 의지해야 하고, 일으킨 방편을 행할 때도 환술사(幻術師)처럼 전도되지만 말고 보시(布施) 등에 의지해야 합니다.

『대방등대집경제십이무진의보살품(大方等大集經第十二無盡意菩薩品)』에서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보살의 방편은 무엇이며 지혜를 성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한다면;

정(定, Samāhita: 人無我와 法無我의 空性을 보기 위한 선정)에 들어 유정 중생을 보살피면서 대비심(大悲心)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가까이 하는 것이 방편이며, 적정(寂靜)과 최고의 적정(寂靜)으로 정려(精慮, Samāpatti: 평등한 경지의 선정)에 드는 것이 지혜이다.”라고 널리 설하신 바와 같습니다.

『항마장(降魔章)』에서도 말씀하시기를, “더불어 보살들의 가행(加行: 적극적 수행)을 바르게 공경하는 것은, 지혜를 알기에 모든 선법(善法)을 쌓기 위해 가행(加行)하고, 지혜를 알기에 내가 없음(無我)과 유정이 없음과 생명이 없음과 생명의 유지가 없음과 사람이 없음(人無我)에 대해서도 가행(加行)하며, 방편을 알기에 모든 유정을 완전히 성숙시키기 위해 역시 가행(加行)하는 것이다.”라고 널리 펴셨습니다. 『집제법방광경(集諸法方廣經)』에서도,


“예를 들어 어떤 환술사(幻術師)가

[자신이 만든] 환(幻)에서 벗어나려고 애쓸 때,

그는 이미 환(幻)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환(幻) [자체에] 집착하지 않듯이,


삼계(三界)가 환(幻)과 같은 줄

구경보리(究竟菩提) 성인(聖人)은 아시나니,

중생을 위해 무장(武裝)하신 [뜻은]

중생을 그전부터 알기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살들이 오직 지혜와 방편의 법(法)을 성취한 힘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들의 가행(加行)이 윤회 속에 머물면서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공성(空性)과 대비심(大悲心)의 정수(精髓:心要)를 가지고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원만하게 회향(回向)하는 보시(布施) 등의 방편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승의(勝義:絶對)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 앞에서와 같이 일정한 시간에 따라서 지(止)와 관(觀)의 가행(加行)을 가능한 만큼 수행해야 합니다.

『성소행경계원만청정경(聖所行境界圓滿淸淨經)』에서 언제나 유정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보살들의 공덕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처럼, 가까이 두고 생각하면서 언제나 방편에 능숙해지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비(慈悲)와 방편(方便)과 보리심(菩提心)에 익숙해지면, 이 생에서 의심할 것 없이 특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꿈 속에서 언제나 불보살님을 친견(親見)할 수 있습니다. 다른 좋은 꿈들 역시 꿀 수 있습니다. 천신(天神)들도 기뻐서 보호할 것이며, 매 순간 마다 공덕과 지혜의 자량은 늘어만 갈 것입니다. 번뇌장(煩惱障)과 나쁜 과보 역시 정화할 수 있으며, 언제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의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풍길 수 있으며, 몸도 역시 질병으로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업(業)에서 자유로워지는 수승함 역시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통(神通) 등의 특별한 공덕(功德:屬性)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신통력(神通力)으로 세간(世間)의 무량(無量)한 세계에 가서 불세존께 헌공(獻供)하고 당신들의 법(法)을 듣습니다. 임종시(臨終時)에도 의심할 바 없이 불보살님들을 친견(親見)할 수 있습니다. 다른 생에서도 불보살님과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특별히 성스러운 가문(家門)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원만하게 구족(具足)할 수 있습니다.

큰 부(富)와 수많은 권속(眷屬)을 거느리며, 예리한 지혜로 수많은 사람을 모두 성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에서 [모든] 생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량없는 공덕을 다른 경전들에서도 보여주고 있음으로 [바르게] 터득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비(慈悲)와 방편(方便)과 보리심(菩提心)을 항상 공경하고 오랫동안 수행하면 점차로 마음의 흐름(心相續)이 완전히 모두 청정해지는 순간이 나타나 완전한 성숙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부싯나무(燧木)를 문질러 불을 만드는 것처럼, 바른 이익을 위해 수행하면 최고의 구경(究竟)에 이를 수 있고,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로 일체의 분별(分別)의 그물에서 멀어져 법(法)의 틀을 희론(戱論)함이 없이 분명하게 알며, 티 없이(無垢) 흔들리지 않는 등불을 바람이 없는 곳(無風地帶)에 놓아 둔 것처럼, 흔들림 없이 알게 됩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본래 자성(自性)이 현전(現前)하는 견도(見道)를 포함한 승의(勝義:絶對) 보리심의 본래 성품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하여 사물의 끝자리를 보는 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여래의 종성(種姓:家門)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보살의 무결(無缺)함에 들어가는 것이며, 세간의 일체 중생에서 바뀌는 것입니다. 보살의 법성(法性)과 법(法)의 틀을 알고서 안주(安住)하는 것이며, 보살의 초지(初地)를 성취한 것으로 이에 대한 공덕은 더 자세하게 『십지경(十地經)』 등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여(眞如)를 바라보는 선정(禪定)이며,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 가르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보살이 희론(戱論)없는 무분별(無分別)의 성품에 들어간 것으로, 신해행(信解行)의 경지를 신해(信解)의 힘으로 들어갔음을 의미(安立)하는 것이지, 실제 행(行)은 아닙니다. [여기에] 지혜가 생겨나야만 실제 행(行)에 들어가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초지(初地)에 들어간 다음, 수도(修道)에서 출세간(出世間)에서 얻은 두 가지 지혜(根本智와 後得智 또는 止觀)로 지혜와 방편을 수행하고, 점차로 수행하여 끊어야 하는 장애(障碍)가 미세하게 축적된 것 역시 미세하게 정화하며, 특별한 공덕(功德:屬性)을 더 깊이 성취하기 위해 하급(下級)의 수준들도 완전히 정화하여, 여래지(如來地)의 중심에 들어가 일체지(一切智)의 바다로 들어가게 되면, 목적한 바를 완전히 이루고 목표 역시 [완전히]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완전히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점차로, 보다 질 좋은 땅의 황금처럼, 마음을 확실히 정화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어 구경원만(究竟圓滿)한 완전청정(成佛)을 이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체지(一切智)의 바다에 들어가면 여의주(如意珠)와 같이 일체 유정 중생의 생존을 떠받치는 공덕(功德:屬性)을 쌓고 지니며 이전(以前)에 [세운] 원력(願力:祈禱)의 과보를 받아 이룰 수 있습니다. 즉 대비심(大悲心)의 본성(本性)으로 돌아가, 본래 갖추고 있던 갖가지 방편을 가지고 한량없는 화현(化現)으로 일체 중생을 모두 원만하게 합니다. 습기(習氣)로 인한 잘못된 일체의 허물을 제거하고, 무한한 유정 세계에 머무시는 것을 알기에 불세존의 일체 공덕(功德:屬性)이 생긴 자리(根源)에 대한 신심(信心)을 일으키며, 그 공덕(功德:屬性)을 완전히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비밀주(秘密主)의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라는 것은 자비(慈悲)를 근본으로 하여 생긴 것이고, 보리심(菩提心)이라는 원인(因)에서 생긴 것이며, 방편(方便)으로 구경원만(究竟圓滿)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자(賢者)는 질시(嫉視) 등의 허물을 멀리 하고

공덕(功德)에는 만족이 없어, 대양(大洋)과 같으니,

분별(分別)하고 잘 해석하여 파악함이

환희(歡喜)의 백조가 물에서 우유를 취하는 것 같네.


그러므로 지자(智者)들은

편견(偏見)의 혼란을 여의고,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잘 해설하나니

모두가 취(取)해야 할 것 뿐이로다.


이와 같이 중도(中道)를 설하노니,

내가 지은 공덕이 무엇이든

그렇게 일체 중생이

중도(中道)를 성취케 하소서.


『수행차제(修行次第)』를 아짜리야(Ācārya, 傳敎師) 까말라실라(Kamalaśīla, 蓮花戒)께서 중편(中篇)을 지어 마치셨다. 인도 학자 쁘라갸와르마(Prajñavarma, 慧鎧)와 역경사(譯經師) 승려(僧侶) 예쉐 데(Ye shes sde)가 번역하고 편집 교정하였다.


이 까말라실라(Kamalaśīla, 蓮花戒)의 『수행차제(修行次第)』의 중편(中篇)은 2002년 1월 인도의 보드가야(Bodhgaya)에서 있었던 깔라짜끄라(Kālacakra: 時輪) 관정(灌頂) 입문식에서 현 제14대 달라이 라마께서 깔라짜끄라 관정을 위한 예비법문을 위해 사용한 교재로서, 북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세릭 빠르캉(Sherig Parkhang)에서 출판한 교정본(校訂本)을 서기(西紀) 2004년 정초(正初)에 한국말로 번역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