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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6. 수행차제.삼종요도

1.곰림 바르빠 : 수행차제(修行次第) 중편(中篇)


곰림 바르빠 : 수행차제(修行次第) 중편(中篇) 


까말라실라(蓮花戒)의 수행차제(修行次第) 중편(中篇)



달라이 라마 주석(註釋),

곰림 바르빠 <수행차제(修行次第) 중편(中篇)>


편역(編譯)

明中 최 로 덴


일러두기


티벳어 원문의 저자인 8세기 인도의 대학자 아짜리야(acarya, 傳敎師) 까말라실라(Kamalasila, 蓮花戒)는 위대한 스승 샨따락시따(santaraksita, 寂護)의 제자입니다. 이들은 티벳어를 사용하여 티벳인의 시각으로 불법(佛法)을 전파하고, 경론을 저술한 최초의 인도 학자이자 위대한 수행자들입니다. 그 중에서 까말라실라의 이 수행차제(修行次第)』는 티벳 불교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수행지침서 중에 하나로, 본래 상편, 중편, 하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번역한 『중편』은 현 제14대 달라이 라마이신 뗀진 갸초 성하(聖下)께서 불교의 본격적인 입문 수행자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특히 중요한 원전(原典) 중에 하나입니다.


번역에 사용한 티벳어 원문은 2002년 1월 인도의 보드가야(Bodhgaya)에서 현 제 14 대 달라이 라마께서 전수하신 깔라짜끄라(Kalacakra:時輪) 입문 관정(灌頂)식의 예비법문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교정본(校訂本)입니다. 이 교정본은 북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세릭 빠르캉(Sherig Parkhang)에서 출판한 것입니다. 또, 본문에서 달라이 라마께서 직접 해설하신 주석(註釋)의 내용은 현 달라이 라마의 영어 수석 통역사이자 개인 비서인 비구(比丘) 롭상 최펠 강첸빠(Losang Choephel Gangchenpa) 스님이 1989년 북인도 마날리(Manali)에서 채록(採錄)한 법문 내용을 사용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티벳어의 영문 철자표기는 일명 <와일리 시스템(Wylie system)>(A Standard System of Tibetan Transcription,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 22. 1959, pp. 261-267)을 사용 하였습니다. 몇몇 인명과 지명은 발음 나는 대로 표기한 것도 있습니다. 본문에 있는 주는 모두 역주입니다. 본문과 역주에서 사용하고 있는 부호인 S는 싼스끄리끄어, T는 티벳어 표기의 약자입니다.


본문에서 티벳어 원전을 번역할 때 사용한 용어들은 불교의 전문적인 수행용어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처음 접하는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운 용어들이 많이 보일수 밖에 없습니다. 경안(輕安), 산란(散亂), 침몰(沈沒), 도거(掉擧) 등의 용어가 다소 생소하고 어려운건 사실이지만, 이 용어들은 모두 기존의 스승들이 수행 중에 직접 체험하고 활용하여 그 의미가 다져진 것들로 용어 자체가 수행의 경지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쉬운 글로 풀어쓰면 그 의미가 줄어들거나 퇴색할 우려가 있습니다. 용어의 의미 하나하나를 공부하고 수행하여 천착(穿鑿)해 들어갈 때 용어의 깊은 의미와 성취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머리말


까말라실라의 『곰림 바르빠(수행차제 중편)』(이하, 수행차제)는 불교 수행의 방법과 과정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전문적인 논서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제 1부에 실려 있는 티벳어 원문 번역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은데, 이는 본문의 내용 하나하나가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 2 부에 실려 있는 달라이 라마의 주석은 원문의 내용을 증명하기 위한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의 주석(註釋) 부분 역시 원문을 한 구절씩 풀어쓴 저술이 아니라, 법문의 형식을 빌려 구전으로 전수한 것이어서 내용이 아주 개괄적이기 때문에 내용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고 조금씩 끊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머리말을 활용하여 전반적인 내용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실제 원문에는 내용에 대한 항목의 구분이 따로 되어 있지 않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을, 발단(發端)과 개론(槪論) 부분을 포함하여, 모두 열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티벳 불교의 경론들은 대부분 경전의 첫머리에 목차(혹은 科目, T: dKar chag)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른 고유한 경전의 기술(記述)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내용에 들어가면 내용에 대한 형식적인 구분 없이, “첫 번째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다시 그 몇 가지의 첫 번째 내용은 이러 이러한 것들이 있다.”라는 식으로 단락을 나누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본 『수행차제』에는 이러한 구분마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형식적이나마 내용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달라이 라마께서 세계의 여러 나라를 다니시며 행하신 기존의 설법에 이미 어느 정도 내용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본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구분은 이를 근거로 해서 나눈 것입니다.


다음은 본문의 내용에 대한 간단한 해제입니다. 먼저 발단(發端) 부분부터 살펴보면, 이 발단 부분에는 티벳 불교의 경전들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경전의 원문 제목(原文, 특히 산스끄리끄어)이 들어있습니다. 또, 이 발단 부분에는 책을 짓게 된 동기와 서원, 예경 등을 담고 있는 귀경게(歸敬偈)와 편찬발서(編纂發誓)가 있는데, 이것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실마리에 해당합니다.

즉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내용과 성격을 규정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본문에서 “대승을 공부하는 마지막 목적은 부처의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는 것이며,”

따라서 “깨달음을 이루는 적절한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탐구해 나가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논서의 핵심주제는 보리심(菩提心)과 공성(空性)에 대한 바른 견해입니다.”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논서의 내용을 풀어 나가는 실마리(發端)입니다.


개론(槪論) 부분은 실제 원문에는 없는 내용으로, 달라이 라마께서 원문의 내용을 풀어가기 위해 불교와 수행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여기서 달라이 라마는 본 『수행차제』의 법맥과 전승의 뒷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 이 책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 수행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이나 아직 수행의 과정과 형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논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핵심적인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추면 다른 경전들도 큰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논서는 불교의 모든 다른 경전들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이어지는 제 1 장에서 10 장까지는 실제 본문에 해당합니다. 먼저 제 1 장에서는 인과(因果)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부처의 경지인 일체지(一切智)를 논리적 증명 방식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계는,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가 원인과 조건에 의지해서 존재합니다.

따라서 부처의 완전한 깨달음인 일체지도 역시 그에 따른 원인과 조건의 결과로 얻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원인과 조건에 의지해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 현상계의 실체(空性)를 바로 알고, 그에 따른 깨달음의 원인과 조건을 심기위해 노력해야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1 장은 현상계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에 대한 불교 철학의 대명제(大命題)에 대한 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달라이 라마는 불교의 이러한 논리적 증명 방식이 가지는 장점에 대해서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 2 장에서는 마음 수행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제 1 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깨달음도 역시 원인과 조건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에 합당한 원인과 조건을 충분히 갖추어야 실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원문에서는 일체지를 얻기 위한 원인과 조건을 부처님의 말씀을 빌려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비밀주(秘密主)의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라는 것은 자비(慈悲)를 근본으로 하여 생긴 것이고,

보리심(菩提心)이라는 원인(因)에서 생긴 것이며, 방편(方便)으로 구경원만(究竟圓滿)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지를 성취하기를 원한다면 자비와 보리심 그리고 방편, 이 세 가지 모두를 공부해야 합니다.

마음은 모든 번뇌 망상의 바탕이기도 하지만,

잘 다스리면 깨달음의 본래 상태를 들어낼 매개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이 장에서 마음의 수행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원인과 조건을 갖추는 실제 매개체가 바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제 3 장에서는 불교 수행의 근본 바탕에 해당하는 자비(慈悲)를 다루고 있습니다.

원문에서, “일체지의 근본은 오직 자비뿐이며 가장 먼저 [이에] 익숙해져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비는 보편적 사랑의 원리이며,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강력한 동기입니다.

자(慈: 사랑)와 비(悲: 연민)가 없는 수행은 자칫 공허한 신비(神秘) 놀이에 불과 한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원문과 달라이 라마의 주석에서도, 이미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이 무주열반(無住涅槃; 윤회도 열반도 버리고 오직 중생들을 위해 일하는 상태)하시는 이유를 바로 이 자비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4 장에서는 자비의 근본인 평등심(平等心)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자비심을 기르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을 향한 평등한 마음에서 사랑(慈愛)이 싹트고, 이 사랑에서 중생들을 도우려는 연민(慈悲)이 생깁니다. 평등심과 자비심은 중생들을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인 보리심(菩提心)의 기본 바탕에 해당합니다.


제 5 장에서는 그 실상을 알고 나면, 자비심이 저절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윤회 중생의 고(苦)에 대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지옥, 아귀, 축생계의 중생들뿐만 아니라, 인간과 천상계의 삶까지도 모두 안타까운 윤회의 고통 속에 있음을 하나씩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윤회 중생들을 돕기 위한 보리심을 일으켜야 하고, 그에 따른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바른 수행을 위해서는, 샨띠데바(Shantideva, 寂天)의 저서인『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허공계(虛空界)와 중생계(衆生界)가 다 할 때까지 모든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내 여기에 머물게 하소서.와 같은 강력한 동기를 가져야 하며,

바른 깨달음을 위한 두 축(軸)인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yana)의 수행을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와 관은 본『수행차제』에서 특히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깨달음의 실질적인 수행 방법들입니다.


제 6 장에는 불교 공부의 기본적인 방법과 그에 따르는 지혜(智慧)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습니다. 즉 계정혜(戒定慧: 계율, 선정, 지혜) 삼학(三學)을 바르게 문사수(聞思修)하는 것이 불교 공부이며, 이러한 지혜를 갖추어야 실제 수행에서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바르게 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 7 장에서는 지(止)와 관(觀)에 들어가는 실질적인 수행 방법을 담겨져 있습니다. 즉 수행의 장소나 자세 그리고 호흡하는 방법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 8 장은 지(止, Samatha)의 수행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침몰(沈沒: 무겁게 가라 앉음)이나 도거(掉擧: 들뜸) 등 지(止)의 수행에서 나타날 수 있는 허물과 그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 9 장에서는 수행의 대상을 바르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그 허상에 현혹되지 않는 수행 방법인 관(觀,Vipasyana)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나(我)와 현상계의 실체인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를 바로 아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여(眞如)는 지(止)를 갖춘 상태에서 관찰과 분석(觀)을 완전히 마쳐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본문에서,

“여기서 저자는 침몰(沈沒)과 도거(掉擧)에서 벗어나, 진여(眞如)를 극명(克明)하게 볼 수 있는 삼매에 드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석적인 지혜로 진여를 바르게 이해하고 나서도 마음을 진여에 계속 둘 수 있다면, 그 상태를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유지해야 합니다.

 

침몰하거나 산란하지 않고 계속 수행을 할 수 있다면, 대응법을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진여(眞如)에 대한 관(觀)을 성취할 때까지 분석과 집중을 균형 있게 병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석적인 수행을 통하여 무아(無我)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얻어야 합니다. 더불어 집중력 있는 선정의 힘이 함께 해야 합니다.

지나친 분석은 집중을 방해합니다. 또, 지나게 집중하면 분석적인 지혜를 잃고 맙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유형의 수행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점점 지(止)와 관(觀)의 수행적 합일(合一)을 이룰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 10 장은 마지막 회향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앞에서 설명한 모든 수행의 방법을 갈무리하고 완성하기 위한 지관쌍수(止觀雙修) 즉, 지혜와 방편의 합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지와 관을 동시에 이루고 나면 나타나는 각각의 경지를 설명함으로써, 깨달음을 위한 수행에 있어서 지관쌍수(止觀雙修: 지혜와 방편의 합일)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행의 공덕과 책을 지은 목적, 그에 대한 회향을 담고 있습니다.


본 『수행차제』에 대한 번역 작업은 단순히 읽고 가슴 속에 묻어둘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 보다는 오히려, 내용 한 구절 한 구절을 같이 공부하고 수행할 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좋은 스승을 찾아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가르침을 전수받고, 스승의 지도 하에 하나씩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바른 활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책을 모두 마무리할 때까지 애정과 인내로 지켜봐주신 법계의 스승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책에 조그만 공덕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모두 법계의 가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내용 중에서 발견되는 모든 잘못은 모두 역자의 잘못입니다.


자유의 길을 향해 걷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법계의 가피가 함께하기를 기원하며.......



문수동자(文殊童子) [보살님]께 배례(拜禮) 올립니다.


[여기에] 대승 경전의 체계를 따라 입문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수행차제(修行次第)를 간추려서 설명하겠습니다. 이에

일체지(一切智)를 속히 성취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원인(因)과 조건(緣)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일체지(一切智)는 원인(因) 없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며, [만일 원인 없이 일체지가 생길 수 있다면] 모든 것은 항상 일체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생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도 속박(束縛)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 어떤 것도 일체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 부분적으로 생기는 모든 사물(事物)은 원인에 의존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체지도 역시 때에 따라 부분적으로 [생기는] 것이며, 언제든지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곳에서나 그런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렇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원인(因)과 조건(緣)에 의존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원인(因)과 조건(緣)들 중에서도 바르고 완전한 것들에 의존해야 합니다. 잘못된 원인에 열중하면 아주 긴 시간이 흘러도 바라던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뿔(角)에서 우유를 짜는 것과 같습니다. 원인(因)을 모두 다 갖추지 않으면 결과는 생기지 않습니다. 씨앗(種字) 등에 무언가 하나라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싹 등의 결과는 생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과를 바란다면 바르고 완전한 원인과 조건들에 의존해야 합니다.


‘일체지(一切智)의 결과를 얻기 위한 원인(因)과 조건(緣)들은 무엇입니까?’라고 한다면, 대답하건대, 저 같은 [사람은] 맹인(盲人)과 같아서 그것들을 가르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세존(世尊)께서 실제 부처를 이루신(現證菩提) 후에 제자들에게 설하신 바와 같이 제가 세존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비밀주(秘密主)의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라는 것은 자비(慈悲)를 근본으로 하여 생긴 것이고, 보리심(菩提心)이라는 원인(因)에서 생긴 것이며, 방편(方便)으로 구경원만(究竟圓滿)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지를 성취하기를 원한다면 자비와 보리심 그리고 방편, 이 세 가지 모두를 공부해야 합니다.


자비심(慈悲心)이 발동(發動)한 보살들은 모든 유정(有情)을 해탈(解脫)케 하려는 분명한 서원(誓願)을 세웁니다.


그런 다음, 자신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버림으로서, 너무나 행하기 어렵지만, 흐름을 끊지 않고 긴 세월을 쌓아야 하는 공덕(功德)과 지혜(智慧)의 자량(資糧)에 집중해 들어갑니다.


그렇게 해야 확실한 공덕(功德)과 지혜(智慧)의 자량(資糧)을 원만하게 구족(具足)할 수 있습니다. 자량(資糧)을 원만하게 구족(具足)하면 일체지(一切智)는 손 안에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일체지의 근본은 오직 자비(慈悲)뿐이며 가장 먼저 [이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불설법집경(佛說法集經)』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세존이시여, 보살은 너무 많은 법(法)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한 가지 법이라도 제대로 지니고 바르게 깨우친다면 부처의 모든 법은 그의 손 안에 있게 됩니다. 한 가지 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즉 대비심(大悲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비심(大悲心)을 모두 섭수(攝受)하신 불세존(佛世尊)들은 자리(自利)를 원만하게 모두 이루셨어도 끝내 유정(有情) 세계 안에 머무시며, 성문(聲聞)처럼 열반(涅槃)의 최고 적정처(寂靜處)에도 들지 않습니다. 유정을 살펴보시고 열반의 적정처를 불타는 철옥(鐵獄)으로 여겨 멀리 하시는 세존들께서 [그렇게] 무주열반(無住涅槃)하시는 원인(因)은 바로 대비심입니다.


이제 자비(慈悲)를 수행하는 단계에 처음 들어가 [어떻게] 시작하는 가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먼저 평등심(平等心)을 길러서, 모든 유정(有情)을 향한 집착(貪)과 분노(瞋恚)를 버릴 수 있는 마음(捨)의 심성(心性)을 계발(啓發)해야 합니다.


모든 유정(有情)은 안락(安樂)을 바라며 고통을 원치 않는다는 것과

무시이래(無始以來) 윤회해 온 유정이 수백 번을 나의 친인척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모두 헤아려 보면,

여기에 차별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어떤 것에는 아주 집착하고 어떤 것에는 아주 분노하였었던가,

그러므로 나는 모든 유정에게 마음을 평등하게 대하리라.’라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행동할 수 있도록 중립적인 상태에서 시작하며,

친구와 적에게도 역시 평등심(平等心)을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유정(有情)에 대한 평등심(平等心)을 갖추고 나서 자애(慈愛)를 기릅니다.

자애의 물로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적시어 비옥한 대지(大地)처럼 [만들고 거기에] 자비(慈悲)의 씨앗을 심으면 아주 빠르게 흠 없이 잘 자랄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자애롭게 하고 자비를 길러야 합니다.


자비(慈悲)라는 것은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헤어나기를 바라는 성품(性品)입니다. 삼계(三界)의 모든 유정(有情)은 삼고(三苦: 苦苦, 變苦, 行苦)로 인해 갖가지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니, 모든 유정을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즉 “이와 같이 잠시 동안 유정(有情)은 지옥 중생들이 되어 [그 고통들을 경험하며], 그들의 흐름(相續)을 끊지 못하고 긴 세월 동안 염열지옥(炎熱地獄) 등 갖가지 고통의 강물로 빠져들기만 하느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와 같이 아귀(餓鬼)들도 너무나 참기 힘든 배고픔과 갈증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며, 그] 고통의 불로 타버린 몸은 혹독한 고통의 경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으며, 축생(畜生)들 역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위협하며 흉포(凶暴)하게 해치는 등 수 많은 고통의 성품만 드러냅니다. 사람들도 역시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여 서로 성내고 해치며 좋은 것과 헤어지고, 싫은 것과 만나며 가난해지는 등의 고통을 끊임없이 경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몇몇은 탐착(貪着) 등의 번뇌로 모든 것에 얽매여 마음을 속박하고, [또] 몇몇은 갖가지 전도된 견해로 분란을 일으키는데, 이 모든 것 역시 고통의 원인입니다.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이 [항상 함께]합니다.


천상계(天上界)의 [신]들 역시 모든 것이 변하는 고통(變苦)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또] 욕계천(欲界天)은 어떠합니까? 그들도 [역시] 언제나 죽음이라는 변화와 하락(下落:墮落) 등의 두려운 슬픔이 마음을 짓누르는데,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행하는 고통(行苦)의 특징은 업(業)과 번뇌의 성상(性相: 본성과 형상)으로 인한 의타기성(依他起性: 다른 것에 의지하여 생김)이며, 매 순간 흩어지는 성상(性相)으로 모든 중생에게 편재(遍在)합니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이 고통의 불꽃 안에 갇힌 것을 보고 내가 고통을 원치 않는 것처럼 다른 모든 이들 역시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즉 “아, 가엾다. 내 사랑하는 유정들의 이 모든 고통, 이들을 고통에서 어찌 벗어나게 할 수 있으랴.”라고 [모든 유정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겨 [모든 중생들이]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자비삼매(慈悲三昧)에 들거나, 어떠한 행위를 할 때도 언제나 모든 유정들을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먼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친인척들이 갖가지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보면서 수행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유정의 평등성에 차별이 없음을 보고서,

모든 유정이 나의 친척이었다고 전부 헤아려 [편견 없이] 중립적인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친인척과 같은 자비심이 평등하게 머물면,

그것이 시방(十方)의 모든 중생을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애지중지하던 막내아들의 고통에 괴로워하던 어머니처럼,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 그와 같은 자비심이 모든 유정에게 평등하게 머무를 때, 그것을 원만(圓滿)이라고 하며 대비심(大悲心)이라는 이름 역시 얻게 됩니다.


자애(慈愛)를 기르는 것은 친인척부터 먼저 해야 하며, [그들이] 평안(平安)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와 같은 마음이] 점차 일반인과 적들에게 향하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비심을 익히고 나면, 점차 일체 유정을 구경(究竟)으로 이끌고자 하는 스스로의 힘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렇게 근본적인 자비심을 익히고 나면, [이제] 보리심(菩提心)을 길러야 합니다.

보리심(菩提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세속(世俗:相對) 보리심승의(勝義:絶對) 보리심 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속 보리심은 자비심으로 일체 유정을 구경에 이르게 하려는 서원(誓願)으로, 중생을 유익하게 하고자 했던 부처님의 본원(本願)을 기억하며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열망하는 마음을 처음 일으키는 것입니다. 더불어 『계율품(戒律品)』에서 설하신 의궤(儀軌:儀禮)에서와 같이 보살계(菩薩戒)에 안주(安住)하시는 스승님(傳戒師)께 [계(戒)를 받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보리심을 일으키고 나서, 승의(勝義) 보리심을 일으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승의 보리심이란 출세간(出世間)의 희론(戱論)을 모두 떠나 극히 명확한 절대적 경계(境界)로서, 티 없고(無垢) 흔들림이 없으며(不動), 바람 없는 등불의 흐름과 같이 움직임이 없습니다.


이를 이루려면 언제나 소중하게 긴 세월을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의 요가(瑜伽)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즉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미륵(彌勒)이여, 모든 성문(聲聞) 보살(菩薩) 여래(如來)들의 선법(善法)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모두가 지(止)와 관(觀)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 두 가지(止觀)는 모든 삼매(三昧)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요가 수행자는 언제나 확실하게 지(止)와 관(觀)에 의지해야 합니다. 즉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것처럼, “내가 성문(聲聞) 보살(菩薩) 여래(如來)에게 가르친 다양한 유형의 삼매(三昧)는 무엇이든 그들 모두가 지(止)와 관(觀)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지(止) 하나에만 익숙해져서는 요가 수행자들의 장애를 끊기가 어려우며, 잠시 번뇌 망상(煩惱妄想)을 억누를 수 있을 뿐입니다. 즉 지혜의 빛을 비추지 못하면 수면번뇌(睡眠煩惱)를 모두 제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수면번뇌(睡眠煩惱)를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선정(禪定)은 번뇌 망상을 가라앉히고, 지혜(智慧)는 수면번뇌(睡眠煩惱)를 완전히 소멸케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삼매왕경(聖三昧王經)』에서도,


“삼매(三昧)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생각(想)은 멈추지 않고

번뇌로 너무나 산란(散亂)하여

우닥(Udrak)이 정(定)에 든 것 같아라.”


“법무아(法無我)를 세세히 살피고

각각을 분별(分別)하여 수행하면,

그것이 열반의 결과를 위한 원인,

다른 인(因)이 무엇이든 그것으로는 멸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장(菩薩藏)』에서도, “어떤 이는 가르침(法)을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고, [또] 어떤 이는 성스러운 율경(律經)의 [내용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삼매(三昧)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만심(自慢心)때문에 증상만(增上慢: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자만)에 떨어지며, 생(生)·노(老)·병(病)·사(死)·비통(悲痛)·탄식(歎息)·고통(苦痛)·불안(不安)·산란(散亂)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며 고통이 쌓이는 것(苦蘊)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나니, 그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른 것에 완전히 부합(符合:契合)하는 것(菩薩道)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 것이 노(老)·사(死)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장애를 제거하고 완전한 청정지혜(淸淨智慧)를 이루려고 한다면 지(止)에 안주(安住)하여 지혜를 수행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도 말씀하기를, “계율(戒律)에 안주(安住)하여 삼매(三昧)를 이루고, 삼매를 이루고 나서도 지혜를 수행해야 한다. 지혜로 청정지혜(淸淨智慧)를 이루고 나면 청정지혜가 계율을 원만하게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대승신심수행경(聖大乘信心修行經)』에서도, “선남자(善男子)여, 지혜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 대승 보살들에 대한 신심(信心)이나, 대승에 대한 어떠한 것도 생기리라고 나는 말할 수 없다.”


“선남자(善男子)여,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대승 보살들에 대한 신심(信心)이나 대승에 대해서 생기는 것은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이 산란(散亂)하지 않는 마음으로 실제(利)와 법(法)을 바르게 사유(思惟)하여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止)와 멀어진 관(觀)만으로는, 요가 수행자의 마음은 경계(境界:對象)들로 산란해지게 되며, 바람 앞에 등불처럼 불안해 집니다. 따라서 지혜의 빛을 극명(克明)하게 드러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止)와 관(觀)] 두 가지를 똑같이(雙修) 의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불임열반기법주경(佛臨涅槃記法住經)』에서도, “성문(聲聞)들이 여래의 종성(種姓)을 볼 수 없는 것은 삼매(三昧) 부분이 강하고, 지혜 부분이 약하기 때문이다.”


보살들이 [여래의 종성(種姓)]을 볼 수는 있지만 불분명한 것은, 지혜 부분은 강한 반면, 삼매(三昧)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래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지(止)와 관(觀)을 똑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지(止)의 힘으로,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분별(分別)의 바람에 의해 마음이 요동치지 않게 됩니다. 관(觀)으로 그릇된 견해의 모든 티끌을 제거함으로써 다른 것들에 의해 전도(顚倒)되지 않게 됩니다. 『월등경(月燈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지(止)의 힘으로 마음은 흔들리지 않게 되며, 관(觀)에 의해 산(山)처럼 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止)와 관(觀)] 두 가지 모두를 기르는데,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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