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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6. 수행차제.삼종요도

『삼종요도(三種要道)』

쫑카빠의 『삼종요도(三種要道)』


(*역주: 원제는『Lam gyi gtso bo rnam gsum gyi rtsa ba』이다.)



지금 우리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여기 특별한 보드가야에 머무는 것처럼, 모든 중생을 위해 깨닫고자 하는 마음인 보리심이라는 특별한 동기를 세워야 합니다.

아주 진지해져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당신의 순수한 보리심을 동기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성취와 공덕은 깨달으려는 마음인 보리심에 의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이 마음을 기르고 개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보드가야에서의 마지막 날인 오늘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좀 더 많은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따라서 쫑카빠 대사의 “세 가지 중요한 길” 인 『삼종요도(三種要道)』를 계속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과 번뇌 망상으로부터 떠나는 마음인 출리심(出離心)(*역주: 미혹(迷惑)한 세계를 포기하는 마음과 그에 따른 수행)은 윤회에 대한 모든 욕망에서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해탈의 길은 바로 이 출리심에 의지해서 들어갑니다.

또, 보리심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깨달으려는 자세 또는 의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공성(空性)에 대한 정견(正見)은 존재의 실제 본성을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존재의 무자성(無自性)에 대한 개념인 공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눈입니다.


정견(正見)
(*역주: 견(見, darshana)은 인도에서 철학이라는 용어로 쓰이며, 모든 현상과 본질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이 바라봄은 판단 분별 작용을 동반하는 것인 데, 절대 진리를 바로 보고(正見) 깨우치면 더 이상 바라보는 판단 분별 작용이 필요 없게 될 것이다.)은 출리심에 의해서 생기며, 출리심이 생기면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해탈을 가로 막고 있는 장애를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장애란 주로 윤회에 집착하는 번뇌 망상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공성에 대한 바른 눈인 정견(正見)에서 보리심에서 생깁니다. 이 보리심도 역시 완전한 깨달음인 일체지(一切智)를 가로 막는 장애를 제거해줍니다.

이러한 장애들은 주로 존재를 실재하는 것으로 잘못 파악하는 견해들을 말합니다.
깨달음은 이러한 장애들을 제거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성에 대한 정견은 모든 장애를 제거하는 실질적인 방법이며,
이것은 출리심과 보리심의 도움으로 이루어집니다.

소승의 가르침에서는 자신들의 목표인 해탈을 이루기 위해 출리심과 공성에 대한 정견을 수행합니다. 대승은 여기에 보리심을 더 수행하여 모든 장애를 완전히 제거합니다.

따라서 『삼종요도』 즉, 세 가지 중요한 길인
[출리심]과 [보리심] 그리고 [공성]은
소승과 대승의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며 정수(精髓)입니다.


밀법(密法, Tantra) 수행에서의 미세신(微細身), 풍기(風氣), 기맥(氣脈), 명점(明点) 등도 결국 출리심과 강력한 보리심 그리고 용수(龍樹) 보살과 당신의 두 제자(聖天과 佛護)께서 가르치신 공성에 대한 바른 이해, 이 세 가지 길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미세한 마음과 의식을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에 대한 자존심과 위엄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수행을 통하여 우리는 부처님의 지혜법신(智慧法身)과 색신(色身)의 고귀함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러한 몸을 수행 중에 바로 가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깨달음을 이루려는 강력한 동기인 보리심을 바탕으로, 부처님의 지혜법신과 색신의 고귀함을 유지하는 수행을 통하여, 점차로 완전함을 성취해 나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중요한 길은 모든 현교와 밀교의 기본 바탕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항상 지혜에 의지해야 하며, 남들을 돕고 공덕을 쌓는 방편이 지혜와 결합되도록 함께 수행해야 합니다.


쫑카빠 대사의 이 저서는 아주 짧은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는 맨 처음 이 경전을 딱다 린포체(Tagtra Rinpoche)께 공부하였으며, 나중에 티장 린포체(Trijang Rinpoche)등 여러 스승들께 여러 번 다시 배웠습니다. 이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는 바른 동기를 심어야 합니다.

자신의 동기를 친절한 마음에 둔다면 이것은 행복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부족하고 대신 자만과 오만 등이 가득하다면 불행과 어려움만 따를 것입니다. 미래 생의 결과는 착하든 거칠든 또는 친절하든 무례하든, 자신이 지금 이 생에 하고 있는 행동방식에서 미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설령 미래의 생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가지고 있는 친절한 마음이나 거친 마음은 이 생에서 바로 행복과 불행이라는 결과로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입니다.
미래의 생이 없어도 친절한 사람은 해로움이 없습니다.
친절한 마음은 일상을 편안하게 도와줍니다.

 

또 미래 생이 있다면 지금 친절한 사람은 그때도 모든 이들에게 이익을 줄 것입니다.
그러니 친절하십시오.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이론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만나는 실제 상황에서 실제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르침(法, Dharma)의 핵심입니다.
따라하기에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처럼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씩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중국은 티벳 사람들이 자비심을 공부하기에 아주 좋은 대상입니다.
그들은은 잠시 바르고 틀린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어떤 행동의 절차를 밟고 있는 지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자비심을 보여줘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맑고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티벳의 전통 술인 창(chang)에 중독 된 사람을 보십시오. 아주 형편없는 모습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들은 점점 더 거칠고 무례해집니다. 부처님께서도 잦은 음주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거칠고 좋지 않은 일들을 저지르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흡연(吸煙)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러 의사들의 경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건강에 아주 해롭습니다. 만약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흡연을 한다면, 그것은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그냥 습관적으로 흡연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마약 등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거친 행위들을 떠남으로서 더 부드럽고 친절해질 수 있으며, 맑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 친절하고 바른 사람들이 있다면, 좋은 본보기로 삼아서 자신도 스스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더 조심하고 더 친절해지십시오.

그래서 따듯한 마음으로 사랑과 자비를 기르십시오.
거칠고 이기적인 것의 허물을 잘 보십시오.

친절한 마음을 가지면 행복과 행운 그리고 건강하고 평온한 마음이 항상 함께 할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바르게 갖는데도 많은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습니다. 모두가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하고 따듯하게 대해야 합니다.


여기 티벳에서 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난 30~40여 년간 너무나 애처로운 일을 많이 당했지만, 어려움을 되뇌지는 않습니다. 내 자신, 함께 고생하며 법을 위해 일해 온 그들에게 너무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여기에 온 것은 법(法)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 인도에 살고 있는 티벳인들 역시 중국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인도에서 법(法)을 수행할 기회를 얻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중국에 의해 핍박받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불교를 수행하지 않은 사람들은 감옥에서 분노와 증오로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화를 가라앉히고 자비로운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 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면 완전히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
화를 가지고 다른 생에까지 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히틀러를 보십시오. 그는 살아생전에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자신에 대한 증오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을 때는 비참하게 독약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스탈린도 마찬가지로 큰 두려움 속에 죽어 갔으며, 모택동도 어렵게 죽어 갔습니다. 그러므로 친절하고 따듯한 마음을 기르는 데 진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죽음이 다가와도 평온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수많은 나라를 다녔지만 항상 같은 내용을 가지고 법을 전합니다. 서양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친절한 마음으로 분열하지 말고 모두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생각합니다. 국적과 인종 종교 등과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있어서 그들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관찰한다면, 우리들 자신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똑같이 존엄한 인간입니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며, 고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친절하고 따듯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한 말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까? 이해가 되신다면, 나와 함께 이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친절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여기 보드가야에 달라이 라마가 전하는 법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
나의 본론은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토끼처럼 귀를 쫑긋이 세우고, 쫑카빠 대사의 『삼종요도』 즉, 세 가지 중요한 길에 대한 가르침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쫑카빠 대사는 티벳의 암도 지방에서 태어나서 위짱(U-Tsang)에 있는 중앙 티벳으로 여러 스승들께 공부하기 위해 갔습니다. 거기서 현교와 밀교를 모두 공부하고,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쫑카빠 대사는 다양한 인도의 경전과 주석들을 근거로 아주 뛰어난 열여덟 책(冊: 저서의 묶음)을 쓰셨습니다. 이 저서들은 수제자인 응아왕 닥빠(Ngawang Dragpa)에게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쫑카빠 대사의 대표적인 저작인 『보리도차제론』과 이 『삼종요도』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삼종요도』에서는 출리심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귀한 인간의 몸을 받은 것과 무상(無常)을 기억하여 이 생의 번뇌 망상을 떠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윤회의 고통을 기억하여 다음 생의 번뇌 망상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즉, 귀의에 대한 강조를 조금 덜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세 가지의 동기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습니다. 즉, 입문자의 단계에서부터 근기(器根)가 뛰어난 단계까지, 먼저 다음 생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하며, 같은 맥락에서 귀의에 대한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의 구조가 조금은 다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본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존귀하신 스승들께 배례(拜禮) 올립니다.


“존귀하신(大德)”은 티벳어의 “제쮠(Jetsun)”에 해당하는 말로 윤회를 향한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서 완전한 해탈(解脫)의 길에 들어섰다는 말입니다. 스승은 보리심과 공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모두 갖추신 뛰어난 분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존귀하신 스승”이란, 쫑카빠 대사께 께달음의 길인 람림(Lam-rim)을 가르치셨던 스승들을 말하며, 특히 비전(秘傳)의 스승이신 문수사리(文殊師利, Majuśrī) 보살을 말합니다.


다음은 책을 쓴 동기와 서원을 말한 편찬발서(編纂發誓) 부분입니다.


승리자께서 가르치신 모든 핵심적인 의미는

수승한 승리자의 아들, [보살]들께서 찬탄(讚嘆)하신 길,

상서로운 해탈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이 길을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여 제가 해설하려 하옵니다.


“승리자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핵심적인 의미”는 출리심을 말하며, “수승한 승리자의 아들 [보살]들께서 찬탄(讚嘆)하신 길” 또는 보살의 길은 보리심을 말합니다. “상서로운 해탈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길”은 우리를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공성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편찬발서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해서” 즉, “가능한 한 모든 의미를 담아 농축하여” 세 가지 중요한 길에 대해 설명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누구든 윤회의 안락에 탐착하지 않고

가만(暇滿)*의 의미를 다하기 위해 정진하는 이는

[오직] 승리자를 기쁘게 하는 길에만 마음을 쏟는

상서로운 이들의 [뜻]에 맑은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라.

(*역주: 가만(暇滿)이란 팔유가(八有暇)와 십원만(十圓滿)을 말한다. 즉 (1) 지옥에 나지 않음 (2) 축생으로 나지 않음 (3) 아귀로 나지 않음 (4) 장수천(長壽天)에 나지 않음 (5) 변방(법의 불모지)에 나지 않음 (6) 몸이 불완전 하지 않음 (7) 사견(邪見)을 지니지 않음 (8) 여래 없는 때에 나지 않음 등의 여덟 가지의 여유인 팔유가와 (1) 인간의 몸을 받은 것 (2) 중심지(법이 잇는 곳)에 난 것 (3) 몸이 온전한 것 (4) 전도업(顚倒業 혹은 無間業: 최고의 악업)을 짓지 않은 것 (5) 불법(佛法)을 믿는 것 (6) 부처님이 계신 것 (7) 정법을 설하시는 것 (8) 가르침을 펴기 위해 머무시는 것 (9) 법의 수레를 굴리시는 것 (10) 법을 수행할 인연이 있는 것 등의 열 가지를 구족한 십원만을 말한다. 여기 열거한 가만(暇滿)의 구체적인 내용은 경론의 출전 근거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내용이 다르지는 않다.)


이 게송은 주의 깊게 잘 들으라는 권고입니다. 즉, 어떤 동기를 가지고 가르침을 들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승리자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길”은 어떠한 잘못도 없는 완전한 길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완전한 길을 가는 것이 바로 부처를 기쁘게 하는 길입니다.


실제 본문은 출리심과 보리심 그리고 공성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이해의 점차적인 단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윤회의 안락을 벗어나려는 강한 출리심에서 다른 이들을 위한 자비심이 강화됩니다.

예를 들면, 인도의 기차역에서 시각 장애인이나 팔 다리가 없는 신체장애인 그리고 거지들을 볼 때는 상대적으로 쉽게 자비심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출리심이 없다면 큰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자비심 대신에 질투를 느끼고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자만심을 내기도 합니다. 반면에 출리심에 익숙해지면 윤회의 안락에 대한 생각은 결국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뉴욕의 어느 한 곳을 둘러보면, 너무나 분주한 많은 사람들을 보고 먼저 본능적인 자비심을 느낄 것입니다.


출리심은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윤회의 고통을 아래로 훑어보고 나서, 윤회에 관심을 잃고 혐오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를 위로 살펴보고 그것을 성취하기 바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자세를 강화하면 보리심은 더 강해질 것입니다.
보리심 역시 마찬가지로 위아래로 살펴보는 두 가지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이 출리심과 보리심을 기반으로 하여 공성에 대한 바른 견해인 정견을 얻게 되면, 해탈 또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정견에는 사성제(四聖諦)에서 구분한 두 가지의 진리인 이제(二諦)가 있습니다.

(*역주: 여기서 이제(二諦)는 사성제의 고제와 집제를 세속의 진리인 속제로 보고, 멸제와 도제를 궁극적 진리인 진제로 보는 데서 나온 말이다. 즉, 사성제를 이제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방식이다.)

 

귀의의 근본 대상인 부처님은 사성제의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완전무결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보리심과 함께 공성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를 완전한 지혜인 일체지(一切智)로 이끌어 줍니다.

또, 바른 출리심이 생겨야 해탈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먼저 출리심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2. 청정한 출리심이 없이는, 윤회 바다의

안락한 과보(果報)에 이끌리고 마나니, 끊을 방법이 없으며,

윤회를 탐닉하는 몸 가진 이들은 [결국]

모든 것에 속박 당하고 마나니, 먼저 출리심을 구하라.


첫 구절에 “청정한 출리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윤회의 안락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렸다는 의미로 아주 청정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청정한 출리심이 부족하면, 세속적인 관심에 자꾸만 사로잡히게 되어 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길과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한 업을 쌓았는가에 상관없이, 욕망과 집착이 함께한다면 윤회의 사슬은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므로 출리심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출리심은 어떻게 개발하는 것입니까?

3. 얻기 힘든 가만(暇滿)을 얻은 이 생을 낭비하지 말고

마음과 친숙하여 이 생의 부귀영화(富貴榮華)와 바꾸라.

업보(業報)를 피하지 못하는 윤회의 고통을

다시금 생각하여 앞날의 부귀영화(富貴榮華)와 바꾸라.

고귀한 인간 몸 받은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는 여덟 가지 한가한 자유로움인 팔유가(八有暇)와 열 가지의 온전함인 십원만(十圓滿)인 가만(暇滿)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무상하며, 죽음이 찾아오면 곧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얼마나 어려운 기회를 얻은 것인지 깨닫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생에 집착하는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어렵게 얻은 이 가만의 몸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무상(無常)과 죽음에 대한 가르침은 지난 며칠 동안 톡메 상뽀의 『승리자의 아들, 보살의 37 수행법』(*역주: www.tibetan-museum.org 최 로덴의 티벳불교입문 참조. 여기서는 티벳불교입문을 위한 총론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에서 이미 논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죽음과 무아에 대해 수행 할 때도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즉, 죽음은 확실하다는 것,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 등입니다.
죽음은 어떤 순간에도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법에 대한 가르침을 제외하고, 어떤 것도 죽음의 순간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다가오고 있는 죽음과 미래의 생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죽음이 임박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 생에만 집착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인과법(因果法)의 완전무결함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인과(因果)의 법칙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해서 선은 선을 낳고, 악은 악을 낳습니다. 업은 확실히 존재합니다.선한 행동은 확실히 행복한 결과를 낳고, 악한 행동은 다소 빠르고 늦는 차이는 있지만 분명 고통의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자기의식의 흐름(自相續) 속에 고통의 원인을 심는다면, 어떻게 마음 놓고 쉴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언제 터지는가는 시간문제입니다. 이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끝내 평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력하게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서원(誓願)을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에 자신의 생로병사를 경험합니다. 약이 아무리 많아도 늙음을 치료할 수 없으며 ,지속적으로 생겨나는 모든 병을 다 치료할 수 없습니다.

생로병사의 고통은 그것이 생기는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이 바로 생로병사의 원인입니다.

이 몸은 여러 가지가 모여서 이루어진 화합물입니다.
즉, 번뇌 망상과 업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고통은 언제나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부딪치고 반발하는 힘이 모여 있습니다. 즉, 몸에는 냉기(冷氣)와 열기(熱氣)가 돌아다닙니다. 감기에 걸려 해열제(解熱劑)를 먹으면 몸에 열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으면 다시 몸에는 냉기가 힘을 쓰게 됩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합니다. 오직 몸의 냉기와 열기가 잠시 균형을 이룰 때만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도 계속 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균형이 무너지고 맙니다. 성천(聖天, Āryadeva) 보살의 『사백론(四百論)』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몸은 서로 밀고 반발하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잠시도 쉬지 못하고 고통 받습니다.


우리는 예쁜 사람의 몸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머리, 눈, 코, 심장, 피부, 폐 등 부분적으로 떨어뜨려서 생각하면
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부분들은 예쁜 것이 아닙니다.

또, 소변, 대변 등 몸에서 나오는 것을 거리에서 보게 되거나 냄새를 맡게 되면,
우리는 얼굴을 돌리거나 코를 막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바로 우리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몸에서 온 것입니다.

그렇게 오물을 쏟아 내는 우리의 몸이 어떻게 깨끗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몸은 부모님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생겼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것들을 얻어서 책상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면 누군가는 혐오감마저 느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기 위해 음식을 40년간 먹었다면 반대로 찌꺼기를 배설한 것도 40년 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고 움직이는 이 몸이 어떻게 깨끗한 것일 수 있습니까? 따라서 이렇게 청정하지 못한 몸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이 몸은 번뇌 망상과 업으로 인하여 생긴 것입니다.

번뇌 망상과 업을 완전히 제거 한다면 다시는 이러한 거친 몸이 모여서 고통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번뇌 망상은 잘못된 생각과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즉, 존재의 본성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 본래의 성품이 없다는 것을 바로 보게 되면, 번뇌 망상은 녹고,
공성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이 무지를 보기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이와 같이 익숙해지고, 윤회의 번영(繁榮)에

이끌리는 마음은 한 순간도 일어나지 않으며,

온 종일 밤낮으로 해탈을 구하는 마음이생겨날 때,
출리심이 일어나리라.

그러므로 출리심을 길러야 합니다.
다음은 깨달으려는 동기인 보리심에 관한 내용입니다.


5. 출리심은 또한 청정심(淸淨心)을 발휘하여

정화(攝受)하지 않으면, 무상보리(無上菩提)의

원만한 안락의 원인이 될 수 없나니,

지혜로운 이들이여, 수승한 보리심을 일으키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보리심(菩提心)이 없이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6. 격류(激流)하는 네 개의 강(江)*이 흘러 나른

풀기 힘든 속박은 단단히 조여 오고,

아집(我執)의 철망 안에 갇히니,

무지의 큰 암흑에 완전히 덥혔도다.


7. 끝없는 윤회로 태어나고 또 태어나니,

삼고(三苦)**는 쉬지 않고 괴롭히네.

지금 그와 같이 되신 어머니들의

참 모습을 잘 보아, 수승한 마음을 일으키라.***


(*역주: 네 개의 강(江)이란 이 몸과 현상계를 이루고 있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 구성 요소를 말하며, 번뇌와 업을 구성하고 움직이는 요소이기도 하다. 또 생(生) 노(老) 병(病) 사(死)를 말하기도 한다.)

(**역주: 삼고(三苦)는 즉, (1) 신체 등에 오는 직접적인 고통을 고고(苦苦) 라 하고, (2) 모든 것은 변해감으로 그 자체가 고통인 변고(變苦), 그리고 (3) 중생의 몸을 받으면서부터 끊임없이 움직이고 업을 쌓아 쉴 수가 없는 고통인 행고(行苦)의 세 가지를 말한다.)


(***역주: 지금은 윤회로 고통 받고 있지만, 어느 한 생에 나의 어머니였던 그들이 왜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지를 잘 살펴보고 그들을 위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말이다.)


“격류(激流)하는 네 개의 강(江)이 흘러 나른”은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을 말합니다. 어두운 업의 과보인 “풀기 힘든 속박은 단단히 조여 오고” 있는데, 무지라는 “아집(我執)의 철망”에 갇혀서 “큰 암흑에 완전히 덥히니” 존재의 바른 본성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과 현상이 모두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항상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변화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나”는 단지 변화하는 속에 “나”라고 이름 붙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무지로 인하여 “나”라고 파악할 뿐, 그것은 변화하는 현상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원하고 항상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무언가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이 무지의 어둠이 우리를 업의 철망 속에 갇히게 하는 나쁜 업을 쌓는 실질적인 원인입니다.

그 결과 저절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세 가지 고통인 삼고(三苦)를 받는 것입니다.

즉 ,직접적인 고통인 고고(苦苦), 변화로 인한 고통인 변고(變苦), 업과 번뇌가 무르익어 행을 해야만 하는 고통인 행고(行苦)를 받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우리의 모든 어머니가 그대로 당하고 있음으로, 보리심의 바른 동기를 가지고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다음은 공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8. 현상(現象)을 분별하는 지혜를 못 갖추면

출리심과 보리심이 익어간다 하더라도,

윤회하는 근본은 끊을 수가 없나니

연기법(緣起法)*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을 구하라.


(*역주: 모든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여 생긴다는 이론으로 불교 교의의 핵심 중에 하나이다.)


쫑카빠 대사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공성은 연기법에서 생기고, 연기법은 공성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의존하여 생기는 원리인 연기법에 의존하는 현상의 실상을 알고, 그 본래 성품인 공성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들을 익히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9. 윤회열반(輪廻涅槃)*의 일체법(一切法:現象)이

어떠한 인과(因果)도 피하지 못하는 것을 보는 이가

대상(所緣)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모두 제거하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부처를 기쁘게 하는 길에 들어서리라.


(*역주: 윤회는 돌고 도는 현상계, 열반은 윤회를 멈춘 절대의 자리를 말한다.)


윤회와 열반의 모든 현상은 원인과 결과에서 옵니다. 이것은 오류가 없습니다. 이것을 한 번 이해하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부처를 기쁘게 하는 길에 들어 설 수 있습니다.

공성을 한 번 이해하고 나면, 더 이상 본래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무언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기반인 잘못된 인식은 사라집니다.


10. 현상(存在)은 연기(緣起)를 속이지 못한다는 것과

공성(空性)이라는 것, 이 두 가지를 벗어난 이해*가

다양한 형태로 생겨남은

여전히 [석가]모니의 종지(宗旨)**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로다.


(*역주: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이 현상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연기의 법칙 때문이며, 그 실체는 공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벗어난 견해는 모두 현상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생기는 오해로 부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이라는 말이다.)


(**역주: 근본 가르침 즉 중생이 해방할 수 있는 길에 대한 가르침을 말한다.)


공성(空性)을 한 번 이해하고 나면, 손가락으로 가리켜 ‘이것은 이런 물건’이라고 하던 것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절대적 진리 안에서 궁극적으로 분석하면, 어떠한 사물에서도 그 실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물이 나타나는 것도 역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 역시, 세속적 진리 안에서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부처님께서 의도하신 공성과 이제(二諦)에 대한 바른 견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11. 언제나 흐름을 멈추지 못한다는 [사실]과 동시에

연기(緣起)를 속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봄으로서,

믿고 있던 모든 이해의 방식을 깨뜨리고 나면

그때야 정견(正見)의 분석을 [모두] 마치리라.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물이 연기의 법칙으로 인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사물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발생하며, 그들의 본래 성품은 공(空)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에 의지하는 연기의 법칙을 확실히 이해하고 믿음으로서 사물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역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그와 같은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공성 즉, 정견에 대한 완전한 분석을 모두 마치게 됩니다.


12. 더불어 존재에 끝이 있다(有邊)는 [관념을]벗어나고

공(空)에 끝이 없다(無邊)는 [관념을]벗어난 공성(空性)이,

[오직] 원인과 결과로 생겨나는 이치를 알고 나면

극단적인 견해(邊執見)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으리라.*


(*역주: 이 게송은 공성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즉 무언가 끝이 있다고 믿는 유변(有邊)과 지금 이대로 끝나면 모든 것이 공하니 아무 것도 없다는 무변(無邊)의 견해로 다른 말로는 상견(常見: 항상하다)과 단견(斷見: 단절된다)이라고도 한다. 또 변집견은 다섯가지 잘못된 견해인 오견(五見) 중에 하나이다. 즉 오견(五見)은 (1) 나와 내것이 있다고 믿는 유신견(有身見) (2)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에 빠져 있는 변집견(邊執見) (3) 인과(因果)의 도리를 부정하는 사견(邪見) (4) 잘못된 견해를 옳은 것으로 믿는 견취견(見取見) (5) 바르지 않은 계율을 따라 해탈의 길이라고 믿는 계금취견(戒禁取見)을 말한다. 즉 이 모든 잘못된 견해는 인과의 법칙을 바로 알고 나면 모두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사물만을 가지고 사물들이 그렇게 눈에 보이는 대로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견해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사물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공(空)하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만납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서로가 서로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사물은 공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눈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공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떠나고 나면,

사물은 원인과 조건 또는 원인과 결과에 의지한 연기(緣起)의 법칙으로 존재하며,
그래서 그 실체가 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쫑카빠 대사의 특유한 논증(論證) 방식입니다. 이에 대한 주석은 최네 린포체(Choney Rinpoche)의 『연기찬탄송(緣起讚嘆頌)』에 나옵니다. 따라서

사물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연기법 때문이며, 연기법 때문에 사물이 본래 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깨우침으로서 두 가지의 극단적인 견해를 떠날 수 있습니다.


13. 이와 같이 세 가지 중요한 길의

핵심을 스스로 그와 같이 이해할 수 있을 때,

고요한 곳을 찾아 떠나 정진의 힘을 발휘하여

구경(究境)의 안락을 속히 성취하라, 아들이여!


바른 가르침을 들은 힘으로, 깊이 생각하여 그 의미를 확신할 수 있을 때 까지 분석한 다음, 출리심과 보리심과 공성에 대한 바른 견해를 얻게 되면,
스스로 고요한 곳을 찾아 선정에 헌신하여 그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밀라레빠(Milarepa)나 위대한 갸와 엔사빠(Gyalwa Ensapa)와 그의 정신적 제자들 그리고 케둡 상게(Khedup Sangyay)와 같은 과거의 많은 스승들이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기쁨을 가지고 정진해야 합니다. 이 게송에서 “나의 아들”이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쫑까빠 대사의 수제자인 응아왕 닥빠(Ngawang Dragpa)를 말합니다.


이것으로 『삼종요도』의 간단한 해설을 마칩니다. 이 『삼종요도』는 아주 중요한 경전입니다.

이 안에는 모든 현교와 밀교의 핵심적인 내용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공성에 대한 가르침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성이나 이제(二諦) 그리고 정견(正見) 등 전문적인 불교 용어들에 익숙하지 않으면, 아주 혼돈스럽습니다. 이러한 용어를 정의하고 주장하는 방법은 불교 안에서도 다양합니다.

인도 불교의 사대학파(四大學派)인 유부(有部), 경부(經部), 유식(唯識), 중관(中觀) 학파 또는 밀교의 사급요가(四級瑜伽)인 행(行), 작(作), 요가(瑜伽), 무상요가(無上瑜伽) 등에서도 각기 조금씩 다른 깊이를 가지고, 이러한 불교 전문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또, 티벳 불교의 사대종파(四大宗派)인 닝마, 까규, 사꺄, 겔룩에서도 각기 자기 학파의 전승 체계와 맥락 안에서 조금씩 다른 정의를 내리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혼동 없이 이러한 용어들을 각자가 주장하는 맥락에서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지 하나의 체계나 학파의 이론만을 공부하고서 다른 것을 비판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서로 조금씩 다른 눈으로 분석하고 이해하여 자신의 전통을 세워왔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거나 자기 용어만을 가지고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보행왕정론』이나 『입보리행론』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할 말이 없으면 그저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것이 최고입니다.


심지어는 가르침의 한 전통인 겔룩 종파 안에서도 공성(空性)에 대한 이해나, 현교와 밀교 등에 대한 이해와 주장이 서로 조금씩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대상이나 공성 또는 현교와 밀교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성을 이해하는 마음과 관련한 차이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서 현교와 밀교에서 정의하는 궁극적인 진리인 진제(眞諦)와 상대적인 진리인 속제(俗諦)의 이제(二諦)에 대한 설명이 다를 때도 있으며, 그에 대한 수행 방식도 조금씩 다릅니다.


무상요가(無上瑜伽) 안에도 다양한 수행체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밀교의 무상 요가들인 구히야삼마자(Guhyasamaja, 秘密集會)와 깔라짜끄라(Kāla- cakra, 時輪)의 개괄적인 수행 방법에는 여러 가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또 분석적인 수행과 형식적인 수행도 방법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모든 불교의 교학적, 수행적 체계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많은 혼돈과 오류가 뒤따를 것입니다.


요약하면, 어떤 특정한 체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서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분파(分破)적인 속성을 버리고 거시적인 시각으로 하나씩 진지하게 공부해 나갈 때,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의 진수를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이상(以上)은 다문(多聞)하신 비구 성(聖) 롭상 닥빠(쫑카빠)께서 차코(Tshva kho: 티벳 동부의 캄지방)의 영주(領主) 응악왕 닥빠에게 전수구결(傳授口訣)하신 것이다. 선길상(善吉祥: 좋고도 상서러워라)!


이상의 티벳어 본 삼종요도는 서기 2003년 말에 북인도 다람살라 세릭 빠르캉의 교정본을 가지고 한국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달라이라마 특별 법문




부처님 초전법륜(初轉法輪)의 해설서인 용수보살의 저서 <보리심석>은 본래 인간의 마음은 청정하며 밀교와 상통하는 것으로서 인간 마음의 허물을 없애는 것을 관건으로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미세한 의식 상태를 현현시키는 것이 밀교의 수행방식입니다.


우리가 어떤 법을 설하고 듣는데 있어서 근기(根機)는 매우 중요합니다. 설법자와 법을 듣는 이 모두 절실한 신심을 가지고 부처님의 불법을 유지하고 받들겠다는 마음으로 법을 설하고 제자 역시 신심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멸성제(滅聖諦) 즉, 번뇌의 허물에서 벗어난 열반을 이루기 위해 불교 수행을 합니다.

비폭력으로 선취에 들 수 있지만 반드시 지혜가 있어야만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무명을 없애기 위한 방편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하며 일어나는 지혜에는 사해(思解)에 의해 일어나는 지혜가 있어야 하며,

그 이전에는 문해(聞解)가 일어나야 합니다.

 

수습해서 일어나는 지혜를 수해(修解)라고 하는데,

우리가 공성(空性)을 사유함에 있어서 확신을 스스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많이 듣고 공부하는 문(聞)을 시작으로 사수(思修)의 과정은 반드시 인과의 관계로 성립합니다.

 

지금 이 자리는 우리가 성불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며

이 자리에서 법을 듣기 위해 모인 동기를 바로 세우십시오.


모든 고통의 근본은 번뇌이고 그로 인해 아집(我執)이 생깁니다.

나만 소중하다는 이기심이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꿈에서도 나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음에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고 해롭다면 우리는 아견의 반대되는 생각인 무아(無我)와 아집의 반대된 생각인 보리심(菩提心)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심도 있게 다룬 것이 용수 보살의 <보리심석>입니다.

 

이 가르침에 따라 무아의 지혜를 증장시키고 이타심을 키워 나간다면 일시적인 행복이 아닌 지속적인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두려움 없는 행복은 몸과 마음을 평안하게 합니다.


 

부처님의 경장에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오온(五蘊: 생멸 변화하는 모든 것을 구성하는 다섯 요소 즉, 色受想行識)에 의지해 존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인무아(人無我)입니다.

 

경량부에서 이야기하는 인무아는 몸과 마음을 좌지우지 하는 주체로서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에서는 인무아를 향유하는 존재자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점차적으로 수행하면 ‘아’의 집착을 소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식학파와 중관에 있어 인무아와 함께 거론되는 것이 법무아(法無我)입니다. 아의 집착을 없앨 때는 인무아이지만 반대로 향유하는 주체 대상이 아직 남아 있음으로 법아의 집착은 끊어집니다. 물론 인무아를 수행했을 때 법에 대한 집착도 줄어듭니다.


인식하는 대상과 주체는 상호 의존적으로 안립되는 것입니다.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自性)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이름에 지나지 않으니, 이름과 달리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언어 또한 무자성(無自性)인 것입니다.


마음은 환(幻: 환상)의 본성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眼識)은 안근(眼根)과 대상 경계가 만날 때 일어납니다. 일반적인 생각에 우리의 마음과 몸이 실체인양 느껴지지만 실상은 이것이라고 규명하려 할 때 결코 실체는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비롯한 모든 제법은 상호의존에 의해 존재하니, 본래 자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일체의 희론이 적멸한 무분별의 지혜가 생기기 이전에는 대상이 마치 진실인양 여겨집니다.


어떤 이에게 분별이 일어난다면 공(空)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는 승의보리심(勝義菩提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의지해서 공을 이름붙인 것뿐이지, 공 또한 실재하지 않습니다.

보리라는 말은 ‘희론의 적멸’을 의미합니다.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든 허물이 벗겨져 본래가 드러난 것을 의미합니다. 집착하는 의식 또한 적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리(菩提)란 성품이 없고 생함이 없으며 존재한 적이 없어 허공과 같습니다.
공성을 깨달은 승의의 보리심은 분별로는 알 수 없습니다.

 

깨달음의 정수에 머무시는 부처님은 언제나 공이 허공과 닮았음을 아십니다.

붓다라는 말 속에도 ‘청정하다’, ‘그치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집착의 근거가 모두 적멸한 상태입니다.


희론의 적멸이 바로 공성(空性)입니다.
이런 공성을 깨달은 지혜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과 대치합니다.

 

반야경에서 ‘제법이 무자성’이라는 궁극의 실상을 말씀합니다.

선(善), 불선(不善)이란 분별의 흐름을 깬 것이 공입니다.

마음에 의식의 대상이 없는 머무름은 허공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모두 배제되어야 합니다.

공의 사자후에 모든 실유론자(實有論者)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실체가 있는 타력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부 조건에 의해 결과물이 발생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초전법륜 이후 부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체종지를 이루고, 이를 위해 승의보리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자성은 제법의 법성입니다.

사탕의 달콤함과 불의 본성인 뜨거움과 같이 모든 법의 본성을 공으로 인정합니다.



보리심의 보리라는 말은 티베트어로 ‘장춥’입니다.

 

‘장’은 허물을 모두 정화해 청정한 상태입니다.

‘춥’은 대상을 모두 알고 있는 지혜를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허물이 정화돼 깨끗해지는 근간은 ‘장’이 2가지 청정함을 의미합니다.

일시적이고 우연한 객진(客塵)을 대치법으로 청정해진 객진청정(客塵淸淨)의 관건은 바로 공성입니다.

 

공성은 궁극의 실상을 의미합니다.

공성을 깨닫지 못하면 번뇌에 휩쓸려 끊임없는 고통을 야기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의 실상인 공성에 밝지 못하면 계속 윤회를 하는 것이고,

궁극의 실상을 밝히면 윤회를 끊게 되는 것입니다.

 

무명은 계속적인 고통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성청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객진을 대치로 다스려서 객진청정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공에 대한 지견을 거듭 거듭 사유한다면 열반을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제법이 자성청정(自性淸淨)인데 이것이 국한된 대상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객진청정과 자성청정은 생명체에 국한된 의식을 지닌 존재에게 한정됩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속 식(識)이라는 것은 대상을 요량하고 인지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무지한데 무명의 반대인 실상(實相)을 확연히 요달할 때 본래부터 우리가 자성광명을 지니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용수 보살의 저서 <법성계찬탄>에는

윤회의 인(因)을 소멸한 것이 열반이다. 법신 또한 그것이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을 다스리지 못함으로 인해 업을 쌓고 윤회를 하게 됨을 말합니다.

윤회하게 하는 번뇌의 뿌리인 무명에 물든 의식 상태입니다.

 

그렇게 윤회의 바탕이 되는 의식 상태에서 허물이 대치법으로 정화되면 열반입니다.

실제를 바탕으로 하는 방편으로 보리심이 뒷받침 됐을 때 번뇌의 습기도 없앨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비유로서 용수 보살은 “불로 옷을 태워도 더러움은 사라지지 않네. 마음의 객진을 대치법으로 청정히 해도 근본 마음이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고 설합니다. 마음의 허물들을 대치법으로 썼을 때 대상을 요량하고 광명의 자성을 가진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지닌 또다른 특성은 물질적으로 바깥의 육체를 단련했을 때의 특징과 달리, 마음에 습(習)을 들였을 때 습이 견고해지고 무궁무진하게 증장될 수 있는 것이 내면의 마음이 지닌 공적(空寂)함입니다. 이렇게 해서 궁극의 일체 종지까지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는 부족하지만 많은 허물이 있는 의식 상태가 향상 되어 궁극의 성불을 이룰 수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춥’은 객진이 없어 일체의 대상을 알아차리고 요량하는 상태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 대상을 요별하고 인지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의 마음 상태는 대상을 인식하지만 현재 마음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부처님처럼 모든 대상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은 소지(所知) 즉 일체 대상을 알 수 있는데,

실제 그렇지 못한 것은 소지장(所知障)의 일체 모든 것을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무명을 없앤다면 우리에게 무시이래로 지니고 있었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공덕들은 기존에 있는 것이기에 조건을 따로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닝마의 <마하무드라>에서는 ‘본래 갖추었으니 모두 부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서 ‘장춥’이라는 보리심은 존재 가능하고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위함입니다.

 

일체 종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실질적으로 소지장을 없애는 대치법이 되기 위해서는

보리심이 뒷받침이 되어야지만 비로소 공성이 소지장을 없애게 됩니다.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이전의 동기와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지, 더 나아가서 중생 전체를 이익되게 하기 위한 것인지 목적에 따라 행동은 같더라도 결과는 다릅니다. 처음 자신의 동기가 옳다면 그에 맞는 선업을 받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개인의 해탈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한 편에 치우친 것입니다. 모든 중생을 위해 성불하기 위한 행동으로 선업을 행한다면 그 과(果)는 무량합니다. 즉 어떠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일시적인 행복을 준 것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을 행복으로 이끌겠다는 생각으로 선을 행한다면 아주 다양한 결과물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보리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굉장히 큰 이익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공성의 지혜가 소지장을 끊어 일체 종지를 끊는 대치법이 될 때 진정한 성불로 가는 궁극의 원인이 됩니다.

 

출리심(出離心)을 내어 단순히 해탈을 원한다면 번뇌장(煩惱障)을 베는 것은 가능하지만 보리심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소지장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공성의 지혜검은 소지장을 없앨 수 있습니다.


승의보리심과 진제보리심(眞諦菩提心)은 반드시 병행 돼야 합니다.

공성의 지혜를 수행할수록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견고해집니다.

 

자비심을 바탕으로 한 일체 중생의 구제를 원하는 보리심에 공성의 지혜는 힘이 되어 증장시킴으로써 공성의 지혜와 보리심의 방편은 쌍수(雙修)가 되어 병행돼야 합니다.


백조가 하늘을 날려면 두 날개를 펼쳐야 하듯 보살이 부처가 되려면 보리심과 스승의 힘과 공성을 깨우친 지혜의 날개를 펼쳐 선한 공덕의 발원으로 공덕을 성취합니다.

 

월칭 보살은 두 가지의 장애인 번뇌장과 소지장을 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샨티데바는 <입행론>에서 “보리심의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자들이 보리심이 있다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이를 아는 자 어찌 나태함에 빠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용수 보살의 <보리심석>에서 중관은 제법이 무자성임을 인정합니다.

대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해서 생겨난 것으로 의지해서 가설한 것입니다.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결과들이 항시 존재합니다.

12연기 가운데 안팎을 나누어서 대상을 이야기 합니다.

 

내면의 연기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무명에서 비롯한 노사(老死)까지의 연기는 조건에 의한 것으로 모두가 꿈과 같습니다. 원인과 성품 그리고 결과물은 모두가 무자성입니다.


외부의 연기를 보면 오온은 조건으로 생멸합니다. 중요한 것은 연기 사상에 있어서 인과연기는 불교의 4대 설일체(說一切), 경량(經量), 유식, 중관 철학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공통점이라는 것입니다.

 

원(原)이라는 것 역시 결과에 의지함을 알아야 합니다.

원인은 결과를 의지해야지만 안립됩니다.

 

긴 것는 짧은 것에 의지하듯, 원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결과에 의지된 이름입니다.

이러한 상호 의존의 안립을 중관에서는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든 4대 견해들이 원인과 조건에 의한 연기입니다.


공성을 수행해야 하는 필요성을 봅시다.

 

습기와 멀어지는 행복이 적정(寂靜)입니다.

용수 보살의 저서 <중론> 18장과 26장을 참고하십시오.

 

이러한 공을 수행자가 수행하면 해탈을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삼보에 귀의한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법보(法寶)는 도성제(道聖諦)와 멸성제(滅聖諦)입니다.

 

법보가 많은 이들에게 유익함을 알게 되면 이를 구현한 성현의 귀함을 알게 되어 불보(佛寶)의 귀중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법어의 전통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그 해설서를 쓰신 스승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3학입니다.

 

외도 뿐만 아니라 기타 종교에도 3학이 있지만 불교에서 더 수승한 것은 무아와 공의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아의 지견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타(利他)에 착하는 마음으로 중생의 이익을 구하십시오.

중생을 향한 대자비심을 내십시오.


중생들을 이롭게 할 때 얻는 선한 과보와 반대되는 부정적 과보를 알아야 합니다.

은혜로운 중생들에게 자신의 신구의(身口意)를 모두 받쳐 자신의 몸처럼 중생을 보살펴야 합니다.

 

이타심을 증장해야 합니다. 자비의 단단한 뿌리를 가진 보리심을 수행해 타인의 고통을 두려워하여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고서라도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찬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샨티데바의 <입행론>에는 속제보리심(俗諦菩提心)이 자세히 규명돼 있습니다. 이러한 논서 뿐만 아니라 부처님 경에 보리심의 가르침이 가장 광범위 하게 나온 것이 <화엄경>입니다. 티베트에서는 <화엄경>이 6부 입니다만, 중국에는 80부가 있습니다. 티베트 불교가 분발해야할 부분입니다.


대보리심의 마음을 일깨워서 자유롭지 못한 중생을 자유로 안내해야 합니다.

 

‘제법이 무아’이니 보리심의 마음을 가지고서 깊은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을 구제해야 합니다. 유정(有情)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지닌 이는 진흙탕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수련의 향기가 납니다.

 

자비의 행장을 꾸리십시오.

세상에는 다양한 방편이 존재합니다.

 

중생의 근기에 맞춰 처음에 중생들의 관심을 끌어 성숙시키고 궁극의 길로 향하게 합니다. 윤회에도 열반에서 머물지 않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이 바로 그것입니다.


번뇌가 없는 고귀한 마음은 보물입니다.

 

보물은 광명을 수행해 무간도에서 끊어야 할 바를 끊은 해탈도의 상태로 고귀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보리심에 두어 희유한 마음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매진하여 보현 보살의 행원을 따라 무지개 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광명의 공성을 깨달은 상태를 이룰 때 지혜의 법신을 증득하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예찬하신 보리심을 찬탄합니다. 윤회의 바다와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이 양족존(兩足尊)께서 의지하신 길을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