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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6. 수행차제.삼종요도

6. 곰림 바르빠

5. 고(苦)


자비(慈悲)라는 것은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헤어나기를 바라는 성품(性品)입니다.

삼계(三界)의 모든 유정(有情)은 삼고(三苦: 苦苦 變苦 行苦)로 인해 갖가지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니, 모든 유정을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즉 “이와 같이 잠시 동안 유정(有情)은 지옥 중생들이 되어 [그 고통을 경험하며], 그들의 흐름(相續)을 끊지 못하고 긴 세월 동안 염열지옥(炎熱地獄) 등 갖가지 고통의 강물로 빠져들기만 하느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와 같이 아귀(餓鬼)들도 너무나 참기 힘든 배고픔과 갈증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며, 그] 고통의 불로 타버린 몸은 혹독한 고통의 경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으며, 축생(畜生)들 역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위협하며 흉포(凶暴)하게 해치는 등 수 많은 고통의 성품만 드러냅니다. 사람들도 역시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여 서로 성내고 해치며 좋은 것과 헤어지고, 싫은 것과 만나며 가난해지는 등의 고통을 끊임없이 경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사랑과 애정으로 중생들의 고통을 보고 배우는 수행의 과정을 보여주고 나서, 까말라실라께서는 중생들을 괴롭히는 다양한 유형의 고통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고통에는 세 가지의 유형이 있습니다.

고고(苦苦)와 변고(變苦) 그리고 행고(行苦)입니다.

이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 고통 받지 않는 중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 가지 좋은 윤회 세계에 태어난 중생들도 지금은 순간적으로 행복해 보이지만 자세히 분석해보면 그들의 모든 행복 역시 변하고 있으며, 끝내는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들에게도 역시 자비심이 필요합니다. 까말라실라께서는 또 지옥, 아귀, 축생, 인간들의 고통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이 고통을 만드는 특징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몇몇은 탐착(貪着) 등의 번뇌로 모든 것에 얽매여 마음을 속박하고, [또] 몇몇은 갖가지 전도된 견해로 분란을 일으키는데, 이 모든 것 역시 고통의 원인입니다.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이 [항상 함께]합니다.


천상계(天上界)의 신들 역시 또 다른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상계(天上界)의 [신]들 역시 모든 것이 변하는 고통(變苦)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또] 욕계천(欲界天)은 어떠합니까? 그들도 [역시] 언제나 죽음이라는 변화와 하락(下落) 등의 두려운 슬픔이 마음을 짓누르는데,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이제 본문에서는 행고(行苦)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행하는 고통(行苦)의 특징은 업(業)과 번뇌의 성상(性相: 본성과 형상)으로 인한 의타기성(依他起性: 다른 것에 의지하여 생김)이며, 매 순간 흩어지는 성상(性相)으로 모든 중생에게 편재(遍在)합니다.


고고(苦苦)는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고통이나 병 그리고 정신적 갈증으로 인한 고통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변고(變苦)에 해당합니다.

즉, 오염되고 끊임없이 변하는 고통입니다. 오염된 행복이란 완전한 행복이 아닙니다.

단지 좀 더 거친 고통이 일어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오염된 행복은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행으로 끝나는 행복입니다.

변하는 성품 때문에 일어나는 고통입니다.

행고(行苦)는 과거의 업과 번뇌로 인하여 축적된 오염된 모임 즉 온(蘊)들이 활동함으로서 일어나는 고통입니다. 이것은 고고(苦苦)도 변고(變苦)도 아닌 경우입니다.

하지만 오염된 정신과 물리적 온(蘊:모임)에서 멀어지지 않는 한 계속해서 다양한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행고(行苦)라고 합니다. 이들이 적절한 조건들을 만나면, 우리를 고통 속에 속박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의 고통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신적 수행을 위한 다음 단계는 고통에서 해방되려는 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통에서 해방되려는 마음을 갖으려면, 고통의 특성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동물들도 참을 수 없는 고고(苦苦)의 고통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한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불교도, 비불교도(非佛敎徒) 할 것 없이 누구나 고도의 선정(禪定) 상태에서 맛 볼 수 있는 무색계(無色界)와 같은 좀 더 높은 영역의 삶을 희망합니다. 그리고 불행한 변화의 고통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잠시 고고(苦苦)에서 벗어나는 행복을 맛봅니다. 소위 천상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선정(四禪定)의 아래 단계와 같은 높은 영역의 세계에 도달하면 잠시 변고(變苦)에서도 자유로운 중간적인 상태를 경험합니다.

또 사선정(四禪定)의 마지막 단계인 사선(四禪)이나 무색계(無色界)에서는 잠시 처음 두 가지의 고(苦)인 고고(苦苦)와 변고(變苦)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이들이 행고(行苦)를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매개로 해서 해탈의 경지를 찾으려는 자극을 받습니다. 그들은 존재의 실체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에 대한 혐오감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번뇌와 불안정한 상태의 불이익을 인식하게 됩니다. 번뇌의 허물을 이해함으로서 오염된 정신과 물리적 온(蘊: 모임)의 허물을 이해하게 됩니다. 번뇌의 허물을 보고서 그것들과 떨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번뇌를 모두 제거하고 나면 바로 열반(涅槃) 또는 해탈(解脫)을 이루게 됩니다. 행고(行苦)를 바르게 인식하고 그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는 것이 출리심(出離心)과 해탈의 의지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본문에서는 행고(行苦)의 특성이 순간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먼저 모든 것은 무상하게 흩어지며 매 순간 변합니다. 그리고 또한 순간순간 해체되는 똑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상한 현상에는 독립적인 속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다른 원인과 조건들에 의지하여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행고(行苦)는 한 순간도 그 상태로 남아 있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해체되고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이 고통의 불꽃 안에 갇힌 것을 보고 내가 고통을 원치 않는 것처럼 다른 모든 이들 역시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즉 “아, 가엾다. 내 사랑하는 유정들의 이 모든 고통, 이들을 고통에서 어찌 벗어나게 할 수 있으랴.”라고

[모든 유정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겨 [모든 중생들이]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자비삼매(慈悲三昧)에 들거나, 어떠한 행위를 할 때도 언제나 모든 유정들을 위해 수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먼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친인척들이 갖가지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보면서 수행해야 합니다.


위의 구절에서 저자는 자비심을 수행하는 과정을 개괄(槪括)하고 있습니다. 자비심은 모든 중생이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에서 자유롭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수행 정진의 시간을 두고 주기적으로 그것을 따라해야 합니다. 수행자로서 공식적인 수행 정진 시간에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키도록 노력해야 함은 물론 행(行)·주(住)·좌(坐)·와(臥) 즉, 행하고 머무르며, 앉고 눕는 등의 행위를 하는 모든 동안에도 똑같이 수행을 해나가야 합니다.

하나의 정진 방법을 지속할 수 있게 되면, 수행을 끝내고 난 다음에도 좋은 경험의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상태는 자비심을 개발하고 향상시키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반면에 수행이 끝난 후에 주의와 경계를 갖춘 억념(憶念)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마음은 다시 이리저리 떠돌고 수행은 더디기만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수행의 허물입니다. 어떠한 행위를 하는 중에도 자신을 바르게 챙기는 것이 핵심입니다. 정진 중에 이것을 지속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 정진이 끝난 후에도 이 상태를 유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것이 바르고 좋은 기운의 흐름을 즐기는 방법입니다.


그와 같이 유정의 평등성에 차별이 없음을 보고서, 모든 유정이 나의 친척이었다고 전부 헤아려 [편견 없이] 중립적인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친인척과 같은 자비심이 평등하게 머물면, 그것이 시방(十方)의 모든 중생을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자비심에 대한 수행을 할 때, 앞에서 평등성을 개발할 때 했던 수행처럼, 구체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개인에 대해 집중할 수 있다면 아주 효과적일 것입니다. 초기단계에서는 열악한 세계인 악취(惡趣)에 태어난 중생들의 고통을 집중적으로 관상(觀想)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의도가 있고 행동이 있으며 결말이 있는 부정적인 행위를 좋아하는 이들을 향해서도 자비심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그들이 힘든 고통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미래에 받을 고통의 원인을 축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구절들을 잘 수행하면 윤회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 각각에 대해 자비심을 기르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존재의 참 모습에 대해 자기중심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무지로 인한 번뇌에 이끌려 다닙니다.


까말라실라께서는 모든 중생들이 똑같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측면과 궁극적인 측면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차원에 대한 중생들의 평등성은 세속적인 차원의 친구나 적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따라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의 보이지 않는 대상에 집중하여 수행하면 존재의 실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 생기는 집착과 증오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행태(行態)를 제어하고 훈련하는 데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의 절차를 따르고 긍정적인 공덕을 쌓아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고통 받는 중생들을 향한 일반적인 자비심은 강화할 수 있고, 더 맑고 순수한 상태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지금 느끼고 있는 우리의 자비심은 보통 집착과 함께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집착이 묻어있는 이 자비심은 나중에 완성할 진짜 자비심의 바탕이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힘들게 고통 받고 있는 낯선 사람들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자비심도 동시에 기를 수 있습니다. 즉, 타고난 자비심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강화하고 향상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선천적인 자비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비심이 지금 당장은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늘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제 그러한 자비심을 기르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지중지하는 막내아들의 고통에 안타까워하는 어머니처럼,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 그와 같은 자비심이 모든 유정에게 평등하게 머무를 때, 그것을 원만(圓滿)이라고 하며 대비심(大悲心)이라는 이름 역시 얻게 됩니다.


아이를 가진 사람은 보통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애정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이런 마음을 모든 중생에게로 향하게만 할 수 있다면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특별한 이유를 만들지 않고도 이런 마음이 저절로 생기기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훌륭한 자비심이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루고 싶은 깨달음이 무엇이건 간에 먼저 그러한 깨달음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원인과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언가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수행의 과정에 익숙해지고 경험이 생기면 다른 부차적인 것들이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또 분석과 관찰을 통하여 마음이 실제 움직일 수 있는 강한 느낌을 키워야 합니다. 이것을 실제 경험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의식적인 경험과 무의식적인 경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의식적인 경험이란 경전의 말씀에 의지한 미세한 이유를 사용한 결과 마음에 생긴 느낌을 말합니다. 분석과 관찰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으면 이러한 경험은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의식적인 경험을 키우고 나서 이것을 기르고 강화하는 수행을 계속해 나가면 어떤 특별한 이유나 근거를 들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강한 느낌이 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무의식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자비심을 이루게 되면, 그것이 바로 수승(殊勝)한 자비심이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다음 본문에서는 자애(慈愛)에 대한 수행의 과정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자애를 개발하는 방법은 뛰어난 자비심을 개발하는 방법과 유사합니다.

자비심은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자유롭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자애심(慈愛心)은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애심은 자비심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자비심은 그에 따른 특별한 태도를 유발합니다. 여기서 특별한 태도란 중생들을 어떻게 고통에서 해방시킬까하는 생각뿐만 아니라 실제로 중생들의 고통을 제거하도록 도와서 해탈의 경지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자발적인 책임 의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특별한 태도가 보리심을 유발합니다.


자애(慈愛)를 기르는 것은 친인척부터 먼저 해야 하며, [그들이] 평안(平安)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와 같은 마음이] 점차 일반인과 적들에게 향하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비심을 익히고 나면, 점차 일체 유정을 구경(究竟)으로 이끌고자 하는 스스로의 힘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렇게 근본적인 자비심을 익히고 나면, [이제] 보리심(菩提心)을 길러야 합니다.

보리심(菩提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세속(世俗:相對) 보리심과 승의(勝義:絶對) 보리심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속 보리심은 자비심으로 일체 유정을 구경에 이르게 하려는 서원(誓願)으로, 중생을 유익하게 하고자 했던 부처님의 본원(本願)을 기억하며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열망하는 마음을 처음 일으키는 것입니다. 더불어 『계율품(戒律品)』에서 설하신 의궤(儀軌:儀禮)에서와 같이 보살계(菩薩戒)에 안주(安住)하시는 스승님(傳戒師)께 [계(戒)를 받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방법은 자비심을 일으키는 방법과 유사합니다. 먼저 의식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보리심을 길러야 합니다. 그런 다음 뛰어난 보리심의 경지인 무의식적인 경험을 개발해야 합니다.


고 2

인도 출신의 위대한 스승인 싼띠데바(Śāntideva, 寂天)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맛보고 있는 모든 고통이 자신만의 행복을 바라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행복은 다른 중생들을 돌봄으로서 생기는 것입니다.

부처와 보통 사람의 차이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능력인 일체지를 성취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일체지를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오직 자신만의 편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 데도 항상 윤회 속에서 피곤해 합니다.

심지어는 열반(涅槃)을 성취하고서도 자기 희열에 빠져 있는 경우는, 여전히 일체지를 이루지 못한 채, 나 홀로 자유로운 독각(獨覺)의 경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정신적 편안함이나 친구와 친척들과의 화목함 그리고 방해받지 않는 삶 등도 역시 모두 다른 이들의 이익에 먼저 관심을 가진 결과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궁극적인 깨달음 역시 바로 이런 마음을 바탕으로 해야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부처님과 비교해 보면 우리의 수많은 허물과 부처님의 완전한 속성 그리고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허물과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시는 부처님의 관심 등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수행하셨기 때문에 부처님은 일체지를 성취하셨고 그 모든 완전한 속성을 두루 갖추신 겁니다. 반면에 자기중심적인 자세 때문에 우리는 허물을 안고 사는 중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먼저 다른 중생들의 이익에 관심을 갖는 마음을 계발하셨고 그런 다음 그것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완성하신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완전한 속성을 갖추신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좋은 조건의 인간 몸을 받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수행 중에서도 가장 심오한 수행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부처를 이루겠다는 이타적인 마음과 자비심입니다. 이 보다 나은 수행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여러 스승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일상의 자비심을 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서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바라는 마음이 자라난다면 믿음은 강력해지고 마음은 더욱 편안해 질 것입니다. 마음속에 이러한 편안함이 생기면 세상 모두가 우리에게 적의를 품고 다가오더라도 우리의 정신적 평화를 해치진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마음이 들뜨고 혼란스러워 다른 중생들에게 악의를 품는 다면, 다른 이들이 아무런 해로운 의도를 가지지 않고 다가오더라도 스스로 부담스러워 피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적 자세나 내적 느낌 또는 내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두려움과 걱정 그리고 갈등과 불안 속에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건강과 부유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의 장애가 계속 되는 한은 평화를 얻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마음의 자세는 일상의 모든 것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합니다. 마음을 잘 제어하고 평정하면 어떠한 적의에도 방해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고 나면, 사실 모든 환경은 정신적 평온을 위한 친구이며 협조자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잘 돌보아야 할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을 돌보야 하는지 또 자신의 관심을 어떻게 탐구해 나가야 할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남들의 이익에 무지한 채 그들을 괴롭히고 속여서 얻은 자신만의 행복을 구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은 행복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결과는 부정적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행복을 얻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종교적 정신적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삶을 바르게 이해하고 나면 평화와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단 한 순간도 다른 이들의 도움이나 협조 없이 혼자서 고립되어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농부나 사업가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에게 의지하여 사는 삶입니다. 가족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높은 산이나 깊은 골짜기에서 정신적인 수행을 하며 사는 수행자들의 삶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동물인 만큼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평화와 행복을 바란다면 남들의 이익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키워야 합니다. 야생의 새들이나 동물을 보십시오. 그들은 함께 움직이고 함께 둥지를 트는 등 서로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벌들의 예를 들어 보면 그들은 특정한 생존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서로에 의지하여 생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자연의 삶입니다.

우리가 지성을 갖춘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서로에 의지하여 살아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우리의 지성을 이용하여 남들의 이익을 착취하려고 애씁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만약 어떤 특정한 종교의 수행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특히 이러한 점을 잘 생각하여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서로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 속에 행복을 만들어 가는 원천입니다.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자신보다는 남들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과 남들의 이익에 대한 관심이 부딪힐 때는 다른 이들의 이익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스스로를 나머지 다른 중생들과 비교해보십시오. 자신은 혼자지만 다른 중생들은 셀 수없이 많습니다. 자신의 고통과 행복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개인에 한정된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모든 유정 중생들의 고통과 행복은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희생해 대다수를 위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입니다. 즉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행복의 원천입니다.


어떤 종교를 믿고 따르든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자비심을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평화롭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들 특히 대승의 수행자는 이러한 수행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하겠습니까?

대승의 수행자는 다른 사람을 도울 때도 지금 잠시의 이익을 위한 음식이나 의복 등의 도움에만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영원한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원하고 궁극적인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고통을 근본부터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자이든 아니든 최소한 고통을 제거하려는 정신적 의지를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완전히 소멸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마음에 강한 결심을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대승의 수행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나의 어머니와 같은 수많은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우리라.”

이것이 우리의 서원(誓願)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능력으로는 수많은 중생들은 놔두고라도 단 한명의 유정도 도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고통은 스스로 만들어온 구체적인 원인과 조건에서 생깁니다. 그래서 무엇이 영원한 행복이고 무엇이 고통을 부르는지 또 무엇을 수행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중생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즉 어느 길이 행복의 길이고 어느 길이 고통의 길인지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생들의 이익을 위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수행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에 대해 바르게 이해시키고 길을 제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많은 중생을 돕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다른 중생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가르침을 펴기 전에 먼저 스스로 그 길에 대한 의미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제자가 발전하면 할수록 스승은 더 깊은 의미를 가르쳐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중생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 그 길을 밟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냥 그 길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중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으며 지금 당장 필요한 것과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적인 바탕이 없는 가르침은 설명이 부족하여 관심을 끌지 못할 것입니다. 그냥 “나는 바른 동기로 이것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만약 바른 동기로 하고 있다면 참회할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중생들의 진정한 이익을 위한 것인지는 아무런 보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중생들에게 필요한 것과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다양한 범주의 능력 즉 신통력(神通力)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른 중생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길과 가르침에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중생들에게 설명할 가르침이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생들에게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그들의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갖추신 일체지를 이루지 못한다면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만 이끌어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른 중생들을 도우려는 마음을 개발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을 위해 부처가 되려는 서원을 세우는 원인이 됩니다. 이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보리심에는 세속적인 것과 궁극적인 것의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보리심은 단 몇 달 만에 기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언제나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보리심을 개발하기 위한 수행을 계속하면 어느 순간 그것을 맛 볼 때가옵니다.

예를 들어, 초기 단계에서는 보리심이라는 말조차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런 마음을 일으켜야 하는지 잘 모르고 헤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 익숙해지면, 점차로 그런 마음에 가까워져 갈 수 있습니다. 조건에 의해서 생긴 사물의 특징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변합니다. 따라서 보리심에 대한 이익을 기억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강한 결심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잠들거나 앉아 있거나 걸을 때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나에게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원(誓願)의 차원에서 보리심을 기르십시오. 이러한 수행을 매일 반복적으로 지속하면 분명히 발전합니다. 수많은 생을 보내야 하더라도 결심을 확고히 하십시오. 샨띠데바는 『입보리행론』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허공계(虛空界)와

중생계(衆生界)가 다 할 때까지

모든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내 여기에 머물게 하소서.


다른 중생들을 돕는 일이나 계획에 관련하여 시간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끝까지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며칠이나 몇 달 안에 보리심을 이루려고 하거나 깨달음을 단번에 이루기 위해 3년 3개월의 정진에 들어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3년 3개월의 수행 전통은 우리의 고유한 수행 전통이고 이를 통해 많은 수행자들이 공부의 이익을 얻어 왔습니다. 하지만 3년 3개월의 정진을 완성하면 단번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제안을 들을 때면, 나는 가끔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이상향과 같다.”라고 농담 삼아 말하고는 합니다.

또, 가끔씩 서양의 친구들이 가장 심오하고 빠른 길을 수행할 수 없느냐고 물을 때면, 나는 그런 수행을 기대하거나 쉬운 결과를 바라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심오하고 넓은 수행을 가장 빨리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일대기를 보십시오. 부처님은 세 번의 무수한 겁(劫)을 보낸 다음에야 부처를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3년 3개월 같은 짧은 시간 안에 부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실제의 모든 과정을 다 거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불완전한 지식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부처를 이루었든 아니든 목적은 다른 중생들을 돕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상계에 있든 지옥 중생으로 있든 목적은 다른 중생을 돕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오직 수행의 목적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부처를 이루겠다는 이타적인 의도에서 나온 결심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이해하고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한번 이런 마음을 추론적인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나면, 이제 보살계(菩薩戒)를 받아야 합니다. 즉 보살의 삶과 행동에 대한 강력한 염원이 일어나면 그때 보살계를 받는 것입니다.


보살의 삶의 방식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연히 보리심을 개발하고 수행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일체지(一切智)는 오직 마음 안에 있는 번뇌 망상을 모두 정화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소망과 기도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번뇌 망상들은 그에 맞는 대응 방법을 적절하고 구체적으로 사용해야 하나씩 제거할 수 있습니다.

보살의 행위는 방편과 지혜의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시(布施)·지계(持戒) 등의 방편 수행을 완성하는 것은 지혜 수행의 뒷받침과 영향이 있어야 합니다.

지혜를 수행하지 않고는 육바라밀(六婆羅蜜) 중에 앞의 다섯 가지 즉,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을 실제로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도(中道)나 중관(中觀)으로 알려진 고도의 철학적 견해를 바르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중관(中觀)의 견해란 무엇입니까? 불교에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학파(*역주: 일반적으로 인도·티벳 불교 전통에서는 불교의 교학적 발달을 크게 네 학파로 구분한다. 이들은 각기 유부(有部, ꇄ Vaibhāṣika, ꇅ Bye brag smra ba), 경부(經部, ꇄ Sautrāntika, ꇅ mDo sde pa), 유식(唯識, ꇄ Cittamātra, ꇅ Sem tsam), 중관(中觀, ꇄ Mādhyamika, ꇅ dBu ma) 학파들이다. 또, 중관학파는 자립논증(自立論證, ꇄSvātantrika, ꇅRang rgyud pa)과 귀류논증(歸謬論證, ꇄ prasaṅgika, ꇅ Thal 'gyur ba) 학파로 세분할 수 있다. 이 학파들은 원칙적으로 모두 불교의 무아(無我)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귀류논증학파를 제외한 나머지 학파들은, 거칠고 미세한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어느 정도 실유(實有)론적 경향을 보인다. 여기서 이 학파들의 차이가 나타난다. 하지만 좀더 거친 수준의 실유론적 견해에 바탕을 둔 학적 견해는 좀더 미세한 차원을 이해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학파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의 독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가 있습니다. 앞의 세 가지 학파를 공부함으로서 좀더 거친 수준의 무아(無我)에 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 결국 연기법(緣起法)을 바탕으로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의 바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중도(中道)의 철학으로 옮겨 갑니다. 그렇게 바른 견해를 오류 없이 세우고 그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 공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성을 깨달은 지혜만으로는 무지를 제거할 수 있는 힘 있는 대응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즉,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의 방편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무아(無我)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만으로는 번뇌를 제압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고3

그러므로 지(止, Śamatha)를 바탕으로 한 관(觀, Vipaśyanā)을 하나로 합일(合一)하는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를 개발해야 합니다. 지는 한 곳에 집중하는 수행입니다. 반면에 관은 분석적인 인식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로 수행할 수 있을 때 지혜와 방편의 결과적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보리심을 일으키고 나서, 승의(勝義) 보리심을 일으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승의 보리심이란 출세간(出世間)의 희론(戱論)을 모두 떠난 극히 명확한 절대적 경계(境界)로서, 티 없고(無垢) 흔들림이 없으며(不動), 바람 없는 등불의 흐름과 같이 움직임이 없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세속적인 보리심은 기대치 또는 목표치를 가진 보리심입니다. 승의(勝義) 보리심이란 무엇입니까? 세간(世間)은 무엇이고, 출세간(出世間)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존재들의 모든 구체적인 차원을 세간(世間)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존재들의 모든 정신적 차원을 출세간(出世間)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의 길을 처음 보는 견도(見道)를 성취하고 나면 비로소 출세간(出世間)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이전에 공성을 단순히 이해하던 수준에서, 견도(見道)에 들어감에 따라 공성에 대한 직접적인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이 『수행차제』는 요가행(瑜伽行) 자립논증(自立論證)(*역주: 앞의 주에서 말한 것처럼, 중관(中觀, ꇄ Mādhyamika, ꇅ dBu ma) 학파는 자립논증(自立論證, ꇄSvātantrika, ꇅRang rgyud pa)과 귀류논증(歸謬論證, ꇄ prasaṅgika, ꇅ Thal 'gyur ba) 학파로 세분할 수 있다. 먼저, 자림논증 중관학파는 용수(龍樹) 보살의 중관사상을 직접적인 논증 방식을 통해 입증한 학파이다. 자립논증 학파에 속한 대표적인 학자는 청변(淸辨, ꇄ Bhāvaviveka)이 있다. 귀류논증 학파는 이러한 자립논증 학파를 비판하고, 모든 주관과 객간의 존재론적인 사고를 부정하는 논리를 전개한다. 불호(佛護, ꇄ Buddhapālita)와 월칭(月稱, ꇄ Candrakīrti)이 가 그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중관학파가 두 가지 견해로 나뉘게 된 실질적인 원인은 이들의 치열한 논쟁의 결과 때문이다. 티벳 불교의 대표적인 종학사(宗學史)인 『Thu'u bkvan grub mtha'(宗敎源流史)』kun su‘u mi rigs dpe skrun khang, 감숙성 민족출판사, 1984년본과 영문본, Practice and Theory of Tibetan Buddhism, B.I Publications, Delhi, 1976년판 참조.) 중관학파에 속합니다. 따라서 이 논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할 때는 자립논증 중관학파의 체계를 따라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귀류논증(歸謬論證) 중관학파의 입장을 통해 더 정교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수행자들 중에는 성문(聲聞) 연각(緣覺)처럼 공성을 깨달은 성인(聖人, Ārya)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살의 길에 들어선 성인(聖人)은 방편의 심오한 수행을 뒷받침으로 해서 공성을 직접적으로 깨우칩니다. 공성을 직접 깨우친 지혜는 구체적인 번뇌 망상에 구체적인 대응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실질적인 바른 길인 사성제(四聖諦)는 성스러운 존재 즉 성인들의 정신적인 흐름에서 볼 수 있는 공성을 깨우친 지혜를 말합니다. 궁극적인 보리심은 공성의 다양한 양식(*역주: 여기서 나누고 있는 16공성(十六空性: 초기에 공성을 열여섯 가지로 분류하던 방식), 20공성(二十空性: 후기에 공성을 이십 가지로 분류하던 방식), 2공성(二空性: 眞諦와 俗諦의 두 가지 공성) 등은 공성(空性)을 나누는 구체적 양식들이다. 이렇게 공성을 구체적으로 나누고, 그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일반적인 경전에서 인용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서 역사적인 전개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데, 그 결과 좀더 자세하게 첨가된 양식을 후기로 보는 것이다. (김성철 역, 『불교의 중심철학』, 서울 경서원 1995년판의 부록참조,) 또, 상징의 해석을 통한 방식도 있다. 특히 티벳 불교의 무상요가(無上瑜伽, ꇄ Annuttarayogatantra)에서 볼 수 있는 분노존(忿怒尊)의 상징적 의미에서 보면, 야만따까(Yamantaka, 忿怒明王)의 열여섯 개의 손 등은 16공성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이 분노존의 형성시기와 철학적 시대 배경을 암시하는 증거이기도 하다.)인 16공성(十六空性), 20공성(二十空性), 2공성(二空性) 등을 자유롭게 다 아는 상태를 말합니다.


나타난 현상의 유형들이 다양한 것처럼, 공성에 대한 이렇게 다양한 범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하나의 현상에 대한 공성을 깨우치면 모든 현상에 대한 공성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모든 현상의 궁극적 본성인 공성은 한 가지 맛으로 분리할 수 없는 똑같은 성품입니다. 모든 현상의 본성은 공성으로 똑같은 것입니다.

즉 모든 현상이 선과 악이나 변화하는 모습 등 구체적으로 다르게 나타나 보인다 해도 그들은 모두 공성에서 생긴 것입니다. 공성은 주체와 객체 또는 주관과 객관을 따로 나누는 이원(二元)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공성은 대상에서 자유로운 본래의 상태를 말합니다. 사물은 원인과 조건들에 의존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물이 본래의 성품이 없이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다양한 현상들이 결국은 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공성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나타난 현상의 서로 다른 모습이 아니라 현상의 궁극적인 실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용수(龍樹)보살의 『중론(中論)』 귀경게(歸敬偈)에서 분명히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공성은 모든 희론(戱論) 또는 궤변에서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모든 현상은] 연기(緣起)로 생겨난다.

나지도 않고(不生) 멸하지도 않으며(不滅),

영원하지도 않고(不常) 끊어지지도 않으며(不斷),

오지도 않고(不來) 가지도 않으며(不去),

같지도 않고(不一) 다르지도 않으니(不異),

[세상의 모든] 희론(戱論)을 가라앉히는 법을 보여주신,

원만하신 부처님 말씀의 수승함에

배례(拜禮)올립니다.


(*역주: 위의 번역은 티벳어에서 직접 옮긴 것이다. 티벳에서는 이 『중론(中論)』의 귀경게(歸敬偈) 부분을 『반야심경』과 함께 일상 의식에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중론(中論)』 귀경게(歸敬偈)에 대한 김성철 역본(서울 경서원, 1993년본)을 보면, 범어는 “소멸하지도 낳고 생겨나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 동일한 의미도 아니고 다른 의미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緣起), 희론이 寂滅하며 祥瑞로운 緣起를 가르쳐 주신 正覺者, 설법자들 중에서 제일인 그분께 예배합니다.”(anirodham anutpādam anucchedam aśāśvatam/ anekārtham anānārtham anāgamamanirgamam// yaḥ pratīyasamutpādaṁ prapañcopaśamaṁ śivam/ deśayāmāsa saṁbuddhastaṁ vande vadatāṁ varam//)라고 푸로 있으며, 한역(漢譯)은 "[새롭게] 생겨나지도 않고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으며, 한상 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어디선가]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나가는 것도 아니다. 능히 이런 인연법을 말씀하시어 온갖 희론을 잘 鎭滅시키도다. 내가 [이제]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하오니 모든 설법 가운데 제일이로다.“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來亦不出 不一亦不異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라고 풀고 있다.)


공성(空性)과 연기법(緣起法)은 동전의 양면(兩面)과 같습니다.

연기법(緣起法) 즉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물은 생겨나거나 소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용한 『중론』에서 의미하는 것은 공성의 관점으로, 모든 사물은 나지도 않고(不生) 멸하지도 않으며(不滅), 다르지도 않고(不異) 한 가지도 아니(不一)라는 말입니다.

시간이란 개념에서 보면 끊어짐도 없고(不斷) 영원하지도 않습니다(不常). 또, 사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독립적으로 따로 떨어져서 오는 것도 없으며(不來) 가는 것도 없습니다(不去). 용수(龍樹)보살은 독립적으로는 생겨나지고 않고 멸하지도 않는 여덟 가지 범주의 희론(戱論)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인식의 지혜를 가진 오염되지 않은 성인들은 서로 의지해서 생겨나는 현상을 독립적으로 생겨나고 소멸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모든 희론(戱論)을 떠나 궁극적인 진리인 공성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승의(勝義) 보리심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은 “승의(勝義)”라고 말할 수 있는 궁극적인 지혜와 관련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무결(無缺)하고 부동(不動)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정(禪定)에 든 성인(聖人)들의 지혜는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이 조화를 이룬 지혜입니다. 이러한 조화는 먼저 지를 개발함으로서 이루어집니다.

한번 관찰의 대상에 대한 안정성을 확보하고 나면,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인해 일어나는 정신적 들뜸에 방해받지 않고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때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등불과 같은 부동(不動)의 지혜가 생깁니다.


이 궁극적인 보리심은 본래부터 모든 희론에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다음 구절들에서는 이것을 성취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이루려면 언제나 소중하게 긴 세월을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의 요가(yoga, 瑜伽: 修行)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즉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미륵(彌勒)이여, 모든 성문(聲聞)·보살(菩薩)·여래(如來)들의 선법(善法)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 모두가 지(止)와 관(觀)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 두 가지(止觀)는 모든 삼매(三昧)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요가 수행자는 언제나 확실하게 지(止)와 관(觀)에 의지해야 합니다. 즉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것처럼, “내가 성문(聲聞) 보살(菩薩) 여래(如來)에게 가르친 다양한 유형의 삼매(三昧)는 무엇이든 그들 모두가 지(止)와 관(觀)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지(止, Śamatha)는 정신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수행의 대상 이외에 다른 외부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상태로, 자기가 원하는 대상에 마음을 머물게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대상에 집중하는 마음은 안정적이며, 산란(散亂)과 도거(掉擧)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정신적인 지복감(至福感)을 맛 볼 수 있습니다. 관(觀, Vipaśyanā)은 마음이 집중하고 있는 대상의 궁극적인 실제에 대한 직관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관(觀, Vipaśyanā)에는 세간(世間)적인 것과 출세간(出世間)적인 것의 두 가지 범주가 있습니다. 관의 대상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기본적으로 관은 공성에 집중하고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지와 관의 두 가지 수행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이 두 가지만이 모든 수준의 선정을 이룰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지와 관을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고, 두 가지를 다 함께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止) 하나에만 익숙해져서는 요가 수행자들의 장애를 끊기가 어려우며, 잠시 번뇌 망상(煩惱妄想)을 억누를 수 있을 뿐입니다. 즉, 지혜의 빛을 비추지 못하면 수면번뇌(睡眠煩惱)를 모두 제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수면번뇌(睡眠煩惱)를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선정(禪定)은 번뇌 망상을 가라앉히고, 지혜(智慧)는 수면번뇌(睡眠煩惱)를 완전히 소멸케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지(止, Śamatha)만을 수행해서는 번뇌 망상과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를 모두 제거할 수 없습니다. 공성과 관련한 지를 성취했다 하더라도 관(觀, Vipaśyanā)의 뒷받침이 없이는 장애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성삼매왕경(聖三昧王經)』에서도,


“삼매(三昧)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생각(想)은 멈추지 않고

번뇌로 너무나 산란(散亂)하여

우닥(Udrak)이 정(定)에 든 것 같아라.”


지(止, Śamatha)만으로는 자아에 대한 오해를 깨뜨리지 못하며, 번뇌 망상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잠시 고요함을 맛 볼 수는 있겠지만, 지만으로는 번뇌 망상이 다시 일어나고 맙니다.

그것은 마치 외도(外道)의 스승이었던 우닥(Udrak)의 경우와 같습니다. 우닥(Udrak)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지를 수행하는데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의 상태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능력을 키웠습니다. 어느 날 그가 깊은 선정에 들어있을 때 쥐 한마리가 그의 머리카락을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에 그가 선정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쥐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갉아먹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우닥(Udrak)은 갑자기 정신을 잃고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번뇌 망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선정에 들어 있을 때 가라앉아 있던 번뇌 망상이 선정에서 깨어나자마자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지만을 수행했을 때 생기는 모순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법무아(法無我)를 세세히 살피고

각각을 분별(分別)하여 수행하면,

그것이 열반의 결과를 위한 원인,

다른 인(因)이 무엇이든 그것으로는 [번뇌를] 멸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관(觀, Vipaśyanā)이나 분력의 지혜로 법무아(法無我)를 구체적으로 점검해야만 해탈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해탈이나 열반을 위한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보살장(菩薩藏)』에서도, “몇몇은 가르침(法)을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고, [또] 몇몇은 성스러운 율경(律經)의 [내용을] 듣지 못했으면서, 삼매(三昧) 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만심(自慢心)때문에 증상만(增上慢: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자만)에 떨어지며, 생(生)·노(老)·병(病)·사(死) 비통(悲痛)·탄식(歎息)·고통(苦痛)·불안(不安)·산란(散亂)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며 고통이 쌓이는 것(苦蘊)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나니, 그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른 것에 완전히 부합(符合:契合)하는 것(菩薩道)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 것이 노(老)·사(死)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설하셨습니다.


따라서 진여(眞如)나 자성(自性)에 대한 설명을 잘 듣고 그에 대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고통에서 해방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장애를 제거하고 완전한 청정지혜(淸淨智慧)를 이루려고 한다면 지(止)에 안주(安住)하여 지혜를 수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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