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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6. 수행차제.삼종요도

8. 곰림 바르빠

===== 아래는 실제 수행 방법 및 과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


1. 이에 요가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는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든 모두 완전히 구족(具足)해야 하는데, 변(便)을 보고 나서, 번잡한 소리가 없어 마음에 흡족한 곳을 찾아, “내 모든 유정을 깨달음의 정수(精髓:心要)에 이르게 하리라.”라고 생각하며, 일제 중생을 구경에 이르게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비심(大悲心)을 시현(示現)하여 시방(十方)에 머무시는 불보살님들께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한 다음,


2. 자기 눈앞의 허공중에 관상(觀想)으로 불보살을 모시고 가피를 청하는 기도를 올립니다.

이것은 보통 현교(顯敎)에서도 하는 수행입니다.

밀교(密敎)에서는 먼저 서언존(誓言尊) (*역주: 서언존(誓言尊, ꇄ Samayasattva, ꇅ Dam tshig sem dpa')은 밀교의 수행에 있어사 자기 자신을 본존으로 관상하여 생기한 본존을 말한다. 주로 생기차제(生起次第, ꇄ Utpattakrama ꇅ bsKyed rim) 수행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을 일으키고 그 다음 지혜존(智慧尊)(*역주: 지혜존(智慧尊, ꇄ Jñānasattva, ꇅ Ye shes sem dpa')은 밀교 수행에서 실제로 관상하는 대상을 말한다.)과 합일하는 방식으로 스승을 청합니다(請師).

은 몸의 다섯 군데 즉 이마와 두 손바닥과 두 무릎이 땅에 닿도록 하는 것이 전통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쁨으로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흉내만 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신(身)·구(口)·의(意)를 대표하는 상징물들을 단(壇) 위에 배치합니다. 아니면 허공중에 그대로 관상을 하여도 좋습니다. 공양(供養)은 하던 방식대로 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가진 것이 넉넉하다면 풍족하게 올려도 무방합니다. 불상이나 다른 것들이 없으면 억지로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정하게 유통되는 탱화(幀畵) 등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바르고 적절하게 준비하면 됩니다.


산 중에서 홀로 정진하는 수행자도 굳이 너무 많은 불상이나 장식을 소유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둑들의 호기심만 자극할 뿐입니다. 옛날에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위대한 성자 밀라레빠(Milarepa)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밀라레빠께서 동굴에 사실 때, 어느 날 밤 무언가 훔칠 거리를 찾아 도둑이 들었습니다. 이를 본 밀라레빠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내 눈에는 벌건 대낮에도 아무것이 보이지 않는데, 이 야심한 밤에 무엇을 찾는단 말인가?” 이와 같이 정신적 발전을 찾아 내면을 탐구하는 것 이외에, 밖에서 찾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종교적인 수행을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화려하고 값비싼 단(壇)을 차리는 데만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애써 차린 불단(佛壇)은 아무 의미 없이 집안의 화려함만을 장식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적절하게 단(壇)을 꾸미려면, 먼저 불법을 처음 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상(佛像)을 모십니다. 또 가르침을 상징하는 경전들 즉 지혜를 상징하는 『반야경(般若經)』이나 보살의 삶을 상징하는 『화엄경(華嚴經)』 등을 모실 수 있습니다. 또 부처님의 마음을 상징하기 위하여 그에 맞는 경전을 모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구할 수 없어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으면 적절히 모시는 것이 좋습니다.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상이나 탱화를 모시고 주변에 수행의 본존(本尊)들과 부처님의 팔대제자 등을 모십니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불상들을 모실 때 물리적인 값어치를 따라 모신다면, 그냥 귀중품을 소유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목적과 의미를 잘 이해하고 순서에 맞게 단(壇)을 꾸며야 합니다. 성스러운 불단(佛壇)에 절을 하고 공양을 올리십시오. 공양은 항상 “청정한 것”을 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청정하지 않은 것”을 올리면 부정적인 업을 짓게 됩니다. 여기서 “청정하지 않은 것”이란 사기나 거짓말 등으로 얻은 물건을 말합니다. 이것은 특히 재가 수행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경전이나 불상 또는 부처님의 사진을 개인의 이익이나 사업적인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아주 부정적인 업을 짓고 있는 겁니다. 반면에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 위해 경전을 보시하고 책을 출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때도 순수한 목적을 가진 이들의 도움으로 함께 선한 행위를 쌓아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만큼 “청정한 것”을 가려서 공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티벳에는 청수(淸水) 즉 맑은 물이나 버터 등(燈)을 공양 올리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 역시 바르게 존경심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헌공의식(獻供儀式)을 수행할 때는 칠지작법(七支作法) (*역주: 칠지작법(七支作法, ꇄ Saptāṅga pūja, ꇅ Yan Lag bDun)은 티벳 불교의 가장 일반적인 기도 수행 방법으로, 정례지(頂禮支) 공양지(供養支) 참회지(懺悔支) 수희지(隨喜支) 권청법지(勸請法支) 소청주세지(所請住世支) 회향지(回向支)의 구조로 되어 있다. 각각의 지(支)는 간단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① 정례지(頂禮支): 법계(法系)의 스승들께 절을 올리며 예경(禮經) ② 공양지(供養支): 향·꽃·등불·산개(傘蓋) 등을 공양 올림 ③ 참회지(懺悔支): 신·구·의 삼업으로 지은 탐·진·치 삼독에 대한 참회 ④ 수희지(隨喜支): 시방에 계신 스승의 공덕에 수희 동참 ⑤ 권청법지(勸請法支):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 법을 청함 ⑥ 소청주세지(所請住世支): 항상 중생과 같이하기를 바람 ⑦ 회향지(回向支): 이 수행 기도 공덕으로 쌓은 복덕을 중생에게 회향. 이 칠지작법은 의례의 내용과 수행의 방법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모두 같다. 졸고, 『가톨릭과 티벳불교의 의례비교』(계간 『불교평론』, 통권 13호의 논단 부분) 참조.)을 따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주 심오한 깨달음을 얻으신 분들도 공덕을 쌓기 위해 이러한 수행을 계속합니다.


불보살의 존상(尊像)이나 탱화(幀畵) 등을 앞에다 모시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하며, 그들에게 정성껏 헌공(獻供) 찬탄(讚歎)하고 나서, 자신의 허물을 참회(懺悔)한 다음, 일체 중생의 공덕을 따라서 향수(享受)해야 하며,


수행자는 먼저 칠지작법(七支作法)을 행해야 합니다.


- 아주 편안하게 앉아서 주존(主尊) 비로자나(毘盧遮那)의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 눈은 너무 크게 뜨지도 감지도 말며 코끝을 향해 두고,

- 몸은 너무 앞으로 기울거나 뒤로 기울지 않게 똑바로 세우며,

- 생각은 안으로 돌려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어깨는 같은 높이에 두고, 머리는 젖혀지지도 않고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게 하며,

코에서 배꼽까지 일직선이 되게 합니다.

이(齒)와 입술도 자연스럽게 합니다. 혀도 윗니 부분에 닿게 합니다.

호흡의 들고 남(氣息出入)도, 소리가 나거나 너무 세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고,

어떤 것에도 끌리지 않게 천천히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숨을 들이 쉬고 내 쉬어야 합니다.


수행자는 호흡을 제어하는데 아주 주의해야 합니다. 너무 거칠고 소리가 나는 호흡은 해롭습니다.

부드럽고 깊게 호흡하십시오. “천천히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숨을 들이 쉬고 내 쉬어야 합니다.”

8. 지(止, Samatha)


이에 먼저 지(止)를 성취해야 하는데, 외부 경계(境界:對象)에 산란(散亂)함을 가라앉히고 나서 내적인 대상(所緣)에 [집중하여] 지속적으로 자기 본성(本性)에 머무르며, [몸과 마음이] 경안(輕安: 맑고 가벼움) 상태에 안주(安住)하는 것을 지(止)라고 합니다.


적절한 예비수행을 마친 다음에,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으로 이루어져 있는 실제 수행에 들어 가야합니다.

지를 수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지는 외적인 대상에 대한 이끌림이 없는 고요함을 이룬 결과로,

수행의 대상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더불어 지는 정신적인 침몰(沈沒)이나 도거(掉擧)에 빠지지 않고 몸과 마음의 허물을 점점 제거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경안(輕安)”은 수행자의 몸과 마음의 속성이 향상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수행의 과정에서 보면, 정신적 경안이 먼저 찾아오고 그 다음에 몸의 경안이 찾아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정신적 경안이 생긴 뒤에 몸의 경안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지복감이 생기는 것을 지(止, Śamatha)의 수행이라고 합니다.


관(觀, Vipaśyanā)은 무엇을 말합니까?

지(止)의 본성을 볼 수 있을 때, 그 자체를 분별하는 것이 관(觀)입니다.

『불설제개장보살소문경(佛說除蓋障菩薩所問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지(止)는 한 곳에 집중(一處(点)集中)하는 마음의 성품이며, 관(觀)은 바르게 각각의 것을 분석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지(止, Śamatha)의 수행능력을 개발하고 나서도 수행자가 그 대상 한 곳에 마음을 둘 수 없다면 그 대상을 분석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집중하는 수행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절대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지만, 세속적인 현상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닙니다.

대상을 분석하면서 생기는 정신적·육체적 지복감의 상태가 관(觀, Vipaśyanā)입니다.

그런 다음,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을 하나로 합일해야 합니다.


지와 관은 집중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진리나 궁극적인 진리 할 것 없이 모두 집중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진리에 집중하는 지의 수행도 있고 세속적인 진리에 집중하는 관의 수행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을 공성에 두고 집중해 들어가는 지(止, Śamatha)의 수행이 있습니다. 또, 수행의 길에서 나타나는 거칠고 미세한 세속적 현상을 분석해 나가는 관(觀, Vipaśyanā)의 수행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수행의 일반적인 차이를 보면,

지(止, Śamatha)는 집중하는 것이고, 관(觀, Vipaśyanā)은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교(顯敎)의 바라밀승(婆羅蜜乘)과 세 가지 하급 밀교(密法, Tantra)의 관점입니다. 무상요가(無上瑜伽)에 따르면, 관(觀, Vipaśyanā)이 집중하는 수행입니다. 이 단계는 집중의 힘을 완전히 관(觀, Vipaśyanā)에다 두는 독특한 이해 방식입니다. 반면에 까규(Kagyu)의 마하무드라(Mahamudra, 大印)와 닝마(Nyingma)의 족첸(Dzogchen, 大圓滿) 수행에서는 관(觀, Vipaśyanā)을 단지 분석적인 수행으로만 생각합니다.

(*역주: 여기서 말하고 있는 닝마(rNying-ma), 까규(bKa' brgyud)는 티벳 불교의 사대 종파에 속하는 종파의 이름이며, 족젠(Dzog chen), 마하무드라(Mahāmudrā,, ꇅ Phyag rgya chen po) 등은 그 종파들의 무상요가 수행 방법을 말한다. 또 세 가지 하급 밀교란 무상요가(無上瑜伽, ꇄ Anuttarayogatantra)를 제외한 행(行, ꇄ Kriya), 작(作, ꇄ Carya), 요가(瑜伽, ꇄ Yoga)의 단계적 밀교 수행 방법들을 말한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야 지(止)를 완전히 탐구(探究)할 수 있으며, 관(觀)에 능숙한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답하시기를, ‘미륵이여, 나의 법(法)을 상대적으로 구별하면 다음과 같다. 계경(契經:經, Sutta)·응송(應頌:重頌, Geyya)·기별(記別:記答, Veyyākaraṇa) 풍송(諷誦:偈, Gāthā)·자설(自說:感興偈, Udāna)·인연(因緣,Nidāna)·비유(譬喩, Avadāna)·본사(本事:如是語, Itivuttaka)·본생(本生, Jātaka)·방광(方廣, Vedalla)·희법(希法:未曾有法, Abbhutadhamma)·논의(論議, Upadeśa) 등을 보살들에게 설하노니, 보살은 이것들을 잘 듣고 잘 지니며, 경문(經文)을 염송(念誦)해야 하고, 마음으로 잘 구분하며, 본 것을 잘 이해하고 나서, 홀로 고요한 곳에 바르게 머물며, 이와 같이 잘 사유한 법의 내용을 마음에 새기고, 어떤 마음이 생각을 만드는 마음인가에 대해 내면에서 끊임없이 억념(憶念)해야 한다.”


지(止, Śamatha)에 머무르면서 가르침의 핵심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위의 구절에서 열두 가지 범주로 나누고 있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신적 물리적 온(蘊:모임)이나 대(大:요소) 그리고 입(入:감각 대상과 감각 기관) 등에 대한 심오하고 폭 넓은 주제들을 담고 있습니다.

지(止, Śamatha)를 수행할 때는 개인적인 견해로 희론(戱論)에 빠지지 말고, 무상(無常)이든 공성이든 그 본래의 성품에 있는 그대로 집중해야 합니다.

반면에 관(觀, Vipaśyanā)의 수행은 분석적입니다. 즉, 정신적이거나 물리적인 온(蘊)과 대(大) 그리고 입(入) 등과 같은 수행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기원(起源)이나 정의(定義), 그리고 다른 특징들에 대해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안주(安住)하고 이것을 수없이 반복 적용하면, 이에 몸의 경안(輕安)과 마음의 경안(輕安)을 성취할 수 있으며, 이것을 지(止)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보살은 지(止)를 완전히 탐구할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는 수행의 과정에서 먼저 경안(輕安)을 성취해야 합니다.

경안(輕安)은 무겁던 머리의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 마음의 얼룩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안을 이루고 나서 몸의 경안을 성취합니다. 이것은 탁한 몸과는 정반대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해서 몸의 지복감이 생기고 거기서 마음의 지복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는 몸의 경안(輕安)과 마음의 경안(輕安)을 성취하고 나서, 그 자체에 안주(安住)하여 마음의 산란(散亂)을 가라앉힌 다음, 이와 같이 생각으로 만든 현상(法)은 그 자체가 내적인 삼매의 행위경계(境界:對象)로서 영상(影像)과 같은 것이니, [이들] 각각을 분석하여 신해(信解)해야 한다.

이처럼 삼매의 행위경계(境界:對象)인 영상(影像)들이 인식의 대상(境界)임을 판별하여 철저히 구분하고, 완전히 분석하며, [이들을] 모두 분별하기 위해 인내(忍耐)와 기쁨으로 통찰(通察)하여 이해하는 것을 관(觀)이라고 하며, 이렇게 해서 보살은 관(觀)에 능숙해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정적인 동기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행자는 수행의 과정 속에서 이러한 긍정적인 자세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나는 허공처럼 무한한 유정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위대하신 까말라실라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성실히 들으리라.”라고 생각합니다.

희유하고 고귀한 이 인간의 몸을 받은 이유를 깨닫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합니다.

이 몸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순간적이거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유롭고 복 받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 생은 너무나 좋은 기회입니다.

최선을 다해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합니다.

더불어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려면, 그 근본 바탕인 이타적인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즉 자비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또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이 합일된 수행을 하면서 더불어 보시 같은 다른 공덕을 함께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일반적인 윤회의 고통과 특정한 윤회의 세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참을 수 없는 윤회의 고통에 대한 속성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윤회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지 저절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을 필요합니까?

이러한 질문을 정직하게 하나씩 점검해나가다 보면 고통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의 근본 원인은 업과 번뇌에서 생긴 정신적 장애입니다.

가끔은 잠시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가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들을 제거하고 고요함을 이루면, 사성제에서 멸제(滅諦)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에서 자유롭기를 바라는 출리심(出離心)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불어 다른 중생들도 역시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면, 그때 자비심을 수행하는 본격적인 과정을 밟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먼저 수행자는 일반적인 수행의 과정을 밟아야 하며, 점점 더 높은 수준의 길을 밟아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정신적인 수행의 이력을 쌓아나가는 바른 과정입니다.


예비수행을 하고 난 다음에는 두 가지의 보리심을 수행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보리심을 일으키고 육바라밀(六婆羅蜜) 수행 등을 통해 보살행(菩薩行)을 해나가야 합니다.

궁극적인 보리심에 대한 수행은 공성을 직접적으로 깨닫는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를 일으켜야 가능합니다. 이러한 지혜는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이 합일된 선정(禪定) 상태에서 생깁니다.

이것은 공성에 대한 본래의 성품을 보면서 삼매에 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먼저 수행자는 지(止, Śamatha)를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준비해야 합니다.

따라서 요가 수행자가 지(止)를 실제로 성취하고자 한다면, 먼저 계경(契經)과 응송(應頌) 등의 십이분교(十二分敎) 모두가 진여(眞如)로 인도(引導)하고 있고 진여로 이끌어 왔으며 진여로 이끌어 갈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으로, 그곳에 마음을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 분석의 마지막 단계에서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모두 진여(眞如)와 관련이 있습니다.


무상(無常)이나 고(苦) 등을 분명하게 다루고 있는 경전들도 궁극적으로는 진여(眞如)를 다루고 있습니다.

비록 주체와 객체의 불이성(不二性)과 같은 거친 수준의 무아(無我)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들을 모두 부처님께서 두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 보여주셨던 미세한 공성의 경지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형태로 어떤 형태의 현상(諸法)도 포괄할 수 있는 대상(蘊) 등에 마음을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 한 가지 형태라 함은, 보고 들은 바와 같이 부처님의 존상(尊像)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즉 『성삼매왕경(聖三昧王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황금의 꽃과 같은 옥체(玉體)이신

세간(世間) 보호자 [관세음]의 완전한 아름다움,

그 대상(所緣)에 마음을 두고 있는

보살을 정(定, Samāhita)에 들었다 하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지(止, Śamatha)를 수행하는 대상은 다양합니다.

밀교(密敎)에서는 독특하게 수행본존(修行本尊)이나 종자음(種字音) 등을 지(止, Śamatha)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현교(顯敎)의 체계에서는 주로 부처님 모습 그대로를 그 대상으로 합니다. 선정(禪定, Dhyāna)은 불교나 비불교도(非佛敎道)할 것 없이 일반적으로 하는 수행입니다.

따라서 불교도들은 부처님의 모습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을 기억하고 복덕을 쌓으면 많은 이익을 거둘 것입니다. 소중한 보석의 옥좌(玉座)에 앉아계시는 부처님을 관상하십시오. 눈앞의 허공에 우리 몸과 같은 크기로 이마 정도의 높이에다 관상해야 합니다. 그 모습은 구체적이고 빛을 내고 있어야 합니다.


좀 더 지적인 수행자들은 먼저 바른 견해를 찾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공성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 지(止, Śamatha)를 성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마음을 지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이런 수행자는 사실 명료한 의식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 자체에 집중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먼저 실제로 맑은 의식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은 억념(憶念)의 도움으로 감각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은 너무나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대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듯이 그렇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는 색깔이나 형체 등이 없습니다.

단지 감각과 경험에 대한 맑은 의식이 있을 뿐입니다. 마치 여러 가지 색깔에 물든 물과 같습니다.

여러 가지 색깔이 섞인 물은 본래의 색깔을 보기가 힘듭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물리적인 모습과 같은 외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다섯 가지 감각 의식에 너무 물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오염된 마음은 거의 물리적인 형상이나 색깔과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수행은 모든 종류의 생각과 인식을 의도적으로 멈추는 것입니다.

일단 감각적인 의식을 잡아두는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즐거움과 고통을 경험하는 감각적인 의식을 멈추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을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에 빼앗기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서 서서히 마음의 본래 색깔이 드러나기 시작할 겁니다.

마음이 모든 종류의 생각이나 개념에서 자유로워지면 갑자기 텅 빈 상태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 텅 빈 상태와 점점 익숙해지면 명료한 의식은 저절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지(止, Śamatha)를 수행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다섯 가지 허물과 여덟 가지 대응법을 완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다섯 가지 허물에는 게으름, 수행의 대상을 망각하는 것, 정신적 침몰(沈沒:무겁게 가라앉음)과 도거(掉擧:들뜸), 정신적 침몰과 도거에 대응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 적절하지 않은 대응법을 사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여덟 가지 대응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덟 가지 대응법에는 신심(信心:믿음), 관심, 인내, 경안(輕安), 억념(憶念:잊지않음), 자각(自覺:깨어있음), 침몰과 도거가 일어났을 때 대응법을 적용하는 것, 불필요한 대응법을 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신심이란 집중하는 수행의 이익을 알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수행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고, 인내하는 마음을 키워줍니다.

앞의 네 가지인 신심(信心) 관심 인내 경안(輕安)은 게으름에 대한 대응법입니다. 다섯 번째 억념은 수행의 대상을 망각하는 것에 대한 대응법입니다. 여섯 번째 자각은 침몰과 도거에 대한 대응법입니다. 마음이 침몰하여 힘들어 지면 깨워서 부추겨야 합니다. 도거는 들떠있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수행을 통하여 정신적 안정을 찾고 수행의 단계를 높여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단계는 오래도록 집중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이루어지면 갖가지 대응법은 오히려 해가 됩니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대응법을 피하고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무언가 바라던 대상(所緣)에 마음을 두고, 그 자체가 되기 위해 지속적으로(相續)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까이 두고서 마음에 대해 이와 같이 분석해야 합니다. 즉 대상을 잘 지니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침몰(沈沒: 무겁게 가라앉음)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외부경계(境界:對象)에 도거(掉擧:들뜸)하여 산란(散亂)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점검해야 합니다.


지(止, Śamatha)의 수행이 발전해가면, 수행자는 적절하고 편안한 수행의 대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 대상에 집중하여 마음이 외부로 이끌리거나 무겁게 가라앉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선명(鮮明)한 삼매(三昧)를 이루는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침몰(沈沒)은 마음의 상태가 불분명하거나 경계심을 잃을 때 또는 게으름으로 인해 생깁니다. 그냥 보통의 일상에서도 우리는 “멍하다.” “불쾌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수행의 대상을 분명히 챙기지 못하고 침몰이 오면 수행은 효과가 없습니다.


이에, 만일 혼침(昏沈: 몽롱한 무기력)과 수면(睡眠:졸음)에 굴복하여 마음이 침몰(沈沒)하거나 침몰할 염려가 있을 때는 최고 환희(歡喜)의 대상인 부처님의 존상(尊像) 등이나 밝은 빛을 관상(觀想)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침몰(沈沒)을 제거한 다음, 무엇이든 대상 그 자체에 마음을 [두고] 대상을 아주 분명히 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혼침(昏沈)과 침몰(沈沒)은 서로 원인과 결과로 작용하여 생깁니다. 의식이 몽롱해지면 몸과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수행자가 명료함을 잃고 나면 마음은 별 다른 효과 없이 비생산적이 됩니다. 침몰(沈沒)은 정신적으로 가라앉아 있는 상태 중에 하나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깨우고 부추기는 대응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효과적인 방법들 중에는 완전한 성품을 모두 갖추신 부처님과 같은 기쁨의 대상을 생각하거나 인간 몸을 받은 소중함과 그 기회를 얻은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수행의 의미와 결과를 생각함으로서 마음을 고취시킬 수 있습니다.


지(止, Śamatha)의 발전과 함께 정신적 도거(掉擧) 같은 다른 장애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과거에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나 욕망의 대상을 쫓아가면 도거가 일어납니다. 거친 형태의 도거는 집중하고 있던 대상을 완전히 놓치는 원인이 됩니다. 미세한 형태의 도거는 대상을 부분적으로만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들뜨게 하는 생각들에게 무상(無常)이나 고(苦) 등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습니다.


언제든지, 선천적인 맹인(盲人)이나 어둠 속에 있는 사람 같고, 눈을 감은 것과 같아서 마음의 대상을 분명하게 볼 수 없을 때는 침몰(沈沒)하고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언제든지, 외부의 형상 등에 [마음이 향하여] 그들의 특성을 구별하는데 쫓아가거나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을 하고, 이전에 경험한 경계(境界:對象)에 이끌려 마음을 방일(放逸: 놓고 풀어짐)하거나 방일할 염려가 있을 때는 모든 생각을 분석하지 말고 고통스러움 등에 대한 생각을 내서 대상(所緣)의 본질(性品)을 파악해야 합니다.


방일(放逸)의 허물을 계속 지켜보거나 다른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에서 힘을 빼면, 도거(掉擧)가 줄어듭니다. 수행의 대상을 놓치고 과거의 경험이나 집착의 대상으로 마음이 향하는 것을 도거라고 합니다.

수행의 대상을 완전히 놓치고 외부의 대상에 마음이 향해 있는 상태를 거친 도거라고 합니다. 또 부분적으로 집착하는 대상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을 미세한 도거라고 합니다. 도거는 마음이 많이 들떠있을 때 생깁니다. 마음이 너무 들떠있으면 활동적이 되어 쉽게 풀어지게 마련입니다. 이에 대한 대응법은 마음을 다잡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외적이든 내적이든 집착하는 대상에 대한 집중을 줄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무상(無常)이나 고(苦) 등을 그 집착의 대상에 다시 한번 적용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침몰과 도거에 대응하는 방법은 자각(自覺) 즉 항상 깨어있는 것입니다.

자각의 기능은 마음이 수행의 대상에 잘 머무르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깨어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억념(憶念)의 기능은 잊지 않고 수행의 대상에 마음을 계속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 억념의 상태를 이루고 나면 수행의 대상에 마음을 잘 두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자각이 일어납니다.

 

억념이 강해질수록 자각이 더 강해집니다. 예를 들면 만약 “이것은 좋아.”, “이것은 도움이 안 되는군.” 등의 생각을 계속해서 기억할 수 있다면, 자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는 부정적인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고 억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자각 기능의 특징은 몸과 마음의 상태를 잘 살펴서, 수행의 대상에 머무르고 있는 지를 챙기는 것입니다.


동시에 마음이 너무 가라앉으면 침몰하게 되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침몰할 염려가 있으면 마음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모두 일상의 건강상태나 음식 그리고 움직이거나 앉아있는 시간대 등에 많이 의존합니다. 따라서 언제 가라앉히고 언제 고취시켜야 할지 항상 최선의 판단을 해서 조절해야 합니다.


이렇게 산란심(散亂心)을 가라앉히고 나서, 주의(主意: 알아차림)와 경계(警戒: 깨어 있음)의 끈으로 마음의 코끼리인 대상(所緣)을 나무에다 묶어 두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침몰(沈沒)과 방일(放逸)이 사라지고 대상(所緣)에 대한 마음이 평온해 지는 것을 보게 되면 정진(精進)을 [조금] 느슨하게 하여 적당하게 해야 하며, 그렇게 적당한 상태에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수행의 대상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침몰과 도거 등에 대한 대응법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나가다 보면 거친 장애는 점점 줄어들고 미세한 면이 점점 확실히 드러납니다. 주의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수행을 계속해 나가면 미세한 유형의 장애도 수행을 방해하지 못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힘 있게 수행을 계속해 나가다 보면 모든 장애가 사라지고 긍정적인 면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한 정진을 마치는 시간 내내 큰 노력 없이 앉아 있을 수 있게 됩니다.


삼매(三昧)에 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랜 수행의 시간을 감내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수행해야만 몸과 마음의 얼룩을 모두 제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얼룩이란 수행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무겁게 침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허물들은 수행자가 아홉 단계의 지(止, Śamatha)를 모두 개발해야 완전히 제거됩니다. 그러면 마침내 마음의 경안(輕安)이 찾아오고 이어서 몸의 경안이 찾아옵니다.


이와 같이 지(止)를 닦고 나서 몸과 마음의 경안(輕安)이 이루어지고, 원하는 만큼 대상(所緣)에 [집중하는] 마음을 스스로의 힘으로 갖추고 나면, 그 때 지(止)를 성취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止, Śamatha)의 수행은 불교 수행자나 비불교도(非佛敎道) 수행자 할 것 없이 일반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개념적으로는 별로 특별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상의 특성을 잘 관찰해 보면 세속적으로든 궁극적으로든 지의 수행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밀교 수행에 입문한 사람들은 이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집중력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수행의 대상에 대한 완전한 집중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완전한 지의 상태를 이룰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육바라밀(六婆羅蜜)이나 이타심 등을 수행하는 동안에도 정신적 안정성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止, Śamatha)를 수행하는 최종 목표는 관(觀, Vipaśyanā)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9. 관(觀, Vipashyana)


이 논서는 보살의 육바라밀(六婆羅蜜) 수행을 염두에 두면서 지은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止, Śamatha)를 수행하는 목적은 출세간(出世間)의 관(觀, Vipaśyanā)을 개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止, Śamatha)를 이룬 다음에는 관(觀, Vipaśyanā)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지(止)를 성취하고 나면 관(觀)을 수행해야 하는 데,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즉 “세존의 모든 말씀은 완전한 가르침이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진여(眞如)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으며 진여로 인도하고 있다. 진여를 알고 나면 빛이 나타나 어둠을 물리치는 것처럼 [전도된] 견해의 모든 그물을 피할 수 있다. 지(止)만으로는 맑음을 이룰 수 없고 장애의 어둠도 제거할 수 없으며, 지혜로 진여를 바르게 수행하여야 청정지혜(淸淨智慧)를 [얻을 수] 있다. 지혜만이 진여를 깨우치게 할 수 있으며, 지혜만이 장애를 바르게 제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지(止)에 안주(安住)하면서 지혜로 진여를 완전히 탐구하리라. 지(止)만으로는 만족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이타적인 생각은 자비심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강력한 이타적인 동기가 생겨야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 등의 선업(善業)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관(觀, Vipaśyanā)에 대해 살펴볼 차례입니다.

궁극적인 실제를 깨닫기 위한 관(觀, Vipaśyanā)을 수행하려면, 먼저 무아(無我)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현상의 본래 성품에 대해 탐구해 나가야 합니다.

단순히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현상에는 “나”라고 할 만한 근본 바탕이 없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세속적이든 종교적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눈으로 현상을 직접 확인하는 것처럼, 논리와 논증식(論證式: 순차적인 논증 방식)을 가지고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형(有形)의 물질적인 대상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기 때문에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분명하고 모호한 현상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논증식(論證式)을 사용해야 합니다.


무아에는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 “나” 즉 “아(我)”를 부정하는 것에는 인무아와 법무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인(人)”이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모여 있는 온(蘊: 덩어리)을 말합니다. 일반적인 인식 수준에서는 “아(我)” 또는 “인(人)”이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수준에서의 “인(人)”은 실재(實在)하는 “아(我)”가 있다고 믿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인(人)”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무언가 부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화합물일 뿐입니다. 강한 자기 집착으로 인해, “실재하는 인(人)”을 인식함으로서 “나”라고 하는 자기인식을 가집니다. 이러한 “아(我)”는 부정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탐구의 과정을 통하여, 이 “나”라고 생각하는 “아(我)”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무아(人無我)를 이해하면, 이에 대한 지혜가 자라납니다.


법무아(法無我)는 인식의 대상이나 마음에 본래의 성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식대상은 인식하는 마음의 성품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보통 외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외적인 대상에 빠지면 집착과 증오가 생겨납니다.

반면에 본래 존재하지 않는 인식대상의 성품을 바로 보면, 인식하고 있는 마음의 본성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절로 집착과 증오가 줄어듭니다. 본래의 성품이 결여되어 있는 인식대상과 인식주관 그리고 인식작용을 따로 인식하는 것은 거친 수준의 법무아(法無我)입니다.


인식하는 마음 역시 본래의 성품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본래의 성품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마음이 움직여 대상을 만들어 내고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존재의 특성은 그 자신의 내면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이 현상은 자기 내면에서 동요한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의 모든 사물은 텅 비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와 관련한 불교 학파에서 증명해온 미세한 공성입니다. 따라서 나타난 사물의 실재성을 부정함으로서 사물의 속성이 환영(幻影)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물의 실제를 이해함으로서 집착이나 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 역시 환영(幻影)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결국은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여(眞如)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님 스스로도 궁극적인 진리 즉 진제(眞諦)의 의미를 바로 알고서 깨달음을 성취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철학적 견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른 견해는 오직 궁극적인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바르지 못한 견해를 따르게 되면 중간에 멈추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관(觀, Vipaśyanā)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잘못된 견해를 근본 뿌리부터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진여(眞如)는 무엇과 같은가라고 한다면,

[답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물과 사람과 법의 자성(自性)이 공성(空性)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혜바라밀(婆羅密, Pāramitā) 행으로 깨우치는 것이지 다른 것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세존이시여, 보살은 제법(諸法:現象)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어떤 바라밀행(婆羅密行)으로 파악합니까? 관자재(觀自在) 보살이여, 지혜의 바라밀행으로 파악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止)에 안주(安住)하면서 지혜를 수행해야 합니다.


진여(眞如)는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를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법무아(法無我)를 말합니다. 자세하게 들어가면 학자들 마다 견해가 많이 다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법무아(法無我)를 인무아(人無我) 보다 좀더 미세한 상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人)”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모여 있는 온(蘊: 덩어리)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인(人)”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무언가가 모여져서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인(人)”은 사실 세속적인 차원에서도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자기 정체성에 대해 바르게 이해한 상태를 인무아(人無我)라고 합니다.


존귀하신 스승 샨따락시따(Śāntarakṣita, 寂護)의 수제자였던 위대한 까말라실라께서는 ‘요가행(瑜伽行) 자립논증(自立論證) 중관학파’에 속해 있습니다. 이 학파는 거칠고 미세한 두 가지 차원의 법무아(法無我)를 주장합니다. 주체와 객체가 다르지 않고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 다르지 않은 것을 아는 것은 거친 수준에서 진여(眞如)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또 모든 현상의 공성을 바로 보는 것은 미세한 수준의 진여(眞如)를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경전들 중에 반야부(般若部) 경전들이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깊이를 담고 있습니다.


인무아(人無我)에서 “나”에 대한 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법무아(法無我)에 완전히 천착(穿鑿)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나”를 지금 느끼는 그대로 본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슬픔과 행복을 경험하게 합니다.

 

“나”가 존재한다고 믿는 고대의 다른 학파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 중에 한 인도의 학파는, “나”를 사용하는 주체로 또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모여 있는 이 온(蘊:덩어리)을 사용할 대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학파는 결국 “아(我)”와 대상을 따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학파들은 “아(我)”가 하나이며 영원하고 독립적인 실재(實在)라고 주장합니다. 전생에서 이어진 이러한 “아(我)”는 이 생의 죽음과 함께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모임이 해체되면, 다음 생으로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기독교 같은 다른 종교들도 유일하고 영원하며 독립적인 실체를 믿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종류의 학파나 종교들이 주장하는 것은 “아(我)”가 무언가 의존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 그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불교의 4대 학파 중에 어느 누구도 그러한 “아(我)”가 실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즉 “아(我)”는 단지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모임에 의지하여 나타난 것 일뿐 그 본래의 성품이 있지 않다는 것을 공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불교는 “아(我)”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원히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은 무엇이냐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렇게 거친 수준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눈에 보이는 “아(我)”가 존재하는 방식을 자세히 점검해 봐야 합니다. 논리적인 분석을 통하여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모임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아(我)”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모임에 대해서는 여러 학파들이 조금씩 다른 차원의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의지하여 발생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무언가에 의존하여 모임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아(我)”라고 인식하는 것일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我)” 또는 “나”를 애써서 탐구하고 존재의 실체를 살펴봐야 합니까? 예를 들면 [집착의] 정도에 따라 자신의 편과 다른 편 즉, 두 편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에게 집착하고 다른 이에게 적의를 품습니다. 집착과 적의가 생겨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여러 가지 부정적인 행위를 저지릅니다. 이 모든 부정적인 행위들이 바로 “아(我)” 또는 “나”에 대한 분별 의식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我)” 또는 “나”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깊이에 따라 부정적인 행위와 농도의 범위가 달라집니다. 본능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며 집착하는 “나”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모임을 통제하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나”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로 인하여 우리는 끝없이 욕심을 냅니다.

이 욕망들 중에 몇 가지는 아주 독특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의 지성과 미모를 보면 자신의 부족한 면과 바꾸고 싶어 합니다. “아(我)”가 존재하는 실제 형식은 원인과 그에 따르는 조건들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我)” 또는 “나”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 실체가 없는 “아(我)” 또는 “나”에게 강한 집착을 보임으로서 생기는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요가 수행자는 다음과 같이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온(蘊)·계(界)·처(處:入)를 제외하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온(蘊) 등일 수 없는 것은, 온(蘊) 등이라는 것들이 무상(無常)하고 많은 성품(性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항상(恒常)하며 하나의 성품(性品)이라고 다른 이들이 분별(分別)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을 실재한다고] 믿습니다. 그 자체이거나 또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실재(實在)할 수 없습니다. 즉 [서로 결합하고 의지하여 존재하는 방식 이외에]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세간(世間)에서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人無我]


정신적이나 물리적인 모임에서 따라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아(我)” 또는 “인(人)”은 없습니다.

“인(人)”은 모임에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을 관찰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몸과 다른 모임들이 젊으면 우리는 그 사람이 젊다고 말합니다. 또 늙으면 나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표현은 모임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사람들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법무아(法無我)도 역시 이와 같이 수행해야 합니다. 즉 법(法:現象)이라고 하는 것은, 요약하면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입니다. 여기서 온(蘊) 처(處) 계(界) 그리고 형색(形色:形體)을 가진 것들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의 형상(形像) 이외에는 없습니다. 즉 그들은 미세한 입자(粒子)로 부서지며, 미세한 입자들 역시 나누어지는 성품(性品)으로, 각각을 살펴보면 본래의 성품을 분명하게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시이래(無始以來) 형색(形色:形體) 등은 역시 청정한 것이 아니며, 발현(發現)의 욕구가 꿈이라면 보이는 대상(所緣)의 형색(形色:形體)등은 빛과 같은 것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마음의 성품인 형색(形色:形體) 등을 밖에서 끊으려고 하는 것과 같으며, 결국 여기서 형색(形色:形體) 등은 마음의 형상(形像)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이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唯識)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이러한 법(法:現象)을 분석하여 일체가 마음뿐이라는 것을 알고서, 이들 각각을 분석하는 것이 모든 법의 본성을 각각 분석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의 본성을 각각 점검해야 합니다. 이상(以上)을 이와 같이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법(法) 또는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와 같이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물리적인 형색(形色:形體)같은 이 모든 외적인 대상들은 인식하는 마음과 분리하여 생각할 때 나타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인식하는 마음과 분리된 무언가가 있다면, 현상과 인식하는 마음은 완전히 상관없는 것으로 정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물이 인식하는 마음에서 생긴 것이라는 말과도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인식대상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과 따로 떨어뜨려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물리적인 형색(形色:形體)을 가진 사물들이 외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 사물을 낱낱이 분해한 다음에도 그대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물은 외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것은 또한 인식대상과 인식하는 마음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학파들에서는 마음의 본성과 다른 외적인 대상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다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물리적인 형색(形色:形體)이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처럼 잘못 인식합니다. 그래서 형색(形色:形體) 등을 꿈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처럼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형색(形色:形體) 등은 마음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여(眞如) 또는 공성이란 인식하는 주관인 마음과 마음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이 본래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리적인 것들을 세분하여 보면 조금 전에 그 모습은 사라집니다. 그렇게 해서 계속 세분해 가면 어느 것도 실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상은 유식(唯識) 학파의 견해입니다. ‘요가행(瑜伽行) 자립논증(自立論證)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견해도 몇 가지 미세한 점을 제외하고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견해 역시 중관(中觀)의 마지막 학파에서는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음 구절에서는 독특한 중관 철학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마음 역시 진제(眞諦:절대 진리)에 부합(符合:契合)하지 않습니다.

즉 거짓 본성인 형색(形色:形體) 등의 형상(形相)을 파악하는 갖가지 심성(心性)이 생겨나서 [인식하는] 것을 진제(眞諦)에서 무엇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형색(形色:形體)등이 거짓인 것처럼, 마음 역시 그 이외에는 없는 거짓 성품입니다. 그렇게 형색(形色:形體) 등은 갖가지 형상(形相)이나 일(一)과 다(多)가 본래의 성품이 아닌 것처럼, 마음 역시 그 이외에는 없음으로 일(一)과 다(多)가 본래의 성품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환영(幻影) 등의 본성(本性)과 같을 뿐입니다.


불교의 여러 학파들 사이에서도 공성의 의미를 해석하는 차원이 조금씩 다릅니다. 유식학파의 해석은 심오한 공성의 철학을 다 드러낸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유식학파의 논사들 역시 공성을 논박하는 자신만의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불교는 부분적으로 보는 것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망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본적으로 좀더 낮은 수준의 학파들은 직접 간접적으로 좀더 높은 수준의 학적 견해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으로서 작용합니다. 위의 구절은 중관학파에서 독특하게 설명하고 있는 법무아(法無我)를 다루고 있습니다. 중관학파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단지 마음에 의해서 이름 붙여진 것일 뿐입니다.

외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마음이 인식하는 다양한 범주의 현상도 역시 실재하지 않습니다.

중관학파는 이와 같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궁극적으로 모든 현상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상에 본래의 성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나타난 모습과 존재하는 방식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현상의 궁극적인 실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에는 본래의 성품 즉 자성(自性)이 없습니다.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제법(諸法:現象)도 역시 환영(幻影) 등의 본성과 같을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지혜로 마음의 본성을 각각 분석하면 궁극적으로 마음은 내부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외부에서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으며 현재 생겨나는 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생겨날 때 역시 어디서 온 곳이 없고, 사라질 때 역시 어디로 간 곳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파악할 수도 없고 신뢰할 수도 없는 것인데, 형색(形色:形體)을 가지지 않는 것이 본래의 성품인 것은 무엇과 같은가라고 한다면,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가섭(迦葉)이여, 마음을 완전히 탐구하고 나면 발견할 수가 없다.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은 찾을 수가 없다. 찾을 수가 없는 것은 과거에도 없다. 미래에도 없으며 현재에도 생겨나지 않는다.”라고 널리 [법을] 펴셨습니다.

그렇게 분석하면 마음은 시작도 무결(無缺)하여 볼 수 없으며 끝도 무결(無缺)하여 볼 수 없고 중간도 역시 무결하여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에 끝과 중간이 없는 것처럼 제법(諸法:現象)도 역시 끝과 중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마음의 본래 성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무언가를 완전히 깨우친다는 것은 공(空)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마음이 만든 형상(形相)인 형색(形色:形體) 등의 본래 성품 역시 궁극적으로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지혜로도 제법(諸法:現象)의 본래 성품을 바르게 볼 수 없다면, 형색(形色:形體)이 항상(恒常)한지 무상(無常)한지 공(空)한지 공(空)하지 않은지 번뇌가 있는지(有漏) 번뇌가 없는지(無漏) 생겨나는지(生) 생겨나지 않는지(不生) 존재하는지(有) 존재하지 않는지(無)를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형색(形色:形體)에 대한 구별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수(受)·상(想))·행(行))·식(識)도 역시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차별들 역시 존재할 수가 없으니, 이에 구별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위의 구절은 궁극적인 실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즉 궁극적인 의미에서 대상은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도 같은 맥락의 “무색성향미촉(無色聲香味觸)” 즉 형체도 없고 소리고 없으며, 냄새도 없고 맛도 없으며, 접촉도 또한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 역시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원하다거나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논하는 것도 의미 없는 일입니다. 궁극적으로 온(蘊:모임) 등을 포함한 모든 현상의 본래 성품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眞如) 역시 실체가 없는 현상의 한 속성일 뿐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잘못하면 현상의 실체에 본래의 성품이 없는 것을 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무언가 실체가 있다고 오해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지혜로 사물을 분별하여 요가 수행자가 어떤 사물의 본래 성품이 궁극적으로 확실히 [있는 것이라고] 천착(穿鑿)하지 않을 때, 무분별삼매(無分別三昧)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제법(諸法:現象)에는 본래 성품이 없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구절은 무아(無我)를 깨닫는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아를 깨달은 지혜라는 것은 결국 무아를 확인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我)”에 대한 오해를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마음은 다양한 방법으로 물리적 형색(形色)과 같은 사물들을 인식합니다. 물리적인 모습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마음이 있으며, 실재의 속성으로 인식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또 본래의 성품인 자성(自性)이 없는 것을 인식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더불어 실재에 대한 속성을 어느 것도 분별하지 않고 무분별(無分別) 상태를 그대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아(我)”를 논증(論證)하여 분별하는 것을 분석적인 지혜라고 합니다.

 

“아(我)”에 대한 논증을 바르게 거쳐야, 무아(無我)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지혜로 사물의 본래 성품을 각각 분석하지 않고 수행을 하게 되면, 생각을 모두 끊기 위해서만 수행하는 분별심 역시 피할 수 없으며 본래의 성품이 없다는 것도 깨우칠 수 없는데, [이것은] 지혜의 빛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바르게 각각을 분석해야 앎의 불이 생기는 것은, 마치 부싯나무(燧木)를 문질러 일으킨 불처럼, 분석의 나무를 태우는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물의 실제 본성을 이해하려면, 검증의 과정에서 지성과 지혜를 활용해야 합니다. 위의 구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활동을 끊으려고만 하면 진여(眞如)에 대한 수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신의 활동을 쉬는 것만으로도 “아(我)”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무아(無我)를 분별하기에는 무언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지혜의 빛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지(無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아(無我)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지혜의 불꽃을 일으켜야 합니다.


『불설제개장보살소문경(佛說除蓋障菩薩所問經)』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잘못 길들여진 일체의 희론(戱論)을 여의고자 한다면 공성(空性)을 닦는 요가(瑜伽)를 해야 한다. 공성(空性)에 대한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마음을 흐트러뜨리거나 마음을 아주 기쁘게 하는 대상(處)과 그것들의 본래 성품을 완전히 탐구하여 공(空)을 깨우친다. 마음이 무엇인지 깨우치는 것도 역시 본래의 성품을 모두 탐구하여 공(空)한 것을 깨우치고, 그렇게 깨우쳐서 무상(無相) 요가(瑜伽)에 들어간다.”라고 널리 펴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분석을 먼저 하는 것이 무상(無相)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생각을 완전히 끊는다 해도 지혜로 사물의 본래 성품을 분석하지 않고는 무분별(無分別)한 상태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 형색(形色:形體) 등으로 [이루어진] 사물의 본래 성품을 바르고 정확하게 분석하고 나서, 선정(禪定)에 들어 갈 때는 형색(形色:形體) 등에 머무는 선정(禪定)에 들어가지 말 것이며, 기세간(器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사이에 머무는 선정(禪定)에도 들지 말아야 함은 형색(形色:形體) 등의 [실체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주선정(無住禪定: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는 선정)이라고 합니다.

지혜로 일체 사물의 본래 성품을 각각 분석한 다음, 무성선정(無性禪定: 대상이나 조건이 없는 선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지혜선정(智慧禪定)이라고 합니다. 즉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이나 『대보적경보만보살회(大寶積經寶鬘菩薩會)』 등에서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관찰을 통하여 인식하는 마음이 공(空)하다는 것을 이해하고나면, 마음의 대상들도 역시 공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과 함께 수행자는 무상(無相)의 요가를 해야 합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면, 물리적인 형색(形色)과 같은 인식의 대상들을 포함한 모든 종속적인 현상 그리고 인식하는 마음은 자성(自性)이 모두 공합니다. 무분별(無分別)의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완전한 분석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별의 지혜로 종속적인 대상들을 살펴보면,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무아(無我)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제대로 된 관점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정신적 활동을 멈추는 것만으로는 무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단순히 “아(我)”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난다고 무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아(無我)는 결국 인식하는 마음과 인식되는 대상의 자성(自性)이 궁극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을 바로 아는 지혜로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지혜는 바른 분석과 분별을 마치고 나서 생기는 밝은 지식입니다.


이와 같이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의 진리에 들어가면, 모든 것은 생각할 것과 관찰할 것이 다르지 않음으로 분별과 분석을 떠나는 것입니다. 말없이 한 곳에 집중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행하는 바(加行方便) 없이 진여(眞如)를 극명(克明)하게 수행하는 데 머무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상태에 머무르면서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산란(散亂)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탐착(貪着) 등으로 마음의 바깥 경계(境界:對象)가 산란해지면 산란한 감각(受)을 빨리 벗어나는 수행 등으로 산란심(散亂心)을 가라앉히고 빨리 본래 상태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마음에 싫증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면 삼매(三昧)의 공덕(功德)을 생각함으로서, 그에 대한 환희심(歡喜心)을 길러야 합니다. 산란함의 허물을 보고서 또한 싫증을 모두 가라앉혀야 합니다.

반면에 혼침(昏沈)과 수면(睡眠)에 굴복하여 흐름이 불분명해지고, 마음이 침몰(沈沒)하거나 침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환희심(歡喜心)의 대상을 생각하여 빨리 침몰을 극복해야 하고, 그런 다음 대상(所緣)의 본래 성품에 아주 견고(堅固)하게 집중해야 합니다. 반면에 이전에 웃고 즐기던 기억으로 인하여 도거(掉擧)나 방일(放逸)할 염려가 있을 때는,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상(無常) 등을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대상에 적용하여 산란심(散亂心)을 가라 앉혀야 하며, 그런 다음 다시 진여(眞如)를 향해 마음을 행하는 바(加行方便) 없이 들어가 머무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위의 구절들은 궁극적인 실제와 관련하여 관(觀, Vipaśyanā)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여(眞如)에 대한 삼매에 든 마음은 종속된 대상이 사라지고 없는 텅 빈 상태를 봅니다.

마음에는 텅 빈 상태 이외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무지에서 오는 모든 오해를 버리고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분석과 개념에서 자유롭고, 표현할 수 없는 삼매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진여(眞如) 한 곳에 집중하는 상태를 “진여선정(眞如禪定)” 또는 “입주진여(入住眞如)”라고 합니다.

지속적인 수행을 통하여 명료함을 얻으면 산란(散亂)함이 없이 수행을 계속해 나갈 수 있습니다. 무아(無我)를 보고나서는 그것을 이해한 힘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물론 무아를 한번 본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분석적인 지혜로 관(觀, Vipaśyanā)의 수행은 발전합니다. 또 관(觀, Vipaśyanā)의 힘에 의해서 정신적 물리적 지복감이 찾아옵니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지(止, Śamatha)을 수행할 때는 침몰(沈沒)이나 도거(掉擧)에 유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분석적인 수행을 할 때, 수행의 대상에 대한 명료함을 잃게 되면, 마음은 다른 대상으로 향하고 맙니다. 즉 예리함과 집중력이 떨어지면 침몰(沈沒)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애가 일어나 수행을 방해할 때는 필요한 대응법을 즉시 취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까말라실라(Kamalaśīla)께서는 집착으로 인해 마음이 외부의 대상으로 향하면, 그 대상에 대해 무상(無常)함 등을 적용하여 물리쳐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행 중에 혼침(昏沈: 몽롱한 무기력)이나 수면(睡眠:졸음) 또는 몽롱함이 찾아오면 부처님의 모습 같은 아주 큰 기쁨의 대상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대응법을 사용함으로서 장애는 가라앉고 수행의 힘은 점점 커질 것입니다.


반면에 침몰(沈沒)과 방일(放逸)에서 멀어진 다음, 정(定)에 들어 진여(眞如)에 대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려면, 정진(精進)을 [조금 느슨하게 하여] 쉬고 [치우치지 않으며] 평등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마음이 정(定)에 들어가고 있는 중에 [너무] 애써 정진하면 마음은 산란해질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침몰하고 있는 중에 애써서 정진 하지 않으면 아주 침몰하여 관(觀)은 사라지고 마음은 선천적인 맹인(盲人)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침몰하면 애써서 정진해야 합니다.

[또 이미] 정(定)에 들면 [너무] 애써 정진하지 말아야 합니다. 관(觀)을 수행하는 중에 지혜를 아주 강화(强化)하면 지(止)가 약해져서 등불을 바람에 놓아 둔 것처럼 마음은 요동칠 것이며, 그로 인해 진여(眞如)를 극명(克明)하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럴 때는 지(止)를 수행해야 합니다. 지(止)가 너무 강해지면 마찬가지로 그때는 지혜를 수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침몰(沈沒)과 도거(掉擧)에서 벗어나, 진여(眞如)를 극명(克明)하게 볼 수 있는 삼매에 드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석적인 지혜로 진여를 바르게 이해하고 나서도 마음을 진여에 계속 둘 수 있으면, 그 상태를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유지해야 합니다. 침몰하거나 산란하지 않고 계속 수행을 할 수 있다면, 대응법을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진여(眞如)에 대한 관(觀, Vipaśyanā)을 성취할 때까지 분석과 집중을 균형 있게 병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석적인 수행을 통하여 무아(無我)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얻어야 합니다. 더불어 집중력 있는 선정의 힘이 함께 해야 합니다.

지나친 분석은 집중을 방해합니다. 또 지나게 집중하면 분석적인 지혜를 잃고 맙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유형의 수행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점점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의 수행적 합일(合一)을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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