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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6. 수행차제.삼종요도

7. 곰림 바르빠

6. 지혜(智慧)


불교에는 교학(敎學)적 이론의 유효성을 논리적인 검증을 통하여 결정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과 학자들이여,

태우고 자르고 문질러 보는 황금처럼,

나의 말도 그와 같이 제대로 분석하라.

존경심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느니라.


그러므로 내적·외적인 현상에 대해 증명하는 과정에서도 논리적인 검증에 의존해야 합니다. 단순히 경전의 권위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경전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이든 논리에 비추어 분석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내용의 유효성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검증의 대상으로 항상 열려있습니다. 불교문화의 가장 놀라운 특징 중에 하나는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된 것인지 점검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승의 말씀도 역시 점검할 수 있습니다.

지식에 접근하는 불교의 방식은 현대 과학과 유사합니다. 처음부터 어떤 주제에 대한 내용을 단정적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주의 깊게 하나씩 점검해야 합니다. 분석의 결과, 논리적으로 합당하다면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불교는 고도의 논리적 체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기(基)·도(道)·과(果) 즉, 기초(基)·방법(道)·결과(果)를 검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기초는 현상의 실체 또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사실에 근거한 방법을 따름으로서 결과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수행은 단순히 마음의 조작이 아니라, 무언가 좀 더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정신적인 수행의 기초가 단순히 상상으로 꾸며낸 것이라면, 실제로 수행의 방법을 따라서 한다고 해도 마음을 전환하기 위한 잠재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에 따른 해탈 등의 결과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부처님의 경지는 여러 가지 속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속성들은 정신적 수행의 방법을 따라 적절한 원인과 조건을 개발하여 생긴 것입니다. 부처님이 갖추신 10가지 능력인 십력(十力)이나 그 외에 다른 속성들은, 이미 잠재하고 있던 개별적인 속성들을 완전히 개발한 것입니다. 즉, 기초나 바탕이 없이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습니다. 바위나 산에서 일체지(一切智)가 생긴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기초를 검증하는 것은 중요한 과정입니다. 단순히 정신적인 조작에서 생긴 것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기초를 검증하는 것은 본성과 실제의 법칙을 바르게 정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초의 실제 본성을 검증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일입니다.


불교 경전은 그 내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경전의 가르침이 논리적으로 분석되지 않을 때는 의도와 목적 그리고 논리적 부정의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절대적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경전을 분석하는 동안 어떤 허물을 발견했다면, 그때는 그 경전이 가르치는 의도와 목적을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아(無我)에 관한 내용 등이 모호해서 논리적으로 추론했는데도 만약 허물이 발견되었다면, 그때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날에는 태양의 크기나 달의 움직임 등의 정보가 아주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전에서 만약 이렇게 직접 지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들을 현저하게 다르게 주장하거나 표현하고 있다면, 단순히 권위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실들에 대해 불교와 과학은 유사한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정신적인 기초(基)와 방법(道), 결과(果)의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결과는 수행자들이 부처의 경지를 이루었을 때 나타나는 속성들입니다. 이런 속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바른 원인과 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불교 수행의 과정 속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우리들 안에 이미 부처의 십력(十力)이나 그 외의 속성이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잠재력은 우리 의식의 흐름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산이나 바위가 수행을 한다고 일체지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적절한 기초가 없이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즉 우리의 의식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일체지나 부처의 속성들은 수행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정신적인 기초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정신적인 기초(基)란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를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마음의 본래 성품을 말합니다. 정신적인 방법(道)에는 방편과 지혜가 있습니다. 즉 방편과 지혜의 자량을 쌓음으로서 불성(佛性)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 철학의 이러한 바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들은 상상으로 만든 무언가가 아니고 실제 확인 가능한 것들입니다. 이들이 만약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라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여도 실질적인 깨달음의 길에는 들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결과도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어떻게 해야 해탈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이런 기본적인 원리들을 점검해야 합니다. 만약 다른 철학적 견해에 사로잡힌 편견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이런 원리들을 객관적으로 발견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의문을 분석하고 점검한 결과 논리적으로 합당하다면, 그때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불교에는 아직 과학이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그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다면, 무조건 경전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수용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논서는 기본적으로 이제(二諦)를 기초(基)로 하여 방편과 지혜의 수행을 방법(道)으로 삼고 있고, 지혜 법신(法身)과 방편 색신(色身)을 그 결과(果)로 하고 있습니다.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삼매(三昧)에 머물면서 지혜에 대한 수행을 하여 모든 장애를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도 말씀하기를, “계율(戒律)에 안주(安住)하여 삼매(三昧)를 이루고, 삼매를 이루고 나서도 지혜를 수행해야 한다. 지혜로 청정지혜(淸淨智慧)를 이루고 나면 청정지혜가 계율을 원만하게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와 남을 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장애를 제거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지(止, Śamatha)를 수행해야 합니다.

지(止, Śamatha)에 들어있는 동안, 진여(眞如)를 깨달은 지혜로 현상을 분석할 수 있는 수행자는, 관(觀, Vipaśyan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수행에는 세 가지 분명한 순차가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본문에서는, “지혜로 청정지혜(淸淨智慧)를 이루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는 그 씨앗만으로도 어둠을 비출 능력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진리를 깨달은 지혜만으로는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완전한 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완전한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라는 것은 일체지(一切智)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체지를 이루려면, 해탈의 어둠인 번뇌를 제거해야 합니다.

지혜만으로 두 가지의 장애(煩惱障과 所知障)와 잠재되어 있는 그 씨앗들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계율(戒律)이나 삼매(三昧)가 없다면 이 장애들을 직접적으로 다시 만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단순히 듣고 이해하는 것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수행의 결과로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실제에 대한 관(觀, Vipaśyan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止, Śamatha)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삼매(三昧)를 이루려면, 무겁게 가라앉는 침몰(沈沒)이나 들뜨는 도거(掉擧)를 넘어서야 합니다. 이러한 허물을 벗어나려면 계율을 먼저 수행해야 합니다.


『성대승신심수행경(聖大乘信心修行經)』에서도, “선남자(善男子)여, 지혜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 대승 보살들에 대한 신심(信心)이나 대승에 대한 어떠한 것도 생기리라고 나는 말할 수 없다.”


신심(信心) 즉, 믿음은 지혜에서 옵니다.

“선남자(善男子)” 또는 수행자가 관(觀, Vipaśyanā)의 지혜를 개발하는 것은 신심(信心)을 바탕으로 합니다. 물론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도 헌신할 수 있습니다. 대승 수행자의 신심(信心)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바른 논리와 지성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해탈의 과정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만이 바른 출리심(出離心)을 낼 수 있습니다. 의식의 흐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해탈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앎으로서 생기는 출리심(出離心)은 확실히 뛰어난 성품입니다. 마찬가지로 귀의(歸依)는 공성에 대한 지식이 아주 잘 정제(精製)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선남자(善男子)여, 이것을 열거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이 대승 보살들에 대한 신심(信心)이나 대승에 대해 생기는 것은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이 산란(散亂)하지 않는 마음으로 실제(利)와 법(法)을 바르게 사유(思惟)하여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정신적인 기초(基)와 방법(道)과 결과(果) 안에서 수행자가 굳건한 신심(信心)을 얻으려고 한다면, 세속적인 실제와 궁극적인 실제에 대한 지혜를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의 체계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止)와 멀어진 관(觀)만으로는, 요가 수행자의 마음은 경계(境界:對象)들로 산란해지게 되며, 바람 앞에 등불처럼 불안해 집니다. 따라서 지혜의 빛을 극명(克明)하게 드러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止)와 관(觀)] 두 가지를 똑같이(雙修) 의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불임열반기법주경(佛臨涅槃記法住經)』에서도, “성문(聲聞)들이 여래의 종성(種姓)을 볼 수 없는 것은 삼매(三昧) 부분이 강하고, 지혜 부분이 약하기 때문이다.


위의 구절을 철학적 체계 안에서 해석해 보면,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은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 등에 대한 공성을 완전히 깨우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를 완전히 분석할 수 있는 지혜를 모두 갖추신 부처의 성품을 아직 못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인무아(人無我)를 깨치긴 했지만 아직 법무아(法無我)를 깨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삼매(三昧)가 지혜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인(聖人)들의 지혜를 통해서 본다면,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은 공성을 깨우친 보살들과는 달리, 다양한 논리나 합리를 바탕으로 오염된 마음의 실체를 깨우치신 부처의 본성을 아직 못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삼매(三昧)가 강하고 지혜는 약하기 때문입니다.


보살들이 [여래의 종성(種姓)]을 볼 수는 있지만 불분명한 것은, 지혜 부분은 강한 반면, 삼매(三昧)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래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지(止)와 관(觀)을 똑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어려운 내용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살이 직접적으로 진여(眞如)를 보고 인식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정(禪定)에 들은 상태에서 그런 것이지 선정이 끝나고 나서도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아니라는 말로 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언제나 완전한 진여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언제나 선정과는 상관없이 진여의 상태에 계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보살이 진여를 직접적으로 인식한다 하더라도 분명하게는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번뇌의 잠재력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마저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반면에 부처님은 아주 미세한 번뇌도 없이 그 잠재력마저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 계십니다. 부처님이 아는 진여는 완전하고 수승(殊勝)한 것입니다.


지(止)의 힘을 [얻으면], 등불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분별(分別)의 바람에 의해 마음이 요동치지 않게 됩니다. [또] 관(觀)의 [힘]으로 그릇된 견해의 모든 티끌을 제거함으로써 다른 것들에 의해 전도(顚倒)되지 않게 됩니다.

『월등경(月燈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지(止)의 힘으로 마음은 흔들리지 않게 되며, 관(觀)에 의해 산(山)처럼 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止)와 관(觀)] 두 가지 모두를 기르는데, 머물러야 합니다.


이 구절은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의 의미와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무언가에 끌려 다니지 않고 원하는 대상에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마음의 속성입니다. 선정에 필요한 대상에만 집중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대상을 명료하게 바라보며 정신적 침몰(沈沒:무겁게 가라앉음)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지를 지속적으로 이룰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몸의 경안(輕安: 미세하게 경쾌하고 가벼운 상태)과 마음의 경안(輕安)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삼매와 지복감(至福感)이 함께 하는 것을 지라고 합니다.

관(觀, Vipaśyanā)은 육체적 정신적인 지복감과 함께 공성을 깨닫는 지혜입니다.

이 지복감은 분석적인 지혜에서 옵니다. 즉, 지의 지복감 상태에 머물면서, 대상의 실제에 대해 계속 분석하고 점검함으로서 생기는 지혜에 따른 지복감입니다. 관은 단순히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즉, 그 대상이 세속적이든 궁극적이든 분석적인 지혜로 점검하여 그 실체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 관(觀, Vipaśyanā)입니다.

7. 지(止)와 관(觀)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은 어떻게 해야 동시에 수행할 수 있습니까?


이에, 먼저 요가 수행자가 편하고 빠르게 지(止)와 관(觀)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止)와 관(觀)의 자량(資糧)을 증장(增長)시키는데, 의지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으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선행 조건이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지(止)의 자량(資糧)이라는 것은, 적절한 장소에 머물며, 탐심(貪心)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알며, 집착 등의 분별심(分別心)을 완전히 버리고, 계율을 청정히 하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에서 저자는 수행에 필요한 행위와 환경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공덕을 모두 갖춘 적절한 장소가 있는 곳을 알아야 하는데, 의복과 음식 등을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거나 얻기 쉬우며, 악한 사람과 적 등이 거주하지 않아 머물기에 좋고, 질병이 없는 땅이라 터가 좋으며, 계율을 수지(受持)하고 견해가 같은 좋은 친구(道伴)가 있으며, 낮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지 않고 밤에는 잡음이 없는 곳이 좋은 곳입니다.

탐심을 줄인다는 것은 법복(法服) 등이 좋거나 많다고 특별히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은 법복(法服) 등이 좋지 않은 것을 얻었어도 항상 만족하는 것입니다. 많은 활동(分別心)을 완전히 떠난다는 것은 사고파는 등에서 악업(惡業)을 모두 떠나고, 재가자(在家者)나 출가자(出家者) 누구든지 너무 가까이 하는 것을 완전히 떠나며, 의약(醫藥)과 점성(占星) 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위의 구절은 무의미한 농담이나 모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점성(占星)이나 의약(醫藥)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수행에 큰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수행자는 이렇게 세속적인 것들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계율을 청정히 한다는 것은 두 가지 율의(律儀:戒行) 모두 성죄(性罪: 자체로 무거운 重罪)든 차죄(遮罪:행위 규범 위반)든 지니고 배운 것(遮戒學處)을 위반하지 않고 방일(放逸) 하더라도 신속하게 참회(懺悔)하여 여법(如法)하게 하는 것이며, [또] 성문(聲聞)의 율의(律儀)에서, 바라이죄(波羅夷罪: 승려자격 박탈의 최고 중죄)는 개차(開遮: 참회용서)하여 회복할 수 없다고 설하셨지만, [혹시라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또한 참회하여 이후에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업(業)을 지었든 그 마음에는 본래의 성품이 없다는 것(心無自性)을 각각 분석하든지 제법(諸法:現象)은 본래 성품이 없다는 것(法無自性)에 익숙해짐으로써 그의 계율이 청정해 질 수 있음을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아사세참회대승경(聖阿闍世懺悔大乘經)』에서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그렇게 참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행에 확실하게 매진해야 합니다.


두 가지 유형의 율의(律儀)란 별해탈계(別解脫戒)와 보살계(菩薩戒)를 말합니다. 또, 출가(出家) 수행자의 계율과 재가(在家) 수행자의 계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래의 구절은 집착과 욕구의 무익함을 보고 세속적 행위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모든 잘못된 이해 즉 분별(分別)을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집착(執着)도 역시 이 생과 다음 생에 다양한 허물을 마음에 짓게 하므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분별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의 모습으로 윤회하는 사물은 아름다울 수도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은 [끝내] 소멸하는 법으로 불안정합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 모든 것들은 나(我)에게서 머지않아 떨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나(我)에 대해 어찌하여 [그렇게] 지나치게 집착하는가라고 곰곰이 생각하여 모든 분별을 버려야 합니다. [더불어] 관(觀)의 자량(資糧)이라는 것은, 성현(聖賢)께 의지하여 많이 듣고 완전함을 추구하며 적절히 사유하는 것입니다.


즉, 세속적인 것과 궁극적인 것의 대해 사유하는 수행을 말합니다.

다음은 정신적인 스승들의 특징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어떤 성현(聖賢)을 의지해야 하는가라고 한다면, 다문(多聞)하시고 말씀이 분명하며 자비심을 지니어 어려움을 잘 견디시는 분을 말합니다.


“말씀이 분명”하다는 것은 법을 설하는데 능숙하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자비심이 없이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자비심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배움도 크게 유용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스승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자비심 즉 따듯한 마음을 꼽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인내와 관용을 가지고 제자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대해 설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에, 많이 듣고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세존께서 십이분교(十二分敎: 열두 가지 가르침의 형태)하신 요의(了義: 확실한 뜻, 正見)와 불요의(不了義: 불확실한 뜻, 外見)를 겸양한 자세로 진지하게 듣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필요한 만큼 듣지 않는 것은 관(觀)의 장애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경전에서, “관(觀)은 듣고 사유하여 생긴 바른 견해(正見)라는 원인(因)에서 생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연천소문경(那羅延天所問經)』에서도, “듣는 것이 갖추어지면 지혜가 생겨날 것이며, 지혜가 갖추어지면 번뇌가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위의 구절들은 잘 듣고 사유하여 폭넓은 지식을 얻는 중요성에 대해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풍부하고 다양한 지식을 담고 있는 경전의 가르침에 대한 설명입니다. 적절히 사유한다는 것은 요의(了義) 경전과 불요의(不了義) 경전 등을 바르게 판단하는 것으로, 그와 같이 보살의 의심이 사라지면 수행이 한 곳에 분명해 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심스런 의혹은 커져만 가서 마치 돌 계곡 길을 건너는 사람처럼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들었던지 그것에 대해 잘 사유하고 확인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잡한 교차로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주제를 모호하게 설명하거나 가르침이 능숙하지 못하면 저절로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위의 구절에서는, “요의(了義) 경전과 불요의(不了義) 경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요의(了義)의 가르침과 불요의(不了義)의 가르침은 무엇을 말합니까? 또 요의(了義) 경전과 불요의(不了義) 경전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들은 불교의 철학적인 면과 중요한 관련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처님께서는 세 번의 법륜(法輪)을 굴리셨다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가르침의 수레를 굴리셨습니다.

사성제는 불교의 기초이자 기본적인 틀입니다.

사성제에는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두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는 멸제(滅諦)에 대한 의미를 모두 밝히셨습니다.

이 시기의 가르침들은 반야부(般若部) 경전에 담겨 있습니다.

내용이 워낙 심오하고 정교하기 때문에 이 가르침의 시기에는 많은 잘못된 견해가 생겨났고, 무아(無我)에 대한 오해가 생겼습니다. 따라서

세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는 무언가에 속해있는 귀속현상(歸屬現象)과 무언가에 의지하는 의존현상(依存現象) 그리고 완전히 검증된 확정현상(確定現象)이라는 맥락에서 무아(無我)에 대해 좀 더 분명히 설하셨습니다.

(*역주: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귀속현상(歸屬現象), 의존현상(依存現象), 확정현상(確定現象)의 용어들은 의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용어들이다. 이 단어들에 상응하는 불교 용어들을 보면, 귀속현상은 변계소집성(遍計所集性), 의존현상은 의타기성(依他起性), 확정현상은 원성실성(圓成實性)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 귀속현상은 본래 자신에게 속해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라는 말입니다.

- 의존현상은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아라는 말입니다.

- 확정현상은 어떠한 것도 궁극적인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굴리시던 법륜의 내용을 담은 『여래장경(如來藏經)』과 같은 특정한 경전들은, 객관적인 대상의 맑은 빛(淨光明)과 함께 주관적인 마음의 맑은 빛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두 번째 법륜을 굴리실 때 설명하셨던 완전무결한 공성에 대해 다시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세 번째 법륜에서는 마음의 특성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성제의 네 번째 진리인 도제(道諦)에 대한 설명을 더 깊고 심오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저절로 밀법(密法, Tantra)의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펴신 목적은 오직 듣는 이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근기에 맞추어 좀 더 넓고 심오한 가르침을 펴거나 좀더 좁고 구체적인 가르침을 펴기도 하였습니다. 지적인 수준에 따라 다양하게 펼치신 가르침은 조금씩 다른 교학적 체계로 발전하였습니다.

결국 네 개의 주요한 불교학파가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몇몇 학파들은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펴신 초전법륜(初傳法輪) 동안 가르치셨던 사성제의 열여섯 가지 모습(十六行相)(*역주: 보통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진리로 알려진 사성제는 다시 각각 네 가지의 구체적인 모습이 있다.

 

이것은 유부(有部)의 학파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 각각을 살펴보면, 고제(苦諦)에는 비상(非常), 고(苦), 공(空), 비아(非我)가 있고, 집제(集諦)에는 인(因), 집(集), 생(生), 연(緣)이 있으며, 멸제(滅諦)에는 멸(滅), 정(靜), 묘(妙), 리(離), 그리고 도제(道諦)에는 도(道), 여(如), 행(行), 출(出)이 있다.)만을 주장합니다. 이 학파들에게는 공성이나 무아(無我)에 대한 가르침이 거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몇몇 경전들은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경전들을 결정적인 가르침과 해석적인 가르침 즉 요의(了義)의 가르침과 불요의(不了義)의 가르침으로 분류합니다. 이러한 용어들에 대한 정의 역시 학파들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유식학파(唯識學派)는 결정적인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해석적인 가르침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립논증(自立論證) 중관학파에서는 결정적인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궁극적인 진리로 인정하고 직접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 이외의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해석적인 가르침으로 분류합니다.


궁극적인 진리인 미세한 공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공성에 대한 주제를 허물없이 잘 드러내고 있는 경전과 논서들을 따라야 합니다. 결국 경전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결정적인 내용인지에 따라서 적절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러한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스승들이 먼저 분류해 놓은 것을 따라서, 어느 것이 결정적인 내용이고 어느 것이 해석적인 내용인지 하나씩 공부해 나가다 보면 공성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까말라실라께서는 결정적인 경전인 요의(了義) 경전과 해석적인 경전인 불요의(不了義) 경전을 모두 함께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본문은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을 위한 일반적인 준비사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요가 수행자는 언제나 생선과 고기 등을 피하고 가까이 하지 않으며 [수행자에게 맞는] 적당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수행자들은 육체적인 건강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적절한 음식은 필수적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음은 맑고 강건해야 합니다.

이 또한 육체적인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생선이나 고기, 마늘, 양파 등을 먹지 말라고 제안합니다. 수행 중에는 수행에 도움이 되고 소화에 무리가 없는 적절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과식을 하면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보살은 지(止)와 관(觀)의 모든 자량(資糧)을 쌓음으로서 수행에 들어가야 합니다.


수행 중에는 밤의 처음과 밤의 마지막에 잠을 자지 않는 수행이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을 할 때는 한밤중에 잠을 자는 동안에도 억념(憶念)의 상태에서 적절한 자세를 유지합니다.


채식만으로도 영양섭취가 충분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좋은 삶의 방식입니다. 완전한 채식을 하기가 힘든 경우도 되도록이면 적당한 양의 고기만을 섭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남방 불교의 몇몇 학파에서도 육식을 엄격히 금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동물을 도살한 고기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지 않고, 그 동물에 대해 잘 모르며, 자신을 위해 동물을 죽였다는 의심이 없는 “청정한 고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대승 불교에서도 육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입능가경(入楞伽經)』과 같은 경전에서는 육식을 하는 것이 아주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아짜리야(Ācarya, 傳敎師) 바바비베까(Bhavaviveka, 淸辯)의 『중관심송(中觀心頌)』같은 경전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야바라밀(般若婆羅蜜)과 관련한 대승 경전에서도 주로 육식을 금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세 가지 하급 밀교(密敎) 수행에서는 육식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무상요가(無上瑜伽) 계열에서는 다섯 가지의 고기와 다섯 가지의 감로(甘露)(*역주: 오종육(五種肉, ꇅ Sha lnga, sha chen sna lnga)은 보통 코끼리고기(象肉), 인간고기(人肉), 말고기(馬肉), 개고기(狗肉), 소고기(黃牛肉)을 말한다. 그러나 말고기 대신에 새고기(鳥肉)을 포함할 때도 있다.밀법의 오감로(五甘露, ꇅ bdud rtsi lnga)는, 신성한 소의 다섯 가지 생산물인 오줌, 똥, 우유, 버터, 커드(curd)를 말하는 오정(五淨, ꇅ ba byung lnga)과는 달리, 오방불(五方佛) 중에 보생불(寶生佛)을 피(血)로, 무량광불(無量光佛)을 정액(精液)으로, 불굥성취불(不空成就佛)을 인육(人肉)으로, 부동불(不動佛)을 소변(小便)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대변(大便)으로 여기는 것을 말하며, 대변, 소변, 백보리(白菩提), 적보리(赤菩提), 골수(骨髓)의 다섯 가지를 말하기도 한다.)를 특별한 수행의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육식은 일반적인 한도 내에서 필요에 의해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만을 섭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을 위해 동물을 희생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관심 있는 수행자들은 지(止, Śamatha)에 대한 수행을 하기 전에 필요한 것이 갖추어져 있고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장소 등을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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