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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0.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가르침

5. 극락세계, 참다운 실상

5. 극락세계, 참다운 실상

 

 

  극락세계는 분명히,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존재하는 실상(實相)의 세계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가상의 세계이고, 극락세계야 말로 참다운 실상의 세계인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우리가 몇 만 번의 생을 되풀이 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도달해야 할 근원적인 영생의 고향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어려운 말도 있고 쉬운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모두가 다 같은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모두 다 영생불멸한 고향자리를 보여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는 우리 중생이 가진 보통마음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명의 근본 도리를 알지 못하면 그 영원한 고향 자리는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생명의 근본 도리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성(佛性)이나 법성(法性)이나 진여(眞如)나, 우리 생명의 근본 도리를 표현한 말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만 가지고서는 우리의 근본 성품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인식능력은 한계가 있어서 육안에만 의존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상(相)밖에 인증을 못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상(我相), 너라는 상(人相), 또는 중생이나 산이나 물이라고 하는 상대 유한적인 상(衆生相, 壽者相)밖에 인식을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을 가지고는 우리 본래의 자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을 한 말로 말하면 “모든 상을 거두어서, 상을 여의고서 상을 초월한 영원의 자리로 돌아가라(攝相歸體 捨妄歸眞)”는 말씀, 즉 다시 말하면 본체로 돌아가는 말씀인데 사람들은 상(相) 밖에 인식하지 못하므로 부처님 법에 다가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극락세계를 이야기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못미더워합니다. 극락세계란 참으로 있는 세계가 아니라 사바세계에서 고생하는 중생들을 달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스님들 가운데서도 극락세계가 실제로 있는지 의문을 품는 분들이 있습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극락세계를 백번 천 번 듣는다고 해도 마음에 닿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극락세계를 낯설게 생각하고, 정녕 우리의 근본 자리를 믿어야 할지 고민하고, 극락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지 의심을 합니다.

 

극락세계는 분명히,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존재하는 실상(實相)의 세계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가상의 세계이고, 극락세계야말로 참다운 실상의 세계인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우리가 몇 만 번의 생을 되풀이 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도달해야 할 근원적인 영생의 고향입니다. 인간은 극락세계에 가기위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을 하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불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극락세계라고 하는 영원의 세계에 가기 위해서 걸음걸음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극락세계에 가야 하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 극락세계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본래 성품이 불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가 불성으로 부처의 성품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본래 불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불성과 오로지 하나가 되는 자리에 있지 않고서는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방 5리에 안개가 자욱한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현대식 단위로 말하면 사방 2㎞에 안개가 자욱한 것입니다. 안개가 조금만 끼어도 앞이 잘 안 보여 답답한 것이 사람인데, 2㎞나 자욱하게 안개가 끼어있으면 앞뒤 분간도 못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이라는 것은 그와 똑같습니다. 전생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죽어서는 어디로 갈지도 모릅니다. 몇 분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니 과거도 모르고 미래도 모릅니다. 그러니 마음이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자(聖者)가 되어야 비로소 과거나 미래를 훤히 내다볼 수 있습니다. 견성오도(見性悟道)라, 자기 본래의 성품을 봐야만 비로소 시야가 트인다는 말입니다. 범부(凡夫)는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견성오도를 말하면 견성오도는 열심히 공부하는 스님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부처님 말씀만 조금 따라가는 것도 벅찬데 어떻게 견성오도의 경지에 이를 것인지 걱정부터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쉽게 포기하면 안 됩니다. 견성오도를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견성오도를 못하며 육도윤회(六道輪廻)입니다.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아수라나 인간이나 또는 천상으로 뱅뱅 돈단 말입니다.

 

과거의 위대한 학자들 중에서는 윤회설(輪回說)을 이야기한 분들이 많습니다. 윤회설은 우리가 지은 업보에 따라 사람으로, 축생으로, 지옥으로 뱅뱅 돈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도인(道人)들은 윤회설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과거나 현재를 뻔히 내다보는 분들입니다. 분명히 보이는 것이니 윤회설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아 있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을 볼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으로 보면 다릅니다. 전생에 더러는 귀신도 되고, 더러는 축생도 되고, 또는 지옥도 다 갔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래 성품은 다 부처이고 불성이지만 무지(無知)와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말도 함부로 하고 행동도 함부로 하고 생각도 함부로 하면 결국 개도 되었다가 소도 되었다가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제대로 살아서 지금에야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인과(因果)라는 것은 조금도 더하고 덜함이 없이 꼭 그대로 다 받습니다. 지금 우리가 금생에서 여러 가지 고생을 겪고 있지만 이런 것이 모두 다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지어서 그대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나 목소리나 얼굴 생김생김도 모두가 다 과거세 자기 업(業)의 과보(果報)를 금생에 받은 것입니다. 다음 번 생인 내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생은 금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받게 됩니다.

 

불경에 “일념오백세(一念五百歲)”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가지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의 기운이 오백세 동안이나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그 마음이 한 생 두 생 거듭해서 오백세 동안이나 흘러갑니다. 남을 지나치게 좋아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생각 하나, 좋은 생각 하나를 품어도 그 기운이 오백세나 흘러갑니다.

 

이렇게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나 혹은 같이 모여 공부하는 사람들 모두 만나서 서로 참 반가운 고향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또 조금만 더 있으면 반드시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돌고 도는, 숙명적인 무상(無常)의 물결 위에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고향이라 하는 극락세계가 없다고 하면 인생을 살 가치가 없습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어차피 죽어갈 것이고, 죽은 뒤에 천상도 없고 극락도 없이 그냥 자연적으로 뱅뱅 도는 윤회만 있다고 생각할 때는 삶이 의미가 없습니다.

 

영원불멸의 극락세계는 분명히 실제로 존재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이야말로 가상에 불과한 것이고, 극락세계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영원의 고향이고 참다운 실상의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