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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0.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가르침

2. 염불과 화두

2. 염불과 화두

 

 

 

 

선방에서 몇 십 년 동안 화두를 들고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의단을 품는다 하더라도 염불하는 마음이 화두하는 마음의 밑바닥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 공부가 되는 것이지 그냥 덮어놓고 의심한다 해서 그것이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염불수행자(念佛修行者) 인중분다리화(人中芬陀利華)”라는 말이 있습니다. 분다리화는 가장 청정하고 향기로운 연꽃입니다. 염불수행자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정녕 향기로운 연꽃과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불교의 삼법인을 알고 외도와 정도와의 차이를 알고 불교의 교리를 익히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설사 철학적인 것을 깊이 모른다 하더라도 그저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것만 해도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향기로운 연꽃과 같습니다. 부처님이야말로 영생불멸한 실존이고 실상 자체이니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그래서 “관음세지(觀音勢至) 위기승우(爲其勝友)”라고 했습니다.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 같은 보살들이 염불하는 사람을 가장 훌륭한 벗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저 뜻도 모르고 염불을 하는 사람이라도 염불하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인 동시에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 같은 보살들이 가장 훌륭한 벗으로 삼습니다.

 

왜냐하면 나무아미타불은 세상의 모든 개념 가운데 가장 고귀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무생청정(無生淸淨) 보주명호(寶珠名號)”라고 합니다. 생사를 초월한 보배 구슬 같은 이름이란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고, 가장 행복스럽고, 가장 위대한 이름 이것이 부처님 이름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최상의 이름을 갖는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 이름 가운데는 이루 헤아리지 못할 만큼의 공덕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이름은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본래 의지할 곳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무서우면서도 가장 자비롭고 가장 지혜로운 이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장이나 귀신이나 천상의 천신들이나 모든 존재가 아미타불을 숭앙하고 받들고 지킵니다.

 

우리가 이론도 철학도 뜻도 모르고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 외운다고 해도, 그 이름의 공덕으로 인해 모든 신장이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권위가 있고 두려운 이름이 또 부처님의 이름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는 나쁜 것들이 얼씬도 못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염불인데 어떤 사람들은 염불이 무지한 사람들을 위한 쉬운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고 선방(禪房)에서 화두(話頭)를 들고 의단(疑團)을 품는 것이야 말로 참다운 가르침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염불 공부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선방에서 몇 십 년 동안 화두를 들고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의단을 품는다 하더라고 염불하는 마음이 화두 하는 마음의 밑바닥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 공부가 되는 것이지 그냥 덮어놓고 의심한다 해서 그것이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선이란 본래 내 마음의 주인공을 찾는 공부입니다. 이른바 본체를 여의지 않는 공부라는 것입니다. 선(禪)이라는 것은 본체를 떠나지 않아야 진정한 선입니다.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본체를 떠나버리면 그때는 선이 아닙니다. 따라서 화두 하는 마음 밑에는 반드시 염불하는 마음이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불만 하면 될 일이지 화두는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화두는 우리의 산란한 마음을 통일시켜줍니다. ‘이뭐꼬’화두를 드나 ‘똥막대기’화두를 드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화두를 들든 목적은 화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산란한 마음을 통일시켜 본래 우리 생명이 부처이고 아미타불 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부처를 찾기 위해 화두를 통해 임시로 의심을 품는 것이지 의심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화두를 드는 것도 좋기야 좋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화두를 빨리 타파해서 의심이 없는 그 자리, 의심이 없이 부처님을 확신하는 그 자리로 빨리 가야 합니다. 화두의 의의는 그런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본말이 전도가 된 형국입니다. 사실 신앙이라는 것은 의심이 있으면 안 됩니다. 100% 그대로 완벽히 믿어야지 티끌만큼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예로 달마스님도 의심하라는 말 한마디 안하셨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더라도 의심하라는 말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마조스님이나 백장스님이나 임제스님이나 의심을 하라는 말이 한군데도 없습니다. 6조 혜능스님이나 그 뒤의 마조스님, 백장스님, 황벽스님, 임제스님 같은 분들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바로 사람 마음을 직접적으로 가리켜서 깨닫게 했습니다.

 

중국 남송 때에 이르러서야 대혜스님께서 비로소 화두라는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우리의 참 주인공을 찾는 하나의 방편으로써의 화두를 제시한 것입니다. 절대로 의심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이도 한국에서는 사람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깨닫게 하는 쪽의 선법이 차츰 이울어지고, 남송 때 대혜종고스님이 내놓은 화두법이 융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고려 때로, 그때 화두법이 한국으로 수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자체는 송나라,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 때 불교가 융성했습니다.

 

명나라 때의 4대 고승이 있습니다. 운서주굉(雲棲株宏,1535~1615), 감산덕청(憨山德淸, 1546~1623), 자백진가(紫栢眞可, 1542~1603), 우익지욱(藕益智旭,1599~1655)이라고 하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모두 화두를 염불로 삼았습니다. 화두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 자체를 화두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가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숭앙하는 정책을 펴서 한국의 불교와 중국의 불교는 교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이나 한국 불교는 제대로 발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500년 동안은 불교의 교화나 참선 면에서 굉장히 큰 손해를 본 것입니다.

 

명나라 때 4대 고승들이 화두를 염불로 하던 풍조가 한국에 성공적으로 들어왔었더라면 지금 한국 선방에서 화두를 한다고 끙끙 앓으면서 의심만 하는 풍조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화두를 잡고 의심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화두가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을 깨닫고 빨리 화두를 타파해 우리 마음의 본래 자리에 도달해야 합니다. 마조스님같이, 백장스님같이 100% 의심 없는 그 자리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