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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0.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가르침

3. 염불(念佛)과 염불선(念佛禪)

3. 염불(念佛)과 염불선(念佛禪)

 

 

 

 

천지우주는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참다운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자리가 바로 내 자성(自性)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됩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본체를 여의지 않고 염불을 하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부처님이 저 밖에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은 염불선이 못됩니다.

 

 

 

  이왕 염불을 할 것 같으면 염불선(念佛禪)을 하고 싶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 같은 사람도 일반 염불과 염불선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염불과 염불선의 차이를 고민하다 보니 염불선의 체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말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해도 꼭 자기 식대로, 자기 의견대로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염불이 고유하게 정해진 음정에 따라서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를 내면서 해도 좋고, 안내고 속으로만 해도 좋고, 계행(戒行)을 지키면서 염불을 해도 좋고, 계행을 지키지 못하면 또 지키지 못 한대로 염불을 해도 좋습니다.

 

염불은 다 좋은 것입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소리를 내나 안내나 염불하는 것은 어느 때나 좋습니다. 염불이라는 것은 생각 염(念)자에 부처 불(佛)자 부처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정한 박자에 맞추지 않고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염불을 하는 데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누구 식으로 따라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극락세계에서는 꼭 어떤 식으로 하라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극락세계라는 것은 모두가 다 광명정토(光明淨土)입니다. 지금 여기에 사고 있는 우리 사람같이 물질적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광명세계란 말입니다. 우리 몸도 광명입니다.

 

극락세계의 중생은 무극허무지신(無極虛無之身)입니다. 물질이 아닌 광명으로만 된 무량(無量)의 몸이라는 말입니다. 몸이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극락세계의 중생은 개체인 동시에 바로 전체입니다. 자기 몸이 우주와 분리되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몸이라는 뜻입니다.

 

극락세계의 중생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 중생들도 똑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개체인 동시에 전체입니다. 개체와 전체는 절대 따로따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제법무아라, 모든 존재는 ‘나’라고 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비어 있다는 것과 인연법(因緣法)을 알면 저절로 알 수 있는 이치입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입니다. 모두가 다 한 고리로 얽혀 있다는 말입니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전체를 보지 못하니까 내가 따로 있고 너도 따로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인연법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인연법만 잘 알아도 우리 모두가 다 본래 하나의 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로 볼 수만 있다면 저절로 참다운 대비(大悲)가 나옵니다. 참다운 자비가 나옵니다. 나와 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참다운 무주상행(無住相行)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남에게 베풀면서 나라는 상(相)을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염불과 염불선의 차이가 나옵니다. 염불선은 근원적인 문제, 즉 본체를 여의지 않고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 이치에 따라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지만 어려워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천지우주는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참다운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자리가 바로 내 자성(自性)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됩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본체를 여의지 않고 염불을 하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부처님이 저 밖에 다른 어떤 곳에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은 염불선이 못됩니다. 그래도 그냥 염불은 되므로 그렇게라도 열심히 하다 보면 마음이 모아집니다. 본래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므로 꾸준히 염불을 하여 마음이 모아지면 결국은 우주의 본바탕인 진여불성과 하나로 계합됩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혼란한 시대입니다. 마음을 모으기도 어렵거니와 자본주의 산업사회라는 것은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는 것을 미덕으로 치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사람 욕심만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무시무시한 경쟁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많이 가지려고 하고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다 보니 사람들끼리 다투기는 쉽고 화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별스러운 사회적 폐단들이 등장하고 환경도 파괴됩니다.

 

모두가 다 바른 진리를 모르는 데서 오는 무지(無知)와 무명심(無明心)에서 비롯된 폐해입니다. 이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 것, 네 것을 갈라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에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본체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생명의 본체가 곧 불성이고, 법신이고, 진여입니다. 부처님께서 마르고 닳도록 말씀하신 법신ㆍ진여ㆍ불성 또는 실상ㆍ실재, 또는 주인공 이런 말이 모두 다 하나의 도리입니다. 글 자리가 바로 열반이고 바로 극락입니다.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 참다운 불교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를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사바세계 이대로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몸이 그대로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왜냐하면 전체 우주의 생명과 내 생명이 따로따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바탕을 보지 못하고 몽환포영(夢幻泡影)같은 꿈이요, 그림자요, 거품 같은 들떠 있는 상만 봅니다. 중생의 인식 능력으로는 그렇게 밖에 보지 못합니다. 모두가 하나의 생명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이 통일되어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 진여불성을 깨닫게 되면 근본 바탕을 볼 수 있습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닌 우주의 모두가 하나의 생명으로 해서 통일되어버리는 그런 근본 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지에까지 가야합니다. 그래야 생사윤회를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되면 염불보다 염불선이 높은 차원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됩니다. 삼매라는 것도 참선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우주의 본 생명,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는 것이 참선의 목적입니다. 삼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이 삼매에 든다는 것은 산란한 마음을 쉬게 하여 우주의 본바탕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진여불성 자리에 들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염불도 하고 염불선도 하는 것인데,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염불삼매(念佛三昧)입니다.

 

공부를 해보신 분들은 우리 마음을 통일시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압니다. 앉아서 집중을 하려고 하면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듭니다. 그 생각의 실마리를 모두 거두어 하나로 모으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마음을 통일시킨다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 방법으로 화두라는 것도 나온 것입니다.

 

과거 전생에 업장이 가벼운 분들이나 마조나 임제나 백장 같은 스님들은 마음을 먹으면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즉시 내가 부처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여러 가지 잡다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처럼 범상한 사람들은 좀처럼 마음을 통일시키기가 어렵습니다. 이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이 염불을 통해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