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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9. 말씀

마음의 성품

마음의 성품


- 참선은 증상심학

 

참선(參禪)은 심학(心學)이라, 마음 배우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런데 마음, 이것이 가장 가깝고도 실은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챙기려고 들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안 죽어봐서 알 수 없습니다만, 죽어보면 그야말로 마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가 있고, 몸과 마음의 비중 역시 몸은 별것 아니고 마음이 주인이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 죽어봐서 그걸 확실히 모른다고 하지만, 성자(聖者)들은 안 죽어봤다 하더라도 과거ㆍ현재ㆍ미래를 통하기 때문에 마음과 몸의 비중을 압니다. 죽는 찰나 몸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마음성[心性]만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요즘은 구정(舊正)을 두고 '조상의 날'이다, '민속의 날'이다 해서 어휘 가지고도 말이 많은 모양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분들은 그냥 "조상의 제사 모시는 것은 옳지 않다. 죽어지면 다 그만인 것인데 영혼을 위할 필요가 없다"라며 구정 자체를 반대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인간이 죽어서 가는 영혼세계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몸은 다만 영혼과 우리 마음에 따른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라, 부모한테서 나기 전의 우리 본래생명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해 본다고 할 때 한번 따질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는 우리가 부모한테서 태어나 이렇게 사람 모양이 되었습니다만, 나기 전의 그 생명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굉장히 깊은 문제입니다.


우리의 생(生)은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이 문제도 역시 그와 같은 문제 아니겠습니까. 죽어서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도 크지만 우리 생이 어디에서 왔는가? 이 문제도 굉장히 큽니다. 그러나 우리 안목은 제한되어서 과거도 못 보고 미래도 못 봅니다. 천안통(天眼通)을 통한 안목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비로소 과거도 보고 미래도 본다는 것입니다. 도인들이 밝혀 놓은 법문에 의하면, 우리가 부모한테 의지하기 전에는 무엇인고 하면, 하나의 영혼으로 해서 헤매는 영혼체(靈魂體)라고 합니다. 사람 모양이 아니라 사람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무엇, 요새 심령과학에서 말하는 유체(幽體)라는 말입니다.


유체, 이것이 영혼과 더불어서 헤매고 있다가 부정모혈(父精母血)이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緣)을 만나서 그 기운에 딱 붙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불교에 있어서는 아주 세밀히 풀이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영혼도 역시 사람으로 살다가 죽었겠지요. 또는 개나 돼지나 그런 것으로 있다가 죽었겠지요. 그런 영혼이 헤매다가 가사, 부모 되는 내외간이 만나서 기운이 결합되면 영혼체가 멀리서 보고 있다가 거기에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 몸뚱이가 아닌 그윽한 몸인 영혼체는 아무리 멀리까지도 다 아는 것입니다.


가사, 미국에서 헤매는 영혼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자기 부모 될 만한 사람이 딱 결합하면 그때 그것을 보고서 안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잘은 못 통해도 천안통을 통하는 것이기에 안다고 합니다. 따라서 부모 연 따라 자기한테 인연이 맞으면 거기에 딱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시초는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오직 하나의 점(點)입니다. 지금은 눈이 예쁘네 코가 예쁘네 하지만, 맨 처음에 부모한테 붙어 올 때는 하나의 점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이 어머니 태중(胎中)에서 여러 가지로 영양을 섭취해서 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되어서 자라났다가 죽어지면 또 무엇이 남습니까? 실상 몸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죽은 송장은 싫어합니다. 썩은 송장이 있는 방에 누가 들어가려고 합니까? 오직 남는 것은 그 마음, 영혼만 남습니다. 영혼만 남아도 그놈이 역시 또 헤매다가 자기한테 알맞은 인연이 있으면 또 그리로 붙어 가는 것입니다. 금생에 쓰는 마음씨가 개 같으면 개의 태중에 들어가서 개가 되고, 또 소 같으면 소의 태중에 들어가서 소로 태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윤회(輪廻)는 사실입니다.


불교에서 '악(惡)을 행하면 안 된다, 좋은 일을 많이 해라' 하고 권선징악(勸善懲惡) 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설(方便說)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몇 천 번, 몇 만 번 그와 같이 서로 사람도 되었다가 이렇게 뱅뱅 윤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마음 따라서 그럽니다. 마음 잘못 쓰기에 치근차근 윤락(淪落)되었다가 또 조금 잘 쓰면 초승(超昇)합니다. 이렇게 마음은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 잘못 쓰면 마음같이 더러운 것이 없습니다. 굉장히 비겁합니다. 또 마음 잘 쓰면 마음같이 고결(高潔)하고 고상(高尙)한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마음 쓰는가? 마음을 가장 잘 쓰는 법, 이것이 참선입니다. 마음을 가장 잘 써서 마음의 가장 본질, 본바탕이 되는 마음에 딱 들어가면 그것이 성불입니다. 우리 같은 스님네가 될 때 맨 시초부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또는 '마음이 곧 부처다' 이런 말을 항시 들었지요. 그러나 몇 년간 세월이 흘러도 당초(當初)에 그것이 납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 분명히 이렇게 물질뿐인 것인데 일체유심조라', 일체 만물은 마음으로 되었다는 그것이 납득이 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리학도 배우고 무엇도 배워 놓으니까, 그런 것이 머리에 들어 가지고 당초에 일체유심조라는, '모두가 마음뿐'이라는 생각이 우리 마음에, 우리 머리에 잘 안 들어옵니다. 물질만 사실 같고 마음은 그냥 물질에 따르는 한 가지 반영체나 그림자 같단 말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마음이 무엇인가'를 조금씩 음미해 보니까 차근차근 그때는 일체유심조라, 일체가 마음뿐이라는 그 말씀이 조금씩 납득이 되는 것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씀에도 '부처란 소중한 것인데, 천지우주의 절대적인 것이 부처인데, 나 같은 이런 마음이 어떻게 부처가 되랴' '남을 미워도 하고 사랑도 하는 이런 아니꼬운 마음, 이것이 무슨 부처가 되랴' 이렇게 생각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실히 아는 것이 불교인 동시에, 이러한 것에 가장 가까운 길, 가장 가깝고도 군더더기나 찌꺼기를 다 버려버린 정수(精髓)가 참선이라 하는 심학(心學)입니다. 참선, 이것은 증상심학(增上心學)입니다.


- 유식삼성


   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 정유리무(情有理無)

   二. 의타기성(依他起性) : 여환가유(如幻假有)

   三. 원성실성(圓成實性) : 정무리유(情無理有)ㆍ진여(眞如)ㆍ진공묘유(眞空妙有)

   [- 이 삼성(三性)으로써 비공비유(非空非有)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표현함]


일체는 유식삼성(唯識三性)이라,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유심(唯心)이나 유식(唯識)은 똑같은 뜻입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조금 차이 나게 풀이가 됩니다만 같은 뜻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품에 여러 가지 구분이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만, 우선 간추리면 삼성(三性)이라, 세 가지 성품으로 줄여서 말씀합니다. 이런 법문은 불교 전반적으로도 되어 있으나 불교심리학인 유식론(唯識論)에서 말씀하는 법문입니다.


맨 처음에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우리 중생은 절대로 바로 못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로 못 보는 견해를 옳다고 생각해서 고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이 한 가지 중생의 습기(習氣)가 되어 버렸습니다. '내 견해가 절대로 옳지가 않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무지(無知)를 아는 것이 참다운 지혜'라고 말입니다. 자기가 보는 견해가 상대유한(相對有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은 절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지혜에 들어갑니다.


변계소집성이란, 두루 계교(計較)하고 헤아려서 집착하는 성질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중생의 성품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일체 만물을 좋다 궂다, 옳다 그르다고 자꾸만 헤아리고 분별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아는 것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마음, 이것이 변계소집성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정유리무(情有理無)라, 중생의 망정(妄情)인 망령된 정(情)에는 있다 하더라도 참다운 진리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진리에는 없습니다.


'저 사람이 밉다' 하는 것도 역시 번뇌에 가린 마음에서 보는 것이지,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미운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은 나의 망정, 나의 망상(妄想)에만 있지 참다운 진리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보통 이와 같이 정유리무라, 우리 중생의 망정에만 있고 참다운 이치에는 없는 것 가지고 싸우고 좋아하고 전쟁까지 합니다.


인류 위기상황도 이러한 정유리무의 법, 중생의 상대유한의 망정에만 존재하고 참다운 진리에는 없는 것 가지고서 억지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변계소집성이라, 두루두루 헤아려서 옳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뿌리쳐 버리면 우리 집안이나 가정이나 마을에 평화가 안 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 무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 역시 인연 따라서 생겨났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생인연멸(因緣生因緣滅)'이라는 말을 흔히들 쉽게 합니다만, 이 말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사람 하나가 존재한다 해도 천지우주가 거기에 다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송이 꽃이 핀다 하더라도 역시 꽃씨나 태양이나 기후나 수분 같은 것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의 모두가 거기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직ㆍ간접으로 먼 원인, 가까운 원인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이나 태양광선이나 어떠한 것이나, 우주의 저 변두리 그야말로 극지(極地)에 있는 어떤 공기나 어떠한 미세(微細)한 존재라도 거기에 다 관계가 있습니다. 단, 직ㆍ간접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중생은 먼 것은 안 보이니까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일체 만유의 것은 결국 타(他)에 의지해서 일어났다[起]는 말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하나의 존재는 일체 만유를, 일체 만물을 다 인연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존재가 나올 때는 일체 만물을 다 인연으로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날 때는 그 어머니와 아버지만 인연이 아니라 무수한 인연이 모인 것입니다. 가사, 오행(五行)을 보는 사람들이 하늘의 별도 보고, 여러 가지 사주풀이를 할 때 그 사람이 태어난 시(時), 날[日], 달[月] 이런 것을 보는 것도 역시 저 북극성이나 하늘의 별들과 다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항시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즉 모든 것을 다, 모든 천지만유를 의지해서 나오는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환가유(如幻假有)라, 허깨비같이 가짜로 임시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나오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일체 현상, 이것은 마치 바다에 뜬 거품 모양으로 사실이 아니요,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일어난 허깨비 같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허깨비 같은 존재를 중생들은 망정(妄情)으로, 망상(妄想)으로 헤아려서 좋다 궂다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궂은 것도 아니고, 이쁜 것도 미운 것도 아닌데, 중생이 괜히 자기 뜻으로 헤아려서 좋다 궂다 고집하고 싸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성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원성실성(圓成實性)입니다. 원만히 성취된 참다운, 실다운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실존(實存)이고 실상(實相)입니다. 이것은 정무리유(情無理有)라, 우리 중생의 망정에는 없지만 참다운 이치에는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실상이 보입니까? 우리는 불성도 못 보고 진여도 못 봅니다. 부처나 여래도 못 봅니다. 따라서 중생은 안 보이니까 부인(否認)합니다. 그러니까 중생의 망정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원리, 참다운 근원적인 이치(理致)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시하는 것은 실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스스로가 인생고해(人生苦海) 아닙니까? 그러나 천박한 사람들은 인생고해마저 잘 못 느낍니다. '인생은 향락이나 하고 멋대로 즐기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고해라고 생각하면 웬만한 것은 잘 참습니다만, 인생은 원래 행복스러운 것이라고 하면서 고생이 오면 그냥 나에게만 왔다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실상은 결국 고생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낳는 것도 고생, 사는 것도 고생, 또 아파서도 고생, 죽어서 고생, 늙어서 고생, 헤어져서 고생, 모두가 고생인 것입니다. 안락(安樂)은 잠깐, 순간순간, 고생의 막간에 존재하는 허망한 것에 불과하고 사실은 고생뿐입니다. 신라 때 사복(蛇福)이란 사람이, 어머니는 절의 종이었는데, 열두 살 먹도록 벙어리같이 말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바보천치같이 보았겠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은 깊은 선정에 잠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위대한 성인인 원효(元曉)대사한테 가서, 어머니 장사를 같이 지내자고 했습니다. 성인(聖人)끼리는 서로를 알아봐서, 사복이가 말은 못했지만 위대한 성인인 원효대사는 안단 말입니다.


원효대사가 그러자고 하고서 같이 장사를 지내는데, 그 시체에 대해서 원효대사가, "낳지 말라, 죽는 것이 고생이니라. 죽지 말라, 낳는 것이 고생이니라"라고 법문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어지면 임종법문(臨終法門)이라, 죽을 때 영혼한테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아는 바와 같이 생자필멸(生者必滅) 아닙니까. 한번 낳아지면 결국은 죽어지는 것이고, 또 회자정리(會者定離)라,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것 아닙니까. 역시 무상한 것입니다. 그러한 무상법문(無常法門)을 원효대사가 시체한테 했다는 말입니다.


"낳지 말라, 죽는 것이 고생이니라" 한번 낳아 놓으면 결국은 죽는 것이 정칙(定則)이니까 "죽지 말라, 낳는 것이 고생이니라" 한번 죽어 놓으면 해탈을 못하고 윤회할 바에는 이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고생이요, 또 어린애 배서 고생, 날 때 고생, 크려면 고생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사복이가 듣고 있다가 "스님, 말씀이 너무 깁니다. 낳는 것이나 죽는 것이 다 고생이니라"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은 모두가 다 고생입니다.


그러나 인생고를 떠나는 데는 단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불교말로 해서는 '백도(白道)'라 합니다. 어두운 길에서 광명으로 가는 하나의 외줄기 밝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 길이 무엇인가? 이것이 원성실성, 곧 영원하고 참다운 성품을 우리가 찾는 길입니다. 원성실성을 다른 말로 하면 불성, 부처, 열반, 도, 극락, 실상이라 합니다. 다 똑같은 뜻입니다. 시간의 제한도 받지 않고, 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고, 우주에 가득 차고, 영원하고, 일체 공덕이나 모든 재주를 다 갖춘 것이 원성실성이고 다른 말로 하면 진리, 도, 부처, 하느님이라 하는데 다 같은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런 말이 많으니까 그냥 말 때문에 혼란을 느껴 버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경을 보더라도 이런 원리를 아는 분들은 그냥 척척 알게 되는 것인데, 조금 어려우니까 말 때문에 그냥 혼동을 해서 혼미를 느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구하는 불성이나, 성불, 열반, 극락, 도, 진리, 주인공, 본래면목 같은 것이 모두가 다 똑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있다는 고집으로 느끼는 망정(妄情), 범부의 망상(妄想)에만 존재하고 실제는 없는 것이 현상세계입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비유하는가 하면, 불가에서는 사승마(蛇繩麻)라 합니다. 뱀 사(蛇)자, 새끼줄이나 노끈 승(繩)자, 삼 마(麻)자입니다.


사승마란 무엇인고 하면, 우리 중생이 망상으로 고집하는 견해, 이것은 마치 어슴푸레한 때 새끼줄 토막이 있으면 그것을 뱀으로 잘못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새끼줄 토막인데 어슴푸레하여 광명이 없으니까 잘못 봐서 뱀으로 보는 정도의 것이 변계소집성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 실체는 역시 하나의 새끼줄 토막이지요. 그래서 새끼줄 토막은 의타기성에 해당합니다.


뱀으로 본 것은 다만 우리 망상이지만, 현상적으로는 분명 새끼줄 토막이 있습니다. 인연 따라 일어난 것은 의타기성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여환가유라, 다만 임시간 새끼줄로 만들어져서 새끼줄 토막이 되었던 것이지 역시 짚이나 삼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새끼줄 토막의 본질은 삼이나 짚입니다. 따라서 새끼줄 토막을 이룩한 본질은 원성실성에 해당합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이러한 것을 못 보고 다만 어두컴컴할 때 새끼줄 토막을 뱀으로 보는 그런 견해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무지를 알아야 합니다.


- 마음의 구성 : 십식


  ①안식(眼識):눈 ②이식(耳識):귀 ③비식(鼻識):코 ④설식(舌識):혀 ⑤신식(身識):몸

  ⑥의식(意識):뜻

  ⑦말나식(末那識):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등의 망식(妄識)

  ⑧아뢰야식(阿賴耶識):장식(臧識)

  ⑨암마라식(菴摩羅識):무구식(無垢識), 백정식(白淨識)

  ⑩건율타야식(乾栗陀耶識):진실심(眞實心), 견실심(堅實心)


그러면 대체로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마음풀이, 이것 역시 유식론(唯識論)이라, 불교심리학에서 말씀하는 것을 들어서 얘기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을 십식(十識)이라 합니다. 식(識)이라는 말도 역시 마음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심(心)이나 식이나 같이 풀이합니다. 심식은 무엇인고 하면, 맨 처음 안식(眼識)이라, 우리의 시각(視覺)이고 그 다음 이식(耳識)이라, 청각(聽覺)이고 그 다음 비식(鼻識)이라, 후각(嗅覺)이고 그 다음 설식(舌識)이라, 미각(味覺)이고 그 다음 신식(身識)이라, 촉각(觸覺)이고 그 다음 제6 의식(意識)이라, 느끼고 판단(判斷)하고 분별하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십식 가운데서 다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의식으로 분별하는 6식까지밖에는 못 씁니다. 인간 이외의 동물은 6식도 못 쓰고 5식까지만 씁니다. 의식 판단은 못하니까 말입니다. 식물은 아무 식도 못 씁니다. 그러나 식이 없다고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초목무심어생호소승(草木無心語生乎小乘)'이라, 풀이나 나무가 마음이 없다고 하는 말은 소승(小乘)에서 쓰인다는 말입니다. 대승(大乘)에서는 이런 말을 안 씁니다. 소승은 밀교(密敎)를 모릅니다. 말하자면 마음의 본질을 못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승은 본질을 봅니다. 따라서 "동물이나 마음이 있지, 나무나 풀은 마음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소승에서만 나온 말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하나의 나무라 하더라도 다 마음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잠재해 있을 뿐입니다. 마음의 형상이 없어놔서 잠재해 있을 뿐입니다. 아, 보십시오. 같은 꽃이라도 똑같은 화분에다 심어 놓고서 하나에는 정성을 들이고, 또 하나에는 정성을 덜 들이면, 똑같이 거름도 주고 물을 주더라도 역시 정성과 마음을 쏟은 쪽이 더 성장하더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초목(草木) 역시 잠재해 있을 뿐이지 마음이 있습니다. 다만 진화과정에 따라서 일반 동물은 그 가운데 잠재의식이 발동되고 계발되어 5식을 쓰고, 사람은 더 계발되고 진화를 거쳐 와서 6식까지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6식이 모두가 아니라 6식 뿌리에는 또한 제7 말나식(末那識)이란 식이 있습니다. 또 말나식이 다가 아니라 말나식의 뿌리에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식이 있습니다. 또 아뢰야식이란 식이 우리 마음의 전부가 아니라 그 저변에는 암마라식(菴摩羅識)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는 또 건율타야식(乾栗陀耶識)이라는 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이나 동물의 마음에나, 풀이나 나무 또는 하나의 전자(電子)나 어떤 것이나 십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자라 하는 것이 무생물(無生物)이라 하지만, 어떤 소립자나 무엇이나 다 식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어느 만큼 계발되었는가 하는 정도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제10식인 건율타야식, 곧 진실심(眞實心) 또는 견실심(堅實心), 이것이 불심(佛心)입니다. 이것이 불성이고 불타요, 진여입니다. 비록 계발만 못했을 뿐이지 일체 만유의, 존재의 근본은 모두가 다 불심입니다. 또한 이것이 청정자성심(淸淨自性心)입니다. 다만 그 존재 자체의 업 따라서 계발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행을 하면 차근차근 6식에서 7식으로 나아가고 그 다음 8식이라,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식의 끝까지 이르면 그때는 성불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제 제일 밑바닥에 닿는다는 말입니다.

고향은 역시 여기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인간 존재가 비록 6식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이런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 중생은 자기 보배를 모릅니다. 금은보화나 보배로 알지 영원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일체 공덕을 갖추고 있는 일체 만덕장(萬德藏), 즉 만덕의 곳집인 영원적인 불심은 잘 모릅니다. 이것만 깨달으면 천지가 자기 것인데 말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지름길은 참선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냥 끄덕끄덕 하나둘씩 올라갑니다만, 참선은 그냥 비약적으로 불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 마음의 본성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감가나 박가나, 지금 우리 마음은 모두가 다 이런 제6의 의식 단계에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마음이 곧 부처라, 비록 우리가 아직 정화되지 못해서 이런 불심은 미처 못 되어 있다 하더라도 불심과 내 마음은 곧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한 마리의 파리도, 파리 마음밖에는 못쓸망정 그도 역시 본질은 같은 부처입니다. 부처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전자도, 겉으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전자지만 본바탕은 역시 불심입니다. 불심과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따져 볼 때는 천지우주 모두가 다 불심을 바탕으로 합니다. 겉에 뜬 것을 중생이 잘못 봐서 정유리무(情有理無)라, 망정(妄情)으로 봐서 나무요, 소요, 중생이 가짜로 이름 지어서 무슨 산이요,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다만 불심이 이렇게 저렇게 변화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도인들은 전부를 다 부처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성불하는 방법도 여기에서 추출이 되어서, 구경지(究竟地)인 우리가 가야 할 고향, 여기를 딱 집어 들고서 안 놓치고 항시 생각하면 그때는 빨리 가겠지요. 바로 이렇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자기 마음 떠나서 저만치 불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본바탕이 바로 불심이기 때문에 불심이라는 그 마음 안 놓치고서 곧장 파고들어 가면, 그때는 우리가 불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인지라, 내 바탕, 천지만유의 바탕인 불심은 그야말로 보다 더 큰 생명이 되겠지요. 그래서 그런 생명을 하나의 원리로만 구하면 그때는 바싹 말라서 납득이 잘 안 되는 것이고 무미건조합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역시 흠모, 추구하는 그러한 감성으로 구해야 합니다. 고도한 문화종교는 모두가 다 신앙 대상을 생명으로 구합니다. 기독교는 '하느님' 천도교는 '한울님' 이슬람교는 '알라신' 모두가 다 생명을 구합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 대상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은 우리 수행법의 가장 중추인 것이고, 기타 방법은 하나의 개별적인 특수에 불과합니다.


화두를 든다, 무자(無字)를 든다, 이런 것은 그때그때 사람에 따라서 특수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줄거리는 생명 자체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화두를 들어서 의심하는 것이나,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나, 어떠한 방법이든지 우리 본바탕 곧 불성을 참구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나 도인들은 모두가 다 생명을 생명으로 수용하는 근본으로써 우리를 지도해 왔던 것입니다.


불교는 일체 만법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을 다 수용합니다. 어떤 법이나 본질은 부처이기 때문에 어떻게 구하든지 들어가서 끄트머리에 가면 그때는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법이나 다 용납할망정, 주장된 우리 수행법은 역시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하고, 생명으로 생각하고, 생명으로 외우면서 다른 방법도 종적(縱的)으로 용납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한테 공덕(功德)을 많이 줍니다. 기독교인들이 '오, 주여!' 하는 그 생각도 역시 굉장히 많은 공덕을 주는 것입니다. 흐트러지고 망정(妄情)밖에 없는 우리 중생이 완벽한 존재를 구하는 그 마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은 승화(昇華)되어 본심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불경에도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라, 신앙심은 도의 근본인 동시에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믿는 마음이 없으면 도는 못 통합니다.


우리 중생은 안 보이지만 부처님이나 성인의 말씀을 우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에게 실상이 보입니까?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자는 거짓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못 믿는 것은 그만치 업장이 무거운 소치입니다. 우리 마음의 광명이 밝아서 실상의, 불성의 지혜가 우리한테 좀 더 빛나 있다면 빨리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두워서 우리 본래마음인 불성광명(佛性光明)이 빛나 있지 않으면 잘못 알고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 불성광명


불성(佛性)은 무엇인가? 그것은 광명(光明)뿐입니다. 그러나 불성광명(佛性光明)은 사바세계에서 보는 유한적(有限的)인 광명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갖춘 광명입니다. 광명을 부정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둠입니다. 또한 물질이란 것은 일차 광명을 부정하는 데서 물질이 생기는 것입니다. 텅 빈 태초(太初)에 우주가 이루어질 때, 어떻게 해서 원자(原子)가 생기고 물질이 생겼을까요? 불교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은 중생의 업(業)에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우주가 텅 비어서 허무(虛無)가 되어 버리지만, 다만 빈 것은 아닙니다. 광명으로 꽉 차 있고 다만 형체만 비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냥 이런 몸이 아닌 광명체(光明體)인 중생들이 생각하면, 생각하는 힘, 곧 업력(業力)이 모이고 모여서 원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중생들은 그때는 형상 없이 다만 광명을 몸으로 하는 중생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런 중생도 아직 성불을 못했기 때문에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즉시 싫어하는 마음의 에너지, 업력 따라서 바로 전자(電子)가 이루어집니다. 또 내키는 마음이 있으면 내키는 마음 거기에서 즉시에 자기(磁氣)가 이루어집니다. 이렇듯 전자와 자기가 모이고 쌓여서 물질이 되고 우주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은 역시 불심입니다. 불심을 우리가 분별시비한 데서 그때그때 물질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물질은 결국 광명을 일차 부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물질에 대하여 차근차근 과소평가하게 되고, 또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닦아보면 알지만, 닦아본 분들은 자기 몸을 굉장히 원수로 여깁니다. 여러분도 닦아 보십시오. 숨이 막히는 것도 이 얼마나 원수입니까? 일차 한고비를 넘어서 몸에 부담이 없으면 그때는 모르겠습니다만, 부담이 없을 때까지는 몸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금 잘 먹으면 배부르고, 조금 덜 먹으면 배고프고, 어디가 조금 얹히면 우리 색신(色身)을 구성한 원소(元素)가 부자유하니까 아프단 말입니다.


우리는 일체가 모두 다 마음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서 그러한 마음을 생명으로, 곧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구하며 부처님의 이름을 우리가 찾는 것입니다. 이런 불성은 천지우주의 밑바닥이고 우주가 다 불성이기 때문에 몇 마디 말로는 표현을 다 못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말씀하신 부처님의 대명사인 이름에 따라서 겨우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미타불' 하면 우리가 뜻은 별로 모를망정 그 말은 벌써 '우주의 모든 실존의 대명사구나'라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또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이 활용하는 하나의 기운입니다. 불경에서 보면 '관음삼십삼신(觀音三十三身)'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관음의 몸이 서른세 가지로 화신(化身)한다는 말입니다. 부처의 몸, 사람 몸, 국토의 몸 또는 귀신 몸 등 이와 같이 화신이 됩니다.


따라서 관음보살은 부처님의 체(體)가, 부처님이 그때그때 만유(萬有)로 형성하는 그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만유를 다시 부처한테로 이끌어 가는 것이 관음보살입니다. 때문에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 근본이요 우주의 근본인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부처님을 우리는 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다만 그저 '끝도 가도 없는 우주에 펼친 광명, 영원적인 진리를 갖춘 광명이 부처구나' '부처님은 우주의 모든 실존의 대명사구나' 이렇게 느끼면서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우며 염(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사소한 것에 얽매이면 공부가 안 됩니다. 참선을 제아무리 많이 했다 해도 마음이 옹졸하면 공부는 못 트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확 열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의심이나 한다든지, 주문(呪文)만 해서 공부한다면 흔히 고집만 강해집니다. 먼저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물론 공부를 하면 열리겠지만 잘못 나가면 공부한다고 해봤자 도리어 마음이 더 옹졸해집니다. 따라서 우선 마음 열어서, 비록 내가 미처 못 증(證)했다 해도, 내 마음은 천지우주를 다 감싸고 모두를 다 자기 마음에다 집어넣어야 합니다. 양자강 물을 한 번에 들이마시는 그런 기운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천지우주의 전부로 보는 지위에서, 전부를 내가 다 감싸버리는 그런 기백으로 공부를 해야만이 차근차근 마음 지평(地平)이 열려갑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시 그러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광명을 상상하면서 부처님 이름을 외우고 염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름은 그냥 우리 중생 이름과는 다릅니다. 부처님 이름은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이름 자체에 부사의한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몸에 향(香)을 지니면 우리 몸에서는 그냥 향냄새가 풍깁니다. 우리 몸에다 나쁜 냄새 풍기는 것을 지니면 또 역시 나쁜 냄새가 풍깁니다. 그와 똑같이 가장 높은 이름이고 일체 공덕이 갖추어 있는 그러한 공덕 이름이 부처님 이름이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을 자꾸만 외우면 그때는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우리 몸에 향기로운 영원자(永遠者)의 빛이 감싼다는 말입니다. '관음보살'을 하루에 몇 만 번 해보십시오. 그 사람 얼굴은 이상하게 빛납니다. 원래 우리가 부처인지라 또 이름 자체에 영원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서, 부르면 부를수록 결국은 우리 몸이나 우리 마음은 향기롭게 빛납니다.

 

광명은 차근차근 증장(增長)되어 갑니다. 원래 불심은 광명뿐인 것인데, 우리 중생심은 일차 어두워졌다 해도, 부처님을 부르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광명의 비중이 더 높아져서 우리 마음이 광명 쪽으로, 불성광명으로, 불심으로 가까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광명만으로 충만하면 그때는 성불이 되겠지요. 광명만으로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처님을 한시도 안 놓쳐야 합니다. 그렇기에, 부처님 이름은 지극청정보주명호(至極淸淨寶珠名號)라, 지극스럽고 또는 청정하고 보주(寶珠)라, 보배 같은 그런 광명이 빛나는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아미타불이나 그런 부처님은 무량광불이라 합니다.


이러한 무량한 부처님의 광명을 염두에 두고서 찰나도 잊지 말고서 가는 것이 참선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천지우주를 부처님의 일상(一相)으로 보는 것이고,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일상으로 보는 그것을 안 끊어지게 사뭇 이어간다는 말입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이것이 참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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