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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9. 말씀

염불

염불



- 염불의 의의


 ㆍ念者人人現前一念也 佛者人人本覺之眞性也 現前一念 覺悟本覺眞性 卽是可謂 上根人念佛也 是與佛不二 與佛不離之行也

                                   -《지도론(智度論)》


공부가 익어져서 한고비를 넘어서면 염불이고 화두고 다 초월해 버립니다. 그러나 화두나 염불이나 묵조나 모두가 다 한고비를 넘어서기 전에 습인(習忍)을 익혀서 마음이 딱 자성(自性), 곧 불성(佛性) 한 자리에 머물기 전에 하는 것이지 익은 사람들한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시비논쟁은 말아야 합니다.


염불(念佛)이라 할 때의 염(念)이란 사람 사람마다 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을 말하고, 불(佛)은 사람 사람마다 갖추고 깨달은 근본성품을 말합니다. 염불공부란 우리 눈앞에 좋다, 궂다 시비 분별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우리 본각(本覺)의 참성품을 각오(覺悟)하는 것이요, 이것이 곧 참다운 염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재확인하는 공부입니다. 생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고 부처도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본각진성(本覺眞性)인데 생각생각에 부처를 여의지 않고서 염(念)하는 것이 참다운 상근인(上根人)의 염불인 것입니다.


염불은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부처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를 떠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업장 때문에 자꾸만 떠나 버리니까 우리가 떠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부처임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또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다 부처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도 부처요 좋아하는 사람도 부처라고 깨달으면, 미워도 미운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고 좋아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한테나 남한테나 이런 도리를 역설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 염불의 방법


 1. 칭명염불(稱名念佛):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외우는 염불(念佛)

 2. 관상염불(觀像念佛): 부처님의 원만덕상(圓滿德相)을 관찰하는 염불(念佛)

 3. 관상염불(觀想念佛): 부처님의 공덕(功德)을 상상하며 하는 염불(念佛)

 4. 실상염불(實相念佛): 불(佛)의 법신(法身)이 비유비공(非有非空)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묘심(妙心)임을 관조(觀照)하는 염불(念佛)


염불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 염불이라고 하면 부처의 이름, 명호(名號)를 외우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있고, 부처의 상호 32상(三十二相)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춘 원만덕상을 관찰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이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그림을 보면 기분이 좋듯이 부처님의 상호만 보아도 우리 마음에 우러러 숭앙이 되고 한결 안심이 되고 아늑한 평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관상염불(觀想念佛)이 있습니다. 음은 똑같습니다만, 앞의 것은 상(像)을 관찰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상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공덕(慈悲功德)이라든가 훤히 빛나는 지혜광명(智慧光明) 등 부처님의 공덕을 상상하는 염불입니다. 그 다음은 실상염불(實相念佛)입니다. 이것은 현상적인 가유(假有)나 허무에 집착하는 무(無)를 모두 떠나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이른바 법신(法身)자리를 생각하는 염불인 것입니다.


진여불성 자리를 생각하는 실상염불이 참으로 본질적인 염불입니다. 이른바 법의 실상, 내 인간생명의 실상, 우주생명의 실상을 우리가 관찰하는 것입니다. 관찰은 분명히 뚫어지게 안 보이니까 볼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생각만 해도 관(觀)이라는 뜻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부처의 법신(法身)이 있지도 않고 또는 공(空)하지도 않은 중도실상의 생명의 광명을 관조하는 염불이 곧 실상염불입니다.


우리가 의심을 품는 문제는 부처님의 명호에 대해서입니다. 우리 스님네나 재가불자들 중에 '어떤 부처를 염해야 할 것인가?' 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분이 있습니다.


《지장경(地藏經)》을 보면 지장보살을 염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되어 있고,《아미타경(阿彌陀經)》을 보면 아미타불을 한 번만 잘 염해도 극락세계에 간다고 되어 있고, 또《관음경(觀音經)》을 보면 욕심이 많을 때나, 마음이 괴로울 때나, 무엇이 안 될 때나, 좋은 사람 만나고 싶을 때나 모두가 관세음보살을 염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佛子)들은 '뭘 염해야 좋을 것인가?' '다 한꺼번에 염해야 할 것인가?' 하고 마음에 갈등을 갖습니다.


가령, 지장보살님을 위주로 염하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보다도 훨씬 공덕이 많다는 생각을 하고 염하면 이는 공덕을 크게 감하는 것입니다. 참답게 지장보살을 염하는 것이 못 됩니다. 또 관세음보살님을 염한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이나 지장보살 염불은 별로 공덕이 없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것이 가장 수승하다고 생각한다면, 참다운 공덕이 못 되고 부처님 법에 여법한 염불도 못 됩니다.


아미타불을 염할 때도 같은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법은 무장무애(無障無碍)하고 평등일미(平等一味)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라는 평등일미 자리에는 높고 낮은 우열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명호나 다 좋은 것입니다.


'오, 주여!' 하고 기독교식으로 한 명호만 있으면 될 것인데 무슨 필요로 복잡하게 많은 부처님의 명호가 있는 것인가? 하고 의단을 품기가 쉽습니다. 이런 때는 부처님의 불성공덕(佛性功德)을 생각해야 됩니다. 불성공덕은 무한공덕입니다. 불가설(不可說)이라, 어떻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쪽으로도 무한하고, 지혜로운 쪽으로도 무한하며, 지구덩어리가 베풀어 주는 은혜공덕으로 보더라도 무한합니다.


부처와 보살의 수많은 명호는 이른바 생신(生身) 보살이 아니라 법신(法身) 보살 명호로, 모두가 다 부처공덕을 상징한 것입니다. 무장무애한 무량공덕이 자비로운 쪽으로는 관세음(觀世音)보살이고, 지혜로운 쪽으로는 문수(文殊)보살ㆍ대세지(大勢至)보살이고, 원력(願力) 쪽으로는 보현(普賢)보살이고, 죽어서 가는 영가를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쪽에서는 지장(地藏)보살ㆍ인로왕(引路王)보살이고, 병고를 다스리고 구제하는 쪽에서는 약사여래(藥師如來)ㆍ약왕(藥王)보살입니다.


법신 부처님이 하늘에 있는 달이나 별 같은 광명체로 화현(化現)하는 쪽에서는 이른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요, 일광(日光)보살ㆍ월광(月光)보살이고, 북두칠성 등 28수(宿) 쪽에서 본다면 칠성(七星)입니다. 예경할 때 보십시오. 산신(山神)을 외울 때도 처음에 '만덕고승(萬德高僧) 성개한적(性皆閑寂)'이라는 말을 합니다. 역시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성중(聖衆)을 먼저 내놓고서 나중에 산신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청정무비한 무량공덕이 산에 들어가 있으면 산신인 것이고, 물에 들어가 있으면 용왕(龍王)이요, 우리 지구에 들어 있으면 지장보살이요, 또 별에 들어 있으면 치성광여래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올바른 해석이 되겠지요. 따라서 중생이 근기 따라서 산신불공을 하더라도 우리 중생이 볼 때 산신인 것이지, 바로 본다면 부처님 화신(化身)인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할 때도 산은 그냥 산이요, 물도 그냥 마시는 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불성의 산으로, 불성의 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해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경을 보면 다 그런 도리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본다면 지장보살을 부르나 또는 무엇을 외우나 '부처님의 화신으로, 부처님의 공덕으로 우리 중생을 다스리는, 자비로 구제하는 공덕명호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우리 마음이 부처님한테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지장보살이나 무엇을 염해도 공부에 조금도 손해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사(本師) 아미타불이라, 모두를 포괄적으로 법(法)ㆍ보(報)ㆍ화(化) 삼신(三身)을 말할 때는 아미타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사 아미타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통 염불할 때는 아미타불을 많이 하는 셈입니다만, 어떤 명호를 부른다 하더라도 아미타불을 하는 것이나 다 똑같은 공덕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 염불삼매


一. 一念으로 佛의 相好를 觀하거나 또는 一心으로 法身의 實相을 觀하거나 혹은 一心으로      佛名을 稱하는 行法을 因行의 念佛三昧라 한다.

二. 因行의 念佛三昧가 成熟되면 마음이 禪定에 들어가고 혹은 十方佛이 現前하며 혹은 法      身의 實相에 契合되는데 이를 果成의 念佛三昧라 한다.


염불삼매(念佛三昧)에는 인(因)과 과(果)의 두 경계가 있습니다. 일심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하는 관상염불을 하거나, 일심으로 법신의 실상을 관하는 실상염불을 하거나, 일심으로 부처의 명호를 외우는 행법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명(佛名)을 외운다 하더라도 꼭 법신자리를 믿어야 참다운 염불이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닦아나갈 때 염불인 것입니다.


우리가 견성하기 전에, 인행의 염불삼매가 성숙되면 마음이 선정에 들어가서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법신의 실상인 진여불성에 계합되는데 이것을 '과성(果成)의 염불삼매'라 합니다. 따라서 염불로도 견성(見性)하고《천수경》으로도 견성하고, 마음에서 업장만 녹아지면 다 견성합니다.


그러나 '시방불이 현전한다, 부처가 앞에 나온다'라는 말이 표현될 때는 또 의단을 품습니다. 부처란 상(相)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나올 것인가? 부처가 상이 있으면 참다운 부처가 못 되겠지요. 우리는 이런 때에도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상이 없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허무가 아니기 때문에 부처의 화신으로 육도중생(六道衆生)이 나오지 않습니까? 본래 실상은 색즉공(色卽空)이라, 본래의 몸뚱이 이대로 바로 空이지만 이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따라서 부처님도 역시 필요한 때는 부처님 상호를 우주에 가득 차게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보면 부처님의 몸은 크기가 육십만억 나유타신(那由陀身)이라 합니다. 나유타는 헤아릴 수 없는 무량수입니다. 그렇게 한도 끝도 없는 큰 몸이 부처님 몸이라는 말입니다. 그 뜻은 바로 시방여래 시법계신(十方如來 是法界身)이라, 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경을 볼 때 말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작게는 바늘구멍 가운데에도 부처님은 들어가신다고 말합니다. 바늘구멍 가운데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세계란 것은 그냥 공간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무량의 공덕을 갖춘, 상이 없는 세계가 바로 허공입니다.

보통으로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허공이라고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허공은 그것이 아닙니다. 무량공덕을 갖춘, 상을 떠난 무량무변의 경계를 바로 허공이라고 합니다.


일모공중에 무량불찰이 광연안립(一毛空中 無量佛刹 曠然安立)이라, 조그마한 터럭 가운데에도 한없는 부처님 세계가 다 원만히 갖춰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작고 적은 것으로 부처님 법은 비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장무애란 것은 작고 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이 아닌 무량공덕을 갖춘 순수생명 자리가 우주에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작다 크다를 초월해 있습니다. 따라서 티끌 가운데에나 삼천대천세계 어디에나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품(性品)으로는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진 애를 쓰고 공부는 하는데, 그럴 만한 인연이 성숙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앞이 확 열려서 부처님이 분명히 앞에 나오십니다. 더러는 부처님 상호가 방 안에 가득 찰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영상(影像)에 집착하고 맙니다. 그러면 공부가 그냥 악화됩니다.


실상무상(實相無相)이라, 실상은 상이 없습니다. 일정하게 고유한 상이 없다고 해서 허무한 것이 아니라 만상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기도를 모시는 분들은 더러 경험하실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금색으로 훤히 빛나는 부처님도 보이고, 어떤 때는 밤인데도 훤히 밝아서 방 안이 다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때에도 집착하면 안 됩니다. 부처가 그뿐만 되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우선 닦아 나가는 수행법인 인행(因行)공부를 하다가 좀 하기 싫거나 빨리 성취하고 싶고 대접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오래 못 닦습니다. 오랫동안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독지옥(孤獨地獄)이라, 우리가 외로운 것도 지옥같이 괴로운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니체의 말대로 "고독은 그대 고향이다. 고독한 가운데 그대의 고향을 가라" 이런 말은 우리한테 감동을 줍니다. 고독을 못 참으면 삼매에 어떻게 들겠습니까? 고독을 못 참으면 무슨 필요로 승려가 되겠습니까?


도반(道伴)이 좋기는 하나 너무 밀착하면 공부에 방해가 됩니다. 대중이 좋으나 공부가 익은 다음에는 또 방해가 됩니다. 달마의 9년 면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석존의 6년 고행상을 상기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독했을 것인가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서 출가사문이 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인간이니까 습기(習氣) 때문에 고독한 때는 친한 사람도 만나고 싶겠지요. 그러나 냉철하게 자기를 추슬러야 합니다.


- 여러 가지 경론의 염불법문


 ㆍ念佛三昧 能除種種 煩惱 及 先世罪         -《지도론(智度論)》7권


용수보살《지도론(智度論)》에는 "염불삼매는 능히 종종의 번뇌나 또 숙세 죄까지도 다 제거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만 그렇겠습니까? 화두나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ㆍ我本因地 以念佛心 入無生忍               -《능엄경(楞嚴經)》5권


《능엄경(楞嚴經)》에는 "부처님께서 인행시(因行時)에, 부처를 생각하는 염불심으로 무생법문에 들어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전에 부처가 없을 것인데 어떻게 부처를 염할 것인가? 부처란 것이 무엇입니까? 부처란 것은 자기 본심, 본각(本覺)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모양으로 상이 있는 부처를 생각하면 의미가 안 통합니다. 자기의 본래면목 자리가 바로 부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본래면목 자리를 생각함으로 해서 우리가 무생법인(無生法忍), 즉 불생불멸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ㆍ念佛三昧 則爲總攝 一切諸法 是故非聲聞緣覺二乘境界  -《염불삼매경(念佛三昧經)》7권


《염불삼매경(念佛三昧經)》에서는 "염불삼매는 곧 모든 수행법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부처의 모양만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못 되겠습니다만, 부처를 본래면목이라고 생각할 때는 다른 묵조선이나 화두선, 간경(看經) 등 모든 수행법을 다 염불삼매에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간경자 혜안통투(看經者慧眼通透)라, 우리가 마음만 순수하면 경을 보면서도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고로 성문이나 연각이나 이승(二乘) 경계가 아니다", 우리가 염불을 성문이라든가 낮은 근기만 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ㆍ以專意 念佛因緣 隨順得生 他方佛土              -《기신론(起信論)》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우리 마음을 오롯이 해서 염불하는 것으로 인연이 되어 부처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꼭 무슨 부처 이름이 아니더라도, 부처를 생각하는, 자성을 생각하는 염불을 오랫동안 할 때 이것이 인(因)이 되고 연(緣)이 되어 극락세계, 이른바 깨닫는 세계, 모든 것이 다 광명으로 보이는 광명의 세계에 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ㆍ如是罪人 以罪業故 應墮地獄 命終之時 地獄猛火 一時俱至 遇善知識 以大慈悲 爲說 阿彌陀佛 十方威德 不可思議 聞法歡喜 此人已除八十億劫 生死之罪 地獄猛火 化爲淸凉風 吹諸天華 華上皆有 化佛菩薩 迎接此人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업장을 많이 지은 죄인들은 과거세나 금생에 지은 업장에 대한 과보로 응당 지옥에 떨어질 것인데, 수명이 다할 적에 지옥의 맹렬한 불이 일시에 그 사람에게 달려든다"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장선화라는 분은 염불로 인해서 왕생한 처사입니다만, 이분은 도한(屠漢)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도살장에서 도살하는 사람입니다. 하여튼 멋도 모르고 그저 돈벌기 좋아하고 고기 잘 먹고 그러니까 그런 짓을 했겠지요.


개 한 마리 죽이면 한 마리 죽인 대로, 개미 한 마리 죽이면 한 마리 죽인 대로 그것이 업장으로 남는 것입니다. 부처와 둘이 아니고 생명이 같기 때문에 말입니다. 개미란 놈이 자꾸만 방에 와서 성가시게 한다고 차별을 두고 죽인다면 그것이 업으로 남는 것입니다. 돼지나 소나 유정물(有情物)인지라, 죽을 때 꼭 원망을 품습니다. 소나 돼지가 죽을 때의 비창(悲愴)한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저는 인공(人共) 때 사람이 죽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몽둥이로 때려서 산 사람이 그대로 죽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때 원망스런 마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생명이 원래 둘이 아닌 것인데, 가사 죽는 사람들이나 죽임을 당하는 돼지나 소나 '당신을 원망한다. 기어코 보복한다'고 말은 안 할지라도 그 원한이 죽이는 그 사람한테 다 배는 것입니다. 또는 그런 원혼들이 틀림없이 보복하겠다는 뜻을 갖는 것입니다. 원망에 사무치는데 보복을 안 하겠습니까? 임명종시(臨命終時)에 그런 많은 업장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간지옥(無間地獄)의 맹화불입니다. 그런 불들이 일시에 달려들어서 괴롭히는 것입니다.


일반 병상에서 돌아가시는 분들 모습도 보십시오. 저같이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은 다른 이의 임종도 많이 봤습니다만, 공부를 많이 하고 음식도 함부로 안 먹은 분들은 깨끗이 돌아가십니다. 그렇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도 보약 많이 먹고 자기 몸만 생각하고 업장을 많이 지은 분들은 굉장히 괴로워합니다. 이른바 단말마(斷末魔)의 고통이라, 그냥 손으로 허공을 허우적거리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은 어떻게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업장 때문에 그럽니다.


하물며 도한인 장선화 그분은 그렇게 많은 소나 돼지를 죽였으니 그 업장으로 얼마나 괴로워했겠습니까? 저승사자가 분명히 와서 묶어가려고 합니다. 원한들의 상징으로 그와 같이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옥맹화(地獄猛火)가 일시에 이르렀어도 다행히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대자비로 베푸는, 아미타불의 무량공덕에 대한 설법을 듣습니다.


"아미타불은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생명 자체이고 그대의 본래면목 자체다. 또 아미타불은 모든 공덕을 다 갖추고 있어서 다만 지성으로 한 번만 생각하고 한 번만 이름을 외운다 하더라도 그대가 평소에 지은 죄업장이 다 없어진다. 지옥도 원래가 없는 것이고, 바로만 보고 바로 생각하면 모두가 다 극락세계다." 선지식인지라 이렇게 설법을 하셨겠지요. 그를 위해서 설한 아미타불 십력위덕(十力威德) 부사의(不思議) 법문을 듣고 환희심을 냅니다.


불량한 사람, 나쁜 사람이라도 죽을 때는 보통 다 선량해집니다. 저는 업장으로 유치장에 가서 3개월 동안 살았습니다. 그때 사형수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승려니까 저한테 위로를 받으려고 말을 많이 걸어옵니다. 사형수같이 순진한 사람들을 저는 별로 못 보았습니다. 저런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을 죽였을까? 원래 부처니까 순진할 수밖에는 없겠지요. 또 사형선고를 받았으니까 자기에 대한 체념을 했겠지요. 죽을 때는 어떠한 사람이나 다 선량해집니다. 그렇기에 고인들이 '새도 죽을 때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지저귀고 악한 사람도 선량한 말을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장선화라는 분도 그렇게 고통을 받겠지만 선지식을 만나 법문을 듣고는 환희심으로 그냥 선량한 마음이 발로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심으로 염불을 하는데 나무아미타불 열 마디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지옥불이 꺼짐과 동시에 맑고 시원하며 환희 충만한 청량미(淸凉味)를 느끼고 극락에 왕생했습니다.


극락 가운데 상품상생(上品上生)은 공부를 많이 해서 번뇌의 습기가 녹은 사람들만 갑니다. 그러나 금생에 성자(聖者)가 아니더라도 부처님 공부도 다소 하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한 분들이 죽는 순간에 부처님 가르침을 100퍼센트 의심 없이 믿고 죽는다면 죽는 순간, 그 마음으로 상품극락에 갈 수가 있습니다. 상품극락은 바로 화장세계(華藏世界)입니다. 살아서는 불량한 사람들이나 일반인들이나 잘못 믿기도 하겠지만, 죽을 때는 만사가 허무해서 선량한 마음이 발동되니까 잘 믿게 되는 것입니다. 또 믿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부사의 법문을 듣고서 환희심을 내는 사람들은 이미 팔십억겁(八十億劫) 생사죄를 멸하는 것입니다. 과거 숙세 무량세를 상징적으로 팔십억 겁이라고 합니다. 무량세부터 지어 내려온 죄를, 죽을 때 선량한 마음을 내어 부처님을 생각하고 염불을 함으로써 제거하는 것입니다. 본래 마음이 자취가 없는 것인지라 죄 또한 본래 뿌리가 없습니다. 지옥맹화가 바뀌어 맑고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하늘에선 꽃비가 내립니다. 우리 중생의 때 묻은 눈으로는 안 보이더라도 천안(天眼)만 통하면 틀림없이 꽃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영축념화시상기(靈鷲拈華示上機)라, 영축산에서 부처님께서 금바라화(金波羅華)를 척 들으시고 대중들 앞에 보였습니다. 그런데 대중들은 금바라화가 보이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볼 수 있는 상대적인 금색광명이나 어떤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중생의 때 묻은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緣起)를 말한 경은《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현재는 '僞經'이라 함)으로서, 대범천왕이 부처님께 금색 바라화를 바치고 법문을 청하자 부처님께서 그 꽃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 꽃은 사람이 드린 것이 아니라 범천왕이 드린 천상의 꽃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실 때는 우리 인간의 눈에는 안 보여도 범천왕이나 제석천왕이나 천인(天人)들이 와서 법을 청하여 듣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화엄경》을 설할 때에는 말로 한 것이 아니기에 우리 중생들은 듣지 못했어도 제석천왕이나 범천왕 또는 법신보살은 다 듣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천상의 꽃, 바로 진리의 꽃인 금바라화를 들었지만 대중들은 부처님의 손만 보이기에 영문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삼명육통을 한 마하가섭(摩訶迦葉)은 훤히 알아보고 방긋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한테 있는 열반묘심(涅槃妙心)을 그대에게 전한다'고 했다는 게송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천상꽃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적습니까? 우리는 구경지(究竟地)까지 깨닫지 못하는 한에는 절대로 안다는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믿어야 참다운 믿음입니다.《보조어록(普照語錄)》은 그것을 역설했습니다. 과불공덕이 분호불수(果佛功德 分毫不殊)라, 부처가 성취한 공덕이 우리 본래 공덕과 더불어 눈곱만치도 차이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믿어야 비로소 참다운 신앙입니다.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하늘 꽃이 흩날리는데 그 꽃 위에는 부처님과 보살들이 계시면서 저승에 들어가는 사람을 마중한다"고 하셨습니다.《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입니다. 이런 상징적인 것들을 사실로 느껴야 합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미신이겠지, 우리에게 방편으로 말씀하셨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이 많은 불자님들은 특히 돌아갈 길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질 것입니다마는, 정말로 바르게 살다가 죽으면 꼭 불보살님이 마중을 나오십니다. 이것을 성중래영(聖衆來迎)이라 합니다. 성중이 우리를 마중한다는 말입니다. 욕계의 하늘도 있고, 색계 천상도 있고, 3계 28천(三界二十八天)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다 마음 가운데 있겠지' 합니다만, 물론 마음의 화현이기는 하나 3계 28천이 가상(假相)으로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ㆍ心懷戀慕 渴仰於佛 卽種善根   -《법화경(法華經)》<수량품(壽量品)>


'심회연모 갈앙어불하면 즉종선근(心懷戀慕 渴仰於佛 卽種善根)이라' 저는 자주 이 법문을 말씀드립니다. 마음으로 부처님에 대해서 연모(戀慕)하고 갈앙(渴仰)하면 바로 선근(善根)을 심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우리 자성(自性)을 그리워하게 하기 위해서 극락세계, 화장세계의 찬란한 장엄도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 결정신심(決定信心)이 없으면 갈앙심(渴仰心)이 안 나옵니다. 따라서 결정신심을 두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결정신심을 내는 데 있어서 경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심불상속고이니 부득결정신(心不相續故 不得決定信)이라.' 가사, 화두나 염불이나 공부가 상속되지 않기 때문에 결정적인, 꼭 옳다는 확신을 못 갖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공부나 신(信)만 있고 해(解)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설사 解가 있더라도 信이 없으면 그냥 퇴타(退墮)하고 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특히 온 생명을 바치는 신앙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부처를 생각하는 마음이 상속되어야 결정신심이 나오고 참선을 하든 또는 염불을 하든 기도를 하든 간에 결정신심을 얻어야 갈앙심이 생깁니다. 종교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순명(順命)이라, 신앙 대상에 대해서 순수하니 환희심으로 따르는 마음이 없으면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순명이 있을 때는 필연적으로 정결(淨潔)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명에 순수하게 따라야 하겠지요. 따르면 응당 정결신심(淨潔信心)이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이 모두 다 검소한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 생활이 청빈(淸貧)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빈은 우리 수행자의 자랑이요 무기입니다. 우리가 신앙 대상에 대한 순명이 없고, 정결하지 못하고, 청빈한 생활을 안 한다면 출가사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순명과 정결과 청빈에서 우리의 사명감과 자랑과 긍지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회연모(心懷戀慕)라, 우리 마음으로 부처에 대해서 연모하고 갈앙하는 그 마음은 굉장히 중요합니다.《팔상록(八相錄)》에 나오는 법문입니다만, 부처님 당시 파사익왕(波斯匿王)의 딸이 추녀개용(醜女改容)이라, 아주 못생겼는데 얼굴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세존에 대한 사무친 갈앙심 때문에 부처님의 광명을 스스로 감견(感見)했던 것입니다.


신앙에 사무치면 불성광명을 우리가 느끼고 현전에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 광명은 무량광명이기 때문에, 또 천지우주가 바로 순수의 적광(寂光), 청정한 광명[淨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만 청정해지면 꼭 광명을 보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 마음이 일념(一念)이 되는 공부가 쉽지 않지만, 간절히 그리워하고 연모하는 그 마음은 우리 마음을 한결 빨리 통일이 되게 하고 비약시킵니다. 따라서 마땅히 부처님께 대해서 연모하고 갈앙하는 마음은 우리 인간존재가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것이지만, 번뇌에 가려 버리면 참 어렵습니다. 마음이 맑아질수록 점점 더 갈앙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매에 들어갈 때는 몸도 마음도 정화가 되면 된 만큼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마음도 훨씬 더 부드러워지고 또는 점차로 더 선심(善心)이 깊어집니다. 세상사람 모든 사람이 다 소중하며 풀포기 하나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비스런 마음이 됩니다. 이른바 동체대비(同體大悲)에 차츰 가까워지는 셈이지요. 마땅히 우리 마음으로 부처님과 우리 자성에 대해서 연모, 갈앙한다면 바로 우리 선근을 더 증장시키고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갈앙하는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불경(佛經)에서 비유담 하나를 더 들겠습니다. 과거 저사(底沙) 부처님 회상에서 석가행자와 미륵행자가 도반이 되어 수행 정진할 때였습니다. 그때 저사 부처님이 두 수행자를 관찰하니 석가행자보다 미륵행자가 근기는 더 수승하나, 장차 제도할 인연 있는 국토 중생들은 석가가 제도할 국토 중생들이 훨씬 수승하므로, 기왕이면 석가를 빨리 성취시켜서 인연이 성숙한 국토 중생을 제도하고자 작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상대각(無上大覺)을 성취한 부처님이 과거세에 점수(漸修)한 수행과정을 헤아려 보면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의 무량세월 동안을 수행하신 다음 마지막에 32상을 얻기 위해서 또다시 백겁 동안 닦았다고 합니다.


원만덕상(圓滿德相)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과거 전생의 무량한 선근(善根) 과보인 것입니다. 온몸이 금색으로 생긴 것이나, 머리카락이 나계상(螺髻相)인 야청색으로 되어서 빛나는 것이나, 미간에 백호상(白毫相)이 오른쪽으로 돌면서 삼천대천세계를 비추게 된다는 것이나, 원만상인 32상의 공덕은 무량한 세월인 백겁 동안 수없이 자기 몸뚱이를 희생하는 이른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무아행(無我行)을 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행을 할수록 얼굴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루는 저사 부처님이 석가행자에게 산에 올라갈 테니 따라오라고 하시고 신족통(神足通)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석가행자는 그런 신통이 없는지라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산에 올라가서 보니 저사불(底沙佛)이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부터 6조 혜능스님까지 삽삼(卅三)조사 가운데서 한 6할 정도는 열반에 드실 때 화광삼매에 들어서 가셨습니다. 스스로 자기 가슴에서 삼매의 불을 내서 자기 몸을 다비(茶毘)했습니다. 저사불이 화광삼매에 들어 계시는데 그 광명이 너무나 장엄 찬란하여 석가행자는 황홀한 동경과 환희용약하는 마음이 사무쳐 넋을 잃고 저사 부처님을 우러러 뵈올 뿐이었습니다. 경을 보면 '첨앙존안에 목불잠사(瞻仰尊顔 目不暫捨)라' 저사불의 존안을 우러러 뵈오면서 잠깐 동안도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발을 옮기려다 한 발을 든 채로 7주야(七晝夜) 동안 찬탄을 했습니다.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은 아시는 바와 같이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天上天下無如佛 十方世界亦無比 世間所有我盡見 一切無有如佛者)'입니다. 이 게송은 그때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교족칠일(翹足七日)이라, 이레 동안 한 발을 들고서 부처님을 찬탄한 공덕으로 석가행자는 미륵행자보다도 9겁을 초월해서 성불했습니다. 저는 맨 처음에는 참 기이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깊이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사무치게 찬탄한 공덕으로 9겁을 초월했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심심미묘한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통감했습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님 무량공덕을 100퍼센트 믿을 때는 우리 마음이 비약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위법망구의 무아사신(無我捨身)의 공덕은 다생(多生)의 업장을 순식간에 소멸해 버리는 것입니다.


《법화경》<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본지수적(本地垂迹)이라, 석가모니 부처님은 금세에 화신불(化身佛)로 잠시간 모습을 나투신 것이지 본지불(本地佛), 본래불(本來佛)은 바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합니다. 무량수(無量壽)는 문자 그대로 생명이 한도 끝도 없는 영생불(永生佛)이라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을 지혜 쪽으로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하고, 시간적으로는 영생하는 무량수불이라고 합니다. 부처님 명호는 이와 같이 공덕 따라서 이름이 다르게 됩니다.


《법화경》<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에 부처님께서 "어느 중생이 부처님의 수명이 한정이 없고 공덕이 무량무변하다는 말씀을 듣고 능히 신해(信解)하는 생각을 내면 그 공덕이 한량없다"고 하십니다.


우리 신앙은 꼭 신해(信解)가 필요합니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믿기만 하고 해석이 없으면 맹신(盲信)이 되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고인들 말씀에도 '신이무해(信而無解)하면 단조무명(但助無明)'이요, 믿고서 解가 없으면 무명만 더 조장할 뿐이요, '해이무신(解而無信)하면 즉타사견(卽墮邪見)'이라, 解만 있고 믿음이 없으면 사견에 떨어지기 쉽다고 했습니다.


ㆍ其有衆生 聞佛壽命長遠 如是能生一念信解 所得功德 無有限量 善男子 善女人 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於八十萬億那由他劫 行五波羅蜜 除般若波羅蜜 以是功德 比前功德 萬分千分 萬千億分 不及其一

                     -《법화경》<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



"이와 같이 부처님의 수명이 무량하고 공덕도 한량없다는 것을 신해하는 공덕은 한량이 없느니라. 선남자 선여인아, 보리 즉 무상대도를 위해서 무량세월인 팔십만 억 나유타겁을 두고서 반야바리밀을 제외한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 선정 5바라밀을 닦는 공덕은 앞의 공덕에 비교한다면 천분, 만분, 천만 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따라서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따르고 의지하는 공덕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ㆍ若人疾欲至 不退轉者 應以恭敬心 執持佛名號 以信方便 念佛易行 疾至阿惟越地(不退轉地)                                                       -《십주비파사론(十住毘婆沙論)》


용수(龍樹)보살《십주비파사론(十住毘婆沙論)》에 있는 법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빨리 불퇴전(不退轉)에 이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불퇴위까지 올라가야 안심하고 공부를 할 수가 있겠지요. 불성을 못 깨닫고 미처 증명을 못하면 견성을 못한 분상에서는 항시 퇴전될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후퇴가 안 되려면 현전(現前)에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갖춘 불성과 계합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사람이 빨리 이러한 불퇴전지(不退轉地)에 오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공경심으로써 부처님의 명호를 굳게 지녀야 한다." 불명호(佛名號)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그런 명호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성불(自性佛)을 믿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이 믿는 방편으로서 하기 쉬운 염불행을 하라." 사실 염불이 하기는 가장 쉽습니다. 나도 부처요, 너도 부처요, 원래 우리가 가고자 하는 것도 부처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쉽기는 쉽지요. 쉬우니까 이행문(易行門)이라, 염불의 쉬운 행을 믿는 방편으로 할 때, 아유월지(阿惟越地: 阿毘跋致) 곧 불퇴전지에 빨리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명심하고, 그리워하고, 흠모하고, 이런 믿음의 염불하는 방편으로 간다면 빨리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ㆍ自性彌陀何處在 時時念念不須忘 一朝忽得情塵落 倒用橫拈常不離  - 나옹대사(懶翁大師)


나옹 혜근(懶翁慧勤)스님 어록에 '자성미타하처재요, 우리 자성의 미타가 어느 곳에 있는고? 시시념념불수망이니, 시시때때로 잊지 말고서 간절히 생각할지니, 일조홀득정진락이면, 하루아침에 문득 번뇌 망상이 다 떨어지면, 도용횡념상불리라, 거꾸로 쓰나 또는 누워 잡으나 떠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번뇌 망상이 미처 안 떨어질 때는 그냥 애쓰고 화두를 들려 하고 염불하려 하겠지만, 한 번 망념만 떨어져 버리면 거꾸로 쓰나 옆으로 누워 잡으나 언제 어느 경우에나 조금도 자성경계 본래면목 자리가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옹화상 염불 게송의 끝에 있는 구절입니다.


 ㆍ阿彌陀佛淨妙法身 遍在一切衆生心地 故云心佛衆生 是三無差別 亦云心卽佛 佛卽心 心外無佛 佛外無心 如是眞實念佛 十二時中四威儀內 以阿彌陀佛名字 帖在心頭眼前 心眼佛名 打成一片 心心相續 念念不昧 久久成空則 忽爾之間 心念斷絶 阿彌陀眞體 卓爾現前 方信舊來不動名爲佛

                          - 태고대사(太古大師)



태고 보우(太古普愚)선사 게송입니다. "아미타불의 청정미묘한 법신이 두루 일체중생의 마음자리에 본래 갖추어 있기 때문에 심불중생이 시삼무차별(心佛衆生 是三無差別)이라, 마음이나 부처나 중생이나 세 가지가 차별이 본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바로 마음이라,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도다. 이와 같이 진실한 염불을 할 때는 밤낮으로 행주좌와에 아미타불의 명호를 심두(心頭)에나 안전(眼前)에 붙여 두어라."


처음에는 관상적으로나 실상염불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역시 이름을 부르면 부르기가 쉽고 또 우리가 가장 공경하고 그리워하는 이름이니까 계속 불러도 별로 싫증이 안 나겠지요.


아미타불 명호를 우리 마음에나 눈앞에 여의지 않고 딱 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안불명이 타성일편(心眼佛名 打成一片)'이라, 우리 마음으로 생각하고 눈으로 실지로 광명무량한 세계를 보려고 계속 공부해 나갈 때 마음이나 눈이나 부처의 명호가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따로따로 생각할 수가 있지만 공부가 익어지면 이것이고 저것이고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모두를 다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을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고 합니다. 어떤 공부를 하든지 우리 마음이 타성일편이 되어 나와 우주가 하나로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그 자리를 애써 놓지 않고 상속적으로 생각생각에 조금도 어두워지지 않게 오래오래 공을 이루면 문득 찰나 동안에 우리 범부심이 끊어진다. 그래서 아미타불 진체(眞體)인 우주에 변만한 진여불성이 활연히 앞에 나투나니 이것이 바로 불생불멸한 생명의 실상인 부처임을 믿을지니라."


 ㆍ眞如念佛 念佛功極 日日時時 於一切處 阿彌陀佛 淨妙眞體 冥現其前 臨命終時 迎接九品蓮臺 上品往生        - 보조(普照),《염불요문(念佛要門)》


보조 지눌(普照知訥)국사의《염불요문(念佛要門)》에는 '진여염불(眞如念佛)'이라 했습니다. 진여염불은 대상적으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바로 미타이고 우주가 바로 부처라는 염불입니다. "진여염불의 공이 사무치면 나날이 때때로 어디에나 아미타불의 청정미묘한 진체(眞體)가 불현듯 그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임종할 때는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성중(聖衆)들이 마중하여 구품연대(九品蓮臺)의 상품상생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했습니다.


극락세계는 깨달은 경계에서 본다면 한 점 티끌도 없고, 오염 없이 만공덕을 갖춘 세계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보면 사바세계가 곧 적광토(寂光土)라, 이 세계가 이대로 극락세계인데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려서 미처 수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ㆍ若念佛者 當知此人是人中 分陀利華 觀音勢至 爲其勝友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만약 부처를 생각하는 자, 즉 본래면목을 안 떠나는 자는 마땅히 알지니 이런 사람은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인 분다리화(分陀利華)라, 따라서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그를 가장 좋은 벗으로 삼는다."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도 인간적으로 때 묻은 안목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습이 필요하면 언제나 나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청정하고 정말로 순수할 때는 수시수처(隨時隨處)에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에 갖추어 있는 본래 자비의 정기(精氣) 그 생명 성령(聖靈)이 관음이요, 지혜의 정기 그 생명 성령이 문수요, 또 대세지입니다.


염불은 지혜와 자비를 온전히 다 갖추고 있는 부처, 곧 본래면목 자리를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니까 마땅히 관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염불행자가 비록 범부라 하더라도 가장 좋은 벗으로 삼는 것입니다. 관음은 자비를 의미하고 대세지는 지혜를 의미하기 때문에 일체보살을 다 대신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염불행자는 일체 천만 보살이 그를 좋은 벗으로 생각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ㆍ諸佛如來 是法界身 遍入一切 衆生心想中 是故 汝等 心想佛時 是心卽是 三十二相 八十隨形好 是心作佛 是心是佛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제불여래는 바로 법계(法界)가 몸이고, 법계란 삼천대천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불여래는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두루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대승적인 차원에서는 사람만이 중생이 아니라, 유정ㆍ무정 모두가 다 중생입니다. 사바세계의 두두물물이 다 중생이니까, 또는 그런 중생으로 모든 법계가 구성되었으므로 부처님이 모든 중생의 마음 가운데 원래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우리 속에 들어 계신다는 의미는 모든 존재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어디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입니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불성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부처님이 중생한테 들어 계신다는 것은 바로 온전히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개한테 불성이 있다고 할 때도 개의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머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전체가 바로 부처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삼십이상 팔십종호라." 이것도 꼭 상(相)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의미로 생각하면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말한 것입니다. 부처님을 한 번 생각하면 바로 그 생각이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생각하는 것이 되고 공덕을 갖추어 나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마음으로 부처를 짓고 또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께서 중국 광주에 오실 때 이미 150(또는 130)세였다고 기록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던히 오랫동안 사셨겠지요. 그리고 9년 동안 면벽했습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범부들은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또 자기가 아는 것하고 조금 다르게 얘기하면 그것이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달마스님께서는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 문자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겠지만 문자의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오직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다, 마음만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마음만 깨달으면 거기에 모두가 다 들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 스님들이 아주 시기심을 많이 냈습니다. 그것도 보통사람들이 아니라, 논장(論藏)들을 보면 그 당시 가장 훌륭하다는 광통율사(光統律師), 인도에서 들어오신 보리유지(菩提流支) 같은 분들이 법집(法執)하여 시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밑에 있는 분들이 달마스님을 여섯 번이나 독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박해가 많았던가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 어른께서 중국에 들어오신 딴 뜻이 있겠습니까? 오직 자기 생명을 모조리 바친다 하더라도 중생제도 하겠다는 뜻 이외에는 다른 뜻이 없는 분인데, 그런 분을 독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까지 몸에 독이 안 받는 것입니다. 벌써 삼명육통을 통달한 분들은 '인연이 다 됐으니까 내가 가야겠다' 해서 가는 것이지 독살하려고 해서 갈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섯 번째까지는 독을 먹고 바위 위에다 대변을 누면 어찌나 독한지 바위가 다 빠개져 버립니다.


이렇게 독을 다 안 받았지만 여섯 번째는 "중국에 와서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인연이 다 됐다" 하시고는 독을 그대로 받고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입관하여 웅이산(熊耳山)에 묻었습니다. 그 뒤에 위(魏)나라의 송운(宋雲)이라는 사람이 사신으로 인도까지 갔다가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총령(蔥嶺), 지금의 파미르고원을 넘어오는데 수염이 털털하고 늙수그레한 스님이 주장자를 어깨에다 척 걸쳤는데 짚세기 한 짝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없고 반갑기도 해서 수인사를 하고 물으니까 달마라고 합니다.


송운이 위나라로 돌아와서 말을 들어 보니까 달마스님이 이미 돌아가셔서 관에 넣어 매장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상하게 생각해서 달마스님 묘소를 파서 보니까 관 속의 시체는 간 곳이 없고 짚세기 한 짝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달마스님도 그야말로 부활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또 달마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생명도 원래는 죽음이 없는 것이니까 사실은 다 부활입니다. 그네들이 저승세계를 잘 모르니까 예수의 부활설만 말씀을 했겠지요.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는 정각(淨覺)스님이 저술한 책입니다. 5조 스님의 제자 가운데 혜능(慧能)대사, 신수(神秀)대사, 현색(玄賾)대사, 지선(智詵)대사 등 10대 제자가 있는데, 그중 한 분인 현색대사의 제자가 정각스님입니다.


정각스님이 저술한《능가사자기》는 전에는 미처 발견되지 않았다가 1907년경 돈황(敦煌)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돈황에서 발굴되어 나온 문서 가운데는 당시까지 불교에서 몰랐던 것이 굉장히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가사, 6조 혜능스님하고 신수대사가 마치 경쟁하는 것같이《단경》에도 기록되어 전수되어 왔었는데, 돈황에서 나온 여러 가지 문서에는 신수스님도 위대한 도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실은 응당 도인이 되겠지요. 5조 홍인(弘忍)대사 7백(七百)제자의 상수(上首)제자인데 도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종전에 신수는 점수(漸修)나 하고, 6조 혜능스님만 돈오돈수니까 위대하다고 칭송해 왔습니다. 하지만 돈황문서가 발굴된 다음에는 모두가 공평하게 바로잡는 작업들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4조 도신(道信)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도 그 전에는 몰랐습니다. 전에는 아무런 문헌이 없었는데 돈황에서 발굴한《능가사자기》가운데 이 법문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뒤에야 지극히 귀중하다고 훤전(喧傳)해서 여러 가지로 참고하고 주석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ㆍ念佛卽是念心 求心卽是求佛 所以者何 識無形 佛無相貌 若也知此道理 卽是安心 常憶念佛 攀緣不起則 泯然無相 平等不二 入此位中 憶佛心謝 更不須徵 卽看此等  卽是如來 眞實法性身 亦名正法 亦名佛性 亦名諸法實相 實際 亦名淨土 亦名菩提 金剛三昧 本覺等 亦名涅槃界 般若等 名雖無量 皆同一體也


"염불이란 바로 자기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며, 마음을 구하는 것은 바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식(識)이란 형체가 없고, 부처란 무슨 모양이나 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도리를 안다면 바로 안심이라."


부처나 마음이란 것이 모양이 있다고 할 때는 마음에 걸리겠지만, 마음이란 원래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도리를 안다고 할 때는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입니다. 가사, 나한테 죄가 많이 있다고 생각할 때도 우리 마음으로 생각하겠지요.


승찬(僧璨)스님이 2조 혜가스님한테 올 때 풍병에 찌들어서 "저한테는 죄가 많아서 이렇습니다" 하고 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니까, 혜가대사가 "죄가 그대 마음의 어디에 있는가?" 하였습니다. 마음이 원래 없거니 무슨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죄를 어디서 끌어낼 만한 터무니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원래 없고 죄상도 본래 없으나 자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 단계에서는 죄를 범해 놓으면 인과를 받습니다. 가사, 우리가 금생에 남의 것을 훔치기도 하고 남을 죽이기도 하고 또는 다른 동물도 함부로 대하면서, 범부 분상에서 이치로만 '상(相)이란 본래 없지 않은가?' 하는 정도로는 과보를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마음도 원래 자취가 없고, 마음이나 부처나 원래 형상이 없다는 도리를 알 때는 벌써 이것이 바로 안심이라는 말입니다.


달마 때부터 6조까지는 주로 안심법문(安心法門)으로 모두가 다 마음을 안심케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먼저 안심이 되어야 하고 재가불자님들한테 법문을 할 때도 안심을 시켜야 합니다. 안심을 시켜 놓고서 철저히 도덕적인 계율을 지키라고 해야지, 안심도 없이 억지로 지키라고 하면 재미도 없고 구속감을 느낍니다. 다시 도신대사 말씀입니다.


"항시 부처를 깊이 사무치게 생각하고 반연(攀緣)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상(相)이 소멸되어 상이 없고, 평등하여 둘이 아니다. 이런 자리에 들어간다면 부처님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모든 상을 다 버리게 되는데 새삼스럽게 애쓰고 구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본다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진실한 법성신(法性身)이요, 정법(正法)이고, 불성(佛性), 제법실상(諸法實相), 실제(實際), 정토(淨土), 보리(菩提), 금강삼매(金剛三昧), 본각(本覺), 열반계(涅槃界), 반야(般若)라고 한다. 이름은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모두가 다 하나의 몸이니라."


4조 도신대사의 말씀은 권위있는 말씀인 것이고 귀중한 말씀이기 때문에 더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ㆍ我此法要 依楞伽經 諸佛心 第一 又依 文殊說般若經 一行三昧 卽念佛心是佛 妄念是凡夫 若善男子 善女人 欲入一行三昧 當先聞般若波羅蜜 如說修學 然後 能入一行三昧 不退不壞 無碍無相 善男子 善女人 欲入一行三昧 應處空閑 捨諸亂意 不取相貌 繫心一佛 專稱名號 隨佛方所 端身正向 能於一佛 念念相續 卽是念中 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 何以故念一佛功德 無量無邊 亦與無量諸佛功德 無二不思議


"나의 이러한 법요는 능가경의 제불심(諸佛心) 제일(第一)에 의지하고 또 문수설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지했다."


저는《육조단경》의 <부촉품>에 있는 "그대들이 만약 부처님의 일체종지를 얻으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지니라"라는 경구를 보고, 또 4조가 말씀한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을 볼 때 다 비슷한 법문이라서 '역시 위대한 분들은 생각이 비슷한 것이 당연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했습니다.


"즉 염불심시불(念佛心是佛)이요 망념시범부(妄念是凡夫)라." 원래 부처인지라 부처를 염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요, 반대로 상을 내는 망념일 때는 범부라는 말입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일행삼매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마땅히 먼저 반야바라밀을 들어야 한다." 반야가 있으면 불자이고, 반야가 없으면 불자가 못 됩니다. 반야가 없으면 결국은 속물입니다. 반야가 있어야 참선이 되는 것이고 반야가 없으면 참선이 못 됩니다. 반야는 무엇인가? 반야는 바로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또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지혜입니다.


"그 반야바라밀에서 말씀하신 것같이 배운 연후에야 능히 일행삼매에 들 수가 있다. 그래야 후퇴도 물러남도 없고 파괴함도 없고 거리낌도 없고 상도 없다. 선남자 선여인들이 일행삼매를 정작 공부하려고 할 때는 잡요한 시끄러운 인연이 없는 한가한 곳에서 산란스러운 생각을 모두 버리고, 상을 취하지 않고 마음을 부처의 경계에 매어 두어야 한다."


부처의 경계는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 마음이 부처의 경계를 잡기가 좀 곤란스럽습니다. '부처란 것은 본래면목 자리가 아닌가' 이렇게는 알지만 '우리 마음을 부처의 경계에다 맨다고 할 때는 어떻게 맬 것인가?'라며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부처란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일체존재의 생명인 동시에 상이 아니지만, 인연이 닿으면 또 현상계에 상을 나투는 것입니다. 즉 유(有)도 아니고, 가(假)도 아니고, 공(空)도 아닌 진공묘유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를 감견(感見)했으면 좋은데, 미처 감득(感得)하지 못한 사람들은 부처에다 마음을 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때라도 '나라는 이 몸뚱이나 너라는 몸뚱이나 천지우주에 있는 모든 두두물물이 다 비어 있다'라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자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비어 있는 무량무변한 자리에 무량공덕을 갖춘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충만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매는 것이 실상관(實相觀)입니다.


이리하여 '전칭명호(專稱名號)'라, 우리가 초심일 때는 역시 뭐니 뭐니 해도 화두면 화두, 염불이면 염불, 이름을 자꾸만 외우고 하나만 생각해야 마음이 모아집니다. 공부가 익어져서 한고비를 넘은 사람들은 외울 것도 없지만, 처음에는 하나로만 외워야 마음이 계속되어 통일이 잘 되는 것이지,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는 잡수(雜修)라, 잡스럽게 할 때는 마음의 통일이 안 됩니다. 한 부처한테 마음을 내고 오로지 명호를 외우고 또 기왕이면 부처의 명호를 상상하면 좋겠지요.


상호란 허무한 것이 아니라 무량공덕을 갖춘 상호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러를 때마다 그만치 흐트러진 마음이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계신 방소(方所)에 따라서 단정히 바로 향해 앉고, 한 부처님에 대해서 생각생각에 생각이 끊어지지 않을 때에는 즉시 그 생각 가운데 능히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제불을 다 본다. 한 부처의 무량무변한 공덕을 생각하면 바로 무량한 부처님 공덕을 다 감견(感見)하여 제불공덕과 둘이 아닌 부사의한 공덕을 성취한다."


도신선사 <입도안심요방편법문>에 있는 염불찬탄의 법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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