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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9. 말씀

여래선과 조사선

제Ⅱ부 원통불법의 요체


여래선과 조사선



- 여래선과 조사선은 하나


현대는 모든 것이 분열적이고 갈등된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사회 아닙니까? 그러나 시대의 추세가 모두 용(用)으로부터 본체[體]로 돌아가는 경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사, 유물주의도 참다운 진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붕괴가 되는 것이고, 어떤 분야나 분열과 갈등을 지양(止揚)하여 화해로 나아가는 추세이고, 같은 종교 내에도 여러 갈래로 갈라진 것을 하나의 순수한 것으로 고양(高揚)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각 종교 간에도, 전에는 다른 종교라고 하면 아주 원수시하고 마귀시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일본 중세기 불교사를 보면 같은 불교 내에서도 종파가 다름으로 해서 상대편 절을 태우고 스님들의 코나 귀를 베어버린 잔인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중생의 미망(迷妄)으로 종파주의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현대는 이것저것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이른바 원시 공산시대, 중세 암흑시대, 현대에 와서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등 많은 사상적 시련을 겪었습니다. 바야흐로 우리는 지금 참다운 진리로 돌아가는 전환기에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우리한테 사실은 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문제는 우리 인간 자체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는, 자기 생명과 우주의 본체, 인생과 우주의 실상을 바로 알 때 모든 문제는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다 한 점의 눈을 넣은 것과 마찬가지로 될 것입니다.


모든 문화현상이 분열로부터 종합과 화해로 나아가는 것이 현대사회의 추세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법(佛法)의 해석도 마땅히 회통(會通)적이어야 하고, 불법 본래 자체가 '비법(非法)도 불법(佛法)이라' 불법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기에, 응당 부처님께서 주로 말씀하신 여래선(如來禪)이나, 달마스님 이후에 발달된 조사선(祖師禪)이나 내용이 둘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분별을 우리 고인(古人)들은 한갈등(閒葛藤)이라, 필요 없이 괜한 갈등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당대를 주름잡은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불필요한 갈등에 반대했습니다. 원효(元曉)스님이나 대각(大覺)국사, 보조(普照)국사, 나옹(懶翁)스님, 태고(太古)스님, 서산(西山)대사 같은 분들은 모두가 다 통합적인 원통무애(圓通無碍)한 법을 지향했습니다.


불법 자체가 본래로 일미평등하여 둘이 아닙니다. 법집(法執)을 털어버릴 때는, 부처님이 말씀했다거나 조사가 말씀했다는 것 가지고 시비할 것도 없고, 조사가 정말 조사라면 부처님 뜻에 맞아야 할 것이고,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정법(正法)은 조사가 그 법을 계승했을 것입니다. 다만 시대상황 따라서 표현이 다르기도 하고 중생교화의 연(緣)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선교방편(善巧方便)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원래가 둘은 아닌 것입니다.


꼭 여래선과 조사선이 원래 둘이 아니라는 데 입각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갈등이 생길 때는 공부도 안 됩니다. 본래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을 둘로 보고 셋으로 보면 우리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도 역시 타성일편(打成一片)의 도리로 모든 갈등을 하나의 반야진리로 해결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 여래선이란 무엇인가


ㆍ云何如來禪 謂入如來地 得自覺聖智 三種樂住 成辨衆生 不思議 是名如來禪

                                          -《능가경(楞伽經)》2권

'무엇을 여래선(如來禪)이라고 하는가?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서 성자(聖者)의 무루지(無漏智)를 깨달아 삼종법락(三種法樂)에 머물고 동시에 중생의 부사의한 일을 다 성취하는 것을 여래선이라고 이름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깨달아 우주의 본 실상을, 성지(聖智)를 자각해서 여래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분명히 현법락주(現法樂住)라 하는 데가 있습니다. 현법락주란 우리가 온갖 법락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공부하는 분들은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한 고비만 넘어서면 틀림없이 법락이 옵니다. 길을 올라갈 때 가파른 길만 있다고 생각하면 사뭇 답답하고 더욱더 피로할 것입니다만, 가파른 길을 올라서기만 하면 분명 내리막길입니다. 정상에 올라가면 훤히 다 보여서 그야말로 쾌적하고 마음이 툭 트이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깨달으면 틀림없이 법락이 있고 항시 법락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법락을 나누어서 삼종법락(三種法樂)이라 합니다. 가장 재미를 느끼는 선정을 삼선(三禪)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삼선천(三禪天)입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을 비유할 때는 삼선천락이라고 합니다만, 사선천에 올라가서는 그런 안락마저도 초월해 버리는 것입니다.


삼종락은 삼선천락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천상에서 받는 천락(天樂) 또는 선정으로 받는 선정락(禪定樂) 또는 열반락(涅槃樂)인 제일락(第一樂)입니다. 고락을 다 떠나버린 무량의 청정무비한 안락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천락 또는 선정락 또는 열반락을 다 갖춘 삼종락에 머물고 성판중생 부사의(成辨衆生不思議)라, 우리 중생계를 다스린다거나 중생을 교화한다거나 신통을 부린다거나 하는 부사의한 모든 것을 다 충분히 성취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경계를 여래선이라고 합니다.


《능가경》은 선경(禪經), 참선하는 경이라 해서 달마대사가 혜가대사에게《능가경》4권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6조까지 이르는 데 있어서 4조까지는 보통 다《능가경》을 의지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어록을 보더라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5조, 6조에 와서는《금강경》을 위주로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능가경》에서 선의 종별도 구분한 것이 있으나 너무 번쇄하니까 인용을 않겠습니다만,《능가경주해》에 나오는 여래선에 대한 주(註)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ㆍ註曰 如來所得의 禪 卽 首楞嚴定이다.

   此禪定에 依하여 法身ㆍ般若ㆍ解脫의 三德秘藏의 大涅槃을 窮竟하고 妙用을 일으킨다.

   外道ㆍ二乘ㆍ菩薩所得의 涅槃과 簡別하여 如來禪이라 云함.

                             -《능가경주해(楞伽經註解)》


주에서 이르기를 '여래소득의 선을 곧 수릉엄정(首楞嚴定)'이라고 합니다. 여래선과 수릉엄정은 같은 뜻입니다. 모든 삼매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 되는 선, 일체종지를 다 깨닫는 선이 이른바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 수릉엄정입니다. 여래선은 그와 똑같습니다. '이 선정에 의하여 법신ㆍ반야ㆍ해탈의 삼덕비장(三德秘藏) 대열반을 궁경(窮竟)하고' 깨달은 단계가 열반인데, 열반이란 것은 어떤 공덕이 있는고 하니, 우주의 참다운 생명의 실상을 그대로 깨닫는 법신, 모든 참다운 지혜를 깨닫는 반야, 우리 인생의 모든 고액인 삼계(三界)를 초월할 수 있는 법을 깨닫는 해탈이 열반삼덕(涅槃三德)입니다.


이런 '삼덕비장의 대열반을 다 마치고 무작(無作)의 묘용(妙用)을, 무루법으로 조금도 조작이 없이 일으키는 것으로 외도나 성문ㆍ연각의 이승(二乘)이나 보살이 얻는 바의 열반과 간별(簡別)하여 여래선이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래선에 관한《능가경》의 주해입니다. 신라(新羅) 무상(無相)대사의 4세 법손(法孫)이요 중국 화엄종의 5대 법사 가운데 마지막 법사가 규봉 종밀(圭峰宗密)대사입니다. 선교(禪敎)에 통달한 분으로서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창도(唱導)하였습니다. 강원에서 배우는《선원도서(禪源都序)》는 종밀대사의 저술로 禪과 敎가 원래 둘이 아니라는 데 입각해서 밝혀 놓은 법문입니다.


 ㆍ若頓悟自性 自心本來淸淨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來具足 此心卽佛 畢竟無異 依此而修者 最上乘禪 亦名如來淸淨禪 亦名一行三昧 亦名眞如三昧 此是一切三昧根本 若能念念修習 自然漸得 百千三昧 達磨門下 展轉相傳者 是此禪也                -《선원도서(禪源都序)》상(上)


여래선에 대한 설명으로 '우리가 문득 자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자기 마음이, 범부의 번뇌에 덮여 있는 마음 이대로 본래 청정하니까 원래 번뇌가 있지 않고,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참다운 지혜의 성품이 본래 다 구족하고 있는 것이니, 이 마음이 바로 부처로서 필경 부처와 더불어 다를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돈오(頓悟)란 것은 이런 도리를 알아야 하겠지요. 이런 도리를 이치로 알면 해오(解悟)인 것이고, 증명해서 깨달아 알면 증오(證悟)인 것입니다. 증오와 해오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돈오는 돈오인 것입니다. 돈오도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합니다. 견성만이 돈오라고 못 박을 수는 없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이 돈오는 증오만의 돈오가 아니라 해오의 경계도 돈오라 해왔습니다. 다만 그 깊고 얕은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범부지에서는 우선 도리로 '이 마음 본래 청정하고 원래 번뇌가 없고 때 묻지 않은 지성(智性)이 본래 갖춰져 있으니까 이 마음이 바로 부처고, 이 마음이 범부나 또는 석가모니나 일반 성자나 다름이 없다' 이렇게 알면 해오인 돈오인 것입니다.


그러나 알기만 하면 해오이고, 닦아서 번뇌를 여의고서 금강불심(金剛佛心)을 증명해서 깨달을 때는 증오입니다. 그런 차이만 있을 뿐이지 이치로 아는 해오도 돈오라 해왔습니다. 불교적 논의는 꼭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관행(慣行) 술어를 알아야지 자기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이러한 돈오에 의지해서 닦는 수행을 최상승선(最上乘禪)이요,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며, 역명 일행삼매(一行三昧), 다시 이름하기를 진여삼매(眞如三昧)라 하며, 일체삼매(一切三昧)의 근본이니 능히 생각생각에, 다른 생각이 끼지 않게 지속적으로 닦고 익힐 때 자연히 점차로 백천삼매(百千三昧)를 얻는다. 달마 문하(達磨門下)에 구르고 굴러서 서로서로 전하는 선(禪)은 바로 이 禪이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우리가 꼭 견성한 것만이 돈오라고 한다면 일행삼매나 진여삼매, 일체삼매 같은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겠지요. 우리 같은 범부도 닦을 수가 있으니까 일행삼매나 일상삼매 등을 닦으라고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이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돈오는 인(因)과 과(果)가 있어서, 인(因)으로는 우선 해오로 '내 마음이 본래 청정하니까 본래 번뇌가 없고 때 묻지 않은 지성이 본래 갖춰 있어서 이 마음이 바로 부처고 필경 부처와 더불어서 다르지 않다' 이렇게 알고 닦아 나가면 이것이 바로 최상승선이요, 최상승선은 도인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범부도 그렇게 닦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도인한테만 있으면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낼 필요도 없겠지요. 그래서 과(果)로는 증오가 되는 것입니다.


영가 현각(永嘉玄覺)대사의 <증도가(證道歌)>에 '돈각료여래선(頓覺了如來禪)하면 육도만행체중원(六度萬行體中圓)이라' 문득 여래선을 깨달아 마치면 육도만행을 본체를 여의지 않고 원만히 갖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래선이 아직 덜 된 것이 아니고 여래선 자체가 원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증도가>도 6조 대사로부터 정법을 그대로 인가받은 영가 현각대사의 <증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중국 선교사(禪敎史)에서 볼 때 달마대사 때부터 6조 혜능대사 때까지는 조사선(祖師禪)이라는 이름이 없습니다. 조사선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절대로 아니란 것이 역사적인 정확한 해석입니다. 물론 조사선적인 뜻은 다 있어 왔습니다만, 이름으로 조사선이라 한 것은 6조 스님 이후인 것입니다.


- 조사선이란 무엇인가


 ㆍ祖師禪 : 不立文字 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格外道理에 立脚한 祖祖本傳의 禪을 말한다. 楞伽經所說의 如來禪의 名에 對하여 此稱을 세웠다. 따라서 如來禪을 敎內未了의 禪이라 하고 祖師禪을 敎外別傳의 至極한  禪으로 한다.         

            - 조사선(祖師禪)이 여래선(如來禪)보다 우월하다는 주장


그러면 조사선(祖師禪)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조사선은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 참다운 진리는 원래 문자를 세울 수가 없다. 다만 우리 중생들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문자를 빌린 것이지, 참다운 진리 자체는 말도 떠나고 문자도 떠나고 생각을 떠나 있다. 따라서 참다운 도는 교(敎) 밖에서 전한다.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 교를 하나도 안 배운다 하더라도 사람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니까 바로 마음 깨달으면 된다. 바로 본래성품을 보고 성불하는 이른바 격외(格外)도리에 입각한 조사와 조사가 본래 전하는 禪을 말한다.'


《능가경》에서 말하는 여래선의 이름에 대하여 조사선이란 명칭을 세웠고, '여래선은 교(敎) 안의 미처 덜 된 선이라 하고, 조사선을 교 밖에 달리 전하는 지극한 선'이라고 하는 것이 조사선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뜻이 여래선 가운데 안 들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래선의 공덕 가운데는 일체상을 떠나고 생각을 떠난 도리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여래선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사선이라는 이름이 언제 처음 나왔는가?《전등록(傳燈錄)》의 <앙산장(仰山章)>에, 앙산 혜적(仰山慧寂)이란 분은 위산 영우(潙山靈祐)선사한테서 법을 받은 분입니다. 중국의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曺洞宗), 위앙종(潙仰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의 5종 가운데 하나인 위앙종은 위산 영우대사와 그 제자인 앙산 혜적선사 두 분 이름의 첫 자를 따서 위앙종이라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앙산은 위앙종을 건립한 한 분이지요.


향엄격죽(香嚴擊竹)이라 하면 공부하는 분들은 다 알지 않습니까? 향엄 지한(香嚴智閑)대사가 위산선사 밑에 가서 공부할 때 위산대사가 향엄대사를 점검했습니다. 향엄대사가 책을 많이 보아서 말은 청산유수였습니다. 그래서 '점검을 좀 해야겠구나' 하고, 향엄대사에게 "그대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삼장 십이부경(三藏十二部經)의 뜻을 의지하지 않고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한번 말해 보게" 했습니다.


경을 많이 배웠기에 경으로야 이말 저말 다 하겠지요. 그러나 삼장십이부경을 의지하지 않고서 낳기 전의 본래면목을 말해 보라고 하니까 딱 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에서 배운 대로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해도 그런 말이 맞을 턱이 없습니다. 도인 스님네의 명구(名句)를 적어 놓은 책을 아무리 뒤적여 보아도 명답이 안 나옵니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은 문자를 통한 말로 할 수 있는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정말 깨달은 분상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겠지요. 말로 알아맞히는 것으로서는 禪도리에서 맞는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가 없다 하더라도 깨달은 사람들은 벌써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위산대사가 볼 때 향엄은 법기(法器)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범부인데, 학문만 많이 해서 알음알이로 말만 잘하니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렇게 점검을 했던 것입니다. 향엄이 아무리 애쓰고 궁리해도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화엄경》뜻을 갖다 대보아도 아니라고 하고, 별스럽게 영리한 말을 해보아도 다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내가 공부를 한 것이 참다운 본래면목 자리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었구나. 이제는 정말로 내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해야겠구나' 하고서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던 제방 도인 스님네의 명구를 적은 책을 다 불태우고 남양 혜충(南陽慧忠)국사가 계시던 절로 떠났습니다.


혜충국사는 40년 동안이나 산중에서 안 나온 분입니다. 그분의 본을 따르기 위해 그곳에 가서 공부할 때, 하루는 풀도 뽑고 마당을 치우다가 던진 돌멩이가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문득 활연대오(豁然大悟)했습니다. 이를 '향엄대사 격죽(擊竹)의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향엄대사가 경도 많이 보고 공부를 애쓰고 했으니까 문득 깨달은 것이지, 아무것도 않고 컴컴하니 있다가 갑자기 깨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 여래선과 조사선


 ㆍ傳燈錄十一仰山章, 師問曰 香嚴師弟 近日見處如何 嚴曰 某甲 卒說不得 乃有偈曰 去年貧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貧無卓錐之地 今年貧錐也無 師曰 師弟只得如來禪 未得祖師禪


앙산대사께서 묻기를 "향엄사제, 근자에 그대가 깨달은 바가 어떠한가?" 하니까 향엄대사가 "모갑(某甲) 졸설부득(卒說不得)이니다" 했습니다. 자기를 겸사할 때 모갑이라 합니다. "제가 졸지에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는 게송으로 "거년의 가난한 것은 아직 가난하다고 할 것이 없으나 금년에 가난한 것은 비로소 참으로 가난한 것이고, 거년의 가난한 것은 송곳을 세울 만한 땅이 없었으나 금년의 가난한 것은 송곳마저도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향엄스님의 이런 대답에 앙산스님이 "사제는 다만 여래선만 얻고 아직 조사선을 얻지를 못했네 그려"라고 말씀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조사선과 여래선을 비교하여 헤아린 최초의 근거가 있습니다. 위의 사연은 다시 어어 져서 위산대사의 어록에 보면, 앙산스님의 평을 들은 향엄스님은 "나에게도 대기(大機)가 있어 눈을 껌벅이고 그를 보았는데 알아차리지 못할까 하여 달리 사미를 부른 셈(我有一機 瞬目觀伊 若人不會 別喚沙彌)"이라 하니, 이에 앙산스님이 스승인 위산스님에게 말씀드리기를 "이렇듯 향엄 지한 사제도 조사선을 깨달았습니다(且喜閑師弟 會祖師禪也)"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래선과 조사선의 우열을 상량(商量)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부처님 당시부터 조사선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고 조사선의 명의(名義)는 이때부터 있어 왔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우리 선가(禪家)에서도 어록을 보면 여래선보다 조사선을 위라고 하는 망발도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부처가 깨달은 여래선이 아래라고 하면 말씀이 될 수가 없겠지요. 여래선이란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만덕을 원만히 갖춘 무루(無漏) 청정선(淸淨禪)인 것입니다.


경(經)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나 같은 것이지 그 자체가 바로 불성은 아닌 것이니, 참선 공부하는 분들은 너무 경론의 표현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향엄스님 같은 분도 글 잘하는 분이라서 잘 풀이하였지만, 자기가 참말로 깨달았으면 깨달은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주저 없이 바로 내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서 '졸설부득이라, 졸지에 말할 수 없습니다' 하고서 게송으로 말하였으니 앙산스님 생각에 '이 사람이 문자에 집착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이 되었겠지요. 그래서 '그대는 아직은 여래선만 득했지 조사선은 미처 얻지 못했다'라고 했으나, 앙산스님은 부처가 깨달은 여래선을 폄하한 뜻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다만, '그대같이 경의 연구에 너무나 집착해서 바로 심지(心地)를 닦는 실참실수(實參實修)를 소홀히 말라'는 경책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세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여래선보다 조사선이 위라고 잘못 생각하는 분이 많았고 그런 폐단이 지금까지도 흘러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몇 백 년, 몇 천 년 뒤에 선사들의 어록을 볼 때는 굉장히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단경(壇經)》가운데서도 사실은 이상한 대목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당시《단경》이 상당히 유포될 때 6조 대사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인 혜충국사도《단경》가운데 범부의 소견이 들어 있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범부들이 조작해서 성자의 뜻을 함부로 왜곡시켰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록이라고 하는 것은 도인들 본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받아쓰기도 했고, 그것도 몇 십 년, 몇 백 년을 지나는 동안 책을 다시 쓰고 개작하고 다시 펴낼 때마다 바꿔 쓰기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근래에 선지식들의 비문을 참고합니다만, 비명(碑銘)을 금석학(金石學)에서는 권위 있는 증거로 존중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비문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꼭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옛날 분이야 우리가 그분을 만나 보지 못했으니까 사실을 모르긴 하지만, 근래에 우리가 아는 분 가운데 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분도 그 비문에는 '대도를 성취하였고 공덕이 하늘에 닿는다'라고 정도 이상의 과찬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 과거에도 그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비문을 보고 권위 있는 증거로 삼기가 어렵습니다.


조사 스님들의 어록도 마찬가지로 몇 백 년 세월이 흐르게 되면 많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육조단경》에도 5조 홍인(弘忍)대사의 7백 제자 가운데 상수제자인 신수(神秀)대사와 혜능(慧能)대사가 마치 법을 받기 위해 경쟁을 하는 것처럼 되어 있고, 신수대사는 돈오는 전혀 모르고 점수만 알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도인들이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역사적으로 밝혀졌습니다만, 6조 스님의 제자인 하택 신회(荷澤神會)가 6조의 법을 받아 자기가 정통7조라고 내세우기 위해서 혜능대사는 높이고 신수대사를 지나치게 폄하시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과거에는 곧이듣고서 신수대사는 부족하고 6조대사만 위대하다고 했는데 근래에 돈황문서(敦煌文書)가 발견되면서, 이른바《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등 여러 가지 문헌으로 신수대사도 결국은 똑같이 위대한 분이요, 또 신수대사에게도 분명히 돈오가 있고 돈수도 있다고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록에 대해서 그대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근본 자성(自性)에 비추어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 범일의 진귀조사설


 ㆍ我本師釋迦 出胎說法 各行七步云 唯我獨尊 後踰城住雪山中 因星悟道 旣知是法 猶未臻極遊行數十月 尋訪祖師眞歸大師 始傳得玄極之旨 是乃敎外別傳也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眞靜國師 天頙 著, 1293년]


범일(梵日)대사의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도 문제로 지적을 많이 합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조작했다고 여러 나라 불교학자들이 신랄한 비판을 합니다. 범일스님은 9세기 신라 때 스님으로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조(開祖)가 된 스님입니다. 중국에 가서 마조 도일(馬祖道一)스님의 제자인 염관 제안(鹽官齊安)선사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진귀조사설도 범일대사가 스스로 저술한 것이 아니라, 400여 년 뒤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이 저술한《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나오는 것입니다.


내용은 "우리 본사인 석가모니께서 태어나서 사방으로 각기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설법을 하였다. 그 뒤에 성을 넘어 출가하여 설산 중에서 공부를 하다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았는데 이미 깨달은 이 법은 지극한 깨달음이 못 되었다. 그래서 수십 개월 동안 다시 유행(遊行)을 하여 진귀(眞歸)조사를 심방(尋訪)하면서 현묘하고 극진하게 사무친 도를 비로소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교외별전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진귀조사설은 한국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디에도 없다고 비판들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까 비문을 든 것이 무엇인고 하면, 적어도 마조 계통의 정통으로 법을 받으시고 사굴산문의 개조가 되시는 범일대사께서, 이렇게 훌륭한 분이 과연 이런 말을 했을 것인가? 의심이 안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조사 어록에 대해서도 꼭 자성에 비추어서, 본래적인 부처님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궁극에 비추어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다 그대로 묵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일본 선종사에 가장 위대한 분이 도원 희현(道元希玄)선사라고 합니다. 중국 송나라 천동 여정(天童如淨)스님에게 사법(嗣法)하고 일본 조동종의 개조(開祖)가 된 도원선사는 이러한 여래선과 조사선의 우열론(優劣論)에 대해 "여래선이다, 조사선이다 하는 이름이 옛날에는 전하지 않았는데 오늘날 비로소 망령되게 전해져 부질없이 헛된 이름에 미혹하여 집착하기  몇 백 년이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 아닌가? 말세에 용렬한 인연 때문이니 다 이익이 없는 한갈등이다(如來禪祖師禪 往古不傳 今妄傳 迷執虛名 何百歲可怜 末世劣因緣 皆是無益之閒葛藤也)"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후학들이 참고할 만한 경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왕고(往古)에는 없던 것을, 경우에 따라 문자에 착(着)하지 말고, 경에도 착하지 말고, 오로지 마음공부에 정진하라는 의미의 방편 말씀이고 경책의 말씀인데, 그 뜻을 잘 모르고 헛된 이름에만 미혹되어 집착하니 참으로 가련하고 딱한 일이요, 말세의 용렬한 인연 때문에 쓸데없는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말에도 구속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마음 닦는 모든 법을 팔만 사천 법문으로 밝혀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부처님 경전 밖에 마음 닦는 법이 따로 있다고 하면 문제가 됩니다. 설사 어록이라 하더라도 권위를 100퍼센트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부처님 경전과 우리 자성으로 조명하여 간택(簡擇)해야 하는 것입니다.


- 마음을 열고 닦아야 참다운 공부가 된다


 ㆍ祖師禪은 如來禪의 敎禪一致說에 反對하여 如來言句에 執着함을 警策하는 意味에서, 如來禪과 簡別하여 祖師禪을 唱導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如來禪이나 祖師禪이나 對機에 다른 隨時의 所說로서 如來禪 외에 祖師禪이 없고 또한 祖師禪 외에 如來禪이 따로 있지 않으며 그 內容에 있어서는 一毫의 相違도 없고, 淺深 優劣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조사선이란 여래선의 교선일치설(敎禪一致說)에 반대하여 제언(提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래선 도리는 敎나 禪이나 원래 둘이 아니라는 도리를 역설하여 말합니다. 불법(佛法)에 있어서 무엇이 둘이 되겠습니까? 우리 중생이 공연히 갈라서 둘인 것이지, 어느 것도 불법 속에 안 드는 것이 없기 때문에 敎나 禪이 특징은 다 있으나 본래는 절대로 둘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사선은 여래의 언구(言句)에 집착함을 경책하는 의미에서 여래선과 간별(簡別)하여 창도(唱導)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밖에는 달리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래선이나 조사선이나 근기에 따른 수시(隨時)의 말로서, 여래선 외에 조사선이 없고 조사선 외에 여래선이 따로 있지 않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일호(一毫)의 상위(相違)도 없고, 천심(淺深) 우열(優劣)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가 깊고 어디가 더 얕은지, 어디가 더 수승하고 용렬한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이런 도리를 깊이 생각하셔서 앞으로는 부질없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진지한 수행자는 꼭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달마 때부터 6조까지는 이런 이름도 없이 오로지 마음공부만 했습니다. 부처님 법을 범부 소견으로 무엇이 옳네, 그르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부처님은 비록 수하성도(樹下成道) 했다 하더라도 미처 공부가 덜 되어서 또다시 숲속에 들어가 스승을 구하고서야 비로소 완전한 법을 얻었다는 말이 있다고 할 때 세존을 얼마나 비방하는 말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서는 일호의 관심도 갖지 말고 다만 근기에 따라서 공부할 길을 한번 선택했으면 생명을 걸고 최선의 정진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공부하는 데에는 장애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수행자가 부질없이 무익한 한갈등(閒葛藤)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 닦는 것에 도움 되는 말 외에는 말도 함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야말로 찰나무상 아닙니까? 숨 한 번 들이쉬지 못하면 우리 생명은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 인생에 있어서 부질없는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불(成佛)하는 직통 길만 가기에도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


또한 우리 번뇌는 얼마나 깊습니까? 닦으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렁저렁 지내는 사람들, 속물이 되어 세속에 휩싸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정작 '그런 속물이 되지 않아야겠고, 한사코 해탈의 길에 나가야겠다'라고 할 때는 가지가지의 마장(魔障)이 굉장히 많습니다. 욕계에 있는 것은 모두 다 총동원해서 우리한테 대항하는 것입니다. 좋은 맛이나, 좋은 경치, 아름다운 것이나, 이성이나 모든 것이 다 우리의 해탈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해가 많은 원수의 밀림 가운데서 이른바 번뇌조림(煩惱稠林)이라, 번뇌나 마군(魔軍)이 빽빽한 가운데서 헤쳐 나가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팔만장경을 금생에 다 볼 수가 없습니다만, 어느 경을 보아도 다 소중합니다. 논장도 다 볼 수 없습니다만, 지금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서 강원(講院)에서 배우는 것은 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교(大敎)까지 안 배운다 하더라도, 정말로 숙세(宿世)에 선근(善根)이 깊다면 초심에서도 깨닫는 것입니다. 불 보고 깨닫고, 물 보고 깨닫고, 달 보고 깨닫고, 별 보고 깨닫고, 우리가 깨닫는 인연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자성의 문제입니다. 오로지 자기 문제라는 말입니다.


돈오돈수나 돈오점수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다 옳은 말입니다. 다만 시초에 말씀한 분들은 너무나 점차를 따지고 고하, 시비, 차서를 따질 때 이른바 무염오(無染汚) 수행이라, 오염하지 말라는 뜻으로서 돈수를 말씀한 것이지, 견성 견도한 다음에 닦을 것이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화엄경》이나 어느 경이나 어록을 보아도 다 그런 뜻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처음부터 권위 있는 어록에 의거하여 말씀드린 것입니다.


여래선ㆍ조사선도 그와 똑같은 의미로서 고하가 있는 것도 아니요,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화두(話頭)는 근기가 수승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주문(呪文)이나 염불(念佛)은 근기가 하열한 사람들이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 경전에 그런 말씀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는가?' 그 자세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적인 자세만 여의지 않고 본체를 여의지 않을 때는 다 그대로 수승한 대승법이요,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묵조(默照)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묵묵하니 바보같이 앉아 있기만 할 때는 선이 못 됩니다. 분명히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도리를 관조(觀照)해야 참다운 묵조선인 것입니다.


화두를 참구한다 하더라도, '이뭐꼬'나 '간시궐(乾屎橛)'이나 또는 '판치생모(板齒生毛)' 같은 화두를 들 때는 원래는 본분사,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 본래면목 자리를 들었습니다. 어록을 보신 분은 다 아는 바와 같이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이런 데서 화두가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무슨 화두를 들든지 간에 제일의제(第一義諦) 자리를 분명히 들어야 참다운 화두가 되는 것이지, 본체 자리를 여의고 그냥 의심한다고 해서 참다운 공부가 되고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훤히 틔어버린 본래면목 자리를 안 놓치고 화두를 들어야 상기(上氣)도 안 됩니다. 그냥 애쓰고 의심만 할 때는 상기되게 마련입니다. 마땅히 마음을 열고 닦아야 참다운 공부가 됩니다. 마음을 연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일체존재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일체존재 모두가 진여불성뿐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닦아나가는 데는 꼭 철저하게 계행(戒行)을 지켜야 합니다. 철저히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이면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이라' 시라는 계율입니다. 계율이 청정하지 않으면 삼매가 못 나온다는 말입니다. 삼매에 들지 못하면 참다운 견성이 못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진리 그대로 하신 말씀인 것이고, 진실 그대로의 말씀인 것이고, 속이지 않는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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