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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9. 말씀

선과 근본선

선과 근본선



- 참선공부야말로 불도의 정문이다


우리가 가령 수영을 할 때는 물에 들어가서 실제로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 하듯이, 참선공부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닦아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실참실수(實參實修)라, 정말로 우리 몸으로 부딪쳐서 참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대강 이치로 체계가 서야 흐트러짐이 없고, 또 능률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덮어놓고 공부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부처님의 8만 4천 법문 모두가 다 어느 분야에서나 세밀하게 밝혀 놓은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들을 충분히 참고해서 우리의 부질없는 분별시비는 끊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많이 해보신 분들은 짐작을 하시겠지만, 사실 맨 처음부터 쑥쑥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선의 가장 큰 두 가지 원수가 있는데, 이를 불교 전문술어로 하면 도거(掉擧)와 혼침(昏沈)입니다.


도거란 이것저것 따지고 분별하는 것이고, 혼침이란 앉으면 꾸벅꾸벅 조는 것을 말합니다. 조는 시간은 죽은 시간과 똑같아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그야말로 참 맑고 청정해 본래면목 자리만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참선을 좀 했다 하더라도 한도 끝도 없는 분별시비가 나온단 말입니다. 평소에 그렁저렁 생활을 할 때는 안 나오다가도 정작 참선이라 해서 들어앉으면 과거에 섭섭했던 일, 미워했던 일, 좋은 일들이 자꾸만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면 머리나 몸이 가볍지가 않습니다.


익힐 습(習)자 참을 인(忍)자 '습인(習忍)'이라, 오랫동안 공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몸에 배어 습관이 됩니다. 처음에 참선공부 할 때 좀 안 된다 해서 그냥 놓지 마십시오. 우리가 본래시불(本來是佛), 즉 본래 부처이고, 부처란 것은 무한공덕이라, 무한공덕이 들어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향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차근차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거기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근기나 선근에 따라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습니다마는 보통 차원에서는 이른바 '경안심(輕安心)'이라, 경안이라는 것은 불교 전문술어인데 여러분들께서는 외워 두십시오. 가벼울 경(輕)자 편안할 안(安)자, 경안이라는 것은 몸도 마음도 가뿐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가뿐할 때는 다른 헛된 생각이 안 일어납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해지는 경안이 서야 피로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른바 내 몸을 어느 정도 조복(調伏) 받는 것입니다. 보통 참선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겠습니다마는 한 10년쯤 선방에서 고생고생 해야 경안이 좀 나오는 것 같아요. 빠르고 느린 차이는 물론 있습니다. 몇 십 년 된 사람도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역시 참선에 들어가면 몇 십 분도 못 되어 끄덕끄덕 좁니다. 그런 분들은 아직 경안이 못 나온 것이지요.


우리 스님네들은 경험도 많고 해서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만, 처음 참선을 배우는 재가불자님들은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참선공부, 이것은 불도의 정문(頂門)이라, 부처님 가르침이 정문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다른 가르침은 방편설도 많이 있고 여러 가지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하는 법문도 많지마는 참선법문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바로 내 마음이 부처요, 마음 떠나서 부처를 구하면 이것은 사도(邪道)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직통으로 들어가는 직설법문이기 때문에 참선이야말로 불도의 정문인 것입니다. 어떻게 공부하든지 간에 종당에는 우리가 참선을 해서 깨달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자라면 다 해야 되는 것이고,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참선을 해야 됩니다.


- 참선은 불교인만 닦는 정문이 아니다


가령 기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바깥에다 설정하지 않고 하느님이 바로 내 마음의 본체이고, 우주의 본체다, 하느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안 계시는 데가 없다, 이렇게 법신불(法身佛) 차원에서 하느님을 보면서 참선을 해야 되겠지요. '불교인만 닦는 정문이다'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어서 다른 종교의 우수한 점이라든가 발전적인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또 수용해야 합니다. 저쪽 기독교 인구도 지금 17~18억인데, 그 많은 사람들을 대립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좀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부처님의 일통법문으로 인도해 가면서 같이 공부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고, 또 그네들이 나가는 공부도 역시 참선공부로 유도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하느님을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의 본뜻도 하느님이 밖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맑은 자는 행복 할지어다. 그들은 하느님을 볼 수 있을 것이요"라고 한 대목을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본다면, 부처님 경전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고 특히《법화경》과 유사한 대목이 아주 많습니다. 어느 분야이든 다른 공부도 그렇겠지만 특히 참선공부는 마음을 활짝 열어야 됩니다.


법계연기 또는 진여연기라, 모든 존재는 진여불성으로부터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양을 달리했단 말입니다. 근본적으로는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항상 의심을 떨치지 못합니다. 진여불성 자리에서는 하나일망정 현상만 볼 때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고 나와 네가 분명 다르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이 현상만 보니까 다르다고 보는 것이지 본 성품자리, 본질을 본다면 혼연일체란 말입니다.

부처님 사상에서 본다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다 마음의 현상이요, 마음은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으므로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현상적으로 인연 따라 잠시간 모양을 달리했을 뿐, 진여불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상(像)만 보고 물질만 보니까 다르다고 하지만 본 성품을 본다면, 바닷물이 바람 따라서 파도가 크고 작더라도 큰 파도나 작은 파도나 똑같은 물 아닙니까. 그와 같이 우리가 인연 따라서 상황이 어떻게 바뀌든 간에 진여불성이라는 그 자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너나 나나 모두가 같은 몸이요, 동체대비(同體大悲)라, 거기에서 참다운 자비가 나오고 참다운 도덕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 선이란 무엇인가


선(禪), 이것은 이른바 제나(Zena)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 禪은 세계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禪은 많이 알려져서 그 사람들이 젠(Zen)이라고 하니까 일반적으로 禪을 '제나'라고들 발음합니다. 그리고 禪과 정(定)을 구분하는 분도 있고 구분하지 않고 합해서 선정(禪定)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禪은 관(觀)을 위주로 합니다. 觀은 관찰을 뜻하는 것입니다. 정(定, Samadhi)은 이른바 삼매에 든다고 하지요. 삼매란, 마음에 다른 생각 없이 오로지 한 생각에 머무르는 것을 뜻합니다. 독서도 역시 독서만 열심히 하면 독서삼매라 합니다.


그냥 나쁜 생각으로도 한곳에 머물 수가 있는 것인데, 여기서의 定은 나쁜 생각이 아니라 정념(正念)으로 한 생각에 머무르는 것을 뜻합니다. 정념이란 것은 오로지 우리 마음의 본래성품 자리, 즉 진여불성 자리에 우리 마음을 머물게 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뜻하고, 이를 일러 사마디라고 합니다.

禪은 그 자리를 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관조를 한다는 말입니다. 가령 실상관(實相觀)이라, 실상관은 우주법신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래서 禪은 관찰을 위주로 하고 定은 지(止)를 위주로 하니, 합하여 정혜균등(定慧均等)의 묘체를 선정이라고 합니다.


- 선정은 정혜균등의 묘체


정혜균등이란 말을 참선 배우는 사람들은 꼭 외워 두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오로지 한곳에 머무는 것, 또는 그 고요함을 定이라고 합니다. 혜(慧)는 참다운 지혜(智慧), 즉 우주의 실상을 비춰보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보통 지식적으로 아는 지혜가 아니라 참다운 반야(般若)의 지혜, 우주의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가 정혜의 慧에 해당합니다. 또 정념(正念)이라, 올바른 생각이 한 군데 모이는 것이 定입니다. 정혜균등이란 定과 慧가 평등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고요한 것은 定이고 慧는 비춰보는 것인데 실상(實相), 즉 우리 불성을 비춰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가지런히 되어야 참선 진도가 빨라집니다.


우리 본래면목은, 우리 불성 자체는 원래 定과 慧가 같이 구족(具足)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성이나 우주의 본성인 진여불성 자리는 定과 慧가 본래적으로 원만구족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 공부도 거기에 걸맞게끔 定과 慧가 가지런히 균등하게 나가야 이른바 개안(開眼)이 빠르단 말입니다. 定에만 치우치거나 慧에만 치우치더라도 공부가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진도가 더딘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중도(中道)를 추앙합니다. 중도란 것은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 아니라, 다 갖추고 있는 온전한 자리를 제대로 참구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진여불성이 바로 중도이고, 우리 본성이 바로 중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참선할 때는 꼭 고요하니 우리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定과, 우리 불성자리를 비추어 보는 慧와 같이 아울러 나가야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관찰만 많이 하고 慧 쪽으로만 치우쳐서 고요히 머무르지 않는다면 공부가 더디단 말입니다.



《육조단경》의 <부촉품>에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가 나오지요. 여기서 일상삼매가 바로 이 慧에 해당합니다. 일상삼매는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인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이라고 관찰하는 것이고, 일행삼매는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행삼매는 定에 해당합니다. 일행삼매ㆍ일상삼매, 定ㆍ慧, 또는 천태식으로 말하면 지(止)ㆍ관(觀)이라, 그칠 지(止)는 定에 해당하고 볼 관(觀)은 慧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 불심에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참다운 지혜, 조금도 번뇌가 없는 고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공부도 거기에 맞게 해야 우리 번뇌의 습관성을 빨리 녹이고 참다운 진여불성을 견성(見性)하게 됩니다.


- 선정은 악을 버리고 바르고 고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선정은 '사유수(思惟修)'라고도 합니다. 사유수란 바르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바르게 생각을 해야지 그냥 덮어놓고 생각한다고 그것이 禪이 되는 건 아닙니다. 우주만유란 것은 오직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뚜렷이 생각해야 그것이 정사유(正思惟)가 됩니다. 다음은 '기악(棄惡)'이라, 버릴 기(棄) 모질 악(惡), 악을 버린단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선공덕(禪功德)입니다. 사유수란 바른 생각을 관조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악심이나 나쁜 생각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은 '정려(靜慮)'라, 고요할 정(靜) 생각할 려(慮), 고요히 조금도 삿된 생각 없이 바르게 참다운 진리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이 또한 선정의 뜻풀이입니다. 공덕이 무엇입니까? 자기건 남이건 누구나 유익하게 하는 것이 공덕입니다. 총림은 그야말로 수풀 모양으로 하나 둘 있는 것이 아니라 숲처럼 무한공덕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할 때는 무한공덕이 거기에서 우러나옵니다.

참선을 하면 사람이 기악(棄惡), 즉 악이 없어지고 차근차근 선량해집니다. 부처님의 진여불성하고 가까워지니까, 나쁜 마음이 생길 수가 없겠지요. 진여불성 자리는 만능의 자리인 동시에 오직 하나의 생명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참선을 해나가면 자(自)ㆍ타(他)라는 구분 역시 사라집니다.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자기 모서리가 끊어져서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는 생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래가 무아이기 때문에 공덕총림 또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오직 마음이 하나로 묶인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나지만 마음이 정화되면 오직 하나의 생각, 영원한 그 맑은 생각, 부처님 마음 같은 그런 생각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심일경성이라, 오직 부처님 경지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현법락주(現法樂住)'라, 이 역시 참선공덕입니다. 우리가 지금 재미있는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에게 재미있는 것은 속락(俗樂)이라, 세속적인 오욕 같은 것은 재미는 좀 있다 하더라도 모두 허망 무상한 안락일 뿐입니다. 그러나 법락(法樂)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안락이 아닙니다. 법락은 공부를 해서 원래 우리 불성에 갖춰져 있는 공덕을 얻으므로 참다운 안락이 온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신통자재(神通自在) 같은 것도 모두 다 법락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겠지요.


현법락주라, 법락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환희심에 차서 닦아나가는 경안 또한 역시 법락입니다. 아직 견성오도(見性悟道)한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법락이 나타나는 것이 현법락주인데, 이 또한 참선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 우리가 여러 가지 다른 선을 알아야 하는 이유


선종(禪宗)의 禪은, 명(名)은 고요히 생각도 하고 사유정려(思惟靜慮) 하는 뜻을 취하고 있으나, 그 체(體)는 열반묘심(涅槃妙心)이라, 바로 불심입니다. 일체종지의 근본자리, 본래면목 자리인 불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선정이라고 할 때는 관찰도 하겠지만 선종에서 禪이라 할 때는 훌쩍 뛰어넘어 이것저것을 다 초월한 하나의 불심을 바로 禪이라고 합니다. 불심만을 문제시하고 견성만을 문제시하는 것이 선종의 禪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의 교리 내에서 보통 선정이라고 할 때와 선종에서 '禪'이라 할 때는 차원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가 상충하지 않고 같이 화해하여 더불어 발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불교 내에서 부질없는 소모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무슨무슨 종파가 50종파요, 일본도 지금 80종파라고 합니다. 더구나 미국은 종교박람회장 같아서 불교도 지금 별의별 파가 다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각축하고 다투는 마당에서 우리가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쪽을 이해도하고 살피기도 해야겠지요. 근본선도 알아야 하고, 스리랑카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도 참고해야 하고, 일본의 임제종(臨濟宗)이나 화두를 참구하는 의미도 알아야 하며, 화두 없이 잠자코 비춰보는 묵조선(默照禪)도 알아야 합니다.


- 근본선이란 무엇인가


근본선(根本禪)은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사선정(四禪定)과 사공정(四空定), 여기에 멸진정(滅盡定)을 합하면 아홉이 되기 때문입니다.


  근본선(根本禪):구차제정(九次第定-사선정ㆍ사공정ㆍ멸진정)

  ①사선정(四禪定):초선(初禪)ㆍ이선(二禪)ㆍ삼선(三禪)ㆍ사선(四禪)

  ②사공정(四空定):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ㆍ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ㆍ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ㆍ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③멸진정(滅盡定):성자(聖者)가 모든 심상(心想)을 다 없애고

                  적정(寂靜)하기를 바라고 닦는 선정


근본선은《아함경》을 근간으로 합니다.《아함경》은 부처님 육성 같은 경입니다. 부처님께서 초기에 참선하신 법은 모두가 다 근본선에 입각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직접 근본선으로 성도(成道)하셨고,《열반경(涅槃經)》을 보면 열반에 드실 때도 근본선으로 해서 사선정과 사공정에 드셨으며, 멸진정에 들어가셨다가 다시 또 내려오셔서 사선정에 들어가 열반에 드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근본선으로 공부를 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아함경》에 보면 "그대들이 철저한 계행을 지키고 그래서 초선에 들고 이선에 들고 삼선, 사선에 들어서 멸진정을 성취하여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한다"는 말씀이 수십 군데 있습니다. 따라서 근본선에 대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 산란한 생각이 들지 않고 삼매에 들어가는 초선의 경지


사선(四禪)은 초선, 이선, 삼선, 사선 등 차원의 차이에 따라 나뉩니다. 그러면 초선(初禪)은 어떤 것인가? 초선은 참선을 오래 해서 안정이 되어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우리 마음에 산란한 생각이 들어가지 않고 이른바 삼매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삼매에 들어가면 산란한 마음이 없어집니다. 이른바 무간정(無間定)이라, 다른 망상이 사이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처음 앉으시면 다른 망상이 많이 나지만 그것은 초기에만 그럴 뿐입니다. 재가불자님들은 주로 조석으로 오랫동안 앉으셔야 되겠지요. 그리고 평소에 장사를 하시든지 어디를 가시든지 간에, 미운 사람을 보더라도 '우리가 연기법으로 보면 본래성품은 다 부처인데 현상적으로 보기 때문에 남자이고 여자가 아닌가' 생각하여, 누구를 만나도 부처같이 생각하고 부처같이 대접하다 보면 참선공부도 손해를 안 봅니다. 우리 마음을 항시 하나로 추스르고 다스려야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꼭 집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 참선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도 이것저것 생각을 하면 참선이 아닙니다. 마음이 내는 것이지 모양이 내는 것이 아니니까요. 따라서 우리 생활에서 무엇을 하든지, 부엌에서 공양을 짓든지, 누구랑 얘기를 하든지 간에 모두를 다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항시 생각을 하나로, 근본적인 자리로 돌리면 공부에 손해 없이 참선이 진전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딴 생각이 안 나온단 말입니다. 참다운 진리만 생각하고, 참다운 진리만이 옳은 것이라는 확신이 섰는데, 다른 생각이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이른바 삼매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초선에 들어갑니다.


경에 보면, 초선에 들어갈 때 우리 생리가 바뀐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바뀜에 따라 우리 몸도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촉(八觸)'이 발생하게 됩니다. 팔촉이란 몸이 어떤 때는 뜨겁고 어떤 때는 춥고, 공중에 뜨기도 하는 등 이런저런 경험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 생리가 바뀐다는 증거입니다.


이른바 요즘 도가(道家)식으로 말하면 환골탈태(換骨奪胎)란 말입니다. 우리가 그냥 생각할 때는 '참선을 많이 하나 적게 하나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게 아닌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지 몸이야 그대로 가만히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몸과 생리가 바뀌기도 합니다.  좀 더 전문적인 불교용어로 하면 소조사대(所造四大)라, 오염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사대가 청정한 명정사대(明靜四大)로 바뀐단 말입니다. 바뀌는 과정에서 나오는 공덕이 소조사대입니다. 그것은 불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바뀌어서 육근청정(六根淸淨)이 되는 것입니다.


생리가 청정하게 되어야 초선에 들어갑니다. 초선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재가불자님들이 참선을 좀 했다고 해서 '나는 지금 초선인가, 이선인가?'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누구나 그냥 쉽게 초선에 쑥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설령 공부가 좀 되어 초선에 들어갔다고 해도 그렁저렁 해버리면 또 후퇴가 되겠지요. 공부라는 것은 끊임없이 지속해야 됩니다. 그렇게 지속해서 초선에 들어가면 그 삼매의 기운을 아주 소중하게 아껴서 보임(保任)을 해야 합니다.


보임이라는 것은 공부하는 참선기운이 흩어질세라 말도 가만가만히 하고, 행동도 조심하고, 서두르지 말고, 함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함부로 행동하면 선정기운이 흩어져 버립니다. 따라서 음식도 조금씩 먹고, 될 수 있으면 말도 적게 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선정기운이 그만큼 흩어지는 것입니다. 선정에 들어가려면 가급적 말도 하지 말고 혼자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마는 사회생활을 하려면 그렇게 하기가 무척 어렵겠지요. 그래서 재가불자님들도 평소에 세속에서 그렇게 공부하다가, 일 년에 한두 번쯤은 내외간에 함께 절에 오셔서 일주일이나 며칠씩 오로지 공부만 하는 용맹정진의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본래대로 한 차원씩 올라갑니다.


참선공부는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든 본래의 참 자기, 영생해탈의 열반경계, 참다운 행복을 바란다면 꼭 가야 할 길입니다. 게으름 부리면 못 가겠지요. 가고 안 가고는 본인한테 달렸겠지만 우리가 인간인 한에는 꼭 가야 됩니다. 못 간다고 할 때는 끝없이 윤회할 수밖에 없겠지요.


- 구족지의 이선, 삼선락의 삼선, 부동지의 사선을 거쳐


이선(二禪)에 올라가면 정심(淨心)이라, 마음이 청정해서 욕계 번뇌를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초선까지는 아직 욕계 번뇌의 종자가 좀 남아 있습니다. 평소에는 생각이 별로 안 나오다가도 경계에 부딪치면 욕심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선에 들어가면 남녀의 음부도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선을 가리켜 불교 전문술어로 '구족지(具足地)'라고 합니다. 구족지는 계행을 참답게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선까지 못 들어가면 억지로 계행을 지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니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선에 들어가면 음욕이 떨어져 버리니 그때는 다른 생각이 나올 수 없습니다. 계행이 원만히 갖춰지는 것입니다.


재미있기는 삼선(三禪)이 제일 재미있다 그럽니다. 이 세상에서 삼선 들어간 재미만큼 큰 재미는 없다고 합니다. 삼선락이라, 아주 재미있고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광명이 훤히 비춰서 이것저것 다 알게 됩니다. 다음으로 사선(四禪)은 부동지(不動地)라, 사선에서는 호흡이 끊어집니다. 그때는 산란스런 마음이 조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선에 들어가도 아직 견성은 못 됩니다. 말로는 쉬울 것 같지만 견성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저도 여러 선방에서 공부하면서 보았지만, 가벼운 사람들은 이런 근본선을 모르고 좀 재미있으면 공부 다 배웠다고 하면서 말려도 튀어나갑니다. 더 공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근본선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선정을 증명해 나가는 한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환희심만 나면 그만 다 된 줄 압니다.


참선을 하고 있으면 기분 좋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그것을 무슨 대단한 경지인 줄 알고 공부 다 되었다며 뛰쳐나간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아무렇게나 먹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면서 '견성했으니 무애행(無碍行)이라,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본래 청정이다' 이런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선만 올라가도 음욕이 끊어져서 음탕한 생각도 안 나고 음탕한 짓도 못합니다. 더구나 삼선에 들어가면 그 정도가 더욱더 증장되고, 사선에서는 호흡도 끊어져 참다운 삼매에 들지요. 그것을 부동정(不動定)이라 합니다. 선정 중에서는 가장 고요한 것이지요.


그렇게 되어도 아직은 성자가 못 됩니다. 그러다가 멸진정(滅盡定)이라, 멸진정에 들어가면 그때는 모든 번뇌를 모조리 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我)의 뿌리를, 자기라는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멸진정을 성취해야 비로소 성자요, 도인이 됩니다.


- 부처님이 밟으신 사공정의 단계를 좇아 멸진정의 경지로


사공정(四空定)은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이라, 모두가 다 텅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광대무변한 세계를 관찰하는 선정(禪定)입니다. 다음의 식무변처(識無邊處)는 모두가 다 그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라는 하나의 마음 그림자가 우주에 충만한 때이고, 그 다음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공(空)도 아니요 식(識)도 아닌, 알 수 없는 그러한 청정무비(淸淨無比)한 것이 충만해 있는 때입니다. 그 다음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생각이 전혀 없지도 않고 아주 미세한 생각, 극미(極微)한 생각만 남아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이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가도 아직은 성자가 못 됩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셔서 스승을 찾아 공부하실 때의 일대기는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부처님께서 거쳐 가신 하나의 행로를 우리도 따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맨 처음에 발가바선인, 즉 고행을 위주로 하는 선인에게서 고행을 배웠습니다. 하루에 씨앗 한 톨이나 보리 한 알을 드시면서,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온갖 지독한 고행을 다 하셨습니다. 그렇게 고행을 통해서 발가바선인이 올라간 선정에 들어갔습니다.


발가바선인은 고행을 통해 범천(梵天)에 올라가는 공부를 했던 분입니다. 범천도 욕계가 아니라 색계입니다. 따라서 굉장히 청정한 곳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이 선인 밑에서 공부를 해 범천에 올라가는 선정에 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범천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범천 역시 영생의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의 천상이라는 제한된 곳에 올라간 것이지, 그것이 해탈은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은 '결국 내가 구하는 것은 생사해탈'이라는 생각으로, 천상에만 올라가면 된다는 스승을 뿌리치고 그 당시 제일 훌륭하다는, 알라라칼라마에게 갔습니다.


알라라칼라마는 이른바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는 선정을 닦은 분이었습니다. 원래 천재적인 분인 석가모니께서는 이미 발가바선인에게 범천까지 올라가는 선정을 배웠고, 또 쉽게 무소유처까지 올라갔어도, 결국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지 이 또한 해탈의 법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알라라칼라마를 떠나면서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이시여, 어디로 가면 더 높은 공부를 배우겠습니까? 당신보다 더 나은 분이 있으면 알려주소서." 알라라칼라마가 답해 주었습니다. "내 아들이 우다카인데, 나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해서 삼계에서는 제일 꼭대기 하늘인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가는 선정을 닦았으니 거기 가서 공부하라." 그래서 무소유처까지 올라간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삼계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선정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생사해탈, 즉 영생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복이 다하면 다시 떨어지게 되는 곳이었습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생사해탈인데 천상에 올라 천상 복만 받고 말 것인가?' 그래서 다시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이시여, 다른 데 가서 해탈의 법을 구할 수 없겠나이까?" 그러자 스승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 더 큰 스승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보리수 아래로 가셔서 자기 스스로 무사도(無師道)라, 스승 없이 닦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밀교(密敎)에서 보면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다 경각하고 지켰다고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곳에서는 사람만 스승이겠지만 밀교보다 더 심오한 형이상학 쪽에서 본다면 우주에는 무량의 법신불이 있단 말입니다. 법신불의 경각(驚覺)을 받고서 무상대각을 성취했다고 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근본선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알아야


지금 우리가 계발하는 것은 부처가 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처가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할 이러한 과정을 전적으로 무시한다면 미처 가지도 못하고 갔다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증상만(增上慢)이라는 허물을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은 내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또는 내 마음이 바로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마음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입니다. 허나 부처라고 하더라도 금생에 나와서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느끼고 한 것이 우리에게 나쁜 습관과 습기로 남아 있습니다. 바로 전생에도 무수한 생을 살아오는 동안 중생으로 윤회하는 과정에서의 습기가 남아 있습니다.



불교말로 하면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라, 여러 생과 더불어 묻어나온 번뇌와, 금생에서 온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라, 금생에 나와서 다시 잘못 배우고 듣고 느낀 번뇌들 때문에 우리는 번뇌의 습관성을 깨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본래 조금도 오염이 안 된 불성이라 하더라도 나쁜 습관이 배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시일이 걸려야 차근차근 정화됩니다. 근기가 수승한 분은 빨리 정화가 되고 근기가 더딘 분은 좀 더디게 된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지,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급한 사람들은 단박에 된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이야 빨리 되면 될수록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빨리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공부를 하다 보면, 갖가지 경계가 많이 나옵니다. 부처 같은 사람도 나오고, 평소에 모르던 것도 척척 알아지고 광명도 비추면 한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공부가 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인 행세하는 사람을 굉장히 많이 보았습니다. 참 딱합니다. 자기도 죄를 범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결국은 죄를 범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맹인중맹(一盲引衆盲)이라, 한 소경이 뭇 소경을 데려다가 함정에 빠뜨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선,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육성으로 설하신 근본 직설을 참고로 해서 우리 공부가 얼마만큼 되어 있는지 그 위차(位次)를《화엄경(華嚴經)》의 십지보살이나《능엄경(楞嚴經)》의 사십육지 등에 비추어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부를 한 만큼 그 위치를 알아야 자기 경계를 정확히 점검할 수 있습니다. 모르면 증상만이라, 미처 증(證)하지 못하고도 증했다고 하게 됩니다. 증상만이 되면 못 통하고도 통했다 하면서 성자를 기만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 사선, 사공정, 멸진정의 단계를 밝힌 근본선


근본선은 바로 구차제정(九次第定)입니다. 사선, 사공정, 멸진정. 이 근본선을 생각해 두셨다가 나중에《아함경》을 꼭 보십시오.《아함경》풀이가 꽤 많이 나와 있지만 풀이를 하신 분들이 근본선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안 두고 했기 때문에 근본선을 별로 옮겨 놓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중요한 점을 모두 놓쳐 버리게 되지요. 일본 사람들이 해놓은 풀이도 봤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을 참고로《아함경》을 보시면 '근본선은 사선, 사공정, 멸진정'이라는 말씀을 거듭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출가한 뜻은 윤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고, 또 계율이 청정해야 삼매에 빨리 들어갑니다. 계율이 부실하면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시라청정(尸羅淸淨)은 삼매현전(三昧現前)이라, 시라는 계율을 말하는 것인데 계율이 청정해야 삼매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악행한 사람이 삼매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아함경》을 보면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고 조그마한 나쁜 행동에도 마음에 두려움을 품고 마음을 추슬러서 초선에 들어가고, 이선ㆍ삼선ㆍ사선에 들어가서 결국 멸진정에서 자기라는 '我'를 몽땅 소멸하고 이른바 견도(見道), 즉 아라한(阿羅漢)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 정혜쌍수라, 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 마음을 지켜야


선(禪)은 진리를 바로 비춰 보는 공부입니다. 정(定)은 주로 고요한 쪽으로 바른 마음을 분별없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둘을 합한 것이 바로 선정(禪定)인데 보통 합해서 많이 씁니다. 참선할 때 가장 큰 원수는 분별 시비하는 도거(掉擧)와 꾸벅꾸벅 조는 혼침(昏沈)입니다.


선방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참선을 아무리 오래 했다 하더라도 꾸벅꾸벅 졸아버리면 그 사람은 참선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기의 신심과 원력을 다 발휘해서 꾸벅꾸벅 조는 이 혼침과 분별 시비하는 도거를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항시 흔들립니다. 모두중생(毛頭衆生)이라, 바람이 안 불어도 터럭 끝이 움직이듯이 우리 범부 마음은 다 그렇습니다. 항시 동요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혼침 없이 단정하게 앉아 제법 잘하는 것 같아도 마음으로부터 분별시비하면 참선은 되지 않고 명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꼭 이겨내야 합니다. 꾸벅꾸벅 조는 것과 분별 시비하는 것,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지켜야 합니다. 《보조어록》을 보더라도 정혜쌍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육조단경》에도 나오고 어느 성전에나 다 들어 있습니다. 정(定)은 마음을 고요하게 한곳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혜(慧)는 바로 진여불성 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훤히 비춰 본다는 말입니다.


'이뭐꼬' '시심마(是甚麽)'도 그냥 단순히 '이뭐꼬'가 아니라,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漆)보다 검고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고, 그런 것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그 자리를 들어야지 덮어놓고 '이뭐꼬'만 한다고 선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화두가 나올 때 그 뜻을 알아야 됩니다.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도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또는 '부처가 무엇인가?' 이런 데 따라서 화두가 나왔단 말입니다.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분명히 들어야 화두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상대적으로 의심만 한다고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면목 자리가 진여불성이고, 그 자리는 끝도 없는 광대무변한 생명의 실체이고 실상입니다. 따라서 이런 실상자리를 비추어 봐야 합니다. 우리 참선하는 사람들은 꼭 주의해야 합니다. 참선은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비춰 보는 지혜'란 말입니다. 단경에 보면 '반야관조(般若觀照)'라, 반야의 지혜로 역시 우리 마음을 관조한다는 말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상(假相)과 가명(假名)을 떠나서 참다운 지혜로 우리의 본래자리를 비춰 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야 혼침과 도거가 줄어듭니다. 그냥 덮어놓고 아무것도 없이 묵묵부답으로 앉아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부처님 명호도 모두가 다 그런 진여불성의 대명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 참선의 공덕은 끝도 가도 없이 무한하다


참선을 하면 저절로 선량한 사람이 됩니다.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마음이 거친 사람도 부드러워집니다. 정려(靜慮)라, 항시 자세가 고요하다는 말입니다. 가령 고요하지 못하고 서두르는 사람들은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서두르는 것은 마음이 항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거일동이 사급취완(捨急取緩)이라, 버릴 사(捨)자 급할 급(急)자 취할 취(取)자 늘어질 완(緩)자, 즉 급한 마음 버리고 느긋하게 해야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급하게 서두르는 사람들은 결국 마음이 고요하지 못합니다.


참선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또 그 공덕은 총림(叢林)이라, 거기에 따르는 공덕이 끝도 가도 없이 많단 말입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도 그 공덕의 한 예지요.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삼명육통이라고 하면 하나의 신화가 아닌가? 신통은 외도(外道)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부처님 경전에 삼명육통이란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와 있습니까? 만약 그것이 외도의 말이라면 부처님께서 거짓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삼명육통이란 말은 다른 경전에도 수백 군데나 나옵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 본래 불심은 그와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과거를 훤히 알고 미래도 다 알고 우주만물을 다 무불통지(無不通智)하고 말입니다. 누진통(漏盡通)이라 일체 번뇌를 다 깨버리고, 타심통(他心通)이라 다른 사람 마음을 알 수 있으며, 천이통(天耳通)이라 우주에 있는 모든 음성을 헤아려서 들으며, 신여의통(身如意通)이라 우리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을 신화나 기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위대한 힘을 갖추고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 등은봉스님은 마조스님의 제자입니다. 등은봉스님이 공부를 많이 하신 후 오대산에서 '내가 이제 나이도 많이 먹었으니 열반에 들어야겠구나' 하고 암자를 나섰습니다. 그런데 오대산 위에서 정부군과 반란군이 싸운단 말입니다. 그 싸우는 꼴이 아주 피비린내 나는 참극이었어요. 스님이 보기에 안타깝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겠죠.


'저들이 무지해서 저와 같이 업을 짓고 싸우다가 죽으면 다시 윤회하고 지옥도 갈 수 있으니, 어떻게든지 제도를 해야겠다' 하고 생각하셨지만, 그렇게 싸우는 사람들이 누구 말을 듣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면 중놈이 허튼소리 한다고 하겠지요. 그래서 주장자(拄杖子)를 하늘로 휙 던졌단 말입니다. 그리고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서 그 주장자를 타고 싸우는 전장을 빙빙 돌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때는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광명도 비추었겠지요. 그러니까 싸우던 사람들이 그걸 보느라고 넋을 잃어 버렸다고 합니다.


"사람이 수양을 하면 저렇게 위대한 힘이 나오는 것인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싸우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해서 전쟁이 끝났단 말입니다. 그 등은봉스님은 실존인물입니다. 당나라 때니까 그렇게 먼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의 자성, 불성은 다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명히 삼명육통을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의 습관을 온전히 떼어 버리지 못하니까 미처 못 한단 말입니다. 물론 견성오도했다고 해서 신통이 다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견성오도한 분들은 앉아서 가만히 잠기면 신통은 저절로 다 나온다고 합니다. 삼매에 들면 말입니다.


다만 중생들이 불쌍하니까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삼매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중생들에게 훌륭한 법문을 들려주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성자도 비증보살(悲增菩薩)이라, 자기가 수승하지 못하면 공부를 할 수가 없고 지혜가 수승한 분들만이 삼매를 초월해서 그와 같이 신통도 발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대에는 빈두로존자도 신통을 행하다가 부처님께 견책을 맞고 서구야니로 가 계셨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하도 빈두로존자를 보고 싶다고들 하니까 부처님이 허락하셔서 천상에 있다가 비로소 다시 내려왔습니다.


부처님께서 빈두로존자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신통을 함부로 한 죄로 열반에 들지 말고 영원히 사바세계에 남아서 중생들을 지켜라." 우리가 절집에서 항시 모시고 있는 이른바 나반존자 독성(獨聖)이 바로 그분 빈두로존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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